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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2년 8월 31일: 길잡이

술판이 벌어진 다음 날 아침, 길잡이와 누군가는 재단 안전가옥을 완전히 떠나기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그리 거창한 일은 아니었다. 식량 분배와 지도 확보 등의 굵직한 일들은 이미 몇 달 전에 다 끝내 놓았으니까. 둘은 아침 시간의 대부분을 그저 가옥 안을 서성거리면서 들고 갈 만한 것들이 아직 남아 있는지 확인하는 데 바쳤다.

야, 이거 너한테 쓸 만하지 않을까?

누군가가 포스트잇에 대충 휘갈겨 써서 길잡이에게 보여주었다. 비교적 멀쩡한 상태의 손부채 하나가 그의 가시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딱히요. 8월이긴 해도 그리 덥진 않고, 전 어차피 실내에 있을 건데요.

제21K기지에는 이제 전기도 안 들어오잖아. 건물 안에 들어가면 숨막히게 더울 수도 있어. 누군가가 주장했다.

길잡이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 말이 논리적임을 받아들이고 손부채를 챙겼다. 부채는 이미 터질 정도로 부풀어 있는 길잡이의 가방 맨 위쪽으로 들어갔다.

각종 종이더미들이 흩어져 있는 가실에서부터, 각자의 방과 화장실, 주방, 임시 무기고로 사용되던 옷장까지. 둘은 이런 식으로 가옥 전체를 훑어보았고, 빠트린 물건이나 지도가 없는지 적어도 두 번씩은 확인한 후에야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 누군가가 거실의 중앙에 놓인 책상을 씁쓸하게 바라보았다.

종이를 더 못 들고 가는 게 아쉽네. 유일하게 쓸 만한 대화 수단이 필담이었는데. 그가 책상 위에서 아무 이면지나 골라서 썼다.

길잡이는 딱히 쓸 말이 없어 어깨만 으쓱하고 말았다. 누군가가 한숨을 쉬면서 책상에 앉았다.

넌 이제 기지로 갈 거지? 그가 길잡이에게 적었다. 길잡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이후로 그들은 헤어져 서로 다른 곳을 향할 예정이었다. 이건 그들이 안전가옥에 자리를 잡았을 때부터 결정된 사항이었다. 누군가는 제21K기지로 돌아가는 것을 질색했고, 길잡이는 그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잡으려 헤메는 데 별 관심이 없었으니까.

누군가는 순간이동으로 전북 지역을 순회하면서 숨겨져 있을 재단 기지와 그 안의 풍소경을 찾아 다닐 것이고, 길잡이는 파괴된 제21K기지로 돌아가서 기억을 되찾게 해 줄 복구제를 수색할 것이었다. 만약 복구제가 없다면 그때부터는 기약 없는 생존의 여정이 될 것이고.

누구 씨는 전북으로 순간이동할 거죠?

어. 그리고 경남. 그 뒤엔 무진시에도 들러 볼까 하는데, 아직 거기가 닫히지 않았다면.

근데 왜 하필 전북이에요?

길잡이가 물었다. 서울과 전북은 꽤 거리가 멀었고, 그의 생각으로는 서울에서 대피한 연구원들을 찾으려면 인천이나 경기도 등 최대한 가까운 거리에 있을 다른 기지들을 찾아보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다.

예전에 들은 정보인데, 전북 쪽에 있는 재단 기지는 심령 독립체에 특화된 기지라고 들었어. 투명이들도 일종의 사념 독립체기도 하고, 기지가 뾰족이들한테 함락당할 때 경고 방송에서 남쪽으로 대피한다고 했으니까. 일단 찍어 보는 거지.

만약 기지를 발견하면, 그 안으로 어떻게 침입하려고요?

계획은 있어. 좀 피튀기는 내용인데, 궁금해? 누군가가 적었다.

길잡이는 농담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누군가의 얼굴을 슬쩍 쳐다보았지만, 그의 표정은 웃음기 없이 건조했다. 진심인 모양이었다.

네. 길잡이가 답장하자마자 누군가는 바로 글을 적기 시작했다.

일단 재단 기지가 있는 곳을 찾아야 해. 산이랑 지하 건물들을 발로 뛰면서 찾아봐야 하니까 이게 제일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일이겠고, 그 뒤로는 좀 더 쉬울 거야. 내 가면 기억하지?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나무 가면을 가리켰다. 길잡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경호 요원이든 잠깐 산책 나온 연구원이든, 내가 10m 안으로만 접근하면 목표물의 의식을 잃게 만들 수 있어. 그 다음 그 사람의 가슴에 구멍을 뚫고, 실로 꿰매지 않고 그대로 놔두는 거지. 그럼 그건 마치

누군가는 글을 잠시 멈추고, 더 세련된 표현을 고민하는 예술가처럼 펜촉을 앞뒤로 흔들었다.

마치 투명이한테 찔려서 죽은 사람처럼 보이거든. 저번에 그 변칙예술가 처리할 때 한 번 시험해 봐서 아는데, 구분 못할 정도로 비슷해. 실제로 찔러 죽인 건 아니니까 내가 투명이로 바뀌지도 않고.

그 다음은요?

위장 시체가 발견되면 몇 분 안에 재단 내부에 비상이 걸릴 거야. 특무부대든 뭐든 전투 요원들은 방령 장치를 덕지덕지 끼러 갈 거고. 저번에 21K기지 탈출할 때 알게 된 건데, 재단의 방령 장치는 기본적으로 유령들이 선호하는 장소인 지하에 구비되어 있어. 반대로 연구원 같은 비전투 요원들은 유령들이 쉽게 도달하기 힘든 최상층으로 대피하고.

그럼 풍소경 씨는 연구원이니까, 최상층으로 가겠네요.

그래. 물론 그쪽도 방어 인력 몇 명은 남겨 두겠지만, 그 정도는 내가 처리할 수 있어. 지금 재단이 가장 염려하는 건 손에 가시를 세우고 달려드는 미친놈들이지 권총을 든 사람이 아니거든. 원거리 공격에 대한 대비는 안 돼 있을 거야. 거기에 내가 추가적으로 만든 무기들도 몇 개 있고.

누군가가 자신감 있는 어조로 적었다. 길잡이는 그의 전투력을 잘 알기에 그 글에 토를 달지 않았다.

방어 인력을 다 제압하고 나서 풍소경을 납치하면 끝. 놈을 기절시키고 순간이동으로 도주하는 거지. 200m 너비로 다섯 번 이동하면 바로 빠져나올 수 있어.

유일한 문제점이라면 스크랜턴 현실성 닻이지. 이게 있으면 일단 기지 내로 순간이동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지고, 밖으로 나가는 것도 힘드니까. 그래도 이건 엄청 비싼 거니까 기지에 기껏해야 하나 정도밖에 없을 거야. 운이 좋으면, 기지 바깥에서도 저격해서 터뜨릴 수 있겠지.

만약 닻이 못 찾게 숨겨져 있으면요? 그토록 중요한 물건을 복도 한복판에 총으로 쏠 수 있게 전시해 놓았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두 번째 플랜을 써야지. 투명이들을 실제로 기지 내로 침투시키는 거.

