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안(開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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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기억.

"부인, 몸은 좀 어떻습니까?"

"전일보다 훨씬 괜찮습니다. 유모가 여아를 보고 있으니…"

"여인은 출산 후 조리가 중요하다 들었으니, 당분간은 휴식을 취하도록 하세요."

아내가 수줍게 웃는다. 저 웃음은 혼인 후 한 번도 변하질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꽃에 앉은 나비처럼 고고하고 풍아한 자태로 망막에 다가온다. 가슴을 울리는 애달프고 아름다운 미소다.

이내 몸을 돌린다. 아내의 친정에서 보내온 여종에게 갓난쟁이를 받아든다. 손끝에서 전달되어 오는 유아의 온기. 행여 떨어뜨리기라도 할까 봐, 행여 너무 세게 쥐기라도 할까 봐 조심스럽다. 아기가 눈을 들어 자신의 아비와 눈을 맞춘다.

최초의 직시.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 용솟음치면서, 입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저도 모르는 새에 눈가에 물기가 드러난다. 아이가 방긋 웃는다. 무지와 순수의 얼굴.

"그래, 그래 우리 옥아. 아비다."

살짝 먹먹해진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장면이 전환된다.

걸음마를 떼는, 아이가 있다. 그의 여식이다.

귀한 꼬까옷을 입히어, 아이는 한 마리 벌새처럼 귀엽다. 좋지 않은 형편이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아이에게 좋은 것은 모든 해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임을 깨닫는다. 유학의 도리가 바로 여기에 있음을 배운다. 이 마음[心]의 길이 바로 유학의 길이구나. 진정으로 유자(儒者)가 행해야 할 것이 다른 곳에 있지 아니하니. 그저 저 아이가 곁에서 오래오래 함께해주길 바랄 뿐이다. 아이의 뒤뚱거리는 걸음이 위험한 곳으로 향하지 않기만을 빌며.

옆에서 아내가 웃는다. 연약한 몸뚱어리가 웃음으로 흔들린다. 아내는 출산 후 잔병치레가 잦아졌다. 밤중에 아내의 기침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가슴 한 켠이 서늘해지곤 한다. 그럴 일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가끔 끝을 생각하고 만다. 저 먼 옛날 부친께서 졸하기 전의 나날들이 상현달처럼 피어오를 때, 그 기침의 맥은 너무나도 유사하게 들려왔다. 그것만은 막으리라고 생각한다. 비록 용렬한 사내이나 처자를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해야만 하지 않겠는가.

조금 더 부유했더라면, 조금 더 재산이 많았더라면…하고, 부질없는 생각을 한다. 선비로서 할 생각은 아니지만, 권도를 택할 수만 있다면 그리하고픈 마음이 인다. 어쨌거나 이 사람을 지킬 수만 있다면. 이 사람을 영영 잃지 않고 곁에서 같이 살아갈 수만 있다면.

그러면 되었으니까.

또, 장면이 바뀐다.

"아버지!"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금제소에서 돌아오는 길이다. 아비의 귀가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딸아이는 골목 어귀에 들어오자마자 달려온다. 땀에 젖은 이마가 번들거리고 있다. 어지간한 사내애보다도 기운이 세, 아내에게 늘 농담조로 무과를 보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리도 활달하니.

"옥아, 몸가짐을 단정히 해야지. 너도 인제 여섯 살이 아니더냐."

짐짓 훈계를 하는 척하면서 아이를 들어 올려 목말을 태운다. 아이의 웃음소리가 높아진다. 부녀의 얼굴에 한 가지로 웃음이 걸릴 제, 아내가 문 앞에 서 있는 모습이 들어온다. 아내 역시 웃고 있다. 살짝 메마른 얼굴에 화색이 도는 그 모습. 딸아이를 바닥에 내려주자, 아이는 이번에는 제 어미를 향해 달려간다.

