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차로 속에 갇히다
평가: +8+x

작별이야.
전할 말은 이것 뿐이야. 더 이상은 연락하지 말아줘.
실망했다는 거 알아. 하지만 내가 당신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은 당신도 이미 알잖아.
행복하길 바래. 안녕.

바깥에서 총 소리가 들렸다. 제이미 애로우는 눈을 찌푸렸다. 약물 처리보다 총살이 싸다는 것은 별로 납득이 가지 않았지만 그는 시장 가격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었다. 총알의 가격과 저울질당한 D계급 인원 한 명이 오늘 죽었다. 그보다 이해하기 힘든 것은 발포 일정이 항상 아침 일곱 시에 예정된다는 점이었다. 제이미는 입맛을 다셨다.

타임 패러독스 사건이 일어난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3등급 보안 단계를 얻은 그는 직원 연수를 위해 제17기지에 찾아왔다. 그것은 함께 승진했던 펠릭스도 마찬가지였지만, 둘이 맡은 분야가 확연히 달랐으므로 만날 기회는 흔치 않았다. 제17기지에서 일주일을 보내는 동안 제이미는 펠릭스를 직접 만난 횟수를 손으로 꼽았다.

마침 벨소리가 울렸는데 발신자가 펠릭스였다. 그는 피식 웃으며 휴대전화를 들었다.

"여보세……"

"아니, 그러니까 당신 누구냐고요?"

휴대전화를 귀에 가져가자마자 앙칼진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또 누구야?"

"레인 양, 무슨 일이십니까."

"제이미? 제이미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된 일이냐니?"

"이렇게 된 일입니다."

갑자기 제삼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뭐야, 당신 누구야?"

"그래,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잠시만, 조용히 해주세요. 저도 얘기해드리고 싶습니다."

"좋아요, 얘기해 보시죠."

"설명해보라고."

제이미와 펠릭스의 목소리가 겹쳤다. 신원불명의 목소리는 난처한 기색을 표하며 말했다.

"일단, 혼란스러우니 한 명만 얘기해주세요. 여자 분은 듣기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뭐가 어쩌고 어째?"

"펠릭스, 참아. 계속 말해보시죠."

"좋아요, 저는 알렉실바 대학교의 보노디 교수입니다. 본의치 않게 이 휴대전화가 제 손에 들어왔는데요."

"휴대전화라고?"

"예, 당신 전화 같습니다만. 중간에 리지웨이라는 분에게서 연락이 왔었는데 배터리가 다 되어서 받지 못하고 그만 끊어져버렸고, 그 뒤로 같은 분에게서 메시지가 또 왔는데 비밀번호 잠금 때문에 열어보지도 못했습니다. 당신 것이 맞나요?"

"리지웨이라고요! 그 아저씨랑 요즘 통 연락이 안되고 있었는데."

"그럼 맞나보군요. 다행입니다. 그런데 이 전화 연결은 어떻게 가능한 거죠?"

"내 말이, 통화 회선이 꼬여도 이렇게 꼬일 수가 있냐는 거야. 그전에 제이미, 애초에 너 휴대전화 잃어버린 적 있어?"

"여자 분께서는……"

"아니, 없는데. 지금 내가 들고 있는 거 내 휴대전화야."

"음. 모델을 여쭤봐도 될까요?"

"검은색 '테디베어 v7'인데요."

"그렇습니까? 어디…… 그렇군요. 이것도 마찬가집니다. 같은 휴대폰이 두 개로군요. 지금으로써는…… 음…… 그렇군요, 타키온 간섭이라는 추측이 가능합니다만. 짐작가시는 바가 있습니까?"

"타키온이라고? 분명히, 저번 사건 때 타키온 펄스가 어쩌고……"

"그렇습니까. 뭐 그건 됐습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뭐가 중요한데요?"

"이 휴대폰이 간섭하는 바람에 저희 쪽 GPS 동작이 꼬여서 화물 수신 포트가 잘못 설정되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원래 받아야 할 화물 대신 이 휴대폰이 와버렸습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저희 화물을 되찾아달라는 뜻이지요. CC 좌표 33.108에서 보낸 프로메테우스 연구소의 화물입니다. 그걸 받으면 이 휴대폰을 돌려 드리겠습니다."

"뭐라고요?"

"답답하군요! 그쪽 문제로 저희가 피해를 입었으니 그쪽이 해결해달라는 뜻 아닙니까!"

보노디 교수는 화를 냈다. 펠릭스가 말했다.

"제이미는 이미 자기 휴대폰이 있고, 그쪽으로 넘어간 휴대폰은 필요하지 않다고 하면 어쩔 건데요?"

"필요 없다고요? 진심입니까? 거래처의 연락이 계속 이쪽으로 들어오고 있는데요. 리지웨이라는 분의 메시지라던가 말입니다."

"펠릭스를 제외하면 내 휴대폰은 지난 일주일간 계속 잠잠했는데……."

"그건 제가 설명해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쪽 휴대폰의 반응이 더 빠릅니다. 메시지와 전화 연결 같은 것 말입니다. 그 탓에 이쪽 휴대폰에서 메시지를 받았다는 신호를 먼저 쏘아보내면 그쪽에 메시지가 닿기 전에 시퀀스가 종료되어서 당신은 수신받지 못하는 겁니다. 이것 흥미롭군요. 아인슈타인-로센 다리에 타키온 펄스라……"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잘 모르시겠으면 그냥 그런 줄 알고 넘어가시면 됩니다."

"그럼 이 전화는 뭡니까? 그쪽이랑 펠릭스가 먼저 연결이 됐는데 제가 나중에 또 받은 거잖습니까."

"전화 통화는 통화 자체가 종료될 때까지 신호가 지속되니 중간에 끊기고 말고 할 것이 없지요. 그쪽 벨소리가 울리기 전에 제가 전화를 끊었다면 마찬가지로 당신 쪽에서는 아예 수신받지 못했을 겁니다."

"당신 인공위성에 대해서 알고 있긴 한 거야?"

"됐습니다. 소모적인 이야기는 그만하죠. 그래서 이 전화가 필요없다고 말할 생각입니까?"

"아니야, 리지웨이 아저씨의 메시지는 꼭 봐야겠군요. 펠릭스, 아저씨랑 요즘 통화해본 적 없지?"

"안 받아."