길잡이는 잠시 멈칫하고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너무도 평안해서, 마치 대량 살육 계획이 아니라 저녁 메뉴를 정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유인 자체는 쉬워. 일단 기지에서 물러나서, 전북 남서부부터 순간이동하면서 살인광 투명이들을 싸그리 모아. 그 놈들이 양치기 역할을 하면, 전북 곳곳에 숨어 있던 뾰족이들도 다들 몰려 나와서 하나의 거대한 무리를 이루겠지. 이 무리를 그대로 재단 기지에 갖다 박을 수만 있다면 제21K기지에서 벌어졌던 일을 전북 기지에서도 재현시킬 수 있어. 그 다음부턴 혼란과 공포의 도가니가 될 테니까, 풍소경 하나쯤 납치하는 건 식은 죽 먹기겠지,

재단이 같은 사태에 그대로 당할 것 같진 않아요. 더구나 그 기지에는 제21K기지의 생존자들도 많잖아요. 만약 재단이 무슨 수를 써서든 뾰족이들을 막아낸다면요?

그럼 █ 된 거지. 난 바로 투명이들에게서 멀리 떨어져서 탈출하고, 풍소경 그 놈은 먼발치에서 얼굴 한 번 본 걸로 만족하고. 다른 수가 없으니까 이렇게라도 하는 거야.

길잡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는 그의 계획에 대한 길잡이의 비평을 바라는 듯했지만, 길잡이는 자신이 별 도움이 될 리 없음을 알고 있었으므로 보완점 대신 묻고 싶은 것들을 적어 보기로 했다. 그가 펜을 들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적어.

왜 그렇게 풍소경 씨를 찾고 싶어 하는 거에요? 찾은 다음에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고요?

찾는 이유는 왜냐하면 그 놈도 변칙예술가거든. 납치한 다음에 어떻게 할 거냐면 일단 글쎄, 몇 가지 질문을 해야지.

그는 몇 번 단어를 썼다가 지웠다 하며 문장을 완성했다. 신중하게 쓸 말을 고르는 듯했다.

그게 뭔데요?

이제 마음이 바뀌었냐는 질문. 저번에는 분명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자기 손으로 끝내겠다고 했지만… 글쎄, 만약 누군가가 풍소경 그 놈에게 '다른 사람들을 지킬 만할 작품을 만들 변칙적인 힘을 준다'고 하면, 놈은 이번에도 거절할까?

풍소경이라는 사람이 누구 씨와 비슷한 성격이라면, 백 퍼센트 거절할 것 같은데요.

1년 6개월 동안 누군가의 불같은 성격을 옆에서 지켜온 길잡이의 생각이었다. 그는 죽으라면 죽었지, 결코 고집을 꺾을 인간이 아니었으니까. 누군가가 그 글귀를 보고는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게. 사실, 나도 걔가 거절하면 좋겠어. 그럼 그냥 놈의 머릿속에서 재단 안전가옥 위치랑, 변칙예술가들 근황이랑, 몇 가지 시시콜콜한 정보만 빼내고 보내 줄 용의가 있거든.

만약 마음이 바뀌었다고 하면요? 누군가가 웃음을 멈추었다.

그럼 죽여야지.

왜요?

내가 두 명일 수는 없잖아.

이해가 안 되는데요. 풍소경 씨랑 누구 씨는 겉모습만 같고 서로 다른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누군가는 이 문장에 대답을 적는 대신 고개를 저었다. 더는 물어보지 말라는 암시였다.

길잡이는 궁금했지만, 한 번 더 물어보았다가 진짜로 얻어맞을까 봐 추가적인 질문을 포기했다. 대신 그는—

'잠깐. 난 누구 씨한테 얻어맞은 적이 없는데.' 길잡이의 희미한 무의식이 속삭였다.

'내가 누구한테 얻어맞은 거지?'

"그럼 다른 SCP 실험에 투입된 건가요? ███-KO는요?"

"그 SCP의 실험은 미뤄졌다." 스포츠머리가 대신 대답했다.

"왜죠?"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경호 요원들은 입을 꾹 닫았고, D-3203은 더 물어보았다가 진짜로 얻어맞을까 봐 추가적인 질문을 포기했다. 그의 마음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왜죠?

길잡이는 말할 수 없다는 사실도 잊고 입을 뻐끔거리며 누군가에게 물었다. 본능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누군가가 왼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뭐라고? 적어 봐.

길잡이는 고개를 저었다. 갑작스레 떠오른 이상한 생각에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그는 애써 주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아니에요. 그냥 이제 여길 떠난다고 생각했더니 긴장했나 봐요. 곧 재단 기지로 침입해야 하기도 하고.

누군가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그가 가시가 돋히지 않은 손으로 길잡이의 팔목을 토닥였다.

작전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단 건 나도 인정해. 그래도 너무 긴장하지 마,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봐야지.

그렇죠.

우린 더한 일들도 겪어 봤잖아. 벌써부터 너무 마음 약해지진 말자고.

그 문장을 보자 길잡이에게 과거의(그러니까, 그가 기억할 수 있는 과거) 추억이 문득 떠올랐다. 그가 망설이다가 펜을 들었다.

누구 씨. 마천역에 있던 쉘터 기억나요? 그가 조심스럽게 적었다.

누군가와 길잡이가 재단 안전가옥을 발견하기 전에, 그러니까 제21K기지에서 갓 탈출한 두 명의 떠돌이 신세였을 때, 그들은 마천역을 기지로 만들어진 생존자 쉘터에서 잠시 머물렀었다. 정신적으로 한계까지 몰린 사람들이 어떠한 의지도 없이 좀비처럼 흐느적대며 식량만 까먹고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서는 서로가 각자의 감시자였다. 의심스러운 행동을 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식량을 나누어 주는 사람은 곧바로 표적이 되어 물어뜯겼다. 누군가는 그들이 순간이동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길잡이와 참치 통조림 한 캔을 이틀에 걸쳐 나누어 먹어야 했다.

결국 한계에 다다른 그들은 오밤중에 순간이동으로 쉘터에서 몰래 탈출했다. 시간이 지난 뒤, 몇 개의 다른 쉘터들을 건너건너 그들이 안전가옥에 자리를 잡고 나서, 그곳을 다시 찾아가 보았을 때 마천역은 이미 폐허가 돼 버린 지 오래였다. 투명이도, 시체도 없었다.

기억나지. 끔찍한 시간이었어. 조금만 더 있었으면 나도 아무나 찔러 버리고 투명이가 되어 버렸을지도 모르지. 누군가가 적었다.

우리 저번에 거기로 한 번 찾아가 봤잖아요. 아무것도 안 남아서 다시 나오긴 했지만.

그래. 그게 왜?

그 사람들, 길잡이는 펜을 잠시 멈추었다.

어디로 갔을까요? 거긴 아무것도 없었잖아요. 다들 투명이로 변해 버렸다면 시체라도 있어야 하는데.

