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헌책방의 그늘 속 정밀함 가운데에, 언제나 당신은 있었다.
잔설의 냉기가 오래 읽힌 책의 얇은 쪽을 넘기는 손끝을 무디게 한, 겨울의 마지막 오후는 완만하게 지나간다. 창 건너편에는 호박을 어떻게든 실로 자아서 짜낸 천처럼, 그렇게 유리창을 건너는 것처럼, 매끄러운 햇빛이 비치는 부드러운 시간이 가득하다. 오늘도 만날 수 있을까, 하며 금속 손잡이가 달린 미닫이문을 되도록이면 소리가 나지 않게 열고 들어가 본다. 가게 안은 책 내음과 약간의 먼지 외에, 기척도 인영도 없다. 아무도 없다는 것은, 당신은 또 가장 깊숙한 곳에서 독서를 즐기고 있는 것일까. 달리 응대해야 할 사람이 없다면, 오늘은 대화해줄까. 이렇게 기쁜 것은, 분명 당신과 만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리라.
몇 서가를 지나친다. 책의 숲 깊숙한 곳, 사람의 빛이 타오르는 계산대에서, 당신은 독서에 열중하고 있다. 책은 산뜻한 장정의 「석양」으로, 당신의 새하얀 손에 잘 빛난다. 이윽고 이쪽을 알아차린 당신은 손톱이 짧은 손으로 조심스레 문고본을 덮는다. 말수가 적고 붙임성 없는, 그러나 사려 깊은 당신이 그리 행동함은, 잘난 체 하는 게 아니라면, 당신에게는 진지한 것과 마주 보고자 할 때의 신호이다. 나와 마주 보려는 신호인 것이다. 당신은 평소 책에서 고개를 돌리지 않고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 악의 없는 불손을 싫어하는 인간들은 적지 않다. 그러나 마음에 드는 것과 마주할 때는 매우 정중하고 진지하기 이를 데 없다.
「……어서 와요」
독서용 안경을 벗으면서 나른한 목소리, 중얼거리는 듯한 인사. 그 목소리를 들으며 다행이다, 라는 생각하는 것은 당신의 그 가늘고 창백한 몸이 늘 활기와 생기라는 단어와는 무관해 보여,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당신은 언제나 그곳에 있다지만, 그 존재를 확인하면 이상하게도 안심이 된다. 사흘 만이네요, 라고 말하자 당신은 조용히 웃었다. 마음에 드는 소설을 열어볼 때와 같은 얼굴이었다.
「물도 갈수록 따뜻해지고, 복수초도 피었더라고요」
「매화의 꽃봉오리도 많이 풀렸어요. 이제 곧 봄이죠」
이런 하릴없는 대화를 당신이 허락하기까지 두 달이 걸렸다. 그런 것을 맥락 없이 떠올리고 만다. 과묵함도 눈도 화창한 날씨에 녹아드는 듯, 당신은 봄 이야기를 하면 말이 많아진다. 그것이 너무나도 기뻐,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대화를 나누려고 한다. 거짓말을 잘했더라면, 있지도 않은 일을 당신에게 물어보며 계속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다. 내 서투름 탓에 호기를 놓치고 있다. 따끔하니 심장 안쪽이 아파져 왔다. 가업 이야기, 가족 이야기, 학교 이야기. 기억하고 있는 것은 모두 이야기했다. 대화하는 것은 좋아하지만 잘하지 못한다. 그러나 당신이 들어줬으면 했다.
거의 없던 대화 주제가 떨어져 갈 즈음, 이번엔 당신에게서부터 '상태가 꽤 좋은 황표지1를 얻을 수 있었다', '후타바테이 시메이2의 초판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가게에 아이들이 많이 와서 귀여웠다'라는 주제를 꺼내며 꾸밈없이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면서 호메로스를 읽어본 적 있나요, 라는 질문을 상냥하게 던졌다. 좀처럼 남에게 무언가를 묻지 않는 사람이 내게 그리 질문한 것이다.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물론, 이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공교롭게도 이름밖에 들어본 적이 없는 나로써는 거짓말을 할 수 없어, 지식이 없어 부끄럽네요. 아직이에요,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반응이 두려웠으나, 그 대답은 뜻밖에도 호의적이었다.
