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은 유독 시끄러웠다. 장대비가 사정없이 천장과 바닥을 두들겨대며 자아내는 불쾌한 소음 덕에 평정은 고사하고 머리가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저밖에 떨어지는 빗줄기만큼이나 마음이 시끄럽고 정신이 아득해져서 몸을 바로 가눌 수가 없었다. 밀려오는 졸음의 파도에 눈을 감아버리고 싶었고, 눈앞의 시끄러운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싶었다.
방에는 항상 꿉꿉하고 들큼한 냄새가 가득했다. 침상에 누워있는 아내는 헛소리를 힘없이 중얼거리며 이따금씩 쇠약한 신음을 내뱉었다. 사흘 내리 발작을 일으키며 괴성을 지르고 먹은 것을 토해냈던 나머지 이제는 스스로 몸을 일으킬 힘조차 남아있지 않은 듯 보였다. 온갖 잡병들을 몇 달토록 내리 앓고도 지금껏 버틴 것이 용하다면 용했다.
"아부지, 아부지…"
아내의 신음 한 마디가 끝맺기도 전에 바로 옆에서 또 하나의 괴로운 외침이 들려왔다. 채 열 살도 되지 않은 딸아이가 가쁜 숨을 내쉬며 허공에 손을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덥썩 붙잡은 아이의 손은 붉게 떠오른 얼굴만큼이나 뜨겁게 느껴졌다. 그 열기가 결코 반갑지 않았다. 아이의 손을 잡고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손 너머로 느껴지는 체온이 빠르게 식는 것 같았다. 위태로이 꺼질 듯 말 듯하는 잔불과도 같이.
저주스런 빗줄기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잿더미에 파묻힌 잔불마저 꺼뜨릴 맹렬한 기세로, 미친듯이 비가 오고 있었다. 빗방울 하나하나가 천장에 부딪치며 제 자식 하나 못 지키는 놈팽이새끼, 라고 놀려대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런 비난 따위는 얼마든지 들어도 좋으니 제발, 제발.
천지신명이시여, 천상하만물이시여, 비나이다, 이리도 비나이다. 이 못난 놈 거두어 가시건대 부디 이 보배와도 진배 없는 내 아내와 딸아이만은 거두어가지 마시옵소서. 제발, 어떤 것이라도 좋습니다. 무엇이든 좋습니다. 아이와 아내가 낫기만 한다면!
포개어진 손에서 아이의 손이 한 번 움찔거렸다. 그것이 내게는 하나의 계시처럼 느껴졌다.
* * * *
때는 기미년의 어느 습한 여름날, 풀벌레나 짐승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한 새벽녘. 한 선비가 밤새 내린 비로 질퍽해진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닦이지 않은 길 위로 더러운 물 웅덩이가 가득했으나 그의 걸음걸이에 조심성 따위는 차마 느껴지지 않았다.
하마비를 지나 그의 발걸음이 멈춘 곳에는 여느때와 같이 두드러지지 않는 분위기의 사립문이 서있었다. 그는 흘기듯이 주변을 둘러보고는 문 너머로 들어섰다. 조그마한 문짝이 기척없이 닫히자, 그 앞으로 엄중한 분위기의 기와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안쪽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무거운 공기가 내부에 숨겨진 비밀들을 속삭이는 듯 하였다. 대청으로 걸음을 옮기며 문득 올려다본 명패에는 기이한 서체로 다음과 같이 적혀있었다.
— 보전원 금제소(保傳院 禁制所)
조선의 고위 기관이면서 그 이름과 역할이 알려지지 않은 이 기관은 명칭만큼이나 기이한 업무를 맡고 있었다. 지범(只凡)이라는 호를 가진 이 선비는, 옛 성현이 입에 담지 않은 괴력난신(怪力亂神)에 속하는 온갖 보물들을 속세의 시선을 피해 감추어두고 봉인하여 관리하고 있는 보전원 금제소의 출납을 담당하는 관리였다.
