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일기[정초본], 광해 4년(1612년) 3월 6일
각 사람들을 대질시켰더니 말마다 거짓임이 드러났고 그때그때 말이 달라서 그 가소로움이 희극도 견주기에 부족할 정도였다. 좌우가 모두 아뢰기를, "이미 그(김경립)가 터무니없다는 것을 알았으니 그만두어야 합니다. 지엄한 자리에 매우 미안스러운 일입니다." 하였다…(중략)…
승지가 대질시켜 힐문한 문안을 아뢰었다. 대신이 아뢰기를,
"이는 너무도 아이들의 장난 같아서 문안에 기재할 수 없습니다."
정인홍이 서찰을 내려놓았다. 옆에서 형혹이 궁금한 듯 쳐다보자, 그가 말해주었다. "이이첨이 추국이 어찌 진행되고 있는지 보내준 것이다. 김경립이 말이 이리저리 바뀌고 두서가 없으니, 성상의 의지가 없다면 옥사가 더 이상 확대될 것이 없다는구나. 이제 슬슬 저것을 써야 하겠다." 정인홍이 방문을 열고 마당에 놓아둔 상자를 가리켰다. 상자가 놓여있는 땅은 묵직한 물체가 올라가 있는 듯 내려앉아 있었고, 흰 천으로 보이지 않도록 세 겹으로 덮어둔 상태였다.
형혹의 팔이 마치 뱀이 기어가듯이 움직여 제 품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서 형혹이 거울을 꺼내들고 그것이 비치도록 각도를 이리저리 돌렸다. "저것이 날붙이의 기운을 띄고 있으니 금(金)이 생하는 축시에 행해야겠고, 휘말려서 되려 살을 맞지 않게 어르신도 지금부터는 직접 보지 말고 거울로 비춘 상만 보십시오. 그리고 이 일에 관련된 놈의 피나 살점, 아니면 뼈가 필요한데, 구해올 수 있겠습니까?"
정인홍이 피식 웃었다. "봉산군수 신율은 고문으로 유명한 자이니,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필시 형구(形軀)에 피나 살점이 말라붙어 있을 것이야. 너는 저 이물이 힘을 제대로 쓰도록 하는 것이나 신경쓰거라."
머물고 있던 집을 나와, 그는 곧장 군청으로 향했다. 이미 그가 온다는 소식이 관내에 쫙 퍼져서, 대문에 도달할 때쯤에는 아전들과 근처의 현령들이 쫙 도열해 있었다. 그가 문지방 안으로 들어서자, 신율이 버선발로 마당에 내려와 정인홍을 맞이했다. "잘 오셨습니다, 대감. 마땅히 먼저 찾아가 모셨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하여 참으로 죄송스럽습니다. 조촐하게나마 술상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조촐하다는 그의 말과 달리, 이미 청사 양옆에는 차려입은 관기(官妓) 여섯과 술상을 든 하인 둘이 대기하고 있었다. 정인홍이 껄껄 웃으며 물리쳤다. "되었네, 되었어. 공무로 온 것이니, 어찌 함부로 그럴 수가 있겠나."
"죄송합니다, 대감.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신율이 허리를 푹 숙였다. "되었네. 이번 고변을 쉬이 넘기지 않고 조정에 알린 자네의 공이 크지 않나. 내 힐책하러 온 것이 아니고, 밀지를 받아 온 것이야." 그 말에 신율의 눈이 크게 떠졌다. 정인홍이 이곳까지 와 있었으니 없는 잔머리도 최대한 굴릴 수밖에 없었다. 서둘러 주변인들을 물리치자, 정인홍이 물었다.
"네가 김경립을 찾아 처음으로 형추한 것이 틀림없으렸다?" 아까의 웃음기는 싹 사라진 채, 정인홍이 빠르고 날카롭게 물었다.
"예, 틀림없습니다." 신율이 긴장하여 답했다.
정인홍이 신율을 노려보았다. "너는 본디 천성이 천하고 사사로운 일들을 중히 여기는 간특한 자이니, 좀도둑의 열 손가락에 못을 박아 자복을 받은 적도 있었다. 김경립의 공초가 두서없고 또 어떤 자는 잡혀와 내 이름을 끌어다 대는 둥 헛소리를 하는데, 네가 무슨 일을 꾸민게 아니냐?"