아내의 해진 옷차림을 보자 즐거웠던 마음도 살짝 녹아든다. 가장의 무게가 이렇게 클 줄 누가 알았는가. 어릴 적 야망과, 오래전에 떠나가신 부모의 말씀이 무색하다. 세상은 결국 부와 힘의 도리 앞에 놓인 것이 아닌가 하는 부정한 생각이 자꾸만 신념을 흔든다.

말없이 아내에게 다가가 허리에 팔을 두르고 안으로 들어간다. 이리 약한 몸으로 어떻게 가내의 일을 보는지. 아내의 어깨에 얼굴을 묻는다. 살짝 놀라는 듯한 떨림도 잠시, 아내의 가느다란 손이 뺨을 어루만진다. 다시 평화가 찾아든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살지 않으리란 다짐이, 나 하나의 몸이 아닌, 두 사람의 육신이 손에 달려 있단 사실이 무겁게 자각된다. 허나 고통스럽지는 않다. 아내의 손길 앞에, 세상은 멀고 또 가까웠으니.

그저 이 시간이 오래되기를 염원할 뿐이다.

다시 장면이 전환된다.

보고 싶지 않은 기억이다.

비가 내린다.

날카로운 기억의 편린이 솟구친다. 그 집, 그 공간, 그 초가.

피.

딸아이의 차가운 손.

결박당한 몸.

불타는 초가.

그리고… 장대비.


* * * *


이영은 눈을 떠 간극을 바라보았다.

회상이 끝나자 전신이 찌르르하는 미약한 통증이 느껴졌다. 밖의 풍경은 고요하게 자리하고 있다. 보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공간… 이제야 이 모든 공교로움이 느껴진다. 헛웃음 같은 날숨이 배어 나온다.

이 지독한 탈력감.

이영은 잠시 허공을 응시하다가 문득 자리를 떨치고 일어선다. 방 저편에 있는 창가로 그는 거닐어갔다. 영은 시선을 던졌다. 사방에서 들어오는 낯설고 기이한 빛깔. 지금까지 내가 무얼… 무얼 그리도 바랐던가. 무얼 바라 이 지경까지 거닐어 온 건가.

달빛에 빛나던 그 밤이 떠올랐다.

없는 육신이 아파왔다  지독한 환지통. 그 통증과 통증 사이에서 기억의 불길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가 스러져 갔고, 또다시 불쑥 튀어나왔다. 그것은 말하자면 의식의 단말마와 같았다. 불지옥에서 새까맣게 타버린 뇌리의 마지막 흔적이 그에게 계속해서 외치는 것이었다. 나를 기억하라고. 우리를 기억하라고  우리의 끝을 기억하라고.

망막 저편에 어리는 미소, 어린 딸과 아내의 얼굴, 그들이 아직 메말라가지 않았을 적의 형상…

육신을 갖고 있었다면 불타는 가슴을 두드리며 이를 악물었으리라. 그러나 지금 영에게 남은 것은 오롯이 영(靈)인지라, 그저 끓어오르는 고통과 슬픔을 안으로 삭일 뿐이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저편을 응시했다.

"…차마 두고 볼 수가 없군."

정천은 여전히 앉아 교수의 말을 곱씹었다. 그의 목소리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생각지도 못한 정보의 투입이 이어지는 가운데, 그간 추적해 온 이영의 죽음에 대한 내막은 갑작스러웠고 납득할 수 없었다. 더구나 이러한 죽음은 더더욱. 그의 얼굴에는 의기로 가득한 분노가 진중히 드러나고 있었다.

걸립 역시 꽤나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맺힌 데 없이 맹한 얼굴에 미미한 놀라움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턱을 긁적이더니 고개를 살짝 돌려 영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영으로서는 어떠한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말로만 들었다면 수긍하고 넘어갈 수 있었을지도 몰랐으나, 김세경의 증언은 숨겨진 기억에 연쇄적인 반응을 일으켜 그의 정신을 요동치게 하고 있었다.

