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락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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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춘은 을 태우고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깊은 쾌감이 밀려들어왔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기쁨은 끔찍한 고통으로 다시 변할 것이다.

유병춘의 뇌는 이미 그렇게 설계되어버렸다.

삼대천은 인간의 신체를 깊이 탐구해 보다 높은 경지로 끌어올리는 데에 모든 노력을 다하는 집단이다.

인간의 신체 능력을 향상시켜주는 데 도가 텄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인간의 신체를 완전히 망가트리는 데에도 도가 텄다는 뜻이기도 하다.

"조금만 더…"

유병춘은 간절히 바랐지만, 더이상 그에게 허락된 늑대꽃은 없었다. 나머지는 모두 삼대천…아니 정확히 말하면 마스터의 것이었으니.

가쁜 숨을 내쉬고 있는 유병춘에게 한 남자가 다가왔다. 마스터였다.

나이도 성별도 추즉하기 어려운 존재. 그런 그가 유병춘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그래. 성과는 어떤가요?"

유병춘은 서둘러 답했다. 마스터가 가장 공포스러운 순간은 그가 친절했을 때였으니까.

"상당히 긍정적입니다. 늑대꽃의 최음 효과는 월광에 노출되었을 때 반응하는데, 이와 일치하는 빛의 스펙트럼을 파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대략 3주 정도 경과를 지켜봐야 하겠지만 곧 대량 생산에 성공할 것 같습니다."

마스터는 그 대답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좋아. 좋아요. 그럼 임자만 믿고 가겠습니다."

"저, 마스터님."

"뭔가요?"

"죄송하지만…늑대꽃 한 까치만 더 피울 수 있을까요?"

유병춘의 그 물음에 마스터의 안색에 경멸이 잠깐 스쳤다.

그러나 유병춘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유병춘의 상태는 마스터의 얼굴을 자세히 살필 만큼 기민하지 못했다. 마스터는 이내 해사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요. 얼마든지 펴도 되지요. 프로젝트에 차질만 없다면."

평소보다 조금 과한 친절이었다.


강남역 근처의 한 허름한 호텔은 언제나 불이 꺼져 있었다.

그 인기척 없는 곳에 리무진이 도착했다.

그리고 리무진에서 거대한 남자가 내렸다. 한때 서울의 지배자라 불리던 남자이자, 지금은 어엿한 기업체인 삼대천의 사장인 임한영이었다.

체중의 절반을 지팡이에 의존한 채였지만, 그 풍채는 실로 거대했다.

그는 이 장소가 익숙한 듯 자연스럽게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압도적인 무게 때문인지 복도가 쿵쿵 울렸다.

"어서오세요."

"마사지 받으러 왔네."

건물은 안과 밖이 달랐다. 허름한 외부와 달리 실내는 넓고 고급스러웠다. 아름다운 외모의 여인이 웃으며 그를 반겼다.

"어머. 회장님, 승모근과 능형근이 많이 뭉쳐 있으시네요."

"미스 김. 잘 부탁해. 늙어서 그런지 금방 금방 몸이 굳어버려."

"에이. 말씀도 참. 이렇게 정정하신걸요."

김세희는 임한영의 근육을 어루만졌다. 일반적인 마사지는 아니었다. 그녀의 손길에 단단히 뭉쳐 있던 근육들이 탄성을 가지기 시작했다.

"좋군."

임한영은 그녀의 실력에 감탄하며 파이프를 찾아 입에 물었다. 곧이어 연기가 뿜어졌고, 노인의 얼굴은 한층 더 편안해졌다.

"이 냄새는…아직도 이리꽃를 피우시나요?"

"걱정 말게. 이걸 피웠다고 망나니처럼 날뛰지는 않을 테니."

임한영의 말에 김세희는 살며시 웃었다.

"설마 어르신같이 훈련되신 분이 절제 하나 못하실까봐요. 그래도 끊으시는 게 좋아요. 특히 심장에 상당히 무리가 간다고 들었거든요. 물론 어르신께서야 걱정 없으시겠지만, 혹시 모르니까요."

