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 한 마리
“싫어요.”
시호가 퉁명스레 말했다. 소매 밖으로 삐져나온 뱀도 동조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운전석에 앉은 남자는 일부러 핸들에서 손을 때고 어깨를 으쓱했다.
“네가 싫다고 해도 별 수 없잖아. 단장님이 그렇게 결정하셨다는 걸.”
“그 양복쟁이들을 저희가 뭘 믿고요? 괜히 시비 걸어서 작품만 안 가져가면 다행일걸요.”
“그래도 재단이 최소한의 안전장치라는 데 어떡해. 수습할 수 없는 사고라도 나면 다른 사람이 수습해야지.”
“그래도 인정 못해요. 남의 손 빌려가면서까지 공연하긴 싫어요.”
“그 쪽에서도 우리 편의를 많이 봐줄 거야. 조금만 참자고.”
“됐네요.”
시호는 몸을 의자 뒤로 묻었다. 아예 의자까지 뒤로 젖히고 싶었지만, 머릿속이 복잡해서 그렇게까지 하기가 귀찮았다. 재단이 우리 쪽 일을 뒷수습해주는 건 맞지만, 이렇게까지 깊숙하게 들어올지는 몰랐다.
남에게 감시받으려고 공연하는게 아닌데……
시호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뾰족한 방법이 안 나오자 짜증만 더 나왔다. 안전벨트가 허락하는 한에서 몸을 휘둘러 심통만 부렸다. 그러자 소매의 뱀이 놀라 튀어나와 무릎에 똬리를 틀고 시호를 올려다봤다. 시호는 괜히 미안해져서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다 한 가지 재밌는 게 생각났다.
“재단은 저희가 이번에 참여하는 걸 모르죠?”
“그러겠지? 우리 첫 공연이잖아. 왜? 뱀으로 놀래주게?”
시호는 그냥 웃었다.
“진짜 그거야?”
가면 하나
“이번 ‘떡갈나무의 날’에 파견되는 모든 외무부 현장 요원들 주목!”
출동을 기다리던 요원들이 모두 고개를 들었다. 언제나 봐도 익숙치않은 모습의 외무부장이 이들을 내려다봤다. 옷차림은 평소와 달리 격식은 있지만 한결 가벼운 사복이었다. 요원들과 같은 복장이었다.
“이걸 휴가라던가 아니면 문화생활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있을 텐데, 뭐 부정을 안 할게. 근데 이게 ‘잠복 임무’라는 건 기억해둬. 그냥 감상만 하지 말고, 위험한 게 뭐가 있을지, 사건 터지면 어떻게 대응할지, 전부 생각해두라고. 그리고 사전에 알려진 바 없는 괴랄한 게 있으면, 바로 가서 조사해.”
외무부장은 요원들을 죽 둘러봤다. 몇 명의 얼굴이 굳어지는 게 보였다.
“이번에는 나도 작전에 참여하니까 땡땡이 칠 생각 말고.”
이젠 모두의 얼굴이 굳어졌다.
뱀 한 마리
콰광!
굉음과 함께 나무 한 그루가 천막을 찢고 솟아올랐다. 덕분에 천막을 5번이나 교체해야 했는데도 시호는 멈추지 않았다. 커튼콜이 끝나고, 관객들은 이번에도 마지막 장면에서 받은 압도감을 얘기하며 천막 밖으로 나갔다. 시호는 무대에 부루퉁하게 앉아 있었다. 마지막 공연까지 최대의 사고를 쳐보잔 마음으로 천막을 뚫었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마지막인데도 없어?”
무대 담당자가 떡갈나무 크기를 줄이면서 말했다.
“뱀들 말로는 다들 경외심이나 놀라움이나 재미 정도만 느꼈데요. 걱정이나 경계심을 느낀 사람은 없다네요.”
“뭐, 그 사람들도 감시만 하지, 다른 관객들하고 똑같은 거 아닐까?”
시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거면 또 그거 나름대로 불만이었다. 준비를 했는데 받아주지 않은 숙제나 프러포즈 같았다. 아무도 관심이 없는데도 혼자만 덩그러니 날뛰는 격이었다.
“공연 끝났는데요.”
