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BE(Beyond Entropy, 엔트로피를 넘어서)를 알게 된 것은 친구의 소개였다. 그곳에서 나는 환경보호 활동에 몰두했는데, BE에서의 일은 세상을 더 이롭게 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조직 내부에서 균열이 발생했다. BE는 이른바 변칙이라는 신비한 힘을 발견함으로서 그 설립 목적을 성취할 수 있게 되었다. 문제는 설립목적인 이상향이 개인마다 조금씩 달랐다는 것이다. 그러한 갈등이 BE를 분열시켰다.
BE는 수많은 UT(Universal Tissue, 만능 조직)로 갈라졌다. 그리고 나 안현서도 이러한 흐름에 편승하여 UT로 옮겨갔다. 시간이 지나 수많은 UT가 붕괴하고 흡수되었지만, 우리 UT-흑두루미는 그러한 혼란 속에서 당당히 살아남았다. 그리고 나도 새로운 사람들과 고군분투한 결과 관리 팀장 자리를 꿰찰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그것'을 만났다.
그날 아침에, 나는 헬리콥터를 타고 불타는 숲을 향해 날아갔다. 방금 전 포획 작전을 수행하던 팀이 처참하게 격파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차였다. 나는 목적지로 이동하며 이미 몇 번씩 보았던 포획 영상을 다시 돌려보았다.
UT-흑두루미의 다른 현장팀은 물탱크를 실은 업무용 개조 트럭에 앞뒤로 탑승하여 다들 한 방향을 주시하고 있다. 한 차례 불이 사그라든 숲에서 긴장감이 돌았다. 그리고 그 방향 멀리에서 불타는 누런 덩어리가 화염을 몰고 그들에게 걸어온다. 걸어오는 불기둥의 깨진 픽셀은 점점 확대되며 한 마리의 소의 윤곽으로 재탄생한다. 소는 불을 뿜어내며 이미 한차례 발화했던 나무를 다시 한번 태우며 검은 연기를 만든다.
현장팀장의 신호와 함께 현장팀은 일제히 움직인다. 트럭이 소의 양쪽으로 돌아 소를 순식간에 사방에서 둘러싼다. 그리고 일제히, 소를 양해 물줄기를 발사한다. 무수한 물줄기를 맞고 불이 점점 사그라들며, 소가 몸부림친다. 몇 분 후 불덩이의 윤곽이 드러나며 불이 소의 피부 표면만을 덮고 있다는 게 눈에 띈다. 그래, 그것은 정말 네 발 달린 소의 모습이다. 그리고 소의 몸부림이 점점 약해진다.
트럭의 사이로 소의 정면에서 크레인을 탑재한 트럭이 나타난다. 무자비한 집게로 약해질 대로 약해진 소의 몸체를 붙잡는다. 그리고 끝없는 물세례를 맞으며 소는 그대로 180도 회전하여 사각 컨테이너에 빠진다. 물로 가득 찬 컨테이너의 천장에 달린 문이 닫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자가 들썩거리더니 컨테이너가 폭발한다.
수증기와 불씨가 사방으로 튄다. 그리고 소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검게 그을린 트럭 위에서 카메라를 지켜보고 있었다. 뒤늦게 소를 향해 몇 줄기의 물줄기가 날아든다. 그러나 소는, 하나의 미동도 없이 의연히 서 있을 뿐이다. 소의 불은 사방의 물줄기를 받으면서도 점점 크게 타오른다. 그리고 소는 몸을 돌려 좌측의 트럭으로 돌진한다. 날아온 소와 충돌한 트럭이 이내 폭발한다.
나는 영상을 껐다. 이어지는 것은 일방적인 학살극이었다. 그 팀의 대부분이 크게 다쳤다. 영상 속에서 보이는 것을 분명 평범한 소가 아니었다. 날뛰고 있는 건 살아 움직이는 흉내를 내는 어떤 물질이었다. 그저 소의 모양을 취하고 있을 뿐, 일반적인 생물이 불타오르면서 살아 있다는 건 말도 안 된다. 하지만 그런 말도 안 되는 미스테리가 현실에 일어난다. 변칙종이라는 신비로운 생물, 외계에서 온 듯한 그런 괴생물체가 실제로 자주 나타난다는 것이다.
어릴 때, 나도 유령이나 도깨비 같은 것들이 무서워 잠이 안 오던 날이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그런 것들이 세상에 존재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달래곤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오히려 그런 것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BE와 UT에서 일하면서 내 눈으로 세상에 그런 외계 생명체들이 있다는 사실을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저 어릴 적에는 내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다.
그 상상 속의 외계 생명체는 이제는 나의 밥벌이가 되었다. BE와 UT는 그러한 변칙종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기관이었다. 즉 이들이 환경보호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마법적인 힘을 활용할 수 있었던 점이 크다. 사실 내가 지금 탑승한 헬리콥터 역시도 평범한 헬리콥터가 아니었다. 나는 이른바 하멜른의 기수라 불리는 공중 병기를 타고 있었다. 우리 기지에도 단 2기밖에 없는 이 헬리콥터는 어마어마한 전력을 활용한 중력 밧줄로 수많은 객체를 조종하는, 말하자면 우리 기지 최강의 병기였다.
나는 숲에 들어섰다. 이글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불 난리가 눈에 들어왔다.
