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드 온 안개 낀 피난처
lecture.jpg

"……따라서 달 기반 마술에 대한 이해는 달의 주술적 특성을 이용해 만들어진 마술 구조가 존재한다고 할 때, 이 구조 하에서는 어떤 예외도 없이 달이 제일 으뜸가는 주체가 되며 술식을 어떻게 설계하였는지와 관련 없이 설계자 또는 실사용자는 객체 또는 달에 이어 두 번째 주체로서 술식 내에 위치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백 퍼센트 받아들였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거지. 질문?"

"저요."

"그래 휘영아."

"이거 꼭 배워야 돼요? 너무 어려운데요."

"……네가 밥먹듯이 쓰는 마술이 이거잖아."

"그래서 하는 말이에요. 제가 마술을 쓸 때는 그냥 하면 되던데요."

"네 그런 체질이 얼마나 많은 마술사들의 질투의 대상이 되는지 알고서는 하는 말이냐?"

"그래서 강 작가님이 저 괴롭히시는 거에요? 저 질투해서?"

나루는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달의 파편으로부터 태어난 아이라지만, 역시 아직 정신적으로는 청소년에 불과한 휘영이에게 자기 자신이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시키는 건 무리인 듯 했다.

"그래 나도 모르겠다. 관두자. 앞으로 갑자기 달빛으로 변신하지 못하게 되거나 눈이 어두워져도 후회하기 없기야."

"콜."

"다른 질문 있어? 방금 내가 얘기한 거랑 상관 없어도 되니까."

"저요."

"그래 휘영아."

"저 아닌데요?"

"그럼 누구야?"

나루는 그제서야 칠판에서 몸을 돌려 반대편을 바라보았다. 나루가 자신의 안전 가옥 안에 마련해 놓은 조촐한 강의실의 맨 앞 줄에는 금발금안의 여자아이 한 명, 그리고 후줄근한 차림의 검은 머리 여성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두 사람 다 지루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림이구나, 누군가 했다. 그런데 무슨 질문이?"

"여기서 뭐 하세요?"

"마술 강의."

"아니, 그러니까 배달 물품 수령하러 왔는데 왜 형이 여기서 나오냐고요. 지금쯤 본부에서 서류작업하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의뢰인이 나니까 내가 여기 있지. 그리고 나도 좀 쉬자, 림아."

나루는 그렇게 말하며 강의실 탁자 옆에 놓여 있던 상자를 손으로 톡톡 두들겼다. 능구렁이 손의 젊은 맹원이자 언제나 쉬고 싶어하는 배달부 이림은 그 상자를 눈에 담는 순간 얼굴을 찌푸렸다.

"누구한테 맞았냐, 표정이 왜 그래." 나루가 이림의 찌푸린 얼굴을 보고는 물었다.

"그게 오늘 배달할 물건이에요?" 이림은 의심스럽다는 투로 되물었다.

"응."

"저 차 저기 공영주차장에 대고 왔는데요."

"그러면 거기까지 들고 가야겠네."

"걸어서 5분 거리인데요?"

"그러면 5분 동안 들고 가야겠지."

"아, 형, 제발요. 딱 봐도 한 사람이 들고 갈 수 있는 사이즈가 아니잖아요."

아닌 게 아니라 실제로 그 상자는 이림이 배달부 일을 하며 자주 볼 수 있었던 골판지나 스티로폼 상자 따위가 아니었다. 마치 유서깊은 부잣집에서나 볼 법한, 질 좋은 목재에 검은 칠을 하고 반짝이는 자개 조각을 박아 넣은 커다란 함이었다. 함의 여닫는 부분에 달려 있는 해태 형상의 거대한 자물쇠에 시선이 닿은 이림은 실시간으로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다행히도 나루는 이렇게 덧붙였다.

"내가 설마 너더러 그걸 혼자 들고 가라고 하겠니. 내가 같이 갈 거야. 그리고 보기보다는 안 무거울 테니 그만 투덜거리고 이제 일어나."

"예에,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저기 휘영이도 좀 깨워라. 하여간 얘는 밤에 좀 자라니까 안 자고 왜 지금 이러고 있냐?"

"형이 데리고 다니는 아이잖아요. 제가 어떻게 압니까."


"휘영아?"

"예?"

"오빠 좀 도와주지 않을래?"

"응원은 해 드릴 수 있어요."

"아냐, 됐다. 으으으윽."

이림은 함의 왼쪽 밑을 들고 나루와 함께 끙끙대며 공영주차장으로 이어지는 골목길을 힘겹게 걸어갔다. 이림의 배달용 자동차인 풍뎅이호는 그곳에 주차되어 있었다. 대장이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그 녹색 다마스는 외형만으로도 능구렁이 손을 예의주시하고 있는 단체들의 눈에 띄기 충분했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이림의 차가 너무 눈에 띈다는 이유만으로 곤욕을 치른 적은 없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두 사람은 수 분 간의 고생 끝에 간신히 뒷좌석에 함을 올려놓았다. 양손에 조금씩 감각이 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이림은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었다.

"휴우, 이제야 좀 편하게 가겠네. 미멜라, 길 좀 열어줘."

"쿠리어 제이드, 아직 차 문이 열려 있어요." 이림이 시동을 걸어 깨운 풍뎅이호의 길 안내 AI는 평소처럼 목적지를 재확인하는 대신 이렇게 대답했다.

"운전석 문 닫혀 있는데?"

어리둥절한 이림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차 뒷좌석에는 오늘의 배달 물품인 나무상자 외에 다른 무언가가 더 올라앉아 뻑뻑한 뒷좌석 미닫이 문을 끙끙대며 닫으려고 하는 중이었다.

"휘영아?"

"네?" 휘영이 헉헉거리며 대답했다.

"그 문 왜 연 거야?"

"……차에 타려고요?"

"너가 차에 왜 타?"

그 순간 조수석 문이 열리면서 나루가 들어왔다. 나루는 평온한 모습으로 조수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잘 매고는 뒤에서 들리는 소란에 몸을 돌려 휘영을 바라보았다.

"안 닫혀?"

"이거 고장난 거 아니에요? 아무리 잡아당겨도 안 닫히는데요."

"그거는 차체잖아. 문을 잡아당겨야 닫히지."

"아."

"저기요, 가고 싶으신 곳이 있으시면 길을 열던가, 택시를 잡던가 하세요. 이게 뭐에요 진짜." 이림은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와중에도 평정을 유지하며 말했다. 사실 그녀가 받은 의뢰는 어디까지나 '화물' 한 개를 수령 후 목적지로 운반하는 것이었으므로, 아무리 능구렁이 손의 부주석과 그 비서라고 해도 지금 두 사람은 어디까지나 풍뎅이호에 무임승차한 셈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림의 정직한 배달부다운 일침에 부끄러움을 느끼기는 커녕 적반하장이었다. 나루는 눈썹을 치켜 올리며 답했다.

"우리도 동승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몰랐어?"

"그게 무슨 소리에요?"

"도장을 찍기 전에 계약서를 꼼꼼히 검토했어야지." 강나루가 혀를 차며 말했다. "너 사서함 다시 열어봐."

이림은 불쾌한 감각이 가슴에서부터 위로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다시 폰을 꺼냈다. 그녀가 처음에 대충 출발지 목적지만 훑어보고 신경을 꺼 버린 배달 요청서의 맨 밑바닥에, 마치 사냥꾼이 파 놓은 함정처럼 한 줄의 추가 조항이 적혀 있었다.

"'두 명의 마술사가 콘보이Convoy로서 배달부와 동행할 것임'……?" 이림은 조수석에 앉은 나루에게 물었다. "콘보이가 뭐에요?"

"호송대." 나루가 말했다. "VIP나 중요한 물품을 운반하는 차량, 또는 다른 운송 수단을 보호하는 인원이지."

"아니, 잠깐만요." 이림이 다급하게 다시 물었다. 갑자기 그녀의 머릿속에 오만 가지 질문이 추가로 떠오른 것이다. "저는 지금까지 온갖 곳을 다 갔다 왔는데요."

"그렇지."

"막 터진 화산 사이에서 용암을 피하면서 달린 적도 있고요."

"음음."

"유독한 매연 사이를 방독면 끼고 운전한 적도 있는데요."

"아, 맞아요! 그때 언니 시꺼먼 몰골로 기침하면서 차에서 나왔잖아요." 약간은 눈치가 없는 아이 휘영이 뒷좌석에서 명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엄청 웃겼어요. 킥킥."

"오빠라고 부르라니까, 휘영아. 아무튼, 그런 데에 배달할 때도 혼자서 했었는데 이번에는 왜 콘ㅂ- 그, 그 뭐시기냐, 아 젠장, 호송대가 붙는 거에요?"

"좋은 질문이야. 대답하기 전에 한 가지만 부탁하자." 나루가 조용히 말했다.

"뭔데요?"

"일단 어디든 출발을 좀 하지 않으련?"

"앗!"

그제서야 풍뎅이호가 몇 분째 공회전 중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이림은 황급히 후진 기어를 넣고 페달을 밟았다. 잠시 후 이림과 화물, 그리고 불길한 콘보이를 태운 녹색 다마스는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인적 없는 도로로 나섰다.

"여기면 됐다. 미멜라, 길을 열어줘."

"대한민국 무진시로 이동합니다. 안전벨트를 착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셋, 둘, 하나."

빠르게 달리는 풍뎅이호의 앞으로 '길'이 열렸다. 차 한 대가 거뜬히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의 차원문이 이림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로 가득한 땅으로 이끌었다.

이림은 차원문을 통과하는 순간 새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그것은 저 앞에 펼쳐진 길이, 바로 앞의 길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이라는, 운전자의 악몽 그 자체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가 새하얗게 질린 진짜 이유는 조수석에 앉은 강나루가,

"용암이나 매연은 배달부를 납치하지 않지."

라고 중얼거렸기 때문이었다.


"미멜라?"

"죄송해요, 쿠리어 제이드."

"안 돼, 미멜라…… 이제 와서 이러지 마."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어요."

안개 속을 달린 지 30분. 이림은 치명적인 교통사고와 그 밖에 안개 속에 도사리고 있을 온갖 끔찍한 것들에 대한 악몽에 시달리며 풍뎅이호를 운전 중이었다. 온 몸에 식은땀이 맺히고 핸들을 잡은 두 손은 덜덜 떨렸다.

일반적으로 그녀가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 운전을 하게 될 때에는 미멜라가 기상 상황과 최적의 경로, 주의해야 할 요소들을 풍뎅이호에 설치된 센서를 통해 감지하고 미리 이림에게 일러주었다. 그런데 무진의 안개는 초상기술 센서마저도 먹통이 되게 만드는 견고하고 숨 막히는 위협이었다.

일단은 요괴와 마술사들로 이루어진 조직의 일원이긴 하나 능력도 경험도 부족한 이림은 평소 같았으면 지금쯤 겁에 질려 풍뎅이호를 버리고 달아나거나, 그대로 안개 속으로 사라져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게 되었을 것이다. 이림이 아직도 차를 끈질기게 몰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녀와 같은 차를 타고 있는 사람들의 침착함과 평온한 마음이 그녀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안개가 많이 사납군." 나루가 안개 뿐인 창밖을 내다보며 무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안개가 뭐요?" 이림이 덜덜 떨면서 말했다.

"사납다고. 굶주린 범처럼."

"왜…… 왜 하필 그런 거에 비유를 해요?"

"잡아먹으니까요." 휘영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러고는 고양이처럼 두 주먹을 쥐고는 말했다. "어흥!"

그 순간 풍뎅이호가 한 차례 심하게 덜컹거렸다. 깜짝 놀란 이림은 주먹 관절이 하얘지도록 핸들을 꽉 쥐었다.