문득 이가 악물리면서 머리가 아파왔다.

별안간 영은 정천의 방을 나섰다. 주체할 수 없는 혼란과 분노가 몸을 뒤흔들었다. 뒤에서 걸립이 부르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으나 벽을 통과하면서부터 들리지 않았다. 그는 걸어 정천의 아파트를 나섰다. 비틀거리는 발걸음이 어디로 가는지는 영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아이의 걸음마가 기억났다. 그 걸음마가 자신에게 향하던 순간이 기억났다.

영은 도보에 무릎을 꿇었다. 잇몸 사이로 울음이 비어져 나왔다. 아픔과 슬픔과 분노가 한 가지임을 이제야 깨닫는다. 입에서 무의(無義)한 사과가 흐느끼듯 흘러나왔다.

"…옥아, 효옥아, 내 딸아… 못난 아비를 용서해다구. 이 못난 아비를… 여보 나를 용서해주오… 내가…"

눈물이 흘러 뺨을 적셨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한 번 더 죽어 이 모든 상황을 망각하고 싶었다. 기억이 돌아올수록 심장을 쥐어뜯는 아픔은 더욱 거세어졌다. 영은 바닥에 머리를 숙였다. 눈물이 아스팔트 위로 떨어졌다.

분노와 깊어진 살의가 내면 어딘가에서부터 느껴졌다. 손을 꽉 쥐었다 풀어본다. 무력하게 흔들거리던 딸의 손이 기억난다. 그리고 그 피의 장면도, 시야에 떠오른다.

머리에서 웅웅거리는 느낌이 더해졌다.

눈가에 불똥이 튄 듯 뜨거워졌다. 정신은 도리어 차츰 고요해지기 시작했다. 의식은 한 가지의 과녁으로 모인다. 이 모든 사달을 초래한 원인으로의 증오로.

영은 고개를 들어 허공을 노려보았다. 마르지 않은 눈물에 핏빛 광채가 돌았다.

그 여자, 모든 걸 앗아가서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 그 이물, 연경. 그것을 찾아야만 했다. 그것을 찾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죗값을 치르게 해야 했다. 지난날 자신이 그리 다짐했듯이. 피 끓는 아픔으로 다짐한 바와 같이.

턱에 힘이 들어간다.

죽일 년, 어떻게든 죽일 테다. 영은 저도 모르게 눈가에 힘을 주고 속으로 되뇌었다. 아니, 죽음보다 더한 삶을 살게 해주마.

이가 악물렸다. 속이 뒤틀리면서 손이 차가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피가 바닥을 메우는 모양처럼 분노가 뜨끈하게 그의 뒷목을 적시며 빠르게 불타올랐다. 갈 곳 없는 분노가 끊임없이 요동쳤다.

소리없이 중얼거렸다. 매일 매시 매분 매초, 시간의 흐름이 그 자신의 감옥이 되게 해주마. 기필코, 내 기필코.

그리고 통증.

영은 턱을 부여잡고, 어안이 벙벙한 채로 날아온 공격을 바라보았다. 정천이 엉망진창이 된 꼴로 숨을 몰아쉬며 허리에 손을 얹고 있었다. 영은 눈물을 닦아내고, 무슨 항의라도 하려고 몸을 주춤 일으켰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다 다시 중심을 잃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골목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전신주에 스파크가 일고 있었고, 전선 몇 가닥이 끊어져 바닥으로 머리칼을 내리고 있었다. 주변 건물 외벽과 아스팔드 도로에는 패인 듯한 흉터가 큼지막하게 남았다. 주차된 차량과 음식물 쓰레기통, 갖가지 물건들은 제자리에서 벗어나 바닥에 나뒹구는 상태였다.

"어떻게 된 겁니까, 이게?"
"이거 다 형씨가 한 일이요."

정천이 지친 목소리로 대꾸했다.