글쎄. 생각이 있는 사람이 굶어 죽기보다 다같이 떠나자고 사람들을 설득해서 어딘가로 간 걸 수도 있지. 그래서 그게 왜?

그 사람들이 스스로 떠난 걸 수도 있지만, 그곳에서 내쫒긴 걸 수도 있잖아요.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기 때문에. 가령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찔러 죽이고 투명이가 되었거나.

긴급한 사태로 대피한 거라면 흔적이 있었어야 했는데 거긴 깨끗했잖아. 피도 없고, 남은 식량도 없고. 누가 봐도 조직적인 이동이었어. 누군가는 글을 쓰다 말고 길잡이를 쳐다보았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그냥요. 거기는 제21K기지에서 가장 가까운 쉘터였잖아요. 만약 그들이 뿔뿔이 흩어졌다면, 그들 중 몇 명은… 기지를 발견하지 않았을까 싶어서요.

그것 때문이었구만. 누군가가 다 안다는 듯 길잡이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걱정 마. 굶어서 비쩍 마른 뾰족이 몇 명쯤은 큰 문제가 안 돼. 그보다는 격리에서 풀려나 기지 안을 활보하고 있을 변칙 개체들을 훨씬 더 걱정해야 할 거다. 재단 기지 안에서는 절대 방심하면 안 돼. 알겠지?

길잡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대화를 나눌 건덕지가 떨어졌으므로, 둘은 책상 위의 종이들을 치우고 거실을 비우는 작업에 다시 착수했다.


***

아침 시간이 거의 다 지나는 동안, 안전가옥은 그들이 처음 왔을 때처럼 변해 가고 있었다.

혹시라도 어떤 재단 인원이 이곳을 발견할 것에 대비해, 그들의 신원을 특정할 수 있는 문서나 물건들은 모두 뒷산에서 불태웠다. 집 안의 가구들은 그대로 두되 그들이 어떤 식으로든 낙서해 놓았던 부분은 검은 페인트로 가렸다. 챙기지 못한 식량은 만약을 대비해 느티나무 밑동에 숨겨 놓았다.

완벽한 은신처였어. 뾰족이들만 아니었어도 여기를 계속 거점으로 삼을 수 있었을 텐데. 누군가가 적었다.

뭐, 평생 한 곳에서만 살 수는 없죠. 특히 이런 세상에서는.

너 여기로 다시 안 돌아올 거야? 아무리 네가 투명이들을 볼 수 있다 해도, 밖에서 계속 이동하는 건 할 짓이 못 돼. 특히 밤에는 더 위험하지.

괜찮아요. 밤귀가 밝아서. 누군가는 이 어이없는 대답에 헛웃음을 지었다. 길잡이는 계속 적었다.

어차피 일주일 이내로 뾰족이들에게 점령당할 곳이에요. 꾸물대면서 식량만 낭비하는 것보다 기회를 잡아 보는 게 낫죠. 여기 오기 전에 어땠는지 알잖아요.

누군가는 더 적지 않고 어깨를 으쓱했다. 너 알아서 해라는 뜻인 듯 했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각자의 방에 들어가서, 돌아오지 않을 여정을 위해 챙긴 다양한 짐을 등에 멨다.

어림잡아도 통조림 20개와 생수통 7병, 다양한 무기, 여벌의 옷, 신발, 외투, 손부채까지 포함한 길잡이의 배낭은 터져나가기 직전이었다. 길잡이는 그의 몸통 절반만한 크기의 물체를 등에 지기 위해 의자에 얹혀 놓고 쪼그려 앉아 메는 방법을 써야 했다. 그가 일어서자, 품 속에서 작은 종이가 툭 하고 떨어졌다.

길잡이는 짜증스러운 한숨을 쉬며 다시 몸을 굽혀 종이를 주웠다. 여러 번 접힌 종이는 끝부분이 변색되어 있었고, 길잡이는 그게 무슨 종이였는지 바로 알아보았다. 누군가와 그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짰던 제21K기지 진입 작전이었다. 그는 앞부분만 살짝 펴 보았다.

1. 일단 정문으로 들어간다. 여러 장애물들로 인해 불가피할 경우, 특무부대 숙소 근처에 있는 옆문으로 들어간다.

2. 강을 건너서 유클리드급 격리동에 도달한 다음 크게 돌아서 안전급 격리동, D계급 숙소로 간다. 이유는 여기가 뾰족이들이 있을 가능성이 가장 없는 곳이니까.

3. D계급 숙소에 있을 경호 요원들의…

커다란 똑똑 소리가 길잡이의 상념을 흩뜨렸다. 누군가가 가옥 밖에서 그를 기다리는 중인 모양이었다. 길잡이는 벽을 탕탕 쳐서 곧 나갈 것임을 알리고, 종이를 품 속 깊숙히 집어넣은 뒤 방을 나섰다.

누군가는 자신의 가면을 쓴 채로 가옥의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길잡이는 그의 옆으로 가서 섰다. 둘은 그 상태로, 가시가 돋히지 않은 손을 서로 맞잡고 잠시 안전가옥을 바라보았다.

안녕, 내 집아. 길잡이가 입모양으로 중얼거렸다.

옆에서도 누군가가 뭐라고 속삭였다. 맞잡은 그의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길잡이가 고개를 살짝 돌려서 그의 얼굴을 보려는 순간-

휙 하는 소리, 귀가 먹먹해지고, 시야가 점멸했다가 다시 밝아진다. 몸의 무게중심이 뒤로 쏠려서 넘어지지 않도록 반사적으로 팔을 앞으로 내밀고 고개를 숙인다. 코에서 강한 레몬 향이 나고 세상이 조용해졌다가 다시 시끄러워진다. 시야 너머로는 내게 가장 집에 가까웠던 장소가 영영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멀어지면서-

길잡이는 누군가의 손을 탁 하고 놓았다. 그들은 제21K기지에 가까운 산의 초입으로 순간이동해 있었다.

옆을 돌아보니 누군가는 가면을 벗고 머리를 털고 있었다. 잔뜩 찡그린 표정을 보니 여기 서 있는 것조차도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괜찮아요? 길잡이가 손짓으로 물었다. 누군가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길잡이는 혀로 입술을 적시며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는 정말로 이별의 시간인데, 그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펜은 가져왔지만 무슨 글을 적을지도 생각이 안 났다. 그는 미리 적당한 작별 인사를 준비해 둘 걸 하고 후회했다.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길잡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누군가가 작은 종이 하나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조심해라. 통제 불가능한 재단 기지는 지옥 그 자체야. 어떤 변칙 개체들이 풀려나 있을지 아무도 몰라.

길잡이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머릿속에서 '조심해요'나 '살아남아요' 같은 상투적인 어구들이 휘몰아치듯 등장했다가 사라졌다. 그는 어떤 말을 적어야 할지 갈팡질팡하다가, 결정을 내리고 누군가의 가시 돋친 팔을 가리켰다.

누군가가 가시 돋힌 팔을 내밀었다. 길잡이는 누군가의 팔뚝에, 천천히 그러나 커다랗게 네 글자를 적었다. 쉽게 지워지지 않도록, '고 마 워 요'라고.