"비포장도로에 진입했군." 나루가 말했다. "이림,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대로만 해."

"ㅇ, 예."

"일단 최대한 직선을 유지하면서 달리다가, 내가 신호하는 즉시 내가 말하는 방향으로 핸들을 틀어. 아예 급커브를 돌 필요는 없고 차선을 변경할 때처럼 하면 돼. 알았지?"

"예."

"좋아. 휘영아, 너는 우리 중에 제일 눈이 좋으니 뒤를 좀 확인해 줘."

"알았어요." 휘영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뒷좌석에 양 무릎을 대고 차 뒤를 내다보았다.

"보이니?"

"뭐가요?" 이림이 말했다.

"너 말고 휘영이. 쫓아오는 거 보여?"

"쫓아오다니, 누가요?" 이림이 질겁했다.

"네, 보여요." 휘영이 말했다. "다리가 넷, 아니지, 둘 넷 여섯 여덟, 여덟이네요."

"거리와 속도."

"30미터. 그런데 속도는 저쪽이 조금 빨라요. 한 10분 정도면 따라잡히겠는데요."

"제대로 화가 난 모양인데. 우리가 뭐 싣고 가는 건지 알고 있는 건가?" 나루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의 어조는 침착했다.

"저, ㅎ, 혀, 형, 지금 우리 뒤, 뒤, 뒤에 뭐가 이, 있는 거에요?" 한편 이림은 겉보기에도 그렇고 어조도 그렇고 전혀 침착해 보이지 않았다. "방금 다리가 여ㄷ-"

"왼쪽!"

"으어어!" 이림은 반사적으로 핸들을 왼쪽으로 확 꺾었다. 이림의 녹색 다마스가 위험할 정도로 휘청거리며 왼쪽으로 급히 방향을 틀었다.

안개 속에서 갑자기 흰색 승용차 한 대가 튀어나와 이림의 차를 오른편으로 비껴갔다. 운전자 없이 방치된 그 차의 창문은 모두 깨져 있고 군데군데 찌그러진 부분에는 피도 튀어 있었다. 안개 속에서 차보다 빠른 속도로 자기를 쫓아오는 다리 여덟 개 달린 무언가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이림 입장에서 그것은 끔찍한 운명을 예고하는 하나의 징조처럼 다가왔다.

"오른쪽으로 꺾어." 나루가 다시 말했다.

이림은 이번에는 조금 더 침착하게, 하지만 여전히 손아귀에 힘이 잔뜩 들어간 채로 핸들을 돌려 거꾸로 뒤집힌 소형 트럭을 피해갔다. 마찬가지로 피가 튀어 있었다.

"20미터!" 휘영이 외쳤다.

"젠장." 나루가 중얼거렸다.

"젠장? 젠장이요?!" 이림이 겁에 질려 외쳤다. "형 우리 살 수 있는 거 맞죠?!"

나루는 대답 대신에 상의 주머니에서 만년필을 하나 꺼냈다. 만년필의 캡을 열자 괴상하게도 안에 숨겨져 있던 리볼버 권총이 하나 튀어나왔다.

"웬만해서는 소란 피우지 않고 지나가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나." 나루는 그렇게 말하면서 약실에 총알 한 발을 집어넣었다. 탄두가 새빨갛게 칠해진 것만 빼면 겉보기에 특이할 것 없는 총알이었다. "이림, 다시 오른쪽!"

"예, 옙!"

"집중해. 그러면 문제 없을 거야."

"10미터! 우와, 강 작가님! 이제 진짜 가까워요!"

"그래, 이제 나도 보인다." 나루가 백미러를 흘끗 보며 말했다. 옆에 있던 이림은 나루의 말을 듣고 무의식적으로 백미러에 비친 형상을 보았다. 그리고 곧바로 후회했다.

"왼쪽으로 틀어."

"으아아아아!" 이림이 반쯤 울먹거리며 외쳤다. "다리가 여덟 개라며! 그러면 거미잖아! 거미도 끔찍하지만 저건 대체 뭐야아!"

"침착해, 이림! 오른쪽!"

이림은 비명을 지르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계속해서 페달을 밟고 핸들을 잡았다.

"잘 하고 있어." 나루는 이림을 격려하면서도 권총의 공이를 당겼다. "림아, 너 운전석에서 트렁크 문 조작할 수 있지?"

"네? 아, 네."

"내가 신호하면 열어. 휘영아?"

"넵!"

"알아서 조심해?"

"알겠습니다! 저, 근데 지금 바로 뒤에 있어요!"

"이림, 지금이야!"

이림이 운전석 옆의 버튼을 누르자 덜컹거리며 트렁크 문이 열렸다. 그 뒤를 바짝 쫓아오던 흉측한 다리들 중 하나가 풍뎅이호에 올라타려는 듯 문이 열린 트렁크를 향해 쭉 뻗어나왔다.

그 순간 나루가 몸을 돌려 뒤를 보고 총을 겨누었다. 그가 방아쇠를 당기자 폭음과 함께 싯누렇게 발광하는 총탄이 날아가 안개 속의 무언가에 박혔다. 잠시 후 돼지와 사람의 비명 소리를 한데 모은 듯한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리며 안개에 가려진 어떤 형체가 노란색으로 발광하며 몸부림치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그 덕분에 둘 사이의 거리는 크게 벌어져, 얼마 지나지 않아 추격자의 다리도, 끔찍한 형체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추격에서 벗어난 풍뎅이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아스팔트로 포장된 도로 위에 올라섰다. 그것이 이림에게는 안전을 뜻하는 하나의 신호처럼 느껴졌는지, 그녀는 안도감에 한숨을 내쉬며 자기도 모르게 페달에서 발을 떼었다. 그녀의 녹색 다마스는 서서히 속도를 줄이더니 그대로 멈춰 버렸다.

"앗, 죄송합니다." 뒤늦게 그 사실을 눈치챈 이림은 나루에게 황급히 사과하며 다시 차를 움직이려고 했다.

"아냐, 그대로 있어." 나루가 이림을 제지하면서 말했다. "사지를 지나왔으니 좀 쉬는 것도 괜찮겠지. 그리고 어차피 목적지에 도착했으니까."

"목적지요? 도로 한복판이?" 이림이 그렇게 말하는 동안, 차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안개가 서서히 걷혔다.

안개가 사라진 길 끝에는 흰색 페인트로 칠해진 벽과 그 벽을 따라 나 있는 직사각형의 창문, 그리고 매우 전형적인 내부 구조를 가진 매우 전형적인 형태의 2층 건물이라는 점에서 공공시설이 틀림없는 구조물이 세워져 있었다. 이림의 차는 바로 그 앞 주차장 위에, 기묘한 일이지만, 주차선을 정확히 지킨 채로 정차해 있었던 것이다.

이림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건물 정문 위 현판에 적힌 이 건물의 이름을 읽었다.

"황전면…… 사무소?"

"목적지에 도착했어요, 쿠리어 제이드. 현재 위치는 전라남도 무진시 황전면 면사무소입니다." 안개 속에서 추격전을 벌이던 동안에는 한 마디도 안 하던 미멜라가 뜬금없이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여기까지 일행을 인솔해 온 자기가 매우 대견하다는 듯이.

이림은 미멜라를 한 대 쥐어박을까 하다가 그래봤자 자기 차를 망가뜨리는 꼴인지라 애써 화를 참았다. 어차피 목적지에도 도착했겠다, 빨리 물건을 면사무소에 갖다 놓고 일을 마칠 생각으로 차 문을 열었다. 다마스에서 내린 이림은 일단 기지개를 켜며 팔과 다리를 쭈욱 폈다. 극도의 긴장 상태에서 오랫동안 한 자세를 유지하다 보니 온 몸의 근육이 다 비명을 질렀다.

휘영이 힘겹게 다마스의 뒷좌석 문을 열고는 이림을 따라와 몸을 쭉 폈다.

"이제야 좀 얼굴에 색깔이 돌아오시는 것 같네요?" 휘영이 이림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 정도였어?" 이림이 물었다.

"말도 마세요. 언니 얼굴을 종이로 오려서 만든 것 같았다니까요. 온통 새하얘서는."

"이런."

"그래도 도착하고 나서는 멀쩡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걸." 나루가 옆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그 상황에서 분명 제정신을 유지하기 어려웠을 텐데. 일반인인 것 치고는 정신력이 꽤 괜찮네."

"일반인이라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도 능구렁이 손의 맹원이거든요? 형만 능글맞은 까마귀 여자라던가 성질 더러운 여우 요괴에게 치이면서 사는 거 아니라고요."

"대장한테 말한다."

"살려주세요."

농담 섞인 말들을 잠시 주고받은 뒤 나루는 풍뎅이호에 등을 기대고 섰다.

"그런데 여기가 목적지라면, 수령인은 누구죠? 저기서 일하는 사람? 그럼 공무원?"

"엄밀히 따지면 공무원은 아닌데, 내 추측이 맞다면 저기서 걸어 나오기는 할 거야."

"아, 저 사람인가?"

"그러네,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더니."

면사무소 정문이 열리면서 키가 큰 남자 한 사람이 걸어나왔다. 괴상하게도 의사 가운을 걸치고 면사무소에서 나온 이 남자는 주차장에 서 있는 세 사람을 보고는 곧장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그가 가까이 다가서자, 이림은 그의 둥근 안경과 단정한 머리, 그리고 만면에 가득한 미소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 안개 가득한 동네에서 이 사람 혼자서만 구름 한 점 없는 여름하늘 아래 서 있는 듯했다.

"용케도 살아서 왔네?" 키 큰 사내가 여전히 미소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오늘 안개가 사나워서 많이 걱정했는데."

"저 사람도 안개를 사납다고 하네." 이림은 질색하는 와중에도 신기해했다.

"설마 내가 이 정도 안개도 통과 못 할까봐?" 나루가 자신만만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렇게 생각했다면 솔직히 실망이야, 너랑 나랑 알고 지낸 지가 얼만데."

"강나루 네가 어떤 녀석인지는 잘 알지. 야, 고향에 잘 돌아왔다." 키 큰 사내는 다가와 그 신체 비율에 걸맞는 긴 팔로 나루의 양 어깨를 짚었다. "저기 계신 분들은……?"

"참, 그렇지." 나루가 손을 뻗어 이림과 휘영을 가리켰다. "여기는 내 동료 이림이야. 이림, 이쪽은 전세강이라고 해. 초등학교 다니기 전부터 알고 지냈던 친구."

"만나서 반갑습니다." 세강이 따뜻한 어조로 인사를 건넸다. "이림 양이라고 부르면 아마 싫어하실 테죠?"

이림은 얼떨떨한 기분을 느꼈다. "제가 누군지 아세요?"

"10초 전까지는 몰랐죠.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니 보이더군요. 당신의 몸은 크게 바뀌었는데, 당신의 마음은 그렇지 않으니 고생이 많으시겠어요."

"아니, 어떻게……?"

"세강이는 나랑 같은 곳에서 공부를 했거든. 참고로 공교육 얘기 아님." 나루가 말했다.

"강 작가님 제 소개는 언제 해 주실 거에요?"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좀 기다려라. 그 새를 못 참냐."

"그럴수도 있지, 뭐." 세강은 그렇게 말하더니 휘영에게 다가갔다.

자기를 대화에서 소외시키는 데 샘이 나서, 세강이 자기를 애 취급하면 보답을 할 작정으로 몇 가지 못된 말들을 생각해내고 있던 휘영은 세강이 한 쪽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을 꼭 쥐자 당황해 평정을 잃고 말았다.

