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드의 말대로, 길을 찾기는 그닥 어렵지 않았다.
그는 이제 지금 양손에 가방들을 들고 기침을 하며 동쪽 건물로 들어섰다. 그나마 깨끗하게 닦인 중앙 건물의 응접실을 뒤로 하자, 보이는 것이라고는 온통 먼지 낀 복도뿐이었다. 복도 중간중간 놓인 화분들에는 거미줄과 말라 비틀어진 식물만이 있었고, 그나마도 먼지에 뒤덮여 있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복도에는 전등이라고는 보이지도 않았고, 그나마 때 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건물을 밝혀주고 있었다. 그가 먼지가 없는 부분을 따라 몇 분쯤 걸어 계단참에 도달했을 때, 계단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오시오. 에르티스 씨. 우리 집에 온 걸 환영하오.”
카에스틴은 위를 올려다보았다. 갈색 머리의 남자가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얼굴에는 주름살이 가득했고, 눈 밑에는 선명하게 기미가 짙게 배어 있었다. 꼭 죽을 날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노인처럼 보였다. 아마 카를 드네 시장이겠지. 40대 후반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그 남자는 카에스틴의 앞까지 와서는 환영하듯 두 팔을 벌렸지만, 그 몸짓은 확연히 어색했다. 그도 그 사실을 어느 정도 알아차린 듯, 손을 내리고 말했다.
“미안합니다. 저 망할 하인들이 이쪽은 통 청소하려 들지 않아서. 이렇게 지저분한 환경에서 지내게 된 걸 정말 유감으로 생각하오. 어쨌든, 일단 선생이 가르칠 아이가 누구인지는 알아야겠지. 자, 따라오시게나.”
2층에서, 카를 시장이 문을 하나 열었다. 계단에서 올라오자마자 왼쪽에서 두 번째 문. 문 안에 보이는 것은 먼지 낀 방이었다. 방에 놓인 두 개의 침대는 때로 찌들어 있었고, 곳곳에 거미줄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또 두 개의 형체가 보였다. 키 크고, 깡마른, 헝클어진 머리의 여자와 화사한 나들이복을 입고 있는 갈색 머리의 여자아이. 문이 열렸을 때, 여자는 경계하는 표정으로, 아이는 한순간 겁에 질린 표정으로 그들 둘을 쳐다보았다.
“어, 에르티스 씨, 이 쪽은 내 아내 마리엔느 드네이고, 이쪽은 샤를 드네일세. 11살이고, 자네가 맡을 아이지. 샤를, 인사해야지?”
아이는 쭈뼛쭈뼛 조금씩 움직였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마리엔느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샤를, 가서 예의바르게 인사해라. 당장!”
아이는 이제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으로, 카에스틴을 향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그는 이제 완전히 당혹스러운 분위기에 빠져 있었다. 아이는 울먹거리고, 어머니는 뒤에서 쏘아보고 있고, 아버지는 그의 옆에서 어쩔 줄 몰라하고. 마리엔느가 아이를 뒤에서 노려보며, 조용하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어쩜 저렇게 멍청하고 느려터졌는지. 할 줄 아는 거라고는 기껏해야 꼬리치고 돈이나 한 푼 더 얻어보려고 기어다니는 것뿐이고. 도대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고 전혀-“
그 중얼거림은 조용한 방에서 모두에게 똑똑히 들렸다. 카를이 어떻게든 분위기를 바꾸어 보려는 듯, 끼어들어 말했다. “자, 자. 그럼 이만하면 내 아내와는 충분히 만난 것 같고. 에르티스 씨, 어, 저 아이가 피아노를 몇 년간 친 적은 없지만, 예전에는 곧잘 쳤다오. 아마 조금 더 가르쳐보면 꽤나 괜찮을 거요. 혹시 지금이라도…” 카에스틴은 이 방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환영이었다. “네, 뭐, 지금부터 당장이라도 수업을 시작하죠. 어, 샤를, 같이 가자꾸나.”
