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란 소나타
평가: +10+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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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둥에 묶인 남자에게 기름을 뿌린다. 입이 막힌 채 부르짖는 남자의 비명따윈 무시해준다. 돈은 미리 지불해 줬다.

문득 남자가 돈을 받을 때 어떤 생각을 했는지 궁금해진다. 여자에 굶주려 보였는데 그런 쪽으로 생각한 건 아닐까.

모르겠다. 이따 곡 쓰면서 생각해봐야지. 어쩌면 곁들이는 소재로도 괜찮을지 모르겠다.

남자가 흥건히 적셔졌으며 주변으로 기름을 뿌려 길을 이어준다. 장미 모양으로 뿌려주면 예쁠 것 같다. 하지만 반드시 4방향으로, 그러면서 다 타오르는 시간은 5분에서 10분으로 설계한다. 길의 끝부분에는 각각의 도화선이, 그러니까 총 4개의 도화선에 닿아있다. 도화선은 위층으로 올라가 중앙에 있는 폭탄으로 연결된다. 참고로 위층의 바닥은 유리바닥이다. 다시 참고로 남자가 보기엔 유리천장이다.

위에서 밑을 내려다보며 장미 모양이 불꽃과 죽어있는 시체를 보는 거다. 죽은 자의 삶의 욕망이 이 불꽃으로 피어나는 모습을 보며 삶과 죽음에 대한 붉은 악보를 만들어내는 거다. 그리고 저 삶의 욕망은 자기의 원수인 나를 향해 기어온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앉아있는 폭탄으로 다가온다. 난 작곡을 위해 그의 삶을 죽였지만 그 작곡이 이제 나의 삶을 위협한다. 이 모순을 감미료로 삼아 폭발적인 곡을 만들어낸다.

계획은 완벽하다.

기름으로 흠뻑 젖은 기둥 위에 구멍을 하나 낸다. 거기에 다시 도화선을 꼽는다. 내가 위층에 올라가 폭탄 위에 앉기까지 충분한 시간이 흐를 정도로. 실제로 될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제까지 믿어온 내 감을 믿는 거다.

성냥에 불을 붙인다. 남자의 경악하는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흠, 내가 웃고 있나?

남자는 이 불을 어떻게든 끄려고 할 테지만, 재갈 물린 입으로는 어림도 없다. 그런 꼴을 생각하면 괜히 우스워진다.

이젠 성냥의 불을 첫 번째 도화선으로 옮겨놓는다. 남자의 절망스러운 비명을 들으며 계단을 향해 여유롭게 걸어간다. 불을 끄려는 애처로운 숨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고, 너무나 아름다운 소리에 온몸을 타고 전율이 흐른다.

폭탄 위에 앉았을 때, 딱 맞춰서 남자의 몸에 불길이 닿았다. 아직 감 안 죽었구나, 지오다노.

불길이 남자의 살과 재갈을 태웠기에 남자의 비명이 더 생생하게 들려온다. 그 음을 배경 삼아 오선지에 음표를 그려 넣는다.


처음은 안단테(Andante). 생각보다 타는 속도가 별로다. 역시 너무 두꺼운 나무를 샀다. 공백을 채워줄 남자 비명소리를 준비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f(포르테)! 너무나도 감미롭다. 느려터진 초반부를 역동적으로 만드는 저 소리! 제 몫을 해낸 저 남자의 영혼은 음악가의 천국으로 올라가겠지.

마침내 불길이 바닥의 기름길에 닿았다. 불길이 기름을 따라 타오른다. 여기에 프레스티시모(Prestissimo). 너무 안일했나. 생각보다 기름이 빨리 탄다. 5분에서 10분이 아니라 3분 안에 여기까지 올라올 기세다. 상관없다. 언제나 그랬듯이 작곡에 들어가면 예상했던 것보다 더 무아지경에 빠진 채 작곡하니까. 3분 안은 일도 아니다.

남자의 비명이 잦아든다. 데크레셴도(Decrescendo). 어라? 움직이네? 부들거리는 거 봐. 울고 있나? 난 웃고 있는데, 불쌍한 사람. 괜찮아, 당신이 마지막으로 가는 길은 축복으로 가득할 테니깐.