나름대로 나라의 녹을 받으며 극비를 지키는 직책을 맡은 그였으나, 집에서 떠나와 금제소에 다다른 직후까지도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병상에 누워있을 아내와 딸에 대한 걱정밖에 없었다. 아무리 용한 의원을 수소문하고 귀한 약재를 달여보아도, 줄어드는 것은 얼마 되지 않는 재산이오 늘어나는 것은 주변으로부터의 힐난과 질책 뿐이니 조금씩 지치기만 할 뿐이었다.
한참토록 멍하니 명패를 바라보다가, 착잡한 심정으로 마루를 지나 금제소 동편의 집무실로 발걸음을 옮기던 그의 귓가에 누군가의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당신네들이 그토록 읊어대는 경전에는 이런 말조차 없습니까? 사람을 죽이는 것은 죄라 하면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 뭐 죄라고 아득바득 잡아다가 이따위 행패를 놓습니까!"
누군지 모를 여인의 우렁찬 외침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끝을 맺었다. 보전원에 금제되는 것은 비단 진귀한 보물 따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삿된 재주를 부려 국난을 일으키려 하거나, 도술을 부릴 줄 앎에도 국명을 받들지 않으려 하는 이들 역시 마구 잡아다 가두곤 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지범은 필시 사람의 탈을 쓴 이물 따위가 낸 소리리라 여기며 고개를 돌려 집무실로 향하는 걸음을 서둘렀다.
* * * *
문을 열고 들어선 집무실의 내부는 마치 도둑이라도 드나든 것 마냥 벽부터 바닥까지 온통 어지러웠다. 지범은 떠났을 때와 별반 달라지지 않은 풍경에 한숨을 터뜨리고는 바닥에 널부러진 장부와 수기 사이를 지나 자리에 앉았다.
그의 서안 위에는 여느 때보다 그 수가 늘어난, 처리 기한을 제법 넘긴 권자들이 오와 열을 맞추어 놓여있었다. 이금위에서 나온 기록지와 온갖 류의 출납 기록이었다.
본래 금제소란 세간의 눈을 피하여 이물이 들어갔다 나오는 곳으로 비품 따위를 제하고서는 출납이라 할만한 것이 많지 않아 그 혼자서도 어렵지 않게 업무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근래에 갑작스레 불어난 출납량과 가족의 악화된 병환이 겹쳐 자연히 그의 업무는 늦춰지고 정체될 수밖에 없었다.
그 덕분에 그는 낮동안은 눈코뜰 새 없이 밀린 업무를 수행하느라 바쁘고, 밤에는 피를 토하며 괴로워하는 가족들을 간호하느라 편히 쉴 수도 없는 마당이었다. 자리에 앉아 슬슬 숨을 고른 그는 가장 묵은 것부터 하나씩 권자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려진 폭포로부터 술이 흘러나오는 족자, 금제소 동편 금고에 금제. 크기와 상관없이 물건을 담아 숨길 수 있는 주머니, 이금위 오호군에게 인계. 사술이 적힌 악서, 보전원 고서각에 봉하여 금제.
그는 맡은 바 일을 바삐 해내는 것을 썩 괜찮다고 여겼다. 직무에 대한 소명의식이나 업무를 맡는 즐거움 따위가 아니라, 혼을 쏙 빼놓을만큼 바삐 생각하고 움직여야 하는 그 환경과 상황이 적당히 괜찮았다. 암만 괴로운 생각에 갇혀있더라도, 집안 걱정에 새어나오는 시끄러운 잡념에 파묻힐 때에도 몸과 정신을 혹사시키면 그럭저럭 떠오르지 않는 점이 좋았다.
넋은 흰 종이 위에 쓰인 검은 글귀들 사이로 함께 흘러들어가는 듯 할 때 즈음의 육신은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어느 아무개가 적어놓았을 비록을 정리하고 훑어읽고 처리하는 단순담백한 순간을 반복하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보면 기울어져가는 가세도, 바닥을 드러내보인 잔고도, 죽을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는 가족조차도 아주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사람의 말을 할 줄 아는 거북이 조각상, 예기치 못한 사고로 파괴. 사람을 미치게 하는 참나무 가면, 금제소 서편에 금제. 떠올린 그대로 그릴 수 있게 되는 붓, 동위현 살인사건의 진상을 찾기 위해 담당자에게 임시 인계.
