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전등 불빛이 어두운 복도를 이리저리 비추고 있었다. 란란맥과 이트륨 둘이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며 시설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복도 옆에 빼곡하게 세워져 있는 서버들을 지나 한참을 지나간 끝에, 방이 하나 나왔다. 컴퓨터 하나와 책상, 의자 몇 개만 놓여 있는 작은 방이었다. 이트륨이 벽에 있는 스위치를 눌러 보았지만, 불은 켜지지 않았다. 란란맥은 컴퓨터를 켜 보았지만, 마찬가지로 전원이 들어오지 않았다. 둘은 피곤한 표정을 지으며 의자를 끌어당겨 자리에 앉았다.
“이 시설은 확실히 버려진 것 같군.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것 같은데, 그럼 저 서버들은 다 작동하지 않고 있는 건가?”
이트륨의 질문에 란란맥이 직원용 핸드폰을 꺼내 이리저리 조작해 보았다. “내 보안 권한으로는 여기 시스템은 접속조차 할 수 없는데요. 하지만 전기가 완전히 나간 것 같지는 않던데. 저쪽 서버들이 계속 불이 들어왔었거든요.”
“시설은 텅 비어있고, 불은 안 들어오는데 서버들은 작동하고, 3등급 보안 등급으로는 접속도 안 되는 시스템이라. 착륙을 해도 꽤나 이상한 곳에 착륙했군.” 이트륨이 그렇게 투덜거리고 있을 때, 란란맥은 컴퓨터 쪽으로 다가가 책상과 서랍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서랍 첫 칸과 두 번째 칸은 열려 있었고 평범한 사무용품만 있었지만, 세 번째 칸은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란란맥이 서랍을 달그락거리고 있는 걸 보고 있던 이트륨이 일어서더니 다가가 주먹으로 자물쇠를 쾅쾅 내리찍었다. 자물쇠가 약간 찌그러지기는 했지만, 부서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걸로 열릴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T-1000도 아니고.” 그 말에 이트륨이 허리춤에서 총을 꺼내들고 자물쇠를 쏴 버렸다. 요란한 총소리가 울리며 자물쇠가 통째로 박살나고 서랍이 파여 나갔다.
이트륨이 총을 허리춤에 집어넣고 서랍 안쪽을 뒤적거렸다. “흐흠. 이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군.” 그가 붉은 표지로 된 공책을 하나 집어 들었다. 이트륨이 몸을 일으키고 책을 이리저리 넘겨보았다. “뭐 특별한 내용이라도 있어요?” “아니, 별 내용 없네. 그냥 시시껄렁한 내용이군. 재단이 좋아하는 거, 사람 죽고 기지 터지고 도시 날아가는 그런 얘기.” 그가 일지를 접고 책상 위로 휙 집어던졌다. “흠, 이거 재미있군. O5-3 직인이 뒷표지에 찍혀 있네.”
란란맥이 그 말을 듣고 일지로 손을 뻗는 순간, 밖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나무가 부딪치며 생기는 달그락거리는 소리였다. 둘의 눈이 모두 밖으로 쏠렸다. 둘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고개만 내밀고 복도를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잘못 들은 건가..?” 그 때, 뒤쪽에서 무언가가 빠르게 달려오는 소리가 났다. 미처 뒤를 돌아볼 틈도 없이, 11호가 달려들어 문 쪽에 가까이 있던 이트륨을 붙잡고 공중으로 던졌다. 뒤이어 일지를 손에 쥐고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란란맥이 들이받혀 나동그라졌다. 일지가 공중으로 날아갔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이트륨과 란란맥 둘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동안, 11호는 일지를 주워들고 밖으로 나섰다. 막 방에서 몇 미터쯤 떨어졌을 때, 갑작스레 안쪽에서 문이 열리고 형체 둘이 나왔다. 11호의 눈이 그 쪽으로 쏠렸다.
“호, 제대로 이동했네. 변칙적 이동 방어 시스템이 있어서 안 될 줄 알았는데.” Cat With Eye가 귀신 군의 어깨에 올라탄 채로 말했다.
“변칙적 이동 방어면 그거 아니에요? 방금 전처럼 변칙적으로 들어오는 걸 막아내는 거.” 자우가 답했다.
“그래. 재단 중요 시설에 마음대로 못 들어오도록 방어하는 값비싼 시설이지만, 방랑자의 도서관의 이동 능력도 무시하기는 힘든 거라고. 그런데 넌 재단 요원인데 왜 할 줄 아는 게 없냐? 총도 안 가지고 다녀?” 투덜거림에 자우가 바로 맞받아쳤다. “전 기억 소거반 소속이지 전투요원은 아니어서요. 그냥 익숙해지시죠?”
11호가 당황한 듯 그들의 대화를 쳐다보고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덤벼들었다. 자우와 귀신 군이 몸을 날려 피했고, 고양이도 펄쩍 뛰었다. 11호가 다시 팔을 휘둘러 공격을 시도하자, 다시 귀신 군의 어깨에 내려앉은 Cat With Eye가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 간단한 동작에 갑작스레 11호가 서버실 안쪽으로 나동그라졌다. 11호가 일어섰지만, 당혹스러운지 덤벼들지는 않았다. 자우가 여유롭게 고양이에게 물었다.