"운동 전에 피우는 것이 습관이 되서 도저히 끊을 수가 없네 그려. 이것도 어떻게 보면 일종의 운동이니까."

"참. 그런 것에 의존하지 않으셔도 청년들보다 활력이 넘치시면서. 그래도…절제하지 못하시는 어르신의 모습도 한번쯤은 보고 싶네요."

여인은 어느새 임한영의 담뱃대를 빼앗아 피우며 그의 허벅지에 올라탔다.

"허, 그거 농축된 제품인데. 여인의 몸으로는 쉬이 감당하기 어려울…"

임한영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노인인 자신의 것과는 대조되는 부드러운 혀가 감겨왔다. 그는 눈을 감고 그녀의 장단에 따랐다.

상당한 시간이 흐르고 김세희는 천천히 입술을 뗏다. 긴 타액이 늘어졌다.

"어르신도 감당하는 몸입니다. 어찌 저런 약물 하나 감당 못하겠습니까?"

임한영은 그 말에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자신을 감당할 만한 체력을 가진 여인은 적어도 한국에는 거의 없었다.

"끄응. 이 약은 이게 문제야. 모든 감각이 민감해져."

임한영은 자세를 고쳐잡았다. 워낙 거대한 몸인지라 단순히 몸을 일으키는 것만으로도 큰 소리가 났다.

"역시 올려다보는 건 내 취향이 아니올시다."

언제라도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던 김세희는 어느새 요조숙녀라도 된 듯 부끄러운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임한영의 눈빛을 피했다.

상대 남자가 좋아할 만한 모습을 너무나도 잘 알았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말을 손바닥 뒤집듯 바꾸는 여인은 싫어하는데, 미스 김은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군 그려."

상황은 바뀌었다. 이제 누워있는 것은 김세희였다.


임한영은 기절하듯 쓰러져 있는 김세희에게 파이프를 건네며 말을 걸었다.

"이거 피우게."

"감사합니다."

"피우면서 듣게. 미스 김. 자네, 이화천이라고 들어봤나?"

"그럼요. 회장님 밑에서 일했던 전설적인 싸움꾼이죠?"

"잘 아는군. 어떻게 알지?"

김세희는 최대한 임한영의 기분을 맞춰주려 애쓰면서 대답했다.

"남자인데도 꽃사슴이라 불릴 정도로 잘생기신 분이, 그런 거친 세상에 발을 들였다는 것부터가 특이한 일이잖아요."

"허허. 그 부분은 미스 김이 조금 잘못 알고 있네. 이화천이는 물론 잘생겼지만 꽃사슴이라는 별명은 그래서 만들어진게 아니야."

"그런 무슨 연유로 꽃사슴이라는 별명이 만들어진 건가요?"

"싸울 때 단 한번도 얼굴을 맞은 적이 없어서 생긴 별명이지. 무수히 많은 상대를 죽여도 꽃사슴 얼굴에는 상처 하나 없었으니까."

"대단하네요. 결국 10년도 전에 죽은 사람이지만요."

"…아니, 아니지. 후우. 연극 하기 참 어렵군."

"네? 무슨 말씀이신지."

임한영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어색한 침묵이 마사지숍을 물들였다.

"이제 그만하지. '죽은' 친우의 이야기를 하는 건 썩 기분 좋지만은 않아서."

임한영은 그 말을 한 뒤 김세희의 안색을 자세히 살폈다.

"아, 제가 경솔했습니다."

"……뭐, 좋네. 그러면 딱 한가지만 더 묻지. 사실 이게 제일 궁금했어."

임한영은 능글거리며 웃었다. 흉악한 육체와는 영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말씀하세요."

"덕수랑 나랑 누가 더 기분이 좋은가?"

김세희는 그 말에 순간 눈썹을 찡그렸다. 그게 할 말인가 싶을 정도로 유치한 말이었기에.

"회장님도 참, 무슨 그런 말씀을, 당연히 어르신이지요."

하지만 그녀는 전문가였다. 평정심을 유지한 채 임한영의 비위를 맞추려 애썼다.