누군가가 시선을 내려 글자들을 보았다. 그의 입가가 실룩거리더니, 곧 경련하듯 얇게 퍼졌다. 웃음을 참던 누군가는 결국 입꼬리를 귀까지 올리고, 왼손으로는 배를 잡고 웃었다. 성대가 마비되지만 않았다면 온 산을 울릴 수 있을 정도로 호탕한 몸짓이었다.

그러고 그는 길잡이를 꼭 끌어안았다가 다시 떨어졌다.

나도 고마웠다. 그가 입모양으로 또박또박 말했다.

길잡이는 눈시울이 붉어졌을까 봐 오른손으로 눈가를 잠시 비볐다.

둘은 마지막으로 서로에게 손을 흔들었다. 가시가 돋히지 않은 손이었다. 이 고귀한 이별은, 절대 뾰족이들의 저급하고 생존주의적인 몸짓으로 표현되어서는 안 되니까. 이것은 문명인다운 마무리여야 하니까.

누군가가 가면을 쓰고는 순간이동으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자리에 약한 바람이 불었다가 다시 고요해졌다.

길잡이는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손을 한동안 계속 흔들다가 결국 다시 내렸다. 침묵과 정적이 숲을 가득 채웠다.

해가 점점 떠오르고 있었다. 여름의 뜨거운 열기가 울창한 나뭇잎들을 뚫고 들어와 길잡이의 얼굴에 닿았다. 길잡이는 손으로 햇빛을 가리며 산 밑쪽을 바라보았다.

창문이 모조리 깨져나간 마천루들은 고고하게 덩굴과 숲 속으로 침몰하고 있었고, 그을음과 먼지에 덮인 도로는 깊은 잠에 빠져든 듯했다. 인간이 없는 곳에서도 도시는 나름의 위엄을 지키고 있었다.

길잡이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걸음을 옮겼다. 제21K기지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었다.


2014년 5월 2일: 동오

"아, 갈 길이 멀다 진짜." 기현이 말했다.

바야흐로 중간고사가 끝난 다음 주였다. 수업은 끝난 지 오래였고, 그들은 담임 선생님이 조례하러 들어오기 전까지 실없는 잡담을 하며 시간을 때우는 중이었다.

"네가 뭔 갈 길이 멀어. 시작도 안 했으면서." 윤이 기현에게 틱틱거렸지만, 기현은 상당히 피곤한지 윤의 말에 대꾸도 안 하고 축 늘어져 있었다. 옆에서 동오가 앓는소리를 냈다.

"나 토할 것 같아. 시험 끝나자마자 집에서 가채점이랑 오답풀이를 시켰다고… 오늘도 새벽 두 시 반에 잤어."

"그래서 몇 개 틀렸디?" 윤이 물었다. 동오는 짧은 신음소리를 냈다.

"몰라. 2학년 때보다 더 내려가진 않은 것 같은데… 지금 수학이 좆 됐어. 이번에 학원도 바꿨는데, 쌤이 완전 호랑이 쌤이라서 큰일남."

"학원 쌤한테 좆 까라고 해." 기현이 끼어들었다.

"아빠한테 직통으로 전화 갈 텐데. 나 처음 담당할 때부터 그렇게 말했어. 대들면 바로 전화할 거라고."

"너희 아빠한테 좆 까라고 해."

"내가 네 방으로 피신 오는 거 다시 보고 싶냐? 네 형이랑 나까지 세 명이서 자야 했잖아."

"우리 형한테 좆 까라고 해."

"네가 해라, 미친 새끼야."

셋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윤이 향기 나는 스프링노트—산 지 오래되서 이제는 지우개똥 냄새밖에 남지 않은—에 얼굴을 묻은 채로 말했다

"그래도 그렇게 나쁘진 않을 거야. 이번에 수학 엄청 어려워서 전교권 애들도 다 못 쳤대. 편차가 별로 안 심할걸."

"그래? 주안이는 어때, 걔도 못 쳤대?"

"음, 걔는 어나더 레벨이잖아. 3점짜리 하나 틀렸다던데."

"아니, 이 코딱지만한 학교에 괴물들은 왜 이렇게 많은 거야? 노력충 서러워서 살겠냐, 정말."

"안타까운 거지. 그래도 난-"

윤의 말은 담임 선생님이 문을 활기차게 열고 들어오며 중간에 끊겼다.

반장이 일어나서 "전체, 주목!"이라는 구호로 이목을 집중시켰다. 책상에 엎어져서 자던 아이들이 좀비마냥 어기적거리며 일어났다.

"자, 모두 오늘 수업 잘 들었냐?" 선생님이 외쳤다.

약 30명여의 아이들이 입을 모아 "네"라고 합창했고, 기현은 조그맣게 "했겠냐?"라고 중얼거렸다. 동오는 그 소리를 듣고 작게 웃었다.

"그래. 다들 중간고사 치느라 수고 많았다. 시험 잘 친 애들도 있을 거고, 저번보다 조금 성적이 떨어진 애들도 있겠지만, 다들 노력한 만큼 결과 봤으리라 믿는다. 어 그리고, 6월에 가는 수학여행 동의서 아직 안 낸 애들은 오늘까지 꼭! 반장한테 내라. 알겠냐?"

"선생님, 동의서 잃어버렸는데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딘가에서 손이 튀어나왔다. 여기저기서 쿡쿡 하는 웃음소리가 낮게 퍼졌다.

"그럴 거 같아서 교탁에 몇 개 올려 놨다. 잃어버린 놈들은 그거 가져가고. 혹시나 싶어서 하는 말이다만, 다들 부모 싸인 정도는 위조할 수 있지? 내 싸인은 이제 안 통하더라."

이전에는 더 큰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선생님은 자신도 너털웃음을 지으며, 시덥잖은 몇 가지 당부와 함께 조례를 끝냈다. 즉시 교실을 빠져나가기 위한 아이들의 소란이 일었다.

"야야, 피시방?" 기현이 2층 창문 밖으로 뛰어내릴 준비를 하며 동오에게 물었다.

"나 이제 땡땡이 못 쳐. 앞으로 2주 동안은. 학원 쌤이랑 그렇게 협상을 했거든."

동오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가 새 학원에 다니게 된 첫 날, 일단 자기 커리큘럼을 3주만 따라 보라는 쌤의 반 부탁 반 협박에 못 이겨 맺은 계약이었다.

기현은 적잖이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짓더니, 동오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창턱 너머로 점프해서 사라졌다(뒤이어 "방금 뛰어내린 새끼 누구야!" 라는 한 선도부원의 일갈이 들렸다). 윤 역시 그가 다니는 학원 버스에 탑승하기 위해 동오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고 떠났다.

동오는 하품을 하며 자리 왼쪽에 걸린 배낭을 집었다. 그는 저번 주에 새로 발매된 히트곡을 흥얼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잇 머슽 비 엘 오 비 이, 이백 퍼센트 셔 오브 뎃."

그는 노래를 멈추었다. 스스로 듣기에도 너무 괴로운 목소리였다.

"돼지 멱따는 소리는 여전하시구만." 주환이 그를 스쳐 지나가며 낄낄거렸다.