"나루한테서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세강이 따스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이 저 아름다운 밤하늘 위에서 제 가장 소중한 친구의 삶을 밝게 비춰주었을 때부터 감사한 마음을 전해주고 싶었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으, 으에?" 너무 당황한 나머지 휘영은 잠깐 사람의 말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뭐, 음,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림은 세강의 의사 가운에 주의를 돌리며 말했다. "그러면 의사……이신 건가요?"

"정확히는 보건교사입니다. 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죠."

"그런데 왜 면사무소에서 나오시는 거에요?"

"아, 안개가 사나운 날에는 면사무소에서 종종 대기할 일이 있으니까요."

"보건교사님이 왜요?"

"한 가지 힌트를 주지." 문답이 지루해질 기미를 보이자 나루가 끼어들었다. "저 녀석이 치료해준 사람들 중에 일상적인 병이나 부상으로 찾아온 사람들은 아마 1할 정도밖에 안 될 걸."

"나루 말이 맞아요." 세강의 표정이 약간 굳었다. 그래도 여전히 밝았지만. "제가 제일 자주 치료하는 건 신병神病이니까요. 무진에서는 아무 이유 없이 심하게 앓는다거나, 안개 때문에 몸이 상하거나 하는 일이 종종 있죠."

이림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무진에서 신병이 흔하다는 사실과 동네 보건교사가 면사무소에서 당직근무를 서고 있다는 사실 사이의 상관관계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이해하지 않는 편이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 부분에 대해서는 신경을 끄기로 했다. 대신 그녀는 자신이 황전면 사무소까지 온 이유를 떠올렸다.

"맞다, 배달." 이림은 차 뒤로 돌아가 트렁크 문을 열었다. 이림이 그 무거운 상자 위에 두 손을 올렸을 때, 갑자기 의사 가운으로 덮인 긴 팔 두 개가 스르륵 상자 아래로 들어가 깃털처럼 가볍게 상자를 들어올렸다. 그녀는 일말의 표정 변화조차 없이 아주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상자를 혼자서 집어들고 면사무소 안으로 걸어들어가는 세강을 머리를 긁적이며 쳐다보았다.

"아니, 어떻게?"

"자기 거니까." 나루가 짧게 대답하고 세강을 따라 면사무소로 들어갔다. "휘영, 이림, 따라와. 거기서 가만히 있어서 뭐 하게?"


잠시 후, 세강과 나루 일행은 면사무소의 조촐한 숙직실 탁자 주위에 둘러섰다. 탁자 위에는 세강이 올려놓은 상자가 열려져 있었다.

자물쇠는 그냥 열렸다. 열쇠도 뭣도 없이 세강은 해태가 새겨진 자물쇠를 그냥 열었다. 그 흔한 경첩의 비명소리도 내지 않으며, 세강의 상자는 조용하고 우아하게 그 속에 담긴 비밀을 드러내었다.

상자 안에 들어있던 것은 한 자루의 창포검이었다. 나무를 깎아 검붉은색으로 칠해 만들어진, 광택이 나는 칼집과 손잡이가 서로 잘 이어 붙여져 있었다. 손이 미끄러지지 않게 손잡이에 감아놓은 검은 가죽끈 외에 그 어떤 장식도 없는, 수수하지만 깨끗하고 단정한 검이었다. 휘영과 이림은 평범한 반응을 보였다.

"이거 주문이라던가 걸려있는 거에요?" 이림이 멀찍이 물러나 있는 나루에게 물었다. "누나가 만든 건가?"

세강은 좀 더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의 두 팔은 굳어버리고, 휘둥그레진 눈으로 멍하니 검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이 건물 안에서 가장 밝은 사람이 갑자기 차가운 돌처럼 정지해버리자 방 전체의 분위기가 바뀌어버렸다. 하지만 바뀐 분위기는 결코 불쾌한 것이 아니었다. 이림은 세강의 등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보고 그가 극도의 흥분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는 천천히, 경건한 동작으로 두 손바닥을 검 밑으로 넣었다. 부드럽게 검을 들어올린 세강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눈길을 옮기며 조심스럽게 검을 훑었다. 마침내 검사를 마친 그는 고개를 들어 나루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걸 어디서 찾았어?" 세강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내가 아는 그 검이 맞나?"

"확인해 봐." 나루가 답했다.

세강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왼손으로 창포검의 칼집 부분을 꼭 쥐었다. 그의 오른손은 검의 아랫면을 쓰다듬는 것처럼 내려가다가 가죽끈이 매어진 손잡이 부분에서 멈췄다. 곧이어 세강은 심호흡을 한 차례 하고 검을 뽑아들었다. 은처럼 반짝이는 아름다운 칼날이 천장을 향해 들어올려졌다. 천장의 어슴푸레한 전등빛을 받아 검신이 서늘한 섬광을 흩뿌렸다.

그러나 세강의 관심은 검의 반짝임에 있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가 오랫동안 보지 못한 딸의 이름을 찾듯이 무언가를 찾아 칼날을 주의깊게 읽어내려갔다. 그가 찾는 것은 칼날의 하단부, 손잡이와 결합되는 바로 그 위에 뛰어난 장인의 솜씨로 새겨진 글귀였다.

治霧求民

"치무구민."

"그게 무슨 뜻인데요?" 휘영이 불쑥 물었다.

"'안개를 다스려 백성을 구한다'." 나루가 말했다.

검은 미끄러지듯 검집 사이로 들어가고, 깨끗한 탁 소리를 내며 닫혔다. 세강은 다시 경건한 동작으로 검을 상자 안에 모시고, 상자를 도로 닫았다. 자물쇠는 풀릴 때처럼 부드럽게 다시 잠겼다.

"이 네 글자는 한때 우리 조상들의 마음 속에 깊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분들께서는 오래 전부터 안개 속에 도사리고 있는 것들을 싸워 물리치기로 결의하셨으니까요. 이림 씨는 처음 듣는 얘기일 수도 있겠군요. 안개는 언제나 무진을 덮고 있지만, 안개 속에서 무엇이 튀어나올지는 아무도 모르지요. 그 안개 속에서 나타난 것이 반가운 벗일 수도, 소중한 보물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악의와 광기가 그 안에서 뛰쳐나오기도 합니다.

이제는 무진의 안개가 그저 궂은 날씨 이상의 무언가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들조차 드물지만, 나루와 나는 우리보다 먼저 태어나셨던 분들께로부터 안개 속에 도사린 악한 짐승들에게 맞서는 법을 배웠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 가족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그 검, 그게 형이랑 세강 씨 조상님들 거란 말인가요?" 이림이 말했다.

"정확히는 내 조상들의 것이죠." 세강이 답했다. "아직도 기억납니다. 내가 아직 어렸을 적에 안개가 우리 집을 넘어서 마당에까지 들어온 적이 있었죠. 내 조부께서는 이 검을 들고 마당의 안개 속으로 사라지셨습니다. 잠시 후에 안개는 물러갔고, 조부님께서 들고 계시던 검에는 붉은 피가 묻어 있었습니다. 당신께서는 나를 잡아먹으러 온 놈이 그 안개 속에 있었다고, 그분의 할아버지와 그 할아버지도 자신들의 손자를 지키기 위해 검을 들었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런데 왜 제가 가져온 상자에 이 검이 있는 거죠?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거에요?"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나루는 세강을 쳐다보았고, 세강은 고개를 미세하게 끄덕였다.

"세강의 아버지는, 어떻게 말해야 할까…… 안개를 믿지 않았어." 나루가 단어를 세심하게 고르며 말했다. "무진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우리 선조들이 해왔던 일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지. 20년 전에, 그는 이 검을 가지고 사라졌어. 아직 초등학생이던 아들을 여기에 남겨놓고. 나중에 내가 그를 찾아냈지만 그는 검이 자기 수중에 없다고 했고, 내게 몇 가지 불쾌한 인상을 남겼지."

"유감이에요." 이림이 세강에게 위로를 건넸다.

"나루가 저 대신 아버지를 찾아 나갔다가 돌아와서 제게 모든 것을 말해주었습니다. 선조의 검을 멋대로 처분한 것도 모자라서 사피르의 배지를 달고 지내신다는 게 정말이라면, 제 아버지는 안개로부터 삶을 지키며 살았던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 죽은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 이상의 감정은 없습니다." 세강은 담담하게 말했다.

대화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끝났다. 세강은 상자에 시선이 고정된 채 숙직실 의자에 앉았고, 나루와 일행은 저마다 다른 곳에 시선을 두고 각 모퉁이에 가만히 서 있었다.

"나루." 세강이 입을 열었다.

"말해."

"이 검을 어떻게 찾았는지 알고 싶어."

"운이 좋았지. 우리가 이 검을 찾을 생각으로 뭔가 한 건 아니었으니까. 어쩌다 한 번 장사치들과 계약을 맺은 도둑 하나를 붙잡아서 훔친 물건들을 내놓도록 '설득'을 했더니, 제일 먼저 이걸 꺼내오더라고. 자네도 그때 내 표정을 봤어야 돼."

"그랬군." 세강이 말했다. 여전히 시선을 상자에 고정한 채였다. "'우리'가 누구지?"

"능구렁이 손."

세강의 고개가 홱 돌았다. 나루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그의 두 눈에 무언가 이상한 기색이 감돌며 휘영과 이림을 당황시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해처럼 맑게 웃던 사람이 지금은 싸움을 준비하는 것처럼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소식은 들었다만…… 정말로 그렇게 된 건가?" 세강이 뜻 모를 말을 내뱉었다. "그러면 이림 씨도 그들과 아는 사이겠군. 맞나?"

"그들을 아는 정도가 아니라 그냥 '그들' 중 한 사람이야. 맹원이지."

"잠시 어디 좀 나가자." 세강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나루는 그를 따라 숙직실을 떠나고,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휘영과 이림만 방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이림과 휘영의 당황이 가라앉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이 칙칙한 방 안에 방금 떠나간 다른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흥미로운 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지루함에 몸서리를 쳤다. 손님으로서의 예절이 어린아이다운 심술에 휩쓸려 사라지자 휘영은 신발을 아무데나 벗어던지고 숙직실 한 쪽에 놓인 간이침대에 올라앉았다. 이림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무례하기 그지없는 사람이었지만, 아쉽게도 그 정도로 무례하지는 않았기에 대신 비어 있는 의자 위에 두 발을 올려놓았다.

"지루하다." 이림이 정신적인 고통에 떨며 말했다.

"언니는 그냥 지금 돌아가도 되지 않아요?" 휘영이 침대 위에서 다리를 휘적거리며 말했다. "저야 작가님이 저분이랑 볼일이 있다고 하시니까 여기 있지만, 언니 일은 끝났잖아요."

이림은 대답하는 대신 자기 손을 들어 바라보았다. 앞서 비포장도로에서 핸들을 너무 꽉 잡은 나머지 차를 세운 지 수십 분이 지난 지금도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아니, 괜찮아. 나는 너랑 같이 있을게." 이림은 창백한 얼굴의 안면 근육을 억지로 움직여 지은 미소와 함께 말했다.

"소름끼치니까 그런 꿈에 나올 것 같은 표정 짓지 말아요, 언니."

"그래도 지루한 건 사실이야." 이림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여긴 진짜 아무것도 할 게 없네. 나루 형이 무슨 얘기 하고 있는지라도 알면 좀 나을 텐데, 여기서는 어렵겠지."

"딱히 어렵지 않은데요."

"그게 무슨 뜻이야?"

"정 듣고 싶으시면 해드릴 수는 있어요. 자요."