갈라진 무대를 고치던 무대 담당자의 소리가 들렸다. 시호가 고개를 들어보니 관객석 저 구석에 남자 한 명이 앉아있었다. 남자는 무대 위에 부루퉁하게 앉아 있는 시호를 향해 은은한 미소를 보였다.
시호는 남자를 보고 벌떡 일어났다. 공연에 너무 집중해서 알아채지 못했나 보다.
“류! 자기야!”
용케도 찾아왔구나.
“안녕, 시호?”
무희 한 명
이것은 전날 밤의 이야기.
아가씨 앞에는 덩어리진 그림자가 있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보면 아무것도 구별이 가지 않으니, 무엇인지는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아가씨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그림자에 불을 밝혀 단순한 그림자 이상의 것을 보여줄 무언가를요.
아가씨 옆에 구멍 하나가 열리고, 조끼 입은 토끼가 거기에서 기어나왔습니다. 토끼는 아가씨에게 기다란 전선을 넘겨줬습니다. 아가씨는 그걸 그림자에서 나온 검은 선에 연결했습니다.
그림자에서 화려한 불빛이 명멸하더니, 이윽고 원통 밑의 목마가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아가씨가 만든 회전목마가 숨결을 받아 감미로운 불빛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아가씨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토끼굴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토끼도 함께 뛰어들면서 토끼굴이 닫혔습니다. 전선도 함께 끊어졌고, 회전목마는 다시 어둠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내일 아침이 되면 어둠과 함께 사라졌다가, 아가씨의 말 한 마디에 빛으로 나와 돌아갈 것입니다.
내일 행진이 끝나면 말입니다.
가면 하나
격리불가는 축제를 즐기는 것처럼 턱을 쓰다듬으며 걸어다녔다. 아이들, 어른들, 남자와 여자, 연인들, 반려동물들, 동물 같은 인간과 인간 같은 동물들이 여기저기 섞여 다녔다.
가면은 쓰지 않았다. 요즘 뒷세계 사람들은 그 망할 가면에 대해 너무 많이 안다. 라는 게 요원들의 주장이었다. 상당히 아쉬워하며 들어오는 길에 버려두고 왔다. 누군가가 할로윈에 쓰지 않을까 기대하기로 했다.
몰래 귀에 꽂아둔 이어폰에 요원들의 각종 보고가 들어왔다. 대부분이 특별한 일이 없다는 말 뿐이었다. 길거리에서 파는 음식이나 오락거리에도 수상한 점이 없다는 말도 들려왔다. 확실히 아까 먹은 아이스크림에서 이상한 점은 없었다. 오락거리는 조금 더 조사가 필요했다. 장난감 트럼펫을 쓴 요원의 말투가 약간 우렁차졌다. 다른 요원들의 웃음소리를 뒤로 하고 상위 요원이 트럼펫을 압수하라 지시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곤 다들 그냥 축제를 즐기는지 보고가 뚝 끊겼다. 아니면 이제 보고할 거리가 없는 걸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축제는 슬슬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주변에 공연을 하는 천막이 눈에 보일 정도로 적어졌다. 앞으로 조금만 지나면 피날레가 시작할 것이다.
그러면 나도 드디어 축제를 즐겨볼까 생각한 순간에, 유난이 눈에 튀는 회전목마가 눈에 들어왔다.
뱀 한 마리
“이상과 현실 사이, 동작과 행동 사이에…”
“…그림자가 진다.”
상인은 작은 냉장고에서 와플을 꺼냈다. 생크림에 초코 가루가 뿌려진 가장 이상적인 와플이었다. 칼로리를 묻는 류의 말에 조용히 가운데 손가락을 내밀었다.
이젠 류의 차례였지만 상인은 시호를 쳐다볼 때보다 더 오랫동안 류를 쳐다봤다. 아무래도 떠오르는 시가 없는 모양이었다. 둘이 슬슬 지루함을 느끼려던 순간, 상인이 입을 열었다.
“하늘에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상인은 작은 냉장고에서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꺼냈다. 마치 눈과 같은 질감의 하얀 아이스크림이 콘 위에 있었다. 상인은 안에서 토끼 모양 쿠키도 꺼내 아이스크림 위에 꽂아주었다.
“서비스일세. 아가씨를 잘 부탁하네.”
“명심하겠습니다.”