"역시 미스 김은 대단한 여자야. 덕수도 꽤나 괜찮은 녀석인데, 그 정도 남자에게도 만족을 못하니."

여전히 능글거리는 말투였으나, 임한영의 눈빛은 한층 싸늘해져 있었다. 김세희는 이를 알아차렸으나, 그 눈빛의 저의까지는 알지 못했다.

"이화천에 대해서는 정말 모르는 걸지도 모르겠군. 거기서 그리 높은 위치는 아닌 듯 하니…"

"저, 무슨 말씀이신지…?"

임한영은 눈을 슬며시 감은 채 말했다.

"미스 김. 난 개인적으로 미스 김을 참 아끼고 있어. 미모 때문이 아니라 그 재능 때문에."

임한영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

"강한 남자에게 의탁하는 것이 여자의 본능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소. 지금까지 내가 여인을 차지해왔던 방식은 그저 상대보다 강해지는 것이었지만…여인에게 의탁한 여인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이오."

임한영은 김세희의 손목을 잡았다. 김세희는 얼굴이 굳어지는 걸 숨길 수 없었다.

"뱀이 물어가기에는 미스 김의 마사지 솜씨가 너무 아까운지라…"

김세희는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숨기며 물었다.

"뱀이라니요?"

"뱀이 아니면 능구렁이인가?"

김세희는 침을 삼켰다. 저 근육질의 노괴는 생긴 것과 달리 무척이나 영악했다.

'개새끼. 다 알면서 나를 놀려먹었어.'

"답이 없군. 그저 궁금할 뿐이오. 이 몸이 우리 귀여운 미스 김을 만족시키지 못했나 하는 아쉬움도 있고. 그런 여인에게 만족감을 주는 여인은 대체 어떤 여인일지 하는 호기심도 있고."

그는 굳어있는 김세희를 상대로 사랑스럽다는 듯이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지분거렸다.

그런 그를 올려보는 김세희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싸늘했다.

그리고 임한영은 그런 눈빛에 오히려 흐뭇하게 웃었다. 그는 그런 남자였다.

"하아. 한가지만 물을께요. 어떻게 아신 겁니까?"

"글쎄. 사실 나도 굳이 미스 김을 콕 집어서 알아보려고 한 건 아니었네. 그것보다 지금은 자네의 새로운 보호자를 만나고 싶은데."

"…연락해드릴 테니 가세요."

임한영은 물러 보이지만 한번 하기로 결정한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하는 남자였다.

"고맙네. 덕수 너무 미워하지 말고. 그래도 이곳이 영업을 계속 하려면 필요한 인재지 않는가."

'씨발. 한덕수 짓이구나.'

고개를 푹 숙인 김세희를 두고 임한영은 마사지 숍을 떠났다.


3시간째 리무진에서 덜덜 떨며 임한영을 기다리던 백태양은 임한영이 들어오자마자 투덜거렸다.

"영감, 저도 이제 사장인데 회장님 뒤치다꺼리나 하고 다니는 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저도 체면이 있는데."

"그만큼 내가 널 믿기 때문이 아니겠느냐."

"참. 100살 묵은 노인네 아니랄까봐 말투가 존나 꼰대같네요. 내가 고치라 했죠."

"나도 노력하고 있다만 평생 써 버릇하던 말투를 고치기가 쉽지는 않더구나."

"어, 왜 안때리지? 세희씨가 존나 잘 빼줬나 보네."

"…섭섭하게 생각하는 건 이해한다만, 선을 넘지는 말게나."

"씁. 회장님. 내가 말은 이렇게 해도 회장님 챙기는 건 나밖에 없지 않습니까. 새벽 2시에 막 전화에서 사람 부리시려면 이 정도는 감수하셔요."

한참 어린 사내의 폭언에도 임한영은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그만큼 두 남자간의 관계가 신뢰로 이루어졌기 때문일 터였다. 50년 전이었다면 몰라도, 임한영은 자신이 목숨을 빛진 남자의 자식이 부리는 어리광에 일일이 반응할 만큼 성질이 고약하지는 않았다.

