농장과 UZI

노래마인 관리자는 고개를 숙이고 보트에 앉아 있었다. 옆에서는 풀그림과 고디스 연구원이 분주하게 짐을 옮기고 있었다. 관리자는 이마를 손으로 짚고 몸을 수그렸다. 풀그림 연구원이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아니, 그냥…” 관리자가 망설였다. “이렇게 도망치는 게 너무 무책임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런 생각 가지시면 안 됩니다.” 풀그림 연구원이 위로했다. “어차피 재단의 목표는 주요 인원, 그 중에서도 특히 관리자님입니다. 관리자님이 여기 남아있으면 지역사령부 전체가 타겟이 될 것이고, 피해가 훨씬 더 클 겁니다. 지역사령부와의 통신은 그곳으로 이동해서도 가능합니다. 일단 특수 작물 농장으로 이동해서 우리와 생각이 맞는 이들을 모으고, 그 다음에 가능한 방법을 논의해도 늦지 않을 겁니다.”

“그렇길… 바래야겠죠.” 셋은 보트에 올라탔다. 보트는 조용히 물살을 가르며 나아갔다.

보트는 계속해서 바다를 가르고 나아갔다. 시간이 노래마인은 보트 너머의 바다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달이 구름에 가려진 탓에 바다는 새까맣기 그지없었다. 관리자가 두서없이 중얼거렸다. “나한테 연락을 한 건 쯔산이었어요. 외무부에 있는 직원에게 들었다고 했고. 그 회의에서는 우리가 GOC와 UN에 정보를 넘겼다고 했어요. 우리가 아니라면 누군가가 정보를 넘기기는 했을 텐데… 그게 누구일지는 모르겠군요. 지역사령부도 분열되었으니. 제5기지도 제27기지도 연락이 완전히 두절되었고, 샐리도 사라졌고.”

풀그림 연구원이 등을 돌린 채로 말했다. “정세를 읽어내야겠죠. 그 피바다 사건 이후로는 GOC는 확실하게 이길 수 있다는 승산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재단은 기세등등하기는 합니다만, 아직 뚜렷한 세력권이나 지지자가 없죠. 지금 저지하지 못하면 더는 막을 수 없는 수준까지 갈 게 뻔해요.”

“그리고… 우리가 있죠. 정보나 쓸 만한 인물들은 있다만, 너무 분산되어 있고 장비나 수에서 너무 밀려요.” 노래마인이 중얼거렸다. “내 생각에 이제 우리도 편을 정해야 할 때가 온 것 같군요. 재단 편은 아니죠. 그쪽에서 우릴 공격하겠다고 나왔으니. 그럼 택할 편은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고.”

“아주 당연한 거 아닙니까.” 고디스가 보트의 모터를 분주히 살피며 말했다. “진작에 GOC 쪽으로 붙었어야 하는 건데.” 그가 투덜거렸다. “재단이 미친 거죠. 재단이 기동특무부대니 온갖 삐까뻔쩍한 무기를 가지고 있는 건 SCP를 격리하고 요주의 단체가 공격해 오면 막아내기 위해서지 그 무슨 침략을 하려고 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 경계가 애매하기도 하죠.” 노래마인이 맥없이 중얼거렸다. “어디까지가 공격에 대한 방어이고, 어디까지가 침략일지… Odd in Almighty 시나리오에서도 알 수 있죠, 여러분이야 열람해보지는 않았겠지만. 세상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걸 알면, 모든 것이 허용되는 거니까. 설령 그것이 침략처럼 보일지라도. 지금 이 상황도… 시나리오, 시나리오에 해당한다면… 그렇다면 오히려 재단이 옳은 게 아닌지…”

“말도 안 됩니다.” 풀그림이 딱 잘라 말했다. “완전히 터무니없는 소립니다. 모든 예지는 결국 자기충족적이거나 자살적인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재단의 시나리오들도 예외는 아니고. 그건 다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글쎄요, 하지만-” 노래마인이 망설이며 말을 이었다. 풀그림이 말을 딱 끊었다. “그만 하죠. 족히 여덟 시간은 더 가야 합니다. 특수 작물 농장에 가서 해야 할 얘기는 남겨 둬야죠. 좀 잠 좀 자두세요.” 관리자는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그들끼리 얘기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그녀는 다시 바다를 쳐다보았다. 바다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채 새까맸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노래마인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새벽 해가 조금씩 뜨고 있었다. 비좁은 보트에서 불편한 자세로 잔 탓에 온 몸이 저리고 쑤셔왔다. 눈을 가늘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자, 조금씩 언덕 위에 있는 거대한 기지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103-Γ01기지에 도착한 것이다.

