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
제목: 재단 변칙예술학부 내 프로젝트 제안서 2022-07 "갈까마귀"
저자: Bluemoon_TERROR
작가 페이지: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Jackdaw_on_a_post_-_geograph.org.uk_-_2363545.jpg
소유자: Philip Platt
날짜: 2011/04/18
그리하여 갈까마귀는, 결코 날아가지 않고 여전히, 여전히 앉아 있다.
내 방문 바로 위에, 아테나 여신의 창백한 흉상 위에.
그 눈은 꿈꾸고 있는 악마의 모습과도 같고,
그 위의 등잔 빛은 갈까마귀를 비추고 바닥에 그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마루 위에 드리워 떠도는 그 그림자로부터 내 영혼이
벗어날 일은—, 영영 없으리라!
재단 기록정보보안행정처(RAISA) 공지
해당 파일은 변칙예술학부 주도 하의 변칙예술 협력전시회에 전시된 작품의 프로젝트 제안서 기록 파일 중 하나의 디지털 아카이브 본이다. 원문은 변칙예술학부 내에 보관되어 있으며 열람 시 변칙예술학부의 허가를 필요로 한다. 당시 전시회가 요주의 단체 "Are We Cool Yet?" 및 다수의 변칙예술가와 연관이 깊다는 점, 제작자가 재단에 격리된 변칙 개체이면서 동시에 "Are We Cool Yet?" 소속 인원이라는 점을 감안해 본 아카이브 본이 요주의 단체 관련 데이터베이스에 보관되었음을 알린다.
분류위원회의 허가 하에, 문서에는 요주의단체-서식, 그리고 are-we-cool-yet 태그가 부여되었다. 또한 본 기록에서는 제작자 본인의 주석과 함께, 변칙예술학부에서 추가한 주석이 있다. 구분을 위해 전자를 [작성자 주석], 후자를 [변칙예술학부 주석]으로 구분한다.
— 지역사령부 RAISA 연락실장 전도균
프로젝트 제안서 2022-07 "갈까마귀"

갈까마귀 모형. 작업 이전.
제목: 《갈까마귀》
물자 소요:
모형 갈까마귀. 내부는 금속 뼈대를 설치할 수 있게 충분히 공간이 있어야 한다.
EVE 저장장치.
이 작품을 움직이게 할 EVE 수용체. 심령질을 추출해 사용할 예정이다.12
이 개체를 지탱하고 움직이게 할 금속 뼈대. 스테인리스 재질 정도로 충분하다.
이 개체가 가지고 놀 금속 조각들. 재질은 마찬가지.
이 개체를 꾸밀 색색깔의 금속 장신구들. 색이 다양할수록 좋다.
난수 생성 장치
약간의 지성과 행동 원리, 그리고 약간의 밈을 넣을 룬 문자 및 룬 문자 작성기
금기 발생 장치34
작품을 전시할 받침대
전동기
약간의 용서.
이 모든 것을 관리하고 제작할, 나 자신.
초록: 《갈까마귀》는 변칙예술학부에서 주최하는 변칙예술 전시회에 전시할 예정이다. 이 작품은 제2전시관제3전시관5을 관람하는 사람들을 구경하거나, 혹은 날개짓하는 등의 행동을 통해 그들을 환영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전시된 전시대에 널린 금속 조각을 입이나 발톱 등으로 집고 여러 가지 모양으로 조립할 것이다. 이 금속 조각들은 생성된 난수와 이 작품의 판단을 토대로 배치될 것이며 대개 기하학적인 평면도나 간단한 입체 구조물로 만들어질 것이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이 작품을 통해 흥미와 즐거움을 느끼고 남은 작품을 보다 더 즐겁게 관람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준비한 금속 재료들을 충분히 무르게 한 뒤 모양을 내준다. 금속 뼈대는 자연스럽게 동작할 수 있도록 관절을 부드럽게 해주되 너무 무르게 할 경우 움직이던 과정에서 관절이 분리될 수 있으므로 너무 조작하는 것은 위험하다. 색깔 있는 금속은 깃털 모양으로 변형시켜준다. 금속 조각들은 여러 가지 기하학적인 모양(직선, 큐브 등)으로 만든다. 이후 뼈대 내부에 난수 생성 장치와 금기 발생 장치를 설치한다. 장치들은 기존의 역할에 더해 이 작품의 장기 역할을 수행해, 뼈대 사이의 공간을 채워줘 내구성을 올린다.
장치들이 견고하게 설치되었다면 금속 뼈대에 룬 문자를 삽입한 뒤 모형에 집어넣는다. 이 룬 문자를 통해 이 작품은 미약한 지성을 얻게 되며 그 결과 이 작품은 단순한 관객과 연구원, 침입자를 구분할 수 있고6 상황이 변화했을 때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있게끔 한다.
