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noka_h5 2020/7/20 (월) 20:01:17 #87451231
지금까지 남이 투고한 거 읽기만 했는데, 얼마 전에 어떤 에피소드를 체험해서 여기서 썰을 풀어보고 싶어졌다. 투고된 다른 썰들과 비교하면 성질이 미묘하게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들어주면 좋겠다. TRPG라는 게 뭔지는 알고 있냐?
아는지 아닌지 여부는 차치하고 가볍게 설명하고 넘어간다. 쉽게 표현하면 이른바 "역할놀이"다. 어릴 적 테레비에 나오는 히어로나 히로인이 되어서 놀고 그런 적 있지 않냐. TRPG는 그것이 발전한 것으로, 자신이 하나의 캐릭터를 만들고 그 캐릭터가 되어서, 게임마스터라고 하는 진행자의 원안으로 준비된 시나리오를 풀어가는 것이 기본 흐름이다.
이 흐름을 기억 한 구석에 짬박아놓고 계속 들어줬으면 한다. 내가 주최하는 그룹의 멤버 중 한 사람이, 상당히 과몰입하는 타입이다. 단순히 과몰입만 한다면 여기 쓸 필요도 없고, 전혀 재미도 없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런데 그놈은 몰입하는 방법이 이상했다. 앞서 캐릭터를 만들어낸다고 했는데, 그 캐릭터 작성 단계부터 고집스러웠다. 캐릭터에 대해서는 캐릭터 시트라고, 특징이나 능력을 일반 A4 용지 정도 크기의 종이 한 장에 정리하는데, 그놈은 논리적 모순이 없게 꼼꼼하게 성격부터 과거 경력까지 장석해서 소책자가 될 정도의 분량으로 가져오고 했다.
책자를 만들어 온다는 것만으로도 놀랄 일이지만, 이 다음부터가 이상하다는 표현을 쓰는 요인이 될 것 같다. 지금 내 수중에 그놈의 캐릭터 시트……가 아니고 책자의 사본이 있는데, 내용이 농밀하게 정리되어 있는데다, 플레이할 때도 그놈은 다른 플레이어들에 비해 한 선을 긋는 느낌이었다. 그놈은 여캐를 만들었는데, 마치 육체를 가지고 있는 것 같은 존재감과 풍기는 분위기부터 세심한 몸짓까지 책자와 일치하고 있었다.
RihoCat 2020/7/20 (월) 20:03:15 #10261101
나도 TRPG를 가볍게 즐기고 있는데, 역할놀이라는 표현이 잘 어울립니다. TRPG가 뭔지 모르거나 이름만 들어본 사람에게 설명할 때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그 사람에 대해 느낀 인상인데, 배우이자 각본가군요. 자기 캐릭터를 깊게 만든 후에 연기한다는 것은, 설정을 머리에 새긴다고 해야 할지, 완전하게 캐릭터로서의 의식을 만들지 않으면 어려울 것 같기도 합니다.
게다가 캐릭터 시트가 책자 레벨이라면, 보통 사람이라면 그 책자를 봐가면서 하지 않으면 캐붕이 날 수 있음을 생각해 보면, 무섭다는 말밖에 할 수 없네요.
honoka_h5 2020/7/20 (월) 20:08:12 #87451231
썰을 계속 풀겠다. 그 시나리오를 진행시키기 위한 행동을 롤이라고 하는데, 나를 포함해 주변 사람들은 아무래도 제3자로서의 시점이 있는 데 반해, 그놈의 롤은 마치 자신이 체험했다는 풍으로 연출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말투부터 시작해서, 플레이가 끝날 무렵에는 분위기까지 장악했다. 빙의라는 표현이 있는데, 바로 그 캐릭터 자체가 빙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처음에는 플레이가 시작될 때는 보통 인격이었지만, 점점 캐릭터의 인격으로 변해가고, 플레이가 끝나면 스위치가 꺼진 것처럼 원래 인격으로 돌아왔다. 그 이후 플레이 때는 시작하자마자 캐릭터가 완전해졌다. 캐릭터 이름을 부르면 바로 반응하지만, 그놈의 진짜 이름을 부르면 몇 번인가 놀라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데, 그것을 몇 번이나 반복해야 비로소 자기 이름을 부른다는 걸 알게 되는 거다. 그 시점에서 과몰입 정도의 차원을 넘어서 자기자신을 반쯤 빼앗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면 좋았을 텐데.
karkaroff 2020/7/20 (월) 20:10:28 #41910212
자기 체험처럼 연출했다라. 플레이라는 점에서는 상황의 현장감을 나타내는 데 효과적인 방법일지도 모른다. 빙의라는 다소 귀살스런 표현이 개인적으로 걸리지만, 원래 신들린 연기를 하는 배우는 완전히 연기하는 배역 그 자체로 보인다는 말과 똑같다. 기회가 있다면 내 창작 시나리오로 같이 플레이해보고 싶다.
그리고, 플레이 중에 인격이 점점 변한다는 부분이 흥미롭다. 처음에는 점점 변하다가, 마지막에는 순간적으로 돌아가지만, 다음부터는 처음부터 변해 있었다는 부분, 내가 정리해 보아도 빼앗긴다는 표현밖에 나오지 않는군.
교령술 같은 거라면 어느 정도 설명이 되겠지만, 이 경우는 자기 이름에 대해 위화감에 가까운 감각을 느낀 것을 근거로, 이른바 다중인격이라고 볼 수도 있으니, 나로서는 뭐라고 말할 수가 없구만.
honoka_h5 2020/7/20 (월) 20:12:04 #87451231
계속 썰을 풀자면, 그 뒤에 그룹이 모일 때도 만났는데, 그놈이 이런 말을 꺼낸 거다.
