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
SCP-1002-KO - 검 맺힌 한Swordborne Grudge
저자: ProfoundAbyss
SCP-1000-KO 경연 투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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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파도가 치는 백사장에서
한 자루 검과 함께 눈을 떴다
내가 그토록 미워한 검이건만, 내가 그토록 무서워한 검이건만
나 말고는 아무도 없었기에 내가 그 검을 들었다
검을 든 내 손은 희고, 내 발걸음은 가벼웠다
검으로 다른 검을 치고, 방패를 깨뜨릴 차례였다
그런데 또 우스운 것은, 검은 사람을 베기 위해 있는 것인데
나는 왜 사람을 베지 않고 나무나 쇠를 치러 가는가
알 게 무어냐
어차피 이건 내 검도 아닌 것을
아니 애초에 이건 검도 아닌 것을
일련번호: SCP-1002-KO
등급: 히에말(Hiemal)
특수 격리 절차: 최초의 SCP-1002-KO가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기원전 27세기 이후로 총 몇 자루의 SCP-1002-KO 개체가 제작되었는지, 또 2023/5/1 현재 기준 총 몇 자루가 현존한 상태인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전무하다. 따라서 현행 SCP-1002-KO 격리 절차는 현존하는 SCP-1002-KO 개체들을 전부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O5 평의회 결의 제23-1011호에 의거, SCP-1002-KO의 소유자들 중 재단에 우호적인 이들과의 협력을 통해 SCP-1002-KO가 관여된 2종 고위협 사태의 발생을 사전에 차단하거나 이미 발생한 2종 고위협 사태를 조기 진압하는 데에 중점이 맞춰져 있다.
SCP 재단 한국사령부에는 2종 고위협 사태의 발생이 임박했거나, 또는 이미 발생한 것이 분명해질 경우 제01K기지의 주관 하에 검선劍仙 규약을 발동, SCP 재단 한국사령부 예하 주요 보안시설의 가용 자원을 임의로 징발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다. 현재 기준 한국사령부 내에서 검선 규약의 발동 및 실행 권한을 가진 인원은 한국사령부 최선임 인원인 노래마인 관리이사관, 또는 노래마인 관리이사관 부재시 이강수 제21K기지 이사관이다. 현행 격리 절차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5등급 보안 인가, 또는 1002-KO 보안 인가 소지자에게만 공개되어 있다.
설명: SCP-1002-KO는 주로 철이나 청동 등의 금속 물질로 만들어졌으며 길고 날카로운 형상을 한, 일반적으로 '검劍'이라 불리는 무기들 중 일부 개체를 지칭한다. SCP-1002-KO의 형태는 그것이 제작된 시대와 문화적 환경에 따라 다르지만, 비변칙적 검과 SCP-1002-KO를 구분할 수 있는 외적인 특징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재단이 수집한 고대 사료에 따르면 SCP-1002-KO는 대략 기원전 27세기 경 현재의 중국 황허강 유역에서 순전히 인간의 사념, 그 중에서도 안타까움이나 절망감, 분노 등 특정한 부정적 감정들의 혼합체를 봉인하기 위한 목적으로 처음 제작되었다.
SCP-1002-KO의 제작법은 긴 시간을 거치면서 사실상 실전되었으며, 아직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장인들이 존재는 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나 재단에 의해 그러한 기술을 가진 개인 혹은 집단이 발견된 사례는 없다. 마찬가지로 어떤 절차나 의식을 거쳐 SCP-1002-KO 개체가 한 개인에게 귀속되는 것인지, 어떻게 SCP-1002-KO 개체가 그 소유자의 사념을 추출하여 그 안에 수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가 없다.
SCP-1002-KO 및 그 소유자에 대하여 현재까지 알려진 사실은 다음과 같다.
- 일단 한 인간이 SCP-1002-KO 개체를 정식으로 소유하게 되면, SCP-1002-KO의 소유자는 더 이상 나이를 먹지 않는다. 청소년의 경우 성장이 멈추고, 성인의 경우 늙지 않는다. 따라서 SCP-1002-KO를 계속 보유하고 있는 한, 해당 소유자는 노화로 자연사하지 않는다.1
- SCP-1002-KO 개체에는 자의식이 없으나 소유자의 감정, 의지, 사고와 공명하는 성질이 있다. 이러한 공명은 주로 SCP-1002-KO 개체의 변성으로 이어지며, 때문에 민간에서 제작한 검과는 달리 SCP-1002-KO는 때와 상황에 따라 그 강도와 내구성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 SCP-1002-KO는 파괴될 수 있으며, 주된 원인은 여러 차례의 충격으로 인한 금속 부분의 피로도 누적이다. SCP-1002-KO 개체가 파괴되었을 경우 해당 개체의 소유자는 다시 나이를 먹기 시작한다.
- SCP-1002-KO는 부정적인 사념 그 자체를 추출해 저장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매우 특정하고 극단적인 스트레스 상황에 놓였을 때 순간적으로 분출하는 감정을 포집해 그 안에 저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SCP-1002-KO 개체가 자신의 사념을 흡수한 이후에도 해당 개체의 소유자는 계속해서 SCP-1002-KO가 추출한 감정을 경험할 수 있다.
SCP-1002-KO의 존재를 언급한 고대 사료들에 따르면, SCP-1002-KO 소유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SCP-1002-KO를 파괴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여겼으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검을 이용한 결투나 전쟁에 능숙해지고 어떤 경우에는 검을 이용한 초상적 무술을 익히기도 하였다.
SCP-1002-KO와 일반적인 비변칙 검을 서로 구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고, SCP-1002-KO의 소유자들 중 대부분이 눈에 띄지 않는 삶을 선호하였기 때문에 재단을 비롯한 현대의 주요 초상기관들은 2022년 SCP-1002-KO가 연관된 2종 고위협 사태 발생 이전까지 SCP-1002-KO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2023년 사태가 종료되고 난 이후에야 SCP-1002-KO 관련 정보 다수가 재단의 손에 들어왔고, 이를 바탕으로 O5 평의회가 결의한 내용에 따라 SCP-1002-KO의 현행 격리절차가 수립되었다.
주의: O5 평의회 결의 제23-1011호에 의거 아래 기록물은 2023/2/11부로 5등급 기밀보안자료로 지정되었습니다. 5등급 보안 인가 또는 1002-KO 보안 인가를 소지하고 있는 인원만이 해당 기록물을 열람할 수 있습니다.
열람 시도 감지, 보안 인가 확인 중……
1002-KO 보안 인가 확인 완료, 2022~2023 재단 한국사령부 2종 고위협 사태 보고서를 불러옵니다.
2022~2023 SCP 재단 한국사령부 2종 고위협 사태
사건 번호 1002KO-A
2022년 12월, 사건 기록 145K-22-478: 2022/12/30 제145K기지 이사관보인 정하연 박사가 예하 관측소 현장지도 중 SCP-1002-KO를 무기로 사용하는 정체불명의 남녀 5명의 습격을 받았다. 호위 인력들은 기습으로 인해 빠르게 대처하지 못하고 습격 직후 제압당했다. 습격자들은 정하연 박사를 붙잡은 다음 한 명씩 돌아가면서 그녀를 찔렀다. 정하연 박사가 입은 총 열여섯 차례의 자상은 모두 급소에서 벗어나 있었으며, 정하연 박사는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다가 습격 30분 뒤 자상으로 인한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호위 인력들 역시 같은 방식으로 목숨을 잃었다.
상황을 전달받은 윤도하 이사관은 다음 날인 2022/12/31 기지 경계태세를 A+급으로 상향하고 습격자들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해 기동특무부대 람다-7 "청소부"를 습격 장소로 파견했다. 파견된 람다-7 요원들은 1시간 뒤 연락이 두절되었다.
2023/1/1 03시 경에 제145K기지는 SCP-1002-KO로 무장한 30명 규모의 적에게 공격받았다. 공격을 방어하는 과정에서 제145K기지 소속의 보안대원 및 현장 인력들은 몰살당했다. 제145K기지에서 대피한 이사관과 핵심 인원들, 그리고 다른 비전투 인력들은 대부분 도주 과정에서 습격자들에게 붙잡혔고, 정하연 박사와 마찬가지로 SCP-1002-KO가 이용된 길고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살해당했다.
2023/1/1 08:45부로 점거당한 제145K기지의 이사관 단말기로부터 음성 메시지 하나가 한국사령부에 전송되었다.
새해의 첫 날이 밝았다. 재단이 이 땅에서 경험하는 마지막 해가 될 것이다.
이 땅의 위정자들이 자기 목에 목걸이를 걸고 줄을 재단에 넘겨준 바로 그 날부터, 재단은 이 땅의 자유로운 사람들을 억압하고, 죽이고, 고문하고, 착취했다.
신음소리가 천지를 진동시키고 흐르는 피가 강물을 막았는데도, 재단은 눈을 감고 귀를 막으며 오직 자신들이 그토록 믿고 떠받드는 여섯 글자의 결의 아래 사악한 짓을 멈추지 않았다.
재단의 그림자 아래서 희생자들은 피눈물을 흘렸고, 이를 갈았고, 무엇보다 복수를 갈망하였으나, 그들에게는 무기가 없었고 무엇보다 적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어디 있는지 안다. 그래서 내가 그들에게 검을 주었다.
따라서 이 땅에서 재단의 이름 아래 고통 당한 모든 사람들의 이름에 대고 나는 이 자리에서 맹세한다.
첫째, 재단 한국사령부의 제일 높은 위치에 앉은 자부터 제일 미천한 하수인의 역할을 맡은 자까지, 재단의 이름 아래 있는 자들은 모두 죽을 것이다.
둘째, 그들은 쉽게 죽지 못할 것이며, 그들의 손에 고통받은 자들의 영혼이 만족할 때까지 고통과 능욕을 받은 다음에야 죽게 될 것이다.
셋째, 그들에 대해 좋게 말하는 자들, 그들의 고통을 동정하는 자들, 그들의 시체를 보지 않으려고 하는 자들,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자들도 마찬가지로 고통받은 뒤 죽을 것이다.
이 맹세는 세상이 지옥불 속에 떨어지고 마지막 티끌 하나까지 잿더미가 되기 전에는 철회되지 않으리라.
2023/1/1, 재단 내부 메시지 기록:
발신인: 노래마인, SCP 재단 한국사령부
수신인: 이강수 이사관 등 72명
본 메시지를 수신한 핵심 인원 전원은 모든 일정을 중지하고 근무지로 복귀할 것.
핵심만 말하겠습니다.
제145K기지가 당했습니다. 근무하던 인원들은 극소수만이 생존했습니다.
정보를 취합한 결과, 사령부는 2종 고위협 사태가 임박했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지는 다들 알고 계실 테죠.
신년 행사든 뭐든 알 바 아닙니다. 당장 여러분이 근무하던 보안 시설로 복귀하십시오.
2023/1/2, 한국사령부 주요지휘관 회의록 중 일부 발췌:
시간: 2023/1/2, 15:35~15:59
장소: 제01K기지 관리이사관실 및 각 보안시설 이사관실2
참석 인원: 한국사령부 관리이사관 노래마인, 제21K기지 이사관 이강수, 제04K기지 이사관 강윤상, 제09K기지 이사관 연소하, 제12K기지 이사관 안익대, 제13K기지 이사관 설세명, 제37K기지 이사관 이태진, 제45K기지 이사관 영설지, 제64K기지 이사관 선우아난
노래마인: 그래서 이 메시지를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면 되겠습니까?
강윤상 이사관: 받아들이고 말고가 있습니까? 이건 명백한 선전포고입니다.
노래마인: 당연히 선전포고겠죠. 문제는 주체가 누구냐는 겁니다. 지금으로서는 습격자들 개인의 정체도, 집단으로서의 정체도, 그들이 대체 어떻게 검3 을 든 사람 서른 명만 데리고 한국사령부의 핵심 시설 중 하나를 회생 불가능 상태로 만들었는지도 모두 불명입니다.