휘영은 그렇게 말하며 벽에 손가락을 대고 상상 속의 동그라미를 그렸다. 숙직실의 칙칙한 벽 위에 반짝이는 원이 나타나며 다양하고 복잡한 선들이 원 위의 한 점에서 나타나 다른 한 점까지 가 닿았다. 이윽고 이림은 휘영이 만들어낸 백색의 작은 마법진이 천천히 회전하면서 그녀의 명령을 기다리듯 가만히 대기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저게 뭔데?" 이림이 물었다.

"몰라요. 그냥 만들어지길래 작가님한테 얘 이름을 안 물어봤어요. 아무튼 똑같은 마법진 하나를 강 작가님이 계신 곳 근처에 만들면 두 사람이 하는 말이 여기서 들릴 거에요."

"잠깐, 그래도 되는 거야?"

"잠깐이라뇨. 이미 만들었는데요."

"아니……"

"들키면 이림 언니가 시켰다고 하면 되죠 뭐."

"야……"

이림이 난처해 하거나 말거나 휘영이 만들어낸 이름모를 마법진은 불규칙적으로 번쩍이며 잡음이 심하게 섞인 음성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서서히 잡음이 사라지면서, 면사무소 바깥의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가 선명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나루와 세강은 둘 다 숙직실에서처럼 조용하고 침착했지만, 그 대화의 밑바닥에 깔린 불안한 기류를 이런 쪽에 둔감한 이림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루는 무언가 변명하는 중이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가 그 도둑을 잡은 건-"

"그만 해, 나루." 세강이 나루의 말을 끊었다. "이런 식으로 하면 끝도 없을 거야. 내가 그 도둑이니 장사치들이니 하는 사람들에게 관심 없다는 거 알잖아. 더 이상 말 돌리지 마."

"그러지." 나루가 한숨을 푹 쉬고 세강의 말을 받아들였다. "당황해서 말이 헛돌았나 보군. 미안해. 그럼 이렇게 하자고. 지금 나한테 묻고 싶은 게 많을 테니 정리해서 말해봐. 나는 맞다 아니다로 대답해줄 테니까."

"너는 내 오랜 친구가 맞나?"

"맞아."

"그 검은 친구가 친구에게 주는 선물이 맞나?"

"맞아."

"그러면 너는 순전히 친구로서 지금 날 찾아온 거 맞나?"

"아니."

"아니라고?"

"맞다면 배달부 없이 내가 직접 상자를 들고 왔겠지."

"그렇군. 선물은 순전히 네가 나한테 주는 거지만, 이 방문 자체는 능구렁이 손의 맹원이 무진의 주술사와 접촉하려는 시도의 일종이라는 건가."

"그들의 지도자와 접촉하려는 거지."

"나는 무진 사람들을 대표할 생각이 없어."

"미안하지만 너는 이미 그들을 대표하고 있어. 우리가 본 그 많은 사람들을 생각해 봐. 떠난 사람들, 사라진 사람들, 죽은 사람들. 무진의 안개 속에서 살아갔던 그 세 가지 부류의 사람들 중 넌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아. 또 그 누구보다 오래 그렇게 하고 있지. 넌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기에는 너무 뛰어나, 세강. 이미 많은 눈들이 널 지켜보고 있어."

"어떤 눈을 말하는 거지?"

"이번에는 내가 그만 하라고 말할 차례군. 율촌면에 세워져 있는 용도불명의 창고를 모르는 체 하지 마."

"좋아, 인정하지." 세강은 나루가 그랬듯이 허심탄회하게 반응하면서도 날카롭게 되물었다. "그런데 능구렁이의 눈이 나를 주목하고 있는 이유는 뭐지? 나한테서 원하는 게 뭐야?"

나루는 말을 돌리지 않았다. "협력."

"안 돼."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말들이 어찌나 싸늘하고 적대적이었는지, 건물 안에서 이야기를 엿듣던 이림이 마음의 상처를 입을 지경이었다.

"아직 내 이야기를 충분히 듣지 않았잖아."

"왜지?"

"왜냐니?"

"왜 하필 우리지? 아직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인정하겠지만, 그 사람들과의 협력 관계에서 무엇을 얻어내려는 건지 모르겠군. 너희가 원하는 것을 우리가 줄 수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

"두 가지로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너희 도움이 필요해. 그리고 둘째로, 너희도 우리 도움이 필요하지."

"설명해."

"저 안개 뒤에 뭐가 있는지 우리는 알잖아." 나루가 말을 이었다. "물론 바깥에서 온 자들이 무진 곳곳에 초소를 세우고 스스로 안개 속을 들여다본다고 자부하고 있지만, 그들이 실제로 무언가를 '볼' 수 있는 건 아냐. 그들은 무진의 안개가 세상의 모든 이치를 뒤트는 위험한 곳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무진의 긴 역사 동안 그 모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안개 속으로 도망쳐 들어간 영혼이 얼마나 많았는지 놈들은 몰라. 사실 알 수 있을 리 없지. 애초에 무진을 피난처로 삼을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을 테니.

무진 같은 곳은 정말 찾기 어려워. 우리 선배들에게는 안전했던 장소들이 이제는 안전하지 않아. 한때 쉽게 따돌릴 수 있었던 추적자들은 이제 더 집요하고 교활해졌어. 이 세계의 신비를 지켜내려는 사람들이 편히 쉴 수 있는 곳이 점점 줄어들고 있어. 우리도 예외는 아니야, 세강. 물론 마술에 대해 잘 알 수록 무진이 위험한 장소라는 건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안개 낀 피난처가 정말 절실하게 필요해."

"그건 알겠어. 그런데 우리가 너희를 필요로 한다는 건 무슨 말이야?"

"지금까지 내가 말한 것들, 과연 나만 알고 있을까? 너무 많은 눈들이 무진을 지켜보고 있어. 그들의 눈빛에 선의나 호의는 담겨 있지 않아. 무진은 피난처이지만, 동시에 위험에 처해 있지."

"정확히 어떤 위험을 말하는 거지, 나루?"

"전쟁. 적어도 5년 내로. 누가 누굴 상대로 벌일지는 우리도 모르겠지만."

이림은 소스라쳤다. "이거 우리가 듣고 있어도 되는 이야기야?"

"쉿!" 휘영이 그녀를 제지했다. "목소리 크게 내지 말아요! 이거 여기서 나는 소리도 다른 쪽으로 들린다고요."

이림은 급히 입을 막았다. 두 염탐꾼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바깥의 두 사람은 대화를 계속했다.

"전쟁이라. 그래, 알았어." 세강은 나루가 전한 소식의 심각성과는 무관하게 냉정하고 거리감 있는 어조를 유지했다. "그렇다면 너는, 아니 너의 동료들은 우리가 스스로를 지켜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건 알아. 우리 선조들은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를 지켜왔지. 너도, 네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의 힘으로 네 이웃들과 가족들을 수호하고 싶을 테고. 하지만 세상이 많이 변했어. 여기서 이 이야기를 꺼내자니 미안하긴 하지만, 네 아버지가 한 짓은 단순한 배신이 아니야. 황전면이라는 이 작디작은 공간에서 똑같이 나고 자란 사람들의 마음조차도 더 이상 하나로 모이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해."

"그러니 대신 너희가 돕겠다? 내가 들은 바가 맞다면 능구렁이 손의 맹원들은 모두 뛰어난 마술사들이지. 안개는 다른 누구보다도 그런 사람들을 제일 먼저 삼키려 든다는 걸 누구보다 네가 제일 잘 알지 않나?"

"안개는 날 삼키지 못했어. 그리고 무진에서는 내가 그들을 이끌 테니 안개는 그들도 삼키지 못 할 거야." 나루는 진심어린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 이후로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침묵이 이어졌다. 나루는 자신이 세강을 설득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말을 다 했고, 세강은 그의 말을 듣고 지금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다시 휘영과 이림을 지루하게 했던 정체 상태가 돌아왔지만, 권태감은 방 안에 가득한 긴장감에 밀려난 지 오래였다.

"그렇게 된 거군." 세강이 침묵을 깼다. "이제 내가 대답을 할 차례겠지."

그 다음에 이어진 말은 이것이었다.

"안 돼."

이림과 휘영은, 본인들은 사실상 밖에서 벌어지는 설전의 불청객에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세강의 거절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아니, 왜?" 이림이 자기도 모르게 외쳤다. "이게 왜 안 돼?"

"언니는 또 왜 이래요? 정말 들키고 싶어요?" 휘영이 신경질을 냈다.

두 사람의 반응과는 대조적으로, 나루는 의외로 차분하게 그의 대답을 받아들였다. "반쯤은 그렇게 대답할 거라고 예상했었지."

"그러면 내가 왜 그렇게 대답했는지도 알겠군."

"만약 내가 다른 친구들과 왔다면……"

"그때는 받아들였을 거야."

"역시 사상의 문제인가. 그게 걱정돼서 대장이 날 보낸 거였는데."

"그것과는 약간 다르군. 난 능구렁이의 이념, 뭐랬더라, 아나키즘의 뭔가 특이한 일종이었는데, 아무튼 그걸 걱정하는 게 아니야. 관심 없는 건 사실이지만. 아니, 내가 걱정되는 건…… 그 어머니의 이념이지."

"뱀?" 나루가 믿을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그럴 리가. 세강 네가 그들의 신념을 반대한다고? 신비의 해방을? 그 많은 영혼들이 더 이상 위험한 안개 속에 숨어 살지 않아도 되는 세계의 도래를?"

"그 영혼들을 실제로 돌보고 있는 건 나야, 나루. 그들은 내가 제일 잘 알아. 그리고 그런 사람으로서 말하는 거지만, 나는 그들이 '숨어' 살고 있다는 점보다 숨어서 '살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

"그건……"

"궤변 같나?" 세강의 목소리에서 모종의 씁쓸함이 묻어나왔다. "그럴지도. 하지만 무진은, 무진에서의 삶은 이미 우리에게 충분히 안전하고 편안해. 다른 사람들도 아닌 우리 선조들이 만들어낸 삶이고, 더 이상의 대격변을 원하지 않는 삶이지. 뱀의 손이 정말 그들이 원하는 바를 이루어낸다면, 그래서 세상이 한 차례 뒤집어지고 숨어있던 것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어둠 속에서 나오게 된다면, 그때는 이런 삶을 유지할 수 없을 거야. 내 가족들의 보호자로서 나는 그런 일을 용납할 수 없네."

"그렇지만 전쟁은?" 나루가 항변했다.

"때로는 관광객들이 싸움꾼들보다 더한 짓을 도시에 저지를 수 있지." 세강이 더 이상의 반박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단호함으로 이야기에 쐐기를 박았다.

그렇게 해서 능구렁이 손의 제안은 정중히, 그러나 재론의 여지 없이 거절당했다. 이림은 이 사실을 대장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아니 그보다도 지금 세강의 눈앞에 있는 나루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 약간 겁에 질렸다. 능구렁이 손의 맹원들은 어쨌든 정상 세계의 규칙 바깥에서 활동하는 이들이었고, 그 의도를 관철하기 위해서라면 강제력을 동원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이림이었기에, 그녀가 나루의 대답을 듣고 안개의 습한 공기에 피냄새가 더해진 것 같다는 상상을 한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너도 알겠지만 우리가 무진에 진입하는 데 꼭 그쪽의 협조가 필요한 건 아냐. 너희가 비협조적으로 나와도 우리 계획이 틀어지지는 않을 걸."

"비협조와 방해는 또 다르지."

"우리를 방해할 건가?" 나루가 물었다.

"계속 그런 식으로 우리 선조들이 해온 일을 모욕할 건가?" 세강이 맞받아쳤다.

"이게 피할 수 없는 싸움은 아닐 텐데."

"우리는 걸어오는 싸움을 피한 적이 없어. 앞으로도 그럴 거고."