숲에는 검은 연기가 퍼져있었다. 내가 하멜른의 기수를 가까이 접근시키자 그 소를 볼 수 있었다. 소는 영상 그대로 전신이 불타고 있었다. 불은 소를 태우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온몸의 모든 구멍에서, 또 갈라진 피부를 뚫고 스며 나오고 있었다. 강한 열기에 소의 모습이 일렁이는 듯했다. 소는 그러한 불바다 위에서 두 뿔을 치켜들고 고고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광경이었다. 소는 제 몸을 계속해서 태우면서도 멀쩡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즉 소는 타버린 온 몸을 스스로 완전히 복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내가 세운 한 가지 가설은 그 에너지가 소 밖에서 소에게로 흘러들어온다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BE와 UT가 꿈꾸던 외부 엔트로피 생명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숲을 전부 태우고도 일정한 화력을 계속해서 유지하고 있었으니 말이었다. 나는 UT-흑두루미에 있어 역사적인 순간을 맞이한 기분이 들었다. 최소한 그 소가 온 숲을 태우고도 남을 만큼 강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검증되었다. 이 에너지를 전기로 바꿀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UT-흑두루미의 위상이 급부상할 것이었다.
따라서 소를 위해 귀한 하멜른의 기수를 들고 온 건 걸맞은 대우라고 할 수 있었다. 나는 상공에서 소를 향해 고르디우스 중력자 밧줄을 내렸다. 헬기에서 나온 보이지 않는 밧줄이 소에게 닿았다.
'지정 개체를 고정합니다.'
나는 밧줄을 조심스럽게 끌어 올렸다. 소의 몸이 붙들려 올라오기 시작했다. 발이 바닥에서 떠오를 때쯤, 소가 내 쪽을 돌아보고서야 뒤늦게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앞뒤로 양발을 흔들어 대며 온몸으로 난리를 치더니, 등이 갈라지며 불기둥이 솟아났다. 그러자 소를 붙들던 밧줄이 풀리며 소가 땅에 떨어졌다.
하멜른의 기수의 중력 밧줄을 자력으로 탈출하는 것은 지금껏 처음 보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격렬한 움직임으로 균형이 무너졌다고 해도 말이다. 소는 반대 방향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밧줄을 더 깊이히 박을 테니 문제 없는 일이었다. 소를 잡아 기지에 넣자. 다시 첫 번째 밧줄을 당겨 소에게 발사했다.
'지정 개체의 위치를 고정합니다.'
이어서 두 번째, 세 번째 밧줄을 쏘았다.
'지정 개체의 위치를 고정합니다.'
'지정 개체의 위치를 고정합니다.'
.
.
.
총 8개의 밧줄을 걸고서야 다시 소를 끌어 올리자 소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소가 떠오르며 몸부림쳤다. 그러나 이번에는 안정적으로 한 치의 흔들림 없이 공중으로 끌려 올라왔다. 소의 몸체에서 붉은빛으로 타오르는 걸쭉한 액체가 스며 나왔다.
'으읍…'
마치 토사물 같은 즙을 보며, 어쩐지 역겨운 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따로 컨테이너는 없었기에 그냥 공중에 띄운 상태로 들고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애초에 나는 컨테이너 같은 것 없이 포획을 마치기 위해 이 하멜른의 기수를 끌고 왔다. 영상에서 보았듯 그 소를 안전하게 담아 둘 상자를 만드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닐 테고, 긴급한 조치가 필요했던 상황이었다. 일단 UT-흑두루미 기지 옆에 저수지에 소를 끌고 가 묶어두면서 소를 안전하게 사육할 장소가 완성되길 기다릴 작정이었다.
기지로 가는 길, 불 난리 속에서 도망치는 야생동물들이 보였다. 소를 신경 써야 했기에 돕지 못한 동물들이었다. 이러한 불 속에서도 그들은 나름대로 살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자연 앞에서 무기력한 하나하나의 생명들이었다. 그러나 일단 화재 상황을 해결해야 했기에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다시 소를 보았다. 소는 아직도 악을 쓰며 헬기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쳤다. 인도적으로 소를 포획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소가 강력하게 저항했기에 이쪽도 초강수를 둔 것이었다. 소가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었다. 소는 온 숲을 태워 먹고도 가책 하나 느끼지 못하고 단지 땅으로 내려가고 싶다는 생각만을 하는 듯했다. 물론 자의적으로 낸 불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나도 좋아서 이런 가혹한 짓을 하는 것은 아니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이 이 모든 상황을 만든 것이었다.
나는 기지 병실에서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정신이 드시나요?"
한때 내 부사수였던 최예진이 눈에 들어왔다. 강직하고 또 당당한 성격이 인상 깊게 남은 친구였다. 그녀는 뚜렷한 목표 의식을 가지고 UT에서 일했다. 그녀는 생명 하나하나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고, 한 명의 비건으로서 스스로 옳다고 믿는 길을 걸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현실적으로 채식 같은 걸 할 수는 없었다. 그저 가여운 동물들을 구제하고 싶다는 막연한 바람은 그녀의 신념에 비할 수 없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내가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예진이구만."
"대표님께서 정신이 드시면 자신에게 연락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러도록 하지."