선우아난 이사관: [헛기침] 그 점에 있어서는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노래마인: 말씀하세요.
선우아난 이사관: 저희 제64K기지에서 파견한 인력들이 상황 종료 약 3시간 뒤 제145K기지에서 조사를 수행했습니다. 시설은 심각하게 파손되어 있었지만, 시설 내부 폐쇄회로 카메라가 촬영한 영상 중 일부를 복원할 수 있었습니다. 영상에서 얼굴을 확실하게 식별할 수 있었던 16명의 인원들 중 15명이 전부 재단의 요주의 인물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되어 있었습니다.
영설지 이사관: 전부, 그러니까, 재단에 원한이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까?
선우아난 이사관: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7명은 직접적으로 재단의 격리 절차에 의해 정신적 또는 물질적 피해를 입었거나 입고 있었던 사람들이고, 4명은 재단에 적대적인 스탠스를 취하고 있는 GoI 소속 인원들, 그리고 4명은 재단이나 다른 GoI와 직접적 연결은 없지만 반재단적 성향을 공공연히 드러낸 이력이 있었습니다.
연소하 이사관: 아까 총 열여섯 명을 식별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한 명이 비는 것 같은데요.
선우아난 이사관: 맞습니다. 마지막 한 명은 재단 데이터베이스 상에 얼굴이 등록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대략 30대 중반의 나이로 보이는 아시아계 남성으로, 키가 크고 검은 옷차림을 하고 있었습니다. 습격 당시 제일 적극적으로 재단 인원들을 공격하였으며, 다른 이들에게 무언가 말과 몸짓으로 지시를 내리는 것이 여러 차례 식별되었음을 보아 이 사람이 이번 공격의 지도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사령부가 수신한 메시지도 이 사람이 작성한 것 같습니다.
노래마인: 하지만 이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고요.
선우아난 이사관: 맞습니다.
노래마인: 뭐 좋습니다. 일단 확실히 그들이 재단을 미워하는 집단인 건 맞나 보군요. 그러면 두 번째 질문, 어떻게 그들이 숫적, 기술적 열세를 극복하고 재단 보안 인력들을 압도했을까요?
선우아난 이사관: 솔직히 말하면 그들이 숫적으로는 열세가 맞았지만 기술적으로 열세였다고 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영설지 이사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선우아난 이사관: 조사팀의 분석 내용에 따르면, 복원한 영상에서 식별된 습격자들 중 대부분이 초인적 신체능력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아까 말씀드렸던 지도자로 추정되는 인물의 경우, 수십 미터를 도약하거나, 30초 동안 세 층을 오가면서 열두 명을 살해하는 등 물리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모습이 여러 차례 포착되었습니다.
설세명 이사관: 그런데 왜 하필 검일까요? 이번에 사령부가 받았다고 하는 메시지에서도 검을 언급하던데요.
연소하 이사관: 검이 그들의 능력을 증폭시키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어쩌면 아직 우리가 알지 못한 또다른 변칙 존재일지도요.
노래마인: 그 문제는 일단 우리가 그 검에 목이 달아날 염려가 없어진 이후에 신경 쓰도록 하고, 이번 상황에 대한 대응을 논의했으면 합니다. 언젠간 나올 질문 같아서 미리 대답해드리자면, O5 평의회는 이번 사태를 한국사령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외부로부터의 지원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이태진 이사관: 감독관들의 생각이 맞습니다. 저희에게는 이번 사태를 진압하기에 충분한 전력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제 휘하의 가용한 인력들을 이번 사태에 투입하는 것 만으로도-
이강수 이사관: 그걸로는 안 될 겁니다.
[수 초간 침묵]
이태진 이사관: 이강수 이사관, 방금 그 말은-
이강수 이사관: 말 그대로입니다. 지금 한국사령부가 운용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기동특무부대, 보안대원 및 기타 현장 인력들은 다 저마다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해당 인원들이 고위협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자신의 근무지를 이탈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물론 이런 상황을 대비한 예비 자원 확보를 목적으로 제37K기지가 설립된 거지만, 그쪽 인원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이태진 이사관: 이해가 안 됩니다. 상대는 겨우 30명 남짓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강수 이사관: 지금은요.
노래마인: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죠.
이강수 이사관: 제21K기지에서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한반도 전 지역에서 PoI들이 개인적으로 또는 집단을 이루어 호남으로 집결하고 있습니다. 그 지도자라는 자가 누구든, 자기가 사령부에 보낸 메시지를 다른 곳에도 퍼뜨린 모양입니다.
이태진 이사관: 재단에 악감정이 있는 PoI들을 전부 소집하고 있는 거군요.
이강수 이사관: 아마 그렇겠죠. 현재까지 습격자들과 협력할 의도를 분명히 내비친 PoI들 중 호남에 도달한 이들은 확실하게 포착된 수만 80명을 넘겼습니다. 또한 다른 보고에 따르면 그렇게 모인 PoI들에게 습격에 참여했던 이들 중 몇몇이 검을 나누어 주고 일종의 훈련을 시키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제 아시겠죠, 적은 군대를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게 없습니다.
강윤상 이사관: 그런데도 O5 평의회는 지원을 거절했다는 겁니까?
노래마인: 정확히는 지원을 거절한 것이 아니라, 지원의 필요성에 대해 회의적이라는 입장을 내놓았습니다.
강윤상 이사관: 결국 비슷한 의미라는 생각이 듭니다만.
노래마인: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원을 거절했다는 건 그들에게 정말로 우리를 도울 여유가 없음을 뜻합니다. 지원에 대해 회의적이라는 건 말 그대로 그들로부터의 지원이 사태 진압에 절실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의미입니다. O5 평의회의 지원이 절실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입장에서는 차라리 그 메시지에 안도감을 느낄 정도입니다.
이태진 이사관: 결과적으로는 자력 해결이 가능한 문제라고 해도, 일단은 무언가 대응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노래마인: 맞습니다. 우선은 한반도에 위치했거나 이 지역에 이해관계가 있는 GoI들과 접촉, 도울 의사를-
이강수 이사관: 방해해서 죄송하지만, 지금 저희 쪽에서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노래마인: 말씀하세요.
이강수 이사관: 제21K기지 경계에서 재단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되지 않은 인물 한 명이 검을 들고 서 있는 것이 식별되었다는 보고입니다. 지금 영상을 확인 중인데, 제145K기지 습격을 지휘했던 그 인물과는 다른 사람입니다. 그보다 좀 더 나이들어 보이는 인상에, 중키의 다부진 체격을 한 남성이라고 합니다.
강윤상 이사관: 다행이지만 섣불리 단정지을 수는 없겠습니다. 혹시 추가적인 보고는 없습니까?
이강수 이사관: 지금 이사관과의 독대를 요청하고 있다고 합니다.
노래마인: ……흥미롭군요.
이강수 이사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태진 이사관: 속임수일 수 있습니다.
선우아난 이사관: 속임수일 가능성을 고려하더라도, 일단 그 자의 속셈을 들어보고 나서 결정하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지금으로서는 우리의 적들에 대해 알려진 것이 너무 적습니다.
노래마인: 이강수 이사관, 지금 즉시 그 자를 만나보는 게 좋겠습니다. 면담 장소로 지정된 공간의 영상 신호를 이쪽으로 전송해 주십시오. 저는 여기서 다른 이사관들과 함께 참관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강수 이사관: 알겠습니다.
당일 저녁, 제21K기지 면담 기록:
면담자: 이강수 이사관
대상자: PoI-2551-KO4
비고: PoI-2551-KO는 보안 담당관의 다른 지시는 모두 따랐으나, 검을 내려놓으라는 요구는 거절했다. 보안 담당관들은 이강수 이사관의 지시에 따라 일반적인 절차를 건너뛰어 해당 요주의 인물을 강제로 무장해제시키는 대신 정중하게 면담실로 안내했다.면담실 사이에는 만약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90cm 두께의 투명 신소재 벽이 설치되었으며 벽을 가운데에 두고 이강수 이사관과 PoI가 서로 반대편에 앉은 채 면담을 실시했다. 본 면담 내용은 실시간으로 노래마인 관리이사관 및 다른 한국사령부 핵심인원들에게 전달되었다.
[기록 시작]
이강수 이사관: 뜸 들일 생각은 없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원하는 게 뭡니까?
PoI-2551-KO: 당신들에게 절실한 것을 주는 것이 내 바램이오.
이강수 이사관: 우리에게 절실한 것이 뭡니까?
PoI-2551-KO: 생존. 그리고 올바른 일을 할 수 있는 기회.
이강수 이사관: 지금 제게 전향을 권유하는 것이라면, 이 면담실 안에서 하는 말은 하나도 빠짐없이 한국사령부의 귀에도 들어가고 있다는 점을 알려드려야겠습니다.
PoI-2551-KO: 실없는 소리 마시오. 나는 당신들의 적을 당신들보다도 더 두려워하는 사람이니까요.
[PoI가 몸을 앞으로 기울인다.]
PoI-2551-KO: 당신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빠르게 움직여야 하오. 지금 당신들의 적이 꾸미고 있는 일은 하루아침에 계획된 것이 아니오. 이 일은 그가 엄밀히 따지자면 사십 년, 하지만 넓게 보자면 삼천 년 간 준비해 온 아주 주도면밀하고 가차없는 공격이지.
이강수 이사관: '그'가 누굽니까?
PoI-2551-KO: 그것은 알려드릴 수 없겠소이다. 적어도 당신과 나를 가로막고 있는 장벽이 사라지기 전에는 말이오. [신소재 벽을 두들긴다] 비단 이 벽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외다. [이강수 이사관을 가리킨다] 거기, 당신의 마음 속에도 벽이 세워져 있구려. 그대는 두 개의 벽으로 나를 가로막고 있소.
이강수 이사관: 그 두 개의 벽은 제가 재단에서 근무했던 기간 내내 제 목숨을 여러 번 구했습니다.
PoI-2551-KO: 이번에는 의미가 없소, 이사관. 나는 당신을 해칠 의도로 여기 온 것이 아니니 말이오.
이강수 이사관: 증명해 보십시오.
PoI-2551-KO: [한숨을 내쉰다] 좋소. 이걸 보시오.
[PoI가 자신의 옷 주머니에서 이강수 이사관의 인원 보안 키카드를 꺼내든다. 이강수 이사관의 태도에는 변화가 없다.]
PoI-2551-KO: 당신은 면담실에 들어오기 위해 분명 이것을 이용했을 테지요.
[이강수 이사관은 침묵한다.]
PoI-2551-KO: [키카드를 탁자에 내려놓는다] 이게 첫 번째 증거요. 내가 당신을 해칠 마음을 품었다면 당신은 이미 오래 전에 죽었을 거요. 두 번째 증거는……
[PoI가 일어나 자신이 들고 온 검을 검집에서 뽑아 내려놓는다. 청동 재질로 추정되는 그의 구릿빛 검은 부식의 흔적이 없고 광택이 선명하지만, 날의 상태는 매우 불량하다. 칼날의 거의 모든 면이 무뎌져 있고 이가 빠져 있다.]
PoI-2551-KO: 이것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검처럼 보이시오?
이강수 이사관: 그게 답니까?
PoI-2551-KO: 그리고 한을 깨뜨리는 것을 업으로 삼은 사람으로서, 내 검에 한 서린 피를 다시 묻힌다는 건 말이 안 되지요. 이것이 세 번째 증거요. 당신에게는 가장 의심스러운 증거일지 모르나, 내게는 이것이 제일 중요하오.
이강수 이사관: 한이라고?
[이번에는 PoI-2551-KO가 침묵을 지킨다.]