"좆이나 까잡수세요."

동오가 응수했다. 그는 가방을 왼쪽 어깨에 비스듬히 걸쳐 맨 채로 교실을 빠져나가는 인파의 끝자락에 합류했다. 그의 바로 뒤로 태우와 정민이 붙었다. 대화 내용으로 추측컨대 저녁 메뉴에 관한 굉장히 격렬한 토론인 듯했다.

"…그러니까 시발 짬뽕이 왜 여자픽인데, 그럼 넌 앞으로 베스킨라벤스 가지 마라? 어?" 정민이 말했다.

"아니 그거랑 같냐 븅신아? 그럼 넌 저녁으로 아이스크림 케익 처먹을 거냐?" 태우가 맞받아쳤다.

"아 뭐가 다른데, 그러면 고기 먹든가! 지는 뭐 아무 말도 안 하고 이거 먹자 해도 아 이래서 싫다, 저거 먹자 하면 아 저래서 싫다…"

"네가 병신 같은 선택지만 내잖아!"

"내가 뭐 씨발 똥 퍼 먹자고 했냐? 너 자꾸 그러면 한 번 더 본죽 가는 수가 있어?"

"어, 동오네." 태우가 그를 보더니, 정민을 무시하고 말했다. 정민이 태우를 한 대 치는 시늉을 했다. 동오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야, 너 기혀이는 어따 냅두고 혼자 가냐? 같이 학원 다니는 거 아녔음?" 태우가 그에게 물었다. 순수하게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나 이제 그 학원 안 다녀. 아빠가 성적 안 나온다고 다른 학원에 다니라고 해서. 거기에 과외도 곧 추가될 거 같고."

"아."

태우의 표정에 짧은 연민이 스쳤다. 정민의 표정도 비슷하게 변했다. 둘은 동오에게 학원 잘 갔다 와라, 내일 보자는 둥의 작별인사를 하며 서로 헤어졌다.

동오는 홀로 남아서 실내화를 운동화로 바꾸고 학교 현관으로 나왔다. 학교 건물 밖으로 나오자 서늘한 냉기가 그의 몸을 감쌌다. 5월 초의 저녁하늘은 아직 땅을 데울 정도로 뜨겁지 못해서, 많은 사람들이 긴옷을 입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학교의 바로 앞은 큰 도로 두 개가 비스듬하게 교차하는 사거리였고, 학교 쪽이 저지대에 뒤치한 경사면이기도 했다. 사거리 건너편에는 적당히 낡은 상가가 있어 상가 여기저기서 학생들이 군것질거리를 사 먹거나 PC방으로 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상가 뒷길로 걸어 넘어가면, 예전에 시가 야심차게 제작했던 거대한 원기둥 모양의 조각상을 볼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건 도시에게 예술적으로는 실패작이고 재정적으로는 재앙에 가까운 결과를 불러온 흉물이었다. 사람들은 그 조각상을 '우리 모두를 가리키는 거대한 가운데손가락'이라고 일컬어 부르고는 했다. (기현은 '좆각상'이라고 말하기를 선호했다.)

이 조각상 이야기가 나온 이유는 동오의 새 학원 버스가 하필이면 그곳에 정차하기 때문이었다. 오가는 사람은 적은데 도로가 넓어 접근성은 좋다는 게 그 이유였다.

덕분에 동오는 지난 일주일 동안 매일 그 가운데손가락과 달갑지 않은 만남을 가져야 했고,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더럽게 크네, 진짜.'

동오는 원기둥 앞에 도착해서 시간을 확인했다. 4시 46분이었다. 버스가 4시 50분에 여기 도착하니, 4분 정도의 자유 시간이 생긴 셈이었다. 그는 폰을 켜고 볼 게 있는지 잠시 유튜브를 뒤적거렸다.

'5분 지식: 울릉도에 뱀이 없는 이유는?' 첫 번째 영상이었다. 동오는 채널 주인의 목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 다음 영상을 눌렀다.

'국어 공부법 완전정리 - 노베이스로 3개월 안에 내신 3등급까지 올리기!' 두 번째 영상이었다. 그는 이미 1등급이었으므로 가차 없이 다음 영상을 눌렀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마블의 새로운 시도는 성공했을까??' 세 번째 영상이었다. 동오는 이 영상에서 제법 오래 머물렀지만, 결국 흥미를 잃고 폰을 껐다. 영화는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다시 시간을 확인하니 4시 49분, 저 멀리 도로를 따라 학원 버스가 오는 게 보였다. 동오는 폰을 끄고 주머니에 넣었다. 앞으로 3시간 동안 지옥 같은 수학 공부를 즐길 생각을 하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버스 뒤로 누군가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실루엣을 보니 동오와 같은 학교 교복이었고, 이쪽으로 오는 걸 보니 같은 학원에 다니게 된 모양이었다. 동오는 잠재적인 동료의 정체를 파악하려 고개를 앞쪽으로 기울였다.

그 사람도 때마침 고개를 들어 이쪽을 바라보았고, 둘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윽, 지원이잖아?' 동오는 움찔했다. 저 앞에서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건 지원이었다.

학습지를 빌렸던 그날 이후 동오는 지원과 얘기할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사실 기회가 있었다 해도 대화를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는데, 지원은 학교에서 다른 아이들과 일체의 말을 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책상도 따로 떼어서 혼자 앉았고, 점심도 혼자 먹었고, 조별활동 시간에는 책상에 머리를 박고 끝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거기에 그가 드물게 말할 때 쓰는 다소 싸가지 없는 어투까지 더해지다 보니 지원은 현재 학교의 기피 대상 1순위가 되어 있었다. 동오 역시 PC방에서의 대화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기에 지원과는 굳이 말을 섞으려 하지 않았고,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지원에게서 멀어졌었다.

지원이 그에게 걸어오는 동안, 동오는 약한 공황 상태에 빠져서 적절하게 대꾸할 만한 말을 생각해 내느라 안간힘을 썼다. 결국 그가 '너도 이 학원에 다니니' 따위의 한심한 인삿말을 건네기 직전 지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기서 보다니 의외네."

"어?" 당황한 동오가 대꾸했다.

"누굴 기다리는 거야? 여긴 약속 장소로 잡기에 좋은 곳은 아닌데."

"아, 그건 아냐. 학원 가려고."

지원은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평소보다 기분이 조금 더 좋아 보였다. 동오는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자신에게 호감을 보일 때 으레 드는 불편한 감정을 느꼈다.

"그래? 열심이네. 다른 애들은 중간고사 끝났다고 막 놀아재끼던데."

"부모가 부모잖아." 동오는 말을 꺼내자마자 후회했다. 내가 어쩌자고 얘한테 가정사를 털어놓고 있는 거지?

"그렇지, 참." 지원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동오가 대화가 끝났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놓았을 때, 그가 갑자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때 빌렸던 답지 기억나?" PC방에서 했던 대화가 동오의 머릿속을 스쳤다.

"어? 아, 그거, 아직 안 돌려줬구나, 미안-" 그가 횡설수설했다. 지원이 말을 끊었다.

