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성-1599 "붉은 수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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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성-1599 "붉은 수염"
프리드리히 비스마르크.

회원 번호, 칠성 천오백구십구번.

등록한 성명, F. 비스마르크.

신분, 게르만계 남성 인격신.

직업, 현 유럽의회 의원.

회원 등록일, 2019년 5월 23일.

등록한 소모임, 구라파 왕친 승마회, 서천 격구·폴로 동호회.

회비 납부 방식, 민족적인 숭앙심과 정치적 지지. 정상 납부 중.


- 휴양 서비스 정보 -

창희: 아아. 테스트 테스트. 됐어. 녹음된다.

승희: 오케이! 에흠. 아— "붉은 수염" 프리드리히 비스마르크 씨는 우리 리조트 칠성관을 애용하고 있는 VIP 고객입니다. 신성 로마 황제이자 독일 왕으로서 명성을 쌓아 영웅으로 추대되었고, 독일인들이 의지하는 존재 중 하나로서 그들을 수호하는 인격신이 되었습니다. 현역 유럽의회 의원으로 활발한 의정 활동을… 어머머, 지금 이승에서 대놓고 돌아다니고 있단 거야?

문희: 돌아다닌 건 백년도 더 됐지.

세경: 잡담은 나중에 하자고. 활발한 의정 활동을 하고 있는 프리드리히 씨는 매년 여름 휴가마다 컨트리 클럽을 방문하고 있고, 주로 그의 친인척이나 다양한 신들과 폴로를 즐기며 시간을 보냅니다. 7월 무렵엔 항상 쓰는 방을 비워 놓고, 위탁해둔 말을 포함해서 건강한 말 네 마리를 준비해 둡니다. 경기할 때 빼곤 조용히 휴식을 즐기는 편이니, 비슷하게 조용한 휴가를 원하는 회원들과 같은 층으로 붙이면 됩니다. 룸서비스 시에도 유의하세요.

승희: 아니. 그래도 말이 안 되잖아, 말이. 내가 그 쪽 소관은 아니어도 삼신할미끼리 얘기는 다 주고 받는단 말야. 죽은 사람의 영혼이 절차도 저승도 삼신도 안 거치고, 전생 모습 그대로 이승에 돌아가서 살고 있다고?

세경: 아이 참, 언니!

창희: 그쪽 삼신? 누구. 프리그? 에일레이티이아? 출산의 신이라고 다 삼신이냐.

승희: 창희 언니랑 문희 언니도 창세신 모임 있잖아. 뭐 그렇게 깐깐하게 따지셔.

문희: 그러면 가이아는 유럽 마고할미고, 데메테르는 유럽 자청비겠니?

승희: …듣고 보니 그것도 그렇네.

세경: 언니들, 진짜 이러기야! 자꾸 그러면 녹음 처음부터 다시 해요? 오늘 녹음 몇 개나 했다고 이렇게들 산만해. 엉?

창희: 알았어, 알았어. 이건 세경이 말이 맞다. 수다는 녹음부터 다 끝내고 떨어도 안 늦어. 나머지는 내가 읽을게. 흠, 흠. 프리드리히 씨는 방문시 제주공항을 이용하는데, 왕복 차량 서비스가 예약되어 있으니 연락을 받는 대로 리무진과 운전 기사를 공항으로 보내야 합니다. 미용 서비스, 특히 수염 관리에 신경을 써 달라고 요청한 바 있으니 체류 중에는 언제든지 응대할 수 있도록 미용사를 대기시키세요.

그리고 주의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프리드리히 씨와 "사자공" 하인리히 씨의 방문 일정이 겹칠 경우 절대 두 고객이 마주치지 못하도록 하세요. 생전의 원한 관계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고, 2020년 여름에 펜싱장에서 무단으로 벌인 결투 이후에도 이는 마찬가지입니다.

승희: 아으, 생각도 하기 싫다. 난 친척이라길래 붙여놓으면 어련히 격구 치고 잘 지낼 줄 알았지.

문희: 뭐야, 그때 니 탓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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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나게 찍힌 강림.

승희: 하인리히 씨가 막 "네놈 아들을 봐서 참아줬더니 무슨 낯짝으로 여기까지 날 쫓아오느냐"고 화를 내는데 어유, 엄청나더라. 아무 말도 없이 잠자코 듣고만 있는 프리드리히 씨도 솟구쳐오르는 화를 참아내는 게 눈에 다 보였고.

