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박사 일지, 2014/04/24
오늘 하이타이라Heiteira, ██████ 등과 함께 우리는 343에 관한 연구를 실시했다. 늘 그랬듯이 우리가 그에게 가까이 갈 때 달라지는 물리량을 측정하고, 무엇 때문에 그가 공간을 원하는 대로 다룰 수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두어 가지 이상한 점을 찾아내기는 했으나, 변칙적인 현상은 아니었다.
SCP 때문에 일하는 곳에서 약간의 변칙적 사항이야 오히려 정상이라고 말해야겠지만.
그런데 내가 343한테서 마지막 전극을 떼냈을 때, 그가 내게 말했다… 하이타이라도 ██████도 이 말을 듣지 못했다. 먼저 일찌감치 떠났으니까.
"아직도 방정식 속에서 변칙성을 찾고 있군."
평소에 하던 말들이랑은 생판 다른, 의아한 소리였다. 조금만 더 말하도록 시키려 해 봤지만 그는 무덤 속 사람처럼 더 말이 없었고, 내가 다소 고집을 부리기 시작했을 때 그는 내 사무실로 날 이동시켜 버렸다.
젠장, 대체 무슨 소리였을까?
수많은 SCP들 이야기를, 들어보기는 했다. 살인이나 의식, 이차원이나 다른… 어쨌든 그런 불쾌한 이야기들을. 하지만 이번 일은 343의 평소 행동하고는 완전히 달랐다. 기지 이사관한테 이 이야기를 알려야 하려나… 됐다. 그 띨빡한 우리 존경스런 이사관님은 벌써 내 연구자금 요청도 무시해본 사람이니까.
생각 떠오를 시간 좀 가져야겠다. 여하튼 다른 할일도 있으니까. 어떤 멍청한 D계급 인원이 또 실험 중에 006-FR 창고를 열어보려 했다는 모양이다. 뭔 지랄이 났는지 말할 필요도 없겠지.
그림 박사 일지 2014/04/25
오늘 새로운 개체 하나를 수령했다. 수령이라 해도 될진 모르겠다만.
이 개체는 기지 한 격리실에서 그냥 출현했다. 정확히는 113-B호실. 무슨 커다란 정육면체 기계인데 각 변은 2m고 터치스크린 달려 있고 뭐 가설라무네. 얼핏 보기는 그냥 초고성능 컴퓨터고, 난데없이 출현한 것만 빼면 변칙성 같은 것도 잘 모르겠다.
프로그Frog랑 같이 내일부터 실험 들어갈 예정이다.
그건 그렇고, 네렘사Neremsa의 시가를 숨겨놨다.
얼마나 걸려서 다시 찾아내나 한 번 보자.
그림 박사 일지 2014/04/26
우와, 마법처럼 뿅 나타난 이 녀석 굉장히 쓸모가 많다.
프로그는 일련번호가 붙을 때까지 이놈을 "위대한 계산기"라 부르기로 했단다.
이 녀석은 원하는 공간과 원하는 시간에 발생하는 화학적 힘과 반응을 모두 계산할 수 있다.
대충 말하자면 이놈은 미래 예측이 가능하다. 좌표와 시간만 입력하면 된다. 그러면 기계에서 숫자가 나오는데, 우리가 그걸 해석해야 해서 시간이 좀 걸리려고 그랬다가, 그냥 해석까지 다 해서 나오도록 환경 설정을 마쳤다. IT 부서에서 아침나절을 다 바친 덕이다.
맨 먼저 우리는 비교적 "간단한", 하지만 재단의 어떤 다른 컴퓨터를 가져와도 불가능한 것부터 시작했다. 네렘사 요원이 사무실에 숨겨놨던 영국식 룰렛판 어느 칸에 구슬이 떨어질까 같은.
그리고 결과는 항상 정확하게 나왔다. 크기 때문에 못 갖고 나가는 게 아쉬웠다. 카지노에서 쓰기 딱 좋은데.
내일은 일정 기간과 더 넓은 공간에서 실험을 진행할 작정이다.
