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직 민간인이었을 때, 그러니까 미신을 믿었을 때, 점을 치던 천막에 간 적이 있다. 분위기만 보면 탁자 위에 수정구슬이라도 있을 성 싶었다. 그때의 그 기묘한 안락함. 모처럼 잠에 들면서 그런 안락감을 느꼈다.
눈을 뜨니 온전한 어둠이 공간을 꽉 채우고 있었다. 이번엔 검은 천막인가.
조심스레 일어났다. 다행히도 중력은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중력마저 없었으면 미쳐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저 멀리서 이 공간과 이질적인 밝음이 보였다. 다가가니 고급스러운 탁자와 의자가 있었다. 탁자 위에는 다과세트도 함께 놓여있었다.
머뭇거리며 의자에 앉았다. 이젠 저 멀리서 이질적인 움직임이 보였다. 간단한 회색 양복과 중절모를 쓴 노인이 나가왔다. 나는 저 노인을 알았다.
"크리스토퍼" 노인이 말했다.
"990으로 불러 드릴까요?"
"마음대로 하게, 하지만 난 리처드란 이름이 더 맘에 든다네."
노인은 편안한 표정으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크리스토퍼는 불편한 얼굴로 찻잔에 손도 대지 않았다. 내려놓은 찻잔에 차는 빠르게 다시 차올랐고, 접시에 담긴 쿠키는 손에 쥐자마자 그자리에 다른 쿠키가 나타났다. 크리스토퍼는 쿠키를 깨작거리며 또 차 한 잔을 마시던 노인을 바라봤다.
"영 표정이 뚱하군 그래" 찻잔을 내려놓은 노인이 말했다.
"상황이 이럴 때 만났으니까요. 이 전에 만났으면 상당히 반가워했을 텐데 말이죠." 크리스토퍼는 드디어 찻잔을 들었다. "공짜 차와 쿠키도 마시고."
"가정이 좀 잘못됐네. 내가 우연한 기회에 자네에게 온 거 같나? 자네가 이런 일을 당했으니 내가 온 걸세."
"그럴 줄 알았습니다. 사실로 밝혀져서 더 기분이 나쁘군요."
"솔직해서 좋구만." 노인이 킬킬대며 웃었다. 크리스토퍼도 기분이 풀렸는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대화라는 게 오랜만이어서 그럴지도 몰랐다.
"이제 자네에게 맞는 번호도 생겼고, 우리의 세계에 온 걸 환영할 겸해서 불렀네. 번호는 마음에 드나?"
"싫어해봤자 뭐합니까. 제가 정하는 것도 아니고."
두 사람은 더 간소한 대화를 나눴다. 키득거림이 사이사이에 더 끼어들었다. 처음에 크리스토퍼가 가지던 긴장감도 조금씩 풀어졌다. 겉보기에는.
일상적인 대화에는 언제나 틈이 있다. 크리스토퍼는 그 틈을 잘 볼 줄 알았고, 그 틈을 통해 불쑥 들어올 수 있었다.
"그래서, 진짜 목적이 뭡니까?"
노인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크리스토퍼도 예상했기에 별로 당황하지 않았다.
"담소를 나누고 싶다는 걸론 부족했나?"
"부족하죠. 계속해서 대화가 겉에서 맴도는데."
노인은 웃음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크리스토퍼는 노인의 눈에 장난기가 가시는 걸 보았다.
노인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신을 믿나."
"어떤 멍청한 이들은 과학이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고들 하지. 하지만 과학이 신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아. 그들은 빅뱅이라는 사실을 알아냈지만, 그 전에 무엇이 있었는지, 어째서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모르지. 그 너머에는 이제 그들의 영역이 아니라 신의 영역이 되는 거야."
눈을 떴다. 생각보다 낯익은 천장. 4등급 격리실은 빌어먹을 정도로 푹신거리진 않지만 또 무서울 정도로 딱딱했다.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손바닥을 머리에 짚었다. 너무 뜻밖의 일인지라 머리가 어지러웠다. 머리가 욱신거리는 만큼 심장도 빠르게 뛰었다.
