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환상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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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은 그녀가 흡혈 행위를 조금 더 편하게 할 수 있도록 왼쪽 어깨를 가볍게 그녀 옆에 뉘였다. 곧 그녀의 뾰족한 송곳니가 준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준은 늘 그렇듯이 얼굴을 찡그렸지만, 크게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어쨌든 이 행위는 둘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행위이고, 곧 그도 똑같이 해야 하니까. 준은 눈을 감고 자신의 혈액이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기분을 찬찬히 음미했다. 연주하는 것처럼 언제나 신선한 기분이군. 그렇게 생각하고 나서 준은 그녀의 오른쪽 어깨를 살짝 깨물었다.

"준…아파." 솔이 눈물을 살짝 글썽이며 말했다.

"미안. 다음부턴 빨대로 할까?" 준이 실실 웃었다.

"그게 더 아프잖아!" 솔은 가는 팔로 주먹을 꼭 쥐고 그녀만의 특제 주먹을 몇 방 날렸다. "그런 이상한 소리 하면 안돼."

준은 묘하게 그녀의 주먹이 아프지 않게 느껴졌다. 이 미묘한 감각.. 준은 새로운 취향에 눈을 떠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던 거나 마저 하자."

"그래. 준." 솔이 대답했다.

그렇게 그의 피는 그녀가 되었고, 그녀의 피는 그가 되었다. 혈액 순환이 끝난 후, 준은 항상 입던 긴팔 대신 다른 옷을 입었고, 솔은 늘상 입던 그녀의 신체 사이즈보다 월등히 큰 후드티를 다시 뒤집어썼다. 둘의 이 행위가 창작욕에 영향을 주냐고 묻는다면 답은 그렇지 않다지만, 솔은 피를 빤 후에는 늘상 담요를 뒤집어쓰고 의자에 걸터앉아 컴퓨터로 작곡에 들어가곤 했다. 준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침대에 누워서 며칠 전에 산 게임 패키지를 만지작거렸다. 플러그소프트 사의 신작 게임은 확실히 재미있었지만ㅡ특히 언제 어디서나 실행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최근 들어 준은 게임 자체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놈의 레벨업 알림 좀 뇌 속에서 끄게 해 줬으면." 준이 나지막히 한탄했다.

"끝났다! 밥 먹으러 갈래? 나 배고파." 솔이 헤드셋을 벗으며 말했다.

"귀찮은데, 방금 내 피도 배부르게 먹었으면서 또 밥 먹게?"

"넌 아직도 작곡이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지 모르지? 작곡으로 빠져나간 내 차가운 에너지를 국밥의 뜨끈한 에너지로 보충해야 한단 말이야." 솔은 준을 마주보지도 않고 빈정이 상한 듯이 후드를 푹 눌러썼다.

"지갑 사정도 고려해야지. 국밥도 더 이상 가성비를 논할 처지가 아니야. 지금 우리는 국밥보단 김밥천국이 더 어울린다고."

"으으.. 니가 이러면 어쩔 수 없잖아.. 그럼 나도 내 비장의 무기를 써야겠네." 솔이 준비 자세를 취했다.

"뭐..?" 준은 이변을 눈치챘다. 이대로라면 당하고 만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솔은 준과 음반들이 어지럽게 널부러져 난장판이 된 침대로 뛰어들었다.

"이번엔 또 뭘 할려고? 니 패턴은 이미 다 분석되어 있다?" 준의 심장은 요동치고 있었지만, 그와 반대로 목소리는 평온했다.

솔의 가늘고 매끄러운 다리가 준의 허리 옆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솔은 얼굴을 준에 얼굴에 가까이 들이밀며 미소지었다.

"이래도 안 먹을 거야?" 솔은 몸으로 준을 설득하려 했다.

준의 심장이 매우 격렬하게 요동쳤다. 첫 공연을 솔과 함께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경험 이후로 이렇게 심장이 뛴 것은 처음이였다. 준의 얼굴은 점차 솔의 신체 접촉과 비례하여 빨개지고 있었다. 마침내 준은 솔을 밀어내며 외쳤다.

"항복! 항복!" 준이 양 팔을 들었다.

"그럼 국밥 먹으러 가는 거지?" 솔이 미소지으며 몸을 떼냈다.

"그래. 내가 졌다."

"너 참 이런 데 은근 약하다니깐." 솔이 놀리듯이 웃었다.


"잘 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집 겸 녹음실에서 떠난 지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솔과 준은 국밥집에서 걸어나왔다. 솔은 자신 넘치게 당당히 걸어 나왔고, 준은 묘하게 피곤해 보이는 표정으로 솔을 뒤따랐다.