내가 바라던 바였다. 나는 분명 방금까지 소를 끌고 가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지금은 기지에 누워있다. 어쩐지 온몸이 쑤시는 것 같았고 말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었다. 일단 확인 차 전화를 걸자마자 전화를 받았다.
"네, 이하균 대표님? 저 안현서 팀장입니다."
대표의 고함이 들렸다.
"너 제정신이야? 네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알아?"
"일단 진정해주시고요. 잠깐 필름이 끊겨서 말입니다. 분명 하멜른의 기수를 운전하고 있었던 건 기억나는데,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 하멜른의 기수를 네가 완전히 박살 냈지. 그리고 너는 그 옆에 쓰러져있었고.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저지른 거지?"
"분명 확보 실패로 1등급 비상사태가 발생하지 않았습니까? 누군가가 긴급하게 사태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해결에 필수적이었던 하멜른의 기수는 팀장급 중에서도 일부만이 조종할 능력을 갖추고 있었고…"
"아니. 그런 상황은 없었다."
"그러니까 분명히 방금 불타는 소가 등장해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젠 환각이라도 보는 건가? 그러고 보니 네가 여기에서 일한 지 꽤 오래되기도 했지. 명예롭게 은퇴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군. 징계 처분을 기다리도록."
이하균 이 자식은 BE 시절 하령 급의 인물이었으나 반기를 들고 나와 UT-흑두루미를 세우며 즉시 대표가 되었다. 그는 전투술에는 재능이 없었지만, 경영자로서의 재능은 충만했다. 따라서 그는 UT-흑두루미가 생존할 수 있도록 하였고 나 역시도 그의 라인을 탔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따라서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대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말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분명 그 대화재에서 소를 보았다. 그것은 아주 생생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무슨 수를 쓴 건지 모르겠지만 그 소에게 당했다. 소에게서 이전과 다른 특별한 낌새는 눈치챌 수 없었다. 소가 레이더에도 잡히지 않는, 보이지 않는 미사일을 쏘아 하멜른의 기수를 격추했다는 것인가?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소를 놓치고 말았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UT-흑두루미는 UT 중 그렇게 군사력이 탄탄한 편은 아니었지만, 중요한 한 가지로 UT-흑두루미를 건드리는 누구라도 작지 않은 치명상을 입을 거라는 사실이 있었다.
따라서 하멜른의 기수의 부재는 뼈아플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명백했다. 그에 대한 책임으로 나는 내 직장을 잃을 것이다. 운 좋은 날이라고 생각했으나 평범한 UT-흑두루미의 팀장이었던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비극이었다. 이게 정말로 현실인가? 나는 정신이 혼미했다. 그런 채로 앞에 앉은 최예진에게 말을 걸었다.
"나더러 징계를 기다리라는군."
"…"
"그나저나 1급 비상사태 소식 들었나? 사실 내가 요 인근에서 불타는 소를 포획하러 갔었거든,"
"…"
"그 이글거리는 불덩이를 하멜른의 기수를 타고 가서 끌고 오고 있었는데, 갑자기 정신을 잃고 나는 여기 누워있는데 갑자기 전화가 오더니-"
"무슨 말씀이신가요?"
"그러니까 여기 근방에 불로 뒤덮인 변칙종이 나타났고, 그래서 그걸 수습하려고 내가 그 불바다로 갔었단 말이야. 사방에 불꽃이 튀는데 나는 하멜른의 기수를 끌고 갔지. 자욱한 연기를 뚫고 그 소에게로 돌진했단 말이야. 그리고 중력 밧줄들을 소의 부위별로 하나씩 걸었는데 말이야, 여기까지는 이해했지?"
한 박자 늦게 최예진이 무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무슨 말씀이신가요?"
"…"
병실에 정적이 감돌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더 이상 다른 업무는 중요치 않았다. 일단 재정비한 뒤 소를 포획하여 내가 친 사고를 수습하는 게 최우선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우리 기지 사람들에게 어떤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직도 숲은 불타고 있겠지만, 이 의문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확실히 그 소를 포획할 수는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실마리를 얻기 위해 이 사람과 저녁 식사 한 끼를 함께 하자고 했다.
이 사람은 바로 루카스 팀장이다. 그는 UT-흑두루미가 정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영입되었다. 그는 한때 비밀조직인 SCP 재단 출신의 인물이었기에, 그를 신뢰할 수 있을지는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그가 유능하고 또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분명해졌으며 가까이서 그를 지켜본 나는 더욱 그와 가까워졌다. 그는 확실히 경험이 풍부하고 넓은 분야에 밝으니 어쩌면 해법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가 이 UT-흑두루미에 오게 된 것은 사소한 실수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징계로 열악한 환경으로 인사이동 당한 뒤, 현장에서 죽을 위기에 빠졌다가 UT의 도움으로 구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스로 그런 곳에서 일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했고, 그 경험이 그에게 상당한 자양분이 되었다는 사실 역시 분명했다. 그러나 나는 SCP 재단이라는 곳을 날강도 수집가 집단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이놈들은 변칙이라는 것에 환장해서 무언가 신기한 것만 보면 밀실에 가두고 싶어하는 무리였다.