"그래, 무슨 일이 있었을 지도 모르잖아. 메시지를 확인해야겠어."

"노파심에 말하는 거지만 저희 화물을 받기 전에는 돌려드리지 않겠습니다."

"아 알았다고요, 진짜!"

"그, 어디라고 했죠? 프로메테우스 연구소?"

"저희 화물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니요, 없는데요."

"그렇다면 일단 그걸 가져오세요. 전송 방법은 그다음에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오래 걸리지 말아주세요."

전화가 뚝 끊기는 소리가 들렸다. 제이미는 입을 벌린 채로 잠시 방금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생각했다.

"젠장, 그 화물이 어딨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내가 들었어."

"아, 펠릭스. 넌 아직 안 끊었구나."

"화물을 보낸 프로메테우스 연구소는 CC 좌표 33.108…… CC 좌표가 대체 뭐야?"

"다시 연락해야하지 않을까?"

"네 휴대폰으로 네 휴대폰에 전화를 걸겠다고?"

"하여튼 아까 통화가 됐잖아."

"좋아, 난 프로메테우스 연구소에 대해서 찾아볼게. 넌 다시 걸어봐. 그 연구소에 문의를 해보면 무슨 화물이었는지 알겠지. 아까 그 사람 이름이 뭐라고? 버나드?"

"보노디. 알렉실바 대학교 사람이래. 배운 거 기억 나?"

"알렉실바 대학교에 대해서 배우려면 아직 멀었는데. 난 이제 혼돈의 반란 수료 중이란 말이야."

"알았어, 어쨌든 당분간 이번 일 입밖에 내지 마. 휴대폰은 받아보고 보고를 하든 할래."

"또 비밀 작전이야? 걸리면 죽는다 진짜."

"뭐 언젠가야 웃을 날이 오겠지, 펠릭스."

"그 말 좀 이상한데 써먹지 마. 마법 주문이 아니라고."

"알았어, 알았어. 어쨌든 부탁해."

"그래, 뭔가 알아내면 전화할게."

통화가 완전히 끊겼다. 제이미는 휴대폰을 두들겨서 자신의 번호를 입력했다. 좋아, 이번엔 알렉실바 대학교로군. 아예 차원의 틈에 존재하는 것이 않을까 하는 미지의 단체였지. 그는 창문을 열었다. TP 사건 때 건너온 휴대폰이 남아있었던가? 패닝 박사가 말했었지. 그런 물건들은 곧잘 말썽을 일으킨다고. 제이미는 잠시 거기에 대해서 고심했다. 휴대폰 말고 또 뭔가 있지는 않으려나.

"전화가 연결되지 않아……."

보노디 교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의 전화로는 통화가 불가능한 걸지도 몰랐다. 그는 휴대전화를 닫았다.

"뭐, 그건 그 일이고. 지금은 이 일."

제이미는 옷을 걸쳐입고 차 열쇠를 챙겼다. 차원 얘기가 당연하게 새어나오는 알렉실바 대학교가 등장한 시점에서 벌써 심상치 않았지만…… 그런 건 이미 겪어봤겠다, 그것만 빼면 그저 화물 찾아 삼만리라는 이야기였다. 그는 먼저 아침을 먹기 위해 급식소로 향했다.


그래, 쉽게 끝나지 않을 거라고 예상하긴 했었다.

프로메테우스 연구소는 아예 박살이 났다. 제이미는 아무도 찾지 않는 그 터를 허무하게 바라보았다. 펠릭스가 얘기한 그대로였다. 그가 차를 타고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녀는 프로메테우스 연구소가 무너진지 10년이 넘었고, 그들이 연구하던 자료와 발명품들은 격리 대상으로 취급되어 재단에 흡수되었다고 전했다.

돌아갈 길을 생각하면, 도합 10시간을 내다버린 셈이다. 제이미는 머리를 긁적이며 차에 올라탔다. 다시 한 번 자신의 번호로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보노디 교수는 받지 않았다. 이제 화물을 어떻게 찾을 지가 문제였다. 그는 이어서 펠릭스에게 전화를 걸어보려다가 이미 밤이라 자고 있을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그는 지루한 운전을 하다가 중간에 차에서 잠을 자고 다시 차를 몰아 제17기지로 돌아왔다.

오전 11시경이었는데, 제17기지의 입구는 기동 부대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불안감이 엄습한 제이미는 서둘러 차를 주차하고 달려갔다.

"무슨 일입니까?"

"신원을 밝히시오."

"재단 소속 3등급 연구원 제이미 애로우입니다." 그는 신분 카드를 내밀었다.

"제17기지 소속입니까?"

"직원 연수 중이었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언제 나갔었죠?"

"어제 오전에요. 9시쯤."

질문하는 기동 부대 요원 옆에서 그를 보며 듣고만 있던 남자가 말했다.

"제17기지는 전날 16:00경에 완전차폐되었습니다. 우리도 그 이유는 모릅니다."

"뭐라고요?"

"적색 경보가 울린 뒤에 SOS 요청이 전 기지에 돌아갔는데 그 뒤로 갑작스럽게 공식적인 모든 연락이 끊겼습니다."

"사적인 연락은요?"

"보안 유출이 우려되는 상황이니만큼 저희 쪽에서 모든 신호를 빼돌리고 있습니다."

"동료에게 연락해봐도 될까요?"

남자는 제이미를 바라보며 망설이는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저었다.

"상부에 먼저 보고하겠습니다. 연락은 허가를 받은 뒤의 일입니다."

"그런 게 어딨습니까?"

"한 통의 전화만으로도 제17기지와 바깥이 연결되는 회선 하나가 연결되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제이미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이고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기동부대가 둘러싼 제17기지 입구 앞에 박사처럼 보이는 사복 차림의 남자들이 여럿 서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기동부대가 선두 진입을 안 한다고?"

"말하지 않았나? 지금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단 말일세. 지금 부서진 신의 교단 타격 작전 때문에 기동 부대가 현격히 부족한 상황이야. 여기서 더 이상 지원이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섣부른 진입은 피해야 해."

"그래서 박사 한 명만 안에 집어넣겠다고?"

"우리가 원하는 건 상황 파악이네, 키넛 박사. 정찰특무부대 출신인 자네밖에 없지 않은가?"

"말도 안되는 소리는 그만 집어치워…… 혹시 상부의 지목인가?"

"그만 준비하지 않겠나?"

