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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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5시

제09K기지 생활시설 숙소동

정연은 눈을 떴다.

어렴풋한 어둠이 망막에 머물렀다가 이내 떠나자,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은회색으로 은은히 빛나는 그것의 색채는 언제나 기술과 금속의 인상을 풍겼다. 인류 문명의 멈추지 않는 진보의 메타포라고 해야 할까. 그 색채로부터 오는 혐오와 이질감을 느끼면서, 정연은 오늘 하루가 끔찍하게도 좆같은 날이 될 것임을 직감했다.

귓전에서는 새벽 5시를 알리는 알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대고 있었다. 그는 옆구리에 눌린 휴대폰을 꺼내 알람을 끄고는, 간이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짧게 신음을 흘렸다.

긴 하루의 시작이었다.

정연은 침상 바로 아래 마구잡이로 던져져 있던 삼선 슬리퍼를 아무렇게나 주워 신고는 바로 숙직실 바깥으로 나갔다. 제09K기지 지하 3층 복도는 새벽임에도 수많은 사람의 인파로 가득했다. 개중에는 정연과 같이 이른 시간에 기상한 인원들도 있었지만, 아직도 수면에 들지 않은 사람들도 대다수였다. 정연은 그 거대한 피로의 흐름에 몸을 맡겼다. 아침 배식을 받기 위해 구내식당에 가기 위함이었다.

"정연."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기인 김다희 박사였다. 그 역시 어딘가 모르게 피곤한 인상을 하고 있었다. 이 기지의 모든 사람이 으레 그렇듯이.

"밤샘, 기상?"

"기상." 정연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대꾸했다. "그러는 다희 너는?"

"밤샘. 오늘은 내가 졌네."

"나도 기상이지만 2시간 눈 붙인 게 다야. 진짜 줄초상 치르겠다니까."

다희가 피식 웃었다. 두 사람은 지친 발걸음을 이끌고 구내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아침 메뉴는 간소했다. 콩나물, 김치, 제육볶음, 육개장, 콩밥. 언제나 받던 메뉴.

둘은 한적한 곳에 자리 잡아 아침을 입으로 털어 넣기 시작했다. 바글거리는 식당의 소음은 두 사람끼리의 대화를 이어가기에 충분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고민하던 건 좀 나아졌어?"

정연이 움찔하더니 불편한 얼굴로 김치를 입에 집어넣었다.

"고민이라니."

"요며칠 별로 얼굴이 안 좋길래."

아무래도 들킨 모양이었다. 정연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다희를 흘끗 보고 식사를 지속해 나갔다. 육개장의 얼큰한 풍미도 지금은 그저 느끼한 기름과 물의 배합일 뿐이었다.

"철면피 최정연이 그럴 인간이 아닌 건 내 알고 있지."

다희의 말투에는 웃음기가 담겨 있었다. 정연은 삐딱하게 대꾸했다.

"말뽄새 하고는 진짜."

"그러게 좋은 말로 할 때 말하라니까."

다희가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정연이 계속 머뭇거리자, 그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너 그 애 일로 그러는 거지?"

"그 애라니?"

통증. 가슴이 욱신거렸다. 멋모르는 척 되물었지만 정연은 무얼 묻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 애는 어제 죽었다. 차갑게 내려앉은 마음을 숨길 수는 없었으리라.

"너 못 잔 것도 그래서잖아."

여전히 농담스럽게 내뱉는 말투였지만 다희의 시선은 날카로웠다.

"넘겨짚기는."

"과학적 분석이야."

농담하듯이 이야기하지만 정연의 입은 비쩍 말라갔다. 그는 몇 술 더 뜨다 말고 체념한 듯 수저를 바닥에 내려두었다. 걱정과 탐구심이 섞인 다희의 눈은 그를 관찰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정연이 한숨을 쉬었다.

"뭐가 알고 싶은 건데."

"걱정돼서 그렇지."

