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사랑

죽은 자의 격정은 무릇 광대하며 강력하다 하나, 우리는 결코 전능하지 못하다.

내가 결코 보지 못하는 것이 있다. 내가 결코 만지지 못하는 것이 있다. 내가 결코 압도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그렇기에 나는 어떤 것에게서는 '나를 낳은 내 아이들'을 지켜주지 못한다. 그렇기에 수많은 이들이 고통과 비통 속에 죽는다. 그렇기에 이들을 죽음은 크고 작은 '증오'를 낳는다.

증오를 나는 보고 만질 수 있다. 보고 만질 수 있어야만 한다. 나를 낳은 내 아이들이 보고 만지지 못하는 탓이다. 나를 낳은 내 아이들을 나는 지킬 수 있다면 지켜야만 한다. 이들을 보고 내 기이한 형제들이 저주하려는 것과 같이. 증오를 나는 사라뜨리지 못한다. 최선의 방책으로 나는 나를 낳은 내 아이들이 능히 보고 만질 수 있는 것으로 봉인을 만든다. 자연의 진리는 우리의 모든 것이자 우리 자체이며, 자연을 거부하는 것은 우리 힘을 거부하는 것이나, 그보다도 나를 낳은 내 아이들은 자신이 보고 만질 수 있는 것이라야만 맞서서 자신을 지켜내기 마련이다.

무당벌레나 나비라는 모습은 작은 증오를 가두는 고운 봉인이다. 이만큼 작은 봉인에서는 증오가 품은 저주의 힘을 내가 전무에 가깝게 줄이기 쉽다. 더 큰 봉인은 더 큰 증오를 가둘 때 쓰이며 그만큼 더 다루기 어렵다. 증오가 고양이의 모습으로 봉인될 크기이기만 해도 질병과 불운을 능히 일으킨다.

그리고 광대한 증오가 있다. 나를 낳은 내 아이들을 수도 없이 죽인 전쟁과 역병이 이 증오를 낳았다. 자연의 진리를 거부할 만큼 광대한 사랑은 얼마 없으나 내가 단 한 번 부려 보았다. 이때 상대한 증오를 낳은 이는 자기 시신이 역병으로 가득 찬 구덩이에서 이름 없이 불탈 줄 아는 채로 죽어간 수많은 이들의 심장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였다. 평소에 "생명을 주는 빛"의 힘을 빌어다 봉인을 만들 일은 별로 없으나, 죽음의 기운을 그토록 강렬히 풍기는 증오를 마주하니 선택의 여지 또한 없었다.

어떤 봉인이든 최고의 약점은 항상 그 눈이다. 영혼이 바라보는 창이기 때문이다. 이런 말을 나를 낳은 내 아이들은 믿으면서도 그저 관념으로 여기나, 관념은 나를 낳은 내 아이들이 "실질적"이라 생각하는 그 무엇보다도 내 기이한 형제에게든 다른 형제에게든 나에게든 훨씬 더 실재스럽다. 창과 일직선을 이루는 것은 봉인된 영혼이 끼칠 수 있는 가장 잔학한 저주에 영혼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것이다. 나는 알고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봉인의 눈을 강화했으나, 그럼에도 눈이 마주치는 자에게 죽음을 불러일으키는 것까지 막지는 못했다. 내 축복은 생명을 주는 빛이 한 바퀴 돌 때까지 저주의 효과가 완전하지 못하도록 늦출 뿐이다.

내 어리석은 아이들아, 왜 그 봉인의 눈을 떼어갔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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