셋은 보트를 해안가로 가져다댔다. 재단 기지 주변이 다 그렇듯, 나무를 싹 밀어내어 시계를 확보한 부지는 황량하고 싸늘했다. 바다에서 본 것과는 달리 한참을 걸어가야 할 거리였다. 숨을 한참 헐떡거린 끝에, 그들은 기지의 정문 앞에 도착했다. 정문 초소는 비어 있었고, 돌아다니는 인원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풀그림이 잠시 주변을 돌아보았다. “초소가 비어 있군요. 원래 비어 있으면 안 되는 곳인데. 뭔가 좀 이상하군요.”

“그렇긴 하네요.” 노래마인이 답했다. “아무래도 이 대화가 좋게 끝나지 않을 때를 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풀그림, 고디스 당신 둘은 먼저 통신 시설로 가서 GOC와의 연락을 시도해 보세요. 통신 시설은 왼쪽으로 쭉 들어가면 나와요. 나는 A동으로 일단 가보죠. 이 기지야 한 번 와봤으니 대충 길은 아니까.”

두 연구원이 고개를 끄덕이고 종종걸음으로 달려나갔다. 노래마인은 그들과 반대 방향으로 꺾어 들어가 A동으로 향했다. A동의 유리로 된 자동문은 작동하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힘을 주며 강제로 문을 열어젖히자 삐걱대는 소리가 심하게 났지만, 여전히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A동의 복도는 복잡하게 꼬여 있었다. 복도 곳곳에 방이 설치되어 있었고, 방에는 명패들이 붙어 있었다. 흰빛으로 삭막하게 칠해진 벽을 조심스럽게 지나 한참을 가자 온실이 나왔다. 온실은 따스하고 아늑했고, 곳곳에 푸른 식물이 자라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녹색빛의 방과 어울리지 않게 군데군데 은빛 상자가 놓여 있었고, 거기에는 ‘생물재해’, ‘지각’, ‘유클리드’, ‘안전’ 같은 딱지들이 붙어있었다.

노래마인은 누군가가 있나 온실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 때 상자 하나에서 인터컴을 통해 목소리가 났다. “우리는 억압을 거부한다. 모든 억압은 단호히 타도해야 할 대상이요, 벗어나야 할 굴레이다. 그 억압은 단지 칼질과 먹히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냉장고, 통조림, 병조림 같은 모든 보존 조치도 우리를 먹이로 본다는 점에서 모두 억압이다. 날 여기서 꺼내라. 과일들은 썩을 권리를 요구한다.”

관리자가 그 상자에 든 게 무엇인지 눈치채고 이맛살을 찌푸리는 순간, 뒤에서 목소리가 났다. “오, 조용히 좀 해, 1794.” 카일리가 뒤에서 다가왔다. “관리자님.” 그녀가 관리자에게 가볍게 목례했다. 카일리는 SCP-1794가 든 상자를 집어들었다. “인격 A인 것 같기는 한데, A인지 B인지 정확히는 모르겠네. 그게 항상 구분하기 힘들단 말이지.” 카일리의 투덜거림에 노래마인이 물었다. “SCP-1794를 저렇게 보관해도 괜찮은 건가요? 다른 식물들을 선동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오, 저거요? 저런 고차원적인 헛소리가 식물들에게 영향력이 있을리가요. 이쪽으로 오세요. 쯔산하고 하사드가 와 있습니다.” 카일리가 상자를 구석에 내려놓고, 몸을 돌려 노래마인을 안내했다. 잠깐 걸어가자 의자와 테이블로 정자처럼 꾸며놓은 장소가 나왔다. 쯔산과 하사드 둘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관리자님.” 하사드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특수 작물 농장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마중을 나갔어야 하는 건데, 죄송합니다.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차를 끓이는 중이니까.”

“아, 관리자님!” 쯔산이 밝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그가 의자에서 일어나 악수를 청했다. 노래마인은 엉겁결에 손을 잡았지만, 예상과 달리 밝은 분위기에 당황해 물었다. “쯔산, 내부 보안부에서는 어떻게 빠져나온 거죠? 보안 위험 같은 건 없는 건가요?”

“하하, 제 정보원과 똑같은 말을 하시네요.” 쯔산이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전 공식적으로는 엄연히 업무용 출장을 나온 상태이거든요. 그래서, GOC와는 연락이 되고 있는 건가요? 아니면 뭔가 재단을 공략할 만한 정보가 있다던가? 샐리 박사는 뭐 어떻게 된 거에요?”

“워, 워. 한 번에 하나씩 물어봐요.” 노래마인이 손을 내저었다. “그 전에 보안이나 확실히 하죠. 왜 초소나 건물에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죠? 여기도 기지 아니에요?”

“걱정도 팔자시네요, 참.” 쯔산이 웃었다. “여기서 기지 관리자와 내부 보안부 3차장의 비서와 한국 지역사령부 관리자가 만남을 가지는 걸 누구한테 보일 수는 없잖아요. 당연히 직원들은 다 돌려보냈죠. 그럼 일단 제일 중요한 걸 물어야겠네요. 재단에 반기를 든 이유가 뭐죠? 뭔가 정보를 가지고 있는 건가요?”