"괜찮아. 네가 원할 때 다시 줘. 나한테는 필요 없는 거야."

"그럼 넌 학습지를 어떻게 풀게?"

"방법이 있지." 지원이 으쓱했다. 동오가 뭔가 더 물어보려는 찰나, 그의 시선이 막 우회전하고 있는 학원 버스에 닿았다. 버스가 동오 앞에 정지했다.

"저 버스지? 공부 열심히 해. 잘 가라." 지원이 버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달칵. 버스의 자동문이 열렸다. 안에는 동오와 마찬가지 신세인 아이들이 피곤한 표정으로 의자에 주저앉아 있었다. 동오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기사 아저씨가 안 탈 거냐고 독촉하자 그제서야 지원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버스에 올라탔다.

지원은 이미 그는 안중에도 없는 듯 한 손을 주머니에 푹 찔러넣고, 가운데손가락 조각상에 기대서 다른 한 손으로 담배를 꺼내고 있었다. 동오는 창가 자리에 앉아서 지원을 쳐다보았다

언제나 짓던 짜증이 역력한 표정 대신, 지원은 얼굴에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담배를 두 손가락 사이에 꼬나쥐고 긴 연기를 뱉는 그의 눈이 흐릿했다.

갑자기 그에게 빌렸던 답지가 생각났다. 동오는 무의식적으로 학교 가방을 꺼내 안을 열어 보았다. 지원의 답지는 아직 거기 그대로 있었다.

"내가 원할 때 돌려주라고."

동오가 중얼거렸다. 버스는 출발하고 있었고, 가운데손가락 조각상이 그의 뒤로 멀어져 시야에서 사라졌다. 버스는 빠르게 교차로에 도달했다.

그는 답지에서 눈을 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이들은 쪽잠을 자거나, 예습을 하거나, 미처 풀지 못한 숙제들을 마무리하기 위해 급하게 문제를 풀고 있었다. 동오의 앞에 앉은 아이 역시 이차함수 문제를 붙잡고 끙끙대고 있었다.

이곳에서 시간을 낭비하는 건 죄였다. 동오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그에게 박아 넣은 인생의 진리였으니까.

아버지. 동오의 뇌리에 갑자기 아버지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이번에도 성적이 오르지 않으면 이 학원에다 추가로 과외까지 붙이겠다고 그를 위협했다. 그렇게 되면 동오는 잠자는 시간을 뺀 모든 시간을 공부하면서 살아야 했다.

학원 선생님의 부탁도 떠올랐다. 3주 동안만 한 번도 안 빠지고 학원에 오면, 그 뒤부턴 내가 원하는 대로 최대한 커리큘럼을 조정해 보겠다고 했는데. 면담하는 동안 아버지에게 얼마나 신신당부를 받았으면 저럴까 하는 생각이 마음속을 떠나지 않았던 게 떠올랐다. 그리고…

'얼마나 이 삶을 더 살아야 하는 거지? 도대체 언제 끝나는 거지?' 동오의 마음속에서 충동적인 감정이 부풀어 올랐다. 그 스스로도 깜짝 놀랄 만큼 격렬한 분노였다.

그는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오늘 학원이 끝나면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며 주의를 돌리려 했지만, 산더미 같은 숙제의 양을 생각하자 구역질만 올라왔다. 학원 숙제에 아빠가 개인적으로 낸 것까지 추가하면 동오는 하루에 학습지 열 장과 문제 60개를 풀어야 했다. 그건 16살짜리 아이가 버틸 수 있는 양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엄마는-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라. 네 아빠도 다 뜻이 있어서 그러는 거니까.'

다 뜻이 있었겠죠, 엄마. 처음에는요.

현기증이 일었다. 세상이 뒤집히는 것 같고, 머리에서 김이 올라오며 손발이 부르르 떨리는 기분.

동오에게 발작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는 이미 너무 많은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발작은 뭔가 달랐다. 그의 마음속은 전처럼 하얗게 변해 버리지 않고, 온통 하나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탈출하자는 생각.

쿵.

버스가 경사로를 내려가며 심하게 덜컹였고, 동오의 끊겨 버린 퓨즈가 잠시 돌아왔다. 그는 잠시 망설였다.

도망쳐도 될까? 그럼 아빠는? 친구들은 날 어떻게 볼까? 집도 부모도 없는 거지 새끼가 되어서 길거리를 떠돌자고? 마음을 가라앉혀, 동오야. 그게 네 유일한 길이야. 아빠 말 잘 듣고 대학 갈 때까지만 버텨. 그러면-

"네가 원할 때 다시 줘." 마지막으로 지원의 말이 떠올랐다. 그 순간 동오는 마음을 정했다.

"아저씨!" 동오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크게 터져나왔다. 뒷자리에서 졸던 아이가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놀란 버스 아저씨가 뒤를 돌아보자, 동오는 반사적으로 다음 말을 이었다.

"저 화장실이 급해서 지금 내릴게요. 학원에는 택시 타고 간다고 해 주세요!"

그는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저씨의 진작 다녀오지, 하는 툴툴거림과 함께 자동문이 다시 한 번 열렸다.

그는 버스에서 내려 다시 인도로 뛰어올라갔다. 가운데손가락 동상까지 다시 올라가려면 3분 정도 걸릴 것이었다.

5월 초의 서늘한 바람이 그의 얼굴을 스치고, 힘차게 내뱉는 숨에 기합이 섞인다. 동오는 어깨를 따라 들썩이는 가방을 두 손으로 잡으며 가운데손가락 조각상을 향해 정신없이 뛰어올라갔다.

그의 입에서 작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상황이 즐거웠다. 동오는 잠시 후에 그 이유를 깨달았다.

이건 그가 선택한 행동이었으니까.


2029년 7월 27일: ???

아름다운 꿈이었다. 그는 한 손에 바주카포를, 다른 손에는 AK-47을 들고 제21K기지의 모든 인원을 학살하고 있었다.

꿈 속에서 그는 임시 격리실을 요새로 삼아 농성하던 노부인을 장렬하게 폭사시키고, 연구원들의 절반을(인체 실험을 즐기는 쪽으로) 단두대에 처형시킨 뒤, 그를 열렬하게 추앙하는 D계급들의 함성 아래 기지의 새로운 리더로 재탄생할 참이었다.

"███! ███!" 기지 식당을 가득 메운 D계급들이 환호했다. 그는 힘차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의 두 손에 재단 보고서 양식으로 작성된 취임사가 들려 있었다.

"일련번호! 나 █, █, █!" 그가 힘차게 소리치자, 기지가 떠나가라 우렁찬 함성이 울려퍼졌다.

"등급! 황제(Emperor)!" 또 한 번의 거대한 소음이 식당을 휩쓸었다. 그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설명!" 그가 입을 뗐다.

"세상에, 더는 못 들어 주겠네."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기지 식당이 빙글 돌더니 땅 밑으로 사라지고, 어둠이 그를 집어삼켰다. 곧이어 부유하는 느낌과 함께 몸 각지의 신경이 뇌와 연결되었고 그는 갑자기 심각하게 오줌을 누고 싶어졌다. 닫힌 눈꺼풀 사이로 비치는 빛이 너무 밝았다.