"한 대 친 건 미안하고. 형씨가 내 말도 못 듣길래."
"내가…했다고?"

영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정천이 묵묵히 옷매무새를 가다듬기 시작했다. 그가 천천히 말했다.

"내 이리될 줄은 알고 있었지만…"
"무슨 말입니까, 알고 있었다니?"
"형씨는… 악귀가 된 셈이요."

정천이 그에게 손을 내밀며 말을 이었다.

"통상적인 악귀는 아니긴 한데, 말하자면 기억이 되돌아오면서 그 한이 강해진 거지. 원념이 굳건해지니까 도리어 영력 따위의 힘도 생겨난 게 된 거요."

영은 정천의 손을 붙잡고 일어났다. 그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곤혹스럽기도 한 얼굴로 손을 내려다보았다. 일전보다 살짝 더 단단해진 듯한 모습이 괴이쩍었다. 영은 고개를 들어 정천을 바라보았다.

"수백 년도 더 된 귀신이 어떻게 기억도 잃은 상태로 그 자리에서 그냥 남아있었겠소. 필경 한이 끔찍하게 서린 혼령이겠거니 했거늘, 이런 일이 있었을 줄이야…"

정천은 영의 앞에 서서 팔짱을 꼈다.

"이제 어떡할 거요?"

쓰레기통이 바람에 밀려 큰 소리를 내며 굴러갔다. 잠시 허공을 응시하던 영의 얼굴에 다시 굳은 빛이 돌았다.

"…그 지네를 찾아야겠습니다."
"지네라면, 형씨 일가를 몰살한 그 이물이겠군."

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김 교수는 그 지네가 형씨 일이 끝나고 한참 세간을 떠돌다, 언젠가 도로 보전원으로 돌아갔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그 이상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자료도 없고, 보전원이 일제 때 이상사례조사국에 먹히는 바람에 종적도 묘연하니."

영은 한쪽 눈을 찌푸렸다.

"뭐에 먹혔다고요?"
"말하자면 깁니다."

정천이 어깨를 으쓱했다.

"찾으면, 어떻게 할 거요?"

영의 얼굴이 차분해졌다. 그의 눈가에 내려앉은 고요는 정결했지만, 정천은 그것이 지독한 분노를 담아내는 이들이 으레 갖고 있는 폭풍전야의 평화임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영혼이 오롯이 한으로 물들어 있을 때나 가능한 역설적인 안온함이었다.

"죽는 것보다 더한 삶을 살게 해야지요."

영이 조용히 대꾸했다.

"죽는 건 너무 과분한 처사가 아닙니까, 그것에게는."
"점점 형씨가 마음에 드는데."

정천이 피식 웃었다.

"좋소, 알 만한 사람을 알고 있으니 가보지요."


* * * *


"아무도 없나?"

셋은 청회색 벽지로 뒤덮인 정갈한 방 안에 서 있었다. 사방에는 무미건조한 책과 신문, 백과사전과 이해할 수 없는 장비들이 널려 있었다. 정돈되지 않은 방이었으나 나름의 규칙성을 갖는 배치였다. 방의 주인이 필요할 때 언제든 그 의도에 맞출 수 있는 방이었다.

영은 자신이 거쳐온 경로를 떠올렸다. 정천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고는, 서고에서 어떤 책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가 한 페이지를 열자 셋은 이 공간으로 빨려들어 오고 말았다. 물론 걸립은 다짜고짜 끌려온 탓에 돌아가겠다 성화를 냈으나, 정천이 내뱉은 말 탓에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다. 말인즉, 걸립이 종로 식당에 진 빚을 대신 갚아주겠다는 것이었다.

"정말 갚을 수 있는 겁니까?"
"종로 식당 거기가 내 친척이 하는 데라서."

정천이 영을 돌아보며 말했다.