"하여간 오지랖은…"

정연이 짜증 섞인 눈으로 다희를 바라보다가 식판을 들고 일어섰다. 다희가 허겁지겁 그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식당을 나서, 다시 일터로 가는 길 위를 거닐었다. 지상 3층 위치의 통로는 그들이 나선 생활시설에서 연구시설을 이어주고 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넣고 걸음을 옮기던 정연이 약간의 침묵 뒤 입을 열었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눈치가 빨라서 어디다 써먹냐?"

"거봐, 내 말 맞지." 다희가 어깨를 으쓱했다. "너무 추궁했음 미안하고."

정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희의 말이 맞았다. SCP-341-KO는 어제 죽었다. 고작해야 10살 정도나 되었을까 싶은 아이. 그런 아이가 저 먼 우주에서 죽었다. 이 세상의 섭리라는 것이 실상 말이 되는 것과 되지 않는 것의 교차라서, 손 쓸 새도 없이 그 아이는 죽고 말았다. 단지 상상력이 또래보다 뛰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일은 SCP-341-KO의 포착에서부터 시작되었다. UFO의 발견, 그리고 그 비행물체를 만든 어린아이를 추적하면서 재단은 이 일에 깊숙히 개입하고 말았다. 개입하는 것이 그들의 업무였지만 내심 정연은 이 모든 이야기가 해피엔딩으로 끝나길 바랐었다. 아이가 돌아오고, 기억소거제를 주입받고, 그리고 모든 게 일상으로 돌아가길. 그러나 어떻게 삶이란 것이 의도한 대로 굴러가겠는가.

"…심란해서 그래."

"네 맘 알아."

"아는 게 이런 식으로 나와?"

"미안하다니까."

다희가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정연은 잠시 그를 노려보다가 허공으로 시선을 옮겼다.

폐휴대폰으로 그 아이와 교신하던 기억이 났다. 통신을 맡게 된 이유가 팀 내에서 유일한 기혼자가 자신뿐이기 때문이라는 어림짐작도 떠올랐다. 맞는 말이었다. 그 팀에서 아이와 가장 친숙할 사람은 여섯 살배기 딸애의 엄마인 자신이었고, 어쩌다 보니 그런 논지로 그 아이와 가장 가까이에 접촉하게 된 사람이 되고 말았다. 결코 이성적이거나 치밀한 판단은 아니었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정연은 이를 수락했다.

잘못된 결정임을 이제야 안다.

"그애, 사진은 봤어?"

"아니. 뭐, 신원 파악한다고 이러쿵저러쿵 말은 많았지만 우리한테 그렇게 중요한 사항은 아니어서. 이름도, 얼굴도, 목소리도 몰라. 그냥… 문자만 받았으니까."

잊혀지지 않을 활자의 나열이 될 것이다. 아마 한동안은 가슴 속에 남아 아픈 상처로 머물겠지. 아무도 없는 통로에서 으레 나는 공허의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지독한 감정의 맛이 혀를 자극했다. 죄책감의 풍미였다.

"어쩌면 내가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어."

다희가 정연을 올려다보았다. 정연의 눈에는 광채가 깃들지 않았다. 정연은 혼란스럽다는 듯이 허공에 시선을 던졌다가 다시 바닥으로 이를 흩뿌렸다.

"그냥 내가 좀만 더 옆에서 제대로 지켜봤더라면 어땠을까 싶어서."

"네가 뭘 할 수 있었는데. 네 잘못 없어. 이상한 생각하지 마."

다희가 대답했다.

"넌 할 수 있는 걸 했을 뿐이야."

정연은 뭐라고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걷기로 했다. 잊는 게 맞았다. 재단에서의 또 다른 일상이라고 생각해야 했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정연은 회복이 늘 늦었다. 더욱이나 이런 일… 아이가 죽는 일이 일어나면 더더욱.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야, 최정연. 시윤이한테는 이런 일 없을 거야. 그것만 알아둬. 그걸 위해서 우리가 이렇게 죽어라 업무 보는 거 아니야?"

딸의 이름이 나오자 정연의 정신이 또렷해졌다. 그는 눈에 힘을 주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고마 우울해카고 일이나 봐라 이 문디 가스나야." 다희가 삐쭉거렸다.