한때는, 그의 아내와 딸의 병환이 그리 대단치 않은 것이라고 여기곤 했다. 나날이 늘어나는 아내의 기침과 딸아이의 울음을 짜증스러운 것으로 여기며 호통을 친 날도 있었다. 그는 그날 오랜만에 잔뜩 취해있었고, 그의 아내가 대낮 저잣거리에서 혼절한 것은 그 다음날이었다. 잘못을 뉘우치기에도 너무 이른 시기였다.
한스러운 음악을 스스로 연주하는 가얏고, 현을 끊어 금제소 서편에 금제. 사람을 잡아먹으려 드는 대나무, 무기고에 보관. 사람으로 하여금 신고 싶게 하는 욕망을 피워내는 꽃신, 불태워 파괴.
또 한때는 그들의 병이 삿된 것으로부터 비롯된 저주가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억지를 부려 보전원의 관료들에게 이물의 소동이 아닐지 조사해달라 빌었고, 돌아오는 것은 싸늘한 반응과 징계였다. 붉은 옷을 차려입은 무당들이 문지방을 닳도록 오고갔다. 그들은 하나같이 누름굿과 씻김굿을 해야한다며 재화를 요구했고, 그는 항상 그들이 요구한 것 이상의 돈을 쥐어주었다. 그 짓거리는 남은 돈이 떨어지고 딸이 쓰러져 몸져누울 즈음에야 멈췄다.
사람의 정신을 흐리게 하는 야생화, 약재로 취급하여 보관. 불이 꺼지지 않는 나무토막, 물에 담가서 보관. 목이 잘려도 죽지 않는 닭, 사망이 확인되어 아무개에게 전달.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다 그의 탓이었다. 아무리 현실로부터 눈을 돌려보고 무시해보아도 더 크고 무서운 현실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온 밤을 눈물과 한탄으로 지새워도 돌아오는 것은 없었다. 희망을 바랄수록 더 큰 절망만이 그를 반겨주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가족을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질병과 부상을 고칠 줄 아는 인간, 금제소 서편 옥에 금제—
멍하니 생각에 빠져 비록을 훑어내려보던 그는 '질병과 부상을 고치는' 이라는 대목이 눈에 들어온 순간 퍼뜩 정신을 차렸다. 번개라도 맞은 듯한 충격을 받은 그는 처음부터 다시 비록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괴란(怪亂) 기미(己未) 제(第) 십삼호(十三號)
상(詳) — 충(蟲)을 부려 사람을 홀리며 질병과 부상을 고칠 줄 아는 인간
당(當) — 이금위(異禁衛) 오호(五號) 금위대장(禁衛隊將) 소운(素雲)
결(結) — 이금위 오군(五軍)과의 교전을 통해 체포
현(現) — 비록(秘錄)에 기록 후 금제소에 금제선비가 말한다.
이 이물은 지네, 파리 등 사특한 벌레들을 부려 사람들의 질병과 부상을 낫게 하는 재주가 있는 여인으로, 충청도 먹산의 한 산촌에서 선녀 또는 신령으로 떠받들어지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과정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그 재주만 본다면 능히 만백성을 보살필 수 있을만큼의 잠재성이 있으나 이물의 심성과 행동이 올바르지 아니하여 금제에서 풀려나거든 백성들을 현혹시켜 민생을 도탄에 빠뜨리고 사직의 존립을 크게 위태롭게 할 수 있으므로 각별히 주의해야 할 것이다.
이 이물이 몸담고 있던 산촌에는 세금을 피하고자 도망한 이들, 죄를 짓고서 산골로 숨어든 이들이 여럿 있었다. 금위대장이 말하기를 산촌의 모든 이들은 이물에게 단단히 미혹되어 있었는지 이물의 위치와 상태를 묻자 격정적인 모습을 보였고, 끝내는 이물을 제압하려는 이금위군에게 맞서려는 모습까지 보였다. 결국 큰 교전이 일어났고 많은 이들이 큰 해를 입었다.