대화가 여기까지 진행된 시점에서 이림은 아무 능력도 없는 민간인으로서 어떻게 해야 마술사 두 사람이 안개 속에서 혈전을 벌이는 것을 막을 수 있을지 진심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을 그녀 자신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이림은 고민보다는 고통만 머릿속에 가득한 채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 목적 없이 숙직실의 이곳저곳을 절박하게 훑어보던 이림의 눈이 순간 휘영에게 가 닿았고, 나루를 누구보다 잘 아는 그 아이는 빙긋 웃었다.

이윽고 마법진 너머로 두 남자의 조용하지만 만족스러운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공기 중의 피 냄새는 사라졌다.

"내가 우리 두 사람의 역사를 까맣게 잊고 있었군." 나루가 미약한 웃음을 그치며 말했다. "내가 너한테 뭘 부탁하든 너는 한 번도 간단하게 내 부탁을 들어준 적이 없었지."

"그러면 무리한 일을 부탁하지 말았어야지." 세강이 답했다. "마음이 상했나?"

"아니, 전혀." 나루가 홀가분하다는 듯이 말했다. "어차피 대장도 큰 기대를 걸고 나를 보낸 건 아니었으니까, 돌아가서 거절당했다고 해도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겠지. 나는 오히려 너희가 더 걱정이야."

"물론 나도 걱정돼. 하지만 내가 원하지 않는 사람들의 손을 잡을 만큼 걱정되지는 않는군."

"이해해. 그러면 더 이상 붙잡지 않고 떠나도록 하지."

"이건 어때." 세강이 안으로 들어가려는 나루를 붙잡았다. "여기까지 오느라 너도 네 친구들도 많이 지쳤을 테니 오늘 밤은 우리 집에서 묵고 돌아가는 거야. 무진이 좀 음울한 곳이긴 하지만 오랜만에 찾아온 친구를 받아주지 못할 만큼 인심이 없지는 않아."

"그러셔?" 나루는 흥미 없다는 듯 말했지만, 그의 어조에는 은근한 기대감이 여실히 묻어나왔다. "여기서 대기해야 하는 거 아니었어?"

"그거야 걱정 마. 어차피 곧 다른 사람이랑 교대할 거야. 야간에는 나보다 그 친구가 더 유능하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숙직실 전화가 울리지만 않는다면-"

휘영이 누워 있는 침대 옆에는 조촐한 책상과 검은색 전화기가 한 대 놓여져 있었다. 세강이 숙직실 전화를 언급하길 기다렸다는 듯이, 검은색 전화기가 낮지만 도저히 무시하기 힘든 수신음을 내기 시작했다. 이림이 기겁하며 전화를 받으려 했지만 분명 세강을 찾는 전화일 것이 분명한데 자기가 받아도 되는지 고민하다가 때를 놓쳐버렸다. 마법진을 타고 넘어간 수신음이 바깥에 있던 둘의 대화를 멈추게 만들어버렸다.

"-곧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텐데."

"이거 이상한 걸. 숙직실에서 울리는 전화 소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들리지?"

이번에도 휘영은 이림보다 두뇌 회전이 빨랐다. 휘영은 아예 마법진에 얼굴을 갖다대고 이렇게 말했다.

"강 작가님, 저에요! 전화 왔길래 지금 마법진 만들어서 들려드리는 거에요!"

"알았어. 지금 들어간다."

나루의 대답과 동시에 숙직실 문이 벌컥 열리며 세강이 들어왔다. 면사무소 정문에서 숙직실까지는 아무리 서둘러도 20초는 걸리는 거리였지만, 그 당시에는 사무소에 있었던 사람들 중 누구도 세강이 1초도 지나지 않아 여기서 저기까지 도달했다는 사실에 의문을 가질 만큼 정신적으로 여유롭지 않았다. 세강은 굳은 얼굴로 성큼 다가가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전세강입니다. 네, 목사님. 네. 알겠습니다. 예, 바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영무한테는 상황 설명 해놓고 가면 되고…… 다른 사람들은 온답니까? 아, 알겠습니다. 그럼." 간결한 대화가 오간 뒤 세강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무슨 일이래?" 나루가 들어와 물었다.

"온연 쪽에 교회가 하나 있는데, 그 주위에 안개가 심하게 끼고 있는 것 같아."

"그건 무진에서는 그렇게 심각한 일이 아닌데."

"그리고 안개 속에서 사람들의 비명이 들린다고도 했어."

"그건 심각한 일이 맞지. 그러면 지금 교회에 있는 사람들은 고립됐겠네, 모두 몇 명이야?"

"둘. 목사님하고 목사님께서 돌보고 있는 여자아이 하나. 여자애가 안개에 자주 노려진다고 했던 것 같아."

"도움 필요해?" 나루가 물었다.

"괜찮아." 세강이 말했다.

"아닐 텐데." 나루는 이미 그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이 덧붙였다. "너 혼자서 가면 하나지만 나랑 같이 가면 넷이야."

"알고 있어." 세강이 담담하게 답했다. "그래도 나 혼자 갈게."

나루는 졌다는 듯 두 손을 내젓고 의자에 앉았다. 세강은 탁자에 놓여있던 접착식 메모지에 급히 무언가를 휘갈겨 적더니 전화기가 있는 쪽 벽에 메모지를 탁 붙여놓고 숙직실을 나섰다.

나루는 숙직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림, 휘영. 가자."

"가다니, 어디를요?" 이림이 식겁해서 말했다.

"교회. 세강이 도와줘야지."

"가지 말라고 했는데도요?" 휘영이 끼어들었다.

"괜찮아. 난 예전부터 저 녀석 말 안 들었어. 그리고 뭐라 하면 휘영이 네가 부추겼다고 하면 되지."

"엥?"

"우리 둘의 대화를 엿들은 벌이다, 이 녀석아." 나루가 휘영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말했다. "네가 마술을 쓰면 내가 누구보다도 먼저 알게 된단 말이다. 공부는 뒷전이더니 그새 또 잊었냐? 얼른 나갈 준비나 해."

"딱히 뭐 챙길 건 없지만 말이죠." 이림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 올 때 저도 차키랑 지갑이랑 폰 말고 뭐 안 들고 왔거든요."

그 순간 숙직실 문이 벌컥 열리며 세강이 들어왔다.

"금방 끝났네?" 나루가 말했다.

"검!" 세강이 외쳤다. 그는 탁자 앞으로 성큼 다가가 상자를 다시 열고 검을 집어들었다. "이걸 안 챙겼어."

"있었네요, 챙길 거." 휘영이 이림의 귀에 대고 소근거렸다.

세강은 왼손에 검을 들고 다시 방을 나가려다가, 남아있는 세 사람의 어딘가 어수선한 태도를 보고는 눈을 치켜떴다. "나루 너 뭐하냐?"

"온연은 여기서 얼마나 걸려?" 나루는 당당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되물었다.

"너 내가……" 세강은 나루에게 화를 내려다가 짧은 한숨을 내쉬고 대답했다. "옘병, 네가 오지 말라고 안 오는 놈도 아니고, 같이 가자, 그냥. 따라와."

"아직 내 질문에는 답하지 않았는데."

"이런 안개 속에서 거리는 문제가 아니지. 그런데……" 세강이 말끝을 흐렸다.

"그런데 뭐?"

"네가 직접 봐야 돼."


세강과 다른 세 사람이 다같이 면사무소에서 나오자, 흉측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기괴하고 무서운 형태의 안개가 그들을 에워쌌다. 쓰레기가 불타는 듯한 독하고 고약한 냄새가 이림의 코에 닿아 그녀는 본능적으로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으윽!"

다른 사람들도 얼굴을 찌푸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이건 안개라기보다는 매연이라고 하는 게 맞겠는데?" 나루가 말했다.

"안개에 광기가 담겨 있어." 세강이 어두운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것들도. 이런 안개를 뿜어내는 놈이 누군지는 몰라도, 이런 놈이랑 길 위에서 맞닥뜨리고 싶지는 않아. 이 안개를 가로질러서 최대한 빨리 교회에 도착해야 돼."

"가능하겠어요?" 휘영이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온연이라는 데가 아무리 가까워도 일단은 다른 동네일 텐데요."

"물론 그냥 냅다 달리면 우리 모두 안개 속에서 사라지고 말 거야. 하지만 무진의 안개 속에서는 정말 이상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고…… 예측할 수도 있는 법이지. 이 안개를 우리 입맛에 맞게 사용해 보자고."

"뭔가 생각해 둔 게 있나?" 세강과 같이 무진에서 나고 자란 나루는 세강의 계획을 알아챈 눈치였다. "내가 기억하기로 안개 속에서 얻어 탈 수 있는 게 몇 가지 있기는 한데, 이런 새까만 안개 속에서는 걔네를 찾아내는 것 부터가 일일걸."

"내 예상이 맞다면 나룻배 따위보다는 훨씬 강력한 걸 타게 될 테니 걱정 마."

세강이 긴장한 와중에도 자부심을 내비치던 그 순간, 안개 너머로 미약한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날갯짓 소리가 점차 가까워지더니, 검은 형체 하나가 내려와 세강의 어깨에 앉았다. 이림과 휘영은 화들짝 놀라 몇 걸음 물러났다. 나루는 움직이지 않았다.

"벌써 숙직실에 들어왔군. 평소보다 빠른데?" 세강이 고개를 돌려 자기 어깨에 앉은 무언가를 쳐다보고 말했다. 그 '무언가'란 새, 배가 희고 등이 검은 갈까마귀 한 마리였다.

"때가 급한지라 주인께서 서두르셨소이다. 까악." 갈까마귀가 쉰 목소리, 그리고 약간 이상한 어투로 말했다. "허면 숙직실에 글귀를 남겨두신 것이 바로 선생이오?"

"그래, 그거 나야. 영무가 잘 알아들었나 보네, 너가 여기 온 걸 보니."

"까악. 선생께서는 소인의 도움이 필요하시오?"

"20년 전에는 여기에 기차역이 있었지." 세강이 말했다. "우리 위치에서 선로가 대략 어디쯤에 있는지 알려줄 수 있겠나?"

"흐음. 까악. 흐으음. 까아악." 갈까마귀는 고민스러운 듯이 고개를 홱홱 돌렸다.

"무슨 일이에요?" 이림이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나루에게 물었다. "쟤도 길을 못 찾는 건가요?"

"기다려. 갈까마귀들은 늘 저렇게 구니까."

"좋아요, 까악. 좋아요." 갈까마귀가 마침내 고민을 마치고 말했다. "일단 선생과 선생 일행 분들 모두 두 발짝 물러나 주시오."

세강과 세 사람이 갈까마귀의 말대로 하자, 그들이 서 있던 바로 그 자리를 화물 열차 하나가 안개에서 뛰쳐나와 굉음과 함께 지나갔다. 소음과 강풍, 그리고 누가 봐도 잘못 닿았다간 뼈도 못 추릴 것이 분명한 속도와 중량을 너무 가까이에서 마주친 탓에 안개 속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허옇게 질리고 말았다.

"까악. 선로는 저기에 있는 것 같소."

"늘 고맙군그래." 세강이 침을 삼키고 애써 감사를 표했다.

"선생께 도움이 되어 영광이오."

"기차는 찾았는데, 이제 어떻게 하시려고요?" 휘영이 의심스럽다는 듯 물었다. "여기가 기차가 지나다니는 곳인 건 맞아도 기차가 서는 장소는 아닌 것 같은데요."

"그건 내 영역인 것 같군." 나루가 나섰다. "어이, 갈까마귀."

"까악!" 갈까마귀는 그제서야 일행 중에 나루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기뻐서 날개를 퍼덕였다. "나루 도령, 정말 도령 맞소? 이런 일이 다 있나! 까악!"

