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질주 - 새벽을 지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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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 전에도 밖에 서 있었지만, 비가 내려서 그런지 다시 바라본 밤은 더욱 어두운 듯하였다. 조용히 창고를 빠져나온 9대의 차량은 줄을 지어 목표지점으로 향하기 위해 속력을 높였다. 백색소음을 내며 몰아치는 비를 얇은 와이퍼가 부들거리며 쓸어냈다. 흘러내리는 빗방울 때문에 앞의 두 트럭도 그 형체만 간신히 구분할 수 있었다. 밝은 조명이 천장을 스치는 모습을 보고 하늘을 바라보자, 검은색 헬리콥터 한 대가 조용히 선회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가로등이 규칙적으로 창문을 스쳐갔다.

규칙적으로 흔들리는 차에 기대어 빗소리를 듣고 있자니, 여러 잡생각이 머리를 떠돌기 시작했다. 이번달 카드비부터 월세에, 빚에, 밀린 업무에… 관두자. 주식도 별 재미가 없던 터라 휴대폰을 꺼내고 싶지도 않았다. 이전에 번 돈은 부모님 치료비로 다 보내드렸고. 어머니가 얼른 나으셔야 할 텐데…

차량 일행은 교차로를 돌아 차량 전용 도로에 진입했다. 멀리서 의미하게 헬리콥터 날개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불이 모두 꺼진 아파트가 눈에 들어왔다. 저 안에서 잠든 사람들은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세상에선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영영 깨닫지 못하겠지.

"한남대교 진입합니다."

무전기가 지직거리며 나지막히 2호차의 사수님 목소리를 전했다. 곧이어 차량들이 일제히 다리 위로 진입했다. 다리 위에는 시간대에 걸맞게 정적이 가득했다. 어쩌면 이 작전을 위해서 어디선가 몰래 교통을 통제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며 나아가자 다리 위로 다리가 교차하는 지점에 도착했다. 그림자가 머리 위로 스며들자, 몰아치던 빗방울이 사라져 사방이 고요한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기대었던 몸을 일으킨 건 그때였다.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로, 다리 위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어떤 그림자를 본 것 같았다. 자세히 보기 위해 몸을 기울였을 때는 이미 가려 보이지 않았다. 잘못 봤나 싶어서 다시 몸을 되돌린 찰나, 갑자기 금속과 금속이 맞부딪치는 충격음이 울려 퍼졌다. 놀랍게도 소리의 근원지는 바로 앞이었다.

다리 아래를 갓 빠져나온 2호차 위에서 몸을 숙인 채로 등을 돌리고 있는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헛것을 보고 있다기에는 주변을 때리고 흘러내리는 빗줄기들이 그 존재를 증명하고 있었다. 이윽고 검은 형체가 몸을 일으키자 기계장치가 맞물리는 듯한 금속음이 들려왔다. 가로등의 노란 조명이 규칙적으로 지나갈 때마다 몸체가 조금씩 드러났다. 어떻게 달리는 트럭 위에서 저렇게 서 있을 수 있는 거지? 재단의 헬리콥터가 돌연 등장한 괴인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자, 거대한 금속 팔다리를 가진 남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 끝에서 빗방울이 흘려내려 떨어졌다.

"저게 뭐야."

무의식적으로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곧이어 무전기는 상황을 알리는 급박한 목소리들로 소란스러워졌다.