둘은 피식거리는 웃음을 참고 상점을 나왔다. 와플의 달달함은 최고였다. 류는 음미하듯이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녹아서 손에 묻자 핥아먹는 정성도 들였다. 그렇게 축제 중앙을 손잡고 산책하면서 이제까지 있었던 근황을 풀었다. 물론 아까 부루퉁하게 있었던 이유, 재단에 대한 불만까지 함께였다.
“언니 기술 빌려가지고 딱 구덩이에 넣으면, 우리 뱀들이 나와서 동맥 쪽을 앙하고 물어주는 거지.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을 때 구덩이 밖에서 다시는 떡갈나무를 건들지 말라고 말하는 거야. 영화에서 보면 주인공들이 많이 그렇게 하잖아.”
“보통 악당들이 많이 하지 않냐. 가끔씩 널 보면 너무 애 같다니깐.”
“애 같은 게 어때서! 원래 좋은 구절이란 유치함과 중2병에서 오는 거야.”
“그래 뭐, 반박이나 말린다고 해도 네가 들을 거 같지도 않으니까, 여기까지 할게. 나 아니면 너 누가 만나줄까 싶다.”
“딱히 그런 사람 없어도 되거든요. 베에”
류는 그냥 웃어넘겼다. 옛날부터 말다툼은 이런 식으로 끝나왔다. 어쩌면 이런 관계가 오래 지속된 이유도 연인 같은 분위기에서 남매 같은 분위기가 얹혀서인지도 몰랐다. 시호가 이런 생각을 하던 때에 류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회전목마다!”
시호가 고개를 돌려보자 눈에 안 띄는 곳에 정말로 회전목마가 있었다. 어떤 장식도 없는 두 원통에 분홍색 말이 달린 봉이 끼워져 돌고 있었다. 관리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외형을 보고 오는 사람도 별로 없어 질서는 잘 잡혔다.
“웬 회전목마?”
“이번에 이거 가져온 사람 있어?”
“내 기억 상엔 없는데…”
둘은 회전목마에 다가갔다. 총 세 개 있는 목마는 한 자리를 남겨놓고 돌아갔다. 아이 한 명이 목마에 타있었고, 아이의 부모는 밖에서 아이의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다. 다른 하나에는 청년이 타있었다. 부끄러워하는 청년을 밖에 있는 다른 남자가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다. 뭔가 이질적인 조합이었다.
둘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가 류가 입을 열었다.
“타볼래? 사진 찍어줄게.”
시호는 거절하려고 류를 올려다봤지만, 류의 미소에 그만 넘어가버렸다. 시호가 목마에 다가가자, 목마는 잠시 멈추고 시호가 올라가도록 높이를 낮춰줬다. 시호는 목마에 올라타 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목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목마가 돌아가는 동안 시호는 사진에 잘 나오게 포즈를 취했다. 그리고 목마가 한 바퀴를 도는 순간,
목마 아래쪽에 구멍이 생기고 시호가 탄 목마는 그대로 추락했다.
무희 한 명
털썩 소리와 함께 아가씨는 동화에서 나와 이호가 되었다.
이호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캠핑카 운전석에서 밖으로 나갔다. 동시에 조끼를 입은 토끼도 뒷칸에서 내렸다. 토끼는 이호에게 누군가 떨어지긴 했으니 남자가 아닌 여자라고 말했다. 이호는 자기도 느낄 정도로 얼굴을 찌푸렸다.
“뭐, 연인이나 그런 게 아닐까? 대충 인질로 잡을 정도는 되겠지. 그러면 어찌 됐든 알아서 여기까지 오겠구만.”
이호는 그렇게 말하면 캠핑카의 뒷칸에 올라탔다. 바닥에는 충격을 덜어줄 매트리스가 쫙 깔려있었고, 천장에는 토끼굴이 뻥하니 뚫려있었다. 매트리스 위에는 놀라서 정신을 잃은 여자 한 명이 쓰러져 있었다.
이호는 일단 토끼굴을 닫았다. 그리곤 여자에게 다가가 얼굴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옆으로 넘겼다. 캠핑카 안이 어두워서 그런지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이호는 일단 여자를 깨우기 위해 발로 툭툭 건드렸다.
익숙한 감각이었다.