사실 이들이 자신들의 페티쉬를 추구하는 방식은 처음부터 아니꼽기 그지없었다. 양놈들이 무슨 권리로 한반도에 들어와 우리 땅을 점령하려 하는지 정말로 웃기는 일이다. 겉으로 세계 평화니, 인류 보호니 장황한 말을 늘어놓고는 있지만 정말 그들이 그런 걸 이룰 능력이 있는 무리라는 말인가? 어쩌면 BE 본사가 SCP 재단과 티격태격한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수많은 UT로 분열한 뒤의 약해질 대로 약해진 BE와 대등하게 싸운다는 것을 보면 그렇고 그런 정도 수준일 것이다. 지금까지 일하면서 SCP 재단에게 도움을 받았다거나 재단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무튼 그렇지만 루카스라는 사람 자체는 괜찮은 사람이었다.
루카스는 국밥집에서 만나자고 했다. 기다림도 잠시, 루카스가 식당으로 들어와 내게 말을 걸었다.
"안현서 팀장님 아니신가? 그래서 용건은?"
"일단은 식사 먼저 하자."
루카스는 돼지국밥을 주문했다. 루카스는 돼지국밥을 게걸스럽게 먹었다. 루카스가 식사를 마치자, 나는 내가 겪었던 일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늘 오전에 1등급 비상사태가 발생하여 불타는 소가 인근 숲에서 출현했지."
"그래, 나도 확인했지. 꽤 인상적인 이미지였는데."
"이미 알고 있었다면 이야기가 빠르겠네. 난 거기로 가서 포획을 하던 도중 정신을 잃었고, 정신을 잃은 동안 하멜른의 기수 1기를 통째로 날려버렸어."
"그건 슬픈 소식이군. 이제 작별 인사라도 해야 되는 거 아닌가?"
나는 그에게 쏘아붙였다.
"그러게. 사실 내가 아니라 네가 대신 수습하러 갔으면 좋았을텐데. 그때 네가 좆까고 있지만 않았어도?"
"그야 번거로운 일은 싫으니까. 딱히 나를 직접 지명한 것도 아니었고. 결국 내가 옳았지. 하하."
루카스가 소리 내어 웃었다. 나도 그에게 웃음을 지어 보여주었다. 그도 마찬가지로 한 차례 곤욕을 치렀기에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내가 저지른 일을 책임져야 하겠지. 그렇지만 한 가지 의문이 남아서 말이야. 나는 왜 정신을 잃은 거지?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은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기억조차 하지 못했어. 대표에게도 최예진에게도 의사소통의 문제가 있었지. 짐작 가는 거 없나?"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SCP재단에서 일할 때 항밈이라는 것과 관련하여 업무볼 일이 있었지."
"항밈?"
"그래. 어느 날 그것의 격리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 격리실은 텅 비어있더군. 항밈은 그런 거야. 정보를 인지하고 머릿속으로 받아들인 것을 밈이라고 하는데, 항밈은 생각으로 추상화될 수 없는 무언가라는 거야. 네가 항밈 생물을 인지할 때마다, 그 정보는 자체의 밈을 해체하지. 결과적으로 완벽히 자신을 숨기는 거지."
"말이 어렵군."
"쉽게 설명해보지."
그는 남은 깍두기를 젓가락으로 집었다.
"좋아. 이 깍두기를 본다고 해보자. 자네가 이 깍두기를 인식하는 거야."
이윽고, 그는 깍두기를 빈 밥그릇에 놓았다.
"인식은 마음속, 즉 인지 공간에 심상을 형성하지. 즉 깍두기에 대한 자네의 정보가 모인 복합체가 생기는 거야."
그는 새로운 깍두기를 집어 밥그릇으로 가져간 뒤, 그대로 삼키고는 말했다.
"그러나 항밈은 심상으로는 존재할 수 없는 생각이야. 자체적인 특성이지. 자네가 그 이미지를 마음속에 저장하려고 해도 그 이미지는 마음속에 나타나는 순간 스스로를 파괴할 거야. 결국 자네는 그걸 절대로 인식할 수 없게 되는 거지."
"그러니까, 그 소도 항밈이라는 류에 속한다는 말이지? 하지만 그 소가 정말로 항밈이라면 우리 역시도 그 소를 알아차리지 못해야 하는 거 아닌가?"
"맞아. 그렇다면 항밈이라는 걸 확장해서 새로운 생각을 해보자구. 항밈은 자기 자신의 정보를 인식해서 파괴하지. 하지만 이 세상에 자신이 아닌 정보를 파괴하는 정보가 있다면? 그런 특수한 항밈이 있다면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있어. 다만 실제 항밈처럼 기능하려면, 정보를 인식하자마자 즉각적으로 그 정보를 소멸시킬 수 있어야겠지."
"그 말대로면 우리가 그 항밈이라는 것에 면역을 얻은 가설일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그 면역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측면에서는 기억제라는 약물이 있기는 한데, 아직 부작용도 많아. 그걸 사용하면 머리가 깨지는 통증을 겪는다고들 하지. 그런 통증을 겪은 적 있나?"
"없어."
"그래. 그러니 우리가 항밈에 대한 면역을 얻지는 않은 것 같아. 나는 그런 체질은 아니거든. 그 정보가 무엇인지 찾아오면 내가 그 정보를 지워주지. 기억제도 결국 항밈인 정보를 변형하는 거니까."