아이는 이제 약간 진정한 듯 했지만, 얼굴에는 그늘이 여전히 내려앉아 있었다. 입고 있는 꽃무늬 옷 역시, 별다르게 분위기를 바꾸어 놓지는 못했다. 시장은 그들을 조금 더 안 쪽으로 들어가, 식당으로 안내했다. 식당의 분위기 역시 만만치 않게 황량했다. 긴 테이블에는 족히 열다섯 개는 되어 보이는 의자들이 놓여 있었지만, 대부분은 먼지 끼어 있고 변색되어 있었다. 테이블은 무슨 꼴이 났는지, 아예 하얀 천으로 완전히 덮어 버렸다. 이게 혹시 이상 징후가 아닐까 하는 의심까지 들기 시작할 때, 시장이 식당 한 구석에 놓인 피아노의 뚜껑을 열었다. 시장이 손을 휘저으며 콜록거리는 걸 보고, 그런 의심은 점점 더해져만 갔다.
그러나 예상 외로, 피아노는 멀쩡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하얀 건반이 완전히 누렇게 변해버린 것만 빼면, 그 피아노는 제법 괜찮아 보였다. 그는 가방 하나에서 악보를 뒤적거리다, 적당히 쉽게 편곡해놓은 <헝가리 무곡 5번> 악보를 꺼내 피아노에 얹었다. “연주해보렴.” 하지만 아이는 주눅 든 얼굴로 그를 쳐다만 볼 뿐, 건반에 손을 올려놓지도 않았다. “어서.” 이제 이 아이가 말을 할 줄 알기나 하는 건지 의심스러워 질 때, 아이가 거의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악보 볼 줄도 몰라요. 피아노는 쳐 본 적도 없고. “뭐라고? 잘 안 들린단다.” 아이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고는,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저는 악보 볼 줄도 몰라요. 피아노는 쳐 본 적도 없고. 하지만 부인한테는 절대로 말하지 말아 주세요. 제발요.”
모든 게 점점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이제 완전히 당황해서 물었다. “하지만 조금 전에 너희 아버지가 너는 피아노를 쳐 본 적이 있다고…” 아이의 눈가에는 이제 거의 눈물이 글썽거렸다. “그건 다 그 독사 때문이에요. 그건…” 그 때, 갑작스레 뒤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아이가 피아노를 치지 않는군요.” 침착하고 차가운 목소리였지만, 아이는 놀라 의자에서 그대로 넘어졌다. 마리엔느 부인이었다. “죄송합니다, 에르티스 씨. 버르장머리가 없는 아이여서 그래요. 항상 그랬죠. 예의범절이라는 건 눈꼽만큼도 모르고. 항상 자기 하고 싶은 일만 하고, 항상 내가 말하는 건 듣지도 않고, 그 나이에 거짓말에 핑계만 꾸며대고. 남자들에게 꼬리치려고 안달이 나 있다가 결국에는 용서받지 못할 짓을 한두 번 저지른 게 아니죠. 도대체 내 배에서 나온 자식이 맞는 건지 모르게 행동하다가, 결국에는-“ 부인의 창백한 뺨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목소리가 점점 올라가다가, 부인은 아이에게 고함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당장 가서 보라색 방에서 기다리거라! 오늘 밤은 거기서 지낼 줄 알아! 당장 가! 가버리라고!” 아이는 울음을 터뜨리며, 무릎을 꿇고 부인에게 빌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마리엔느 부인. 제발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제발 보라색 방만은-“ 부인이 이제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오른 듯, 온 집에 울리도록 소리질렀다. “날 마리엔느 부인이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당장 보라색 방으로 가, 당장! 다시 말하지 않겠다!” 아이는 울음을 터뜨리며, 달려가기 시작해 곧 복도 깊숙한 곳으로 사라져 버렸다.