스트린젠도(stringendo). 기름불에 가속이 붙는다. 나도 이에 발맞춰 음표를 그려 넣는 속도를 높인다. 조금만 더 빨리. 조금만 더. 더 많은 음표들이 내 손에 놀아나게 하란 말이야.

불길이 모서리의 도화선에 닿았다. 불길이 위층으로 올라온다. 불길이, 올라온다. 고조된다. 크레셴도(crescendo)! 빠르기만 한 죽은 음을 여기서 되살려 보자고! 폭발적인 절정의 순간 속에서 숨겨둔 광염을 미친 놈 마냥 뿜어대는 거다! 콰광!

그러다가 팟하는 소리와 함께 천장 어딘가에 걸려있던 영혼이 나에게로 빨려들어온다. 그러면 가만히 앉은 상태로 나를 향해 올라오는 저 네 개의 점 중 하나만 맹하니 응시하고만 있게 된다.

하….하…… 지친 쓴 웃음이 흘러 나온다. 폭발적인 힘의 문제는 언제나 빨리 식는다는 점이다.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자 이미 위층으로 넘어온 불이 보인다. 폭탄까지 남은 거리 약 5m.

여기서 리타르단도(ritardando). 폭발하는 광기의 여운 속, 마지막으로 정리하는 단계. 싱글거리면서 폭탄에서 내려와 창문 앞에 선다. 폭발로 부서질 유리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단순히 폭발을 통해 탈출하면 재미가 없다는 걸 난 잘 알고 있다.

마카를 꺼내 유리창에 적어넣는다. Symphony No. 94 in G major ‘Surprise’. 마커의 선에 발맞춰서 유리가 은은하게 떨리기 시작한다. 마지막에 있을 피날레의 작은 전주곡으로 딱 알맞는 진동이다.

유리를 주먹으로 툭 건드려본다. 유리는 기다렸다는 듯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그 아름다운 소리에 키득거리면서 웃어본다. 왜 이 소리는 이 날, 이 때, 이 순간에서만 들을 수 있고, 영원하지 않는 걸까?

밑에는 눈으로 가득 찬 쓰레기 수거 차량이 있다. 누가 몰고 왔는지는 모른다. 어차피 잠깐 땡땡이치러 왔다가 영원히 돌아가지 못한 사람에게 그런 질문은 의미없다.

자아, 눈을 감고. 하나, 둘,
.
.
.
.
.
.
.
근데 마지막에 겹세로줄을 그렸나?

f f f f f f f f f f (포르티시시시시시시시시시모)!!!!!!!!!!!!!!!!!!

폭발음! 쾅!


폭발에 나도 모르게 발을 헛디딘 걸까. 발바닥이 아니라 등에 눈의 촉감이 느껴진다. 그 상태로 바닥까지 숭! 퉁! 짜릿한 통증이 척수부터 뇌까지 얼어붙는 느낌으로 자극시켜준다.

와우. 기분 좋아. 타이밍 꼬이는 바람에 좀 흐트러진 채 추락하긴 했지만, 뭐 어때. 악보를 건졌는걸.

그래도 누워서 추락하니까 아프긴 하네. 일어나기 귀찮아. 이래서 일어난 채 떨어지려 했는데.

눈 속에 묻힌 채 악보를 펴본다. 그 난장판 속에서도 용케 잘 보존되어있다. 광란 속에서도 소중히 다룬 보람이 있다.

그리고 썼다. 겹세로줄.

강렬한 환희 속에 악보를 얼굴에 가져다 키스한다. 방금 일을 치른 연인들처럼 가쁜 숨을 쉬며 껴안는다. 일말의 오점도 없이 잘 해냈다, 지오다노.

음표를 그려 넣으며 그 위를 노니는 것만으로도 작곡가는 황홀경에 빠져든다. 아직도 그 속에서 취해 주변을 뒤덮은 눈 속에서 악보를 안은 채 몸을 굴린다. 붉은 화염 아래의 하얀색 광란. 그 새하얀 광염 속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다. 어느 누구도 찾아와 주지 않는 공간의 품에 안겨서.


……잠깐.

근데 이거 어디서 연주하지?

에, 모르겠다. 적당한 곳을 뺐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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