"그런가요, 다행이다. 사실은 예약으로 온 책 중에 좋은 번역본이 있어서요, 하지만 심하게 바래버려서 팔리질 않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괜찮다면 받아주겠어요?"
라고 기쁘게 조금 빠른 속도로 물어보았다. "괜찮을까요?" 바라지도 않던 행운에 뺨이 조금 달아올랐다.
"물론이죠. 책도 기뻐할 거에요. 조금 기다려주세요."
그렇게 말하고는 계산대 뒤편의 깊숙한 방으로 들어갔다. 일 분도 안 돼 돌아온 그 손에는 확실히 바랜 색상의 고풍스러운 책과 양손 크기의 신문지 꾸러미가 소중히 들려 있었다. 두 개를 여기요, 라고 건네받았다. 신문지 꾸러미를 가리키며 이건 뭔가요, 라고 묻자 그 사람은 표정을 바꾸지 않고, 그러나 목소리는 짐짓 부드럽게 대답했다.
"형제분이랑 나누어 드세요. 선물 받은 과자류에요. 아무래도 단 건 잘 못 먹어서."
초코렛과 카라멜. 이름밖에 들어보지 못한 것들이 이 세상에는 넘쳐난다.
"이렇게 멋진 것까지 받아버렸네요. 고마워요."
효성옥 백화점의 멋들어진 봉투에 잠긴 그것을 소중하게 들고 가게를 나섰다. 가슴에 약간의 고동과 들뜬 듯한 기쁨을 느끼면서.
"난 벚꽃을 좋아하니까, 분명히 봄에 죽을 거야."
세상에서 제일 상냥한 목소리로 얼마나 잔혹한 말을 하는 것일까, 라고 생각했다. 당신은 언제까지나 살 거예요, 라고 대답하려고 했지만 촌스럽고 멋없는 짓임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그 대신, 그럼 전 해바라기를 좋아하니까 여름에 죽겠네요,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봄에 죽겠다고 한 그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간호하게 하지 말아줘, 라고 말했다.
밖에선 소복소복이 수분을 머금은 무거운 눈이 내리고 있다. 물방울이 맺힌 창밖 너머는 극한(極寒). 지금은 겨울, 모든 것이 잠드는 겨울. 당신이 떠나간다는 봄이 멀찍이서 물밀듯이 다가오는 계절. 당신이 죽는다는 봄은 이 겨울이 끝나고도 대체 몇 번째의 봄이 될지 알 수 없다. 호박빛의 햇살은 두 사람을 데우지 않고 창의 사각으로 잘려 나가 바닥과 먼지를 비추고 있었다.
멀리서 우레가 일고 있다. 벚꽃 봉오리를 적시는 비가 단아하게 속삭이기 시작한다. 이제 곧 완벽한 봄이 이 동네에도 온다. 봄이 되면 무얼 제일 하고 싶나요, 같은 이야기를 당신과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자 당신은 입술을 앙다물고 조금 생각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말을 꺼냈다.
"나는 말하는 걸 싫어하니까…뭐랄까, 그런 화제엔 제대로 대답 못 할 것 같은데."
정적이라는 말을 향수 내음처럼 온몸에 두른 사람. 하지만 가끔씩 보이는 희미한 따스함이 사랑스럽다.
"수다라던가, 이런 건 잘 못 하나요?"
"그래. 그러려던 의도가 아니더라도 상대를 화나게 하고 마니까."
빛이 없는 눈은 단지 그 사람만의 어둠이나 세상에 대한 관망의 표현으로만은 보이지 않았다. 잔잔한 수면, 하늘을 비추는 거울 같은 아름다움을 머금고 괴괴하고 고요하게 잠든 듯한 긴 속눈썹에 지켜지고 있다. 물에 젖은 까마귀의 깃털처럼 윤기 있는 검은색 홍채에 희미한 그림자가 드리워진, 그 반짝임이 이쪽을 향하는 찰나. 내 가슴에 가득 찬 것은 안심과 긴장의 모순, 그리고 아픔을 닮은 무언가였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그것이 사랑임을 알 수 있다.