그러다가 결국 하인리히 씨가 펜싱장에 구비해둔 칼을 뽑아들었고, 그 다음엔, 으악! 그때 안 대표가 사이에 끼어서 진땀 왕창 뺐잖아.

창희: 매화가 진짜 고생했지. 결국 강림차사까지 나서서야 떨어트려 놨잖아.

문희: 그야 언니가 서천꽃밭 떼어다가 장사하자 그러니까 꽃감관들이 고생이지. 근화는 뭐 괜히 은퇴했겠어. 바지 대표 맡겨놓고 일 시키고 말이야.

창희: 어머, 제주도에 꽃밭 끌어다놓고 사업 하자니까 문희 너도 쌍수 들고 환영한 건 잊었어?

문희: 그땐 목장이었지. 언제 내가 신들 상대로 영업하는 글로벌 복합 리조트 사업에 대찬성했다고 그래? 난 목장이나 계속 하자고 했잖아.

승희: 그건 맞아! 리조트는 내가 대찬성했지.

세경: …창희 언니, 이 두루마리 구간삭제는 안 돼?


- 등록 귀중품 목록 -

매화: 프리드리히 씨는 현신을 갖추고 민간에서 일을 하고 있기에 자신의 신성을 일부러 감춘 채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생전의 소유물 대부분은 운더베르크의 은둔지에 두고 나왔으며, 서천에 반입 품목으로 신청한 물품은 얼마 없습니다.

창희: 독일어 성경 한 부, 왕관과 십자가 보주와 기병도, 백마 한 마리. 말은 우리 목장에 위탁하고 있는 게 맞지? 말 이름은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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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

매화: 그게, 이 친구는 아직 이름이 없습니다.

이 백마는 좀 특이합니다. 보통 고객들의 개인 마필들은 신계의 것이거나 생전에 함께한 녀석들인데, 어느 쪽에도 해당하지 않거든요. 아무래도 프리드리히 씨를 인격신으로 모신 독일 사람들이 그를 왕이자 십자군 기사로서 숭앙했기 때문에 그 윤곽의 하나로 함께 모셔진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신위에 오르면서 새로 갖게 된 말이라 이름이 붙여진 적이 없다는 겁니다. 프리드리히 씨에게 여쭤보니 그냥 짓지 않겠다더군요. 영물답게 소리쳐 부르지 않아도 잘 따라서, 우리 목장에서도 별도로 이름을 지어주진 않았습니다. 언젠가 본인이 원할 때 짓지 않을까요.

창희: 오호… 신기한 경우네.

매화: 먹이로는 선심꽃을 곁들인 목초에 보리를 섞어서 주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전쟁 영웅의 기백이 담긴 영물이라 화의 기운을 다스릴 필요가 있거든요.

자, 그럼 다음은 귀중품 보관고에 반입한 물품들 차례입니다. 우선 프리드리히 씨가 등록했지만 지금 프리드리히 씨의 소유가 아닌 물건들이 있어서 먼저 처리하겠습니다. "대제" 카롤루스 씨의 레갈리아입니다.

창희: 사실 나도 좀 놀랐어 이건. 서천에 처음 온 날부터 남의 분실물을 반납하겠다는 손님은 몇 세기 만에 처음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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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성-0995 "대제"
카롤루스 마뉴스.

매화: 이례적인 경우였죠. 이 보물들은 이름 그대로 카롤루스 씨가 대관식에 사용했던 예물들입니다. 카롤루스 씨 사후에 프랑크 왕국이 쪼개지고 위기를 겪는 동안 사라져버렸고, 이후 신성 로마 제국에선 재현품을 사용했죠. 이후 카롤루스 씨의 유해는 아헨 대성당 지하에서 찾았지만 보물들은 찾지 못했는데, 프리드리히 씨가 찾은 겁니다.

아무래도 프리드리히 씨는 중세 당시에 자신이 모아두었던 소문들을 토대로 추적해서 이것들을 찾아낸 모양입니다. 사실 흥미로운 건 여기부터인데, 1918년 이후로 모습을 감추었던 프리드리히 씨가 다시 활동을 시작한 게 카롤루스 씨의 보물들을 찾아낸 후라는 겁니다. 이게 그에게 뭔가 확신을 줬던 걸지도 모르겠네요.

