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그렇다고…… 이렇게 앉아만 있을 순 없잖아요?”
가넷의 말에 스트링은 고개를 들었다. 가넷은 천천히 다가와 스트링 앞에 앉았다.
“우리가 하려는 일의 이유를 찾으려 들고, 책임 따지고 들면서 아무 것도 못하고. 두 분이 가장 싫어하는 일 아니었어요?”
“그러다 한 명 갔잖아요. 한 명은 연락도 안 되고, 한 명은 어디 끌려가고. 우리 팀, 그냥 완전 망했어요. 산산조각 났다고.”
“그럼 다시 해야죠. 깨진 거 다시 이어붙여야지. 이렇게 손 놓고 있을 거예요, 진짜?”
가넷은 주저하다 스트링의 손을 붙잡았다.
“박사님. 우리 예전에 건축물 가지고 일할 때 기억나요? 한 번은 거의 다 조사한 게 무너져서 했던 일 다 쓸모없게 된 적 있잖아요.”
“아뇨.”
“그 때 박사님이 그랬잖아요. 내가 깜짝 놀라니까.”
가넷의 말에 스트링은 그녀의 눈을 들여다봤다.
“가끔은, 모두 무너뜨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된다고요. 거기에 의미가 있다고.”
“자네 참 대단한 일 했어.”
스트링은 눈을 끔뻑였다. 그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의 양 팔에 정맥 주사가 꽂혀 있었고, 그의 얼굴부터 발끝까지 붕대와 축축한 거즈가 칭칭 감겨 있었다.
“교수님?”
“거 참, 호칭을 통일하게나. 일할 땐 눈치 보면서 과장님이라고 그러고, 아닐 땐 교수님이라고 그러고. 나도 헷갈리네.”
“여기 어디에요?”
옆 침대에서 화이트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진짜 기억을 잃은 모양이구만. 자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날짜 대보게나.”
“7월…… 날짜는 기억 안 나는데, 그날 점심이 삼계탕이었어요.”
“삼 일 치라. 기지 관리자가 기억 소거 절차 폐기를 다시 번복했다는 말이 일리가 있구만.”
침대에서 화이트가 몸을 일으켰다. 그의 몸 상태를 본 스트링이 깜짝 놀랐다.
“교수님 왜 이렇게 다치셨어요?”
“자네가 더 심해. 쯧쯧, 내가 그 약 용량 조절 잘하라고 논문 때 그렇게 말했다만. 하루 반나절 동안 코마였어, 자네.”
화이트는 침대에 걸터앉아 스트링을 바라보았다. 교수는 빙그레 웃고 있었다.
“설명은 나중에 듣게. 우선 칭찬하고 싶어. 자네 덕분에 기밀 누출도 막았고, 적대 조직, 그러니까…… 요주의 단체의 인물들도 많이 확보했네. 비서관은 아직 혼수상태고, 깨어나는 대로 심문 후에 귀가 조치할 거야. 기억은 하려나 모르겠지만. 깨어나면 기억 소거 후에 정부 측에 인수할 걸세.”
“비서관? 무슨 말씀이세요?”
“그냥 듣게나. 나중에 설명을 들으면 다 이해할 거야. 고마워서도 그렇고. 윤리위에서 내 손발을 많이 묶었었거든. 자기 위원들을 의심하냐고 해서 말이지. 특별 부서라고 행적 조사도 못하게 막는데, 당연한 거 아닌가? 여튼 이제 그 성역도 어지간히 뒤집어 질 걸세. 세상에 반란에 윤리위라니, 웃기지 않은가? 톰슨은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하지만, 뒤집으면 뭐가 나올지 아는가. 덕분에 내 발언권도 꽤나 세졌고.”
“……?”