"봄이 되면… 나는, 꼭 벚꽃을 볼 거야. 벚꽃잎의 색채가 아이가 그린 것보다 훨씬 하얗다는 그 사실을 올해도 확인하고 싶어. 봄기운은 바로 거기까지 차 있을 테니까."
"벚꽃. 당신이 좋아하는 꽃이죠."
미소 짓는 당신에게 미소 지어 보인다. 둘 사이에 무른 침묵이 내리기 시작한다. 당신의 미소는 서투르며, 꽃잎의 촉감을 닮았다. 갈증을 모르겠다. 흠뻑 젖어 부드러운, 우아한 꽃의 미술.
"카지이 모토지로3였던가 사카구치 안고4였던가……벚나무 아래에는 시체가 묻혀있다는, 그런 거 있죠."
"사람의 피를 마신 마성의 아름다움이라는 비유. 확실히 알 것 같은데. 그래도 난 벚꽃에는 불가침의 신비를 느껴. 사람의 손에 닿을 수 없는 꿈, 환상, 요정 같은."
"요정이요?"
"대장부의 낭만주의를 비웃는 거야?"
"아뇨, 아뇨 새로워서."
비와 우레와 빛은 서서히 이 거리에 가까워지고 있다. 창 너머는 어둑하니 가라앉아있고, 가로등은 조용히 켜지기 시작한다. 금의 양등(洋燈)램프가 눈부시게 빛나는 계산대. 두 사람의 그림자가 서가에 뻗어 있었다. 그 그림자가 문득 포개진다.
당신의 새하얀 손이 쭉 뻗쳐진다.
닿는 감촉은 머리에. 그리고 부드럽게 쓰다듬어진다.
"나랑 똑같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리고는 미소가 지어지고, 이윽고 웃음이 된다. 덩달아 웃고 만다. 당신에게서 평온한 인간으로서의 온도를 느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당신은 쓰다듬는 것을 멈추고, 아이처럼 책상에 턱을 괴고는 부드럽게 말했다.
"난 의구는 필요 없어. 인간으로 죽고 싶을 뿐이야."
만일 몸 상태가 나빠지더라도 의구로 대체하면 훨씬 더 오래 살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두려워하는 봄을 이겨내고 더 살아갈 수 있는데, 왜일까.
"왜요?"
"유일한 몸을 인간의 피조물로 대체하는 게 싫어. 모던 보이도 모던 걸도 개나 소나 다 유행이라지만 나는 거기 탑승하고 싶지 않아."
"어째서 싫은 건데요?"
그러자 당신은 조금 생각하는 듯 허공을 응시하더니, 입을 열었다.
"내가 나 이외의 다른 무언가가 되어버릴 것 같아서."
나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싫어요. 당신이 당신 이외의 무언가가 되어버리는 건."
책의 숲에 갇혀버린 둘뿐. 은밀한 대화. 봄을 알리는 뇌우 속에서, 당신의 손이 닿은 흔적만이 따스했다.
"잘 있어요."
당신은 얼마나 나쁜 사람이었던가.
당신을 애타게 사랑했더니 봄은 어느새 눈 깜짝할 새에 끝나버리고 말았다. 맑은 햇살은 거리에 찬란하게 내리쬐고, 벚꽃의 어린잎은 번화가의 보도에 인엽석 그림자를 드리운다. 오후 세 시. 그림처럼 한가롭지만 하품은 나오지 않는다. 졸음도 오지 않는다. 몸속이 그대로 고드름으로 바뀌어버린 듯 싸늘하게 식어 있다. 그 봄날의 천둥이 치던 저녁에 나의 모든 내용물을 내려놓고 온 것만 같다. 눈앞의 광경을, 여름으로 변해가는 거리의 내음을, 작은 새의 지저귀는 소리와 지절거리는 소리를 현재 내 앞에 자리한 것으로 인식할 수 없다. 한 장의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바라보는 그 아득함.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꿈처럼 희미하고 몽롱하다.