이강수 이사관: 당신이 말한 세 번째 증거, 그것이 지금 발생한 사태와 혹시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습니까?
PoI-2551-KO: [자리에 앉는다] 우선 벽을 치워주시오. 두 개 다.
[이강수 이사관은 잠시 고민하는 듯 하다가 면담실 카메라 중 하나를 향해 무언가 수신호를 보낸다. 곧 기계음과 함께 양측을 분리하고 있던 신소재 벽이 위로 올라가 사라진다.]
이강수 이사관: 다시 여쭙겠습니다. 아까 한을 깨뜨리는 것을 업으로 삼으셨다고 하셨는데, 그 의미를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PoI-2551-KO: 여기서 굳이 그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를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요. 사람의 감정만큼 복잡하고 난해한 것도 없으니 말이오. 당신이 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격렬한 감정은 무엇이든 그대로 삭히면 언젠가 썩어 필경은 하나의 역병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오.
이강수 이사관: 알고 있습니다.
PoI-2551-KO: [고개를 끄덕인다] 까마득히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사람 안에 수만 가지 감정이 있으며 그 감정을 때때로 풀어주지 않는다면 곧 안팎으로 썩어나가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소이다. 하지만 가장 격렬하고 또 깊은 감정들, 예를 들어 애정과 번뇌, 분노와 슬픔 이런 것들은 그런 감정을 담은 장본인이 혼자서 풀기란 참 어렵지요. 그토록 강한 감정들은 원래 다른 사람들과 함께 부대끼며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오.
예를 들어 한 아이가 있다고 해 봅시다. 그의 부모는 전란에 휩쓸려 죽었는데, 그 아이가 자신의 부모를 도륙한 장수의 얼굴을 보고 슬픔과 증오를 제 안에 품은 것이오. 시간이 흘러 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 그는 검을 들고 부모의 원수를 갚으러 장수의 행방을 쫓았소. 그 아이가 장수를 베어 죽이면, 곧 아이의 마음 속에 담겨 있던 증오는 해결이 되는 것이오.
이강수 이사관: 그런 걸로 해결이 되는 겁니까?
PoI-2551-KO: 물론 보통은 그보다 더 복잡하지. 이건 단순한 예시일 뿐이오. 이제 더 나아가 봅시다. 그 아이가 그토록 제 손으로 베어 죽이고 싶었던 장수가, 정작 한참 전에 병을 얻어 무덤 속에 누웠다면?
이강수 이사관: 원한이 해결되지 않은 채 남는다?
PoI-2551-KO: 그렇소. 그때 갈 곳을 잃은 깊은 감정이 아귀가 되어 모든 것을 집어삼키게 되지.
이강수 이사관: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만, 이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과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PoI-2551-KO: 이런 일이 사람의 역사 속에서 얼마나 자주 일어났다고 생각하시오? 수천 년도 전에 옛 성인들은 사람의 감정이 갈 곳을 잃는다는 게 얼마나 큰 문제인지 알고 계셨소. 지금부터 잘 들으시오. 옛 성인들, 심지어 공구孔丘나 맹가孟軻보다 옛 시대의 성인들 중 헌원씨軒轅氏라는 분이 계셨는데, 그분의 백성들은 오랜 전란에 지쳐 있었다오. 예로부터 전쟁만큼 길 잃은 마음을 많이 만들어내는 것이 없지요. 백성들의 고통은 헌원씨의 큰 고민거리였소.
셀 수 없이 많은 날 동안 밤낮으로 고생한 끝에, 헌원씨는 장인들에게 명하여 백성들의 감정을 담을 수 있는 도구를 만들어내었소. 헌원씨의 백성은 그 도구를 받아들었고, 감정의 병은 아주 사라지지는 않았으나 이전처럼 고통스럽지는 않게 되었지요. 대신 대가가 있었소. 도구를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하게 된 백성은 나이를 먹을 수 없었소. 헌원씨는 비록 사람의 감정이 때로 위험하고 고통스러우나, 그 감정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받아내어 다룰 수 있게 되는 것이 곧 나이를 먹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지요.
이강수 이사관: 그 도구, 그것이 검입니까? 왜 하필이면 검이었습니까?
PoI-2551-KO: 여러 의미가 있지요. 첫째는 검이 적을 상하게도 하지만 잘못 다루면 스스로를 다치게 하고 예상치 못한 죽음을 불러올 수 있으니 자신의 감정을 검에 빗대어 보며 잘 다스리라는 뜻이고, 둘째는 말 그대로 검을 휘두르듯이 스스로 쌓인 원한을 휘둘러 그것을 깨뜨리라는 뜻이오.
지금 세상에서 그러하듯이 옛 세상에도 전란이 잦았지요. 그 전란 속에서 검을 받은 헌원씨의 백성들은 저마다 자신의 원한과 분노를 담아서 적의 방패를 치고 투구를 찔렀는데, 아무리 좋은 검이라도 계속해서 뼈와 쇠를 치다 보면 이가 나가듯이 백성들의 원한과 분노도 계속된 살육 속에 지쳐 나가떨어지게 되었소. 그러면 헌원씨가 준 검에도 마찬가지로 피로가 쌓이고, 종국에는 산산조각 나 거기 담긴 한과 함께 땅 속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소.
이강수 이사관: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방금 검을 받은 사람은 성장이 멈춘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PoI-2551-KO: 그렇소.
이강수 이사관: 노화도 마찬가지입니까?
PoI-2551-KO: [웃음] 그렇소.
이강수 이사관: 그렇다면, 예를 들어, 검을 받아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거기에 저장한 다음, 검에 충격을 주는 일 없이 계속해서 안전한 곳에 보관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불로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까?
PoI-2551-KO: 이런 것을 두고 문일지십이라고 하는 것일까, 대단하구려. 그 말대로요. 헌원씨의 검을 그렇게 악용한 사람들이 있었지. 헌원씨는 당연히 분노하였지만 이미 늦었소. 그는 늘 그랬듯이 검을 만드는 법을 만인에게 베풀었기 때문에, 그가 명을 내렸을 때 이미 헌원씨의 검을 똑같이 만들어낼 수 있는 장인들이 들판의 풀과 같았소이다.
어떤 장인들은 헌원씨의 뜻을 받들어 몇 년이 지나던 올바른 마음으로 검을 만들고 한을 품은 이들에게 나누어주었지만, 대개는 나쁜 마음을 품고 억울한 사람들과 화를 내는 사람들을 제 이익에 맞게 써먹을 심산으로 검을 만들어 나누었지요. 악한 장인들은 또한 자신을 위한 검을 한 자루 만들어, 제 스스로 들고 다니며 긴 수명을 누렸소. 지금 당신들의 가장 큰 적이 된 자도 바로 그런 악한 장인들 중 한 사람이올시다.
이강수 이사관: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보니 그 자와 잘 아는 사이이신 듯 합니다만.
PoI-2551-KO: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지. 그 자의 이름은 도철饕餮이라오. 한때 오만하고 잔혹한 짐승이었으나 헌원씨의 발 아래 엎드려 용서를 빌고 사람이 된 자인데, 결국은 짐승의 본성을 크게 바꾸지 못하고 헌원씨의 장인으로서 큰 죄를 여럿 지었소.
이강수 이사관: 그 도철이라고 하는 자가 우리를 목표로 삼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PoI-2551-KO: 헌원씨의 나라에서 쫓겨난 뒤로 도철은 한 맺힌 사람과 분이 풀리지 못한 사람들을 찾아다녔소. 그들에게 다가가 친구인 체를 하고, 자신이 그들이 겪은 고통의 원흉을 알고 있다며 나라나 사람 하나를 찍어 지목한 다음 그들에게 검을 만들어 주고 살육을 벌임으로써 권력을 얻었소. 그러면 또 그들의 손에 억울한 피가 묻게 되고, 또다른 한이 피어나는 것이지. 도철은 그 사이에서 피칠갑을 한 채로, 모든 사람들의 장수인 체 하며 숭앙받는 삶을 살았소.
내가 알기로 그는 이 근방에서 아주 최근까지도 같은 짓을 질리지도 않고 계속해 왔소. 그러다가 당신들을 알게 되었지. 도철은 영악한 자요. 그는 당신들이나 다른 이들이 언젠가는 그를 가두거나 죽이러 오리라는 사실을 깨닫고 겁에 질렸소. 하지만 도철의 머리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지. 당신들을 죽이면 그는 갇히거나 죽지 않아도 된다는 그 사실을.
이강수 이사관: 그래서 재단을?
PoI-2551-KO: 사실 또 도철의 입장에서 그대들은 쉬운 먹잇감이지요. 도철이 말한 것 만큼은 아닐지라도, 당신들은 분명 그 손에 피를 묻혔소. 그것이 정당하든 정당하지 않든 그쪽을 향해 원한을 품은 사람들이 많소이다.
이강수 이사관: 인정하겠습니다만, 의문이 하나 남는군요. 그 오랜 시간 동안 어쨌든 도철도 수많은 싸움을 경험했을 텐데, 어째서 그의 검은 파괴되지 않은 것입니까? 스스로를 위해 검을 여러 자루 만드는 것이 가능합니까?
PoI-2551-KO: 아니오. 검이 깨졌다는 것은 곧 원한의 고리를 끊었다는 뜻이 되니, 한 번 자신의 검을 깨뜨린 사람은 더 이상 새로운 검에 자기 원한을 집어넣을 수 없소. 그럴 이유도 없고. 도철의 비밀은 그의 검법에 있소. 우리는 그것을 일컬어 비타검非打劍이라고 하지요. 말 그대로 검으로 단단한 것을 치지 않는다는 말이오. 도철은 적과 검을 맞대거나, 적의 갑옷이나 방패, 심지어는 뼈조차도 치지 않소. 그의 검은 오직 혈관을 끊고, 폐부를 찔러 들어가며, 상대의 내장을 헤집을 뿐이지요.
이강수 이사관: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PoI-2551-KO: 말하시오.이강수 이사관: 그렇게 오래된 역사를 제 일인 양 생생히 기억하고 계시는 것이 놀라운데, 선생님은 누구십니까?
PoI-2551-KO: 나? 나는 보잘것 없는 사람이오. 옛 글 중 어디에도 내 이름은 적혀 있지 않지. 그래도 내 이름을 알아야 하겠다면, 나를 명하明霞라고 부르시오.
이강수 이사관: 도철과는 어떤 사이이십니까?
PoI-2551-KO: 나는 그와 마찬가지로 헌원씨에게 배운 장인이었소. 순서로 따지자면 그가 나보다 한참 앞서 있었지요. 나는 헌원씨에게 마지막으로 선택받은 사람이었고, 그때는 아직 많이 어리숙할 때였소. [자신의 검을 다시 검집에 넣으며] 이 검은 도철이 처음 변절했을 때 내 손으로 직접 만든 동검이었소.
삼천 년이 지날 동안 나는 계속해서 악한 장인들이 벼린 삿된 검을 쳐서 부수고, 사람들의 원한을 본디 있어야 할 곳으로 돌려보내는 일을 해왔소. 천 자루의 검을 부수고 깨뜨렸지만 나의 검은 도저히 깨지지를 않았소.
이강수 이사관: 그것은 어째서입니까?
PoI-2551-KO: 이 검은…… 이 검에 담긴 나의 한은 참으로 깊소. 헌원씨의 검을 도철이 악한 마음으로 만들었을 때, 내가 그 자리에 있었소. 그가 달군 구리를 내려칠 때 내가 그의 팔을 제지하여야 했는데, 그가 담금질을 할 때 물동이를 엎었어야 했는데, 나는 그러지 않았소. 도철이 벌인 모든 일, 그로 인해 생겨난 그 모든 슬픔과 아픔이 내 한의 원천인가 보오.