부인의 목소리는 어느새 침착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아이 옷이 더러워졌겠군요. 바닥의 먼지가 묻었을 테니. 하녀를 불러와야겠어요. 전 그만 가 보겠습니다. 선생님 방은 저기 서쪽 복도로 들어가서 사자 문고리 달린 문이 있는 방입니다.” 그는 멀어져 가는 부인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도대체 뭐…” 그가 그렇게 중얼거리고, 악보를 집어넣어 가방들을 들어올렸을 때,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뒤를 홱 돌아보았지만, 보이는 것은 복도와 문들 뿐이었다. 바닥을 흘끗 내려보았지만, 이곳은 사용하는 복도라 그런지 먼지가 쌓여 있지는 않았다. 그러니 발자국이 남아 있지 않아 누가 지나갔는지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서는 하인들 방이어도 서쪽 건물로 가고 싶었지만, 엄연히 정보 요원인 신분이 있으니 가까이 붙어 있는 게 더 나을 것이었다. 짐을 집어들고, 그는 서쪽 복도로 향했다.
낮에 있었던 일은 그 날의 저녁 식사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무표정한 표정을 한 하녀 둘이 카트를 끌고 와 빠르게 음식들을 천 덮인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고, 식기들을 늘어놓았다. 아이는 아직도 그 ‘보라색 방’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고, 긴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이라고는 그와 마리엔느 부인, 카를 시장뿐이었다. 식당은 초 몇 개로만 간신히 밝혀져 있었고, 그나마 복도에 늘어선 전등이 빛을 조금이나마 더해주고 있었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이어지다가, 카에스틴이 입을 열었다.
“꽤나 어두운 편이군요. 식당에는 왜 전등을 설치하지 않죠?”
마치 이 곳에서는 말을 하는 것이 금기인 듯, 하녀들이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시장은 그의 말을 못 들은 것처럼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다가, 그가 헛기침을 두어 번 하자 대답했다.
“오, 이건 그러니까… 원래는 전등이 있었다오. 사정이 있어서 지금은 식당의 전등은 다 없앴지만.”
“그러니까 그 사정이 뭔지 혹시…”
그 때, 의자에 앉아 하녀들을 무표정하게 지켜보던 부인이 말했다. “에르티스 씨, 당신은 가정교사입니다. 당신이 할 일은 내 딸을 가르치는 거지, 우리 집 사정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는 게 아니에요. 한 번만 더 그런 주제넘은 짓을 했다가는, 당장 해고해 버리겠습니다.”
그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입을 다물었다. 그 짧은 대화를 끝으로 이제 식당은 흔들리는 촛불과 하녀들만 움직일 뿐, 완벽한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카트가 마침내 완전히 비었을 때, 카에스틴은 또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다. 식탁에 있는 사람은 세 사람이었는데, 하녀들은 네 사람 분의 식기를 차려 놓았다. 아이 몫은 아니야. 식기 한 세트가 카트에 또 있어. 하녀들은 이미 아이가 식사에 불참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는 거겠지. 그럼 저 한 사람 몫은 뭐지? 그 때 그의 궁금증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하녀 하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사모님, 혹시 그 분은 식사를…”
“안 하실 겁니다. 오늘도.” 부인이 차갑게 말했다. 하녀들은 그 말에 오히려 안도한 듯, 허겁지겁 그 식기를 카트에 다시 싣고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나가 버렸다. 그들은 식사를 시작했다. 식사가 끝날 때까지, 말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방에 돌아와서, 그는 궁금증을 가득 안고 방을 거닐고 있었다. 도대체 아키드나 샤를이 말했던 그 ‘독사’는 누구이며, 시장 부인이 말했던 식사를 하지 않을 한 사람은 또 뭘까? 그 정체가 무엇이든지 간에, 분명한 것은 이제 그것을 알아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카에스틴은 등잔 하나를 집어들고 초에 불을 붙였다.