이후 깃털 모양 금속에 룬 문자를 삽입한 뒤 까마귀 모형에 장식해준다. 여기서 삽입된 룬 문자는 두 가지 역할을 하는데, 첫번째는 이 깃털 금속이 까마귀 모형의 움직임에 맞춰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데, 이를 통해 사람들이 이 깃털 금속이 마치 원래 깃털 같다고 여길 것이다. 두번째는 이 작품을 본 사람들이 이 작품을 보았을 때 상당히 우아하면서도 친근감 있다고 생각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이 작품과 소통을 하거나, 이 작품이 만드는 패턴에 흥미를 느끼게 된다. 이 때 이 호감정은 결코 다른 작품에 대한 비하로 이어지지 않아야 하며, 오히려 변칙 예술 자체에 우호적인 감정을 느끼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이 작품이 전시될 위치가 정해지면 설치할 받침대 또한 작업한다. 이 작업을 먼저 하지 않는 이유는 전시 위치에 따라 받침대의 크기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받침대는 이 작품이 기본적으로 서 있을 금속 재질 횟대와 금속 조각을 펼쳐 놓을 나무 책상으로 구성된다. 또한 이 받침대에는 이 전동기는 이 작품이 창작 활동을 열심히 해 금속 조각이 모자랄 경우, 혹은 금기 발생 장치에서 차단하지 못한 위해한 패턴을 생성할 경우 패턴을 분해해 금속 조각을 원래의 재료로 환원하는 역할을 해줄 것이다.
의도: 이 작품은 변칙예술학부에, 나아가 변칙예술 그 자체에 보내는 하나의 응원이다. 모든 변칙예술가들은 장막을 해치는 테러리스트들이며 격리 대상이라는 재단 내의 고정관념, 그리고 재단하고는 절대 손을 잡을 수 없다는 변칙 예술가 내의 고정관념을 벗어나 한 걸음씩 같이 움직이려는 발자국에 보내는 찬사다. 그리고 이곳에 격리되면서, 이곳에서 활동하면서 새로이 적어내리는 예술에 대한 한 줄의 문구다.
예전에 어떤 시를 읽었던 적이 있었다. 갈까마귀라는 시인데, 에드거 앨런 포라는 한 거장이 쓴 작품이다. 그 시에서는 한 마리의 갈까마귀가 소중한 사람을 잃고 절망한 사람에게 외친다. '영영 없으리'라고. 그 새가 자신이 외치는 말의 의미를 알았을까? 그것은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그 갈까마귀가 시의 화자에게 비탄을 남겼고, 그 깃털처럼 검은 어둠이 독자까지 사로잡았다는 것이다. 나중에 알기로는 그 제목은 사실 오역이고 원제는 The Raven(도래까마귀)라고 했지만, 그 뒤로도 내 머리 속 그 새의 이미지는 특별히 달라지지 않았다. 그게 갈까마귀든 도래까마귀든 까치든 무엇이 상관 있을까. 중요한 것은 시의 화자가 '영영 없으리'라는 말 속에 갇히면서, 그리고 사람들이 그 시를 읽으면서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인데.
그렇다. 비단 그 시 뿐만이 아니라, 모든 예술들이 그렇다. 예술 전체가 그렇다. 사람들이 이야기를 전하는 과정에서 그 내용이 약간 변할 수도 있다. 명확한 이미지가 있는 그림 또한 다시 그렸을 때 달라질 수 있다. 영화 같은 것도 리메이크하면서 내용이 변할 수 있다. 하지만 주제가 바뀌지 않는다면,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말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 정도 변주는 허용할 수 있지 않을까. 오히려 명확하게 '여기서 갈까마귀가 나오면 이상하다, 시에서 나오는 것은 도래까마귀여야 한다'라는 생각이 고정되었으면, 그 시를 즐길 수 있을까? '영영 없으리.'
굳이 내용 뿐만이 아니다. 사람의 생각 또한 마찬가지다. 가장 중요한 가치를 잊은 채 한 가지 생각에만 고정된다면 결국 아무 것도 즐길 수 없다.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과거 나는 '심령체를 잡아서 예술 활동을 한다.'에 집착하곤 했다. 어렸을 때 심령체들에게 유괴당했다던가, 조요와 마찰이 있었다던가, 하는 핑계를 대면서. 하지만 세상의 모든 심령체들이 폭력적이거나 사악한 것만은 아니잖은가. 심야클럽 같이 온건한 심령체들도 많은데, 나는 그들마저 단순히 '심령체는 배제 대상'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래서야 그토록 내가 비판하던 속칭 '사람 잡는' 예술가와 무엇이 다른가. 결국 예술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심령체를 잡니 마니가 아니라, 사람들을 즐겁게 한다는 것인데.
지금도 내 작품은 심령질을 소재로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부산물에 불과하다. 더 이상 그 때처럼 무작정 갈아버릴 생각은 없다. 나는 그렇기에 이 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예술의 목적은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그것을 내가 만약 알지 못했다면, 지금처럼 나의 마음에 안식이 올 수 있었을까? 내가 예술가로서 긍지를 느낄 수 있었을까? '영영 없으리.'
마지막으로, 갈까마귀와 연관된(이번에는 오역이 아닌) 우화를 인용해보고자 한다.7 이 우화를 통해 내가 의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가 이 작품에 깃털 장식을 단 것에 어떠한 악감정이 없다는 것과 내가 이 작품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를 생각하면서 다시금 이 우화를 읽어주었으면 한다.
새들의 왕을 정하기로 마음먹은 제우스는 새들을 소집해 가장 아름다운 새를 왕으로 뽑기로 했다.
새들은 몸을 씻기 위해 가까운 시냇물로 날아갔다.
갈까마귀는 자신의 모습이 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새들이 떨어뜨리고 간 깃털 중 아름다운 것을 골라 몸에 붙였다.
그렇게 갈까마귀는 가장 아름다운 새가 될 수 있었다.
Written by Mt.Sea a.k.a. SCP-811-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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