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가느니라 못가느니라 나를 죽여 이 자리에다 묻고가면 니가 세상을 가지마는 살려두고는 못가느니라 주부야 위방 불입(危邦不入)이니 가지를 마라
-판소리 ‘수궁가’ 中-
사제는 자신의 사제복을 붙잡는 거지의 손을 뿌리쳤다. 그의 뒤를 따르던 신도 둘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거지와 사제를 번갈아가면서 쳐다봤다. 그에 반해 사제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산을 향해 걸어갔다.
“사제님 괜찮으십니까?”
“쓸데없는 부랑자가 한 말입니다. 신경 쓸 거 없습니다.”
“하지만 아 마을에 이제까지 거지가 온 적은 없었습니다. 뭔가 불길한 기운이 듭니다만,”
사제가 표독스러운 눈으로 신도를 쏘아봤다. 신도는 순간 숨을 멈췄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실언을……”
“됐습니다. 빨리 가서 성물이나 찾아오도록 하죠.”
사제는 기계로 된 몸을 이끌고 산으로 올라갔다. 신도들도 기계로 대체된 다리를 가지고 그를 따라갔다.
산 속에는 작은 오두막이 있었다. 지어진지 얼마 안 된 듯, 투박한 느낌이 강했다. 그 오두막 안에 한 남자가 조용히 차를 끓였다.
남자는 자신이 이곳으로 도망치기 전의 마을을 생각했다.
매우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한 때 마을 사람들은 자신을 도술을 부리는 자라 하여 존경하였고, 남자도 그런 대우에 합당한 보상을 주었다. 마을과 나라를 구한 적도 있었다. 남자는 그걸 가지고 우쭐해하지도 않았으며, 사람들 위로 군림하지 않았다. 남자에겐 그저 시골의 평범한 도사로 남고 싶은 소박한 욕망만이 있을 뿐이었다.
사람들이 그를 위한 사당을 지었을 때, 그는 스스로 사당을 지키는 관리인이 되어 마을과 함께했다. 그리고 마침내 사람들이 그를 잊었을 때, 그는 이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들이 오기 전까진.
부서진 신들의 교단. 광기에 휩싸인 그들은 남자를 잊은 마을에서 그의 위치를 손쉽게 차지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광기는 곧 파괴로 이어졌다.
남자는 자신의 행동에 후회할 날이 오리라곤 생각치 못했다.
처음 몇 주일간 사제가 사람들 앞에서 연설했다. 그는 자신을 우러러보는 사람들에게 금속 몸을 보여주면서 사람들을 꼬드겼다.
막았어야 했다.
몇 주 뒤, 열 명의 사람들이 사제를 따라 교회로 걸어갔다.
말렸어야 했다.
의족과 의수를 단 채 멍한 표정으로 귀가한 사람은 세 명 뿐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말리지 않았다. 그것이 오랫동안 마을을 지키는 데 자기가 만든 나름의 규칙이었다.
이후로도 사제를 따라 걸어가는 사람은 열 명이었다. 돌아오는 사람은 점차 늘어갔지만, 결코 열 명을 채우고 돌아오지는 않았다.
결국 남자는 말렸다. 하지만 사제에 눈이 먼 사람들은 볼품없는 관리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남자는 그 순간 사제와 사람들의 눈에서 광기라는 것을 보았다.
어느 날, 사제가 사람들을 데리러 가는 걸 말리려는 순간, 남자는 한 사람이 자신을 수상하게 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렇게 늙지는 않았지만, 마을에서 나름 오래 산 취급을 받는 노인이었다. 남자가 회유를 포기하고 사당에 들어갈 때, 남자는 그 노인이 사제의 귀에 속삭이는 걸 보았다.
무슨 말은 했는지는 명백했다.
남자는 그냥 내버려 두자는 자신의 신념을 깨보기로 했다.
불길이 치솟았다.
남자는 광경을 멀리서 지켜봤다. 자신의 사당이 불타고 있었다. 잊혀진 자의 숭배는 무의미하다는 걸 그들은 굳이 보여주고 있었다.
남자는 그저 허탈하게 바라봤다. 어차피 원하지 않던 상이었다. 오히려 사람들이 잊었을 때 더 편안하게 생활한 곳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저들의 광기어린 눈빛을 보라. 그리고 저 광기에 찬 목소리를 들으라.
“그 영원히 산다던 관리인을 찾아!”
그저 살아가기만 하면 되었던 남자의 눈에 처음으로 어떠한 열기가 생겼다.
사제와 신도들은 산 속에 있는 작은 오두막집으로 다가갔다. 언제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겉모습은 꽤나 산뜻한 집이었다. 문에는 부적이 하나 붙어있었다. 사제는 코웃음치며 부적을 떼고 들어갔다.
안에 들어가자 차를 끓이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중앙에 있는 탁자에는 그가 훔쳐간 성물이 똑닥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사제와 신도는 의자에 앉았다. 남자는 여전히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사제가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헛기침을 했지만, 남자는 아무 반응도 없이 찻잔에 차를 따르기만 했다. 보다 못한 신도가 성물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함부로 건드리지 말게, 훔쳐갈 생각은 더더욱 하지 말고. 자네들은 협상하러 왔지, 도둑질하러 온 게 아니지 않나.” 뒤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남자가 말했다.
“협상이라니? 우린 도둑맞은 걸 돌려받으러 온 주인이자, 당신의 죄를 심판하러 온 판사야.”
“하, 나를 심판한다니. 내가 이 신의 아킬레스건을 훔칠 때 쓴 잔재주를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나봐?” 남자는 뒤로 돌아 사제와 신도들에게 차를 주었다. 하지만 그들은 찻잔에 손도 대지 않았다.