금제를 담당하는 이들은 상(上)께서 명하신대로 이물의 재주를 온전히 파악할 수 있도록 여러 보물들을 활용한 연구에 힘써야할 것이며, 그 과정에서 이물이 죽지 않도록 두고 조심해야 할 것이다.
…
사특한 벌레를 부려, 사람의 부상과 질병을 낫게 하는 인간.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의 연속에 그는 잘못 읽은 것은 아닌가 하며 비록을 처음부터 다시 꼼꼼히 읽어보는 것을 수 차례 반복했다. 그는 지금껏 보전원을 들락거리던 수백가지 종류의 이물들을 마주했지만, 이런 류의 이물은 처음 마주하는 것이었다. 아니, 이보다 더 사특하거나 기이한 이물을 보았을지언정 이번만큼 그의 이목을 이끈 것은 처음이었다.
비록의 끝까지 다다른 그는 마음 한켠에서 자그마한 희망의 불씨가 살아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이어서 파도처럼 밀려오는 한 가지 생각에 휩싸였다.
"이 사람을 만나봐야겠다."
* * * *
금제소 서편, 자못 위험한 괴력난신들을 가두어 봉하는 이곳에는 각종 기이한 이물들을 담아 보관하는 금고실, 사술이 적힌 책들을 봉해두는 서고, 삿된 재주를 부리는 이들을 가두는 형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곳에 봉해둔 이물들을 탐하는 이가 나오지 못하도록 지키는 군졸들이 다수 배치되어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지범에게 있어 금제소 서편은 밀린 출납 확인을 명목으로 하루에도 몇차례씩 드나들었던 곳이라 군졸들과 관리들의 의심을 사지 않고 거의 제약 없이 향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서편에 발을 들인 그는 그동안 밀린 출납을 검토하느라 바쁜 체를 하며 이곳저곳을 쏘다녔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형옥에 새로 들어온 이물의 확인을 위한다는 핑계로 입구를 막고 서있는 군졸들에게 양해를 구한 후 불이 붙은 초 하나를 들고서 형옥으로 향했다. 서편의 형옥은 실제와 달리 아주 넓고 고요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부러 죄수들이 서로 대화할 수 없고 밖이 보이지 않도록 하는 구조의 형옥은, 햇빛이 통하지 않아 항상 어둡고 축축했다.
옥에 갇힌 이들은 대개 사술을 다루었거나 반역을 저지르려 시도한 도사들이라는 명목으로 갇혀있었으나, 오랜 시간 보전원에 몸담아 있었던 지범은 이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세간의 이목을 받지 않는 곳에서는 얼마든지 불합리한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것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 이물이 있는 곳은 형옥 중에서도 가장 구석진 곳으로, 바닥에 먹이를 찾는 시궁쥐 몇 마리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지범은 온갖 부적들이 붙은 금줄들을 조심스레 지나와, 옻칠을 한 창살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일렁이는 촛불이 비친 곳에는 여기저기 맞아 엉망이 된 무명옷을 입고 목에 칼을 쓴 사람의 형체가 긴 머리를 흐트러놓고 있었다.
"아까 그리 매질을 해두고서도 아직 성이 덜 차셨나 봅디다?"
순간 고개를 들며 질문을 던지는 여인의 목소리에 지범은 적잖이 놀랐다. 보는 순간 상투에 담지 못할 만큼의 긴 머리카락이라는 생각이 문득 스쳤으나 차마 여인이라는 생각까지는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짐짓 놀라지 않은 체를 하며 사심을 담지 않도록 엄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오늘 이곳에 들어온 이물이더냐?"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 보고서 이물이라 칭하는 것은 대체 어느 나라의 버르장머리 없는 규범이던가요?"
"계집 주제에 입이 험하구나, 이런 곳까지 와놓고서도 아직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느냐?"
"어디 존대를 할 상황이어야 존대를 해주지요. 자칭 나랏님들이라는 것들이 죄없는 사람을 붙잡아 가두고 사람을 짐승 다루는 듯 매타작을 해대니 어디 존대를 해보려고 해도 욕지거리부터 튀어나올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지범은 퍽 당황하였다. 여인의 몸으로 이런 곳에 끌려와 부녀자에게는 채우지 않는다는 칼을 차고 있는 상황이라면 꽤 겁을 먹었을 법한데, 되려 독기를 품은 말을 쏟아내니 아무래도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은 확실해보였다.