[기록 종료]
면담이 종료된 이후, 이강수 이사관은 보안을 위해 한국사령부 및 다른 이사관들과 연락을 끊고 PoI-2551-KO와 논의한 후 SCP-1002-KO의 최초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면담 3일 뒤인 2023/1/5에 노래마인 관리이사관이 이강수 이사관의 초청을 받아 보고서의 초안을 평가할 겸 제21K기지를 방문했다.
2023/1/5, 제21K기지 내부 비밀 기록:
노래마인: 이 명하라고 하는 자, 신뢰할 수 있는 거 맞습니까? 뒷조사는 해 봤겠죠?
이강수 이사관: 물론입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사흘 전 면담 때 그가 저한테 한 거짓말이 두 개 있습니다.
노래마인: 뭔가요?
이강수 이사관: 첫째는 자신을 '사람'으로 지칭한 것, 그리고 둘째는 자기가 유명한 사람이 아니라고 한 것.
노래마인: 그건 어떻게 아셨죠?
이강수 이사관: 음, [보고서를 뒤적거린다] 무속학부에서 보고한 바에 따르면 가장 오래된 시대에 속하는 초상 사료들 중 총 3건에서 명하대선明霞大仙이라는 신적 존재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세 사료 모두 명하대선을 뛰어난 장인이자 전사로 묘사하고 있고, 그가 직접 만든 갈색 동검에 대한 언급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금록異禁錄에도 그와 인상이나 하는 일이 비슷한 신선을 묘사한 대목이 있더군요. 대체 우리 조상들은 그를 어쩌다가 알게 된 건지 의문입니다.
노래마인: 그러니까 그자가 한 거짓말은 그 둘 뿐이다?
이강수 이사관: 예, 나머지는 믿어도 됩니다.
노래마인: 우리 반대편에 있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도철에 대한 이야기도 검증이 된 겁니까?
이강수 이사관: 그 부분은 사실 의외로 난항을 겪었는데, 일단 도철이라는 개체 자체는 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사흉수의 일원으로서 민간에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문제는 도철이 사람이 되어 헌원씨의 밑에서 일한 적이 있다거나, 그를 배신하고 분란을 일으켰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변칙과 비변칙을 막론하고 그 어느 사료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노래마인: 다만?
이강수 이사관: 이건 이번 사태와 관련 없는 사안을 조사하다가 발견한 사실인데,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발생한 모든 종류의 무력분쟁들 중 대략 70%의 사례에서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이 있었습니다.
노래마인: 그게 뭡니까?
이강수 이사관: 학살, 잔혹 행위, 그리고 도를 넘은 보복 등등인데, 일반적인 전쟁범죄와 다른 점은 주동자가 명백하고 그 주동자에 대한 묘사가 모두 일치한다는 점입니다.
노래마인: 키가 크고 검은 옷을 입은 30대 중반의 남성 말씀이십니까?
이강수 이사관: 예, 그리고 그가 등장한 모든 사례에서 해당 인물은 자신의 검을 제외한 다른 무기를 일절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희생자들은 그나 그의 선동에 동조한 사람들에 의해, 아주 느리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았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전쟁 당시 전주 근방에서 규모는 작지만 그 과정의 참혹함 때문에 주목을 받은 학살이 몇 건 있었는데, 그때 검은 코트를 걸친 장교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희생자들을 죽을 때까지 고문했습니다. 한 번에 손가락 하나, 살점 한 조각, 뭐 이런 식이었다는군요.
노래마인: 속이 거북해지는군요. 장교라고 했습니까? 어느 쪽의 장교였습니까, 남한, 아니면 북한?
이강수 이사관: 둘 다였습니다. 전주를 북한군이 점령했을 때는 언론인들과 기업가들을 모아놓고 베어 죽였고, 나중에 다시 국군이 전주를 수복했을 때는 당원과 농촌 지도자들을 모아놓고 똑같이 죽였습니다. 아무도 그의 옷 갈아입는 솜씨에는 주목하지 않았나 보죠.
노래마인: 아니면 보복이 너무 즐거운 나머지 일부러 모른 척 했었거나.
이강수 이사관: 아마 그랬을 겁니다. 어쨌든, 제145K기지 습격의 주체가 도철이라는 명하대선의 주장은 확실한 증거가 없어 입증하기 어렵지만, 명하대선이 말한 행동 방식과 일치하는 위험 인물이 아주 오래 전부터 존재했고 지금 우리를 적대하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노래마인: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 주제로 넘어가죠. 지금 한국사령부가 종합한 첩보에 따르면 이미 호남에 재단을 적대하는 PoI들이 200명 넘게 집결했고, 모두 검, 그러니까 SCP-1000-KO를 소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상황에 대해서 명하대선은 어떻게 하겠답니까?
이강수 이사관: 그쪽도 전면전이 자살행위라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명하대선은 때와 장소를 잘 선택해서 적의 예봉을 꺾은 다음, 기세가 조금이라도 꺾이면 자신감을 잃는 도철의 심리를 이용해 그를 혼란에 빠뜨리는 전략을 제안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제가 작성한 보고서에 나와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제37K기지의 예비 인력들과 갑호-13이 교란 작전을 맡고, 적들에게 그다지 잘 조직된 체계가 없다는 점을 이용해 각 보안 시설이 대응 가능한 수의 적들만 끌어들여 그들을 각개격파하는 계획입니다.
노래마인: 거기서 명하대선이 어떤 역할을 맡게 되는 거죠?
이강수 이사관: 사실 제37K기지는 엄밀히 따지자면 명하대선을 보조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우리와 협력하는 관계라서 공식적으로 인간형 변칙 존재로 지정이 되지 않았다 뿐이지 그 능력과 위험성에 있어서는 적어도 VI급 이상의 변칙 존재를 능가합니다. 거기에 더해 명하대선은 경험도 풍부하고 무엇보다 우리의 적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노래마인: 저는 부대 단위 전투력을 기대했는데, 이야기 들어 보니 그 자 하나 뿐인 것 같군요.
이강수 이사관: 오, 아닙니다. 그는 혼자 올 생각이 없습니다. [보고서의 한 지점을 가리키며] 여기를 보십시오.
노래마인: ……셋?
이강수 이사관: 예, 세 명입니다.
노래마인: 꽤나 희망찬 얼굴을 하고 계시네요.
이강수 이사관: 그냥 검사 세 명이 아니니까요. 명하대선과 그의 직계 제자 두 명입니다. 제자들에 대한 정보는 이금록에 기록된 게 유일합니다만, 또 그만큼 자세합니다.
노래마인: 정말 이걸로 괜찮은 겁니까?
이강수 이사관: 다른 대안이 있으시다면 저는 언제나 들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노래마인: 알겠으니까 그만하십시오. 보고서를 다른 이사관들과 함께 검토하고 싶습니다만, 괜찮으시겠습니까?
이강수 이사관: 물론입니다.
2023/1/7 이강수 이사관은 노래마인 관리이사관을 포함한 한국사령부 주요지휘관 전원의 찬성을 받아 검선 규약을 제정 및 실행했다. 검선 규약의 내용에 따라, 한국사령부 예하 각 보안시설에서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인원 및 자산이 SCP-1002-KO의 격리에 배정되었다. 또한 PoI-2551-KO5와 그의 제자 두 사람은 검선 규약에 의거하여 3등급 보안 인가를 제공받았으며, 각 보안시설의 이사관이 지정한 자원을 임의로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해당 내용이 명하대선에게 전해지고 나서 30분 뒤, 명하대선과 두 제자가 제21K기지에 나타났다. 아래는 재단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된 해당 인물들의 기본적인 정보이다.
검선 규약 핵심인원: 검선-원-2551
이름: 명하
이명: 명하대선6, 금명장군金鳴將軍7, 동화령왕銅火靈王8, 파검객破劍客9
기원전 27세기 경 중국에서 기원한 것으로 추정되는 VII등급 신격 인간형 독립체. 아시아계 중년 남성의 모습을 하고 있다. 고대 사료들에 따르면 17세에 황제 공손헌원黃帝 公孫軒轅의 신하가 되어 최소 200년에서 최대 400년 간 SCP-1002-KO의 제작에 깊이 관여했다. 그 기간에 대해서는 각 사료마다 차이가 있지만, 일단 도철의 배신이 계기가 되어 황제의 영토를 떠나 방랑하는 생활을 시작했다는 데에는 의견이 일치한다.
고대 사료에서 명하대선의 검술을 두고 이야기할 때는 언제나 '신속神速'이라는 단어가 따라붙으며, 속도뿐 아니라 동작의 정밀성과 파괴력에 있어서도 맞수가 없다는 평을 받는다. 그의 유일한 단점으로서 지적된 것은 바로 살의의 부재로, 수많은 전투를 치르고 수만의 적을 제압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검을 오직 SCP-1002-KO를 파괴하는 데 사용할 뿐, 한 차례도 살생을 위해 사용한 적이 없는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27세기부터 지금까지 그는 총 열 명의 제자를 두었으며, 현재는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제자 두 사람이 그와 동행하고 있다. 제자들에 대한 내용은 다음 장을 참조할 것.
그가 보유한 SCP-1002-KO는 전국시대의 비변칙 검과 유사한 유선형 청동검으로, 길이는 60.1cm이고 검의 표면에 '명하자작용검明霞自作用劍'이라는 여섯 글자가 새겨져 있다. 해당 SCP-1002-KO의 보존 상태는 매우 불량하나, 부식의 흔적은 보이지 않으며 다른 SCP-1002-KO 개체들과 비교했을 때 내구성 면에서 월등한 우위를 보였다.
검선 규약 핵심인원: 검선-시-2430
이름: 단영斷影
이명: 단영선녀斷影仙女10, 절혹진군絶惑眞君11
외견상 20대 중반의 흑발흑안 아시아계 여성. 본명은 남모南毛로, 서기 6세기에 신라 서라벌에서 출생했다. 민간에 공개되어 있는 사서들의 영향으로 그녀는 왕의 총애를 받아 수백 명의 청소년들을 지도하고 훈련시키는 역할을 맡았으나, 같은 위치의 다른 여성과 반목한 끝에 술에 취한 상태로 암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그녀는 암살 시도에서 살아남았으나, 암살 시도에 충격을 받아 이름을 버리고 산에 은거했다. 수 년 뒤 명하대선에게 발견되어 SCP-1002-KO를 수여받고 그의 제자가 되었다. 후세 사람들이 추측한 바와 달리, 선인이나 기타 신적 존재가 아닌 변칙 현상에 노출된 인간에 불과하다.
본래 교관의 역할을 맡았던 만큼 검선 규약의 핵심 인물 세 사람들 중 검술의 체계가 제일 잘 잡혀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에서 있었던 여러 전쟁 및 국소적인 무력 분쟁에서 몇몇 집단에게 자신의 검술을 전수해 준 것으로 추정되나, 전수받은 사람들의 능력 부족으로 인해 단영의 검술을 완전히 재현할 수 있었던 자는 전무했다. 현재에도 그녀는 자신의 유일한 사매師妹를 포함해, 소질이 있어 보이는 사람들에게 검술을 가르치고 있다.
그녀의 SCP-1002-KO는 가야 양식의 철제 환두대도이다. 길이는 약 65cm이며 자루머리에 달린 고리 장식에 나뭇잎 문양이 새겨져 있다. 스승의 것과 달리 이가 빠진 부분이나 기타 손상의 흔적은 보이지 않으며, 관리 역시 잘 되어 있어 부식의 징후도 전무하다.