"제기랄……."

키넛 박사는 다른 박사진들을 노려보았다. 옆에서 듣고 있던 제이미가 나섰다.

"저기, 박사님들."

"뭐지?"

"저도 들어가고 싶습니다."

"뭐라고? 제정신인가?"

"안에 제 동료가 있거든요. 저도 어떻게 된 일인지 확인하고 싶습니다만."

"자네 소속이 어딘가?"

"제17기지에 연수 차 일주일간 머물고 있던 3등급 요원 제이미 애로우입니다."

박사들이 눈을 마주치며 웅성거렸다. 앞에 홀로 동떨어져서 그들을 마주보고 있던 키넛 박사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럼 이 친구를 집어넣고 난 빼주게."

"억지 부리지 말게, 테이트. 애송이 하나 집어넣었다가 3분도 못 버틸지도 몰라.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른다는 걸 상기해."

제이미는 애송이라는 말에 잠시 고개를 들었으나 다시 숙이고 잠자코 있었다.

"그래, 그러면 자네는 빠져. 나처럼 재단의 골칫거리 취급받다가 이런데서 소모품으로 쓰이지 말고. 그렇지 않나, 박사님들?"

"그만둬, 테이트."

"내가 그다지 쓸모가 없었나 보군. 그거 기억해두지."

"진입할 준비나 하게. 그리고 애로우라고 했나? 자네도 함께 가. 테이트 박사에게 길을 알려주는 역할이라도 하게."

기동부대원 한 명이 다가오더니 테이트 박사에게 방탄복과 피스톨을 내밀었다. 놀랍게도 그는 약간 비아냥거리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부족하시면 기동부대에서 자동소총이라도 한 정 빌려다가 드릴까요?"

"입 닥치고 저리 꺼져."

그는 제이미에게는 오지 않고 그대로 기동부대원들 사이로 들어가 버렸다. 제이미는 약간 얼떨떨했다.

"가능하면 지금 당장 들어가게. 시간이 급한 일이니까 말이야. 괜찮겠나?"

"더 이상 내 신경 건들지 말게."

"그럼 두말 않고 열도록 하지."

그 남자는 정문으로 다가갔다. 테이트 박사가 문앞에 서는 것을 본 제이미는 어리둥절하면서도 그 옆에 따라붙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박사님. 저한테는 무기라던가 방탄 조끼라던가 주지 않습니까?"

"고작 일반 연구원들에게 쏟아줄 예산은 없는가 보군."

테이트 박사는 한 마디만 하고 입을 다물었다. 제이미는 더욱 당황했다.

"10초 뒤에 문이 열리네. 무전기 받고."

문 옆의 전자 키패드를 조작하던 남자가 물러나며 말했다. 저번과는 다른 기동부대원 하나가 마치 잊어버렸다는 듯 급하게 달려나와 무전기를 전달했다. 테이트 박사는 탐탁치 않은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곧 문이 열렸고, 두 사람이 들어갔다. 그들이 제17기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아까 그 남자가 키패드 앞으로 튀어나오더니 문을 바로 닫아버렸다.

"테스트. 테이트 박사, 내 말이 들리나?"

테이트 박사는 무전을 듣고도 응답하지 않았다. 제이미는 이 신경전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지만 펠릭스를 찾는데 집중하기 위해 말을 아꼈다.

"테이트 박사? 들리는 거 다 아니까 대답하게."

제17기지 정문 주변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사실상 이것부터가 말이 안되는 일이었다. 사방이 조용했다.

"테이트 박사!"

"닥쳐." 테이트 박사가 무전기에 대고 말했다.

"안쪽 상황이 어떻지?"

"뭔가 알아내면 연락할 테니까 소리내지 마시오."

다행스럽게도 무전기 너머에서 더 이상 아무런 말이 없었다. 두 사람은 전면 로비를 지나 중앙 복도로 들어왔다.

한 남자가 고통스러운듯 옆구리를 잡고 쓰러져서 몸을 뒤틀고 있었다. 제이미가 달려나갔지만 테이트 박사가 뒤에서 "그만."이라고 한 마디 하는 바람에 멈춰섰다. 발작하듯이 몸을 뒤틀던 남자의 팔이 들렸는데 마치 기계처럼 보였다.

"저게 대체 뭐야?"

"의수처럼 보이나?"

"아니요, 훨씬 정교해 보이는데요."

"몸의 다른 부위는?"

"잘 안 보입니다. 박사님께서는……"

제이미가 고개를 돌리자 맞은편에서 기계 인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테이트 박사는 이미 그것을 보고 있었다. 제이미는 경악했다.

"이게……"

"뒤쪽에 더 많아. 따라오게."

테이트 박사는 중앙 복도를 따라 더 들어갔다. 제이미가 황급히 뒤를 쫓는데 중앙 로비에 기계 인간들이 잔뜩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멈춰선 테이트 박사는 그를 옆에 있는 방으로 이끌었다. 작은 물류 창고였고, 더 이상의 길은 없었다. 박사가 문을 잠갔다.

"어이가 없군."

"박사님, 이제 어떻게 합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어. 여기서 가만히 기다려야지."

박사가 무전기를 집어들었고, 곧바로 응답이 돌아왔다. 박사는 말했다.

"왜 기지 전체에 태엽장치 바이러스가 퍼져있는지 설명해주겠나?"

"뭐라고?"

"두 번 말하지 않겠네. 이제 어쩔 테지?"

"부서진 신의 교단의 짓인가?"

"나한테 물으면 곤란하지."

"알았어. 상부에 연락하지. 격리 대상들은 안전한가?"

"우리 지금 중앙 로비 안쪽 작은 물류 창고에 있네. 기계 좀비들이 길을 막고 있어서 더 이상 들어가지 못했어."

"알겠네."

무전기에서 더 이상 말이 없었다. 테이트 박사가 다시 말했다.

"그걸로 끝인가?"

"뭐가 말인가?"

"다음 대처는?"

"상부의 지시를 기다려야지, 테이트. 수순을 알잖나. 제17기지 전체가 걸린 일이야. 안전하다면 그 자리에서 대기하게."

"상부가 지시할 내용 중에는 물론 내 구출 작전도 포함되겠지?"

"그럴 테지. 이제 무전을 끊겠네. 이쪽에서 다시 연락 주겠네."

"잠깐, 잠깐, 잠깐만요!"