"끌려와 매를 맞은 것 치고는 몸에 상처가 없으니 어찌 된 일이냐?"
"허, 그것 때문에 날 잡아온 것 아니었습니까? 있는 상처를 낫게 하는 것을 보고 괴력난신이니 뭐니 하면서 멀쩡한 사람 잡아온 것들이 매를 때리고 왜 상처가 없냐고 묻는 건 무슨 경우인지…"
이 대목에서 지범은 침을 삼켰다. 그러나 본심을 드러내 보이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며 미리 생각해둔 말을 이었다.
"그래, 네가 질환과 부상을 고친다는 재주로 사람들을 홀려 이곳에 갇힌 것이라고 들었다. 허나 본인이나 가족의 생사가 넘나드는 상황에 판단이 흐려진 사람들의 간절한 마음을 이용하고 속여 부정히 재화를 모은 것이 아니냐?"
그 말을 들은 여인은 혀를 차고서, 대답하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렸다. 지범은 그 몸짓에 왠지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이금위군이 직접 적은 비록이 거짓일리는 없으나, 만약 이 여인이 자포자기의 심정에 갇혀 협조해주지 않는다면 모두 허사로 돌아갈 판이었다. 한참의 적막 끝에 조바심을 느낀 그는 거짓 반, 진심 반을 섞은 경솔한 말을 내뱉었다.
"…만약 너가 진정 궁지에 몰린 사람들을 속인 것이 아니라 정말 질병과 부상을 치유하는 재주가 있는 것이라면, 그것으로 네가 부정한 짓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면 내 직접 상부에 아뢰어 네 억울함을 풀어주고 옥에서 꺼내주겠다."
여인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시선은 지범에게로 향해있지 않았다. 그가 여인의 시선을 따라 눈길을 돌리니, 옥 구석에서 다리를 다친 채 몸부림치는 시궁쥐 한 마리가 쓰러져있었다. 찍찍거리는 쥐를 바라보던 여인이 지범을 향해 돌아보고는 살기가 가득한 눈빛을 내비쳤다.
"그 말에 한 치의 거짓도 있어서는 안될겁니다."
말을 마친 여인은 지범이 대꾸할 틈도 없이 흡사 짐승처럼 손목을 물어뜯어 상처를 내고는, 배어나오는 피를 시궁쥐가 있는 방향을 향해 던지듯 뿌렸다. 곧이어 그녀가 피를 뿌린 곳을 향해 팔을 뻗자, 날개 달린 것부터 기어다니는 것까지 온갖 벌레들이 튀어나와 옥 한 켠을 움직이는 거뭇거뭇한 모습으로 가득 채웠다. 여인이 내뱉은 내용 모를 영창과 손짓 한 번에 그 모든 벌레들이 상처입은채 버둥거리는 쥐에게 달려들었다.
상처난 쥐의 다리에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온갖 벌레들이 몰려드는 것을 본 지범은 뒤로 물러나 기겁하였으나, 곧 그의 표정에 멍한 놀라움이 떠올랐다. 쥐에게 달라붙은 벌레들은 제자리서 꼼지락거리더니, 통째로 녹아 상처에 스며들었다. 그렇게 벌레들이 붙고 붙은 곳에는 어느새 새 살이 돋아 있었는데, 털만 조금 비어있다 뿐이지 그 모습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마침내 벌레들이 상처를 온전히 메우고 나자, 쥐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몇 차례 제자리를 돌며 코를 킁킁거리고는 특유의 찍찍 소리를 내며 창살을 가로질러 어디론가 쏜살같이 달려가 사라졌다. 여인은 쥐가 달려간 방향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지범을 향해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어느새 여인의 손목에 생겼던 상처는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져있었다.
"봤지요?"