이호는 이 느낌에 당황하며 이번엔 볼을 쭉 꼬집었다. 역시나 익숙한 감각이었다.
이호는 더욱더 당황해서 주머니에 있던 펜라이트로 여자의 얼굴을 비춰봤다. 순간 여자도 고통과 빛을 느끼곤 눈을 떴다. 비슷하게 생긴 두 얼굴이 서로를 마주봤다.
“시호!?”
“언, 언니?”
뱀과 함께 춤추는 무희
시호는 술집 ‘개척자’에 앉아 코코아를 홀짝거렸다. 갑자기 왜 여기로 왔는지는 별로 문제될 거 없었다. 오히려 언니가 어떻게 여길 알고 있는지, 여기서 뭘 하는지가 제일 걱정되었다. 20년이 넘었어도 언니 속은 알 수가 없었다.
이호는 아무도 없는 바에서 생맥주를 뽑아 마셨다. 푸른 패딩과 하늘색 귀마개가 잘 어울렸다. 방한 조끼를 입은 토끼는 뭘 보냐는 듯 당근 주스를 홀짝였다.
“그래서, 여기엔 왜 나타났어?” 몸이 좀 녹은 시호가 물었다.
“이번 떡갈나무 날에는 재단 사람들이 온다고 소식을 들었거든. 마침 해결해야할 일이 있어서 이렇게 강제로라도 부르려고 했지. 엉뚱한 사람이 걸렸지만.”
“뭘 하려고 그 인간들을 부르려고 해?”
“흠, 넌 보여줘도 되겠다. 따라와 봐.”
이호는 카운터 옆의 작은 비밀의 문을 열었다. 문은 지하로 통했다. 마치 비밀 집단의 비밀 기지처럼 생긴 계단의 끝에는 평범한 술 창고로 이어졌다.
시호는 평범한 창고이지 않냐고 불평하려고 했지만, 이호의 심각한 표정에 입을 다물었다. 이호는 표정을 유지하면서 술 창고를 조심스레 열었다.
안에 술은 없었다. 애초에 술 창고로 보이지 않았다. 내부는 온통 빨간 벽지로 칠해진데다 빨강색 블록으로 가득 차있었다. 블록에는 위험을 알리는 느낌표가 크게 그려져 있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분위기상 위험하다는 것을 본능에서부터 알려주고자 한 디자인인 듯싶었다.
“뭐야, 이거?”
“자세히는 모르겠는데, 검사 결과 화약 성분이 나왔어. 그러니까 아무튼 위험할 가능성이 높은 거지.”
“에? 이건 언제 찾았어?”
“지난 주 쯤? 너 첫 공연이라고 해서, 어떻게 준비되어가나 자주 들려서 확인했지. 근데 언제부턴가 이런 게 있더라고. 바텐더도 이게 뭔지 몰라. 그래서 뭐, 일단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인간들 불러오려고 했지. 이번에 오는 인간이 회전목마 같은 거 보면 환장한다는 말도 들었거든.”
“왜 단장한테 말 안하고?”
“개척자들은 어디서 행진 시작하라고? 안 그래도 찾기 힘든 사람들 겨우겨우 모이는 데가 여긴데. 이거 때문에 진행이 제대로 안되면 너 첫 공연은 제대로 진행이 될 거 같아?”
시호는 뭔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입을 삐죽 내밀면서 그만뒀다. 이호는 그런 시호를 보다가 양 볼을 잡아당겼다. 시호는 팔을 떼려고 약간 버둥대다가 이호의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살짝 비명을 질렀다. 이호는 잠깐 키득대다가 설명을 계속했다.
“근데 지금 네가 와서 살짝 큰일난거지. 이게 아마 피날레 시작 직전에 여기 공간 자체가 행사장 중앙으로 이동해 터지게 설계가 되어있거든. 폭탄 테러인 거지 한 마디로. 터질 때까지 앞으로… 삼십 분도 안 남았네. 코코아주면서 여유부리지 말 걸 그랬나.”
시호의 얼굴이 그제서야 굳어졌다. 시호는 이호의 양 팔을 잡았다.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이렇게나 크게 커질 일일 줄은 몰랐었다. 말을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지만 눈으로는 그럼 어떻게 하냐는 눈빛을 이호에게 보냈다.