"약물을 써서 그런지 피곤하구먼."

"회장님, 설마 또 늑대꽃 하신 겁니까?"

"그래."

"하아. 회장님! 제가 그거 피우지 말라고 했잖아요. 마스터 그 새끼가 거기다 무슨 장난질을 쳐 놨을지 모르는데."

"어허. 마스터도 엄연한 사장인데 그 새끼가 뭔가 그 새끼가. 젊잖은 행동을 갖추게."

"뭐 어때요. 나도 사장인데."

"태양아. 짤리고 싶지 않으면 닥쳐보게."

"옙. 죄송합니다."

백태양의 깐족거림이 익숙한듯 임한영은 백태양을 보지 않았다. 대신 그의 눈은 한 서류에 고정되어 있었다. 붉은 모자, 사나운 눈. 희미한 예전의 기억이 떠오를 듯 했다.

"오랜만에 힘을 써야 할지도 모르겠구먼."


김세희가 일러준 위치는 매우 복잡했다. 몇가지 인식을 무너뜨리는 장치들이 설치되어 있는 장소라 길을 가면서 어디쯤 왔는지 확인하기 쉽지 않았다.

"허 참. 뭐 이렇게 꼬아놨데. 본부도 아니고 고작 접선 장소면서."

백태양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모든 정신을 길을 찾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이내 허름한 집이 보였다.

집 문을 열고 들어가자 세 명의 여인이 있었다.

들어온 남자는 둘이지만 덩치가 거대했고, 안의 여인들은 겉보기에는 평범한 여인들 같았다.

그럼에도 임한영은 섣불리 안으로 들어서지 않았다. 오히려 무작정 들어가려는 백태양을 제지하고 두 손을 들어 싸울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결코 싸울 생각은 없소."

"싸울 생각이 없다? 내 동지를 건들인 책임은 져야지."

"내가 협박이라도 했다는 말인가?"

"아니면."

임한영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호야는 듣던대로 보통이 아닌 존재였다.

"미스 김을 협박한 적 없네. 불필요한 감정싸움은 하기 싫소. 그저 이화천을 보게 해 주면 되는 것일세."

"우리가 널 도와…"

"별일이네? 화천 형도 임한영 당신을 찾던데."

이림은 호야의 말을 끊고 말했다. 호야가 조용히 뒤를 돌아보자 이림은 황급히 자기 입을 막았다.

"뭐어?"

이림의 말에 격렬히 반응한 건 뒤에서 조용히 있었던 백태양이었다.

"…조직원이 경솔한 소리를 했군. 여전히 능구렁이 손이 할 말은 없다."

"아니, 아니요. 그게 아니고, 크흠. 그 아가씨, 방금 형…? 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네. 저 남자에요."

"아, 이해합니다. 전 꼰대가 아니라 모든 걸 다 존중할 수 있어요. 일단 외모가 제 이상…아악!"

백태양의 말은 임한영의 제지로 끝맺어지지 않았다.

"미안하군. 보시다시피 경솔한 친구라. 사과하게."

"으으…죄송합니다."

임한영은 잠시 한숨을 쉬고 말을 이어갔다.

"단순히 만나서 확인할 것이 몇 개 있을 뿐이오. 이화천은 분명 다시 활동을 시작했고, 집요하게 내가 운영하는 시설들을 공격하고 있소. 늑대꽃이라는 물질의 재배를 멈추라고 말이오. 공짜로 말하라는 말이 아니오. 반드시 보답을 해 주도록 하겠소."

"아저씨를 어떻게 믿죠?"

앳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구석에서 숨어 있었던 량다희의 말이었다.

"꼬마 아가씨. 이 할아버지가 지금 여기서 숨을 쉬고 있는 이유는 약속을 잘 지켰기 때문이요."

임한영은 다시 고개를 돌려 호야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배신, 거짓말. 당한 적은 많아도 행한 적은 없다는 게 이 늙은이의 몇 안되는 자부심이오."