여인의 조소가 섞인 물음에도 지범은 한동안 답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있었다. 적지 않은 시간동안 보전원 금제소의 직장으로 일하면서도 이러한 기이한 풍경은 본 적이 없었다. 물에서 금을 뽑아대고 돌에서 꽃을 피워내는 신묘한 보물들을 보더라도 신비스러움보다는 삿된 것에 대한 배척감이 먼저 들었던 그였으나, 그 순간만큼은 되려 구름이 물러가고 밝은 빛 한 줄기가 그의 마음에서 떠오르는 듯 싶었다. 여인은 그런 그의 표정을 읽었다.
"이런 힘을 가지고 궁지에 몰린 인간들을 속였다니, 허튼 소리."
"그 능력으로… 사람도 고칠 수 있나?"
"그러니 제가 붙잡혀왔지요. 나는 산 중턱에서 숨어사는 사람들 병이고 상처고 고쳐주고 다니면서 살았어요. 덕분에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지만."
"그럼, 못 고치는 병은 없나? 무슨 병이든 고칠 수 있다는 건가? 암만 심한 병이라도?"
옥의 여인은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얼굴을 마주 볼 필요도 없이 그의 어투 하나하나에서 숨기지 못한 간절함이 배어나왔다.
"죽은 사람은 못 살려요. 가끔 시체를 들쳐업고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내가 죽은 사람도 살려내는 선녀라고 믿었는지, 아니면 믿고 싶었는지… 허여멀건 시체를 들이밀고 제발 고쳐달라고, 구해달라고 손발 모아 싹싹 빌어대는 사람들이 올 때마다 무슨 심정이었는지 알아요?"
죽은 사람은 살리지 못한다, 는 말 한마디가 지범의 뼈에 새겨지는 듯이 다가왔다. 그의 심장이 쿵쿵거리며 뛰는 것이 그 스스로도 느껴졌다. 그 입에서 나온 시체라는 단어에 집에 누워있는 송장같은 몰골의 아내가 떠올라 더욱 그러했다. 지범은 처음과 같지 않은 상기된 어조로 물었다.
"네 이름이 뭐냐."
"연경, 사람들은 그리 불렀답니다."
* * * *
그 후로부터 지범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여러 핑계를 대며 서편 형옥에 있는 연경을 찾아갔다. 일단 희망의 실마리가 나타났으니 안 붙잡을 이유가 없었다. 매일같이 그녀를 찾아간 덕분에 연경 역시 지범에게 마음을 여는 듯 했고,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덕분에 지범은 그녀의 일생과 기이한 능력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것을 들을 수 있었다.
- 하나, 연경은 산등성이 마을에서 부모 없이 자랐다. 배운 것은 없으나 마을에서 잡일을 하며 살다가 능력을 깨우쳐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고 다녔다.
- 둘, 연경은 어째서인지 나이를 먹을수록 벌레들과 소통하고 다루는 법을 알게 되었으며, 점점 벌레들을 자유자재로 다루게 되어 사람들을 낫게 하는 법을 배웠다.
- 셋, 벌레들을 다루기 위해서는 충분한 양의 피가 필요한데, 병에 걸리거나 다친 사람이 위중할수록 더 많은 피가 필요하다.
지범 또한 연경과 이야기를 나누며 그의 직책과 보전원에 대해 알려주었다. 연경은 처음 붙잡혔을 적에 마주한 이금위 군사들에 대하여 자신 말고도 이런 이형의 재주를 쓰는 도사들이나 이물들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서 크게 놀랐다고 하였으며, 세간의 이목이 닿지 않는 곳에 조정의 기관이 있었다는 사실에 더욱 놀랐다고 했다.
연경을 처음 마주했을 때 지범은 연경의 억울함을 풀어주겠다는 말을 장담하는 투로 하였으나, 솔직히 그에게 있어 충분한 자신은 없었다. 아무리 보전원 관리라 할지라도 고작 출납만을 담당할 뿐이고, 이미 앞서 비슷한 요구를 해보았으나 무시당한 바가 있기 때문이었다. 연경이 아무리 억울하고 무고하다 하여도, 조정에서 그 활용 가치를 모를리가 없으니 그가 암만 무죄 석방을 주장한다 한들 괴력난신의 편을 든다는 명목의 중징계와 함께 묵살당할 터였다.