이호는 어깨를 토닥여주며 빠르게 다독였다.
“괜찮아. 네가 떨어졌으니까, 이젠 그 양반들이 오겠지. 그러면 아슬아슬하게나마 막을 수 있을걸. 그리고 아직 시간은 있잖아. 빨리 가서 사람들을 대피시키면 돼. 알겠지?”
시호는 고개를 끄덕이고 계단을 빠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호는 다시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하나 하고 고민 모드로 들어갔다.
시호가 문을 열자마자 본 건 카운터 위에 널부러진 토끼였다. 순간 당근에 알코올 성분이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먼저 떠올랐고, 0.1초 만에 지워버렸다. 하지만 그 정도로도 충분한 빈틈이 생겨났다.
옆구리에 스파크 소리와 함께 격통이 느껴졌다. 옆을 돌아볼 새도 없이 시호는 멀어지는 의식과 함께 쓰러졌다. 구두처럼 생긴 검은색 운동화가 이호가 있는 통로로 들어갔다. 시호는 마지막 의식을 붙잡아 소매의 뱀을 풀었다.
무희 한 명?
방안들을 하나씩 지워나갈 때, 뒤쪽에서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벌서 갔다 올리는 없었다. 나간 지 10초도 안 걸렸으니까. 시호가 축지법이나 시간 정지 같은 걸 배웠을 리도 없다. 이호가 들은 바로는 시호는 거기에 재능이 없었다.
그러면 답이 뭔지는 자기가 잘 알았다. 애초에 회전목마의 목적이 그거였으니까.
이호는 뒤를 돌아봤다. 눈이 없는 가면을 쓴 남자가 능글맞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발에 흰 뱀이 감긴 채로.
“어머 시발.”
가면을 쓴 무희
“함정을 은근 대놓고 팠네. 덕분에 찾느라 애 좀 썼어.”
“동생은 어쨌지?”
“걱정하지 마쇼. 얌전하게 기절시켜놨으니까.”
“동생이 기절한 채 낯선 사람에게 맡겨진다면 언니로선 걱정해야겠는걸.”
“그것도 걱정하지 말고. 나 혼자 왔으니까.”
“더 걱정되잖아. 얼어 죽으면 어쩌려고.”
“정 걱정되면 나가서 봐보시던지. 난 여기만 정리하면 되니까.”
“혼자서? 팀으로 오면 모를까 혼자서는 무리일걸.”
“나도 꽤 다재다능한데…”
“내가 모든 수를 동원해봤지만 대략적인 내용물, 이동 시각, 이동 장소, 아아주 대략적인 메커니즘 밖에 못 알아냈어. 테러범에 대한 단서도 전혀 없고. 이제 뭘 어떻게 할 건데?”
“어, 소닉 스크류 드라이버?”
“죽는다, 진짜.”
“나 한 명에게도 기대하는 게 없으면 도대체 함정은 왜 설치한건데? 애초에 그런데에 낚일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널 인질로 잡아서 너희 팀보고 해체하라고 하려 했지.”
“이 집안 여자들은 인질 잡는 거 밖에 모르나?”
“협박은 최고의 협상 수단이라고 배웠거든.”
“대단한 가훈이야. 당신이 내 누나가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고.”
둘은 서로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이내 격리불가 쪽에서 먼저 꼬리를 내렸다. 입술 사이로 피식 소리를 내면서 격리불가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이호의 옆을 지나갔다.
“아무튼 혼자서라도 해결하러 왔으니 좀 비키시지. 동생도 확인해야할 거 아니야.”
이호는 짜증이 찬 눈으로 바라보다 발걸음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 계단을 올라갔다. 괜히 불렀나하고 후회도 됐다. 나가는 문은 닫혀있었다. 들어온 놈 상태를 보니 이런 것도 짜증이 났다.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대려는 순간, 강한 전류가 나와 손가락을 치고, 곧 이호의 온몸을 마비시켰다.
“정전기 조심하고!”
이호가 ‘시발’의 ㅅ이 나오다가 멈춘 입술과 함께 계단으로 굴러떨어지려던 순간, 격리불가가 이호를 낚아챘다. 그리곤 문에 몸을 부딪쳐 열고, 반대편 문고리에 최고 출력으로 설치되었던 전기충격기를 제거했다.