"좋아. 그렇다면 이제 그게 뭔지 어떻게 알지?"
"나야 모르지. 이제부터 많은 요소를 검토하고 점검해서 그 정보가 무엇인지 찾고, 그걸 제거한다면 그 소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겠지."
"그런데 한 가지 호기심이 생기는데. 네가 말한 재단이 소유한 항밈 생물 말이야, 결국 포획하려면 인지해야 할 텐데. 그렇다면 SCP 재단은 그걸 어떻게 발견하고 수집해 넣었다는 거지?"
"나야 모르지. 어느 날 그게 격리되어 있다는 걸 발견했을 뿐이야. 아직도 그게 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그게 만드는 정보의 구멍을 통해 그게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뿐이야."
형편 좋은 말이군. 나는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 그러한 나와 대표의 차이점을 어떻게 알아야 한다는 말인가? 식사? 생활 패턴? 사고방식? 아무리 생각해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떤 정보가 사실은 다른 정보를 파괴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다는 것인가?
"그래서 어떻게 검토를 하고 점검하라는 거야?"
"나야 모르지. 운 좋으면 한 번에 찾을 수도 있는 거고."
항밈 이야기는 흥미로웠지만 별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루카스라면 몰라도 내가 지금 느긋하게 연구나 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물론 이유를 알고자 했지만, 나는 실은 의사소통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인지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내용들은 너무도 추상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이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일이라면, 소를 어떻게 붙잡을지의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어떻게 대표와 소통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 후에 포획의 참여할 팀을 구성하는 것도 일이었다. 애초에 뭔지도 모르는 것들을 포획한다는 게 너무도 막연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냥 나는 슬슬 대화를 마무리 지으려 했다.
"대강 이해 가는 것 같긴 한데, 너무 많은 정보가 들어와서 슬슬 머리가 아프군. 아무튼 고마워, 루카스"
"응."
루카스는 아까부터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고 있는 듯했다. 방금 그 대화에서 흥미로운 무언가를 발견한 듯했다. 나는 문득 그가 BE 본사의 임원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BE가 무너진 것은 중요한 문제를 막연하게만 생각하는 임원들의 문제도 컸다. 그들은 BE의 직원들을 단지 돈만으로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막상 그 돈을 벌어다 주는 건 각 기지의 직원들인데 말이다. 의미 없는 무언가에 몰두해 있는 그를 보고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내 자리로 돌아왔다. 가만히 앉아서 생각해보니 사실 다른 것보다 내가 결국 그 소에게 당했다는 사실이 분했다. 그런 생각을 하다 갑자기 어쩌면 그 소가 사실은 어마어마한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상상을 했다. 그것이 등장한 것이 현대가 아닌 약간 이른 과거였다면? 그 소에게 완전히 압도되어 다른 차원의 존재로서 숭배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 소가 우리와 다르다는 게 어디 적혀 있는 건 아니지만, 확실히 우리 지구 생명체라고 부르기에 이질적으로 생기기는 했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 소는 어떻게 탄생한 것일까? 그것이 갑자기 나타나게 된 데는 어떠한 계기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알면 그 소를 어떻게 죽일 수 있을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그 소를 재현할 가능성도 존재했다.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나는 꼭 그 소가 세상에 어떻게 나서 무엇을 하려고 했던 것인지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확실히, 내가 본 불타는 숲은 잘못된 기억이 아니었다. 숲은 한 차례 불이 번지고, 아직도 타고 있었다. 화재의 원인인 소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으니, 일반인인 소방대원들을 개입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가능하면 일반인들에게는 퍼지지 않도록 쉬쉬하고 있겠지. 그게 우리가 하는 일이었다. 아무튼 내가 그 소에 대해 지금 가진 정보는 처음 받은 촬영물밖에 없었기에 숲속에서 그 영상 속 장소를 찾았다. 보통이었다면 눈에 띄는 지형지물을 통해 추측하는 것이 쉽지 않았겠지만 몇 번 순찰로 왔던 경험이 있었기에 그 경험을 되살려서 그 대치 장소를 찾을 수 있었다.
한때 타오르던 장소의 불이 꺼지고, 소가 남긴 흔적이 눈에 띄었다. 어떤 액체가 불에 타서 남긴 독특한 패턴의 연속, 분명 소의 체액이 타오른 흔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영상과 대조하여 소가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소의 반대 방향, 소가 온 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가기로 했다. 소가 지나온 흔적을 따라가는 길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사실상 직선에 가까웠다. 즉 그 소는 어떠한 지점에서 다른 방향으로 앞만 보고 달린 것이었다. 길을 따라서 간 끝에는, 거대한 석회동굴이 있었다.
흔적은 그 동굴에서 끊어져 있었다. 어두운 동굴 바닥에 얕게 물이 깔려 있어서인지 소의 흔적이 흐릿해졌다. 나는 손전등을 들고 조심히 걸어갔다. 그렇게 긴 굴을 굽이굽이 돌아가다 보니 동굴 끝에서 빛이 보였다. 다시 손전등을 끄고 그곳으로 걸어가보니 탁 트인 수직 공간이 있었고, 석순 사이에 돌로 쌓은 집 한 채와 조형물들이 보였다. 돌로 쌓은 집을 중심으로 여기저기에 등불이 박혀 있었으며, 집 안에서도 빛이 새어 나왔다. 나는 조심스럽게 가파른 경사를 타고 내려왔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거 다시 올라오려면 고생 좀 해야겠는걸."