조용히 문을 열고, 그는 등잔을 문 밖으로 내밀었다. 이상하게도, 층 어디에서도 불빛은 보이지도 않았다. 살짝 그 자리에서 몸을 돌려 창문 너머를 보았지만, 보이는 것이라고는 희미하게 보이는 저택 정문과 정원뿐이었다. 건물이 원래 이 시간에 불을 끄는 건지, 아니면 이 동쪽 건물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조심스럽게 등잔을 살짝 손으로 가려 불을 낮추며, 그는 조용히 발을 내딛었다. 식당 쪽에서 무언가 말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천천히 식당으로 들어서는 모퉁이에 도달하자, 식당을 밝히고 있는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더 이상 굳이 불을 켜고 있을 필요는 없겠지.
입김을 불어 등잔을 끄고, 천천히 조심스럽게 카에스틴은 식당으로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 처음에 보이는 것은 테이블을 밝히고 있는 촛불과 그림자였다. 그러고는 의자에 앉아 있는 세 명의 형체가 보였다. 어두컴컴한 식당에서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곧 점차 그들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카를 드네 시장… 마리엔느 드네 부인… 그리고 처음 보는 여자 하나. 그 여자는 쪽진 머리에, 새까만 옷을 입고 있는 듯 보였다.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아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그 여자의 무릎에는 아이가 앉아 있었다. 샤를 드네겠지. 그 여자의 두 손은 아이의 얼굴을 여기저기 더듬고 있었고, 얼굴은 허공을 응시하며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가장 이상한 것은 그 여자의 목소리였다. 그 여자에게서 나오는 목소리는… 어린 소녀의 것이었다. 가냘프고 고요히 방을 채우는 어린 소녀 같은 목소리. “엄마… 엄마… 제발…” 아니면 샤를이 내는 소리일지도. 더 섬뜩한 것은, 부인의 반응이었다. 낮에 보았던 부인의 냉혹하기까지 한 모습과 달리, 지금 그녀는 흐느끼며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카에스틴은 천천히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복도의 어둠 속으로 더듬거리며 들어갈 때, 두런거리는 대화가 들려왔다.
“오래 가지는 않잖소. 위저 보드 같은 게 더 낫지 않겠소이까?”
“아니요. 그들과 직접 대화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게 가장 좋아요.”
질문에 대답한 목소리는 분명히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였다.
브람스의 교향곡 3번이 조용히 울려 퍼졌다. 3악장. Poco Allegretto.
지휘자는 쏟아지는 불빛 아래 부드럽게 지휘봉을 움직였고, 깊고 씁쓸한 곡이 퍼져 나왔다. 노래는 귀에 고요히 파고들었지만, 시선은 다른 곳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 시선이 향하는 곳은-
카에스틴은 갑작스레 눈을 떴다. 아직 날이 완전히 밝지는 않은 듯, 창 밖은 아직까지는 어둠이 가시지 않았다. 그는 창문을 활짝 열고 차가운 새벽 공기에 정신이 드는 것을 느꼈다. 항상 같은 꿈이었다. 꿈을 꾸지 않은 적이야 많았지만, 꿈을 꾸기만 하면 항상 똑같은 꿈. 브람스 교향곡 3번 3악장. 지휘자. 연주회장. 그 꿈은 항상 거기서 끊겼다. 어떤 실마리도 남기지 않고. 마치 그의 이력이 재단에 들어오기 전인 1985년 전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그 때, 그는 무언가 이상한 것을 보았다. 저 멀리 정원 입구쯤에서,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 형체가 보였다. 잽싸게 가방에서 쌍안경을 꺼내들고, 그는 그 형체에 초점을 맞추었다. 쪽진 머리. 새까만 옷. 어제 밤에 보았던 그 여자였다. 그 여자는 천천히 걸어 정원으로 사라져 버렸다. 위저 보드 같은 게 더 낫지 않겠소이까? 그 말이 시사하는 바는 분명했다. 그는 이제 모든 게 점점 걱정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만약 올라시 국장의 추측이 들어맞는다면, 그리고 저 여자가 그럴듯한 사기꾼이 아니라면….?