"알았어." 정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네 말대로 이런 일에 매여 있을 때가 아니지. 빨리 끝내고 집에 가야 우리 딸도 보고 그러겠다. 애아빠가 고생 "

그리고 굉음이 일었다.

정연이 처음 자각할 수 있었던 건 팔에 느껴지는 끔찍한 통증이었다.

"아…윽…"

일어나려고 애를 쓰다 바닥을 짚자마자 다시 고꾸라지며 느낀 감각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알지 못한 채, 정연은 그저 살기만을 위해 몸을 움직였다. 몸을 일으키고 주변을 볼 수 있게 되자, 그는 숨을 삼켰다. 사방이 온통 무너져 있었다. 어디에선가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이게…무슨…"

멍한 의식이 차츰 돌아왔다. 어디에선가 바람이 불어와, 정연은 무심결에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눈을 부릅떴다.

그들이 서 있는 통로는 창문 하나 없이 맞은편을 향해 거닐어야 하는 구조다. 그 특유의 긴 거리와 폐쇄성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런데 지금 그 통로의 중간에서 본관시설이 보이고 있었다.

"최정연!"

다희의 목소리였다. 먼지로 아득해진 시야 너머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다희! 너 괜찮아?!"

"난 괜찮은데 그쪽으로 넘어갈 수가 없어!"

먼지가 차츰 내려앉자 정연은 다희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통로가 부분적으로 무너져내려 그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통로 자체가 붕괴할 가능성도 컸다. 흉측하게 금이 간 통로의 외벽이 보였다. 심장이 내려앉았다.

"나는 다시 생활시설로 갈 테니까, 넌 연구시설 가서 헬프사인 쳐!"

"뭐?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도 모르는데…! 자칫하다가 큰일이라도 나면 어떡해!"

"생활시설에도 사람들 많아! 걱정하지 말고 가! 이러다 통로 완전 무너지면 끝장이야!"

말이 끝나자마자 둘은 동시에 달리기 시작했다. 정연은 욱신거리는 팔을 가슴팍에 안고 뛰었다. 통로 저편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당황한 상태로 우왕좌왕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정연이 달려오는 것을 보고 덩달아 뒤로 돌아 뛰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천둥 같은 소리가 들리더니, 그대로 통로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정연을 선두로 나선 사람들은 생활시설로 도망쳐 나올 수 있었다. 모두 숨을 헐떡였다. 그들은 멍한 표정으로 방금까지 통로가 있었던 거대한 구멍을 바라보았다. 구멍 너머로 연구시설 건물이 드러나고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정연은 아연실색한 얼굴로 사방으로 시선을 던졌다. 누구 하나 제대로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단지 다가온 재앙에 당황하고 있을 뿐.

"다들 진정해요!"

누군가가 크게 외쳤다. 정연은 나이 많은 남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들고 걸어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상관은 아니었지만, 오다가다 본 적이 있는 박사였다. 직급이 꽤 높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정연은 잽싸게 사람들 사이로 걸어갔다.

"진정하세요. 경비가 올 겁니다. 주변 건드리지 말고 계단으로 내려갑시다."

"박사님, 격리 실패가 발생한 겁니까?"

군중에서 누군가가 물었다.

"자세한 건 나도 정보가 없으니까 "

늙은 박사가 말을 멈췄다. 박사는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는 것 같았으나 입에서는 무언가 새는 듯한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박사의 얼굴에 경악이 일었다. 그리고는 

박사의 머리가 폭발하고 말았다.

그리고 복도가 날아간 공간 사이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거대한 인간의 머리를 한 무언가가.

계기는 쉽게 만들어졌다. 박사의 머리 없는 시체가 앞으로 쿵, 하고 쓰러졌다. 이윽고 머리가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보았다. 공포로 굳어있던 사람들 가운데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자 그들은 일제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정연도 미친 듯이 달렸다. 다리가 아프고 목에서 피 맛이 났지만 달렸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변칙 개체였다. 아마 정연의 보안 인가로 접근할 수 없는 등급의 개체인 것 같았다. 정확히 어떤 특성이 있는 존재인지 알아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본능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저건 안된다. 도망쳐야 한다. 도망쳐야만 한다.