“와우, 저런 건 어떻게 하는 거죠? 나도 이제 뱀의 손 회원인데 좀 가르쳐주시는 거 어때요?”
“다 찾아서 읽고 독학하는 거야. 나중에 사용법 알려 줄 테니 알아서 하라고.”
11호가 머뭇거리고 있는 동안, 이트륨과 란란맥은 뒤에서 정신을 차리고 그들을 조심스럽게 보고 있었다. “뭘 어떻게 할까요?” “저게 바로 Cat With Eye잖아. 그 뱀의 손 스파이였다는. 신경쓰지 말고 도망가자!”
둘은 눈치를 보다가 잽싸게 뛰어가기 시작했다. 란란맥은 잠깐 멈춰 11호가 바닥에 떨어뜨린 일지를 주워들었다. 고개를 돌려 둘이 뛰어가는 것을 본 자우가 당황해 말했다. “엥, 저렇게 가게 놔두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원래 계획은 그 시나리오 기록을 찾는 거 아니었어요?”
“그러게. 빨리 잡아야 하는 거 아닌가-” Cat With Eye가 맞장구치고 있을 때, 눈치를 보던 11호가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피하지 못한 자우가 부딪쳐 나뒹굴었다. 고양이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이자 11호가 뒤로 나동그라졌지만, 그 사이 이트륨과 란란맥은 멀리 뛰어가고 있었다. Cat With Eye가 바닥에서 투덜거렸다. “젠장, 엉뚱한 놈 때문에 계획이 잘못 돌아가고 있네. 미쳐버리겠군.”
11호가 안쪽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는 사이, 이트륨과 란란맥은 입구까지 헐레벌떡 뛰어갔다. 건물 밖으로 나와서 숨을 고르고 있을 때, 뒤에서 남자의 말소리가 났다.
“이런이런. 재단에 뱀의 손이라니. 삼파전이 벌어질 줄은 생각도 못했군요.” 아무도 아닌 자가 예의 그 서류가방을 가지고 다가오고 있었다.
“당신은 또 뭐야? 다른 사람들은 평생 볼까말까 한 작자를 두 번이나 보네.” 이트륨이 짜증을 내자, 아무도 아닌 자가 모자를 살짝 들어 사과했다.
“뭐,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저는 방랑자의 도서관 같은 엄청난 시설도 없이 혼자 움직이니까요. 재단의 방어 때문에 저 건물 안에 아예 들어갈 수가 없었다니까요.”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지? 저 건물은 안 되면 왜 다른 재단 건물에는 그렇게 들락날락하는 건데?”
“저곳은 특수한 방어가 되어 있으니 그렇지요. 눈이 튀어나오게 비싼 시스템으로. 어쨌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제가 예전에 말했을 텐데요, 여러분들이 제게 필요한 걸 찾아주게 될 거라고. 바로 지금입니다. 그 일지 말이죠.” 아무도 아닌 자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뺐다. 란란맥의 손에 들려 있던 일지가 어느새 사라지고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일지를 까딱거리다가 그가 다시 집어넣었다. “뭐 고맙습니다. 따라오려고 애쓰실 필요 없다는 건 아실 거라 믿고. 저는 이만.” 다음 순간 아무도 아닌 자의 모습이 지우개로 지운 듯 사라졌다. 란란맥과 이트륨이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이런 빌어먹을. 고생은 고생대로 했는데 왜 했는지는 모르겠네. 도대체 이게 뭐하는 짓이야?”
킬리 차장은 심문실을 비추는 유리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바로 이 방에 쯔산이 옆에 있었는데. 빌어먹을! 심문실 안쪽에는 검은 두건을 쓴 재단 직원이 의자에 묶여 있었다.
킬리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노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카에스틴이 간단히 목례를 하고 방에 들어왔다.
“그래서, 뭐 알아낸 정보라도 있는 겁니까?”
“상당히 상황이 골치 아프게 돌아가더군요. 11호의 보고에 따르면 알 수 없는 재단 요원 둘이 정보를 빼내고 있었고, 뱀의 손도 와서 공격을 시도했다고 합니다. 교전이 있었고 기록은 놓쳤다는군요.”
“정보를 빼내고 있었다니? 평의회에서 따로 요원을 보내기라도 한 걸까요?”
“딱히… 차라리 뭔가 숨기고 싶은 게 있는 거겠죠. 그나저나 저 심문실에 있는 직원은 뭡니까?” 카에스틴 차장이 턱으로 심문실 너머를 가리키며 물었다.
“어…” 킬리 차장이 손으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쯔산의 죽음에 대한 조사를 하고 있었죠. 외무부에 있는 격리불가라는 직원인데, 정보를 팔아넘긴 자 중에 하나에요. 내 직권으로 즉결처분했습니다.”
“워우.” 카에스틴이 휘파람을 불었다. “좀 침착하게 움직이시죠.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하. 지금 그게 문제인지는 모르겠군요. 내가 지금 머리가 아픈 건 다른 겁니다. 그 시나리오, 그거죠. 만약 진짜로 시나리오가 존재한다면, 지금 우리는 시나리오를 벗어난 걸까요? 아니면 시나리오대로 세계가 멸망하는 대로 나아가고 있는 걸까요? 시나리오를 찾겠다고 이렇게 버둥대는 게 오히려 시나리오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시나리오를 막기 위해 움직임으로써 오히려 시나리오를 가속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