검선 규약 핵심인원: 검선-천-2984
이름: 반아返我
이명: 반아선녀返我仙女12, 포온진군抱溫眞君13
외견상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아시아계 여성. 회색 머리카락과 유난히 흰 피부가 눈에 띄는 편이다. 본명은 불명이지만 서기 12세기에 고려 공주 명학소에서 태어난 것은 분명하다. 어린 시절에 해당 지역에서 발생한 반란에 휩쓸려 부모가 목숨을 잃고 본인도 고려군에 붙잡혀 학대를 당했다. 동사하기 직전에 단영에게 거두어져 살아남았으며, 그 길로 SCP-1002-KO를 수여받고 명하대선의 제자가 되었다. 어린 시절에 겪은 고난으로 인해 약간의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으나 기본적으로 밝고 긍정적인 성격이며, 좋아하는 사람에게 스킨십을 통해 애정을 표현하는 것을 즐기는 듯 하다. 단영과 마찬가지로 후세 사람들에게 선인으로 오인되었으나 실제로는 변칙 현상에 노출된 인간이다.
단영을 자신의 사저師姐로 모시며 그녀에게서 검술 지도를 받고 있지만, 수백 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명하대선이나 단영이 기대하는 경지에는 오르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구사하는 검술의 수준은 일반적인 무사들에 비해 월등히 높으며, 검술에 그녀 특유의 창의성이 더해져 상대가 반아의 다음 동작을 예측하기 어려워하는 묘사가 이금록에 여러 차례 등장한다.
반아가 소유하고 있는 SCP-1002-KO는 고려 양식의 철제 환두대도로, 길이는 약 50cm이다. 빛을 받으면 흰색으로 빛나며, 자루는 옥을 깎아 만들었다. 검의 정비 상태가 다른 두 사람의 SCP-1002-KO에 비해 상대적으로 불량한 편이다. 부식이나 손상은 없으나 검신 여러 군데에 거뭇한 자국이 보이고, 칼자루에도 얼룩진 부분이 눈에 띈다.
명하대선 등 3명의 소집 직후 한국사령부는 SCP-1002-KO의 격리 절차를 실행에 옮겼다. 도철과 그 추종자들이 모여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로 기동특무부대 갑호-13 "헤드헌터"가 파견되어 교란 작전을 수행했다. 명하대선이 예측한 대로 도철은 자신의 무리를 적절하게 통제하는 데 실패하였으며, 계획대로 후퇴하는 갑호-13을 쫓아 대략 10명 정도가 도철의 무리에서 떨어져 나왔다. 2023/1/9 오후에 명하대선과 반아가 익산시 근방에서 떨어져 나온 해당 집단을 요격, 7명을 제압하고 그들이 보유한 SCP-1002-KO를 회수하였다.
나머지 세 명은 남쪽으로 도주하였으나, 도중에 그들을 추적한 단영에게 붙잡혔다. 이 과정에서 적들이 격렬하게 저항하였기 때문에 단영은 비살상 제압을 포기하고 세 사람을 사살했다. 단영은 제64K기지로 이동해 그곳에서 단영을 기다리고 있던 명하대선 및 반아와 합류했다.
2023/1/10, 03:21, 제64K기지 내부 영상 기록
[제64K기지 등대 감시장치에 전망대 난간에 기대어 무진의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반아의 모습이 포착된다. 곧이어 등대 안쪽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반아가 뒤를 돌아본다.]
반아: 아, 단영 언니.
단영: 오늘도 잠이 안 오는 모양이로구나.
반아: 네.
단영: [반아 옆으로 다가온다] 앞으로 할 일이 많을 거야. 정 잠이 오지 않는다면 누워만 있어도 되니까.
반아: [단영의 손을 조심스럽게 맞잡는다] 오늘, 아니지, 어제 다친 데는 없어요?
단영: 난 괜찮아. 너는?
반아: [멋쩍게 웃는다] 저도 괜찮아요.
[두 사람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같이 밤바다를 바라본다.]
단영: 밤 풍경이 예쁘구나.
반아: 더 이상 이런 풍경을 못 보는 사람들도 있을 거에요.
[단영이 반아를 쳐다본다. 반아는 시선을 피한다.]
단영: 딴청 부리지 말고, 하고 싶은 말을 하렴.
반아: 어제 언니랑 싸운 사람들…… 모두 죽었다고 들었어요.
단영: 반아.
반아: 꼭 그렇게 원한을 만들었어야만 하나요?
단영: 너는 늘 그렇게 말하더구나. 반아, 어쩔 수 없어. 우리 검은 작은 한으로 큰 한을 풀어내는 도구야.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한이 쌓이는 걸 원치 않는다면, 다른 사람의 원한을 노려볼 각오가 필요해.
반아: 사부님은 싸우면서도 원한을 쌓지 않잖아요.
단영: 사부님은 사부님이시니까. 나는 아니야. [반아를 노려보며] 너도 아니고.
반아: 그렇지만-
단영: 정 살육전에서 불살을 쫓고 싶다면 마음대로 해. 하지만 지금 실력으로는 그 전에 죽게 될 거야.
반아: 언니, 그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
단영: 너도 내가 하고 싶어하지 않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니? 따라오렴.
[두 사람은 등대 아래로 내려가, 감시 장치의 시야 범위에서 벗어난다.]
[잠시 후 제64K기지 정면 감시 장치가 두 사람을 포착한다. 단영은 SCP-1002-KO14를 오른손에 들고 있다. 반아의 두 손은 비어 있다.]
단영: [검을 검집에서 뽑아든다] 검을 들거라.
반아: 제 방에 두고 나왔어요.
[단영은 대답 없이 검을 겨누고 반아에게 달려든다. 반아의 머리를 노리고 단영의 검이 수평으로 휘둘러지는 순간, 쨍 하는 소리와 함께 반아가 어디선가 나타난 자신의 검을 들어 단영의 공격을 막는다. 단영은 몇 발짝 물러나 다시 검을 겨눈다.]
반아: 단영 언니,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되나요?
단영: 네가 자기 목숨을 위험하게 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의 한을 풀어줄 수 있는지 알아봐야겠다. 준비해.
[두 사람은 서로 멀찍이 떨어져 준비 자세를 취한다. 단영이 신중하게 중단을 겨눈 자세를 취한 반면에 반아는 검을 쥔 오른손을 그냥 아래로 늘어뜨린다.]
단영: 너는 늘 비도非刀로 싸움을 시작하더구나. 그건 검술이 아니야.
[단영이 땅을 박차고 수 미터 거리를 단숨에 좁혀든다. 반아는 뒤로 물러나며 첫 번째 공격을 피한다. 단영은 개의치 않고 계속 발을 움직이며 반아를 밀어붙인다. 반아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단영: 반아, 움직여! 저항해! 아무것도 안 하다 죽을 생각이야?
[반아가 공중에서 몸을 돌려 찔러오는 단영의 검을 회피함과 동시에 단영을 노리고 검을 뻗는다. 단영은 간단하게 반아의 검을 쳐내고 다시 반아의 사방에 공격을 가하며 빈틈을 찾는다. 반아는 단영의 검을 간신히 막아내고 뒤로 물러선다.]
단영: 내가 분명히 은망銀蟒의 세를 가르쳐줬을 텐데! 왜 이 상황에서 반격하지 않지?
반아: 언니, 잠깐……!
[단영은 반아의 말을 듣지 않고 뛰어오른다. 반아는 위에서 내려오는 공격을 자세를 낮추고 반시계 방향으로 돌며 회피한다. 반아는 단영이 착지한 틈을 노려 위에서 아래로 크게 벤다. 단영은 검을 비스듬히 들어 반아의 공격을 자연스럽게 흘려낸다.]
[두 사람은 선 자리에서 그대로 여러 차례 공방을 이어나간다. 기본적인 자세 유지와 보법 면에서 단영이 우세를 점한다. 반아는 차츰 중심을 잡기 어려워 하더니 결국 빈틈을 보인다. 단영이 부드러운 연계 동작으로 빈틈을 보인 반아를 찌른다. 반아는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는 공격을 피하려다 결국 무너져 땅바닥에 엎어진다. 단영은 쓰러진 반아의 목에 검을 겨눈다.]
단영: 봤지. 이것 밖에 안 되잖아.
반아: [버럭 소리를 지르며] 아직 아니에요!
[반아가 누운 자세에서 단영의 발목을 걷어찬다. 단영이 한 걸음 물러나며 자세를 가다듬는 사이 반아는 손으로 땅을 치며 단영의 반대 방향으로 떠오른다. 단영은 다시 달려나가며 반아를 쫓고, 반아는 힘차게 땅을 박차며 그대로 제64K기지 경계 바깥으로 날아간다.]
단영: 도망치지 마! 넌 지금 너가 지켜야 할 사람들을 버리고 있는 거야!
[잠시 후 정문 감시 장치의 시야에서 사라진 두 사람을 기지 외부 감시 장치가 다시 포착한다. 두 사람은 모래사장 위에서 공격을 교환한다. 두 사람 모두 젖은 모래에 발이 빠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경공을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단영과 반아 모두 깃털처럼 가볍게 움직이며 모래사장에 발자국을 거의 남기지 않는다.]
[이번에도 반아가 먼저 물러나 단영의 공격을 피한다. 단영은 이번에는 쇄도하는 대신 방어 자세를 취하고 상대의 공격을 기다린다.]
단영: 오랜만에 네가 살의를 품은 모습을 보니 좋네.
반아: 언니가 자초한 거에요.
단영: 나? 천만에. 이걸 자초한 건 너야. 검을 뽑아야 할 때 뽑지 못한 건 너야. 하지만 네가 싸움에서 지면 너만 죽는 걸로 끝나지 않아!
[단영은 이번에는 아예 반아의 시야에서 몸을 숨긴다. 반아가 당황하는 사이를 노려 단영이 그녀의 등 뒤에서 기습해 온다. 반아는 검을 한 차례 크게 휘둘러 흰빛의 원형 궤적을 만들지만, 단영이 반아의 검과 거의 같은 속도로 한 바퀴 돌며 자연스럽게 반아의 칼끝이 아래로 향하는 순간에 다리를 들어 반아의 검과 오른손을 한 번에 밟아버린다. 반아의 검과 오른팔이 묶인 사이에 단영은 반아의 머리를 노리고 검을 내려친다.]
[바로 그때 반아가 교묘한 동작으로 검과 오른손을 뒤로 빼낸다. 예상치 못한 힘에 발밑이 끌려가자 단영은 순간 당황해 주춤거린다. 반아는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을 보이며 검을 회수하고 바로 앞으로 내뻗는다.]
단영: [당황하며] 철번우徹番羽……?!
[단영은 급히 몸을 빼내지만 반아의 검이 빠른 속도로 그녀의 갈비뼈 사이를 노리고 날아온다. 반아의 검이 단영의 가슴을 꿰뚫으려 드는 그 순간 반아가 검을 내팽개치고 단영의 품에 안긴다.]
단영: ……이게 뭐니?
반아: [단영을 꼭 끌어안으며] 서로 싸우는 것보다, 이 편이 더 좋지 않아요?
[단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천천히 손을 들어 반아의 머리를 쓸어내린다.]
단영: 오늘은 네가 이겼구나.
반아: [단영의 품 속으로 파고들며] 정말요?
단영: 도철의 무리와 싸울 때도 이렇게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반아!
[갑자기 반아가 모래바닥 위에 쓰러진다. 급히 반아의 상태를 살핀 단영은 그녀가 잠들어 버렸다는 사실을 알아챈다.]
단영: 어린 녀석 같으니……
[단영은 한숨을 푹푹 쉬면서도 다정하게 반아를 안아들고 제64K기지로 복귀한다.]
그날 오후 명하대선과 두 제자는 제21K기지로 귀환했다. 이강수 이사관과 노래마인 관리이사관이 그들을 만나 다음 행동을 논의했다.
2023/1/10, 제21K기지 내부 비밀 기록:
노래마인: [다른 이들에게 케이크를 내밀며] 드시겠습니까?
[명하대선과 제자들은 정중히 거절한다.]
이강수 이사관: 이게 뭡니까?