그의 뒤에서 달리고 있던 한 연구원이 갑자기 멈추어 서더니, 앞으로 고꾸라지면서 폭발했다.

잡히면 죽는다.

정연은 흔들려서 아픈 팔을 애써 부여잡은 채 아래층으로 달렸다. 두세 명의 낙오자들이 계단에서 굴렀고, 이내 비명을 지르다가 차례차례 폭발했다. 흰 벽에 검붉은 얼룩이 튀었다.

놈은 가장 마지막에 뒤처지는 인물을 붙잡아 죽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규칙을 판단하기도 전에, 앞서 가던 인물의 머리가 터지는 광경을 목격하고만 정연은 방향을 틀어 최대한 먼 곳으로 달려갔다. 욕지기가 치밀었지만 생존본능이 더 먼저였다. 폐가 불타는 것처럼 아팠다. 운동에 익숙지 않은 몸이 이곳저곳 삐걱대며 속도를 저해했다. 그러나 정연의 정신은 한 걸음 더, 한 걸음 더 달리라고 몸을 채근했다. 죽음이 등 뒤에 있었다.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며 다시 한 번 허공으로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까 부러진 곳으로 벽을 받아버린 정연은 다시 한 번 비명을 지르려고 했다가 간신히 참아내었다. 몸 전체가 아팠다. 이러다 잡혀 죽는 게 아니라 실족해서 죽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여기서 몸을 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 머리가 뒤쫓아 오고 있을 것이다.

손발이 차가워지고 강렬한 불안이 심장을 쥐어짰다. 거의 몸으로 문대다시피 하며 정연은 벽을 짚고 일어났다. 여기서 달아나야 한다. 그 존재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것으로부터 멀리 도망쳐야 하는데,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가늠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몸을 일으킨 정연은 눈앞에 그 머리가 떠 있는 것을 보았다.

특징 없는 이목구비와 기이할 정도의 광채를 내뿜는 눈. 검은색 홍채가 정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정연의 입에서 한숨처럼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죽는구나.

머리의 아래에서 부속지가 흘러나왔다. 그리고는 그 말단을 정연에게 향하였다. 아마 저것이 인간을 사로잡아 터트리는 기능을 하겠지. 정연은 눈을 감았다. 죽음은 피할 수 없었다.

일 초도 안 되는 시간이 점점 느려진다. 이게 주마등일까.

여기서 이렇게 죽을 줄 알았더라면 아이와 남편에게 더 사랑한다고 말해둘걸.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부속지가 점점 다가온다.

꽉 쥔 손이 떨렸다.

바람은 왜 이리 거센지.

저도 모르게 맺힌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제 끝이구나.

그러나 죽음은 오지 않았다.

정연이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것은 오로지 빛이었다. 눈을 아프지 않게 어루어 만지는 종류의 불빛이었다. 그 빛이 머리에 직격하고 있었다. 머리가 건물의 내벽을 부수고 저편으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정연은 자각하지도 못한 채 서서히 바닥에 주저앉았다.

"…뭐야?"

머리는 자신의 부속지를 사용해 벽에 달라붙으려고 한 것 같았지만, 빛이 날아가 그 살덩어리를 아예 태워버렸다. 끔찍한 비명이 일면서 머리가 다시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러나 무슨 공격도 하기 전에, 빛이 불꽃으로 화하며 거대한 불기둥으로 변하였다. 주변의 공기가 열기를 띠기 시작했다. 머리는 도망치려는 듯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 존재는 불기둥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머리가 내지른 단말마가 공기를 뒤흔들었다.

기둥은 다시 작은 불꽃으로 변하였다. 불꽃은 이내 일렁이며 정연의 앞으로 날아들어 왔다.

"…당신은…"

정연이 띄엄띄엄 말을 하기 시작했다.