바닥에는 탄 자국들이 사방팔방 흩어져 있었다. 소가 한동안 여기 있었다면 그것은 여기 사는 사람들 때문일 거라고 추측되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지금껏 살아온 것도 그 소 덕분이었을 것이다. 즉 이 사람들은 그동안 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생활해온 것이다. 그렇다면 소를 뺏으려는 내 입장은 그들과는 충돌할 것이라고 예상되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권총 한 정 뿐이었다. 나는 권총을 쓸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며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집 안에는 누더기를 걸친 대가족이 있었다. 그들은 정체불명의 고기 수프를 먹다 나를 지켜보았다. 꾀죄죄한 모습이었지만 순한 인상을 주는 이들이었다.
"한 가지 물으러 왔습니다. 제가 식사를 방해했나요?"
그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아버지로 보이는 이가 물었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말뜻은 대강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과 말이 통한다면 싸우기보다는 그들을 설득하는 게 더 나아 보였다.
나는 부드러운 어조로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저는 이 위에서 왔습니다. 당신들은 불타는 소와 함께 살고 있었죠?"
"네…"
"그리고 그 소는 여기에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렇죠?"
그의 말문이 터져 나왔다.
"오떻게 아신 거죠?"
"제가 바로 그 이유로 왔으니까요. 저는 여러분들의 고민을 해결해주시기 위해 여기로 온 것입니다."
"진짜로 당신은 하늘에서 오신 건가요?"
이 동굴에서는 당연하게도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동굴 천장을 하늘이라고 부른다면 나는 하늘 위에서 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이죠. 이제 그 소가 있던 곳으로 가볼까요? 소가 있던 곳을 한번 보고 싶은데, 당신이 길을 안내해 주실 수 있습니까?"
희망적인 것은 그들이 너무도 원시적이고 또 단순해서 나를 믿어주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을 통해 포획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까?
"지금 식사 중이라 조금만 있다가 출발할 수 있나요?"
"네. 그렇게 하도록 하죠."
"혹시 배고프면 같이 식사할래요?"
"저는 괜찮습니다."
식사를 마친 뒤, 그는 바닥에 꽂힌 횃불 하나를 들고 동굴의 가장자리 방향으로 걸어갔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평소에도 이렇게 식사를 하시나요?"
"오늘은 운이 좋아요. 평소에는 버섯이나 먹었는데, 오늘은 박쥐를 잡았어요."
"기쁜 일이군요."
"네. 슬픈 일이 계속 있었는데 오늘은 좋아요. 여기에요."
그는 횃불로 동굴 벽면에 난 또 다른 굴을 비췄다.
"혹시 더 가야 하나요?"
"이제 다 왔어요."
동굴 벽은 진흙 같은 것이 칠해져 있었으며, 그 위에 여기저기 그을음이 있었다. 그 그을음은 가면 갈수록 더 강해졌다. 그리고 그을음으로 인해 완전히 어두운 암흑 같은 동굴 끝에 돔 모양의 공간이 있었다. 그는 벽면의 등불에 불을 지폈다. 그러자 소가 있던 공간이 드러났다. 특별할 게 없는 빈 공간 중심에 바위 하나만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바위 중앙에는 진주 재질의 염주가 있었다.
나는 바위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곳에 소가 있었던 것입니까?"
"맞아요."
나는 동굴 중심으로 걸어가 염주를 집어 들었다. 염주에서는 무언가 영적인 아우라가 느껴졌다. 나는 이 염주가 이 포획 시설의 핵심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또한 염줄를 들고 있으니 왜인지 힘이 나는 듯했다.
"이것도 소에게 쓰던 물건인가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이제 슬슬 돌아가도록 하죠. 이건 잠시 빌리도록 하겠습니다."
소와 같은 신비한 외계 존재와 싸우려면 똑같이 신비한 힘이 필요한 법이다. 이 남자 덕분에 이제 그 소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게 된 것이다. 동굴을 나오게 되자 그에게 감사하며, 나는 앞장서고 있던 남자의 목을 손날로 가격했다.
"다음에 또 만나도록 하죠.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신을 잃은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들에게 동굴의 출구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꼴사납게 절벽을 올라가는 꼴을 보여주긴 싫었다. 모처럼 기회를 얻었으면 붙잡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필요한 걸 전부 얻었는데 굳이 의심 살 행동을 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그를 눕히고 출구로 향했다.
그들은 계속해서 동굴 안에서 살아왔고, 이들의 세계는 이 동굴에 한정되어 있을 것이다. 그들은 동굴 밖의 세계에 대해서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소를 붙잡을 수단과 능력이 있음에도 소를 잡으러 나갈 수 없었다. 소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내가 이 동굴 안에서 특별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들보다 낫다는 말은 아니다. 그들은 그들만의 삶을 살며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을 함부로 문명에 노출시키는 게 옳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동굴 밖의 이들보다도 안락하게 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지금까지 그래왔듯, 소가 없는 세상이 온다고 하더라도, 적응하여 나름 행복한 삶을 살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소가 필요했다. 지금 가장 소가 필요한 사람은? 바로 나다. 그 소를 가장 잘 쓸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나다. 그러니 나는 소를 기지로 데려가려고 하는 이 행동이 마냥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동굴을 나온 뒤 곧바로 소를 향해 차를 몰았다. 어느새 날이 어두워져 밤이 되어있었다. 다시 불타는 숲에 가니, 그 소가 서 있었다. 내 인생은 소를 만나고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소와의 첫 만남은 하멜른의 기수를 날려 먹으면서 시작했었고, 그 후로는 그 소 생각만 하면 치가 떨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똑같이 신비로운 무언가 없이도 그런 신비로운 것과 싸우고자 했으니 나는 어리석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소를 바라보던 도중 루카스로부터 전화가 왔다.