아, 그리고 네렘사는 누가 자기 물건을 훔쳐갔는지 후딱 알아내 버린 모양이다. 그렇게 나한테 속사포로 쌍욕을 날리던데 뭐 다른 이유가 있으려나. 알 게 뭐람.
그림 박사 일지 2014/04/27
343이 무슨 소릴 했는지 깨달았다.
그 방정식.
우리. 이 세상.
우리가 위대한 계산기로 실험을 진행하던 와중에 그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 늙은이가 나한테 그런 소리를 하고 이틀 지나서 이 물체가 발견된 것은 우연이 아니리라 생각한다.
SCP 때문에 도주와 접촉을 거듭하면서 몇 년을 휭하니 보낸 끝에 내가 배운 건 편집증, 그리고 우연이란 없다는 사실뿐이었다.
우리가 영국식 룰렛의 위치에 관한 미적분 계산에 돌입했을 때, 이 기계는 끝도 없이 이어지는 뉴턴 역학 방정식, 그리고 그 해를 내놓았다. 바로 좋아할 수가 없었다.
내가 이해한 바는 이렇다. 그 늙은이가 방정식 이야기를 한 건, 우리 모두 이야기를 한 거였다. 이 우주를.
결국에 우리는 모두 원자들이다. 우리 우주는 원자로 이루어졌다. 우리 모두는 물리법칙을 따른다.
그러니 따지고 보자면 이 우주는 방정식의 집합이라고 요약할 수가 있다.
그리고 자유의지, 생각만 해도 짜증이 난다. 우리한테 자유의지라는 건 없다. 우리 뇌조차도 원자로 이루어진 일개 체계일 뿐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 또한 방정식의 집합으로 요약된다. 자유의지 따위는 없다. 우리는 로봇일 뿐이다. 아주 초고도 기술로 이루어지고 스스로 업데이트할 줄 알고 있는. 아, 생물학이란…
위대한 방정식, 그건 바로 우주였다.
변칙개체, SCP, 그것들은 물리법칙에 지배되지 않는 놈들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이 존재한다는 말은, 누군가 들여왔다는 말이었다. 우리 우주 바깥의 누군가가.
그것들이 저절로 생겨났을 수는 없었다. 우리 우주의 법칙에 반하는 존재이니까. 다른 데서 왔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누군가 그 변칙개체들, 곧 SCP들을 만들어냈다면, 그놈들을 만들어내 이곳을 난장판으로 바꿔놓은 그 기본방정식 또한 만들어냈을 것이다. 우리 우주에 장난을 친.
젠장, 재단보다 훨씬 거대한 무언가를 찾아내 버렸다. 이건 위대한 계산기로, 내일 확인해 봐야겠다. 이 우주를 다스리는 기본 코드가 있는지 어디 한번 보자.
그림 박사 일지 2014/04/28
그럴 줄 알았어,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갈 줄.
우리는 어느덧 익숙해진 채로 여러 조건을 걸어가며 기지 이사관이 요청한 대로 평소처럼 실험을 진행하고 있었다. 꽤나 위험한 것도 다루고, 심지어 "윤리적" 문제까지 들어가는 참이었다.
그런데 뭐야.
오늘 O5-1이 들이닥쳤다.
그리고 위대한 계산기를 새로 실험하는 걸 엄금했다. 위반 시 사형이라며.
거기다 조만간 기계를 파괴하겠다는 계획까지.
왜 저 기본 코드를 감추려 하는 거지? 이 결정을 설명할 방법은 단 하나밖에 안 보인다.
저들이 안다는 것.
그림 박사 일지 2014/05/01
금지 따위 거역했다. 이제 난 그 코드가 엄연히 존재하는 줄 아는 사람이니까. 이 우주를 그려내는 그 거대한 방정식이. 나는 위대한 계산기에게 그 방정식을 요청했고, 계산기는 내게 방정식을 내놓았다. 그러나 차마 기록할 수 없었다. 재단 서버도 그 충격을 버틸 수가 없을 테니까.
우리는 그저, 시뮬레이션일 뿐이었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았고, SCP는 우리 우주가 거짓임을 증명하는 모순이었다.