그때로부터 때때로, 일상 속 아무것도 아닌 순간에, 감미로운 벚꽃 향기가 손목을 잡고는 아쉬운 듯 귓전에 이름을 부르는 듯한 묘한 감각에 휩싸인다. 작게 사람의 온기를 품은 듯한 그것이 정담인지 뭔지 부끄러이 귓전을 스치고는 그 정체를 제대로 되짚어보기도 전에 떠나가 버리고 만다. 미소 짓는 듯한, 햇살 같은 목소리가 홀연히 비쳐 보여 간다. 그럴 때마다 심장은 저 부드러운 전격이 스쳐 지나가는 듯한 감각을 떠올리며 맥박을 흐트러뜨리곤 한다. 모든 세포가 꽃을 흩날리는 바람에 날리듯 두런거린다.
생각해보면 그 유령은 당신일 게다. 당신을 데려가 버린 벚꽃의 유령일 것이다.
당신과, 당신을 유괴한 꽃을 용서하진 않을 것이다.
봄에 죽으리라고, 먼 곳을 보듯 행복한 표정으로 말한 당신.
그러니 꽃의 요정에게 이용당하고 마는 거라고요.
당신으로부터 맡겨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유품. 와이셔츠의 왼쪽 가슴 주머니에 흰 헝겊에 싸서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먹어 치워버릴까도 생각했지만, 단념하고 말았다.
당신의 울대뼈를 쥐고, 여름이 되면 해바라기가 피는 밭에 서 있을게.
사랑의 고동을 가슴에 확실히 느끼고.
모든 것은 당신의 뜻대로.
숨 막힐 정도의 열이 삼켜버릴 듯한 여름이 온다. 빛은 환상적인 불안함으로 세상을 선명한 푸른색으로 불태우고 있었다. 여름에 타오르며 터벅터벅 걷는 도쿄는 혼잡과 소란으로 의식이 전부 멀어질 것만 같았다. 모던 보이, 모던 걸들의 의구가 내는 작동음, 어린 아이들이 "잃어버린 손발을 의구에 의지하고……"라며 노래하는 소리. 뒤엉키는 음향 모두가 불가사의한 일체감을 이루고 있었다. 그렇게 걸어, 도시의 계산적인 녹색, 키가 큰 해바라기와 스쳐 지나간다.
걸음이 향한 곳은 광대한 전뇌 도시에서도 유달리 시선을 끄는 곳이었다. 헌병 본부. 삼엄한 경비로 지켜지고 있는 그곳은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이었다. 입구에서 계급장을 제시하자 군복을 입은 자동인형이 안으로 들여보내 준다. 그대로 공기 조절이 잘 되어가는 시설 속에서 목적한 부실로 발걸음을 옮긴다.
목적한 부실, 회의실 일영사호. 그곳에 내 보고를 기다리는 이가 있다. 네 번 노크 후 성명을 대며 무거운 문을 연다. 내부에선 한 남자가 여송연을 피우며 기다리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제시간에 왔군, 미카게."
그는 여송연을 피우는 손을 잠시 내려두고는 이쪽을 한번 보고,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이 다시 여송연을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풍채 좋은 이 남자에게서는 담배와 냉철함의 냄새가 난다.
"보고하겠습니다."
다가가서 한번 고개를 숙이고, 서류 뭉치를 여송연을 피우고 있는 사람 타카라다 소위에게 건넨다. 소위는 턱으로 거기 놓지, 라고 지시하였으므로 그곳에 정중히 놓았다.
"그 남자, 스에히로 하루이치는 전혀 중요치 않았습니다. 단지 문학청년일 뿐이었습니다. 지금부터 접촉 기록을 투영하겠습니다."
그리 말하고는 부실에 마련된 영상 투영기를 작동시키고, 왼팔 팔꿈치의 인공 피부로 덮인 구체 관절을 빼냈다. 쿵, 하고 혈색을 표현하여 도색한 왼팔이 책상 위에 놓인다. 그렇게 오른손만으로 영상 투영기를 왼쪽 팔꿈치에서 혈관처럼 늘어뜨린 붉은 끈 모양의 접속부커넥터와 연결한다. 하얀 영사막스크린에, 윤기가 나고 혈관이 도드라진 안구형 촬영기카메라로 포착한 그 스에히로 하루이치 상냥한 그 사람과의 추억이, 기록이 흘러나온다.
비추어지는 것은, 아찔하다.
겨울에 당신을 만난 이후부터 봄에 당신이 벚꽃으로 지기까지의 시간.