“부산 쪽 기지는 서버실이 날아간 통에 당분간 기지로썬 기능을 못하게 되었다네. 건물도 몇 개 날아갔으니, 전체적으로 기지 재건 사업을 시작해야 한다더군. 뭐, 관리자만 바쁘게 됐지만, 관리자야 원래 바쁜 사람 아닌가. 그러려니 해야지. 덕분에 사령부 뿐만 아니라 재단 네트워크에 대한 전반적인 심의가 들어갈 거야. 더 안전해지고, 더 튼튼해지겠지.”
“아…… 네. 좋은 일이네요?”
고개를 갸우뚱하는 스트링에게 화이트가 봉투 하나를 건넸다. 스트링이 봉투에서 편지를 꺼내는 동안, 화이트가 말을 이었다.
“나중에 인사할 사람들이 많네. 특히 케일렙 요원이 자네를 굉장히 보고 싶어 하더군.”
편지를 읽던 스트링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두서없이 두리번거리던 스트링은 수액 폴대를 뽑아들고 옆의 휠체어에 끼웠다. 휠체어로 낑낑거리며 올라타는 스트링에게 당황한 화이트가 손을 내저었다.
“지금 가라는 말은 아니었는데.”
“가서 들어볼게요. 고맙습니다, 교수님!”
스트링은 휠체어를 삐걱거리며 병실 바깥으로 나갔다. 비명 소리와 뜀박질 소리가 차츰 멀어져 가자, 화이트는 태블릿을 꺼냈다. 화면엔 온몸에 튜브가 꽂힌 채 누워 있는 비서관의 영상이 떠올라 있었다. 화이트는 씁쓸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어쩌면 기억 못하는 게 나을 수도 있겠군.”
스트링은 쫓아오는 의료진을 피해 휠체어를 굴렸다. 그의 친구가 팔 아프다며 투덜거리는 것이 이해가 갔다. 진통제 때문에 팔이 아픈 건 아니지만, 뛰는 거에 비해 속도가 느렸다. 그래도 스트링은 온 힘을 다해 가넷이 기다리고 있는 병실로 휠체어를 밀었다.
그의 재건이 시작되어야 할, 이유를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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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링 박사님께.
안녕, 박사님. 솔직히 편지도 오글거리지만, 말로 하긴 더 어려울 것 같아서 써요. 할 말이 꽤 많거든요.
제가 이 년 전에 처음 재단에 왔을 때, 처음 본 사람이 박사님이랑 로드 박사님이었어요. 그 땐 팀도 뭐도 없었으니까 어색했죠. 체계도 하나도 없었고. 그 때 박사님이 저한테 가넷이라고 이름 지어준 거 기억나세요? 자기들도 진짜 이름으로 암호명을 짓는다면서, 저한테 직접 지어주셨잖아요.
그 날부터 지금까지, 솔직히 말하면 되게 힘들었어요. 재단 나가고 싶을 때가 거짓말 안하고 대부분이었던 거 같아요. 주변 사람들한테 말도 못했지만, 버틸 자신이 없었어요. 갇혀있다는 생각도 들었거든요.
그래서 박사님한테도 고마워요. 박사님이 해준 말 덕분에, 저는 옛날 기억을 지우고서도 남들처럼 그리워하지 않을 수 있었어요. 박사님과 로드 박사님, 포드 씨, 맥켄지 씨, 그리고 다른 모든 분들까지. 전부 이 년 전의 제가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도와준 분이니까요.
그러니까 박사님, 아무리 힘들어도 다시 시작했으면 좋겠어요. 우리 둘 뿐이라도, 제가 도와드릴 수 있잖아요? 박사님 말처럼 무너졌더라도 다시 일어나요. 박사님이 내게 말해준 것처럼, 언제나 내가 박사님 곁에 있을게요.
다시 건강하게 일어나시면 로드 박사님 찾는 거부터 시작해요. 실종은 사망과 동의어가 아니라고 했잖아요?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 박사님도 어딘가 있을 거예요. 그렇죠?
기다릴게요. 건강하세요, 박사님.
케이시 가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