격리불가는 이호를 끌고 갔다. 카운터를 나갈 때는 다른 손에 시호를 함께 쥐고 있었다. 그렇게 자매를 질질 끌고 떡갈나무를 향한 문으로 다가갔다.
이호는 속으로 시간이 얼마나 됐는지 세 봤다.
십 분? 빠르면 십 초도 안 남았을 거다.
뻔한 입버릇으로 말하자면, 좆됐다.
떡갈나무 한 그루
모든 사람이 한 곳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은 공연을 하기 위해, 어떤 사람은 공연을 구경하기 위해, 어떤 사람은 공연을 축하하기 위해 가는 중이었다. 약간 긴장한 단원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얼굴에 웃음을 띠고 있었다.
순간, 공중에서 붉은색 상자가 나타났다. 민감한 누군가가 먼저 알아챘고, 세 사람이 공중을 보자 다른 사람들도 공중을 올려다보았다. 상자는 떨어지지 않았다. 그저 공중에 빙글빙글 돌고만 있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관객은 누가 만든 작품인지 궁금해했다. 단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관객보다 더 불안해할 뿐이었다.
상자는 더욱더 빨리 회전했다. 마치 원통처럼 보일 정도였다. 돌고돌고 또 돌다가, 상자는 마침내 중간부터가 부풀어 올랐다. 사람들의 얼굴이 슬슬 심상치 않아질 찰나, 그 중앙으로부터 붉은색이 터져 나왔다.
불꽃은 일곱 갈래로 갈라졌다. 터질 때 붉은색이었던 불꽃은 끝으로 가면서 검은색, 노란색, 푸른색 등으로 달라졌다. 그러다가 모두가 동시에 우회전을 하고 거대한 원으로 돌았다. 서로가 서로의 꼬리를 잡아 거대한 원이 되었을 때, 불꽃의 머리에서 불꽃놀이처럼 솟구쳤다.
‘처럼’은 잘못된 표현이었다. 저건 확실히 불꽃놀이었다.
솟구친 불꽃들은 형태와 함께 터졌다. 각 가지의 이름이 불꽃놀이에 새겨졌다. 그 황홀경 아래서 모든 사람들이 넋을 놓고 바라만 봤다.
메인을 즐기기 전의 에피타이저처럼.
뱀 한 마리
깨어날 때 볼에 느끼던 감촉은 언니의 손길도, 차가운 바닥도 아니었다. 누군가의 무릎께였다. 눈을 떠보니 류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으응… 언니는?”
“신음하는 거 꼭 고양이 같네.”
“언니는?”
“언니가 나한테 데려다주고 갔어. 술집에 쓰러져있었다고. 과음한거야?”
“그랬나… 언니라면 코코아에 브랜디 정도는 탈 수 있지. 그럼.”
펑! 큰 소리가 저 멀리서 났다. 시호는 깜짝 놀라 고개를 소리가 난 쪽으로 돌렸다. 다행이 폭격의 아비규환의 현장이 아니었다. 형형색색의 폭죽으로 알리는 피날레의 시작이었다.
언니가 잘 처리한 걸까? 언니에게 저런 센스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재단이 온 걸까? 거긴 언니보다 센스가 없는데 그럴 리가.
이런 잡생각들은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류의 손에 씻겨 나갔다. 어떻게든 다들 즐기고 있으니, 아무래도 좋겠지.
“뭐, 그렇게 된 걸까?”
“뭐, 그런거지.So it goes”
서로 짧게만 말하고 불꽃놀이 아래서 서로의 머리와 손을 느꼈다. 폭죽소리가 요란했지만, 왜인지 이 순간만은 조용한 느낌이었다.
“예쁘네.”
“예쁘다.”
떡갈나무 아래 가면을 쓴 무희
단장과 격리불가와 이호가 한 천막아래 모였다. 개인적인 일이었기에 다른 요원들은 돌려보냈다. 이호는 제3자였지만 일이 있어서 오게 됐다. 혼자가 아니라 범죄자를 연행하는 경찰처럼 등장하자 단장은 당황한 눈치였다.
“얘기를 시작하기 전에, 이분은 왜 데리고 온 겁니까?”