노래마인: 첫 승리를 거뒀으니, 자축하자는 의미에서-
이강수 이사관: 그래봤자 삼백 명에서 열 명 빠진 정도입니다.
노래마인: 또 숫자가 늘었군요.
이강수 이사관: 좋은 소식은, 그 수가 더 이상은 늘어나지 않을 거라는 점입니다.
노래마인: [고개를 끄덕인다] 좋은 소식이네요.
이강수 이사관: 나쁜 소식은, 그 이유가 도철이 자기 통제하에 있는 모든 PoI들을 이끌고 북상을 시작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노래마인: 북상이라니?
명하대선: 그로선 선택지가 없소. 자신의 오래된 약점이 전혀 고쳐지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거든. 도철은 뛰어난 장인이고, 훌륭한 검사지만 장군감은 아니오. 군율이나 병법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지. 이대로 상황이 지속된다면 그가 애써 불러모은 무리는 한 달도 안 되어 흩어져버릴 테고, 도철은 그걸 알기 때문에 초조해하고 있을 테지요.
노래마인: 그럴 바에는 전력이 최고점에 이른 지금 싸움을 벌인다?
명하대선: 그렇소.
노래마인: 예상 목적지는?
이강수 이사관: 제37K기지입니다.
노래마인: 그건 인천에 있는 시설인데. 왜 굳이 전라도에서부터 그 먼 길을 올라가려는 거지?
이강수 이사관: 제37K기지는 유일하게 유의미한 수준의 전력을 한반도 다른 지역에 투사할 여유와 수단이 있는 시설입니다. 제37K기지가 제 역할을 못하게 된다면, 그때부터는 한국사령부 예하 모든 보안시설을 각개격파할 수 있는 겁니다.
명하대선: 어떻게 하실 생각이시오?
노래마인: 이제부터는 우리가 나설 차례인 것 같군요. 이강수 이사관, 놈들이 인천으로 향할 때 사용할 가능성이 높은 경로를 추려서 제게 알려주세요. 저는 그 경로 근방에 위치한 보안 시설 이사관들을 모두 소집하겠습니다. 도철은 자신의 통제력이 줄어드는 걸 걱정해서 도박을 벌였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통제가 더 어려워지게 될 겁니다.
명하대선: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노래마인: 네. 근데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인지 모르겠네요?
[단영이 노래마인을 째려본다. 반아는 난처한 기색을 드러낸다.]
명하대선: 무슨 일이길래 그러시오?
노래마인: 당신의 속도에 대한 소문이 진짜라면 아무 문제도 없을 거에요.
명하대선: [잔잔히 웃으며] 문제 없소.
2023/1/12에 도철이 자신의 무리를 모두 이끌고 북상을 시작했다. 재단은 도철이 진군을 시작함과 동시에 미리 배치해 둔 현장 요원들과 자산을 활용해 도철의 무리 사이에서 혼란을 일으켰다. 동시에 명하대선이 지속적으로 적진을 습격해 그나마 통제를 유지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지도자들을 무력화시켰고, 결과적으로 도철의 무리 중 절반이 처음 목적지인 제37K기지가 아닌 다른 보안시설을 향해 움직였고, 그대로 본대에서 이탈했다.
- 제13K기지가 목표라고 믿고 왔던 길을 되짚어온 PoI들 20명은 제주도와 해남군 사이 바다에서 기동특무부대 카이-17 "태평양"에 의해 전원 생포되었다.
- 제64K기지를 노리고 무진에 진입한 PoI 17명은 기동특무부대 뮤-39 "등대지기"의 유인 작전에 휘말려 위험한 안개 지대로 걸어들어갔고, 그대로 실종되었다.
- 유일하게 자신들이 정한 목표를 공격하는 것까지 성공한 제09K기지 공격자들 12명은 전술적 후퇴를 실행하던 기동특무부대 프시-3 "어둑서니"를 무리해서 추격하다 Nx-06에 진입, 정확히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주체로부터의 공격을 받고 와해되었다.
- 그밖에 제21K기지, 제12K기지 등 수도권에 위치한 보안시설을 공격하기 위해 북상하던 중 갈라져 나온 무리는 대한민국 정부와의 협력 하에 오산시 근방에서 전원 무력화되었다. 총 75명 중 32명이 재단 요원들의 교란 작전에 의해 흩어졌다가 체포되었고, 나머지 43명은 각각 방재원(13명), 국군 51사단(20명), 경찰(10명)에 의해 제압당했다.
재단이 실행한 교란작전의 여파에 더해 도철의 잘 계획되지 않은 무모한 강행군에 의하여 추가적인 낙오자가 지속적으로 발생했고, 결과적으로 2023/1/13에 제37K기지 앞까지 도달한 이들은 도철을 포함 30여명에 불과했다. 명하대선이 제자들을 이끌고 나가 도철과 대치했다.
2023/1/13, 제37K기지 내부 영상 기록
[제37K기지 정문 영상 감시 장비에 도철의 무리가 포착된다. 명하대선의 요청에 따라 제37K기지 정문을 경비하던 인원들은 모두 철수한 상태이다. 도철과 그 부하들은 검을 뽑아든 채 천천히 길을 따라 기지를 향해 걷는다.]
[제일 선두에 있던 도철이 기지 입구 앞에 버티고 선 명하대선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춘다. 도철이 자신의 검을 들어 명하대선을 가리킨다. 그의 검은 길고 가늘며 햇빛을 받아 미약한 청색으로 반짝인다.]
도철: 명하 아우. 이번에도 편을 잘못 골랐네.
명하대선: 도철, 벌써 삼천 해가 지났소. 언제까지 어리석은 자들을 미혹해 사지로 밀어넣으실 속셈이오?
[도철의 뒤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주로 식별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추종자들이 도철을 변호하거나 명하대선을 모욕하는 내용의 고함소리이다.]
[도철은 손을 들어 무리를 제지한다. 곧이어 그는 검을 양손으로 잡고 오른어깨 위로 올린 자세를 취한다. 명하대선 역시 자신의 동검을 들고 중단부를 겨눈다.]
도철: 마지막 경고일세, 명하 아우. 지금까지는 옛 정을 봐서 참아왔지만 끝까지 나를 막는다면 나는 더 이상 내 맹세를 지키지 않을 수 없네.
명하대선: 내게도 도철 당신에게 정이 있었소. 하지만 그 정 때문에 일을 그르쳤나 보오. 이제는 저승에 가서 헌원씨를 뵐 면목이 없소이다. 지금이라도 내 죄를 없이하고 싶을 따름이오.
도철: [이빨을 드러낸다] 죄를 없이하겠다고?
명하대선: [고개를 약간 숙인다] 도철 당신이 지금 살아 숨쉬는 게 내 죄지요. 지금 당신을 없애겠소.
[도철이 고함을 지르며 뛰어올라 빠르게 명하대선과 거리를 좁힌다. 명하대선은 방어 자세를 취하지만 갑자기 단영이 난입해 도철을 공격한다. 도철은 알려진 대로 단영의 공격을 검으로 받아내는 대신 불가해한 힘으로 공중에서 방향을 바꾸어 회피한다.]
단영: 내가 살아있는 한 사부님의 그림자도 밟지 못 할 거다!
[도철은 으르렁거리며 착지한다. 단영이 느리지만 흔들림 없는 발걸음으로 도철에게 다가온다.]
도철: 너 따위가 낄 자리가 아냐! 거기서 한 걸음만 더 떼면 네 내장을 땅에 쏟아버리겠다!
[단영은 아랑곳 않고 다가간다. 도철은 착지한 자리에서 다시 튀어올라 단영을 향해 쇄도한다. 도철이 내뻗은 검을 단영은 가볍게 피하고 자신의 검으로 도철에게 반격을 가한다. 도철은 몸을 굽혀 피한다.]
[도철이 몸을 다시 일으켜 세우며 빠른 속도로 여러번 검을 찌른다. 단영은 그에 주눅들지 않고 계획적인 움직임으로 도철의 모든 공격을 무력화한다. 단영의 뒷걸음질 한 번, 검 휘두르기 한 번으로 도철의 공격이 모두 봉쇄되는 장면이 여러번 나오며 단영이 우위를 점한다.]
[도철의 패색이 짙어지자 그의 추종자들 중 다섯 명이 난입한다. 추종자들이 단영을 에워싸고 전 방향에서 공격하려는 순간 명하대선이 개입해 도철의 추종자들을 흩어버린다. 추종자 한 사람이 명하대선에게 검을 휘두르지만 명하대선은 가볍게 검을 올려쳐 부러뜨리고 크게 당황하는 추종자의 뒤로 돌아가 그의 목을 칼자루로 쳐 쓰러뜨린다.]
[한편 단영은 계속 공방을 이어가며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도철이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을 줄여나간다. 결국 도철은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지자 몸을 숙이고 왼손으로 지면을 강타한다. 땅이 진동하자 단영과 명하대선이 잠시 주춤한다. 그 틈을 타 도철은 뒤로 펄쩍 뒤어 자신의 추종자들이 있는 곳까지 물러난다.]
[단영은 다시 신중한 경계 자세를 취하며 도철을 노려본다. 도철은 잠시 분이 덜 풀린 듯 하더니 이내 조용히 웃는다.]
도철: 이것 참 성가시군. 그렇게까지 저 자들과 운명을 함께하고 싶은가? 이미 저들이 쌓은 원한은 깊다. 언젠가는 그 원한이 그들의 죽음이 될 텐데, 계속 그러다 보면 너희는 그 옆에 같이 서 있다가 똑같이 죽게 될 거다.
단영: 다른 건 몰라도, 너 같이 하찮은 놈이 우리의 죽음이 될 수는 없어. 그들의 죽음도 마찬가지야.
도철: [얼굴을 찌푸리며]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어린 녀석. 나는 지금까지 네가 먹은 쌀보다 더 많은 소금을 먹었다. 언젠가 그 경솔함을 피를 흘리며 후회하게 될 거다. 말 그대로.
[도철이 자신의 무리를 이끌고 제37K기지에서 떠나간다. 단영은 잠시 숨을 고르다가 검을 집어넣는다.]
2023/1/15, 제21K기지 사건 기록 21K-23-901: 13일에 있었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도철은 인천을 떠나 종적을 감추었다. 노래마인 관리이사관은 제01K기지로 돌아갔고 명하대선과 제자들은 제21K기지에서 휴식을 취했다.
이틀 뒤 도철이 120명의 PoI들을 이끌고 와 제21K기지를 공격했다. 재단 측의 인원들 중 누구도 그가 세력을 이렇게 빠른 속도로 복구할 줄 몰랐기 때문에 사실상 무방비 상태로 당한 기습이었다. 이강수 이사관을 위시한 기지 내 지휘 인원이 빠르게 상황에 대응하였으며 명하대선과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제21K기지가 도철에게 점령당하는 것은 막을 수 있었으나, 그 과정에서 단영이 고립되어 도철의 무리에게 포위당했다. 명하대선은 PoI들의 집중 공격을 받아 그녀를 구출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사건 관련 제21K기지 외부 지역 감시장치 영상 기록
[단영이 제21K기지 외부에 조성된 정원을 가로지르고 있다. 도철과 그의 추종자 약 30명 가량이 그녀의 뒤를 쫓는다. 단영은 추격을 뿌리치기 위해 어떻게든 스스로를 은폐하려 애써보지만 자신을 주시하는 사람의 수가 너무 많아 어려움을 겪는다.]
[결국 단영은 제21K기지 인원들이 구출하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도철의 무리에 의해 포위당한다. 숨을 몰아쉬는 단영 앞에 도철이 자신의 검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나타난다.]
도철: 무엇 때문에 그리 무진 애를 썼느냐? 결국에는 이리 될 것을 정말이지 몰랐던 거냐?