신율이 땅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그의 몸이 벌벌 떨렸다. "천부당만부당합니다. 김경립은 본디 환속한 중이니 무식한 자여서 두서없이 말하였으며, 김경립의 아우도 맥이 통하는 자백을 하였나이다. 어찌 감히 제가 옥사를 조작하여 성립할 수가 있겠습니까."
"틀림없으렸다?" 정인홍이 다시 캐물었다. "지금 내게 거짓을 고했다가 밝혀지는 날에는 반좌율(反坐律)로 네가 능지(陵遲)를 당할 것이야. 성상께서 내 말을 가납(嘉納)하신다는 것은 너도 익히 들어 알 것이다."
"물, 물론이옵니다. 대감." 신율이 고개를 더 깊게 숙였다. "그럼 되었다. 김경립을 형문할 때 쓴 형구가 아직 있을 터인데, 거기 김경립의 피나 살점이 묻어있는지 보고 있으면 보내라. 없으면 김경립의 아우든 김백함이든 관련자의 피가 묻어있는 형구를 하인 편으로 보내도록 해라." 신율은 그 이상한 분부에 영문을 물어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오직 고개를 푹 숙였다. 정인홍이 몸을 홱 돌려 나가려 할 때, 신율이 허겁지겁 입을 뗐다.
"대, 대감. 하오나 남아있는 것이 없나이다." 정인홍이 고개를 돌리고 엎드린 신율의 등을 노려보았다. "무어라?"
"그 후로 형문할 자들이 많았고, 김경립을 심문한 것이 이미 스무 날이 넘었는지라…다 다른 자들의 피가 엉겨붙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나더러 어찌하라는 것이냐?" 정인홍이 말을 뚝 끊었다. "내가 효수된 김직재의 목이라도 수습해 가랴? 네 벼슬이 이미 당상에 이르렀는데 이만한 일 하나 처리할 수 없다는 말이더냐?" 신율이 눈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렸다. "있습니다! 방법이 있습니다. 김백함이 개성에서 잡혔으니, 유수부(留守府)에 필시 그자를 형문한 형구가 있을 것입니다. 파발을 띄우면 받아오는 데 사흘이면 족할 것입니다."
정인홍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혀를 찼다. 고민 끝에 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 하거라. 서둘러라. 종묘사직이 달린 일이다." 그러고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휙 돌아서 버렸다. "겁만 주었는데도 벌벌 떠는 소인배이니, 이런 일을 통째로 꾸며낼 배짱은 없을 것이야." 그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일은 이것으로 다 되었다. 사흘이라, 사흘을 기다려야 한단 말이지."
불어도감등록[개수본], 광해 4년(1612년) 3월 두 번째 기사
일찍이 왕이 정인홍을 도제조에 임명하였는데, 그가 도감의 일을 모르는데도 매사를 걸핏하면 자신에게 따르도록 하니 분히 여기는 자들이 있었다. 조정에도 그를 미워하는 자들이 많았고 좌상 이덕형이 탄핵하고자 하니 따르는[附和] 자들이 있어, 조정이 각자 당으로 나뉜 것과 같이 도감이 둘로 나뉘었다.
이에 선무사가 명하기를, "망령되게 결탁하지 말라. 그러한 자에게 마땅히 법을 엄히 세울 것이다." 하였다.
이덕형은 이항복의 집 사랑채에서 옆에 앉은 사람을 불편하게 흘끔거리고 있었다. 그 노인의 옷차림은 꾀죄죄하기 그지 없었다. 본래 흰 색이었을 두루마기는 찌들어 제 색깔을 알아볼 수도 없었고, 갓은 한쪽이 움푹 들어가 있었다. 또 손에는 큼지막한 금강석이 박히고 금으로 장식된 반지를 끼고 있었는데, 흙과 때가 잔뜩 끼어 윤이 제대로 나지도 않았다. 노인은 눈을 감고 명상하듯 다리를 모으고 앉아있을 뿐이었다. 썰렁한 침묵 속에서 불편하게 앉아있기를 얼마간, 이항복이 문을 열고 들어와 둘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래, 보아하니 썩 안면을 트지는 않은 것 같군." 그가 껄껄 웃었다. "이쪽은 한음이고, 조정에서 좌상의 자리에 있네. 그리고 도감을 만든 문충 이산해 대감의 사위일세."