"놀라셨죠? 죄송해요 선생님."

정연의 눈이 커졌다. 불꽃에서 말소리가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놀라기에는 일렀다. 불꽃이 천천히 걷히더니 한 남자가 그 안에서 걸어나왔기 때문이었다. 갓 성인이라도 되었을까, 상당히 앳된 얼굴의 소유자였다. 길게 기른 머리가 등까지 내려오는 듯했다. 턱과 뺨에 작은 흉터가 있었지만, 그게 남자의 소년 같은 인상을 해치진 않았다. 피터 팬을 연상하게끔 하는 모습이었다. 다만 피터 팬이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식 양복을 입고 있으며, 팅커벨 없이 혼자 날아다닌단 점이었지만.

"…당신 누구야?"

남자가 눈을 내리깔았다.

"선생님께 크게 도움받은 사람이요."

정연이 자신의 팔을 부여잡고 그를 노려보았다.

"나는 당신 같은 사람 몰라."

남자는 대답 대신 정연에게 다가갔다. 그의 시선은 정연의 팔에 고정되어 있었다. 정연이 흠칫 물러서자, 남자가 입을 열었다.

"저는 선생님 안 해쳐요. 그건 믿으셔도 돼요."

"나는 "

"제가 만약 선생님을 해치고 싶었다면 저…" 남자가 뒤를 가리켰다. "뭐냐, 엄청 큰 머리에서 구해 드리지도 않았을 거에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정연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서 있자, 남자가 조심스럽게 정연의 다친 팔을 잡았다. 그리고는 다른 손에서 불꽃을 피어오르게 했다. 불꽃의 색깔은 이전과 달리 초록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가 불꽃을 정연의 팔에 갖다 대자, 놀랍게도 팔의 통증이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 붓기마저 사라지고 있었다.

"…당신 무슨 치유 능력이라도 있는 거야?"

"말하자면요. 이쪽이에요."

남자가 앞서 걸어가고는 정연에게 빨리 따라오란 신호를 보냈다. 위협은 없어졌지만 정연은 여전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당신은 누구고 왜 날 도와주는 건데?"

"말씀드렸잖아요. 선생님이 절 도와주셨으니  아, 선생님, 그쪽으로 가면 무너져요. 이쪽으로 오세요."

정연은 남자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미처 보지 못했는데, 바닥에 심각한 균열이 나 있었다. 물리력도 그렇게 강한 것 같지는 않았는데 어떻게 이런 피해를 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그 머리를 물리친 이 존재는 대체 뭘 하는 사람인지. 아니 애초에 사람이긴 한 걸까.

"당신, 이름이 뭐야?"

"이윤강이요. 물 깊고 넓을 윤에 굳셀 강."

"상세하네."

"…엄마가 지어주신 이름이라서요."

윤강의 목소리가 차갑게 내려앉았다. 정연은 그의 얼굴을 곁눈질했다. 그의 얼굴은 잠시 굳어있었다. 항상 발랄하던 얼굴이 굳자 갑자기 전혀 다른 사람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윤강의 얼굴은 다시 활색을 띠었다.

"선생님은요?"

"나? 최정연… 나한테 도움받았다면서 이름도 모르는 거에요?"

"선생님을 직접 뵌 적은 없었거든요. 문자로만 이야기를 나눴죠."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정연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어제의 일을 아는 건가? 이 남자가, 어떻게 그 일을 알 수 있는 걸까.

"여기가 연구시설이죠?"

남자의 말에 정연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다른 곳으로 돌아온 연구시설은 살짝 무너진 것을 제외하면 외견상으로는 꽤 괜찮아 보였다. 그러나 윤강의 생각은 좀 다른 것 같았다.

"…이거 큰일이네."

정연이 윤강을 바라보았다.

"안이 심각하게 무너졌어요. 몇 분한테서 생명이 느껴지지 않아요…안에 사람들이 갇혀 있어요."