제이미가 급히 무전기를 빼앗아들었다.

"자네는 뭔가?"

"17기지 소속 동료에게 전화를 하고 싶다고 요청 드렸었는데요! 어떻게 됐습니까?"

"방금 바이러스 사건으로 판명된 것이니만큼 통신 차단은 일단 풀렸소. 단 통화 자체는 여전히 우리가 감시할 거요."

"감사합니다. 이제 전화 걸어도 받는다는 뜻이죠?"

"그렇소. 생존한 사람이 더 있다면 이쪽으로 연락 주시오."

"알겠습니다."

제이미는 무전기를 테이트 박사에게 내밀었다. 테이트 박사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볼 뿐이었다. 제이미는 겸연쩍어하며 무전기를 땅에 내려놓았다.

펠릭스는 다행스럽게도 전화를 빨리 받았다.

"펠릭스?"

"제이미? 너 괜찮아?"

"내가 물어볼 말 같은데."

"아, 나 지금 2층 컴퓨터실에 갇혀있어. 몸은 멀쩡해."

"어떻게 된 일이야?"

"잘 모르겠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야. 태엽장치 바이러스 알아?"

"그제 강의가 부서진 신의 교단에 대한 얘기였지."

"원래 태엽장치 바이러스는 인간 대상으로 증상 발현에 10년 이상 걸릴 때가 많아. 그런데 이번 바이러스는 잠복기가 아예 없다시피 한 것 같아. 변형된 것 같다는 소리야."

"확실해?"

"그래, 돌연변이라고 보기도 힘들어. 누군가가 개조한 버전이야."

"다른 사람들은 어때?"

"여긴 나 혼자 갇혀있어. 다른 사람들도 어디쯤에 비슷하게 갇혀있는 사람이 많을 거야. 지금도 간간히 총소리가 들려와."

"너 총 있어?"

"아니, 없어. 괜찮아, 문을 막아뒀어. 감염자들은 둔하니까 어떻게 못할 거야."

"우리 이 상황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아? 기지 안에 갇히는 거 말야."

"기지 차폐 사태를 당한 적이 또 있다고?"

"아니야, 잊어버려. 컴퓨터실이라고 했지?"

"그래, 이번 일의 주동자를 찾아보려고 하는데 난 보안 기록에 접속이 안 돼."

"바깥하고 연락을 취해볼게. 지금 밖에 기동부대가 대기 중이거든."

"잘 됐군. 이제 통화 되는 거야?"

"어, 신호 차단이 막 풀린 거야. 보안 기록이라고 했지?"

"너 지금 다른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지? 보안 기록은 다른 저장소로 옮기는 게 불가능하잖아."

"뭐라고? 그 말인즉슨……."

"결국 또 나라는 거지, 제이미. 내가 직접 뒤져봐야 한다니까."

"알았어. 권한을 요청해볼게. 잠깐만 기다려. 박사님? 제 동료가 지금 컴퓨터실에 갇혀 있다고 합니다. 보안 기록에 접속할 권한을 요청하는데요. 데이터 뱅크 관리 요원인데 이런 거 잘합니다."

"무전기 줘 봐. 그 통화 스피커폰으로 틀어두게. 응답하시오."

"무슨 일이지?"

"2층의 컴퓨터실에 요원 한 명이 갇혀 있는 것이 확인됐소. 권한을 주면 보안 기록에 접속할 수 있다고 합니다."

"보안 기록이라고?"

"벌어진 사태를 확인하는데 그만한 게 없지 않소?"

"하지만 이건 경우가 다르지. 그 요원의 보안 레벨은 몇 단계요?"

"3등급입니다."

"3등급이라는군."

"이건 민감한 문제야. 보안 기록을 꼭 확인할 필요가 있는가?"

"지금 진입 계획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잡힌 사안이 하나라도 있나?"

무전기는 말이 없었다.

"결국 권한을 주게 되어 있어, 관리자. 허가하게."

"그 요원의 신분이 어떻게 되는가?"

"현재 제17기지 소속 3등급 요원 펠릭스 레인."

"제17기지 소속 3등급 요원 펠릭스 레인."

"상부에게 보고하지. 답이 내려오는대로 그쪽에서 허가를 줄 거야."

"자네도 충분히 허가를 내릴 수 있지 않나, 제17기지 관리자?"

"내 결정에 토 달지 말게, 키넛 박사."

무전이 끊겼다. 제이미는 펠릭스에게 말했다.

"권한 허가를 검토하는데 약간 시간이 걸린다나 봐."

"물론 그러시겠지. 지금 어디 있는데?"

"아, 그게 말이지. 1층 물류 창고."

"농담할 때가 아니잖아, 제이미."

제이미는 약간 뜸을 들였다.

"……제이미?"

"나도 갇혔어."

"뭐라고? 언제 돌아왔었는데?"

"오늘 아침. 상황 파악을 위한 초기 정찰 대원으로 내가 임명됐단 말씀이야."

"이 멍청아, 완전차폐된 기지를 뭐하러 들어오는 거야?"

"안 들어가면 진입 작전에 무리가 있다잖아. 상황 파악이라니까. 전투가 아니야."

"그게 무슨 상관이야? 혼자 들어왔다고?"

"아니야, 박사님 한 분과 같이 들어왔어. 같이 갇힌 셈이지만."

"우리가 아는 사람이야?"

"글쎄, 난 처음 듣는데. 테이트 키넛 박사."

"뭐라고? 키넛? 휴, 큰일났는데! 그 사람 완전 또라이로 유명해, 제이미."

테이트 박사가 제이미를 노려보았다. 제이미는 얼이 빠졌다.

"그 사람 진짜 못 들어봤어? 글쎄 말이지, 저번에 오클랜드에서 있었던 일인데, 민간인을……"

"펠릭스, 지금 스피커폰이야."

"뭐라고?"

그는 진땀을 뺐다.

"지금 옆에서 박사님도 같이 듣고 있다고."

"아…… 아, 그래. 박사님. 안녕하세요? 그냥 소문이 그렇다는 얘기였어요. 제 얘기가 아니라요. 그런 이야기 돌고 있다는 거 어차피 알고 계시잖아요?"

"펠릭스."

