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 한번 이야기를 해보자고. 일단 난 어딘가의 화자야. 주인공이라고 할 것 까지도 없겠군. 뭔가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잡설을 늘어놓는 것 뿐이니까.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직 알 수 없는 걸로 봐서 영상 매체는 아니겠군. 텍스트겠지 아마? 아. 묘사할 필요는 없어. 그럴 지면은 없다는 건 알고 있어.
하여튼 재단엔 SCP-245, SCP-3143, 'The Database'같이 많은 메타픽션 소재의 SCP가 있어. 테일은 그보다도 훨씬 많을거고. 근데 이런 걸 읽으면서 느낀 건데, 왜 다들 그렇게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걸까?
물론 서로 하는 짓이 심하긴 해. 등장인물이 죽거나 미치는 건 다반사고, 자신의 존재가 픽션이란 걸 알게 되면 받는 망실감은 크겠지. 근데 어차피 별 방법이 없잖아.
난 내 현실 밖의 존재인 너와 독자들을 인식하고 어떤 식의 영향을 끼치고 있어. 하지만 그렇게 연출된 스크립트를 내뱉고 있는 장치이기도 하지. 엄밀히 말해서 난 외부의 존재를 인식할 수 없어.
좀 쿨하게 받아들이면 차라리 더 낫지 않겠냐는 말이야. 걔들 이야기 하는 거 아니고.
근본적으로 보자면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도 연출의 일환이겠지만.
나의 인식은 실재하지 않아. 그런데 너도 마찬가지 아냐? 너의 인식이 과연 실재한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그저 연출일 뿐은 아닐까? 나는 나에 대한 정보를 모두 알지 못해. 너도 그렇지 않아? 네게 일어나는 일이 네가 모르는 스테이터스에 의해 결정되고 있는 걸수도 있지. 사람마다 운 스텟이 정해져 있을지도 몰라. 마치 게임처럼.
너의 현실은 네가 받아들일 수 있는 상상의 한계 속에서만 성립해. 너의 현실의 창작은 결국 너의 현실의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나온 생각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처럼. 그렇지만 너의 현실이란 창작물은 너희들의 한계를 뛰어넘을지도.
생각해보니까 창작이라는 전제를 두고 있었는데, 또 다르게 생각해보면 엄청나게 정교한 시뮬레이션일지도 몰라. 튜링 테스트는 네가 의식적인 존재인지 그저 고도로 발달한 코드일 뿐인지 판별할 수 없어. 나는 SCP 재단이라고 이름붙여진 현실 속에 존재하지만, 넌 어느 현실에 존재하는 걸까?
네 세계가 창작 또는 시뮬레이션이라 이름붙여진 가상현실의 연쇄의 시작점, 즉 논픽션일수도 있지만 난 그렇진 않으리라 본다. 산술적으로 그럴 확률은 희박하거든. 그러니까 잘 해봐. 네 현실의 한계를 벗어나 보라고. 나는 그렇게 유명해질 것도 없겠지만 재단은 네 현실에 분명히 영향을 끼치고 있어. 재단의 캐릭터들은 비실존의 존재지만 여러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생각되고 있지. 그 점은 현실의 사람과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말이야. 너라는 캐릭터 또는 코드도 그렇게 될 수 있어. 행운을 빌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