그 말에 노인이 눈을 뜨고 이덕형을 빤히 쳐다보았다. "무명(無名)이라 부르시오." 노인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무명이라… 없다[無]는 것은 사에 집착이 없으니 공(空)하다는 것이고, 세상에 이름[名]을 주지 않으니 굴레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이오. 좋은 이름이외다. 도사에게 어울리는구려." 이덕형이 받아쳤다.
노인이 어이가 없다는 듯 쳐다보다가, 깔깔 웃었다. "벽창호는 아니로구나. 그래도 무명이라 부르시오. 여기 우상 대감에게 들으니 불어도감의 도사들과 연락을 하고 싶다는데, 정인홍을 어쩌겠다는 것이오? 그가 도감의 도제조이니 그리 쉽게 몰아낼 수 있는 자가 아닌데."
"몰아낸다는 이야기가 아닐세." 이항복이 고개를 저었다. "성상께서 신임하여 봉하신 자인데, 우리가 몰아내려고 하면 그것이야말로 역모가 되는 법.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지켜보고, 정인홍이 치부가 있다면 스스로 물러나게 하거나, 성상께 고해 명을 기다리는 것 뿐이니."
"둘 다 뜬구름 잡는 소리요. 차라리 주술로 살을 날려서 정인홍을 죽여달라고 청하시오. 정인홍이 봉산 땅으로 가지고 간 것은 사람을 죽이고 미치게 만드는 것이고, 그와 동행한 자는 죽은 것을 부려 산 자를 미혹하는 놈이오. 낮에는 천근만근으로 무거워져서 밤에만 움직일 수가 있는 기이한 것이란 말이외다. 우상 대감에게 들으니 죄인들이 갑자기 죽어나갔다고 하는데, 그 이물로 주술을 쓰려면 사람을 죽여 피와 살을 담아야 하니 그러한 것이요. 당신들은 여기서 부탁을 하고 명령만 하면 되겠지만, 말만 한다고 일이 그대로 되는 것은 아니외다."
"그가 이번 옥사에서 일부러 죄인들을 죽이는 데 가담하였다면 기군(欺君)에 해당하는 것이니 자연히 죽음을 면치 못할 터. 또 그가 무언가를 가지고 봉산 땅으로 향했다 하던데, 만일 주술로써 사람을 해치려 한다면 그것 또한 죽음을 면치 못할 터." 이항복이 담담하게 말했다. 이덕형은 옆에서 말없이 듣고 있었다.
"벽창호는 아니더라도 글만 읽은 샌님이로구나!" 노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갑자기 방 안에 바람이 불듯 노인을 중심으로 차가운 기운이 확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고, 방 안의 촛불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불어도감이 생기고 도감에 들기 거부하는 도사들을 잡아 죽일 때, 내 따른 것은 오직 왜란으로 어지러워진 이 나라를 걱정하였을 뿐이었고, 내 남장(男裝)을 하고 만주를 넘나들며 오랑캐들을 염탐한 것도 이 나라의 안위를 걱정한 것이었다. 옛날 무왕은 주(紂)가 도리를 잃자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고 나라를 세워 왕이 된 적이 있었다. 예로부터 비록 왕이라도 악을 행하면 이리하였거늘, 너희가 신하 된 자들이라면 일신을 돌보지 않고 마땅히 토역(討逆)해야 하지 않느냐!"
이덕형이 노인의 말에 잠시 얼이 빠진듯 멍하니 있다가, 갑작스레 노인의 앞에 엎드려 절을 했다. 이항복이 옆에서 당황해하는 것은 무시하고, 이덕형이 고개를 들어 말을 이었다. "내 오늘 크게 배웠습니다. 그러나 예기(禮記)에서 이르기를, 신하 된 도리로 임금의 잘못을 드러내 간쟁하지 않으며, 세 번 간하여 들어주지 않으면 떠나라 하였는데, 내 한 번도 말을 올리지 않았으니 지금 나서기에는 부끄럽소이다. 대인께서 내게 상세히 알려주신다면 마땅히 전하께 독대를 청해 말을 아뢰겠소."
"만약 들어주지 않으면 어찌하겠다는 게냐? 낙향이라도 할 것이냐?"