호야는 팔짱을 낀 채 한숨을 쉬었다.

"너, 모리안이 딱 좋아할 법한 인간상이군."

"그거 칭찬인가?"

"글쎄. 꼴통이란 소리다."

"칭찬이로군."

임한영은 그 특유의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고, 호야는 반응하지 않았다. 호야는 팔짱을 풀고 입을 열었다.

"이화천은 여기에 없다."

임한영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대와 그대의 조직에 비해 부족할지는 몰라도, 내게도 정보망이란 것이 있소. 이화천은 분명히 능구렁이 손 속이라고 들었소만."

"형은 맹원이었었죠. 지금은 아니지만."

이림은 어쩐지 서글픈 목소리로 말했다.

"어째서죠?"

백태양의 물음에 호야가 대신 답했다.

"스스로 탈퇴했다. 옥리들의 개가 되었지."

"옥리…"

임한영이 단어를 되짚어 보자 호야는 비웃음인지 모를 웃음을 흘렸다.

"그중에서도 식물을 격리하는, 어디더라?"

"제 103K-감마01기지요."

호야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너의 그 늑대꽃인지 제비꽃인지를 공격하는 걸 거야."

"…그렇군. 고맙소. 내 꼭 보답하겠소."

호야는 그 말에 별로 관심없는 듯 대답했다.

"됐어. 대신 다신 우리 맹원을 건들이지 마."

"알겠소."

"아. 하나만 부탁하자."

"무엇이오? 무엇이든지 말만 하시오."

"반말하지 마 이 싸가지 없는 어린노무 새끼야."

"아니, 회장님 나이는 100살이 넘어요! 무슨…"

백태양이 발끈하자 이림은 담담하게 말했다.

"호야 누나 나이는 500살 넘는데."


"회장님. 화천 형님…아니지. 이화천이 배후에 재단이 있다면 늑대꽃을 포기하는게 맞지 않을까요?"

"태양. 자네는 항상 참을성이 없는게 문제야."

"최소한 방비라도 하는게 어떻습니까? 그냥 이곳에 있다고 해서 올 거라는 보장도 없고, 온다 하더라도 재단이라면 대규모 인원이 같이 올 수도 있는데요."

"자네, 일 안하나?"

간단한 축객령이었다. 백태양은 잠시 머뭇머뭇하더니 고개를 숙이고 떠났다.

백태양이 떠나자 임한영은 마치 사람이 있는 것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화천. 나의 오랜 동지여. 얼굴이 전혀 변하지 않았어. 그때 그대로군."

"오랜만입니다 회장님."

"위장 실력이 상당히 늘었군. 암살을 노린 건가?"

"아닙니다. 그저 독대할 기회를 노린 겁니다."

"그래…자네도 나를 찾았다고 들었어. 왜 나를 찾았나?"

"…회장님. 늑대꽃을 주십시오. 단순히 늑대꽃이 민간에 풀리면 위험해서만은 아닙니다. 늑대꽃은 회장님을 좀먹는 마약입니다. 그러니 부디."

임한영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싫은데."

"회장님. 회장님은 변했습니다. 마스터를 영입한 이후…"

임한영은 이화천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니, 아닐세. 말은 바로 하지. 자네 말대로 내가 변한건 사실이지만, 내가 변한건 마스터를 영입했을 때가 아니야."

임한영은 숨을 골랐다. 무언가를 회상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자네가 배신했을 때지."

"그건."

"정확히 말하면 자네를 죽였을 때. 자네의 그 아름다운 얼굴을 부셔버렸을 때 내 마음도 조각났어."

"아니요. 적어도 그때의 회장님은 행동의 일관성이 있으셨습니다."

"되었네. 질문은 내가 하지. 자네, 어떻게 살아있는 거지?"

"새로운 주인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지금 그게 중요한게 아닙니다. 그럼, 늑대꽃을 주십시오. 제공하지 않으신다면 무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네가. 나를?"

임한영의 짧은 반문에는 명백한 비웃음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이화천은 굴하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그러면 자네는 죽어. 이번엔 확실하게."