"3호차에서 보이는데, 2호차, 2호차, 들립니까? 위에 뭐가 떨어진 것 같은데, 확인 됩니까?"
"1호차입니다. 2호차 상부에서 신원 미상의 습격자 확인. 다시 알립니다-"
"2호차입니다! 다리 아래를 지난 직후 충격음이 들렸습니다! 아직-"

모두가 당황하고 있던 그때, 남자가 트럭의 끝 쪽으로 천천히 발을 떼기 시작했다. 한 발 한 발을 내딛을 때마다 무거운 금속이 강철 차체를 내려 찍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몸을 살짝 낮추더니 아무렇지 않게 같은 방식으로 차체 옆면을 타고 내려갔다. 전자석이야. 내가 생각했다. 그 몸짓은 마치 오랫동안 준비해 온 것처럼 능숙했다. 그 순간, 뒤에서 달리던 세 대의 경호차량이 속도를 높이더니, 내가 탄 트럭 왼쪽으로 스쳐갔다. 검은 경호 차량들의 측면 슬라이드 문이 열리며 무장한 인원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남자는 팔을 들어 올리더니 - 그대로 컨테이너의 옆면을 내리쳤다. 충격으로 인해 컨테이너 옆면이 깊은 상처를 남기며 파였다. 남자는 다시 팔을 들어 올리더니 내리 찍고, 다시 내리 찍기를 반복했다.

잠금장치를 부수려는 거야.

잠금 장치는 내장되어있기에 밖에서 드러나지 않았다. 즉, 외부에서는 파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남자도 이를 눈치채곤 당황했는지 움푹 패이기만 한, 아무 장치 없는 컨테이너에 매달려 움직임을 멈추었다.

"무기를 내려놓고 정체를 밝혀라!"

남자는 멈칫하더니 고개를 천천히 돌려 따라붙은 경호 차량을 곁눈으로 흘겨보았다.

"발포하겠다!"

잠시 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물방울들을 쳐내는 와이퍼만이 바쁘게 움직였다. 차량들의 바퀴가 빗물을 뿜어내며 달리는 모습만이 보였다. 남자는 팔이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연속적으로 맞물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 중앙에서 무언가 드러났다.

뭘 하려는 거지?

남자의 손에서 무언가가 반짝였다. 드러난 것은 전선이 조잡하게 연결된 작은 장치였다.

"대장님, 저거…"

"발포해!"

순간적으로 트럭 옆면에서 밝은 섬광이 번쩍였다. 다음으로 보인 건 앞 트럭에서 무언가 떨어져나가는 모습이었다. 힘없이 구겨진 컨테이너 옆면이 폭발로 떨어져 나가며 차량이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기울며 비틀거렸다. 동시에, 경호 인원들도 남자를 조준해 소총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남자가 왼쪽 팔을 들어 올려 총알을 막자 금속과 총알이 부딪치며 스파크가 번쩍였다. 트럭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빗나간 총알은 이전 폭발로 약해질 대로 약해진 차량의 타이어에 명중했다. 큰 소리와 함께 타이어가 터져나갔고, 차량의 휠이 아스팔트에 긁히며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차체는 마찰로 인해 급격히 왼쪽으로 틀어졌고, 무방비 상태의 경호 차량들을 순식간에 덮쳤다. 네 대의 차량은 서로 엉키고 충돌하며 난간에 부딪쳤다. 새벽의 고요했던 도로는 순식간에 난장판으로 변했다.

그 뒤를 따라가던 내가 탄 트럭을 운전하던 요원도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트럭은 미끄러운 도면을 몇 미터 가량 미끄러지더니 끼이익 소리를 내며 겨우 멈춰 섰다. 관성의 충격에서 몸을 일으켰을 때에는 두꺼운 빗방울 사이로 일렁이는 헤드라이트를 받아 하얗게 빛나는 자욱한 연기만이 보였다. 나는 권총을 꺼내 확인하고는 손에 들고 트럭에서 뛰어내려 앞으로 걸어나갔다. 차가운 비가 옷과 머리카락에 스며들며 축축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재단의 헬리콥터가 공중에서 선회하며 현장을 비추었다.

두 걸음 쯤 나아갔을까.

내가 고개를 돌리자 고막을 찢는 듯한 충격음이 귀를 휘감았다. 30분 짜리 짧은 모험에 순식간에 연장 티켓이 찍히는 소리였다.