「어떻게 해서든 내私가が 말투나 분위기는 내보일 수 있었지만, 육체적 요소라는 면에서는 한계가 가까와」
라고
그놈은 여캐로 플레이하고 있었는데, 우선 말투부터 변했다. 처음 만났을 때는 그룹의 모두에게 존댓말로 딱딱한 분위기를 냈는데, 이제는 여고생이라고 해야 하나, 상당히 명랑한 말투가 되어 있었지.
또 뒤에, 다시 그놈과 플레이할 때는 이제 외모까지 만들어왔다. 조금 당당한 분위기였지만, 그 육체를 잘라내고, 화장을 하고, 밝은 홍차색 가발과 파란색 컬러 콘택트렌즈를 착용하고, 어딘지 모를 학교 교복까지 입고 왔다.
그때는 그래도 간신히였지만, 몇 번씩 부르면 자기 이름에 반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RihoCat 2020/7/20 (월) 20:16:11 #10261101
빙의에 가까운 무언가가 외모까지 바꾼다니, 어떤 의미에서 미스터리 현상이네.
사실 내용이 어딘가 진부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중간중간 계속 읽히는 썰이라 조금 더 들려줘
Kousaka 2020/7/20 (월) 20:17:12 #80380117
그런 친구라면 나도 TRPG가 취미라서 본 적이 있는데, 내가 바빠서 플레이할 기회가 자주 없었기 때문에 인상 차이가 확연했다.
처음 인상은 뻣뻣한 체육부계 플레이어였는데, 얼마 후 플레이에서 그 친구를 만났을 때는 키는 그대로인데 전체적으로 근육이 줄어들어 있었지. 피부도 눈처럼 하얗게 되었고, 머리카락은 허리까지 내려오는 스트레이트에 백금발로 염색한데다, 눈까지 파랗게 되었었다. 그 녀석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쩌다 물어봤는데, 얼버무려 버리던 게 기억난다.
honoka_h5 2020/7/20 (월) 20:19:19 #87451231
이런 경험을 한 사람이 나 말고도 또 있었다니 놀라운데. 개인적으로는 그쪽 썰도 궁금하지만 일단 내 썰부터 마저 풀고 보자.
저번에 글 올렸을 때부터 잠깐 짬내서 그놈하고 만났는데, 이미 행동부터 바뀌어 있었다.
행동거지가 완전히 여자애가 되어 있었다. 그 정도라면 뭐 괜찮을지도 모르겠지만, 목소리까지 훈련했는지 고음을 안정적으로 낸다는 사실이 지금도 충격이다.
가장 골때리는 건 뭐래야 하나 인격이 바뀌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원래 인격 대신에 캐릭터의 인격이 구성되어 있었다. 이중인격이 아니라, 그 캐릭터의 인격이 본래의 인격으로서 행동하는 모습을 상상해 봐라. 게다가 행동까지 갖추어진 상태로 말이다.
이름을 불렀더니 그놈은 어리둥절하면서 자기를 부르는 거라곤 전혀 받아들이지 못한 채 이랬다
「에, 나는 에리Eli(그놈의 캐릭터 네임)인데요?」
라고.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내가 알던 그놈은 거기 없었다. 눈앞에 있는 것은 에리라는 캐릭터 뿐이었다.
Kousaka 2020/7/20 (월) 20:19:25 #80380117
너도 그런 식이었구나. 나도 거의 같은 전개를 경험했다.
내 경우 그 친구는 「치카」Chika라는 캐릭터명을 썼는데…… 확실히 행동거지 어딘가가 거기에 있다는 존재감을 나타낼 정도의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때때로 그 친구는 작은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렸데, 치카의 이미지를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더니, 그 녀석은 완전히 치카의 인격이라고 해야 하나 그 무언가에 삼켜져 버렸다. 원래의 이름은 모른다고 단언하고, 자기 이름이 아니라고 막 그러면서.
karkaroff 2020/7/20 (월) 20:20:01 #41910212
자기가 만든 캐릭터에게 자기 인격이 먹혀든다니 상상만 해도 등골이 떨려오는군. 당사자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나야 모를 일이지만.
그 캐릭터명이 에리와 치카라니, 내가 최근에 플레이했던 곳에서 우연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게, 같은 캐릭터명의 플레이어와 한 번 플레이한 적이 있다. 외형적인 특징은 위의 글들과 전혀 달랐지만.
honoka_h5 2020/7/20 (월) 20:27:11 #87451231
자, 슬슬 이야기가 종반에 가까워지니, 썰을 마무리짓겠다.
그 녀석하고는 그 후로 2-3회 정도 플레이했는데, 어느날부터 전혀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걱정이 되어서 SNS 계정도 사찰해 보았는데, 갱신이 거의 없어서, 동료들 사이에서는 사라져 버렸다던가, 이 그룹에 흥미가 없어진 것 아닌가, 그런 결론으로 끝났다.
그 뒤 좀 시간이 지나서 그놈의 SNS 계정을 봣는데, 내용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에리라는 이름만 있는 존재로부터, 에리 요시노Eli Yoshino라는 한 사람의 인간이 태어나 있었다. 완전히 다른 사람 행세를 하며 계정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올리는 글의 모든 부분에서 그 녀석의 무엇인가가 감지되었다.
자신의 육체나 정신을 모두 내주고 에리가 된 것이 기쁜 것인지, 반대로 그것이 불행임을 전달하려고 하는 것인지, 지금으로선 전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