"정인홍이 음험한 계책을 쓰고 있다면 그럴 수는 없을 터. 봉산 땅으로 가서 내 혼자라도 무슨 일이 있는지 살펴보겠소이다. 만약 변고가 있다면 노구(老軀)를 어찌 아끼겠는가."
"이보게, 나더러는 정인홍을 감시하면 국문당할 위험이 있으니 조심하라고 했으면서, 정녕 그리하겠다는 건가! 박동량은 소북을 구원하려 한 것만으로 쫓겨났는데, 상께서 신임하는 정인홍이 기군망상의 죄를 범했다 말했다가는 목이 둘이어도 살기가 힘들걸세. 그럴 거면 나도 같이 가겠네!" 이항복이 옆에서 끼어들었다. "아니네." 이덕형이 고개를 저었다. "정인홍이 옆에서 상의 성정을 어지럽게 하고, 이이첨과 유인길 같은 자들이 조정을 장악하고 상의 총기를 흐리고 있는데, 내 지천명(知天命)을 이미 넘겨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어쩌면 이번이 그를 막을 유일한 기회일지도 모르네. 그러나 대북과 다른 소리를 낼 사람이 하나는 남아야 하지 않겠나."
노인이 품에서 조그마한 유리 조각 하나와 종이뭉치를 꺼내 건네주었다. "그 유리는 상제가 세상을 볼 때 쓰는 거울의 조각이라 먼 곳의 일을 비출 수 있고, 종이는 도감에서 가져온 이물에 대한 정보가 쓰여있소이다, 대감. 그리고 정충신 첨사께서 사람을 보내주어 내 봉산 땅에 숨어있으라 하였으니 말만 하면 움직일 수 있을 것이오."
이덕형이 노인이 건넨 것들을 챙겨 품에 넣었다. "내일 독대를 청할 것이니, 도성 근처에서 있다가 내가 퇴궐하면 오는 게 나을 듯 하오."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고 손에 낀 반지를 문질렀다. 순간 작게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노인의 모습이 방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가 있던 자리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종이 한 장만 허공에서 흩날리다 바닥에서 내려앉을 뿐이었다.
광해군일기[정초본], 광해 4년(1612년) 3월 7일
김직재의 어미 영숙에게 공초를 받았다. 승지가 아뢰기를, "영숙의 공초에서 직재와 백함이 곤장을 못 이겨서 자복한 것이지 어찌 역모를 했을리가 있느냐고 했습니다. 이미 자복한 역적에 대해서 이렇게 말을 하니 기록해야 합니까, 안 해야 합니까?" 하니, 왕이 이르기를, "대신에게 문의하라." 하였다.
좌상이 아뢰기를, "그가 말한 것은 물어보지 않은 것이니 기록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였다.
다시 친국이 끝나고 어둑어둑해질 무렵, 이덕형이 절을 올리고 앉았다. "지금 신이 직을 걸고 극비를 요하는 대계(大計)를 간하고자 하옵니다." 왕이 손짓했다. "좌상이 서두를 떼기도 전에 그리 말하니 겁이 나는구려. 무슨 일이오?"
"얼마 전에 죄인들이 곤장을 맞지도 않고 죽는 일이 있어 조사해보니, 불어도감에 봉한 사이한 이물에 피를 채우고 그것을 봉산 땅으로 옮겨 다시 주술을 행하고자 하는 자가 있었나이다. 이는 세 가지 죄이니 첫째는 붙잡힌 역적을 일률하지 않고 마음대로 죽여 성상을 속인 강상죄이고, 둘째는 고독(蠱毒)과 염매(魘魅)를 부려 모살하려 계획한 죄요, 셋째는 그러한 중대사를 조정에 논하지 않아 기망한 죄입니다. 첫째와 둘째는 대사면도 불가한 중죄이니 마땅히 추국해야 할 것으로 아뢰옵니다." 이덕형이 품에서 이물에 대해 적혀있는 종이뭉치를 꺼내 내밀었다. 왕이 받아들어 빠르게 읽어보았다.