그러니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연경의 힘을 빌어 가족의 병을 치유받을 수 있도록 요청해보는 것인데, 이는 무죄를 주장하는 것보다도 더 어려울 듯 싶었다. 그는 이전에 보전원 관료들에게 징계를 받은 전적도 있었고, 이물을 빌려다가 개인적인 곳에 사용한다는 것을 그들이 허가해줄리 없었다. 이물을 사적인 곳에 쓰려고 한 사람들이 지금껏 적지 않으나 조정의 눈에 띄는 날에는 모조리 옥에 갇히거나 말도 못할 꼴이 되는 것을 그가 직접 목도한 바가 있으니 당연지사였다.
지범은 며칠동안 밤낮으로 금제소와 집을 오가며 고민했다. 몇 안되는 금제소의 벗과 관리들을 찾아가 이물들의 사적인 사용이 허가된 적이 있는지를 돌려물었고, 신비한 재주를 가진 이들이 어떤 조건으로 이금위나 보전원에 속하게 되는지를 알아냈다. 알아낼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고, 그 중에서도 좋은 말은 거의 들을 수 없었다.
상황이 아주 긍정적으로만 흘러간다면 연경이 협조를 약조하고 이금위, 내지는 보전원의 주요 인원이 될 수도 있었다. 그리 된다면 새로운 신분을 얻고서 조건부 자유를 누릴 수도 있을 터였고, 그때 가서 치료를 부탁하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이는 지범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너무 희망적인 가정이었다. 조정의 인간들은 생각 이상으로 탐욕스럽고 잔혹스러운 면이 있었으므로.
이러한 지범의 고민은 어느 장대비가 다시 내리던 날, 보전원에 속해있던 어느 벗과 만났을 때 종지부를 찍었다.
"크흠, 혹 저번에 물었던 이물에 대해서 들은 바가 있는가?"
"그 이물에 대해서는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네. 안 그래도 어르신들께서 그 이물의 처분에 대해 급히 논하고 계시더군."
"어르신들께서 직접 처분을 논하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주상께서 직접 영을 내리셨어. 이물의 재주에 사특한 바가 없지 않으나, 쓰임에 따라 유용한 바가 많으니 인원을 편성하여 이물의 재주에 대해 파악하고 어떻게 써먹을 수 있을지를 실험하고 연구한다고 하더군."
순간 지범은 숨이 턱 막히는 듯 싶었다. 그가 손을 뻗을 수 있는 선을 아득히 넘어선 셈이었다.
"그렇다면, 금제소 관할을 벗어난다는 말인가?"
"그렇게 되겠지. 내 듣기로 연구 뿐 아니라 국문을 겸하여 이물이 저지른 죄를 묻는다고 하였네."
지범은 주변 지면에 부딪치는 빗줄기와도 같이 그의 마음이 시끄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금제된 이물의 죄를 묻다는 말은 대개 한 가지 의미로 통용되었다.
"함부로 꺼내서는 안될 이야기다만… 아무래도 지난번의 그 도사처럼 되지 않을까 싶네. 재주를 시험한답시고 무리한 것을 시키다가 역모를 저지른 죄를 토해내게 만들어 죽였으니."
그 말을 들은 지범의 머리는 빠르고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분명 금제소를 벗어나 보전원으로 들어간다면 그는 연경의 도움을 받기는 커녕 만나기조차 불가능해질 것이고, 이물이라면 무조건 삿된 것이라고 여기며 천대하는 보전원 관료들의 국문이 끝났을 때 연경이 이금위에 속하거나 금제소로 돌아온다는 보장도, 멀쩡히 살아있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철도 아닌 비가 오래도 내리는군… 자네 내 말 듣고 있나?"
지범은 그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생각과 시선은 오직 한 곳에 머물러있었다. 금제소의 명패가 순간 반짝인 듯한 착각을 주었다. 그의 벗의 말마따나 때아닌 비가 세차게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고민을 거듭하던 그는 어느덧 한가지 터무니없는 결론에 이르렀다.
연경을 빼돌려야해.
처마 너머의 수많은 빗방울에 비친 그의 눈은 이전에 없던 열기로 가득차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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