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기지 사람들 - Prologue

따르르릉

자명종 소리가 귓가에 따갑게 울린다. 오늘도 지겨운 일과의 시작이라는 생각에 몸이 잘 떨어지지 않았지만, 뭐 별수 있겠는가.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알람을 끄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제도 밤늦게까지 일하다가 새벽 4시쯤에야 숙소에 돌아와 침대위로 쓰러진 기억밖에 남아있지 않다. 현재 시간은 7시. 잠이 부족하지만 아침을 먹으려면 7시 30분까지 식당으로 가야한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문을 열고 나가자, 내 앞방에서 나오는 프랭클린이 보인다. 나는 반갑게 인사를 할까도 했지만, 우리가 아직 아침인사를 건넬 정도로 사이가 친하지 않다는 것을 떠올리게 할 만큼 그는 냉담한 표정으로 나를 스쳐지나갔다. 예상은 했지만 새삼스레 우울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나는 무거운 발걸음을 식당으로 돌렸다.

식당으로 가자, 낯익은 얼굴들이 많이 보였다. 하지만 그 얼굴들은 나를 외면할 뿐이었다. 예전에 내가 우리 부서의 자료모음집을 실수로 몇 번 날려먹은 이후로, 나는 직원들에게 투명인간 취급을 당하고 있다. 원체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이지만, 계속 이런 식으로 생활하다간 정신에 문제가 생길 것 같다. 내가 하루 중 유일하게 다른 사람과 말을 하는 때는, 이런 때뿐이다.
“조금만 더 주세요.”
식당의 아주머니는 나를 보며 상쾌하게 웃어주었고, 고로케를 하나 더 주셨다. 하루의 유일한 낙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일부러 구석에 가서 앉았다. 내 주변에 앉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젠 익숙하다. 나는 이 무겁고도 어색한 공기가 불편하여, 밥을 금세 먹어치우고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로 가던 도중, 부서장과 마주쳤다. 부서장은 나에게 잠깐 서장실로 따라오라고 말했다. 무슨 일일까. 또 내가 무슨 실수를 했나. 하는 걱정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지만, 뭐 어떡하랴. 잘못이든 뭐든 이미 벌어진 일인걸. 나는 미리 각오를 하고 서장실로 들어섰다. 묵직한 공기가 서장실 안을 휩싼다. 부서장은 곧바로 의자에 앉아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무슨 일로 불렀냐고 물어보려던 도중, 책상에 놓여있는 상자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저 상자에 들어있는 하얀색 화분은 분명히 내 것이었다. 내가 자초지종을 물어보기도 전에, 부서장이 입을 열었다.
“흠. 에반군. 자네가 그동안 사고를 많이 쳤다는 것은 자네도 잘 알고 있겠지?”
나는 고개를 떨궜다. 딱히 변명할 말도, 변명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오늘 자네를 부른 것은 다그치려고 한 것이 아닐세.”
“그..그럼 무슨 일로?”
“갑작스럽겠지만, 자네는 오늘부로 89기지로 발령이 났다네. 어쩔 수가 없어. 이건 상부의 지시거든.”
89기지? 나는 갑작스런 부서이동보다, 89기지가 어딘지 들어보지도 못했다는 것에 대해 더 당황했다.
“아무쪼록, 가서도 잘 적응하기 바라네. 자네 책상에 있던 건 내가 미리 싸놨으니, 이제 가도 좋네.”

나는 가도 좋다는 부서장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박스를 들고 서장실을 빠져나왔다. 단순한 부서이동이었지만, 나는 뭔가 버려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 손에는 내 짐들이 담긴 박스와 함께, 부서장이 준 한 장의 쪽지가 있었다. 89기지의 위치와, 그곳으로 가는 방법이 적혀있는 쪽지였다. 서장실에서 나오던 도중, 나는 밥을 먹고 들어오는 프랭클린과 다시 마주쳤다. 나는 프랭클린에게 마지막 인사라도 할까 했으나, 아마도 냉담할 그의 반응이 두려워 나는 인사를 속으로 집어넣었다. 사무실에서 나와 숙소까지 가는 길은 너무나도 길었다. 가는 길에 아는 얼굴을 몇 명 마주친 것도 같지만, 머릿속이 복잡해 잘 기억도 나지 않았다.

숙소에 돌아와 박스를 내려놓자, 이제야 이곳을 떠난다는 게 실감이 났다. 나는 짐을 싸기 위해 이곳으로 온 뒤 한 번도 건드리지 않았던 캐리어를 꺼냈다. 짐이라고 해봤자 옷가지 몇 개와 부모님 사진 한 장뿐이었다. 박스에 있는 것들도 정리해 모두 캐리어에 담았다. 깔끔하게 정리된 방 안을 보자,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여기서 나가게 되다니,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몰랐는데, 하는 말을 속으로 곱씹으며 나는 건물에서 나와 89기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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