동오 D-3203은 어지러운 기분과 함께 눈을 떴다.

어딘가 익숙한 공간이었다. 누워 있는 곳은 간이침대였고, 그 옆으로 다양한 의료 도구들이 늘어서 있었다. D-3203은 이곳에 언제 왔는지 떠올려 보려고 했지만 그의 기억이 자물쇠로 잠긴 것처럼 더 이상의 무언가를 도출해 내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처음 보는 의사가 있었는데, 나이는 20대 후반에 키는 그보다 머리통 하나는 작아 보였다. 의사는 그를 굉장히 한심스럽다는 시선으로 보고 있어서 D-3203은 그 시선에 살짝 위축되었다.

어쨌거나 화장실에 가야 한다는 건 확실했으므로, 그는 의사에게 개인적인 욕구를 해결해야 한다고 살짝 귀띔하려 했다. 그런데 혀가 입천장에 딱 붙은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턱도, 목울대도 마찬가지로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작동을 멈춘 것 같았다.

"화장실 가고 싶다고요?" D-3203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대는 걸 보고 있던 의사가 말했다. D-3203은 그녀가 자기 마음이라도 읽었나 싶어 살짝 놀랐다.

"그건 걱정 안 해도 돼요. 이미 도뇨관으로 그쪽 오줌이 빠져나오고 있으니까. 조금 있으면 시원해질 걸요."

그녀가 한쪽 입매를 올리며 D-3203 밑으로 연결된 얇은 투명한 관을 가리켰다. 노란 액체가 조금씩 빠져나오는 게 보였다. D-3203은 정말로 자살하고 싶어졌다.

"지금은 그대로 누워 있어야 할 거에요. 말도 못 하는데 말초 근육을 움직이는 건 어불성설이지. 운동 기능(procedural memory)이 완전히 복구될 때까진 가만히 있어요."

의사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D-3203이 볼 수 없는 어딘가에 있는 종이들을 넘기기 시작했다. D-3203은 손가락들을 움직이려고 시도했다. 꿈쩍하지 않았다. 두려움이 그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설마 전신마비가 된 건가?

그는 마지막 기억을 떠올렸다. 사이코패스 과학자가 그에게 이상한 액체를 주입하고 가면을 씌운 것이었다. 그는 아직 기회가 있었을 때 그의 얼굴에 한 방 날려줬어야 했는데 하고 후회했다.

"안심되라고 하는 얘기인데, 그쪽 상태는 꾸준히 좋아지고 있어요. 몇 시간 전에는 목숨이 간당간당했거든요. 저한테 감사하는 게 좋을 거에요. 이 기지에서 기억소거제에 대해서는 제가 제일 전문가였으니까."

D-3203은 이 잘난 체 하는 여자가 조금 싫어지기 시작했지만, 그는 여전히 움직일 수 없었으므로 그녀의 말을 듣고만 있어야 했다.

"고통이 느껴지는 부위가 있나요? 있으면 눈꺼풀을 두 번, 없으면 한 번 깜빡여요."

의사가 디지털 혈압계를 들고 와서 물었다. D-3203은 눈꺼풀을 천천히 한 번 감았다 떴다.

그녀는 그의 왼팔에 혈압계를 감았다가 떼고 무언가를 기록했다. 그 과정에서 철컹거리는 소리가 나서, D-3203은 그제야 자신의 사지가 수갑으로 간이침대에 구속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은 나지 않았다.

"생각보다 괜찮은데." 그녀가 중얼거렸다. 일부러 크게 말한 건지 D-3203에게도 똑똑히 들렸다.

██야, 사람들이 너를 부자연스럽게 위로한다면 그건 네 어딘가가 끔찍하게 잘못되었다는 뜻이란다.

D-3203의 친족—누군지는 기억할 수가 없는데—이 그에게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이 상황에 그보다 어울리는 말을 찾기도 힘들 것 같았다.

"자, 몸 상태가 좀 안정된 것 같으니 촉진제를 들고 올게요. 걱정 마세요. 용량을 신중히 맞췄으니까. 그때처럼 뇌가 약물 범벅으로 절여지는 일은 없을 거에요."

의사가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D-3203은 사형 직전 짧은 유예 기간을 얻은 사형수처럼 자신의 인생을 돌이켜 보았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생각나는 게 거의 없었다.

그는 그제야 자신의 머리가, 속된 말로 완전히 포맷되었음을 깨달았다. 내 이름이 뭐였더라? 기억나지 않았다. 사는 곳도 기억나지 않았다. 자신이 뭐하던 사람인지, 여기가 어디인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SCP?' 그건 기억났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까먹어 버렸지만.

그제야 잠기운이 완전히 걷혔고, D-3203은 무서워졌다. 정말로 무서웠다. 그는 몸을 어떻게든 움직이려고 애쓰며 눈을 격렬하게 깜빡였다. 그 반작용으로 안와에 눈물이 차며 시야가 흐려졌다.

"이런. 무서운 거에요? 걱정하지 말라니까."

의사가 작은 용액을 스포이드에 담아서 들고 오다, 그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 한 줄기를 오해하고 조심스럽게 티슈로 닦아 주었다. D-3203은 쪽팔림과 분노가 뒤섞인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내 몸이 어떻게 된 거야? 내 몸이 어떻게 된 거냐고?! 그는 마음속으로 소리쳐 물었다. 입 밖으로는 한 마디도 새어나오지 않았지만.

"긴장 푸시고." 의사가 D-3203의 입을 조심스럽게 벌렸다. 턱근육이 아래로 밀리며 성대를 압박하는 게 느껴졌다.

"영구적인 장애는 아니니까 걱정 마요. 자연적으로 치유될 거지만, 이걸 먹으면 더 빨리 될 거고." D-3203의 혀에 용액 몇 방울이 떨어졌다. 따뜻한 기운이 목을 타고 내장으로 스며들었다.

"그냥 놔두는 방법도 있었지만 이 용액이 없으면 걷는 법을 다시 기억하는 데 일주일은 걸렸을 거에요. 그리고 재단에게는 전신마비 상태의 D계급이라도 어떻게든 실험에 투입시킬 방법이 아주 많으니, 이게 낫다고 생각했어요. 뭐 아무튼 알아 두라고요."

의사는 속사포처럼 말하며 D-3203의 입을 닫고 흐른 침을 닦아 주었다. 그는 눈을 감고 다시 손가락들을 움직이려 애썼다.

"이제 잠 좀 자요. 수면은 뇌 능률을 향상시키는 제일 좋은 방법이니까. 몇 시간 뒤면 다시 정상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될 거에요."

의사는 잠시 고민하다가 몇 마디를 덧붙였다.

"아니면 죽던가. 죽을 확률이 그렇게 높진 않아요."

그것 참 고맙네요. D-3203은 쏘아붙여주고 싶었지만, 벌써 졸음이 밀려오기 시작했고 그는 잠에 맞서 싸우고 싶지 않았다. 깨어 있어 봤자 그보다 어린 의사에게 전신마비 환자 취급이나 받고 있을 테니까. 그래서 그는 눈을 감았다.