"어, 현서야! 나 루카스다. 전에 네가 소에 대해 말한 적 있었지?"
"응."
"그 소에 관해 한 가지 알려줄 게 있어서. 내가 그 소에 대해서 고민해봤는데, 도대체 어떤 원인인지 도저히 감이 안 잡히더라고. 그래서 전에 SCP 재단에서 꽤 친하게 지내던 동생에게 부탁 좀 했지. 네가 보냈던 자료 좀 분석해달라고 말이야. 답장이 뭐라고 왔는지 알아?"
지금 이 자식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괜히 뻔뻔한 일을 저지르고서는 무엇이 당당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녀석은 보안을 어떻게 생각하는 건지, 내가 전부 해결하고 소를 기지로 끌고 오면 해결되는 일 아닌가? 이 소와 관련하여 다른 조직이 개입할 수 있었다. 즉 이미 수많은 희생을 겪고도 새로운 충돌이 일어날 수 있었다.
"…"
"반응이 왜 그래?"
"내가 왜 지금 네 헛짓거리에 대해 지껄이는 걸 들어야 하지? 이게 얼마나 중대한 사건인지 모르는 거야?"
"너는 못 미덥겠지마는, 그 녀석은 믿을만한 놈이라고. 일단 이걸로 지금 진위를 파악할 수 있다면 아무튼 좋잖아?"
"나 운전 중이거든. 짧게 핵심만 얘기해."
"아니, 그냥. 나는 네가 보내준 파일들을 재단에 보내며 그 소에 대한 특징 몇 가지를 보냈지. 그 소에 대한 인지적인 특이점을 찾아달라고 말이야. 그런데 답장이 안 오더라고. 그들은 분명히 그것에 대해 보면서도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지. 그래서 결국 자료가 불명확하다며 분석을 거부했던 거야. 확실해, 그 소에는 강한 항밈적 요소가 작용하고 있고, 그 요소는 꽤 범용적인 무언가인 게 틀림없어."
이제 적당히 들어주고 전화를 끊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항밈이 뭐 어쨌든지 이제 관심 없다.
"수고했어. 그렇지만 넌 이 정도까지 해줘도 될 것 같아."
"무슨 의미야?"
"지금 그 소를 잡으러 가고 있거든. 자세한 얘기는 기지에서 하자고."
나는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었다. 굳이 루카스를 따라 탐정 놀이를 하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전부 내가 해결할 것이니 말이었다. 소를 기지로 데려다 놓으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으로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 이 산불도 언젠간 사그라들 것이다. 파괴된 생태계도 언젠가 복구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되뇌었다.
다시 소를 보니 그 소는 아직도 직선으로 어딘가에 걸어가고 있었다. 저 소 역시 자신만의 목적, 혹은 사정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 상관할 바 아니었다. 소의 여정은 여기서 끝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차에서 불길을 헤치고 그 소의 뒤쪽으로 달려갔다. 지금이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이제 소와 10미터 정도 거리만을 남기고 있었다. 소가 증오스러웠고, 그에 반응하는 건지 목에 건 염주도 점점 빛나기 시작했다. 온몸에서 힘이 끓어올랐다.
"으아아아아압!"
나는 그 소에게로 달려가 날아차기를 했다.
우드득.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소는 갑작스러운 기습에 깜짝 놀라 이쪽을 돌아보았다. 분명 그 소는 숨겨진 무기를 사용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럴 타이밍을 주지 않고 제압하기로 했다. 소가 돌아본 방향에는 이어지는 어퍼컷이 기다리고 있었다. 쾅. 그런데 주먹이 닿기 전에, 소의 머리가 나에게 박혔다. 나는 그대로 하늘을 가르며 부웅 날아갔다. 나는 수 초를 날아가 땅에 떨어졌다. 다리에서 찌릿 거리는 고통이 올라왔다. 방금의 부러지는 소리는 내 다리에서 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어서 나는 피를 토했다. 온몸에서 울렁거림이 올라오고, 뼈와 장기 모두가 망가졌음을 알았다. 그러나 소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나를 바라보며 멀리서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염주가 나에게 힘을 주었다는 것도, 그 소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으리라는 것도 전부 내 착각에 불과했다는 것을 마침내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이대로 죽을 거라고 직감할 수 있었다. 그 소는 나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상정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꼼짝없이 죽게 생겼다.
