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부스러졌다. 그녀는 D동의 빨간 버튼에 대해서 생각했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해는 벌써 저버렸고 기지는 폐쇄되었을 것이다. 이대로 밤이 찾아올 때까지 우두커니 서 있는 것 말고는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밤이 찾아온 뒤에는 어떻게 될까?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
펠릭스는 흠칫하며 뒤돌아보았다. 중절모를 쓴 양복 신사가 서류 가방을 들고 서 있었다. 그녀가 말없이 묻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남자는 망설임 없이 가방을 열어 그녀 앞에 대보였다.
"이건……."
열쇠였다.
"이걸 어떻게…… 분명히 모든 SCP를……"
"그게 내가 하는 일이지."
그녀가 조심스럽게 만능 열쇠를 집어들고 고개를 숙여 그것을 빤히 쳐다보았다.
"당신은 내가 버튼을 누르길 바라는 거야?"
아무도 아닌 자는 중절모를 기울여 인사하는 시늉을 할 뿐이었다. 펠릭스는 열쇠를 쥔 손에 힘을 주며 천천히 돌아섰다.
검은 인간들은 얼핏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들은 자신이 누구를 공격해야 하는지, 아니면 공격을 해야 하는지 헤매고 있는 것 같았다. 꼭 화이트를 보았을 때만 그랬다. 레버는 이 또한 화이트의 능력임에 분명하다고 되뇌었으나, 그들이 자신을 돌아보았을 때 내비친 적의를 발견하고 그것이 오직 자신을 향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검은 인간들은 단지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뿐이다. 재차 생각해보니 당연한 것이었다. 흰 것과 검은 것. 화이트가 사라지면, 그때야말로 그들의 모든 것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가 화이트를 잡아야 하는 걸까? 아니면 놓아주어야 하는 걸까? 검은 인간들도 그 사실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들은 아직까지 그들의 술래잡기를 방해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를 붙잡는 것이 과연 빛을 구하는 일인 것인지, 빛을 가두는 것인지. 확신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도박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레버는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화이트, 기다려!"
"패닝, 이러고 싶지 않다."
테이트는 휠체어를 타고 있는 남자에게 권총을 겨누고 있었다. 그의 동생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웃기만 했다.
"그럼 하지 마."
괴상하게도 테이트는 마음이 약간 누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어깨에 금 간 사람한테 이런 일을 시킬 작정이냐?"
"진짜배기 장애인한테 이러고 있으면서 어디서 눈물을 팔아?"
웃음이 터졌다. 꼭 옛날 같군.
"그래. 우리가 이 세상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기 전처럼 말이야."
테이트의 팔이 미약하게 떨려왔다.
펠릭스는 연달아 격리 셔터를 열면서 더딘 걸음으로 복도 끝을 향해 나아갔다. 뒤편에 소란이 이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지만 그녀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막다른 길에 다다르는 것은 쉬웠다. 그녀는 띄어쓰기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관련자외 출입엄금'이라는 문구가 크게 새겨져 있는 철문을 향해 열쇠를 가져다 댔다. 문이 천천히 열리자 병원에서나 볼법한 기계 장치들이 즐비한 방이 나타났다. 그럼 저건…… 진정제인가…….
"따라오지 마요!"
술래잡기를 하던 내내 처음으로 화이트가 입을 열었다. 레버는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따라오지 말라고요!"
그녀는 복도를 내달리면서도 내내 방 하나하나를 살피고 있었다. 레버가 절망스럽게 외쳤다.
"누굴 찾는 거야? 나 말고 누굴 찾고 있는 거냐고?"
"형은 날 못 쏴."
두 사람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테이트는 입꼬리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억지로 그 얼굴 표정을 굳혔다.
"쏠 수 있어."
"못한다니까."
"시간이 없어, 패닝."
"그럼 날 쏘셔야겠네."
"원망하지 마라."
"그럴 리가 있겠어."
주머니 속에서 딱딱하게 각진 무언가가 허리를 스쳤다. 테이트는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웃는 이를 억지로 깨물며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경고
제██기지 메인 콘솔 시스템
공격 감지됨
재단의 모든 활동이 적색경보 상태입니다.
테이트는 고개를 떨군 패닝의 품 안에서 스위치를 꺼냈다. 버튼을 눌렀지만 이내 그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장치를 뒤집자, 테이프로 붙여놓은 종이가 나타났다.
'형은 정말이지 변하질 않네. 설마 내가 스위치를 가지고 다닐 거라고 생각한 거야! 웃겨!'
테이트는 패닝의 머리 위에 스위치를 가볍게 집어던지고 휠체어 곁에 풀썩 앉았다. 마지막까지 골치 아픈 자식.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들을 바라보았다. 허리에 뭔가 걸리는 느낌이라 주머니에 무심코 손을 집어넣었는데 담뱃갑이 잡혔다. 테이트는 황금빛으로 코팅된 그 종이 케이스를 꺼내더니 한 개비를 뽑아서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인 뒤 한 모금을 빨아들인 다음, 그는 기침을 하면서 오만상을 찌푸리며 담배를 뽑아냈다.
"쿨럭, 쿨럭, 빌어먹을, 이딴 걸 뭐하러 피우는 거야?"
펠릭스는 물끄러미 화면을 바라보며 빨간 버튼 위로 손을 들어 올렸다. 아이작, 누나는 못 갈 것 같다. 그래도 열심히 노력했는데. 너랑 나는 처음부터 뭔가가 달랐던 걸까? 계속 모래 늪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기분이었어. 모래알들을 계속 삼키고 있는 것 같은 기분. 가슴속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하지만 더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네.
그녀는 이것을 포기라고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녀가 손을 떨어뜨렸다. 그녀는 언제나 빨간색이 싫었다.
"화이트!"
그가 가녀린 팔을 붙잡았다.
"잡았어." 그는 그 사실을 믿기 위해 한 번 더 되풀이했다.
"내가 널 잡았어."
황홀한 표정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레버는 더 이상 다른 행동을 취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냥 그대로 서 있었다.
갑자기 모든 것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꿈에서 깬 것 같다. 레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들은 복도 끝에 다다라 있었다.
경고─원거리 유도형 발사체가 접근 중입니다.
레버가 다시 화이트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그렇지만 생소했다. 그녀는 꽤 긴 시간 동안 그 상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충돌 예상 시각 10초 전.
화이트가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했다. 레버는 동시에 그녀의 뒤편에서 '관련자외 출입엄금'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문을 발견했다.
7.
붙잡은 손을 놓아줄 찰나의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에는 슬픈 분노가 담겨있다.
3.
레버는 처음부터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