윤강이 인상을 찌푸리더니 온몸에 불꽃을 두르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보아하니 저 불꽃이 옷을 태우진 않는 모양이었다. 불꽃이 점점 커지더니 빠른 속도로 연구시설 내부로 돌진해 들어갔다.

몇 분의 시간이 지나자 불꽃이 다시 바깥으로 나왔다. 한 무더기의 사람과 함께.

각각 불꽃에 휩싸여 윤강의 불꽃과 연결된 상태로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던 연구원과 경비들은 비명을 지르다가 바닥으로 착지 당했다. 윤강을 아까의 머리랑 비슷한 존재로 여긴 모양이었다. 그러나 죽지 않고 밖으로 나온 것을 자각하자 다들 어안이 벙벙한 상태였다. 정연은 이마를 짚은 채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다희에게 다가갔다.

"야, 너 괜찮아?"

"정연이냐? 너 안 죽었구나!"

"죽긴 뭘 죽어."

정연이 다희를 찰싹 때렸다. 다희가 낄낄거리면서 일어나려고 버둥거렸다. 그나마 마음이 놓이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살아있지 않은가. 비록 아직도 도움을 주고 있는 저 존재의 정체가 뭔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지만.

그림자가 휘청였다.

정연은 머리 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연구시설의 테라스가 무너져 그들의 머리 위로 추락하고 있는 장면을 목격했다.

윤강이 그들에게로 날아온 것은 그때였다. 그의 손에서 불꽃이 일었다. 이윽고 그 불꽃이 급격히 불어나더니, 이내 어떤 문양을 그리며 일종의 진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윤강이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곧 불꽃이 진의 형태를 따라 반구형의 장막을 이루었다.

테라스였던 석재의 파편이 장막에 충돌하고는 산산조각이 나서 바닥으로 흩어졌다.

정연은 무의식중에 다희를 끌어안았던 팔을 풀고는 갑작스럽게 일어난 사태에 멍해져 있는 다희를 옆에 내려두고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흙먼지에 눈이 따가웠다. 그러나 알아야만 했다. 이렇게 실력 있는 현실조정자가 왜 그들을 자꾸 구하려고 하는지. 어느새 장막은 사라지고 없었다. 인원들이 일어나 안전한 구역으로 재빨리 몸을 피하고 있었다.

그리고 윤강 역시 사라지고 없었다.


아침 8시

경상남도 진주시 상대동

정연은 시윤이 어린이집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도 몇 분을 더 기다렸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오늘은 남편의 근무일이었고, 따라서 정연이 오늘 시윤과 함께 생활하는 차례가 되었다. 재단에서 근무한다는 게 영 쉬운 일이 아니란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육아에까지 이렇게 힘들 줄은 누가 알았을까. 그나마 정연의 남편이 반쯤 휴직 상태에서 아이를 키우고 있었기에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남편의 직무가 현장에서 있을 필요도 없었기 때문인 사실도 한몫을 했지만.

재단에서도 솔루션을 아예 제시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재단 산하의 보육시설에서 아이를 맡아주겠다고 온 제의도 벌써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러나 정연이나 남편이나 둘 다 이에는 찬성하지 않았다. 사실인즉 정연은 자신의 딸을 변칙과 무관한 상황에서 생활하게끔 해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러나 재단에서 무슨, 그리고 어떤 교육을 시킬지 누가 아는가. 게다가 재단에 엮인단 건 그만큼의 위험도 있다는 사실도 모르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가장 소중한 아이를 직접 키워내고 싶은 것도 그들의 욕심이었으니.

정연은 지친 몸을 이끌고 귀가하는 길에 올랐다. 아이는 오후 4시 즈음에 셔틀버스로 집에 돌아온다. 그러니 그때까지 좀 자두면 아이와 놀아줄 수 있을 것이다. 올해로 6살이 된 아이는 부쩍 몸을 쓰는 놀이에 심취해 있었다. 운동선수라도 되려는지 꼭 축구나 농구에 그렇게 관심을 보이는 것이었다. 아마 키는 엄청 크겠다고, 남편은 퍽 좋아했지만 일에 시달리고 난 다음 날 아이와 놀아줄 때는 꽤 힘이 달리는 것이 사실이었다. 늙은 모양이라고, 정연은 그리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직장은 사람을 늙힌다는 이야기는 아주 오래전부터 증명된 명제였다.