소는 근본부터가 다른 특별한 존재였다. 우리 인간들보다 뛰어난, 신적인 존재. 반면에 나는 하루하루를 평범하게 살아가는, 그저 한 명의 구성원이었다. BE와 UT에서 세상을 이롭게 만들고자 하는 막연한 목표만 있을 뿐, 나는 아직까지도 방황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게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정말로 나는 어떤 세상을 꿈꾸고 있었던 걸까? 나는 아직도 바람직한 세상이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정하지 못한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안이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소와의 태생적 격차를 나는 실질적으로 한 걸음도 좁히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부 포기하고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인가? 나는 지금까지도 수많은 외계 생명체를 다루어 왔다. 애초에 나의 일은 나와 다른 존재들과 싸우고 그것들을 다루는 일이었고, 나는 그것을 착실히 수행해 왔다. 이번 사건이라고 뭔가 다르다고 할 수 있나?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있는 대로 부딪치면 어떻게든 뚫리는 일인 것이다. 지금껏 그랬듯이 말이다. 나는 나를, 내가 한 선택을 끝까지 믿기로 했다. 나는 빛나는 염주를 치켜들었다. 나는 어떻게든 염주의 사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소는 움찔거리더니 자세를 바로잡고 내게로 전속력으로 달려왔다. 소가 있었떤 동굴에서의 기억이 되살아났을 것이다. 그것을 감싸는 불이 마치 로켓의 화염 같았지만, 이제는 그런 모습에 움츠러들 필요는 없었다. 나는 평범한 개인이 아니라, 살아있는 안현서였기 때문이다. 더 이상 잃을 것은 없었기에. 소는 정면으로 내게로 돌진하였다. 그러나 내가 있었을 장소에는 내가 벗어 던진 상의만이 있었다. 소는 머리를 흔들어 외투를 떼어냈으나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 나는 소의 측 후방에서 소에게 달려들었다.
그것은 소와 더 이상 거리를 벌리지 않아야겠다는 나의 판단이자,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소를 함께 데려가겠다는 의지였다. 엄청난 온도의 단단한 육체에 오르니 내 온몸이 익으며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견딜 수 없는 고통에도 나는 더욱 단단히 소에게 매달리며 울부짖었다. 그러면서 오른손으로 염주를 벗어들어 염주를 쥔 오른손으로, 몸부림치는 소를 내리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손이 부서지고 주먹의 뼈가 산산조각이 났다. 피는 끓어오르며 말라붙었다. 그러나, 소는 그 역동적인 움직임이 사그라들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자세를 바꿔 염주를 벌렸다. 그리고 어떻게든 소를 잡겠다는 일념으로 염주를 소에게 걸어 목을 조였다. 소가 부들거리면서 염주를 떼어내려고 했다. 힘이 부족해 염주를 놓쳐버리겠다는 생각이 드는 찰나, 나는 염주가 소의 목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느꼈다. 내가 손을 놓치자 염주는 목 위로 미끄러져 올라가 소의 머리로 향했다. 그리고 염주는 소의 코에 걸렸다. 소의 움직임이 멈추고, 소를 덮은 불도 약해졌다. 나는 힘이 빠져 소에게서 떨어졌다. 나는 멈춰선 소의 앞으로 기어가 소의 염주를 붙잡았다. 수많은 형체가 눈앞에서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리고 그렇게 나는 그 소가 되었다. 나는 분명 안현서 팀장이었지만, 이제는 그 소가 되었다. 분명 그 염주가 작동한 효과였을 것이다. 기이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지만, 분명히 가능한 일이었고 또 내가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었다.
나는 인간으로서의 기억을 분명히 떠올릴 수 있었고, 기억의 끝에 염주를 붙잡음과 동시에 섬광이 일고 그 소가 되었다는 것을 떠올릴 수 있을 뿐이었다. 한때 나를 태웠던 그 잔혹한 불은 이제 내 온몸을 간질이고 있다. 그리고 주변의 풍경도 새롭게 느껴졌다. 인간으로서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어디에나 동족들이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그들이 나를 부른다.
그때, 내 앞에 코뚜레를 붙잡은 한 명의 만신창이가 된 남자가 보였다. 그는 포기하지도 않고 겨우겨우 목숨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머리를 비틀었다. 코뚜레는 내 코에서 빠져 바닥에 처박혔다. 나는 한때 UT의 열렬한 신봉자였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나는 이제 와서 어딘가에 평생 갇혀 영원히 이용되는 선택을 할 수 없다. 그래. 나는 인간으로서의 사회에 이제 관심을 잃었다. 나는 그의 머리를 앞발로 지긋이 으깨주었다. 내가 스스로에게 어떤 세상을 바라며 살아왔냐고 물었던가? 나는 현재를 위해 산다.
이렇게 소가 되니 루카스의 헛소리로 치부했던 이야기는 어느 정도 맞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상의 다른 모든 생명체가 그랬듯이, 수많은 항밈적인 존재가 세상에 존재한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의 항밈에 의지하고 있다. 세상은 수많은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이 넓은 세상에서 그 모든 가능성은 실현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루카스는 그 항밈적인 네트워크에서 일부만을 보고 인지할 수 있을 것이었다. 세상이 대칭이라는 사실을, 자신이 보는 것이 좁은 시야뿐이라는 것을 그는 영원히 깨닫지 못할 것이었다.
이 모든 고난을 겪으며, 이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감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가여운 처지에 놓인 동족들을 구해주러 가기로 했다. 하늘 위로 불타는 용이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