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침대에 걸터앉아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날 아침 식사는 그가 예상했던 것처럼 끔찍하지는 않았다. 하녀들이 물론 ‘그 분’이 식사를 할 것이냐고 물어보기는 했지만, 샤를은 아침 식사에는 얌전히 앉아 빵을 칼로 썰고 있었다. 어제 저녁처럼 어두컴컴한 촛불이 아닌, 아침 햇빛이 식당을 밝히고 있어서 그런지, 대화가 오가지 않았음에도 분위기는 그럭저럭 괜찮아 보였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부인이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말했다. “에르티스 씨, 어제 일은 미안합니다. 알고 보니 내 딸이 피아노를 너무 오래 전에 쳐 보아서 악보 보는 법도 그만 잊었다는군요, 미리 알려드리지 못했습니다.” 입가에 미소를 띠고 말하고 있었지만, 그 어조는 어제처럼 여전히 냉랭했다. “그렇지만 남편이 말했다시피 이 아이는 분명히 재능이 뛰어난 아이입니다. 어제 보라색 방에서 악보 보는 법을 배웠으니, 이제 그 재능을 보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포기하지 마시고, 계속 가르쳐주시면 좋겠군요.” 뭐랄까… 어이가 없는데. 하루만에 악보 보는 법을 다 익힌다고? 엄하게 몰아치면 다 되는 줄 아나보지? 악보 보는 게 머리로 외우면 되는 줄 아나? 속으로는 투덜거렸지만, 카에스틴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부인은 그의 그런 반응이 당연하다는 듯 냅킨을 내려놓고, 한 마디를 덧붙였다. “지금 당장 시작해 주시죠.” 맙소사. 이건 또 뭐야? “지금 당장…이요?” 그가 약간의 냉소를 담아 되물었다. 그의 생각을 알아차린 듯, 마리엔느 부인이 답했다. “네. 걱정 마시죠. 정 안 되면 또 보라색 방으로 보내면 됩니다. 안 그렇니, 샤를?” 부인이 부드럽게 말하며, 아이의 뺨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아이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보라색 방’이라는 말이 나오자 잠시 몸을 움찔했을 뿐이었다.
보아하니, 나한테는 선택권이 없는 것 같군. 그는 고개를 끄덕거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에 들어가 악보들을 챙겨왔다. 식당으로 돌아오자, 아이는 이미 구석에 놓인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다. 그는 살짝 고민하다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8번 3악장> 편곡을 골랐다. 어제의 <헝가리 무곡 5번>보다는 확연히 어려운 곡이니, 아이가 못 칠 것은 보나마나 뻔했다. 아마 마리엔느 부인은 자신의 생각이 완전히 틀렸음을 깨닫게 될 것이고, 그러면 그는 그 틈을 노려 부인의 교육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공격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면 부인의 마수에서 저 아이를 빼낼 수 있겠지.
그러나, 그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아이는 망설이지 않고 두 손을 피아노 위에 올려놓더니,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단 한 음도 틀리지 않고. 어제 악보도 못 읽던 아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도 않았다. 그는 완전히 당혹스러웠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부인이 입가에 미소를 살짝 걸고 뒤에서 말했다. “말했다시피, 제 딸이 약간 재능이 있지요.” 카에스틴은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아이는 연주를 마치고 두 손을 무릎에 가지런히 모으고 앉아 있었다. 무표정, 아니 살짝 멍한 표정으로. “글쎄요… 그런 것 같기는 합니다만…” 그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악보를 집어넣었다. 그 때, 부인이 뒤에서 말했다. “그, 에르티스 씨, 혹시 그 곡 알고 계시나요? 그…” 부인은 허밍을 하며 그 곡이 무엇인지 알려주려 애썼다.
