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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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 하나가 풀잎 끝에 매달려 있었다. 그 무게 때문에 기울어진 이파리 아래로 자신의 그림자가 웅덩이에 잔잔히 비쳤다. 젖은 몸을 말리기 위해 움직이지 않던 나비는 그 웅덩이를 거울삼아 보기라도 하려는 듯 늘어뜨린 날개를 활짝 펼쳐보았다. 새하얀 눈과 같은 바탕색의 무늬 없는 날개가 사뿐사뿐 움직였다.

모두들 그 날갯짓과 같은 움직임에서 아무런 소리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길게 뻗어있는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 자기를 알아차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세계를 상상했다. 아니면 자신에게 충실한 세계라던가. 이따금 창틀 너머에 정말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환상에 불과하다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 모습을 그립게 바라보았다. 소리 지르는 사람도 집어던지는 사람도 없었다. 대신 거기에 번데기 허물이 있다.

나비는 날개를 보면서 과연 이것이 자신의 완성된 모습인가 생각했다. 이대로 이 풀잎에서 떨어져 날아갈 수 있을까? 성급했다간 웅덩이에 빠져버리고 만다.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리자. 위험한 도박을 할 필요는 없지.

하지만 거의 다 되었다. 그것은 분명하다. 그녀가 문을 열었다. 그 누가 아무리 고약하게 굴더라도 거기에 움츠러드는 단계는 지났다. 이제 그녀가 무슨 말을 내뱉든, 나비는 견뎌낼 수 있다. 그런 날이 결국에는 왔군! 그녀는 머릿속에서 자신 있게 속삭였다. 심지어 그녀가 지금 술을 마신 상태라고 해도 최악은 아니었다. 최악은 이미 겪었고, 지나가고 없는 것이었다. 이제 날아오를 각오가 되어 있다.

집안은 어두웠다. 샤워를 하고 있는지 욕실에서 물 소리만 고요하게 흐르고 있을 뿐이다. 그녀는 좁은 통로를 따라 들어가 스위치를 향해 손을 더듬었다. 덜컥하는 소리가 들리자 불빛이 내리쬐면서 어지러운 방이 나타났다. 눈을 깜빡이며 어둠과 혼란 사이를 오갔다. 수도관 소리 사이로 물줄기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지금 확인해볼까, 어쩔까? 어쨌든 결과는 이미 알고 있었다. 명백한 증거가 기다리고 있다. 날개의 완성이다.

그녀는 좀 더 기다리기로 했다. 괜히 지금 들어가서 성질을 돋울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따뜻한 물 덕분에 잠시나마 나른하고 좋을 텐데 자기를 보게 되면 기분을 잡칠 것이다. 그 정도는 이해해줄 수 있었다. 대신, 그녀는 구석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책으로 손을 뻗었다. 닳도록 읽어 이제는 내용을 술술 외울 수도 있는 옛날이야기. 괴물도 나온다.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나쁜 것들. 그렇지만 이 괴물들은 또 그녀를 두려워하고 있을 것 같다. 그녀가 위에서 내려다보며 그들이 하는 행동을 감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 심정을 잘 알았다.

기분이 어떨까? 하늘을 날 수 있게 되었다는 걸 알았을 때는. 어쩌면 아무렇지도 않다는 사실에 약간 슬플 것이다. 뭔가 느낀다고 해도 서글플 거라는 건 마찬가지고. 홀로 선다는 점에서 오는 허영심 가득한 만족감은 대가 또한 컸다. 그런데도 그녀가 여기에 매달리는 이유는 오히려 함께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닌가? 시간은 거꾸로 돌릴 수 없는데 사람들은 자기가 뭐라도 되는 듯 제멋대로 거꾸로 행동하니 자기가 생각해도 괴상한 일이다.

사실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녀는 아주 간단한 명제를 발견해냈다. 그녀가 진심일 리가 없었다는 것이다. 가만 두고 생각해보니 이제까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번데기 허물을 생각했다. 어느 쪽이나 단지 성장이 필요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렇다면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수 있을 것이다. 바닥을 채우고 있는 괴물을 무찌를 왕자님은 처음부터 필요하지 않았다. 그것들이 마침내 굳어 견고한 지지대가 되는 날에 그녀는 나비를 다시 보게 될 것이다. 결국은 봐줄 것이다. 그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물소리를 들으면서 한 가지 떠올린 게 있다면, 거기에는 그녀가 혼자 집안에 틀어박혀 있을 때 연구하던 시계 초침 소리와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혀를 차 가면서 초침이 튕기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 간격이 일정하지가 않다는 걸 느끼게 된다. 사실, 간격은 일정하다. 그렇지만 그녀가 공을 들여서 숨이 찬 상태가 되어보면 바늘이 평소보다 좀 더 느리게 가는 것 같다. 상태는 감각에 영향을 준다. 그런 생각은 나중에 생각만으로 현실 자체에 영향을 줄 수 없을까 하는 공상까지 이어졌다. 마치 종이 위의 등장인물들은 페이지가 하나씩 넘겨지고 있을 때에야 비로소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과 비슷하다. 지금 보면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초능력자라는 사람들은 원래 말이 안 된다. 그러는 동안에도 물소리는 마구잡이로 후드득 떨어지는 것 같으면서 금세 졸졸 흘러내리는 소리처럼 바뀌며 오락가락했다. 사실은 처음부터 내내 흐트러짐 없이 일정한 소리만 들려오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게 첫 번째 신호였다.