충격 이후 1초, 연기가 걷히며 20톤이라는 무게가 우습게 트럭이 옆 다리를 들고 한쪽 바퀴만이 아슬아슬하게, 하지만 금방 쓰러질 게 뻔하게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2호차, 사수님이 타고 있는 트럭이었다.

2초, 이런, 씨발. 한 마디 말이 내뱉어지기도 전에 트럭은 쓰러지며 아슬아슬하게 난간에 몸을 걸쳤다. 그 옆으로 트럭을 박살 낸 남자도 바닥에 다리를 내렸다. 다리가 바닥에 닿자 육중한 금속음이 들렸다.

3초, 3대의 운송 차량, 6대의 경호 차량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동시에 경호 병력이 뛰어나오면서 안전 수칙과 대외적인 시선은 포기한 채 즉각적인 발포가 이어졌다.

4초, 남자는 다시 한 번 발을 굴렀고, 다시 한 번 충격음을 내뿜으며 모두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5초, 고개가 위로 향하는 그 순간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 적이 다리 밑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한눈을 판 한 재단 요원의 팔과 다른 요원의 다리를 걷어찼다. 찬 부위에 걸맞지 않는 충격으로 두 요원의 다리가 바닥에서 떨어지더니 몸이 튕겨져 나가 다른 요원들을 덮쳤다. 팔과 다리가 으스러졌다는 건 분명했다.

6초, 그리고 두 번째로 한눈 팔린 그 순간 공중에 있던 남자는 몸을 다리로 향했다. 7초, 3번째 충격이 다리에 울리며 바닥에는 성대하게 금이 갔다. 8초, 난간이 무너지며 몸을 걸치고 있던 트럭을 그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안돼!"

트럭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1초의 침묵.

첫 번째 충격으로부터 10초, 사그라드는 연기 속에서 기계음과 함께 뒤 돌아선 남자의 형체가 드러났다. 나는 그 남자가 트럭을 습격한 괴한임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남은 기동특무부대 인원들이 재빠르게 다가와 남자를 둘러싸고 조준하였다. 빨간색 레이저 포인터들이 남자의 금속성 신체 이곳저곳을 스쳤다. 사라진 두 명의 적을 찾는 황급한 외침도 울려퍼졌다.

쿵, 하고 바닥과 추락한 차량이 충돌하는 소리가 멀리서 들리자 이루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밀려들었다. 사수님은 불과 몇 시간 전에 괜찮을 거라고 나를 안심시키지 않으셨는가. 그런데 이렇게…

1초도 되지 않는 순간, 차가운 정적이 현장을 떠돌았다. 누군가가 총을 장전하는 소리가 들린 그 때, 남자가 몸을 돌렸다. 발을 내딛자 다시한 번 놀랄 만큼 무거운 소리가 들렸다. 키는 언뜻 보기에도 2미터가 훌쩍 넘을 듯 하였으나, 신체 곳곳이 기계로 대체되어있어 원래부터 지금의 키였는지는 가늠이 되지 않았다. 기름에 쩐 옷 아래의, 어디서부터 뻗어 나왔는지 모를 금속 팔다리가 차가운 빗물과 만나자 옅은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다리는 바지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으나, 팔은 양쪽 모양과 크기가 다른 것으로 보아 직접 만들고 개조한 것이 분명해보였다. 그가 팔을 들썩이며 재정비하자, 몸 속 깊은 곳에서 기계장치가 회전하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가 몸을 천천히 돌려 역시 기계인지 아니면 신체인지 알 수 없는 눈으로 자신을 둘러싼 재단 및 방재원의 인원들을 돌아보았다.

"무기를 내려놓고 투항하라!"

나는 정차한 트럭 뒤로 뛰어가 권총을 양손으로 들고 고개를 내밀어 현장을 바라보았다. 대치중인 모습이 보였다. 위를 올려다보자 공중을 선회중인 헬리콥터가 눈에 들어왔다. 이미 방재원과 재단측에 상황은 전달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원 부대가 도착하려면 최소 20분 이상이 소요될 터였다.