슬프게도, 이 아이가 진짜로 재능이 있다면, 어머니한테 물려받은 건 아니군. 저 허밍 실력을 보아하니. 부인도 분명히 느낀 듯, 계이름을 말하는 걸로 방법을 바꾸었다. “그러니까, 대충 듣기에, 도레미-솔파레, 도레미-시라레, 레미파… 뭐 그런 곡이었는데요. 저와 남편이 처음 만났을 때 들은 곡이랍니다. 혹시 아시나요?” 그는 약간 짜증을 섞어 말했다. “글쎄요. 부인. 저라고 이 세상의 모든 곡을 아는 건 아닙-“ 그 때, 어딘가 들어본 적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오늘… 꿈에서. 브람스 교향곡 3번 3악장.
그는 가방을 뒤적거렸다. 당연하게도 그 악보는 없었다. 지휘자가 아니니 원곡 악보를 가지고 있을 이유도 없고, 제대로 살릴 수도 없는 교향곡을 편곡해 놓지도 않았으니.
“음, 악보가 없군요. 아이에게 연주를 시킬 수가 없겠는데요.”
부인이 눈을 반짝였다. “상관 없지요. 선생님이 연주하면 아이가 그 다음에 따라하면 되니까요. 그 정도는 충분히 할 줄 알 겁니다.”
“네? 부인, 죄송하지만 그런 게 가능한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만…”
마리엔느 드네의 눈이 갑작스레 번뜩였다. “죄송하지만, 에르티스 씨, 혹시 본명이 루드비히 베토벤이신가요?”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만.”
“귀가 잘 안 들리시는 것 같아서요. 제가 할 말은 분명히 한 것 같은데.”
참 재밌군. 그는 속으로 이를 갈았지만, 결국 천천히 연주를 시작했다. 여기서 정면으로 싸울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당장 해고당할 테니. 그나마 느린 곡이라 다행이었다. 그는 천천히 연주를 시작하며, 속으로 아이가 제발 비슷하게라도 흉내내기를 빌었다.
그가 적당히 연주를 끊자, 아이가 피아노에 손을 올려놓았다. 조그마한 손가락들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는 손가락들이 건반을 누를 때마다 조마조마했다. 부인은 눈을 감고, 조용히 곡을 음미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때, 땅 하는 소리와 함께 불쾌한 C # 음이 곡의 흐름을 끊어버렸다. 부인이 눈을 번쩍 떴다. 순식간에 얼굴이 일그러지고 있었고, 뺨이 달아올랐다.
천천히 손을 들어, 집게손가락으로 그녀가 복도를 가리켰다. “가라. 보라색 방으로. 당장!” 아이는 어제처럼 울음을 터뜨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체념어린 표정으로 카에스틴을 잠깐 바라보고, 복도를 따라 가버렸을 뿐. 완전히 실패군. 아이가 도대체 어떻게 저렇게 갑자기 바뀐 건지 모르겠지만, 방금 전 내 플롯은 완전히 실패야. 아직 의자에 앉아 있던 카를 드네 시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여보. 어제도 보라색 방에 아이를 보냈잖소. 아이나 카드니 부인이나 너무 무리를 하는 것 같은데.”
마리엔느가 잠깐 남편을 돌아보았다. “그거야 직접 물어보면 알 일이죠. 카드니 부인!” 마리엔느가 높은 소리로 소리질렀다.
서쪽 복도에서, 키 큰 여자 하나가 소리 없이 나타났다. 눈은 탁하게 흐려져 있고, 얼굴에는 주름살이 가득하고, 쪽진 백발에, 새까만 옷. 섬뜩한 모습의 그 여자가 마치 둘러보는 것처럼 천천히 고개를 움직였다. 이윽고, 천천히 입이 열렸다.
“네. 드네 부인. 무슨 일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