"알았어, 나도 몰라. 알아서 해, 제이미. 다시 말하지만 조심해. 내 말은, 네 옆에 있을 그 박사님 말이야. 들리는 바에 따르면 네가 옆에서 좀비한테 물어뜯기고 있어도 얼굴 표정 하나 안 바꾸고 좀비랑 너 둘 다 쏠 인간이야."

"펠릭스!"

"권한 들어오면 전화해 줘. 안녕!"

전화가 끊겼다. 제이미는 테이트 박사를 쳐다보았다. 그를 마주 보던 박사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자기 휴대폰으로 시선을 옮겼다.

"동료라더니 자기 애인이었군."

딱히 무슨 뜻을 두고 한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제이미는 소름이 끼쳤다.


제이미가 리지웨이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동안 테이트 박사는 휴대전화로 그의 비서 레이번에게 전화를 걸었다.

"레이번, 바깥 상황은 좀 어떤가?"

"정적인데요, 박사님. 말 그대로 정적입니다."

"구출 작전 따위 안중에도 없지?"

"어디, 간부급 직원들은 모두 탈출에 성공했고, SCP들은 일단 바이러스에 영향이 없을 거라고 판단되고, 영향이 있어도 어차피 지금 뭘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잖습니까?"

"무슨 뜻이야?"

"SCP가 지금 격리 상태로 감염이 안 됐으면 한 달이 더 지나도 감염 안 될 거고, 벌써 감염이 됐다면 별 수 없다는 식이죠. 정 안되면 만병통치약이라도 쓰던가 그러지 않겠습니까."

"수사 상황은?"

"글쎄요, 외부에서는 보안 기록에 접속할 수 없으니까 좀 난처합니다. 일단 바이러스가 기지에 살포된 과정을 찾고는 있습니다. 범인이야 뻔하고요. 부서진 신의 교단이겠죠."

"그놈들 짓인 건 다 알아. 문제는 왜 그랬느냐는 거지."

"제가 다른 비서들과 연락을 취해본 결과에 따르면…… 최근에 그 남자가 제17기지 주변에서 자주 출몰했다고 하는데요."

"내가 생각하는 그 남자 말하는 건가?"

"예, 상부에서는 그 남자가 술수를 부린 것 같다고 봅니다. 지금 대처가 늦은 것도 그것 때문이에요. 의도한 바가 뭔지 두고 보겠다는 거죠."

"상부 놈들이 어떻게 하든 난 상관 없어. 그래서 부서진 신의 교단 사람이 제17기지에 찾아와서 태엽장치 바이러스를 뿌리고 갔다는 건가?"

"그건 확실하지 않아요. 하지만 부서진 신의 교단이 관련된 건 분명하다고 봅니다. 제17기지에 교단의 첩자가 있다는 사실은 듣고 가셨죠."

"그랬지."

"이번 부서진 신의 교단 타격 작전도 그걸 추적한 결과고요."

"아는 이야기는 빨리 넘어가."

"타격 작전 자체는 잘 진행되고 있는데, 첩자가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가 글쎄 구리단 말입니다. 제17기지에서 발견했다고 했어요."

"뭘?"

"글쎄요. 어쨌든 그것 때문에 벌어진 일로 추측됩니다."

"좋아, 알았어. 무슨 소식 들어오면 다시 알려줘."

"아, 잠시만요. 지금…… 강 하구에서 시체 한 구가 나왔답니다."

"관계 있어?"

"글쎄요, 잠시만요…… 일단 재단 인원이라는데요. 어제 아침에 총에 맞아 죽었다고 합니다."

"어제?"

"그렇다면 분명 제17기지 인원이었겠죠. 우연일 리가 없죠?"

"신원은 확인됐나?"

"램지 프레데릭 박사라고 하는 군요. 특이한 이름이네요. L로 시작해요. 아십니까?"

"잘 모르겠군. 몇 번 들어본 기억은 나는데 말이야……. 아마 고위 간부였을 거야."

"그런가요? 대사건이군요. 정보가 더 들어오면 연락하겠습니다."

"알겠네."

테이트 박사는 전화를 끊은 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제이미에게 말했다.

"애로우."

"예? 무슨 일이십니까." 제이미는 상자를 깔고 앉아서 휴대폰 배터리를 계산하는 중이었다.

"자네 애인한테 다시 전화해서 램지 프레데릭 박사에 대해서 조사해보라고 하게. L로 시작하는 램지야."

"애인이라니요."

"스피커폰으로 해 둬."

제이미는 한 손으로 휴대폰을 눌러 펠릭스를 다시 불렀다.

"무슨 일이야?"

"너 지금 할 일 없지?"

"보안 기록을 못 보니까 할 수 있는 게 없지."

"그럼 지금 데이터베이스 띄워서 램지 프레데릭 박사 좀 검색해 봐."

"램지?"

"R이 아니라 L로 시작해."

"잠시만…… 흠, 램지 프레데릭 박사. 며칠 전에 죽었대. 다른 정보는…… 어라, 전부 기밀이네."

"기밀이라고?"

"다 기밀이야. 이름, 성별, 나이, 생존 여부 빼고는."

"그래?" 제이미는 테이트 박사에게 눈짓을 보냈다. 테이트 박사는 벽에 등을 기대고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프레데릭 박사는 어제 이 근처에서 죽었어."

"어제요?"

"무슨 소리야?"

"프레데릭 박사가 어제까지 여기 살아있었대."

"데이터 뱅크에는 적어도 일주일 전에 사망했다고 나오는데."

갑자기 무전이 왔다.

"키넛 박사, 응답하게."

"무슨 일이지?"

"레인 요원에게 보안 기록 열람 권한이 주어졌네. 이번 사건과 관련된 내용만 확인해야 한다고 당부하게."

테이트 박사는 무전에 응답하지 않고 제이미에게 손짓했다. 제이미가 말했다.

"펠릭스, 방금 권한이 하달됐어. 이제 보안 기록을 열람할 수 있다는데."

"프레데릭 박사가 이번 사건과 연관이 있는 거야?"

제이미는 테이트 박사를 쳐다보았고, 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보안 카메라에서 프레데릭 박사를 찾아볼게. 뭔가 발견하면 연락할 거야."

"오케이, 수고해. 이쪽은 바깥과 계속 연락하고 있을게."

전화가 끊기자 제이미가 말했다.

"프레데릭 박사가 누굽니까?"

"나도 모르네. 기밀 처리된 걸 보면 높으신 분이겠지."