"… … … …"

남자가 입술을 움찔이며 무슨 말인지 모를 말을 웅얼거렸다.

"반복한다, 무기를 내려놓고 투항하라!"

남자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이 없었다. 부대원들이 화기를 조준하고 재차 발포를 시작했다. 그 때, 내가 숨어 있는 트럭 사이로 무언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들은 경쾌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몇 번 튕기더니 기동특무부대원들이 있는 곳으로 굴러갔다. 대원들은 느닺없는 소음에 고개를 돌려 자신들에게 다가온 물체들을 바라보았다. 원기둥 모양의 작은, 폭탄이었다.

"…?"

무엇을 할 새도 없이 밝은 섬광과 함께 뜨거운 폭발이 일었다. 내가 있던 곳까지 뜨거운 기운이 몰아닥쳐 고개를 숙여야 했고, 대원들은 저마다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폭발의 여파에 의해 나가떨어졌다. 폭발은 이중, 삼중으로 계속되었다. 손상을 입은 도로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다시 몸을 일으키는 이는 없는 것 같았다. 트럭에서 새어 나왔던 기름에 불이 붙으며 현장 곳곳에 불꽃이 일렁였다. 폭발의 소음이 끝나자, 사방은 빗소리로 메워졌다. 남자는 그런 풍경을 말없이 바라보고는 몸을 돌렸다.

그 순간 남자에게 강렬한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지더니 공중에서 총알세례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남자는 두 팔을 들어 공중에서 다시 등장한 공격헬기의 총알과 빛을 막아냈다.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리며 팔의 외피가 벗겨져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렇게 몇 초가 지났을 무렵, 남자의 후방에서 펑, 소리와 함께 밝은 빛줄기 하나가 헬기를 향해 다가갔다. 그 모습을 본 헬리콥터가 회피를 시도했지만, 잠시 후 폭발을 일으키며 추락해버렸다. 남자가 수증기가 이는 팔을 다시 내리며 뒤를 돌아보고는 몸을 돌려 내가 숨어있는 트럭 방향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가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 나는 재빨리 몸을 돌려 바짝 엎드렸다. 육중한 기계 다리가 땅에 꽂힐 때마다 그 충격이 내가 있는 곳까지 울렸다. 남자는 트럭 앞에서 멈춰 서고는 반대쪽을 향해 손짓했다. 잠시 후, 아까 폭탄이 굴러왔던 방향에서 비교적 가벼운 발소리가 들리더니 트럭 쪽으로 다가왔다. 트럭 밑으로 고개를 돌리자 두 명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보통 문 아니다. 너네가 준 것으로도 안 부숴진다. 쓸모없는 폭탄을 주다니."

남자가 코를 킁킁 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두 명은 아무 말없이 같이 들고 온 커다란 가방을 아스팔트 위로 던졌다. 그 위로 아직 연기가 이는 로켓런처도 떨어졌다.

"저희는 요구사항을 따랐을 뿐입니다. 더 좋은 것을 원하신다면, 돈을 내셔야죠. 예정에 없던 방해 인력 제거도 원래는 다 비용처리됩니다. 공격헬기가 있다는 말도 없었잖아요."

남자는 불만이 많은 듯 끙, 소리를 내며 입맛을 다셨다.돈이라니. 남자가 고용한 용병인 모양이었다. 그들 중 한 명이 몸을 숙여 가방을 뒤적이다가 무언가를 꺼내 다른 이에게 건넸다. 트럭 아래의 배관에 가려져 그게 무엇인지는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다른 용병이 무언가 작업하는 잠시 멈추더니 하더니 금속과 금속이 자석으로 붙는 듯한, 무거운 소리가 들렸다.

"뒤로 물러서십시오."