"그래,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언제 뛰면 돼?"

"언제 뭘 한다고?" 이림이 비명을 지르다시피 했다.

"까악, 소인이 신호하겠소. 5…… 4……"

"잠깐잠깐잠깐잠깐! 당신들 미친 거 아냐?!"

"언니, 이럴 시간 없어요!"

"3…… 2…… 1…… 지금이오!"

"으아아아아아아!"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이림은 무서운 속도로 달리는 열차의 화물칸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자신이 스스로의 의지로 열차에 뛰어올랐다고 믿었지만, 사실 휘영이 마지막 순간에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면 이림은 온 몸이 얼어붙은 채 소리만 지르던 그 모습 그대로 안개 속에 혼자 남겨졌을 것이다.

어쨌든 그녀는 자신의 용기에 자부심을 느끼며 화물칸 바닥에 편하게 앉았다.

"너무 편하게 앉아 있지는 마요." 휘영이 주의를 줬다. 정작 휘영 본인은 다리를 쭉 뻗고 칸막이에 기대어 앉은 채였다. "어차피 곧 다시 뛰어내려야 될 거에요."

"이 속도라면 금방이겠는걸." 세강이 숨막히는 안개 뿐인 바깥을 내다보며 말했다.

"그런데 뭐 때문에 이렇게 이상한 안개가 낀 거지? 짐작 가는 게 있나?" 나루가 질문을 던졌다.

"있으니까 걱정이지. 자세한 건 내려서 설명해 줄게. 참, 그 얘기 나와서 말인데, 조금 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지만 이제 아주 중요해진 질문을 하나 해야겠어." 세강이 몸을 돌려 화물칸 안에 있는 사람, 그 중에서도 이림을 쳐다보며 말했다.

"뭔데?" 나루가 말했다.

"이림 씨는 마술사로서 재능이 있는 편인가?" 세강이 질문했다.

"아, 그거라면 걱정 마." 나루가 옅은 미소와 함께 무자비한 평가를 내렸다. "그냥 일반인이야. 다른 사람들이 마술 쓰는 걸 어깨 너머로 몇 번 보기는 했는데, 말 그대로 보기만 하지 아무것도 배우는 게 없더라."

"다행이군." 세강은 나루의 평가에 대해 예상 외의 반응을 보였다. "어중간한 마술 사용자보다는 아예 문외한인 사람이 더 안전할 거야. 특히 이런 안개 속에서는."

"그것 참 고맙네요." 마음의 상처를 입은 이림이 투덜거렸다. 처음 입어보는 상처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쓰라리기 그지없는 상처였다.


일행은 갈까마귀의 신호에 맞춰 다시 안개 속 열차에서 뛰어내렸다. 열차는 한동안 굉음과 함께 덜컹거리며 그들이 내린 곳을 지나가더니, 자신이 뛰쳐나온 안개 속으로 다시 사라져 버렸다. 눈 깜짝할 새였다. 갈까마귀는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듯 한참을 더 퍼덕이고 까악거리더니 잠시 후 주인이 부른다면서 나루를 떠나 날아갔다. 나루는 갈까마귀의 도움 없이 안개 속에서 길을 찾아 나아갔다.

"우리가 아직 어렸을 때는 지금 면사무소가 있는 장소와 온연을 직선으로 잇는 철길이 있었어." 나루가 안개 속을 걸으며 설명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예전에는 기차를 타고 움직이는 사람들이 창밖을 내다보면 온연의 작은 산골마을을 잠깐이나마 볼 수 있었지."

"지금 사라졌다면, 철거됐다는 뜻인가요?" 이림이 물었다.

"사람이 한 일은 아니지만, 맞아." 나루가 대답하더니 갑자기 멈춰 섰다.

"뭔가 느껴지나?" 세강이 나지막히 말했다.

"적의." 나루가 대답하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를 향하고 있어. 아무도 움직이지 마."

일행은 나루의 말을 들었다. 나루는 천천히 오른팔을 들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세심하게 허공을 훑는 동작을 취했다. 마치 그 몸짓에 반응이라도 하듯, 새카만 안개가 나루의 팔이 움직인 방향으로 흐르다 공중에서 흩어졌다.

안개가 사라진 너머에 그들의 목적지인, 벽돌로 만들어진 작은 교회가 보였다. 교회는 완만한 오르막길 끄트머리, 야산과 맞닿아 있는 지점에 세워져 있었고 일행은 교회 주변을 둘러싼 조그만 돌담 안에 이미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바로 정면에 남색 옷을 입은 소년 하나가 그들을 향해 석궁을 겨누고 있었다.

세강이 두 손을 들었다. "성림, 나야."

성림이라는 이름의 소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들고 있던 석궁을 내렸다. "이렇게 소름끼치는 안개는 처음입니다. 사방에서 나쁜 기운이 흘러 나오고 있어서, 소리가 들리는 대로 그쪽에 쏠까 하다가 간신히 참았습니다. 하마터면 선생님을 맞힐 뻔했네요."

"그랬으면 진짜 큰일이지." 세강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내가 화살을 맞고 죽었으면 이 교회를 너 혼자 지켜야 했을 테니까. 지금 보아하니 그런 것 같긴 한데, 교회에 나온 사람이 진짜 너 밖에 없는 거야?"

"네.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도 불러 모을까 했는데……" 성림은 말끝을 흐렸다. "이런 안개 속으로 나오라고 했다가 다시는 못 보게 되면 그때는 어쩌나 싶어서요."

"그게 맞지. 잘 생각했어." 세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교회 안에는 몇 명이나 있지?"

"두 명입니다. 목사님하고 은혜하고."

"두 분은 잘 보호되고 있나?"

"일단 교회 문은 잠갔고, 처음 지었을 때 우리 사람들이 걸어놓은 주술이 있으니 안개가 함부로 침범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고 그게 아니었어도 안개 속에 있는 것들이 마음대로 들어오지는 못했을 거에요. 어쨌든 교회니까."

"그래. 일단 위험한 지역을 찾아 보도록 할까. 혹시 이 안개를 만들어낸 놈이 어떤 녀석인지 좀 알아봤어?"

"네, 근데 별로 위안이 되지는 않던데요." 성림의 낯빛은 어두웠다. "적어도 반세기는 묵은 놈이에요. 적어도 어느 한 시점에는 사람이었고, 또 무진의 방식대로 마술을 배웠는데, 안개 속에서 웬 흉물과 잠깐 엮였다가 문자 그대로 한 몸이 된 것 같아요. 그리고 지금은 교회가 그놈을 끌어당기고 있고요."

"교회가?"

"정확히는 교회 안에 있는 어떤 것이라고 해야겠죠. 저번에도 말한 적 있었지만요."

세강은 성림의 마지막 말이 내포하는 의미가 불쾌하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서은혜?"

"선생님, 저번에도 말했잖아요. 그 아이가 대체 어디서 누구 딸로 태어났길래 그런 체질을 타고 났는지는 몰라도, 그 애는 무진에 오면 안 됐어요. 은혜가 집에서 학교까지 걷기만 해도 흉한 일이 세 번은 일어나요. 바깥 동네에서도 그 정도인데 여기서는 무슨 재앙이 또 일어나겠냐 이거죠."

"듣고 있다가 느낀 건데, 마치 그 은혜라는 이름의 여자애를 쫓아내자는 말처럼 들리는 걸." 나루가 둘 사이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요즘 무진 인심이 이 정도인가. 세강이 한 말과는 좀 다른데."

"그렇게 들리는 게 아니라 실제로도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성림이 불쾌하다는 듯 쏘아붙였다. "외지인은 함부로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여기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당신은 모르잖아요."

"이런, 세강, 저 녀석 나 기억 못 하나?" 나루는 짐짓 놀란 체 하며 말했다. "난 저 친구를 기억하는데 말이야. 내가 '길'을 찾기 위해서 무진을 떠났을 때 우리 유성림이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갔었더랬지, 아마?"

"그랬었지." 세강이 맞장구쳤다. "젠장, 그때 네 살이던 녀석이 지금 이렇게 컸군. 팍 늙은 기분이네."

"그게 무슨…… 잠깐, 당신이?"

"그래, 임마. 형 왔다. 나 외지인 아니야. 좀 오래 떠나 있기는 했었지만." 나루는 그렇게 말하며 뒤에 서 있던 이림과 휘영을 가리켰다. "얘네는 외지인 맞아. 그러니 오래 전 친했던 형을 몰라봤다고 너무 시무룩해 있지는 말고."

성림이 붉어진 얼굴로 무언가 사과의 말을 꺼내려고 하던 그 순간, 야산 쪽에서 소름끼치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교회 밖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잠시 얼어붙었다.

"이 소리, 혹시 오늘 다른 시간에 들었던 적 있나?" 세강이 나루에게 물었다.

"있어. 유감스럽게도."

이림은 오싹한 기운이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야산에서 들려온 소리는 이림이 비포장도로 위에서 풍뎅이호를 몰며 들었던 바로 그 비명소리와 똑같았다.

"저 비명의 주인을 봤나?"

"그래. 우릴 잡아먹으려고 하길래 반대로 한 방 먹여줬지." 나루가 대답했다. "아마 피부가 살짝 익었을 거야. 약이 바짝 오른 모양인데."

"후회되지?" 세강이 한 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조금 많이."

"뭐 어쩔 수 없지." 세강이 오른쪽 어깨를 돌리며 말했다. "누가 이렇게 되리라고 예측이나 했을까. 우리는 우리가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걸 하면 되는 거야."

"만약에 하시려면, 빨리 하시는 게 좋겠어요!" 휘영이 위험을 감지한 듯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보세요!"

휘영이 가리킨 야산의 한 지점에서, 비틀린 나무들 사이로 검은 안개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빠른 속도로 주변을 가득 채운 안개는 교회를 통째로 덮지는 않았지만, 대신 돌담 바깥 사방을 둘러싸 아무것도 보이지 않도록 만들었다.

"지금 바로 움직여야 됩니다." 성림이 낮고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돌담 밖에서 막을 수는 없어." 세강이 결정을 내렸다. "교회 문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만들자. 휘영 양, 안개 속에 뭐가 있는지 보이시나요?"

휘영은 실눈을 뜨고 돌담 바깥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네, 어느 정도는요."

"좋아요. 교회 위층에 종탑이 하나 있습니다. 그 위에서 주변 상황을 확인해 주세요."

"다른 사람들은 교회 문 앞으로." 세강이 교회로 쪼르르 달려가는 휘영의 모습을 확인하고 남은 사람들한테 말했다. "어느 방향에서 녀석이 공격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공격할 마음을 먹으면 휘영 양에게 포착될 테니 우리는 그때 휘영 양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우리가 가진 수단을 활용해서 넘어오는 놈을 격퇴하는 거야."

"한 번으로는 안 될 거에요." 성림이 가지고 온 화살 수를 어림잡아 보며 말했다. "이렇게 악에 받힌 귀신은 처음 봅니다."

"맞아, 한 번으로는 안 될 테지." 세강이 동의했다. "다들 가지고 있는 자원을 최대한 아끼도록 해."

그 사이 검은 안개가 하늘을 가렸다. 가볍게 교회 종탑으로 뛰어 올라간 휘영의 머리에 거의 닿을 정도로 무겁고 낮게 내려앉은 안개 아래에서, 세강과 나루, 성림 그리고 이림은 교회 문을 등지고 빙 둘러 섰다.

"저기, 저, 이 상황에서 저는 뭘 하면 되죠?" 이림이 다급하게 나루에게 속삭였다.

"이상한 짓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나루가 조용히 답했다. "그러면 적어도 넌 안 죽을 거야."