"쉽게 말해 도깨비 터에 세워진 도깨비 식당이다, 이 말이요. 갚는 거야 쉽지. 아, 그나저나 이 친구는 어딜 간 거야?"

영은 방의 중심에 있는 소파에 앉아있었다. 무겁게 내려앉은 마음이 몸까지 무겁게 만든 건지, 일어나 돌아다닐 마음이 들지 않았다. 우울한 마음이 한 번 일어나니 도무지 조절이 되질 않았다. 그러나 자제를 필히 하긴 해야 했다. 이유인즉슨,

"형씨, 추워! 거 좀 밝은 생각을 하라니까!"

이렇게 기분에 따라 주변 공기가 유의미하게 변화하기 때문이었다. 걸립이 얇은 코트를 여미면서 투덜거렸다. 영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다른 생각을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좀 구경하기 시작했다.

벽면에는 여러 개의 받침대가 부착되어 있었다. 맨 위와 그다음 받침대는 서가처럼 책이 빽빽히 꽂혀 있었고, 그 아래에는 장식물과 사진이 장식되어 있었다. 액자에 꽂힌 사진들은 평범한 일가에서 붙여둘 만한 사진과 차이가 있었다. 시체 사진, 누군지도 모를 인물들이 밀회를 나누는 듯한 사진,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 사진… 영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누군지는 몰라도 범상치는 않은 인간 같았다.

걸립이 영의 옆으로 걸어와서는 한 액자에 허리를 기울였다. 어떤 여성의 모습을 찍어둔 사진이었다. 트렌치코트를 입고 사진사를 바라보는 모습. 걸립은 뭔가 석연치 않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인데… 도통 어디서 봤는지 모르겠네. 아니, 누구랑 닮은 건가."

걸립이 머리를 긁적이는 사이, 정천은 곤란한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이거 언제 온다고 말을 해야 했나?"
"말도 안 하고 여기로 끌고 온 거냐?"

걸립이 어이가 없다는 듯 외쳤다.

"뭐 언제든 있으니까 그러려니 했지."
"저런 어처구니 없는 놈. 됐고, 일단 누굴 찾아왔는지부터 설명을 해줘야 할 거 아녀."

걸립이 툴툴댔다.

"직장 동료라고 할까."
"그러고 보니 김형은 사설탐정이라 했지요. 개별로 활동함이 아닙니까?"

영이 물었다.

"내가 속해 있는, 말하자면 직장이 워낙 독특해서 말요. 요컨대 사설 수사관 모임이라고나 할까."

정천이 책상 위의 서류를 대충 뒤적거리며 대답했다.

"환물탐정협회, HEA, 이름은 천차만별이긴 하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사람 중 상당수는 그렇게 부릅니다. 이물과 관련된 사건을 도맡거나, 사건 해결에 이물을 사용하는 수사관들이 소속된 협회요. 정확히는 직장이라기보단 동호회 느낌이지만."

정천이 뒷목을 문질렀다.

"이야기가 다른 길로 샜군. 이곳 주인이 꽤나 똘똘합니다. 내 아는 인사들 가운데에서는 정보통으로 불리죠. 특히 정상성 유지 단체 권력 구도는 빠삭하니. 그러니 이 친구라면 뭘 알긴 할 거요."
"보전원 자료를 찾는데 그런 쪽을 물어봐도 되는 겁니까?"
"이금위랑 보전원이 일제강점기적에 일본 초상 기관에 먹힌 건 사실이지만, 필사적으로 해외 도피한 일파가 있지요. 스스로 외보전원이라 칭했는데, 그네들이 2차대전이 끝나고 세계 오컬트 연합, 즉 GOC라는 곳에 가맹했단 말요. 그래서 지금은 그 따까리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만일 지네가 아직도 살아있다면 외보전원에 있을 확률이 높으니까."

"아니면 이자메아에 갔거나. 근데 내 생각에도 외보전원에 있을 것 같은데요, 천이 오빠 말대로."