남자는 한두 발자국 정도 더 물러섰다. 용병들도 무언가를 조작하고는 뒤로 서서히 물러섰다. 가벼운 타이머 째깍거리는 소리, 그리고 테슬라 코일이 작동되는 듯한, 전기가 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섬광이 번쩍였다. 그 소리는 점점 커지더니, 이내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섬광도 사라졌다.

"무슨-"

남자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그들의 발 앞으로 둔탁한 울리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금속 판이 떨어졌다. 나는 잠시 후에서야 그것이 컨테이너의 옆면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자가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금속 판을 발로 툭 건드렸다. 용병들이 다가와 무언가를 살피더니 옆으로 비켜섰다.

남자는 발을 들어 컨테이너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트럭 안에서 남자가 무어라 궁시렁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덜컹거리는 소리를 들으니 무언가를 찾고 있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 컨테이너 밖으로 나온 남자는 무언가를 쿵, 하고 내려놓았다. 나는 그 모습을 조금 더 자세히 보기 위해 트럭 뒤쪽으로 기어 이동했다. 고개를 올리자, 아까 그들이 서 있던 쪽의 컨테이너 옆면이 푸른색 흔적과 함께 동그란 모양으로 깔끔하게 잘려나간 것이 보였다. 남자와 용병들은 트럭 앞 부분 근처에서 아직 꺼지지 않은 헤드라이트에 의존하여 변칙예술품을 담은 상자를 쌓아 놓고 있었다. 그중 유난히 눈에 띄는 상자가 있었다. 무척 커다랗고 납작한, 운송 전에 봤던 그 상자였다.

"그 분이 나를 부르셨다. 도와 달라고 했다. 그 분의 조각을 되찾으시길 바랬다."

"그냥 상자처럼 보이는데."

남자는 손의 기계장치를 재 형성해 날카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더니, 상자의 모서리를 거칠게 잘라냈다. 뜯겨나간 상자의 단면으로 하얀 백자가 드러났다. 상자 주위로 흰 연기가 넘실거리며 흘러내렸다. 두 용병은 그 모습을 별 감흥 없이 바라보는 듯 했다.

"이건 그 분을 위한 양식이다. 메카네. 이것을 드시고 마침내 육신을 다져 돌아오실 거다. 우리 앞으로."

남자는 그 옆의 상자를 집어들더니 라벨을 읽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이건…"

그는 다시 한 번 손을 갈더니 커다란 상자의 끝 부분을 도려냈다. 갈색 액자의 모서리가 드러났다. 남자가 그것을 바닥에 던지자, 노란 눈을 번뜩이는 호랑이가 그려진 그림이 비를 맞으며 바닥에 떨어졌다.

"… 이건, 더러운… 더러운 놈들이군."

남자는 발을 들더니 떨어진 그림을 밟았다. 쿵, 하는 소리가 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다시 발을 들어 그림을 짓밟았다. 보호 유리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숨을 몰아쉬더니 그림에 발길질을 하기 시작했다. 보호 유리가 깨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비를 맞은 그림 곳곳에 물 자국이 졌다. 남자는 그림을 향해 손의 칼날을 들이밀었다. 그림이 관통되자 그 속에서 고틍스러운 외침이 들렸다.

그 때, 트럭이 떨어졌던 부서진 난간 사이에서 어떤 손이 눈에 들어왔다. 손은 부들부들 떨면서 반대쪽 손도 겨우 위로 올려놓았다. 잠시 후 드러난 것은 다름 아닌 김신욱 사수님의 얼굴이었다. 사수님은 숨을 몰아쉬면서 팔과 다리에 이어 몸을 겨우 도로 위로 올려놓고는 뒤 내 쪽과 현장 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나는 그에게 이쪽으로 건너오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사수님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천천히 기어 트럭 뒤쪽으로 다가왔다. 숨을 몰아쉬는 그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한쪽 다리는 비정상적인 각도로 꺾여 있었고, 얼굴의 긁힌 자국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 내가 입을 열려고 하자 그가 검지손가락을 내밀었다.