[단영은 대답하는 대신 검을 들고 싸움을 준비한다. 그녀의 칼끝이 정면 위를 향한다.]
도철: [비웃음] 끝까지 오만하기 짝이 없구나. 너는 내가 직접 내 손으로 죽이겠다. 내가 재단에 대해 한 맹세를 지킬 사람임을, 너에 대해 한 말을 실제로 지킴으로써 나를 따르는 이들에게 증명하겠다.
[도철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검을 뽑는다. 단영은 앞서 취한 그 자세를 한 치의 미동도 없이 유지한다. 이윽고 도철이 검을 화려한 동작으로 회전시키며 단영에게 접근한다. 단영이 빠르게 검을 아래로 내려치지만 도철은 간단하게 옆걸음으로 피한다. 단영은 원래 자세로 돌아오고 도철은 단영의 주위를 돌며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짓는다.]
[두 사람을 둘러싼 도철의 추종자들이 단영을 비웃고 조롱하기 시작한다. 단영은 아주 천천히 자신의 발을 옮기며, 도철의 공격이 어디에서 들어올지 가늠해 본다. 도철은 여전히 미소를 띤 채로 검을 빙빙 돌리며 마치 춤을 추듯 발을 놀린다.]
[순간 도철의 눈빛이 사나워지며 그의 검이 움직인다. 단영이 그의 검을 따라 자신의 검을 내밀었지만 도철은 반 바퀴 돌며 예상치 못한 궤적의 엇박자 공격을 시도한다. 단영은 마지막 순간에 몸을 뒤로 젖혀 도철의 검을 피한다. 도철은 거의 눕다시피 하는 단영을 그대로 발로 밟은 다음 머리를 걷어찬다.]
[단영이 풀밭 위를 구르다 바위에 부딪히며 멈춘다. 조롱 섞인 웃음소리가 주변에서 터져나온다. 도철을 그 웃음소리를 음미하는 듯이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검을 좌우로 휘두르며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단영에게 다가간다.]
[아직 중심을 잡지 못한 단영의 가슴을 노리고 도철이 검을 내뻗는 그 순간 단영이 절묘하게 몸을 틀어 도철이 든 검의 칼자루를 잡아챈다. 앞으로 끌려온 도철의 표정이 순간 경악으로 인해 굳는다. 단영이 한 차례 기합과 함께 온 힘을 다해 도철의 심장을 찌른다.]
[수 초간 침묵이 흐른다. 고개를 들어 도철의 얼굴을 바라본 단영은 그 얼굴에 앞서처럼 비웃는 듯한 미소가 가득한 것을 보고 당혹감에 빠진다. 도철은 한 차례 크게 웃더니 이내 웃음기를 거두고 자신의 검으로 단영의 갈비뼈 바로 아래 부분을 꿰뚫는다.]
[단영이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꿇는다. 고통과 공포 때문에 하얗게 질린 단영의 앞에서 도철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자신의 가슴에 꽃힌 단영의 검을 잡아 빼낸다. 피로 흥건한 검이 풀밭 위에 떨어진다. 도철의 가슴에 난 상처는 빠르게 아물어 원상복구된다.]
도철: 나는 네가 재단 놈들과 똑같이 죽게 될 것이라 말했다.
[도철이 자신의 검을 비튼다. 단영은 신음소리를 내며 두 팔로 도철의 팔을 붙잡는다.]
도철: 나는 또한 네가 피를 흘리며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도철이 자신의 검을 단영의 몸에 박힌 그대로 수평으로 긋는다. 그 경로에 있던 모든 것이 끊어지며 단영의 복부에서 피가 왈칵 쏟아진다. 단영은 숨을 헐떡이며 고통스러워한다.]
도철: 그리고 또 뭐라고 했더라? 아, 맞아.
[도철은 자신의 검에 몸무게를 실어 검을 세로로 긋는다. 그는 단영의 골반 바로 윗 부분까지 검을 끌어내린 다음에야 검을 뽑는다. 단영의 복부로부터 피와 끊어진 내장 조직이 풀밭 위로 쏟아진다. 단영은 울먹이며 앞으로 무너진다.]
도철: 이렇게 될 거라고도 했지.
[도철은 검을 한 차례 휘둘러 피를 흩뿌린다. 곧이어 그는 누군가의 기척을 감지한 듯이 고개를 홱 돌려 기지 쪽을 보고는 무리를 데리고 빠르게 해당 지역을 벗어난다.]
[수십 초 뒤 명하대선이 도철이 있던 자리에 날아와 착지한다. 다급히 뛰어온 그는 이미 단영이 목숨을 잃은 것을 보고 충격에 검을 떨어뜨린다.]
[명하대선은 수 시간 동안 단영의 시신 옆에 무릎을 꿇은 채 움직이지 않는다.]
2023/1/16, 제21K기지 내부 비밀 기록:
명하대선: 내가 죽인 거요.
이강수 이사관: [지친 목소리로] 뭐라고 하셨습니까?
명하대선: 단영은 나 때문에 목숨을 잃은 거요.
이강수 이사관: 그 사람을 죽인 건 도철입니다. 당신이 아니라.
명하대선: 아니오. [침묵] 옛날 헌원씨의 시대에 궁기窮奇라 불리는 짐승이 있었소. 도철처럼 꾀가 있거나 사람의 삶을 동경하지는 않았으나, 옛 시대의 네 흉한 짐승들 중 가장 강하고 악랄했던 놈이오. 궁기의 피에는 요사한 기운이 담겨 있어 궁기가 자기를 죽이거나 해치려는 뜻이 조금이라도 담긴 공격으로 인해 상처를 입으면 곧바로 피가 멎고 상처가 아물었지요.
궁기는 결국 헌원씨에 의해 토벌당했지만 그 피는 누군가 빼돌렸소이다. 오랫동안 찾았지만 발견되지 않아 땅에 모두 흘린 것이라 생각하고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건만, 하필 도철 그 자의 골수에 궁기혈窮奇血이 들어 있었구려. 그것만 아니었더라도 단영은 큰 공을 세웠을 것이오. 그런데 내가 미숙했던 탓에 죽게 되었소.
이강수 이사관: [한숨] 알겠습니다. 하지만 자책은 그만두십시오. 도철이 종적을 완전히 감췄습니다. 언제 어디서 나타나게 될 지 아무도 모릅니다.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명하대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다] 지금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구려…… 일단은 내 제자의 혼을 달래는 것이 우선일 것 같소.
이강수 이사관: 시신은 저희 쪽에서 수습하겠습니다. 정성을 다해서 장례를 치를 예정입니다.
명하대선: 안 되오. 시신은 흙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지만 아직 단영 그 아이의 검이 남아 있소. 그 검 안에 담긴 한이 아직 남아 있으니 그 한을 풀어주기 전에는 혼백이 완전히 하늘로 돌아갈 수 없소이다.
이강수 이사관: 한풀이를 할 방법을 알고 계십니까?
명하대선: 내가 직접 단영의 검을 깨뜨리겠소. 나는 내 검을 들어야 하니, 이제는 내 유일한 제자가 된 사람이 단영의 검을 대신 들고 망자를 추모하는 마음에서 나와 맞서는 의식을 치를 거요. 반아에게도 마음이 찢어질 일이건만, 또 그 아이에게 짐을 지워야 하다니……
2023/1/16, 제21K기지 사건 기록 21K-23-904: 명하대선의 요청에 따라, 제21K기지에 조성된 인공호 한가운데에 수습된 단영의 시신이 실린 작은 배가 띄워졌다. 명하대선과 반아가 각각 호수의 양쪽 끝 지점에 서서 의식을 시작했다. 반아는 자신의 검 대신 단영의 것을 들었다.
[의식이 시작된 직후 두 사람은 날아올라 호수 가운데 지점에서 서로의 검을 휘둘러 힘껏 부딪힌다. 큰 소리와 함께 충격파가 단영이 실린 배 주변으로 퍼져나간다. 두 사람은 그대로 서로를 지나쳐 아까처럼 호수의 각 끝 지점에 착지한다.]
[두 사람은 같은 동작을 여러 차례 반복하며 단영의 검에 피로를 누적시켰다. 의식 내내 무감정해 보이는 상태를 유지하는 명하대선과는 대조적으로, 단영의 검을 휘두르는 반아는 의식이 진행될수록 감정적으로 격해지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들이 여섯번째로 격돌했을 때, 두 사람은 서로를 지나쳐 가는 대신 그대로 호수 표면에 내려온다. 명하대선과 반아 모두 수면에 발이 닿은 채 단영의 시신 옆에서 잠시 침묵을 지킨다. 반아가 울먹이는 모습을 보고 명하대선이 그녀에게 무언가를 말한다. 반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호수 표면에 약간의 파란을 일으키며 허공으로 솟구쳐 오른다.]
[공중의 한 지점에서 반아는 몸을 돌려 검을 수평으로 쥐고 머리부터 낙하하기 시작한다. 반아가 단영의 시신이 실린 배의 5m 위 지점에 다다랐을 때 명하대선이 고속으로 상승하며 자신의 검으로 반아가 쥔 단영의 검을 힘껏 올려친다.]
[곧이어 단영의 검이 산산조각나며 그 파편이 호수에 떨어진다. 가장 큰 파편은 호수에 떨어져 가라앉는 대신 단영의 시신 위로 떨어져 최종적으로 그녀의 두 손 사이에 위치한다. 반아 역시 단영이 실린 배의 끄트머리에 한 다리로 착지한다. 높은 곳에서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단영이 실린 배는 약간 흔들릴 뿐 크게 요동치거나 전복되지 않는다.]
[반아는 조심스럽게 단영의 옆에 다가와 무릎을 꿇는다. 그녀는 울며 단영의 손을 들어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댄다.]
[명하대선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서쪽을 바라보며 물 위에 선다. 그는 자신의 검을 집어넣으며 탄식한다.]
명하대선: 참으로 깊은 한을 품었구나. 참으로 가여운 한이로구나!
[반아가 큰 소리로 통곡한다.]
명하대선: 황제여, 이 원한을 어찌합니까? 남겨진 이들이 품은 한은 어찌합니까? 도철의 검과, 그의 피와, 그 한은 또 어찌하면 좋단 말입니까?
단영의 검이 파괴된 이후, 반아의 불면증 증세가 악화되었다. 사흘 뒤인 2023/1/19에 반아는 제21K기지를 떠나 종적을 감췄다. 명하대선이 관리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반아의 행적을 수색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 동안 도철은 한 번 무진시 근방에서 포착되었을 뿐,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일주일 뒤인 2023/1/26에 반아가 SCP-340-KO 개체들이 격리되어 있는 방에 나타났다. 반아는 검선 규약에 의거하여 아직 3등급 보안 인가를 소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34K기지 인원들은 한국사령부의 연락을 받기 전까지 반아의 정체를 의심하지 않았다.
반아는 격리실 안으로 들어가 SCP-340-KO 개체들과 대략 5분 정도 대화를 나누고 다시 기지를 떠났다. 해당 대화 내용이 SCP-340-KO 격리 담당자들에 의해 녹화되었다.
면담기록 340-78
면담 일자: 2023/1/26
면담 기록자: 김상환 연구원
면담자: 반아
[기록 시작]
[KO-340 개체들 넷이 공연장에서 어슬렁대고 있다. KO-340-1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반아가 공연장 무대 아래에 다가와 말을 건다.]
반아: 소녀 문안인사 드립니다.
KO-340-2: [소리나는 쪽으로 고개를 홱 돌린다] 야, 여기에 문 세워진 데가 없는데 어디가 문 안이고 어디가 문 밖이란 말이냐? 얘 거기 실없는 소리 하는 놈 누구냐?
KO-340-5: 둘째형님, 둘째형님, 저기 웬 낭자가 한 명 서 있는뎁쇼.
KO-340-2: 뭐시라?