모퉁이를 돌았을 때, 정연은 그늘진 곳에 서 있는 윤강을 발견했다.

"…당신은."

"안녕하세요, 선생님. 저번에 그냥 가서 죄송했어요. 선생님이— 그러니까 다른 선생님이 제게 옥리… 아차, 재단 사람들이 많은 곳에선 바로 나오라고 하셔서요."

정연은 잠시 멈춰 서서 윤강을 바라보았다. 몸은 축축 처지고 정신은 금방이라도 잠들 것 같았지만, 지금 그럴 때가 아니었다. 정연은 알아야만 했다. 이 남자가 누군지를. 그리고 SCP-341-KO와의 일에 대해 얼마나 아는지도.

"…잠깐 커피라도 할래요?"

윤강은 가시방석 위에라도 앉았는지 묘하게 주눅이 든 자세로 의자에 앉았다. 사주겠다는 말에 윤강은 아이스티를 주문했다. 무슨 맛으로 할 거냐고 물어보자 도리어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쳐다보자, 정연은 속으로 혀를 내두르고 기본인 복숭아 맛으로 주문했다. 입에 맞는 것 같으니 다행이었지만, 정연은 이 남자의 내력을 점점 더 짐작할 수 없게 되었다.

"죄송해요, 제가 카페는 처음 와 봤어요."

"학교 다닐 때 오지 않나? 친구들이랑. 보아하니 고등학교 졸업한 지 안 되어 보이는데."

"저 학교는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만 다녔어요."

정연은 살짝 놀란 얼굴로 윤강을 바라보았다.

"미안한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봐도 되나요?"

윤강은 말없이 아이스티를 마셨다. 그가 대뜸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아이스티에 다른 맛이 있나요?"

"네? 음…그래요, 레몬 맛도 있죠."

"저는 다른 맛이 있는 줄 몰랐어요."

윤강이 조용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엄마는 한 달에 한 번 저랑 만나면 늘 복숭아 맛 아이스티를 사주셨죠. 그리고는 식당에 가서 맛있는 걸 먹었어요. 중화 요리. 왜 맨날 중식당일까 생각은 했지만 그땐 전혀 몰랐죠. 알 필요도 굳이 없었지만."

윤강이 피식 웃었다.

"그냥 엄마를 보는 게 좋았거든요. 아빠랑 있을 때는 늘 아프고 슬펐으니까."

그가 정연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그때 제가 무슨 생각으로 우주로 떠나고 싶어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저는 분명 우주를 좋아했지만, 다른 아이들은 우주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도 직접 떠날 생각은 하지 않잖아요. 어쩌면… 거기서 도망치고 싶었을지도 모르죠. 아빠가 절 때리고 학대하던 그 집에서 도망가고 싶었던 걸지도요."

윤강이 힘없이 미소 지었다.

"그렇게 떠난 여행이 지옥이 될 뻔했지만, 선생님이 절 이끌어 주셔서 살아남은 거에요."

정연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앉아있었다. 윤강이 크게 숨을 들이쉬더니, 주머니를 뒤적거려 무언가를 꺼냈다. 폐휴대폰이었다.

"…이거…"

"그때 정말 감사했습니다, 로켓연구소 선생님."

정연이 눈을 크게 뜨고 윤강을 바라보았다.

"하, 하지만… 이건…"

"그때 선생님이 없었더라면 전 더 일찍 낙오했을 거에요. 그렇게 되었더라면 아마 전 선생님… 그러니까 다른 선생님을 만나지 못하고 얼어 죽었겠죠."

"하지만…어떻게 네가…" 정연의 목소리가 잦아들어, 거의 속삭이는 듯한 음성이 났다. "그 아인… 그저께에…"

"죽었다고 생각하셨겠죠."