"12시 방향!" 휘영이 종탑 위에서 외쳤다. 교회 문 앞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정면을 향했다. 검은 안개 속에서 그보다도 어둡고 흉측해보이는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 순간 성림이 그림자를 향해 석궁을 쏘았다. 날카로우면서도 둔탁한 소리와 함께 화살이 날아가 검은 형체를 맞혔다. 그러나 화살이 꽂히는 소리나 일행이 기대한 다른 소리는 나지 않았고, 형체는 금방이라도 안개를 뚫고 그 끔찍한 본모습을 드러낼 듯 했다.

성림은 그 모습을 보며 왼손을 들었다. 그리고 힘 있는 동작으로 가상의 과일을 쥐어짜듯이 주먹을 꼭 쥐었다. 그러자 그의 주먹 속에서 푸른 섬광이 터져나왔다. 곧이어 안개 속 검은 형체의 한가운데에서 똑같이 푸른 빛이 새어나오더니 폭발음과 함께 새파란 화염이 보였다. 앞서 들었던 비명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먼 거리에서 들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크고 무서운 비명이었지만, 성림은 자신이 기대하던 소리가 들리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제법 하는데, 유성림." 나루가 성림을 흘낏 보며 말했다. "그새 많이 컸구나."

"긴장 놓지 마." 세강이 말했다. "다시 돌아올 거야."

세강이 옳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돌담 바깥에서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다리가 두 개인 생명체 넷이 모여야 낼 수 있는 시끄러운 발소리였다. 안개 속의 형체는 교회 주변을 돌며 돌담을 유심히 살피는 듯 했다. 그것의 목표는 방어선을 뚫고 교회 안에 진입하는 것이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그것은 방어자들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곳을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러나 아무리 두껍고 독한 안개 속에 몸을 숨기더라도, 금빛 눈을 가진 달의 아이로부터 모습을 감추는 것은 불가능했다. 방어자들이 잠시 다른 곳에 눈을 돌린 틈을 타 안개 속의 형체가 그들의 시선 반대편으로부터 돌담을 타고 올라왔지만, 휘영은 이미 한참 전에 공격의 징후를 포착하고 말보다 빠른 수단을 통해 자신의 후견인에게 경고를 보낸 참이었다.

경고를 받은 나루가 몸을 돌렸다. 그의 손에 언제부턴가 들려 있었던 권총이 연속적으로 불을 뿜었다. 신비한 검은색 궤적을 남기며 날아간 총탄 세 발이 안개를 뚫고 들어갔다. 총탄이 뼈 아니면 두꺼운 살갗을 뚫고 들어가는 소리가 교회 문까지 들려왔다. 또 다른 비명, 분노와 고통이 반쯤 섞인 듯했던 아까와 달리 9할이 고통인 비명이 들려왔다.

"저 녀석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를 모르니까 치명상이었는지 아니었는지 도통 알 수가 없네." 나루가 실린더를 열어 연기가 나는 탄피들을 빼냈다. "그래도 무지 아팠을 거다."

"조심해요!" 휘영이 외쳤다.

나루의 총알이 날아가 꽃힌 바로 그 지점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물체들이 여러 개 날아왔다. 끈적거리고 혐오스러운 그 덩어리들이 일행을 직격하려는 찰나 세강이 뽑아든 선조의 검이 위에서 아래로 수려한 은빛 곡선을 그었다. 검은 덩어리들은 두 조각이 나서 일행을 양 옆으로 비껴갔다. 땅에 처박힌 물컹물컹한 조각들이 지글거리는 소리를 내며 타들어갔다.

"큰일 날 뻔했군." 세강이 검을 아래로 내리며 말했다. "저게 우리한테 묻었을 경우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 지 생각도 하기 싫어."

"이건 뭐야?" 나루가 검은 덩어리의 잔해들을 유심히 살폈다. "뼈에 이빨에, 이런, 사람 눈알도 있군."

"다른 사람들을 안 부르길 잘 했네요." 성림이 거들었다. "아니었으면 이런 역겨운 즙 안에 내가 아는 사람들이 들어있었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그 녀석이 어디로 갔죠?" 이림이 눈을 이리저리 돌리며 말했다. "아까만 해도 온갖 소란을 피우며 돌아다니지 않았어요?"

"그렇군, 이거 이상한 걸." 나루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잠시 후 그는 다른 변화를 발견하고 외쳤다. "이것 좀 봐!"

"안개가 걷히고 있습니다!" 성림이 그렇게 말하며 돌담 너머의 한 지점을 손으로 가리켰다. 돌담을 금방이라도 넘을 것처럼 바깥을 가득 메우던 검은 안개가 연기처럼 위로 향하며 사라지고 있었다. 온연에 넘쳐흐르던 안개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지고 산골 마을의 풍경이 그들 앞에 펼쳐졌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평화롭고 여유 가득한 나머지 나루와 성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림은 약간 다리 힘이 풀려 잠깐이지만 비틀거렸다.

유일하게 세강만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그는 연기가 사라진 방향을 주시하고 있었다. 세강은 뒤로 돌아 교회 위를 바라보았고, 그 덕분에 경악스러운 광경을 포착할 수 있었다.

"휘영 양!" 세강이 소리질렀다. 다른 사람들도 깜짝 놀라 세강의 시선을 따라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돌담 주변에 있던 안개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저 자리를 옮긴 것이었다. 교회 종탑 바로 위 지점에 한데 모인 기괴한 안개가 그 어느 때보다도 위협적인 광기를 내뿜으며 휘영의 머리 바로 위에 머무르고 있었다.

휘영은 마지막 순간에 눈을 들어 안개의 기습을 발견하고 방어 자세를 취했지만,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안개로부터 천둥소리와 함께 적갈색 번개가 터져나와 휘영을 직격했다. 그녀의 몸이 순간 붕 뜨더니 그대로 종탑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나루가 헉 하고 숨을 들이키더니 축 늘어진 휘영에게로 달려갔다. 그는 휘영 옆에 급히 무릎을 꿇고 그녀의 상체를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휘영은 눈을 감고 있었지만, 다행히도 큰 상처를 입은 것은 아니었고 아직 의식이 있었다.

"제발, 눈을 떠!" 나루가 절박하게 외쳤다.

휘영은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려 나루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혼란스러워하다가 나루를 보고 답답하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지금 뭐 하는 거에요?!" 휘영은 거의 윽박지르다시피 했다. "문 안 지켜요?"

그제서야 나루는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본 것은 다음과 같았다.

성림이 나루가 있는 곳으로 무언가 외치며 달려오는 중이었다. 갑자기 두 명이 비어버린 교회 문 앞은 두 사람의 탈주를 어처구니없어 하는 세강과 어찌할 바를 모르는 이림만이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교회 문 바로 정면에서부터, 어떤 괴물이 돌담을 박살내고 돌진해 왔다.


이림이 눈을 떴을 때 그녀 눈에 들어온 것은 작고 허름한 건물의 천장이었다. 이림은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울리고 눈 앞이 흐릿했다. 하늘을 바라보던 이림의 얼굴이 더 아래로 향하자 다른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박살난 나무 문의 잔해, 충격으로 인해 교회 안쪽으로 밀려난 긴 의자들, 그리고 그 충격의 원인이 된 한 쓰러진 남자. 그가 입은 흰 의사 가운이 눈에 띄었다.

이림은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마찬가지로 파편과 밀려난 긴 의자들이 있었다. 그녀도 세강과 같은 방법으로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그 순간 그녀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느끼는 감각을 정 반대 방향으로 경험했다. 자신이 부딪힌 물체를 보고 난 그 다음에야 격통이 그녀의 척추를 타고 온 몸으로 퍼져 나갔다. 이림은 무의식적으로 눈물을 흘렸지만 울거나 비명을 지르지는 못했다. 순간적인 고통이 너무 심해 다른 곳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손끝이 떨리고 몸은 제멋대로 버둥거렸다. 그녀의 몸은 고통에 완전히 지배되어 머리의 명령을 하나도 듣지 않았다.

어쩌면 이림이 다음 순간에 목숨을 건진 것은 그 덕분이었을지도 모른다.

안개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그 형체가 부서진 교회 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이림은 이미 길 위에서 한 번, 교회 바깥에서 또 한 번 그 모습을 보았지만 안개의 방해 없이 그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안개 속에서만 보았던 이 포식자의 형태는 괴물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두 발로 걷는 사람과 네 발로 걷는 동물들,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다리로 기는 벌레들이 한데 섞여 만들어진 듯한 다리 여덟 달린 몸통 맨 앞 부분에 나무껍질 같은 질감의 얼굴이 달려 있었다.

괴물은 천천히, 그러나 다리들을 빠르게 움직이며 교회를 가로질렀다. 반쯤 미쳐버리려 하는 이림에게도, 반대편에서 간신히 의식을 되찾고 몸을 일으키려 하는 세강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괴물의 얼굴은 앞을 향하고 있었다.

그 얼굴에 난 네 개의 눈은 교회의 제일 안 쪽에 놓인 강대상 옆 벽에 등을 바짝 붙이고 서 있던 한 노인과 한 여자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도 괴물이 진정으로 주시하고 있던 사람은 겉보기에 고등학생 이상은 되지 않아 보이는 어린 여성이었다. 어깨에 닿지 않는 검은 단발머리가 덮은 그녀의 흰 얼굴은 이림처럼 겁에 질려 있었으나 그 표정에는 기이한 침착함이 서려 있었다. 앞서 성림이 이야기하던, 은혜라는 이름의 아이가 바로 그녀였다.

그녀 옆에 서 있던 양복 차림의 노인 역시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거기에 더해 옆에 있는 아이를 걱정하는 마음이 그의 눈빛에서 드러났다. 교회의 보호를 바라고 찾아온 은혜를 어떻게든 지키고 싶어하는 그의 마음은 고통 속에 빠져 있던 이림이 보기에도 분명했지만, 이림과 마찬가지로 그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괴물은 강대상 앞에서 멈췄다. 잠시 후 괴물의 맨 앞쪽 다리 두 개가 은혜를 향해 뻗어나왔다. 다리라고는 했지만 굳이 말하자면 사람의 팔처럼 생긴 그 두 부속지가 느린 동작으로 은혜의 허리를 붙잡아 그녀를 벽에서 떼어내다시피 했다. 모두가 숨 죽이고 그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괴물은 균열과 상처로 가득한 자신의 얼굴 바로 앞까지 은혜를 데려왔다. 은혜는 팔다리가 자유로웠지만 그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저항하지 않았다.

괴물의 얼굴 아래에서 돼지의 입을 닮은 구멍이 열리며 악취와 증기가 새어나왔다. 그 입 속에서 이제 질릴 정도로 자주 들었던, 그러나 새로운 감정이 담긴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이림은 일어나 앉은 세강의 눈이 놀라서 휘둥그레진 것을 볼 수 있었다. 괴물은 울고 있었다. 듣기 싫으면서도 안쓰러운 울음과 함께, 네 개의 눈에서 조금씩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치 은혜가 자신의 오래 전 잃어버린 딸이라도 되는 듯이.

그때 은혜가 오른팔을 들었다. 천천히, 자신을 붙잡은 생명체의 얼굴을 어루만지려는 듯 조심스럽게 뻗어나오는 그녀의 흰 팔에 괴물의 눈빛이 가 닿았다.

그리고 은혜는 그 팔을 힘껏 휘둘렀다.

짝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팔이 괴물의 얼굴을 후려쳤다.

수 초 간의 정적이 흐른 뒤, 괴물이 포효했다. 괴물의 입이 물리적 한계까지 벌려지더니 그 안에서 사람 머리만 한 이빨 수십 개가 드러났다. 사람의 이빨과 돼지의 이빨, 그리고 온갖 포식동물들의 이빨이 무질서하게 배치되어 있는 그 입 속으로 괴물은 은혜를 집어넣었다. 정확히는, 집어넣으려고 했다.