"박사님도 상당히 높은 분 아닙니까?"

"난 엄연히 현장 요원이라서 말이야."

"그렇군요. 그러면……"

바깥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제이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생존자일까요?"

"샷건 소리인데. 꽤 멀어."

"밖으로 한 번 나가볼까요?"

"그럴 필요가 있나?"

"도움이 필요할 지도 모르잖아요."

"내 도움은 기대하지 말게."

제이미는 테이트 박사를 곁눈질했다.

"진심입니까?"

"정 그렇다면 문을 좀 열어서 바깥 상황을 확인하는 것 정도면 어떤가?"

"좋아요. 해보죠."

제이미는 문으로 다가가 잠금을 풀고 고개를 내밀었다. 바깥은 그대로인 것처럼 보였고 총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기계 인간들의 숫자가 아까보다 더 불어난 것 같았다. 그는 그들을 쳐다보며 혹시 아는 얼굴을 구별할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걱정했다.

그 때 기계 인간 한 명이 제이미를 발견하더니 톱니바퀴 소리를 내며 그를 가리켰고, 다른 기계 인간들이 일제히 삐걱거리며 제이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기겁한 제이미는 문을 다시 닫고 잠갔다. 천천히 그 자리에서 물러나는데 바깥에서 쿵쿵거리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노크는 반복적이었고, 느릿했지만 아주 무례할 정도로 셌다.

"죄송합니다, 박사님."

"문이 부서질까?"

"적어도 내일까지는 부서질 것 같네요."

"그럼 그동안 뭐라도 다른 생각을 해보지."


레이번의 휴대폰은 바빴다. 그는 아까의 통화를 끊고 다시 연락처를 뒤졌다. 그 대령이던가 하는 사람 비서 이름이 뭐였더라…… 찾았다.

"아, 안녕, 나 레이번이야. 응, 맞아, '전범' 밑에서 일하는. 아, 됐어, 괜찮아. 그건 그렇고, 제17기지 알지? 그래, 지금 완전 이상하잖아. 거기랑 부서진 신의 교단이랑 관계를 좀 찾아줄 수 있어? 어, 그렇고 말고. 그래. 최근 자료. 주목할 만한 거 전부. 알았어, 부탁해."

그는 전화기를 집어넣었다. 돌릴 만한 곳에는 다 돌렸고…… 발걸음이 강변으로 향했다. 램지 프레데릭 박사가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탄피가 발견됐다. 피스톨의 한 종류였지만 그다지 중요한 정보는 되지 못할 것 같았다. 재단의 간부가 제17기지에 아무도 모르게 찾아올 이유가 대체 무엇이었을까. 상부는 프레데릭 박사의 죽음에 대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 가치가 없거나, 예정된 일이었거나, 완전히 당황했거나. 그들의 반응은 세 가지로 고정되어 있었지만 침묵은 세 경우 어느 쪽도 가능한 유용한 연막이었다. 조만간 본부 쪽에서 사람이 더 나타난다면 세 번째일 가능성이 높아지겠지. 레이번은 냄새를 맡았다. 프레데릭 박사의 죽음이 이번 사건과 연관이 있기는 할 테지만, 그가 신경 쓸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좀 더 높은 차원의 문제였다. 그렇다면 집중할 수 있는 문제에 집중해야지.

제17기지에는 '정비공'이라는 남자가 D계급 신분으로 잡혀 있었다. 예전엔 부서진 신의 교단 쪽 사람이었는데, 붙잡힌 뒤에는 버려졌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포로로 잡혀있는 와중에도 몰래 연락을 지속했다는 모양이다. 재단은 알면서도 그들을 방치했고, 부서진 신의 교단이 그들에게서 뭔가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정비공은 얻을 만한 정보를 다 뽑아낸 뒤에 어제 사형당했다. 동시에 기동특무부대들이 소집되어 부서진 신의 교단에 대한 타격 작전을 감행했다. 작전은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다만 정비공과 각기 다른 기지에 뿌려진 다른 첩자들이 재단에서 그토록 찾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아직 모른다는 점이 약간 거슬렸다.

정비공이 '발견했다'는 문서를 밖으로 보내자, 교단은 신속한 답을 보냈다. 그는 휴대폰을 두드려 다시 그 이미지를 띄웠다. 이미 사형되고 없을 정비공에게 보내는 부서진 신의 교단의 최종 지령이었다. 꽤 낭만적인 구석이 있는 편지였지만, 애석하게도 이번 암호는 어이없을 정도로 쉬웠다.

'작전실행'이라. 그리고 제17기지에 태엽장치 바이러스가 뿌려졌다…….


밖으로 무전을 쳐봤지만 3분이 지나서야 받은 대답이라곤 '기다리라'가 전부였다. 문 두드리는 소리에는 이미 적응된 두 사람이었다. 제이미는 한동안 물류 창고를 뒤적거렸으나 테이트 박사가 돕지 않는 것을 보고는 그만두었다. 상대방이 내내 입을 다물고 있었기 때문에 홀로 문이 부서질 때의 상황을 가정하고 있는데, 갑작스럽게도 박사는 제이미와 대화가 나누고 싶어진 듯했다.

"자네 이름을 들어본 적 있어."

"예?"

"패닝이라는 사람을 기억하나?"

"아, 저번에 있었던 소동에서 만났던 박사님인데요. 휠체어 타시던 분. 소속이 아마…… 보안…… 보안?"

"내부 보안부. 내 동생이야."

"정말입니까?"

"자네에 대해서 칭찬하는 말을 하더군."

"정말로요? 그렇게 생각하는 줄은 몰랐는데요."

"자네는 그와 친했나?"

"글쎄요. 얘기는 몇 번 나눠봤지만 그렇게 친해질 기회는 없었습니다. 전 현장 요원이니까요."

"무슨 얘기를 했는지 물어봐도 되겠나?"

"사건에 대한 이야기였죠. 만난 과정도 그렇고, 개인적인 이야기는 전혀 듣지 못했습니다."

"사건이라면 분명 혼돈의 반란의 첩자를 색출하는 일이었지."

"음…… 예, 박사님 쪽에서는 그런 일이었죠. 10년 동안이나 추적하고 있었다고 하셨는데, 잘된 일이죠."

"10년. 10년이라. 패닝이 첩자 하나 잡는데 10년 씩이나 걸렸다고."