"그럼 절대신이란 존재는 있는가. 실제로 있네. 다만 그게 자네들이 생각하는 여호와라던가, 알라라던가, 뭐 너그럽게 봐줘서 반고와 같은 존재가 아닐 뿐이야. 그는 그저 거기에 존재했을 뿐일세."
고개를 들면 굳게 잠긴 철문이 보인다. 저 철문 밖에, 이 방과 똑같은 곳에, 나와 같은 사람들이 채워져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절대신이란 작자는 갈갈이 분해되고 말았네. 우주를 몸에 담은 존재이니 만큼 여러 존재로 흩어져내렸겠지. 누군가는 이 지구로 내려오고, 누군가는 저 멀리 다른 행성에, 누군가는 저 멀리 다른 차원에, 또 누군가는 우리와 다른 평행세계로 떨어졌을지도 모르네. 그 신의 조각 하나하나가 바로 우리들이라네."
내 등급으론 아직 볼 수 없는 SCP가 많았기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있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분명히 조각들은 여기에 있었다. 어쩌면 그 빅맥 할아버지가 그런 존재일지도 몰랐다. 아니, 이건 확실한건가.
"왜인지는 나도 모르네. 어쩌면 그가 그냥 존재했기에 그냥 흩어진 걸 수도 있겠지. 하나 확실한 건, 그가 스스로를 분해한 건 아니라는 것일세. 만약 그랬다면 우리 모두가 완벽했겠지."
여기에 수많은 불완전한 조각들이 있다. 신성한 조각들. 한참 아래 인간들이 만든 방에 갇혀서, 갈망하는 채.
"우리가 불완전하기에, 우리는 후계자를 원하네. 인간이 자신의 자식의 원하는 것처럼. 아, 우리가 불멸이 아니라는 건 아니야. 우리는 그저, 우리 모체보다 더 인간적일 뿐일세. 불멸은 언제나 좋은 게 아니니까. 몇 억년을 살면 귀찮아지거든. 이제 자네를 부른 이유를 알겠나?"
그 원수같은 녀석이 있을 격리실을 생각했다. 호흡이 진정이 되지 않았다. 문이 갑자기 일그러지는 것 같았다. 문의 윤곽이 한 점이 되어 일그러져 사라지자 다시 어둠이 드리워진다.
"자넨 선택받은 거야. 다음 신과 같은 존재로."
멀리서 탁자와 의자가 보인다.
"내 말솜씨가 형편없었나 보군. 바로 깨어나버리다니."
"저 밖에 얼마나 있는거죠?"
"나도 모르네. 그냥 어디서 온지 모르는 것들은 대부분 우리라 생각하면 될거야."
심호흡.
"전 신이 될 생각 없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 선택할 여지가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당신이 어떻게 말을 못해보는 겁니까?"
"내가 왜 그래야하나? 그냥 있던 존재에서 나왔듯이, 우리들 사이에 소속감이나 그런 건 없다네. 원한다면 직접 얘기해ㅇ…"
순간적으로 손에 총이 생겼다. 홧김에 방아쇠를 당겼지만 총알은 그냥 노인의 몸을 통과해버렸다.
"성질 한 번 급하군." 노인이 화났지만 웃음이 반쯤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더니 자기 의자 뒤에서 다른 의자를 꺼내 옆에 두었다.
저 멀리서 한 남자가 서있는 게 보였다.
눈을 뜬다.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은 녀석을 거부하듯이 눈 앞에서 방향을 틀었다. 침착함이란 게 없어지고 분노가 끓어오름에 따라 반동도 없이 그냥 난사했다.
침대에 일어나 앉는다. 조명이 매우 어두웠기에 약간은 꿈과 같은 느낌이다. 그렇기에 더욱 짜증이 난다.
총알은 녀석을 죽이지 않았다. 딱 총열 하나의 거리를 두고 녀석과 내가 서로 마주봤다. 숨소리가 가빠왔다. 녀석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숨이 가쁘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나를 안았다. 꿈이라기엔 너무 생생한 포옹이었다. 도망칠 수 있겠어, 라는 확신에서 온 안도감이자 비웃음이었겠지.
나는 도망치지 않는다. 그렇다고 네놈들 생각대로 하게 두지도 않는다.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어둠의 베일이 나를 감싸게 내버려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