[반아가 무대 위로 사뿐히 뛰어오른다. KO-340 개체들은 놀라면서도 호기심에 반아 주위로 모여든다.]
KO-340-3: 아니, 거, 좀 사는 집 규수 같아 뵈시는데 여기는 무슨 볼일이래?
반아: [주변을 둘러본다] 당신들 큰형님은 어디 있죠? 그 분 만나러 온 건데.
KO-340-4: 우리한테 질문을 하네? 이보슈. 어디서 오신 분이신지는 모르겠는데 초면에 좀 예의가 없으십니다?
KO-340-3: 야야, 그만하고 문제나 내 드려.
KO-340-2: [다른 개체들을 밀치며 나선다] 이 굼벵이 같은 자식들아, 다 비켜라. [헛기침] 흠흠, 낭자, 토끼랑 거북이가 경주를 하면 누가 이길 것 같소?
반아: [짜증을 내며] 거북이요.
KO-340-2: 흥, 똑똑하구먼.
반아: 토끼는 가다가 포수한테 잡혀 죽을 거거든요.
KO-340-2: 잉?
반아: 아니면 호랑이한테요. 이거 몰라요? 예전에 제가 좋아했던 이야기인데.
KO-340-2: 아니, 어……
[KO-340 개체들이 반아에게서 등을 돌리고 자기들끼리 속닥거린다.]
KO-340-2: 아니 답은 맞혔는데, 설명하는 거 들으니까 좀 얼간이 같아 보이는데?
KO-340-5: 형님, 일단 몽둥이로 골통을 깬 다음에 머릿속이 얼간이인지 아닌지 보면 되는 거 아니우?
KO-340-3: 야 이 자식아. 저 처자 허리에 검 찬 거 못 봤어? 아주 밥숫갈 놓고 싶어서 그래? 난 반대요, 형님. 치려거든 혼자서 치시구랴.
KO-340-4: 하필 이럴 때 큰형님께서는 어딜 가셨는지 원……
KO-340-2: 야, 야, 다 닥쳐봐. 일단 몽둥이는 꺼내고 보자.
[KO-340 개체들이 다시 반아를 노려보며 소매에서 몽둥이를 꺼내든다. 반아가 검을 절반 정도 빼자 KO-340 개체들은 허둥거리며 반아에게서 2m 정도 떨어진다. 그때 공연장 뒤에서 KO-340-1이 급하게 뛰어나와 다른 KO-340 개체들의 무릎 뒤를 걷어찬다. KO-340 개체들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꿇는다.]
KO-340-1: 야, 이 못 배워처먹은 새끼들아. 이것들이 지금 누구 앞에서 몽둥이를 꺼내들고 지랄이야? [넙죽 엎드린다] 아이구, 선녀님. 제 아우놈들이 무식해서 그만 큰 죄를 지었습니다. 부디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 주십사…… [주위를 돌아보며] 뭐 해, 이 육시럴 놈들아? 빨리 안 엎드려?
반아: 그만하세요, 순우淳于 선생님.
[KO-340-1의 몸이 굳는다.]KO-340-1: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선녀님……께선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반아: 당신은 옛 일에 밝으신 분이니까 분명 아실 거라 생각해요. 도철의 궁기혈을 깨뜨리려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하나요?
[KO-340 개체들이 저마다 뭔가를 말하지만, 여럿의 목소리가 섞여 분간할 수가 없다. KO-340-1은 가만히 서 있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반아: 왜 대답을 안 하시죠?
[KO-340-1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는다. 반아는 그와 다른 KO-340 개체들을 쳐다보다가 그들이 겁에 질려 있음을 깨닫는다.]
반아: 도철이 여기 다녀갔었군요, 그렇죠?
KO-340-1: 소인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소이다.
[반아가 무릎을 꿇고 KO-340-1의 옷자락을 움켜쥔다. 다른 KO-340 개체들이 안절부절 못하며 이리저리 시선을 돌린다. KO-340-1의 눈에도 당혹감이 여실히 드러난다.]
반아: 선생님,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단영 언니가 도철한테 맞서다가 죽었어요. 그놈 몸에 궁기의 피가 흐르는 한 사부님께서도 뾰족한 수가 없어요. 정말 아무것도 해 주실 수 없나요?
KO-340-1: 아, 아이구, 이런. [반아의 손을 붙잡고 일으킨다] 일단 일어나십시오, 어서! 선녀님 체통을 지키셔야지 이게 무슨 일이십니까?
[반아는 일어나 무릎에 묻은 먼지를 털어낸다. KO-340-1은 당황스럽다는 듯 머리를 긁적인다.]
KO-340-1: 음, 거, 궁기혈이라고 하셨소? 그걸 깨뜨리는 게 뭐 별 것은 아니오. 그런데 궁기혈을 깨뜨린다는 건 도철을 죽인다는 것인데 괜찮으시오?
반아: 뭐가요?
KO-340-1: 선녀님께서는 원한을 쌓는 것을 즐겨하지 않으신다고 알았소만.
반아: [잠시 멈칫한다] 그래도 도철은 살아있으면 안 돼요.
KO-340-1: 음.
[KO-340-5를 잡아 끌더니 귀에 무언가 속삭인다. KO-340-5는 고개를 끄덕이고 무대 가장자리로 가서 벌렁 눕는다]
KO-340-1: 궁기혈이 무서운 것이 바로 그 때문이지요. 궁기는 본성이 포악하고 교활해서, 헌원씨 같은 성인이 아니면 절대 자기를 죽이지 못하게끔 제 피에 불사의 요술을 건 거요. 누군가가 살의를 담아 자기를 베고 찌르고 칠 때 그 요술이 살아나지요.
반아: 그렇다면 지금 도철을 죽이려고 검을 휘두른다는 것, 그 자체가 도철이 검에 죽지 않는 이유가 된단 말인가요?
KO-340-1: 얼추 맞소.
반아: 알겠어요. 그러면 그걸 뚫고 죽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KO-340-1: 간단하오. 살의를 담지 않은 검으로 죽이면 되지.
반아: 그게 가능해요? 모순 같은데요.
KO-340-1: 선녀님도 검이 아닌 것을 검이라고 들고 다니시는데 그건 모순이 아니오?
반아: 말 조심해요! 이건 사부님께서 직접 벼리신-
KO-340-1: 보시오, 선녀님께서도 이미 그걸 검이라고 생각하고 계시지요. 검이 그래서 참 무서운 거요. 처음에 누가 어떤 속셈으로 만들었든 사람들은 그걸 보고 "아, 이건 사람을 베어 죽이라고 있는 물건이구나." 하지요. 심지어 그게 왜 만들어진 물건인지 아는 사람들도, 살전을 계속 거치다가 그리 말하더란 말이오. 지금 선녀님이 꼭 그렇소.
[반아는 잠자코 듣고만 있는다.]
KO-340-1: 선녀님, 잘 생각하셔야 이길 수 있으시오. 그 손에 쥐신 것이 정녕 검이 맞소? 처음부터 사람을 벨 요량으로 만든 물건이오? 혹 손님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건 아니고? 내가 알기로, 선녀님의 한은 사람을 못 벤 것이 아니라-
[갑자기 무대 옆에서 누워 있던 KO-340-5가 매우 큰 소리로 코를 골기 시작한다. 반아를 포함해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그쪽을 바라본다.]
KO-340-2: 저, 저 개새끼 저거, 지금 큰형님께서 말씀하시는데……
[KO-340-5를 걷어차려던 KO-340-2를 KO-340-1가 다른 부분은 하나도 움직이지 않고 팔만 뻗어 낚아챈다. 반아는 혼란스러워하다 순간 무언가 깨닫고 KO-340-1을 쳐다본다.]
반아: 정말 그 뜻이에요?
[KO-340-1은 미세한 동작으로, 그러나 매우 격하게 고개를 마구 끄덕인다. 반아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몸을 돌려 공연장을 떠난다. 잠시 후 자는 척 하던 KO-340-5가 벌떡 일어나 다른 개체들에게로 달려온다.]
KO-340-5: 큰형님, 나 잘했수?
KO-340-1: 귀청 떨어지는 줄 알았다, 이 썅놈아. 그래 잘했다.
KO-340-3: 아이구, 큰형님, 그걸 그렇게 실토해버리면 어떡합니까. 이제 우리 오형제가 한날한시에 고택골 가게 생겼수.
KO-340-1: 니미, 너는 선녀님이 저리 애원하시는데 가엾지도 않느냐? 그렇지만 네 말이 맞다. 우리 패는 이제 날샜다. 빨리 짐 싸라, 얘들아. 서천객들 지나다니는 길목에서 각설이 흉내나 내야겠다.
[기록 종료]
해당 기록으로부터 48시간 후 도철이 제34K기지에 혼자서 난입했다. 기지를 방어하는 과정에서 수 명이 목숨을 잃었으나 도철이 SCP-340-KO의 격리실 문을 부수고 들어왔을 때 이미 KO-340 개체들은 사라진 상태였다. 도철은 자신이 붙잡은 연구원들을 분풀이로 찔러 죽이고 떠나갔다.
도철이 제34K기지를 공격한 지 사흘이 지난 뒤 명하대선이 반아가 제64K기지에 복귀했다는 소식을 듣고 무진으로 이동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이강수 이사관이 제64K기지가 도철의 목표물이 되었다는 정보를 입수, 명하대선에게 연락을 취했다.
2023/1/31, 제64K기지 영상 감시 장치 기록:
[반아가 자신의 검을 품에 안은 채 제64K기지 바깥의 모래사장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과거 반아와 단영이 결투를 벌였던 바로 그 장소이다.]
[명하대선이 걸어와 반아 옆에 앉는다. 반아는 바다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명하대선: 잠은 좀 잤느냐?
[반아는 대답하지 않는다.]
명하대선: 이사관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도철이 곧 여기를 칠 게야.
반아: 알아요. 제가 불렀거든요.
명하대선: [눈을 가늘게 뜬다] 네가 불렀다고?
반아: 그의 한을 풀어줄 테니, 일대일로 겨루자고 말했어요. 바로 여기서.
[두 사람은 잠시 침묵한다.]
명하대선: 네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건지 알고 있으면 좋겠구나.
반아: 사부님, 도철이 죽기를 원하세요?
명하대선: 그는 목숨을 이어나가기에는 이미 천지의 질서를 너무 많이 어지럽혔다.
반아: 도철을 죽이기를 원하세요?
명하대선: [웃음] 내 검은 그런 일을 하기에는 너무 낡았지.
반아: 하지만 할 수만 있다면 하실 거죠?
명하대선: [잠시 침묵] 그런 것 같구나.
반아: 우리의 원한이 도철에게 생명을 주고 있어요. 그를 물리치려면 우리의 검부터 끊어야 해요.
명하대선: [고개를 젓는다] 삼천 년 동안 해 왔지만 다 허사였어.
반아: 저는 아직 그렇게 오랫동안 해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네요.
[명하대선이 무언가 알아차린 듯이 반아를 바라본다. 반아는 지친 기색이 역력하지만 애써 미소를 짓는다.]
명하대선: 정말 가능하겠나?
반아: 예, 믿어주세요. 하지만 이건 저 혼자 해야 하는 싸움이에요. 다른 사람의 원한이 간섭하면 궁기혈이 또 깨어날지도 몰라요.
명하대선: 어쩌면 가능할지도 몰라. 다만…… 다만 자칫 마지막 제자마저 잃게 될까봐 두렵구나.
[반아가 일어나 명하대선을 꼭 포옹한다.]
반아: 이제 가세요. 그가 오고 있어요.
명하대선: 그러마.
[명하대선은 왔을 때처럼 천천히 걸어서 모래사장을 떠난다. 반아는 명하대선을 기다렸을 때처럼 양반다리를 하고 파도에 시선을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