"그만큼 첩자가 대단해서……"

"아니, 그럴 리가 없어. 패닝은 말로는 첩자 색출에 열을 올리고 있다고 했지만 사실 정신은 딴 데 팔려 있었지."

"그렇습니까? 무슨 일이었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는 녀석이야. 최근 패닝에 대해서 들어본 바 있나?"

"아니요."

"그 녀석 얼마 전에 UIU로 떠나버렸네."

"UIU? 특이사건수사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재단의 간부가 그런 곳에는 왜?"

"거기 사정이 개판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 텐데 말이 통하질 않더군."

"이상한 일이군요."

"그 녀석이 거기에 대해서 뭐라고 하던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나?"

"모르겠습니다. 헤어질 때만 해도 그저 미루던 일이 해결된 것 같은 표정이었는데요."

"망할 자식."

나긋나긋한 형은 아니로군. 제이미는 평가했다.

"그렇지만 뭔가 이유가 있으니 거기로 간 것 아니겠습니까?"

"들은 바가 없네."

"왜 전화해서 물어보지 않으십니까?"

"뭐라고 했나?"

"전화해보셨습니까?"

"아니."

"대화가 중요한 거라고요, 박사님. 언제든지 전화할 수 있는 사이라면 결국엔 숨길 일이라는 게 없습니다."

"자넨 쓸데없는 참견이 심하군."

"죄송합니다."

박사는 여전히 인상을 구기고 벽에 기대고 있었다. 제이미는 그가 그만 앉아 있어도 그다지 이미지가 깨지지는 않을 텐데, 하고 생각하며 습관적으로 휴대폰을 열었다. 배터리가 20% 좀 안 되게 남았다. 이만한 용량이 남으면 이상하게 다른 때보다 더 빨리 닳는단 말이지.

그 때 펠릭스에게 연락이 왔다.

"여보세요?"

"찾았어. 프레데릭 박사야. 제17기지에는 그제 나타났어. 행동이 이상해. 보안문은 대부분 걸렀고 신분 증명은 ID 카드를 보여주는 걸로만 하더라. 보안문 앞에서 다른 직원을 불러서 대신 열게 시켰다니까. 근데 이상한 거 있지, 직원들은 다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했다는 거야."

"그거 이상하네."

"스피커폰."

테이트 박사의 말에 제이미는 뒤늦게 스피커폰을 켰다.

"하여튼, 어제 새벽에는 D계급 한 명을 면담했어. 그리곤 데리고 밖으로 나왔는데 그것도 경비가 순순히 받아들인 거야! ID 카드 하나로 말이야. 이쯤 되면 무지하게 높으신 분 아니야?"

"그럴 지도."

"그리고 아침에 그 사람을 데리고 아예 제17기지 밖으로 나가버렸어. 그런데 조금 있다가 보니까 프레데릭 박사는 안 보이고 D계급 남자 하나만 돌아오는 거야. 등에는 샷건을 메고, 손에 뭔갈 들고 말이야. 옷도 갈아 입었고."

"그게 몇 시지?"

"7시 경."

"뭐라고?"

테이트 박사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7시? 확실해?"

"응. 왜?"

"그 때 밖에서 분명히 D계급 총살이 진행되고 있었을 텐데. 확인해 봐."

"진짜야? 웩. 잠깐만 기다려."

박사는 제이미를 곁눈질하며 바깥의 누군가와 대화를 나눴다. 램지 프레데릭 박사의 이름이 지나갔다.

"제이미, D계급 사형 예정은 그제 취소됐어."

"뭐야?"

"램지 프레데릭 박사가 찾아온 날이야."

"분명히 어제 아침에 총소리를 들었다니까."

"그건 램지 박사가 총에 맞는 소리였어." 테이트 박사가 휴대폰을 닫으며 말했다.

"정말이에요?"

"또 왜, 제이미? 무슨 말이야?"

"그 때 램지 박사가 총에 맞았다는 거야."

"그럼 D계급 인원이 기밀급 간부를 쏴죽인 거야?"

"아, 큰일났는데. 대사건이잖아."

"잠깐만 기다려 봐. 음…… 아, 찾았다. 이름은…… 뭐야? '정비공'? 이게 이름이야?"

"코드명인가봐."

"이 기지에 잡혀 있은 지 몇 년은 된 것 같아. 신기한데. 이런 D계급 본 적 있어?"

"D계급도 중요 인사였나 보네."

"그래, 제이미. 정말 재밌다."

"농담 아니야. 뭔가 다른 이야기는 없어?"

"네가 아니라 사건 얘기였어. 글쎄, 딱히 뭔가 적혀 있지는 않은데. 평범한 D계급이야."

"가짜 문서겠지?"

"당연히 가짜 문서겠지."

"그럼 어쩔 수 없군."

"그래, 그럼 통화는 여기서 종료. 이번엔 이 정비공이라는 남자가 기지에서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찾아볼게. 아, 맞다, 어제 말인데. 3시 반쯤? 기지가 차폐되기 직전에 이 남자 또 밖에 나갔다 왔어. 이번엔 뭔갈 들고 나가서 빈 손으로. 밖에 뭔갈 전달한 거야."

"정말이야?"

"그래."

"알았어, 이제 끊어. 나 이제 배터리가 별로 없어."

"수고하셔."

통화가 끊겼다. 테이트 박사가 말했다.

"정비공은 부서진 신의 교단의 첩자였어."

"부서진 신의 교단이요? 정비공이라니, 작명 센스 좋네요."

"나갔다가 들어왔고, 또 나갔다가 들어왔어. 뭔가를 제17기지 안으로 들였고 다시 밖으로 내보냈다는 거야. 그게 뭐지?"

"처음에 들인 건 아마 태엽장치 바이러스가 아닐까요."

"그렇군. 그리고 제17기지 안에서 발견한 그것을 내보냈다라."

"발견해요?"

"그게 뭔지는 몰라."

"그런가요."

"하지만 이상하군. 정비공은 왜 기지를 빠져나가지 않았던 거지? 분명 나갈 기회가 있었는데 그는 물건만 전달하고 다시 돌아왔어."

"제17기지 안에 찾던 게 남아있나 보죠."

"방식이 이상한데."

"이상하긴 합니다. 자폭 수준인걸요."

제이미의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그는 펠릭스이려니 생각하고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댔다.

"당신은 누굽니까?"

리지웨이 박사의 목소리였다.