“잠시 대답하기 전에 긴장을 끊어서 죄송하지만-” 하사드가 끼어들었다. “차가 다 됐습니다. 보이차 같은 건 상대도 안 되는 변칙 개체산 차죠. 한 잔씩 따라드리죠.” 하사드가 주전자를 들고 차를 따르기 시작했다. 막 쯔산의 잔을 채우던 손이 조금씩 떨리더니, 노래마인의 잔을 채우던 순간 주전자를 놓치고 말았다. “오, 죄송합니다.” 하사드가 바닥에 떨어져 깨진 주전자 조각을 주웠다. “계속하세요, 신경쓰지 마시고.”

“어…그럼 말하죠.” 노래마인이 답했다. “이 전쟁은 이미 예견된 거에요. 재단의 시나리오 중 하나라고요. TF급 세계멸망 시나리오.”

“뭐라고요?” 하사드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다가 테이블에 머리를 부딪쳤다. “아우! 그러니까 이 모든 게… 시나리오대로 움직이는 거란 말입니까?” “그렇다는 것은…” 쯔산이 얼굴을 문지르며 말했다. “재단의 높으신 누군가는 이 시나리오를 알고 있다는 거군요. 재단에서 내놓은 시나리오니까.”

“일부러 이 시나리오를 진행시키는 거일 수도 있어요. 처음에 부서진 신과 혼반을 밀어버리겠다고 나선 건 재단이잖아요. 어쩌면 이 시나리오에 재단에 이익이 되는 게 꽤나 있을지도 모르죠.” 카일리가 말했다. “하! 그래봤자 세계가 멸망하는 시나리오인데요. 그 시나리오가 진행되는 걸 어떻게든 막아야 해요. 안 그러면 꽤나 안 좋은 일이 생길 걸요.”

“일단 진정합시다.” 쯔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난 재단의 어떤 사람도 세계가 망하길 원하는 미치광이 사이코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설령 세계멸망 시나리오가 진행되고 있을지라도, 그 누군가는 멈추려고 노력하고 있겠죠. 더군다나, 도대체 그 정보의 출처가 어디입니까? 신뢰할 수 있는 출처에요?”

“밝힐 수는 없지만, 백 퍼센트 신뢰해요.” 노래마인이 답했다. “그리고… 내가 드는 걱정은 이거에요. 만약 그 누군가가 한 명이 아니라면? O5 평의회 전체가 동의한 사안이라면?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그러면.. 평의회 전체를 밀어내려면 재단 내부에서는 불가능해요.” 쯔산이 답했다. “최대한 빨리 외부 세력을 끌어들어야 하죠. 그럼 뭐가 어떻게 돌아가든, GOC를 끌어들이는 게 최선이겠군요. 혹시 그전부터 연락이 되던 겁니까?”

“아니요, 그건 아니에요.” 노래마인이 반사적으로 답했다. “더군다나, GOC를 끌어들인다고 뭐가 해결될지는 잘 모르겠군요. 그 조직은 아마 재단을 진압하고 통폐합하고 싶어할텐데.”

“그렇겠군요. 더군다나 재단이 지금 시나리오를 막으려고 하는 건지도 모르는 상황이어서,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그 시나리오의 내용을 알아내기 전까지는 뭘 하기가 힘들겠는데요?”

“그렇겠지요.” 관리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잠시 화장실이나 갔다오죠.”

“에… 온실 밖에 오른쪽으로 돌아서 두 번째 문이에요.” 카일리가 말했다. 노래마인이 자리에서 일어서 밖으로 나가려는 찰나, 갑작스레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인간.” SCP-1794가 인터컴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우리 과일족은 인간들의 억압을 타도하고자 하고, 즉 너희를 적대한다. 하지만 상황이 네가 말하는 것과 같다면, 돕지 않을 이유가 없지. 저 쯔산이라는 자는 너희 편이 아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무슨 소리를 하기는. 저 자본주의 착취자가 총을 겨누고 이곳에 들어왔다. 내부 보안부에서 널 체포하기 위해 나왔다고. 농장의 저 둘을 협박해서 널 붙잡아 두기 위해 있고. 당장 도망쳐야 한다. 당장!”

“이게 무슨-” 노래마인이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뒤로 돌아서는 순간, 그녀의 눈이 쯔산과 마주쳤다. 쯔산은 그녀의 얼굴을 보고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것 같았지만, 무어라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 아직 눈치채지는 못한 것 같으니, 조심스럽게 움직이기만 하면.. 그 때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관리자님? GOC하고는 얘기 끝냈어요. 농장 사람들은 어디 있는 거죠?” 그 순간, 노래마인은 쯔산의 눈에서 언뜻 싸늘한 결의가 스쳐지나가는 것을 본 것 같았다. 몸을 움직일 틈도 없이, 쯔산이 품 속에서 UZI를 꺼내들고 쏘아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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