"질문은 나중에. 지금 상황이 어떻게 되지?"

"네, 넵. 저 남자 보이시죠? 초상물품을 탈취하려는 목적인 것 같습니다."

"지원부대는?"

"아직…"

"젠장할."

그는 고통스러운듯 천천히 심호흡하더니 고개를 내밀어 남자 쪽을 바라보았다. 그가 옷 안쪽에서 자신의 권총을 꺼냈다.

"그동안 시간을 끌어야 해."

"아뇨 그런 몸으로 무슨 수로… "

내가 나서려는 사수님을 막아 서자 그가 나를 쳐다보았다.

"잘 들어. 이 초상물품들은 아직 우리도 정확히 어떤 용도로 만들어졌는지, 어떻게 작동하는지 모르는 물건들이야. 다른 단체나 인물의 손에 넘어 가는 건 무조건 막아야 해."

사수님은 조용히 몸을 낮추고 몰래 접근하려는 듯 트럭 옆 쪽으로 다리를 절며 천천히 걸어갔다. 두세 걸음 쯤 나아갔을까. 돌연 경쾌한 금속음이 현장에 울려 퍼졌다. 사수님의 다친 발에 맞은 나사 조각이 날아가 남자의 다리에 명중하는 소리였다. 나는 숨을 죽였고 남자는 뒤를 돌아보았다.

"누구냐."

남자는 엉망진창이 된 그림을 옆으로 던졌다. 액자가 툭, 하고 떨어져 중앙 난간에 기대어졌다. 사수님은 빠르게 권총을 발포했고, 남자는 총알을 가볍게 막아내곤 멱살을 잡고 눈높이로 들어 올렸다. 반대쪽 손으로는 왼쪽 옷깃에 매달린 명찰을 툭 떼어서는 들여다보았다. 남자가 얼굴을 찌푸렸다.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지금보다 상황이 나빠질 일도 없지 않은가. 나는 권총을 꺼내 남자를 조준해 쏘기 시작했다. 한 발, 두 발 총알이 팔뚝에 맞고 튕겨나가자 남자가 눈을 내게로 돌렸다.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그가 사수님을 뒤로 던져버리고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양쪽에 서 있던 용병들도 나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남은 총알은 13발. 축축한 비가 머리와 옷을 적셔 서늘했다.

어색한 침묵을 깬 건 전혀 의외의 것이었다. 갑자기 후방에서 남자를 향해 총알이 날아든 것이다. 바라본 곳에는 백송윤 요원이 자신의 권총을 든 채로 가늠쇠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가 당황한 틈을 타 나는 재빨리 옆의 용병에게로 총을 겨누었고 방아쇠를 당기자 다리에 명중하며 쓰러졌다. 오케이, 하나 갔고. 다시 한 번 조준하자 왼쪽 용병이 쓰러졌다. 사수님도 일어서서 총을 겨누며 남자로부터 물러섰다. 그렇게 3명의 요원은 남자를 겨누고 있었다.