"준 이거 봐봐. 사운드클라우드에 올린 게 상당히 반응이 좋아." 솔이 스마트폰 화면을 준의 얼굴 앞에 들이밀었다. "내가 말했잖아. 사막에 선인장이 떨어져 있으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멍게가 떨어져 있으면 자연스럽게 시선을 끄는 법이라고. 그런 의미에서 지금 우리 음악은 멍게라고 부를 수 있지."

"비유가 좀 이상하긴 한데… 이대로 쭉 간다면 진지하게 메이저 데뷔를 기대해봐도 될까?" 준은 눈을 가늘게 떴다.

"쇼미 지원 영상 보낸 거 아직도 메일 안 왔잖아. 언더는 끝까지 언더에서 죽으라는 건가? 이럴 바엔 우리 노래 끝까지 들어 주는 리스너들을 위해서만 음악 할래. 대중성? 필요 없어. 난 절대 노선바꾼 뱀은 안 될 거야." 묘하게 아쉬운 어조였다. 솔은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래도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해 봐야지. 이젠 언더에만 있다간 예전에 그렇게 좋아했던 횟집도 못 가겠어.. 그 황보현욱 사장님이 하시던 데 있잖아."

"거긴 사장님이랑 요즘 연락이 안 되서 안 가는 거야. 우리 오면 서비스 많이 주셔서 좋았는데.. 항상 남는 고기는 덤으로 얹어 주시고. 그런데 요새 통 안 보이시더라고." 솔은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왜? 사장님 되게 연락 자주 하시고 말 많으신 분 아니였나?" 준이 의문을 표했다.

"나도 몰라. 어디 잡혀가서 회 만드는 노예로 일하시고 계신 거 아니야?" 솔은 이 밀을 마치고 쿡쿡 웃었다.

"그럴 수도 있겠네." 준은 솔에게 무언가 할 말이 있었지만, 갑자기 생각나지 않아 입을 다물었다. 최근 들어 준에겐 이런 상황이 자주 일어났다. 나오려던 말들은 점차 흐릿해져 파편이 되어 흩어지고, 기억들은 무뎌져갔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예전에 받은 그 실험 때문일 수도 있었다. 준은 마음속으로 심호흡해가면서 천천히 기억을 되짚어갔다.

"맞다. 솔아. 까먹고 말을 안하고 있었네. 우리 앞으로 초대장이 날아온 게 하나 있어."

"뭔데? 뭔데? 나 초대장 받아본 건 초등학교 이후로 처음이야." 솔은 마치 크리스마스 선물을 처음 받아본 어린아이처럼 눈을 반짝였다.

"음…" 준은 말끝을 흐렸다. "극단..이라고 해야 할까..?"

"뭐. 우리 예전에 있던 데? 말을 너무 이상하게 해대서 뛰쳐나왔잖아. 가끔 걔네가 보냈던 편지들 보면, 씨. 도대체 뭐라뭐라 하는 건질 모르겠어. 말 좀 쉽게쉽게 하면 다 편하고 좋구만." 솔이 불평을 내뱉었다. 상당히 불만이 많은 투였다.

"말을 이상하게 한다니, 솔아. 시적 허용이란 거야. 시적 허용."

"난 시는 중학교 이후론 손 안 댔어. 그래서 왜 극단에서 우리한테 초대장을 보낸 거야?" 솔이 궁금증에 찬 눈으로 준을 쳐다보았다.

"엄밀히 말하자면 여긴 극단이라고 할 순 없어. 이야기하기 전에 짚고 넘어갈 사항이 있는데, 장산 단장 기억나?"

"그 아저씨 말하는 거야? 옛날 회식 때 한번 봤었던 것 같은데.. 얼굴은 대충 기억나. 좀 많이 샤프해지고 수염 기른 송강호 느낌?" 솔이 머리를 배배 꼬았다.

"단장한테 동생이 있었다는 건?"

"몰랐는데.. 난 그때 딱히 다른 단원한테 관심 없었어. 물론 넌 제외하고 말야." 솔이 준에게 무언의 눈빛을 보냈다.

준은 눈웃음으로 화답했다.

"아무튼 단장한텐 장진이라는 이름의 동생이 있었어. 극단이 설립될 때 단장과 둘이서 함께 큰 공을 세웠지. 단장 또는 장진. 둘 중 한명이라도 없었다면 극단이 설립되지 못했다는 말도 공공연히 나돌아다닐 정도였으니까 말이야. 단장도 자주 말을 꺼내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그걸 인정하는 분위기였고."

"근데 동생이 있었다면 왜 난 한 번도 그런 얘길 못 들어본 거야? 말만 들어보면 엄청 중요한 사람 같은데.. 자신있게 말하긴 좀 그렇지만 나도 극단에서 나름 입지가 있었는데 동생 이야기가 한 번도 내 귀에 안 들어온 건 좀 이상한 것 같아."

"왜냐하면.." 준은 잠깐 말을 멈추고 살짝 숨을 들이켰다.

"그는 극단에서 처음으로 단원을 죽이고 제명됐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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