이 왕관과 십자가 보주, 기병도는 방금 말씀하신 대로 프리드리히 씨가 서천에 처음 방문할 때 가져와서 분실물이라고 맡겼습니다. 원래 주인인 카롤루스 씨에게 전달하자 무척 놀라고는 프리드리히 씨를 당장 만나고 싶다 했었죠. 그렇게 둘은 친우가 되었고, 물건들은 귀중품 보관고에 맡겨두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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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 성경.

창희: 마지막으로 그리스도교 성경 한 부. 이것도 귀한 거라더라. 마르틴 루터 씨의 1534년판 독일어 완역 성경인데, 당대의 것이란 건 우선 확실하고 어쩌면 초판본일 지도 모른다 하더라고. 전에 이 책에 대해서 프리드리히 씨랑 얘기해본 적이 있거든. 산중에 잠들어 지낼 시절에 도래까마귀를 살피러 보냈던 아이가 갖고 온 게 그 책이었다고 했어.

처음 봤을 땐 당황스러웠다데. 라틴어가 아닌 성경도 그날 처음 봤는데, 적혀있는 말도 자신이 아는 독일 말이랑 너무 달라서 첫 날엔 그냥 치워버리라 했다나 봐. 그래도 그때부터 차근차근 읽긴 읽었던 모양이야. 그리스도교 성경이야 로마 이후 유럽의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텍스트라서, 잘 안 읽혀도 알던 내용으로 끼워맞출 수 있을테니까.

그 얘기를 듣다보니 좀 궁금한 게 있었지. 물론 인간 출신의 신들은 생전의 지식에 매이는 경향이 강하지만, 그래도 모국어 정도는 조금 변했더라도 신통력으로 이야기하면 충분히 통했을 거거든. 그런데도 굳이 공을 들여서 요즘 말을 배운 걸 보면, 스스로도 백성들에게 다시 돌아갈 때를 기대하고 있었던 게 아니냐, 그렇게 물어봤단 말이야. 그러니까 껄껄 웃고는 그 기대는 산을 내려온 후로 산산히 깨졌다고 하더라.

매화: 그의 백성들이 큰 전쟁을 불러일으켰으니 말입니다. 그것도 두 번 씩이나.

창희: 그렇지. 뭐 그래도 그 덕에 지금 현생에서 활동할 때 톡톡히 써먹고 있으니 헛된 노력은 아니었다고 해야 하나. 그래도 난 솔직히 굳이 인간의 모습으로 이승에 개입하려는 마음은 잘 모르겠어. 매화 너는 어떻게 생각해? 먼 옛날이긴 하지만, 너도 인간 출신이니까 공감이 가는 게 있을 것도 같은데.

매화: 뭐… 저는 그를 평가할 입장이 못 되지요. 아버지나 저와 달리, 그는 개인적 원한을 위해 그러고 있는 게 아니라는 점만 짚어드리고 싶습니다. 서천에서도 이승에서도 지금 그가 바라는 건 한결같아 보입니다.

창희: 그래… 아직 신경쓰고 있었구나. 내가 괜한 얘기를 했네.

매화: 아뇨, 괜찮습니다. 그럼 여기까지 녹음하죠.


- 회원 사교 정보 -

창희: 프리드리히 씨는 중세기 유럽 왕실 출신의 인격신들과 두루 친한 편이지. 특히 독일어권에선 "대제" 카롤루스 씨 다음가는 정도의 인기가 있고, 그 카롤루스 씨도 자기 예물들을 되찾아줬다고 프리드리히 씨를 엄청 좋아하거든. 생전에 프리드리히 씨랑 직접 적대했던 군주 중에 신위에 오른 사람이 별로 없는 덕택에 원수진 사람이 적은 것도 한 몫 하려나. 사실상 칠성관 최고의 셀럽 중 한 명이야.

세경: 그런데도 몇백 년 동안 잠수타고 있다가 2019년에서야 방문했다니, 화제가 될 수 밖에 없었겠네.

창희: 그렇지. 세경이 너도 이승에 보내진 지 한 갑자도 안 돼서 다들 언제 오느냐고 성화였는데 그이들은 오죽했겠어.