“오, 이러지 마. 독이나 그런 건 안 탔어. 그러면 솔직히 재미가 없잖아? 아니면, 그 때를 생각하고 계시나?”
신도 둘은 몸을 움츠렸다. 그 둘은 남자의 말대로 그 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들 때문에 죽은 이들이 걸어오는 걸 보고 느낀 공포, 그 무력감, 성물이 사라지고 난 뒤에 자기 몸에 붙은 밀짚 인형을 보고 느낀 허탈감. 여기까지 올라오면서 느낀 불안감까지 남자의 찻잔을 보며 생각했었다.
하지만 사제는 약간 달랐다. 그는 남자를 어떻게 죽여야 할까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군, 자네는 날 죽일 생각을 하고 있어.”
“알고 있다니 다행이군. 내가 볼 때 넌 둘 중 하나야. 사기꾼이거나 이교도. 어느 쪽이든 넌 죽어야 해. 사기꾼이면 성물을 훔친 죄. 이교도라면 그 자체만으로도 죄지.”
“그래서 날 죽이시겠다?”
“그럼. 어떻게 죽일지 결정만 난다면.”
사제는 기계로 된 왼손을 들어보였다. 겉으로 보이는 고문 기구와 흉기만 몇 십 개는 되어보였다. 하지만 이 안에 몇 배는 더 많은 것들이 들어있다는 걸 신도들은 알았다.
“수술할 땐 여러 가지를 써야 해서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죽일 때는 하나만 쓰는 게 좀 깔끔해서 말이야. 미리 생각해보고 오는 건데.”
“그랬어야지. 지금도 좀 빨리 생각하는 게 좋을걸.”
남자는 차를 마시면서 의자 등받이에 여유롭게 기댔다. 사제는 미심쩍은 눈으로 남자를 쳐다봤다. 남자는 찻잔을 내려놓고, 손을 탁자에 올린 뒤 시제에게 몸을 기울였다.
“불가사리라고 들어봤나.”
쿵 소리와 함께 오두막이 한 차례 흔들렸다.
“고려 말기에 나타나 나라를 난리로 몰아넣은 짐승. 오직 금속만을 먹으며, 죽지 않기 때문에 ‘불가살이(不可殺伊)’란 이름이 붙었지만, 불에는 죽는다는 게 밝혀져 결국 죽어 없어진 괴물이지.”
진동이 점점 더 커져갔고, 신도들은 문을 향해 도망쳤지만 그곳에는 문의 모습을 한 그림만이 그려져 있었다. 사제는 그들을 보며 분노가 서린 표정으로 말했다.
“그걸 왜 말해주는 거지?”
“그거 아나, 그 중 하나는 진실이 아니라는 것. 녀석은 불에도 죽지 않아. 정확히 말하자면 신체는 파괴되지만 안에 파괴할 수 없는 정수 같은 게 남더군. 그걸 그대로 두니까 며칠이 지나니 살이 다시 붙어서 덤벼들었어. 그래서 내가 그 정수를 이 자리에 봉인했지. 지금 너희가 있는 이 자리에 말이야.”
“뭐?”
“인제 이해했나? 너희가 여기 들어올 때 뗀 부적이 그 괴물을 봉인하던 부적이었지. 녀석인 깨어나자마자 머리 위에 먹이를 두고 있는 셈이고.”
사제는 분노로 몸을 떨더니 그대로 왼손을 남자에게 꽂았다. 수술할 때처럼 피도 튀지 않은 깔끔한 처리였다. 손을 빼내도 피는 튀지 않고 남자의 몸에 조용히 흘러내렸다. 사제는 오른손으로 성물을 낚아챈 다음에 문 앞에서 망연하게 서있는 신도들에게 외쳤다.
“뭣들 하느냐, 문이 없다면 벽을 부셔!”
“이미 늦었다.”
남자의 목소리는 가슴이 뚫린 사람답지 않게 선명하고 침착했다.
“시끄러워!”
“아직도 모르나? 난 내 법을 어기기로 했다. 여기에 내가 길들였던 짐승을 풀어놓겠다. 이것이 나의 저주이자, 광신도의 최후다, 미치광이들아!”
벽이 부서지지 직전, 땅에서 괴물이 솟아올랐다. 사제의 발 바로 밑이었다. 그 여파로 사제와 사내는 위로 붕 떴다가 떨어졌다.
막 떨어진 사제의 눈에 보인 건 숨을 멈춘듯한 사내와 콧김을 내뿜는 괴물, 그리고 사라진 자신의 다리였다.
사제는 신도들을 보았다. 그들은 이미 도망친 후였다. 성물도 챙기지 않았다. 사제는 속으로 욕하며 기어서 달아나려 했다. 하지만 그의 등 위로 괴물의 발이 고장난 단두대처럼 서서히 내려왔다.
산을 내려온 신도들은 교회로 달려가면서 한 밀짚인형을 차고 지나갔다. 거지가 사제를 말리던 바로 그 장소였다.
짐승은 첫 끼를 마치고 고개를 들었다. 피 맛은 썩 유쾌한 맛이 아니었지만, 맛없지는 않았다.
이제 짐승은 무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산 속에는 먹이로 먹을 만한 금속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방금 도망간 녀석들, 그들의 발자국에서 금속 내음이 희미하게 남았다.
짐승은 금속 냄새를 추적했다. 그러자 저 멀리, 이질적인 분위기의 한 건물에서 강한 금속 냄새가 났다.
짐승은 만찬을 기대하며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