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P-471-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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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 기록정보보안행정처(RAISA) 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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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SA 이사관 마리아 존스


일련번호: SCP-471-KO

등급: 비격리(Uncontained)


특수 격리 절차

SCP-471-KO가 북한 영토 내에 존재하는 관계로 직접적인 격리는 불가능하다. SCP-471-KO가 언급되거나 등장하는 자료는 모두 제3땅굴 프로토콜1에 따라 적절한 수정을 거쳐야 한다.

설명

SCP-471-KO는 황해남도의 행정 구역인 과일군으로, 행정 구역 전체가 복합적인 변칙성의 영향을 받고 있다.2 적어도 1995년부터 SCP-471-KO는 매년 일정량 이상의 과일을 생산하고 있다. 대상이 생산하는 식량3의 양은 서류상 북한 내에서는 두드러지게 많은 편이지만 비변칙적 현대 농법에 비해서는 적은 양이다. 그러나 여러 정황상 SCP-471-KO에서 이보다 더 많은 양의 과일이 생산될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 SCP-471-KO의 과일 생산량은 병충해를 비롯한 외부 요인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일례로 1995년부터 북한은 기상 이변과 산림 파괴로 인해 대규모의 홍수를 여러 번 겪었으나 SCP-471-KO의 과일 생산량에는 변함이 없었다.

SCP-471-KO를 오가는 교통편은 대상이 생산한 과일을 싣고 나오는 화물차가 전부다. 이외의 인구 이동은 극히 일부의 경우를 제외하면 전무하다. 다만 이는 현재 시점 기준이며 90년대에는 SCP-471-KO로의 인구 이동이 일부 있었다.

현재 SCP-471-KO는 인간이 거주 혹은 진입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내력

김일성의 명령으로 행정구역명이 직접 변경된 곳이기 때문에, 과일군의 과일 생산량 증대는 초상, 비초상 분야를 막론하고 북한 관료층의 주요 관심사였다. 1991년 재단이 북한 지역에서 완전히 철수하기 전까지 수집한 자료에 따르면 북한의 식량사정이 서서히 악화됨에 따라 이상교화국을 비롯한 북한 대초상기관에서는 농업 생산량 증대를 위해 변칙 개체를 이용하려는 노력을 계속해왔다. 과일군은 이러한 시도의 최전선에 있었던 구역으로, 북한의 식량 사정이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던 때도 정상성 유지기관의 눈을 피해 여러 변칙적 농법이 적용되어 온 것으로 추정된다.

과일군에서 변칙적 재해가 발생해 현재의 SCP-471-KO가 된 것은 대략 1995년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는 흔히 "고난의 행군"으로 알려진, 북한의 식량 사정이 심각하게 악화된 시기다. 그러나 이때는 북한이 재단을 몰아내고 자칭 "초상 주권"을 확립했다는 시기이기도 하며, 때문에 당시 북한 대초상기관은 자신들이 거둔 "승리"를 자축하며 사회 각 분야에 변칙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시도를 이어갔다. 즉 이 시기에 과일군 전역에 급진적인 변칙적 농법이 도입된 것으로 보인다.

재단이 북한 지역에서 완전히 철수한 후 확보 가능한 SCP-471-KO에 대한 정보는 몇 건의 위성사진과 탈북자의 증언이 전부다. 여러 증언을 종합했을 때 1993년~1995년 사이 시에 SCP-471-KO를 향한 상당 규모의 인구 이동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증언에 의하면 본래 과일군은 '수령동지의 뜻을 자율적으로 맹종하여 과수와 토지가 저절로 과업을 수행하는', 즉 인간 없이 저절로 식량이 생산되는 시스템을 구축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증언들은 공통적으로 '동자승 모양의 과일'을 언급했고, 당시 촬영된 위성사진에서도 몇몇 과일이 저장 시설 외의 장소에 흩뿌려진 모습을 보인다.4

1994년부터 SCP-471-KO에 관한 정보는 혼란스러운 양상을 띠기 시작한다. 몇몇 증언은 과일군을 과일이나마 풍족하게 먹을 수 있는 살기 좋은 장소로 묘사한 반면, 위성 사진과 나머지 증언은 희생 의식을 위시한 주술적 행위와 인민군의 무력 개입 시도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인민군의 개입 시도가 실제로 있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이후 북한이 파멸적인 식량난에 의해 체제 붕괴 직전의 상황까지 몰린 것을 감안하면, SCP-471-KO에 적용된 변칙적 농법이 상정 외의 결과를 불러왔음은 거의 확실해 보인다. 이에 더해 앞서 언급된 인간형 과일 개체의 존재까지 고려한다면 인민군의 무력 개입 또한 설명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러한 충돌은 우발적, 산발적인 해프닝에 그쳤고, 이후 1998년에 완전히 소강 상태에 접어든다.

이러한 관계 형성에 변칙성이 개입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5 그러나 확실한 점은 이 시기를 전후하여 SCP-471-KO-1에 자체적인 장막 규약이 적용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된 것처럼 SCP-471-KO가 북한 정권의 이익에 맞게 행동하도록 개조되었다면, 이 행동은 대상이 자신의 변칙성이 노출되는 것을 북한 정권에의 위협으로 간주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시점에서 위성 사진의 열화, 혹은 변칙적 요소의 누락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북한 지도층을 제외한 외부와의 인적 교류 또한 이 시점을 끝으로 완전히 끊기게 된다.

SCP-471-KO에 대한 탈북자의 증언은 1998년이 마지막인데, 해당 인원은 '땡중들이 꽃제비들이 보는 앞에서 산처럼 쌓인 사과에 기름을 붓고 태웠다'라고 증언했다. 해당 시점까지 SCP-471-KO에 대한 탈북자들의 증언은 꾸준히 감소하다가 앞선 내용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사라진다. 이러한 경향은 위성 사진과 마찬가지의 경우로 SCP-471-KO가 발현한 항밈성의 한 갈래일 수도, 혹은 재단이 파악하지 못한 세계 오컬트 연합의 활동으로 정보 유출이 차단된 결과일 수도 있다.6

SCP-471-KO로 이주한 민간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95년 시점에서 SCP-471-KO의 자급자족 시스템이 완성되었다고 가정한다면 SCP-471-KO로 이주한 민간인들이 적절한 지역 사회 구성원이 되었을 개연성은 낮다. 위성 사진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던 시점에서도 SCP-471-KO에서 관측되는 유동 인구는 유입량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낮았다.

91년 이후 북한 최고 지도자가 SCP-471-KO를 방문하거나 과일공항에서 미사일을 발사한 사례가 수 차례 있어 왔다. 해당 방문에서 나타난 SCP-471-KO의 모습은 모두 북한의 다른 지역과 큰 차이가 없는 모습이었다. 다만 주목할 점은 분석 결과 이 사진과 영상들에서 모두 아날로그 방식으로 사진을 오려붙여 합성한 흔적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디지털 사진이 보편화된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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