“좀 풀어야 할 오해가 생겼거든요.”
단장은 두 사람을 번갈아가면서 쳐다봤다. 그러다가 어쩔 수 없다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번 피날레 전에 있었던 불꽃놀이, 그 쪽에서 기획했다는 얘기가 있던데.”
“정확히 말하면 저희 쪽은 아니고요. 제가 눈감아줬다고 해야죠.”
“그 쪽에서 상황도 봐줘?”
“여기저기서 많이 부딪치다 보면 연줄이나 정보원 같은 게 필요하거든. 불꽃놀이는 그 정보원 중 한 명의 작품이야.”
“겨우 그런 이유만으로?”
“겨우 그거라뇨. 녀석 덕분에 성공적으로 끝낸 임무가 몇 갠데요. 아, 개중에는 그쪽 뒤처리와 관련된 임무도 있었고요. 개인적인 이벤트라고,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고 계속 부탁을 해서.”
이호는 헛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나도 낭만적인 이유였다.
“언제부터 준비한 겁니까?”
“한 달 전부터일까요. 보다 안정적인 이동을 위해 이동 거점 장소를 살짝 빌렸죠. 사적으로 찾아가서 점검도 하고 도움도 주고 했습니다. 누가 함부로 들어오지 않게 ‘위험’ 표지를 덕지덕지 발라놓자고 한 건 제 아이디어였죠.”
단장은 참 그답다며 팔짱을 끼었다. 격리불가는 아무렇지 않게 미소만 지었다. 이호는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푹 숙였다.
“대충 할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돌아가면 단장님이 준비한 행사라고 구라 좀 칠까 하는데 괜찮은가요? 괜찮다고요?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여기 옆에 계신 여성분이 진짜 폭탄인 줄 알고 터지기 전에 막으려고 했다네요. 동생이 떡갈나무 출신이라서 폭탄 테러에 휘말릴까봐 걱정이 되었다면서요. 참 눈물나는 자매애에요.”
단장은 당당해하는 외무부장과 부끄러워하는 예술가를 바라봤다. 그러다가 피식 웃으며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예술가는 상당히 낭만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군요. 근데 낭만은 역경이 있어야 낭만이 아니겠습니까. 일사천리로 진행되면 재미가 없지요. 오늘 터질 때까진 꽤나 즐기셨지 않았나요?”
“그걸 어떻게 알아요?”
“당신 미소가 그렇게 만족스럽게 보였던 적은 없었거든요.”
떡갈나무 그늘을 벗어나는 가면 쓴 무희
둘은 천막 밖으로 나섰다. 밤이 꽤 깊었다. 이호는 안에서의 부끄러운 표정 대신 담담한 얼굴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제 솔직히 말해보자.”
이호가 말했다. 격리불가는 가려던 걸음을 멈추고 이호를 향해 돌아봤다.
“뭐를?”
“내가 만든 함정 말이야. 그거 널 잡으려고 만든 거거든. 회전목마의 봉이 네 유전자를 인식하면 그대로 떨어지도록 설계를 해놨단 말이야.”
“그런데?”
“문제는 내가 인식 범위를 좀 민감하게 설정을 해놔서. 네 유전자가 남아있는 인간이 타도 떨어지게 해놨거든. 그러니까 네 유전자가 묻은 무고한 인간이 떨어질 수 있다는 거지, 오늘처럼.”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
“얼마나 예민하게 설정해놨냐면, 손만 잡아도 그걸 감지해낼 수 있어. 그러니까, 내 동생이 떨어졌다는 건 대충 너랑 손을 잡고 다녔다는 말이겠지. 근데 네가 걔하고 손을 잡을 경우의 수가 많진 않단 말이지.”
격리불가는 입꼬리를 더 길게 늘렸다.
“개인적인 이벤트란 얘기도 그래, 예술가가 뭐가 아쉬워서 이런 때를 노려서 이벤트를 해? 보통 이런 건 평소에 못 만나는 연인이 할 정도의 스케일이라고. 그래서 말인데, 너 설마…”
그의 표정은 마치 자기들 사이에 끼어들지 말라는 연인의 그것이었다.
“난 인정 못한다.”
이호의 짜증 섞인 불평에도 격리불가는 아무렇지 않게 작별인사를 하며 저 너머로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