달팽이관이 회전하는 느낌, 세상이 빙글빙글 돌면서 귀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D-3203은 편안함에 취한 채로 빠르게 렘수면의 왕국으로 들어갔다.

그는 3분 25초 뒤에 코를 골기 시작했다.

***

의사는 그를 지켜보다가, 코골이 소리를 듣고는 살짝 안도했다. 무의식 중의 신체 활동은 좋은 징조였다. 환자의 몸은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는 게 거의 확실했다.

그래도 안심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재단 의료 인원으로 살아오면서 많은 환자들을 보았다. 몸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듯하다가 갑자기 심각하게 악화되거나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번 케이스는 변칙 개체나 무장한 적대 세력의 습격이 아니라 재단 내부 약품에 과다 노출된 경우니 그나마 나았다. 원인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었으니까.

그녀는 진료실 한구석에 있는 믹스커피 상자에서 한 봉투를 꺼내, 끝부분을 찢고 종이컵에 부었다. 그 다음 생수통 한 병을 커피포트에 넣고 전원을 눌렀다. 그녀는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 동안 재단 인트라넷에 접속해 임시 처방전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병명: 약인성 기억상실증.' 약품 과다복용으로 인해 생긴 기억상실증이라는 뜻이었다.

'발병일: 2029.7.27.'

'처방인: 기하리 의사.'

'처방의약품: 칸타루안정(내복), 아네스틴캡슐(내복), 타티슘정(내복)..'

다양한 약품들. 상당수는 재단 내에서만 유통되는 것이었다. 의사는 가끔 그 사실이 안타까웠지만, 그녀가 바꿀 수 있는 건 없었다.

'처방의약품: …기억복구제(임) 10mL.' 괄호 안의 표시는 이 약이 임상 시험을 거치지 않았으며, 처방 시에는 반드시 전문가와 상담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의사는 그냥 적었다. 그녀가 바로 그 전문가였으니까.

의사는 손가락을 바쁘게 놀렸고 빈칸들은 빠르게 채워졌다. 곧 커피포트가 수증기를 뿜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잠시 일어나 종이컵에 물을 붓고, 믹스커피 봉지로 잘 저어서 한 모금 마셨다. 맛있었다.

저편의 간이침대에서 D-3203이 웅얼거리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나마 언어 능력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의사가 막 다시 자리에 앉아 처방전을 마무리하려 할 때, 그녀에게 이메일이 도착했다. 그녀는 클릭했다. D-3203을 가사 상태에 빠트린 실험에 대해 윤리위원회의 심사가 있을 예정이니 그녀도 알아 두라는 내용이었다.

"이빨 빠진 호랑이들 같으니라고." 의사는 중얼거렸다.

윤리위원회의 손길은 제대로 움켜쥔다면 거의 모든 걸 터트릴 수 있을 정도로 강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사건을 해결하기에는 너무 느렸다.

이 경우와 같은 '작은' 사건들은 보통 감사가 들어오기 전에 용의자가 모든 준비를 끝낼 수 있었다. 그녀는 그 박사가 부적절한 약품 사용에 대해 견책 처분만 받고 끝날 것이라는 데 오른발을 걸 수도 있었다.

만약 그녀가 제때 이 진료실에 있지 않았더라면, 월권에 가까운 행위를 하며 이 환자를 납치해 오지 않았다면 D-3203은 심정지로 죽었을 것이다. 그랬다 해도 그 박사는 여전히 견책 처분만 받고 끝났을 것이다. D계급은 좋은 자원이지만 박사는 훨씬 더 귀중한 자원이니까. 그리고 재단은 항상 선택을 해야 하니까.

가끔 의사는 이런 세상이 지긋지긋했다. 그렇다고 해도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없었지만.

그녀는 작은 한숨을 쉬고, 이메일을 닫은 뒤 다시 작업에 돌입했다. 처방 대상자의 신상정보와 약의 상세 조항까지 입력하고 나자 남은 칸은 하나밖에 없었다. 처방전의 부작용을 기재하는 칸이었다.

그녀의 손가락들이 빠른 속도로 자판을 두드렸다.

'예상되는 부작용: 기억의 해리 및 재구성. 무의식의 실체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연구가 더 필요할 것이다. 그녀 자신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영역이니까. 애초에 그 미친 박사가 기억소거제랑 진정제를 칵테일마냥 섞어서 저 D계급에게 통째로 몸에 들이붓지 않았다면 임상 시험도 끝나지 않은 이 약을 지금 쓸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의사는 모든 빈칸을 채우고 마지막으로 비고 칸을 바라보았다. 굳이 채워도 되지 않는 칸. 그녀도 평소에는 채우지 않는 칸이었지만, 이번에는 적어야 했다. 상부에 이 모든 일들을 벌인 이유를 해명해야 했으니까.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 타이핑했다.

'비고: D계급의'

잠시 정지. 그녀는 심호흡을 했다. 재단에서 여러 해를 일했지만, 필요한 만큼 냉정해지는 데는 여전히 시간이 필요했다.

'비고: D계급의 상태를 통해 신약의 자세한 경과를 확인 가능. 몇 차례의 반복 실험을 통해 6개월 내에 필요한 양의 데이터를 만들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됨.'

그녀는 처방전 작성을 끝내고 얼굴을 두 손에 묻었다. 감정을 가라앉혀야 했다.

어차피 임상 실험은 피할 수 없었다. 그 대상이 사고에 휘말려 죽을 운명이었던 D계급이라면 더 좋았다. 그리고 이 시험에 많은 사람을 쓸 수 없으니, 몇 명을 대상으로 반복 실험을 해야 할 것 역시 예상하고 있었다. 윤리위원회에서도 허락할 것이다.

설령 그 말이, 한 사람의 뇌가 완전히 파괴될 때까지 기억을 지우고 복구시키는 것의 반복을 뜻한다고 해도.

의사는 뒤를 돌아보았다. D-3203은 평화로운 표정으로 자고 있었다. 그가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작은 도로롱 소리가 진료실에 울려퍼졌다.

그가 깨어나면 몇 차례의 간단한 테스트를 통해 운동 기능이 돌아왔는지 점검해야 했다. 그 다음 재단 인사 파일과 그의 기억을 대조하며 뇌가 정상인지 확인하고, 2주 동안의 심층 면담을 진행한다. 그 다음 다시 기억을 삭제시킨다.

이후 반복한다. 그의 뇌가 비가역적인 손상을 입을 때까지. 그러면 의사는 새 실험체를 받고, D-3203은 처분될 것이다. 그렇게 몇 명의 실험체를 거치면 기억복구제의 성능을 개선시키는 데 필요한 충분한 데이터가 만들어질 것이다.

기하리 의사는 두 손의 주먹을 꽉 쥐었다. 재단은 항상 선택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녀는 이미 선택을 내렸다.

이제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다.

진료실의 의료용 카트에 놓인, 표준 용량 기억소거제를 담은 주사바늘이 날카롭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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