영은 화들짝 놀라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짧은 머리를 한 여성이 그를 보며 씩 웃고 있었다. 아까 사진 속 여자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코트 같은 걸 입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냥 평상복이었다. 다크서클이 인상적인 인물이었다. 기척을 잘 숨기는 모양이었다. 정천이 손을 들어 올렸다.

"왔냐, 아수라발발타."
"남한테 이상한 별명 붙여주기는 버릇이죠, 아주."

그는 정천의 팔을 툭 치고 자신의 책상에 앉았다. 아수라발발타라고 불린 여자가 그곳에 앉음으로써, 일순간 방 내부에 기묘한 정연함이 서렸다. 그가 이 방의 주인임은 자명해 보였다.

"이쪽은 송혜윤, 소개는 아까 했지? 정보통이라고."
"왜 별명이 아수라발발타입니까?"

영이 물었다.

"어쩌다 아수라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그걸 또 바리에이션을 만든 거에요."

혜윤이 겸연쩍은 투로 대꾸했다.

"그나저나… 선생님께서 그 유령이신 거죠? 설명 들었어요. 무슨 일로 절 찾아오신 건지도 알고. 그래서 그 부분 좀 찾아보느라 안에 있었는데, 여기 누구께서 냅다 쳐들어오실 줄은 몰랐네."
"그건 미안하게 됐어."
"알면 됐고요."

혜윤이 말을 이었다.

"문제는 그게 아니라, 그 지네여인의 거취니까."

영과 정천은 방 안에 놓인 소파에 걸터앉았다. 영이 탐정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어떻게, 좀 있던가요?"
"좀이 아니라 많이 있던데요. 그 연경이라는 여자."

영의 눈가에 힘이 들어갔다.

"처음에는 이자메아 관련으로 조사했지만, 그런 능력, 즉 벌레를 통한 치유술을 가진 여자가 그쪽에 갔더라면 당연히 흔적이 남았을 거에요. 하지만 일언반구도 언급이 되질 않았죠. 그 대신 외보전원에는 보전원 혁파 직후부터 묘령의 여인이 등장하기 시작했어요. 그 여자가 지금 외보전원의 간부로 있는거고."
"잠깐만, 외보전원 일파, 이번에 GOC 따라서 한국 온다고 하지 않았나? 한국 분점 낸답시고 말이 많던데."

정천이 생각난 듯 말했다. 그러더니 그는 문득 자리에서 일어나고 턱을 감싸쥐고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영에게 말했다.

"…형씨, 생각보다 기회가 빨리 온 것 같은데그래."

영은 정천의 말을 듣고 고개를 숙였다. 연경이 살아있었다면, 그렇다면 된 것이었다. 되갚아줄 기회가 있다는 소리였고, 그럼 제일의 걱정은 지나간 셈이다. 영에게는 연경이 이미 오래전에 죽어 없어졌다는 이야기가 가장 두려운 것이었다. 이 끔찍한 증오를 내뱉을 장소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곳이 연경의 사지가 될 것이었다.

"으아악!"

걸립의 비명이 영의 상념을 방해했다. 걸립은 수갑처럼 생긴 무언가를 손목에 두르고 있었다. 퍽 당황한 것으로 보아 뭔지도 모르고 만진 것 같았다. 정천이 한숨을 쉬더니 걸립의 손목을 붙들고 이리저리 돌리더니 수갑을 떼어냈다. 수갑은 원래의 모습인 듯, 시계로 돌아갔다.

정천이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형씨, 내게 생각이 있는데."

정천이 나직하게 말했다.

"한 번 들어보시겠소?"

영이 정천을 바라보았다. 정천은 영의 눈빛에서 예의 그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천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그 전에,"

그가 혜윤에게 고개를 돌렸다.

"야 아수라발발타, 너 나랑 일 좀 하자."
"뭐, 뭔 일요?"
"큰 판을 좀 짜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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