십자군 왕으로 유명한 것 치고는 정작 원정길에 죽어서 이슬람 쪽이랑도 척진 게 없다보니 사이가 제법 괜찮은 모양이야. "살라딘" 유수프 씨랑은 괜찮다 못해 도리어 절친한 편인데, 한 번 만나보자는 프리드리히 씨의 요청에 유수프 씨가 대인스럽게 응한 뒤로 부쩍 친해진 모양이더라고. 이 둘이 양 쪽을 달래고 설득한 덕분에 우리 클럽의 결투 금지 정책이 몇백 년 만에 빛을 보는 중이니 다행인 일이지.

세경: 문제는 프리드리히 씨랑 악연이 계속된 손님이 아예 없지는 않았단 거지만. 아까도 한 번 이야기했던 "사자공" 하인리히 씨라든가… 두 사람의 문제는 복잡미묘한 부분이라서 다른 신들이 말리기도 곤란한 일이더라고. 그래도 한 번 결투를 벌인 뒤에는 잠잠한 모양이지만…

창희: 그러고보면 1차 세계대전 때의 악연도 제법 있지. 그 전쟁도 그렇고 20세기의 대전쟁에는 유독 칠성관의 인격신들이 많이 개입했으니까. "브리튼의 왕" 아서 씨도 그렇고, "핀 막 쿨" 더이니 씨도 그렇고… 아 그렇지. "해적 기사" 프랜시스 씨도 이때 참전했었잖아.

프리드리히 씨가 서천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프랜시스 씨가 나한테 부탁을 한 게 있었거든? 듣자하니까 그놈의 전쟁 때 자기가 독일 카이저의 배를 가라앉힌 걸 프리드리히 씨가 담아두고 있다는 것 같으니 서로 마주칠 일이 없게 도와달라는거야. 그래서 내가 어떻게 했게?

세경: 어떻게 했는데?

창희: 바로 둘을 붙여놨지. 그 전에 프리드리히 씨랑 얘기할 때 이미 사정은 대충 들었거든. 프리드리히 씨가 전에 이승의 사람들한테 그런 농을 던진 적이 있는데, 아무래도 프랜시스 씨가 뱀동네에서 그 얘기를 전해들은 모양이더라고.

세경: 그래서 어떻게 됐어?

창희: 어찌되긴, 친구 먹었지. 그때 참전했던 인격신들은 다들 개인적으로 원한을 품고 그런 건 없어서 서로 금방 친해졌더라. 뭐, 아서 씨가 PTSD를 못 이기고 잠적한 뒤로는 따로 모임을 갖고 있진 않은 모양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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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0271 "진리의 협력자"
요제프 라칭거.

세경: 아무래도 다들 자신이 알던 것과 너무 달라져버린 전쟁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겠지. 그런 점에서 프리드리히 씨가 서천에서 즐겨 만나는 이 사람은 주목할 만 할지도. 인연관 손님 중에, "진리의 협력자" 요제프 씨가 프리드리히 씨랑 많이 친해졌더라고.

처음엔 그냥 같은 독일계니까 자연스럽게 친해진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프리드리히 씨가 굳이 먼저 만나겠다고 나선 게 조금 신기했단 말이야. 요제프 씨는 산 사람이니까, 이승에 현현해 있는 프리드리히 씨라면 지상에서도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을텐데.

창희: 글쎄, 아무래도 전 교황과 유럽의회 의원이라는 신분이 주목을 끌기 때문 아니겠어?

세경: 그런 점도 분명 있겠지. 그런데 언니, 프리드리히 씨가 이승에서 활동하면서 내걸고 있는 기치가 뭔지 알아?

창희: 글쎄…?

세경: 프리드리히 비스마르크 의원은 유럽의회 안에서도 진짜 강경한 반전주의자야.

창희: …아하. 그렇다면 이 모든 게?

세경: 응. 내 생각에, 프리드리히 씨는 우리 클럽을 통해서 진짜 원대한 목표를 이루고 싶은 걸 지도 몰라. 철저히 계획하고 준비해서 말이야. 서천에서 인심을 모을 방법부터, 누구와 친해질지까지.

창희: 하지만, 신화의 시대는 이미 끝난 지 오래야. 여기서 신들의 지지를 모은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이승의 사람들을 바꿀 수는 없을 걸. 더구나 인간들은 그들을 창조한 창세신들조차도 통제하지 못한 피조물들이잖아.

세경: 그럴 지도… 그래도 난 이 손님을 응원해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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