"건드리지 마!" 누군가 이렇게 외치자, 괴물은 동작을 멈추고 몸을 돌려 뒤를 쳐다보았다. 괴물과 눈이 마주친 이림은 잠시간 괴물을 멍청한 얼굴로 쳐다보다가, 괴물이 더 이상 관심이 없어 내던져버린 은혜에게 한 번 눈길을 주고, 괴물에게 소리친 목소리의 주인이 자신이라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너 뭐 하는 짓이야?!" 이림의 뇌가 이림의 무의식에게 화를 냈다. "너 때문에 다 죽게 생긴 거 안 보여?"

"나? 그게 무슨 소리야?" 이림의 무의식이 항의했다. "난 아무 기억도 안 나는데? 네가 한 거 아녔어?"

"너 이……" 이림의 뇌가 하려던 말은 괴물의 울음소리에 가려 전혀 들리지 않았다. 이림의 눈이 자신을 향해 입을 쩍 벌리며 달려오는 괴물을 포착하자, 이림은 그만 모든 것을 포기하고 바닥에 엎어져 버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포기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문 바깥으로부터 한 줄기 달빛 같은 형체가 바람을 가르며 날아왔다. 괴물은 이림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달빛이 괴물의 바로 앞에서 휘영으로 모습을 바꾸며 그녀의 얼마 안 되는 중량에 무지막지한 속도를 더해 괴물의 턱을 걷어찰 때까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괴물의 턱이 돌았다. 홱 돌아간 턱을 따라 괴물의 온 몸이 비틀렸고 곧이어 그 여덟 개 다리가 중심을 잃고 바닥에 넘어졌다.

휘영은 공중에서 중심을 잡기 위해 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돌고 이림의 옆에 우아하게 내려앉았다.

"이림 언니 건드리면 가만 안 둬!" 휘영이 씩씩거리며 외쳤다. "네가 던져버린 언니도 마찬가지고!"

이림이 반가워하며 휘영의 이름을 부르려는 찰나에 다시 몸을 일으킨 괴물이 두 앞다리를 뻗어 휘영을 붙잡았다. 이번에는 자신이 붙잡은 생물을 아예 찢어버리려는 속셈으로 괴물은 자신이 쥔 것을 서로 다른 방향으로 잡아당겼다. 무지막지한 힘이었지만, 휘영은 그대로 두 쪽 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다시 달빛으로 변해 괴물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괴물이 찢은 것은 허공뿐이었다.

괴물은 분노와 충격으로 으르렁거렸지만, 그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다시 비명으로 바뀌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곧 교회 문 바깥에서 푸른색으로 불타는 화살과 붉은 색으로 번쩍이는 총탄이 날아와 또다시 괴물의 몸에 상처를 만들었다. 괴물은 잔뜩 성이 나 다리와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교회 안의 얼마 없는 가구들을 거의 박살내다시피 했다.

몸부림치는 괴물 위로 완전히 정신을 차린 세강이 펄쩍 뛰어올랐다. 그는 자신의 검을 하늘 위로 높이 들었다가, 괴물의 가장 연약한 부분인 머리와 몸통 사이의 새하얀 연결부 안으로 그 칼날을 찔러넣었다. 굉음과 함께 괴물은 앞다리를 마구 휘둘렀지만, 그 어떤 공격도 괴물의 등에 딱 달라붙은 세강에게는 닿지 않았다.

괴물이 어떻게든 습격자를 떼어내려고 벽을 긁으며 발광하는 사이에 나루와 성림이 이림에게 달려왔다. 이림은 자신이 극도의 흥분 상태로부터 풀려나는 것을 느끼며, 반대급부로 밀려오는 피로감에 휩싸여 바닥에 엎어져 버렸다.

그녀 주위에 둘러선 사람들이 무어라고 외쳤지만, 이림은 무엇 하나 제대로 듣지 못하고 잠들었다.


"까악."

"어때?"

"흐음. 잘 자고 계시는 것 같소."

이림은 사실 깨어 있었다. 그저 자리에서 일어나기가 싫었을 뿐.

"지금 깨우면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긴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

"까악. 그런 건 아니오."

"그러면 부탁할게."

"알겠소이다. 흐으으으으으으읍."

"어? 잠깐, 나 이미 깼어-"

"까아아아악!" 갈까마귀는 힘차게 울었다.

"으아악!" 이림은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다.

그녀가 덮고 있던 담요가 뒤집어지자 그 위에 있던 갈까마귀는 날개를 퍼덕이며 뒤로 물러났다.

"까악, 좋은 아침이오. 이림 양." 갈까마귀가 한쪽 날개를 들고 인사했다.

"그……래요." 이림이 얼떨떨한 채 답례했다. 그녀는 자신이 작지만 밝고 편안한 조명이 준비된 방의 침대 위에서, 안에 입고 있던 검은색 티셔츠 차림으로 앉아 있음을 깨달았다. 그 옆에 나루와 휘영이 어디선가 의자를 가져와 앉아 있었다. 휘영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여긴 어디죠?" 창문으로 퍼드덕대면서 날아가는 갈까마귀를 보며 이림이 물었다.

"세강이네 집." 나루가 말했다. "무진의 따뜻한 인심을 맛보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군. 그래도 나쁘지 않지?"

"그렇네요." 이림이 담요를 가슴께까지 끌어올리며 말했다. 무진에서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장소를 찾기란 참 어려웠다. 적어도 이림이 지금까지 경험한 바에 따르면 그랬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피칠갑을 한 세강이 들어왔다.

"좀 어때?"

"그 몰골로 들어오면 실례일 정도지." 나루가 점잖게 주의를 줬다. "이미 정신 차렸는데 또 기절하면 어쩌려고."

"아, 이런." 세강이 어쩔 줄 몰라하며 자신의 한때 흰색이었던 가운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면……" 이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교회 일은 어떻게 된 건가요?"

"걱정 마, 모두 무사해." 나루가 그로서는 드물게 빙긋 웃으며 말했다. "목사님은 다친 데 없으시고, 은혜는 타박상을 좀 입었을 뿐이야. 교회는 엉망이지만."

"다행이네요. 저, 혹시, 세강 씨……는 괜찮으신가요?"

"예? 아, 걱정 마세요. 이 중에 제 피는 없으니까요."

"그렇구나." 이림은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화들짝 놀라 말했다. "그럼 누구 피인데요?"

"괴물의 피입니다." 세강이 말했다. "놈이 어떻게든 저를 떼어내려고 발악을 하길래 계속 검을 붙들고 있었더니 교회를 나와서 다시 내려앉은 안개 속으로 들어가려 하더군요. 저도 그때 검을 뽑고 그 녀석한테서 떨어졌습니다. 확실히 숨통을 끊을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안개 속에 도사리는 것들은 쉽게 생명을 내주지 않는 법이니까요. 늘 그랬었죠."

"아쉽네요."

"그래도 지켜야 할 사람을 지켜냈으니 된 거야. 우리도, 세강이도, 지금 집으로 돌아간 성림이도 그렇게 생각할 걸. 그게 우리의 목표야. 안개 속에서는 빼앗으려 하면 빼앗기게 되고, 지키려 하면 빼앗긴 것도 돌려받을 수 있으니까."

"그래." 세강은 옆에서 다른 의자 하나를 가져와 힘없이 주저앉았다. "그게 무진의 법칙이지. 아직은."

세강이 마지막에 끼워넣은 단어의 의미를 바로 이해한 사람은 그의 오랜 친구 뿐이었다.

"많이 지쳤나?"

"괜찮아. 아니지, 사실은, 그래." 세강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많이 힘들어. 작년까지만 해도 이런 일들이 자주 일어나지는 않았는데. 요즘은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안개가 뒤틀린 의도와 힘을 지닌 놈들을 내보내고 있어."

나루는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어제 너한테 얘기했던 이곳에서의 삶, 무진의 삶…… 그런 것들에 아직 '평온하다'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지도 의문이야. 다들 안개 속에 숨어 있는 것들에 맞서 가족들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그 마음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용기나 힘을 가진 사람들도 이제는 드물지. 나나, 하다못해 성림이만큼 마술을 다룰 수 있는 사람도 손에 꼽을 정도야."

"그런 것 같네." 나루가 말했다. "넌 가족이 좀 더 많이 필요해."

세강이 고개를 들었다. "아직 미련을 못 버렸나?"

"나도 좀 상황을 다르게 보게 됐거든." 나루가 능청스레 말했다. "처음에는 우리가 네 친구가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건 이미 실패로 결론이 났지. 그런데 어제 그 온갖 일들이 일어나고 나서 깨달은 건데……"

나루는 극적인 효과를 위해 잠시 뜸을 들였다가 이림을 가리키며 말했다. "……생각해보니 얘네는 내 친구가 아니더라고."

"뭐?" 세강이 의아해했다.

"저기요?" 이림은 약간 상처를 받았다.

"이림, 휘영, 그리고 지금 또 어디 다른 곳에서 난장판을 벌이고 있을 대장이랑 다른 녀석들도, 내가 친해지고 싶어서 사귄 친구들이 아니지. 능구렁이 손은 내 가족이야. 가족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지. 모두 내 마음에 드는 사람들이라는 보장도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더 가까운, 바로 그런 사람들이 내 동료들이야."

"그래서, 뭐야?" 세강의 말투는 퉁명스러웠지만 얼굴에는 웃음기가 엿보였다. "네 가족을 데려와서 우리 가족으로 삼겠다 이건가? 그런 근본 없는 제안이 어디 있냐?"

"원래 가족이란 게 그렇게 생기는 거잖아. 근본 없이, 계획 없이, 생각 없이."

세강이 웃음을 참느라 끅끅거렸다.

휘영은 어느샌가 침대 옆에 자리를 펴고 누워 자고 있었다. 나루는 휘영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이림은 따뜻한 햇살이 자신의 뺨을 간지럽히는 것을 느끼며,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켰다.


"예, 대장, 네, 지금 돌아갑니다." 나루가 조수석에서 전화를 받았다.

그날 오후, 이림은 풍뎅이호에 다시 시동을 걸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도로 위로 올랐다. 이제 와서 되돌아보면 배달은 간단하게 끝났는데 왜 그 온갖 일을 겪게 되었는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아니면 괴물이 곡할 노릇이었거나. 실제로 곡을 하기도 했고.

"예? 아, 예에, 잘 끝났어요. 선물이랑 메시지랑 둘 다 잘 전달했고. 뭐, 이제 그쪽에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렸지. 아니, 대장, 직접 찾아갈 필요는 없어요. 놀다 오긴 뭘 놀다 와요, 고생했다고 칭찬은 못할 망정 진짜…… 이번에는 저도 좀 믿어 주시죠? 안개 낀 피난처에서는 안개가 제일 위험하다고 제가 전에도 말했잖아요."

안개가 꼈지만 이전처럼 숨막힐 정도는 아닌 도로를 안전히 달리면서, 이림의 녹색 다마스는 커다란 전광판을 하나 지나쳤다. 당신은 무진시를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이림이 귀찮게 하지는 않았냐고요? 딱히 걔 때문에 힘든 일은 없었는데요. 아, 물론 괴물이 나타난 이후로 계속 비명만 지르다가 어제 오후부터 죽 기절해있기는 했었죠. 차라리 그 편이 낫지 뭐, 비명을 지르면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것보다야……"

이림은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 SCP 재단의 모든 컨텐츠는 15세 미만의 어린이 혹은 청소년이 시청하기에 부적절합니다.
따로 명시하지 않는 한 이 사이트의 모든 콘텐츠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를 따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