윤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글쎄요, 선생님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이해해요. 그때 그 아이는 고작 10살이었는데, 어떻게 제가 그 아이일 수 있는지도 믿기 어려우실 거에요."

정연이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제가 어떤 계획을 짰는지 기억하세요?"

"…PoI-3410은 태양계의 천체를 관람하고 존재하지 않는 행성으로 떠난다고 했어."

"전 실제로 그 행성에 갔어요." 윤강이 차분히 말을 이었다. "우리 우주에는 당연히, 그게 존재하지 않죠. 하지만 그 당시 전 제 능력을 주체하지 못하고 달성되어야만 하는 계획을 세웠어요. 다시 말해 그 계획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당연하게 만든 거죠. 그래서…자연스럽게 그게 있는 으로 가게 된 거에요. 그 행성이 존재하는 다른 우주로. 제 선생님께선 그걸… 어떻게 부르셨는데."

"평행우주." 정연이 중얼거렸다.

"맞아요, 평행우주."

윤강이 잠시 웃음을 거뒀다.

"제 여행을 끝낼 수가 없었어요. 제가 그렇게 되길 의욕했기에, 그 의욕을 완수하기 전에는 이 여행을 시작한 저조차도 그걸 끝낼 수 없었죠. 제가 죽든지, 아니면 끝까지 살아남아 그 여행을 끝내든지…"

그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저는 정말 죽어서 그 여행을 끝낼 뻔했지만, 그렇게 되진 않았어요. 대신 저는 선생님을 만났고, 친구들을 만났어요. 선생님께선 절 살려주시고 능력을 조율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셨어요.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제 힘이 절 해치지 않게."

남자가 등을 쭉 폈다.

"그러던 와중에 여행이 끝이 났어요. 저는 선생님과 함께 이 우주로 다시 넘어왔지만, 넘어온 시기에 오차가 생겨버리고 말았어요.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 우주에 넘어와 버렸거든요."

윤강이 조금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학교에 못 간 건… 그래서에요. 전 공식적인 신분이 없어요. 학교에 재학하려면 그런 게 있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게다가 제 부모님도 절 못 알아보시니까…어쩔 수 없었죠."

"그 선생님이라는 자는…누군데?"

"이 우주에서는 팡글로스라고 불리는 분이죠."

정연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팡글로스, 재단 데이터베이스에서 가끔 등장하는 인물이었다. 변칙적으로 문제가 있는 곳에서 민간인을 돕는 등의 선행을 하는 듯한 요주의 인물이었다. 그런 존재가 그 소년을 살렸다면, 그리고 지금 하는 이야기가 전부 옳다면…

"…난 당신의 말을 그저 믿어줄 수는 없어. 이것만은 알아둬."

"네, 선생님. 이해해요."

윤강이 작게 웃었다. 그때 오갔던 일련의 교신과, 그 문자 너머의 소년이 떠올랐다. 그 아이가 웃는 가공의 모습이 뇌리를 스쳐지나 갔다. 두 이미지는 놀랄 정도로 비슷했다. 혼란스러움을 몰아내려고 정연은 눈을 감았다. 윤강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연은 눈을 뜨고 젊은이가 자신의 컵을 카운터에 가져다 두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가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돌아왔을 때, 정연은 저도 모르게 물었다.

"그럼 난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지?"

"선생님을 늘 가슴 속에 기억하고 있었어요. 한 번 뵙고 감사드리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그 연결을 역추적했고, 누가 교신을 맡았는지 감지했어요. 선생님이셨죠. 물론 이름이나 모습은 전혀 몰랐으니까… 직접 찾으러 갔고요. 공교롭게도 그런 일이 일어났지만…"

정연은 아무 말 없이 윤강을 바라보았다. 자기도 모르게 가슴 속을 메우던 한 문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때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했어, 얘야."

윤강이 빙긋 웃었다.

"아니요, 그때 절 살린 건 선생님이세요."

그리고 그는 이전과 똑같이, 시야 저편으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마치 불꽃이 사그라지듯이.

그러나 정연은 그 불꽃이 아직 저 너머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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