"회장님께서 항상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들어보지 않으면 결과를 모른다."

임한영은 이화천을 바라보았다. 기생이었던 자기 어미를 괴롭히지 말라고 덜덜 떨면서도 내 앞에 섰던 다섯 살 소년. 그 모습이 지금 다시 겹쳐 보였다.

"언제부터 자네가 정의의 편이 되어버린 겐가? 믈론 자네의 얼굴은 그런 주인공이 어울리기는 하지만."

임한영은 이화천이 보란 듯이 파이프를 물었다. 임한영의 전신에 혈관이 도드라졌다.

"여긴 현실이지."


임한영은 피범벅이 된 이화천을 내려보았다. 이화천은 얼굴을 제외한 모든 신체부위가 완전히 박살난 상태였다.

"많이 늘었군."

대답은 없었다. 임한영은 이화천의 머리 옆에 파이프를 놓았다.

"여기 늑대꽃. 마스터에게도 생산을 중지하라고 일러 놓겠네. 뒤에서 몰래 파는 것까지 막을 순 없겠지만 그렇게 되면 그건 삼대천 책임이 아니야. 알겠나?"

갑작스러운 항복 선언에 이화천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어째서입니까. 제 배경이 재단이라는 것 때문입니까?"

"재단이 두려워서는 아니야. 자네의 충고를 들은 거지…라고 말하면 멋있겠지만, 솔직히 두려워서가 더 크다는 건 부정할 수 없긴 하네."

이화천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임한영 회장은 많은 것이 변해 버렸지만, 적어도 썰렁한 개그 감각은 여전한 듯 했다.

"그래. 확실히 자네 말대로 늑대꽃은 끝내주는 효과를 가지고 있지만 부작용도 상당하지. 도파민, 아드레날린, 테스테스테론. 그런 것에 의존하게 되어버렸어. 마스터가 나의 정신을 흐리게 하기 위해 늑대꽃을 개발하는 걸 알면서도 방치해 둔 건 날세. 필요했으니까. 나도 낡아가는 거지…"

이화천은 허탈하게 웃으며 말을 받아쳤다.

"낡아가는 사람 다 죽었습니다."

임한영은 이화천을 응시했다. 그리고 자신의 복부를 응시했다. 아주 작은 생채기가 보였다. 임한영의 완벽한 육체에 약물을 쓰고도 상처가 남은건 실로 오래간만이었다.

"그런가? 그렇기도 하군. 그럼 다시 또 보세. 난 이제 기동특무부대가 오기 전에 꽁지 빠지게 도망가야겠어. 늑대꽃은 제공할 테니 너무 조사하지는 말고."

임한영은 이화천을 내버려 둔 채 늑대꽃 배양실을 떠났다. 기동특무부대가 오면 배양실 전체를 격리 시도할 터였다.

임한영은 천천히 전화기를 들었다. 발신자는 마스터였다.

"할 말이 있네."


제103K-Γ01기지는 기지의 유일한 무력이라 일컬어지던 이화천의 패배에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우리 꽃사슴이 이렇게까지 당하다니, 별일이 다 있네."

"제가 당하는 건 당연한 겁니다. 그분은 괴물입니다. 적어도 일 대 일에서는 적수가 없습니다."

"그럼 왜 혼자 싸웠어? 우리가 도와줄 수 있는데."

그 물음에 이화천은 황당한 듯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절 빼면 박사님 포함 전원이 농부들인데요."

"그렇긴 하지만, 적어도 기동특무부대를 부를 순 있었잖아."

"그러면 회장님께서 절 만나주지도 않았겠죠. 그리고 언젠간 한번 그분과 생사결을 제대로 겨뤄보고 싶었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넌 과거 이야기를 거의 안했었네. 내가 너에 대해 아는 건 사실 유난히 변칙과일을 좋아한다는 것 말곤 없어. 무서워서 안 물어봤는데, 너 대체 뭐 하다 왔던 거야? 이번 일 때문에라도 이젠 알아야겠어."

이화천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거 말하자면 정말 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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