남자는 당황한 듯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내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남자가 펼친 왼손에서 드러난 것은 아까 마주했던 폭탄이었다. 던져진 폭탄은 폭발하며 미처 완전히 피하지 못한 백송윤 요원과 사수님이 뒤로 튕겨나갔다. 뜨거운 폭발에 휘말린 나는 난간에 내동댕이쳐졌다. 정신이 아득해지며 시야가 순간적으로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몸을 천천히 일으키자 남자가 두 요원에게로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모두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사수님에게로 걸어가 육중한 발로 그를 걷어찼다. 보통의 몇 배가 넘는 힘으로 차인 사수님은 붕 떴다가 트럭에 부딪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가 가는 신음을 흘렸다. 그 순간, 난 내 뒤에서 무언가를 느꼈다.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내 뒤에서 처참하게 찢어져 채 버려진 그림이, 내 피를 뒤집어 쓴 그 그림에서, 그 노란 눈을 번뜩이던 범이 그려진 그림에서, 정말로 털이 수북한 머리가 나오고 있었다. 그 다음은 발, 몸통에 이어 꼬리까지, 완벽한 맹수의 형상이었다. 그림에서 몇백년만에 나온 듯한 맹수는 노란 눈을 번뜩이며 주위를 둘러보더니, 총에 맞은 다리를 잡고 쓰러져있는 용병들에게로 다가갔다. 맹수는 온몸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용병은 자신 눈앞의 짐승을 발견하고는 공포에 질려 팔을 정신없이 저으며 뒤로 물러났다. 맹수가 용병을 덮친 건 순식간이었다. 찢어질듯한 비명소리가 차가운 새벽 공기를 가르자, 남자는 사수님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풀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그의 용병을 물어뜯고있는, 한 마리의 비현실적인 동물이 있었다. 그 뒤로 번개가 번쩍이며 천둥소리가 울렸다. 맹수가 남자의 인기척을 느끼고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개를 돌려 안광을 빛냈다. 어느새 그것의 몸은 불어나고 상처는 나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느꼈다는 의미가 아니라, 정말로 다리, 몸 등이 부피가 커지고 있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남자에게 몸을 돌려 다가가는 짐승이 입에 남은 살점을 삼키자, 몸에서 옅은 빛이 나며 그 부피가 커졌다. 나는 공포라고 해야할지, 신기함이라고 해야할지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그 모습을 자켜보았다. 그림에서 튀어나온, 승용차만 한 맹수의 뒷모습을.

맹수는 그대로 목을 노리며 남자에게 달려들었고, 남자가 팔로 막아내며 날카로운 이빨과 금속 팔이 맞부딪쳐 쇠를 긁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남자는 그것을 자신으로부터 떼어놓으려고 했지만 맹수는 그의 팔 곳곳을 공격하며 금속장치들을 뜯어냈다. 금속으로 이루어진 겉이 떨어져나가자 여러 전선들이 드러났고 맹수는 그것들을 입으로 잡아당겨 끊어버렸다. 남자가 고통스럽게 비명을 질렀다. 마침내 거대한 짐승이 남자의 왼팔을 끊어놓는데 성공했다. 그것의 입에 물린 처량하게 뜯긴 팔의 전선에서는 스파크가 튀고 있었다. 남자는 남은 팔로 백자가 담긴 상자를 집어들고는,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남자의 뒤에는 스스로가 초래한 끊어진 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는 앞의 괴물과 뒤의 허공을 두려움에 찬 눈빛으로 번갈아 보았다. 그러나 남자가 무엇을 하기도 전, 아까의 충격으로 약해진 바닥은 그의 몸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부서져버렸고, 남자는 멀어져가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나는 천천히 일어섰다. 옆구리 한쪽 구석이 아려왔다. 맹수가 고개를 숙이고 남자가 사라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주위를 돌아보자, 끙, 하고 몸을 일으키는 사수님과 백송윤 요원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 동안의 정적을 깬 건 공중에서 들린 날개 회전 소리였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밝은 스포트라이트가 눈을 부시게했다. 거의 동시에, 멀리서부터 달려오는 밝은 조명 보였다. 조명은 이내 검은 차량 행열들의 형체를 갖추었고, 나는 비로소 지원 인력이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검은 차들은 현장 바로 앞에서 멈춰섰고, 무장한 인원들이 동시에 쏟아져나왔다. 그들 중 몇명은 바로 부상당한 요원들에게로 뛰어가 차량으로 부축했고, 또 다른 이들은 현장의 사진을 남기며 이런저런 사항을 적어나갔다. 대부분은 비현실적으로 거대한 짐승을 겨누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 즈음, 부축을 마친 대원 중 한 명이 나에게 다가왔다.

"탁재헌 요원님! 이쪽입니다."

어느새 비는 그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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