"왜란 때 만들어졌는데 본디 왜병들을 저주해 죽이는 것이었으며… 피를 채워 주술을 행하면 원하는 자들을 아무리 멀리 있어도 저주해 죽일 수 있다. 두려운 용력이기는 하나 만들어진 계기가 가련하고 비통하니 부수지는 않고 사슬로 묶어 보관하라." 왕이 한 부분을 소리내어 읽었다. "내 부덕하여 즉위한 이래 역적이 끊이질 않으니 참으로 두려운 일이요. 비밀리에 괴이한 것들을 잡으라 도감을 만들었거늘 이제는 그 도감까지도 역모에 이용되는가." 왕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 그자가 누구요?"
"합천 땅의 내암 정인홍이옵니다."
한 순간 정적이 흘렀다. 체통에 걸맞지 않게, 왕의 입이 떡 벌어졌다. "누… 누구라고?"
이덕형이 다시 절을 올리고 깊이 고개를 숙였다. "신이 직만 걸었다 하였는데 이제 보니 명(命)도 걸어야 할 성 싶사옵니다, 전하."
왕이 어버버거렸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비틀거렸다. "그럴 리가 있겠소. 그에게 이번 옥사가 진상을 알기가 어려우니 암행하여 조사해 토역하라고는 하였지 이런 일을 행하라 한 적은 없소."
"전하." 이덕형이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 "이순토역(以順討逆)이라 하였으니 이는 거스르는 것을 순리로 토벌한다는 것이옵니다. 그런데 이제 그가 토역의 명분을 받아 거스르는 것으로 거스르는 자들을 토벌하려 하니, 참으로 어지러운 일이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그 뜻은 나도 알겠으나…" 왕이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좌상이 농이 너무 심한 게 아니요? 무함하는 자들이 있는 것 아니요?"
"전하." 이덕형이 품속에서 이번에는 유리 조각을 꺼내 손에 쥐고 내밀었다. 유리 조각이 파랗게 빛나더니 상을 하나 비추었다. 흰 천에 덮여 마당 한편에 놓여있는 이물과, 정인홍과 형혹의 모습이 떠올랐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불어도감이 생긴 것은 무지한 만민을 구제하고 음흉한 무리들이 힘쓰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인데, 어찌 나라의 중대사에 사술을 쓸 수가 있습니까. 조정의 일을 처리하는 데 사술을 쓰는 선례를 남겼다가는, 후에는 이 나라가 마치 진(秦)과 같이 될 것입니다. 군사를 보내 정인홍을 잡아들이고 불충한 도사들을 잡아다 벌하시옵소서."
"진..진나라라? 좌상이 과인을 지금 진시황에 빗댄 것이요?" 이덕형은 순간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좌상의 말이 이리 흉악하니, 어찌 믿고 따르겠소? " 왕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지며 감정을 못 이기고 손발을 허우적거렸다. "좌상이 지금 한 말이 결코 직재가 꾸민 역모에 비해 경(輕)하지 않으니, 좌상도 역모를 꾸미는 것이오? 임진년부터 나를 도운 좌상까지도? 이러니 내가 먼저 죽이지 않으면 목숨이나 부지할 수 있겠냔 말이오." 말이 점차 힘을 잃어가고 두서없어지고 있었다. "보위를 위태롭게 하는 자들을 모두 베어 후대가 경계하게 하면, 그때서야 방자하게 굴지 않을 것이니…" 말소리에 울음이 섞여 나왔다. 이덕형은 죽은 듯이 움직이지 않았다. "계축년에 선대왕께서 정인홍의 상소를 보고 부자간에 의심이 생기게 만든다 하였고, 세자가 천자의 허락을 받지 못했으니 어찌 세자라 하겠느냐고 하였으니…어찌 아비가 이러실 수가 있단 말이오. 어찌." 왕이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꼈다. "나가시오!" 엎드린 이덕형의 몸 위로 불호령이 쏟아졌다. "오늘 일은 다 불문에 부칠 것이니, 좌상도 입을 다물고 떠나시오! 과인을 보지 않은 것으로 하시오!"
그렇게 쫓겨나와 도성 문을 나올 때쯤, 밤에 본 노인이 가마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이리 되어도 일은 이미 엎어진 것이었다.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가 하인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이 길로 집으로 가라. 누가 묻거든, 나는 아파서 집에 누워 있다고 하거라."
« 야사 - 불어도감의 명맥 (1) | 허브 | 야사 - 불어도감의 명맥 (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