고요한 당신의 말은 떨어져 가는 꽃처럼 사락사락, 담담하고, 사랑스럽다.
당신의 몸짓은. 당신의 시선은.
"나한텐 친척이 없어. 내가 죽으면 내 뼈를 맡아줄 수 있겠어?"
청결한 병상에서 들은, 최후의 말은.
영사막이 아닌, 어디 머나먼 곳을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단지 맥박을 뛰는 것 이상의 기능이란 없는 심장 밑바닥이 아픈 기분이었다. 그런 나를 보아서인지, 영상 기록으로 주고받는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타카라다 소위는 여송연을 재떨이에 누르고는 나를 돌아보았다.
"그자에게 연심을 품었나, 네놈."
"아……"
직설적인 질문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내겐 채워진 기억을 바탕으로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기능이 붙어있다. 여기서 연심을 품었습니다, 라고 대답하면 처분이 내려질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거짓말은 할 수가 없었다. 거짓말을 하면, 이 고귀한 감정에 먹칠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기에.
"연심을, 품었습니다. 틀림없이."
굳센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러자 타카라다 소위는 한숨을 내쉬었다.
관찰 대상이 가진 감정의 변동에 민감하도록 만들어진 자동인형. 헌병과 토헤이 간의 협력 아래 다른 자동인형보다 정밀하게 감정이 설정된 개체. 눈에 장치된 영상 기록 장치, 두드러지는 대인 능력. 잠입과 정찰을 위한 비정한 피조물. 냉정하도록 제조된 특별제 감정을 지닌 자동인형. 토헤이사 자동인형, 일영영형 「미카게」. 나는 그 "만들어진 의미"에 반(反)했다.
"성별을 설정하지 않은 것도 『그렇게』 되지 않게끔 실시한 거였다만. 설마 성별 없는 네가 사랑을 하다니……변명이라도 있나?"
조사 대상에게 정을 베풀지 않도록, 정을 품지 않도록. 연심을 품지 않아야 하기에 처음부터 성별을 제거한 것이 「미카게」의 특징이다. 그 특징에 반대되는 행동을 했다는 것은 불량품으로서의 처분을 피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사를 지닌 사람으로서 느낀 걸, 마지막으로 말해보겠다는 생각이었다.
"……어쩌면, 무성의 사랑이란 것도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함이 예찬되는 이 신성한 세상에서 네놈은 무슨 말을 지껄이는 게냐. 생식 본능도 없는 주제에 사랑을 논하는 거냐?"
타카라다 소위는 몹시 놀란 듯, 분노에 차 거무스름한 표정을 하고 날 노려보았다.
나는 단지 느낌 가는 대로 말을 던진다. 인간그 사람처럼.
"새로운 사랑, 입니다. 우애, 성애, 가족애. 이 중 어느 틀에도 속하지 않은 사랑이 있다면, 제가 그에게 품은 사랑은 분명 그러할 겁니다."
네놈은 상상의 범주를 능가할 정도의 불량품, 아니, 민감한 개체였구나, 하고 타카라다 소위는 비웃었다. 토헤이에 연락하면 차세대 자동인형 연구에 이용할 수 있을 테니 다들 기뻐하겠지, 라고.
"네놈은 이 이상의 활동은 부적합하니, 분명 해체 명령이 내려질 거다."
"알겠습니다."
왼팔을 다시 착용하고, 자동인형을 관리하는 창고로 끌려간다. 어스레하고 바람 한 점 없는, 사람의 온기가 깃들지 않는 쓸쓸한 장소다. 그 가장 깊숙한 곳을 지나가면, 「토헤이사 자동인형 일영영형 『미카게』」라고 적힌 나무 궤짝이 있다. 하긴 처음으로 눈을 뜬 장소는 여기였지, 라고 아픔과 같은 그리움을 느낀다. 스스로 관과도 같은 상자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전원이 꺼지는 찰나.
오늘 지나쳐 간 해바라기와 벚꽃이 뇌리를 기억 장치를 뛰어다녔다.
나의 임종しき, 시키과 사계しき, 시키의 꽃. 아아, 사랑했어요. 당신은 멋진 사람이었으니까, 틀림없이 피안(彼岸)에서도 행복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