그들은 입증하고 있었다. 우리 우주가 비논리적임을, 불안정함을, 우리는 베타 버전일 뿐임을, 오만 가지 지랄들을, 그들은 우리가 알기를 바라고 있었다.
아니면 왜 343이 이런 길을 나한테 보여줬겠어? 위대한 계산기를 보내준 자는 바로 그였다. 그것이 느껴졌다. 그가 나한테 이걸 보여주려 하고 있었다.
대체 왜?
그리고 O5들은 뭐지? 세상에서 SCP를 숨기겠다고 재단을 만든 사람은 그들이었다. 세상에. 그 개자식들은 그 실체를 잘 알고도 남았다.
그리고 그걸 숨긴다는 건, 그들 또한 이 위대한 지랄을 주관하는 사람이기 때문이겠지.
애초에 어떤 자식이 이따위 장난질을 꾸몄던 거지? 어떤 "신"이 실험이 하고 싶어서 이런 매트릭스를 꾸며낸 건가?
SCP를 통해서 우리는 다른 우주가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신성한 서버 속에 갇혀 있는 수만 가지 매트릭스 중에 하나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따금 변칙현상이 나타나고 두 매트릭스가 연결되고.
하지만 누가 그 변칙개체를 낳은 거지? 무슨 지고한 해커인가? 왜 그러는 거지?
대체 왜.
더 이상은 아무것도 모르겠다.
이런 것 따위 발견하지 말 걸 그랬다.
하지만 이제 와서 되돌아갈 수도 없다.
이 우주를 기술하는 방정식이 존재한다면, 교란항 또한 존재할 것이다. 변칙개체와 SCP를 설명하는, 또 그들이 왜 만들어졌는지 보여주는. 어쩌면 어떻게 막을 수 있을지 알려주는.
핵심의 위치는 알아냈지만, 먼저 위대한 계산기를 만져야 한다. 다시.
그림 박사 일지 2014/05/15
위대한 계산기에다 대고 몇 가지 SCP를 계산해 봤다. 경비원 두 명이 지나갔는데 걸렸으면 뼈도 못 추릴 뻔했다.
이 개체를 파괴하기 이틀 전이란다.
그리고 난 찾아냈다.
형언할 수 없는 가치의, 모든 SCP에게 공통의 변수로 작용하는, 이 우주에 걸맞지 않은 물리법칙들을 모조리 서술하는 그 모든 코드들을.
결국 찾아내고 말았다. 모든 변칙성을 다스리는 방정식을.
10테라바이트에 이르는.
가짜 001 제안들을 숱하게 보고 나니 좀더 강렬한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클레프의 불의 천사라든가, 기어스의 외계종이라든가.
그래, 이번 일은 내가 별일을 참견했고, 결코 나만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결국, 001은 단지 망할 숫자들의 연속이었을 뿐이다.
앞으로 올 SCP들의 창조를 내다볼 수 있는 도구로서. 젠장.
그림 박사 일지 2014/05/21
양쪽을 모두 따져봤다.
현존하는 가장 강력한 기억소거제를 열댓 개는 가져온 듯하다.
이 일지는 암호화해서 어딘가 숨어 있는 중앙 데이터 뱅크로 보낼 작정이다. 혹시나 나보다 더 담력 있는 똑똑한 놈이 생길지도 모르지.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이 방정식을 세상에 드러내려고 해 봤지만, 이 모든 걸 만들어낸 놈들은 소프트웨어 상에서 지구를 평평하게 만들어놓을 수 있는 두 가지 변수를 틀어쥐고 있다. 반항할 수도 없다.
그리고 나는 차라리 이전처럼 생각하는 게 낫다. 내가 꼭두각시인 줄도 모르던 채로.
일지는 가짜 페이지를 만들어놓아서 벌써 바꿔놨다. 이 알약들을 전부 다 삼켜버린 다음, 될 대로 되라지 할 작정이다.
이런 게 그놈들이 나한테 기대했던 결과였겠지. 그놈들의 능력을 생각해 볼 때, 내가 다르게 선택하기라도 했으면 벌써 죽어버렸을 테니까.
물론 선택할 수조차 있었다면.
[데이터 말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