그녀는 뒤늦게 깨달은 기묘한 낯섦에 놀라 벌떡 일어났다. 왜 아무런 변화도 없지? 왜 아직도 그대로인 거야? 그녀가 속으로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침체된 소리를 거슬러 욕실로 다가가는 동안 그녀는 휘몰아치는 불안감이 자신을 붙잡고 늘어지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한 발짝 떼는 데마다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마치 질퍽한 늪지대 위에 툭 던져진 것 같았다. 그녀는 문이 제대로 닫혀있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떨리는 손으로 노크를 하자 문이 그대로 천천히 열렸다. 난생처음으로 바랐지만 바라지 않던 일이 벌어졌다. 선뜻 발을 디딜 엄두를 내지 못하던 그녀는 문틀을 부여잡고 고개를 내밀었다. 불이 꺼져 있었다. 그리고 가득 찬 욕조에서 물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수도꼭지에서 쏟아지는 물이 욕조 속에 역겨운 파도를 일으키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녀는 허둥지둥 손을 다시 더듬어 바깥벽에서 전등 스위치를 찾았다. 익숙한 굴곡이 습관의 산물로 어렵지 않게 잡혔다. 그것을 뒤집기 위해 손끝에 떨리는 힘을 가할 때, 그녀는 분명 아무런 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온통 붉었다. 단지 욕실 전등이 주홍빛이기 때문이라기에는 너무 잔인한 붉은색이었다. 욕조는 핏물이 쏟아져 나오는 괴물의 입처럼 계속해서 토악질을 해댔다. 넘실거리는 불결한 폭포 너머로 부유하는 형체가 언뜻 보인 것 같았다. 그녀는 기계적으로 슬리퍼에 두 맨발을 집어넣고 앞으로 다가갔다. 그 형체는 점차 또렷해졌다. 사실 그녀의 눈에는 처음부터 모든 것이 또렷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붉은 웅덩이 아래에서 마구 버둥거리는 머리카락의 덩어리를 보았다.

다음 순간, 모든 것이 내려앉는 듯했다. 직후 붉은 것과 검은 것들이 서로 엉겨 붙은 덩어리 사이로 거품이 비집고 나오며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욕조 위로 거대한 형상을 이루며 솟아오른 그것이 손을 뻗치듯 양쪽으로 가지를 나눠 타일을 타고 다가왔다. 그녀는 까무러치게 놀라며 거기에서 도망치려고 고개를 휘저었다. 날개, 날개를 펼쳐! 지금 당장! 그러나 날개는 아직 젖어 있었다. 그녀는 이제까지의 자신에게 그것이 닥쳐오는 것을 막지 못함으로써 스스로 그것에 사로잡히도록 허락하고 말았다. 다음에 그녀는 뒷걸음치다가 넘어져서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왜? 그녀가 이를 악물고 필사적으로 물었다. 이렇게 예쁜 나비가 기다리고 있는데 왜 그냥 가버린 거야? 그녀는 심지어 나비가 자라는 모습에 관심조차 없었다. 정말로? 그래서 가만히 기다려주는 것도 견디지 못하고 역겨워 도망쳤다는 거야? 붉은 웅덩이는 잔잔한 수면으로 대답했다. 그런 외침으로는 자신에게 작은 파장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럴 리가 없어! 그녀가 절규하자 웅덩이에 거품 하나가 솟아올랐다. 공기와 맞닿은 공기방울이 터지면서 웅덩이 위에 곡선을 그려냈다. 단지 그 정도. 그랬다고? 그래도 희망은 있었던 거지, 응? 실낱같은 시선으로 그것을 보고 있던 그녀는 그 모양이 단순히 그녀를 가지고 놀기 위한 웃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비웃음. 그녀가 눈을 크게 뜨며 거짓말과 기만이라는 단어에 목소리를 가져갔다. 그러자 웅덩이가 점점 차오르기 시작했다. 더욱 깊어졌고, 더욱 어두워졌다. 그 끝을 알 수 없는 그림자에 공포에 질려 몰아쉬는 숨이 오히려 그녀의 호흡을 막는 것 같았다. 물 소리는 급류와 같이 거세졌다. 다시 고개를 저으며 발버둥쳤지만 이미 그녀는 바닥에서부터 가라앉고 있었다. 철벅거리는 물장구가 그녀를 일어서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시선을 들자 거품 속에서 수많은 눈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붉은 웅덩이는 이미 그 속에 수많은 추악한 괴물들을 품고 있었다. 잉태된 자식들은 불경한 어미를 닮아 고통과 비탄의 늪으로 그녀를 끌고 가기 위해 아우성을 쳤다. 그것은 비명에 가까웠다. 어미는 결코 그들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울음소리는 늪 바깥에 닿지 못했고, 눈물은 흘릴수록 오히려 늪에 더해질 뿐이었다. 모두 그 지옥 같은 피조물 속에 완전히 갇히고 말았다. 넋이 나간 그녀가 저항할 힘을 잃으면서 도움을 구하는 독백을 웅얼거리며 쓰러졌다. 그 미약한 말은 이 상황에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엄마?"

막다른 벽에 침묵만이 부딪혀 돌아왔다. 어쩌면 처음부터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녀는 결코 흉한 애벌레의 껍질을 벗은 적이 없었다. 부글거리는 소리 너머로 웃음소리가 들렸다.

풀잎이 기울면서 천천히 웅덩이 속으로 잠기기 시작했다. 매달린 나비는 비행보다 앞섰던 추락을 느끼며 단지 힘없이 날개를 접었다 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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