"아저씨!"

"제이미?"

"아, 제이미 씨. 화물은 어떻게 됐나요?" 그리고 보노디 교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린가?"

"아, 박사님. 오랜만에 죄송한데 정말 잠시만요. 듣고만 계세요."

리지웨이 박사는 침묵했다.

"감사합니다. 신사 분이시군요. 그럼 제이미 씨, 화물은?"

"당신이 얘기했던 프로메테우스 연구소에 가 봤는데 연구소는 이미 무너지고 없었습니다."

"뭐라고요?"

"연구소가 해체된지 벌써 10년이 넘었어요. 거기 세계와 여기 세계 시간대가 다른 것 같은데요."

"그럴 리가 없…… 아, 이런! 애초에 거긴 왜 간 겁니까?"

"예?"

"화물 대신 당신 휴대전화가 전송된 것 아닙니까! 당연히 당신 휴대전화가 있던 곳에 저희 화물이 있겠지요!"

"그렇게 되는 겁니까?"

"화물이 상하면 어쩔 거요? 빨리 찾아오시오!"

"그거 음식인가요?"

보노디 교수는 이미 전화를 끊어버린 상태였다. 적반하장이로군. 제이미는 한숨을 쉬며 휴대전화를 끊으려고 하다가 멈칫했다.

"아, 아저씨!"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리지웨이 박사가 물었다.

"나중에 설명할게요. 상황이 좀 복잡해요. TP 사건 때 미래의 제 휴대폰이 넘어와서 회선이 꼬인 것 같아요."

"네 휴대폰이라면 제17기지에 있다."

"네? 아, 물론 저도 지금 제17기지에……"

"제17기지에서 미래에서 넘어온 네 휴대폰으로 실험을 준비 중이었다. 타키온 펄스 관련 실험은 현재 모두 극비 사항이야."

"네?"

"아까 그 목소리가 찾는 화물이 제17기지에 있다는 얘기다."

"그걸 아저씨가 어떻게 알고 계세요?"

"난 승진했어, 제이미."


펠릭스는 눈을 찌푸렸다. 이게 뭐지? 화면에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서 있었다.

전화벨이 울려서 그녀는 재빨리 받았다.

"아, 안녕하신가요. 펠릭스…… 레인 씨?"

"누구세요?"

"아? 아, 여자 분이셨군요. 죄송합니다. 남자 이름이라 그만……"

"당신 누구에요?" 그녀는 신경질을 냈다.

"실례했습니다. 저는 알베르토 박사입니다. 리지웨이 박사를 찾고 있는데요."

"근데 전화를 왜 나한테 걸어요?"

"그게 말입니다, 리지웨이 박사에 대한 사항이 모두 기밀 처리가 되서요. 이런 경우는 처음 봐서……."


"램지가 살아 있었다고? 말도 안 돼."

"램지 프레데릭 박사에 대해서도 안단 말이에요?"

"알았지."

"아저씨, 그 박사는 이름 빼고 전부 기밀이었단 말이에요."

"그는 윤리위원회의 의장이었다. 일주일 전에 자살한 걸로 알려졌지."


"뭐라고요?"

"지금 남아있는 기록을 가지고 관련 있는 사람들한테 일일이 전화 중입니다. O5급 보안 코드로도 열람이 안 된다면 정보가 아예 지워졌다는 건데, 그건 O5 자기네들 정보거나 윤리위원회 고위 간부밖에는 없어요."

펠릭스는 얼이 빠졌다.


"사이보그 아이에 대해서 아나?"

"SCP-191. 물론이죠. 저번에 인사도 해봤는데요."

"정비공이라는 남자가 사이보그 아이의 아버지다. 부서진 신의 교단에게 딸을 팔아 넘긴 자야."

"예?"

"그는 딸을 되찾으려고 했고, 재단이 그를 붙잡아서 그 아이와 같은 제17기지에 가뒀다. 그리고 그의 딸을 미끼로 정보를 얻어냈지."

"뭐라고요!"

"그 남자는 협력하는 척 하면서 뒤로는 계속해서 교단과 연락했다. 재단은 이미 알고 있었지. 부서진 신의 교단 타격 작전에 대해서는 들어봤겠지? 그 남자와의 연락을 추적한 결과야."

"그리고 이제 쓸모없어진 그 남자를 죽이려고 한겁니까?"

"사형 계획에 마지막으로 사인한 사람이 나다. 이제 내가 윤리위원회 의장이야."


"레이번? 무슨 소식이야?"

"부서진 신의 교단의 연락책이 어제도 다녀갔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프레데릭 박사가 죽었을 때를 말하는 건가?"

"아니요, 그 이후에도요. 세 시 반쯤에. 정비공이 이미 사형당했을 거라고 생각된 시점이었기 때문에 재단에서는 그를 무시했습니다."

"그가 정비공에게서 물품을 전달받은 거야."

"그리고 부서진 신의 교단 타격 작전에서 들어온 정보입니다. 교단 쪽에서는 재단이 흡수한 주식회사 프로메테우스 연구소의 자료를 탐냈다고 하네요."

"프로메테우스 연구소?"

"예. 정비공이 제17기지에서 발견했다는 게 그쪽 자료인 듯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었습니다."

"충분하네. 다음은 여기서 해결하지. 수고했어."

테이트 박사는 전화를 끊었다. 그는 휴대전화를 내려다보며 멍해있는 제이미를 불렀다.

"예?"

"자네 애인에게 전화해."

펠릭스는 금방 받았다.

"제이미, 이쪽 심상치 않아. 전화하려고 했는데."

"무슨 일이야?"

"가까운 곳에서 총소리가 들린 뒤로 기계 인간들이 여기 문을 두드리고 있어."

"조금만 더 버텨, 펠릭스. 우리가 물어볼 건 프로메테우스 연구소에 대해서야."

"프로메테우스 연구소?"

"부서진 신의 교단이 노렸다는 게 거기 연구 자료야."

"글쎄, 그러고 보니 지금 상황에서 떠오르는 건데, 프로메테우스 연구소는 바이러스에 대한 실험도 많이 했다나 봐. 이것저것 많이 시도했는데 관리가 부실해서 유출된 것도 많았어."

"어떤 걸 연구했지?"

"그건 잘 기억이 안 나는데. 꽤 많았어. 하나 기억나는 거라면 잠복기를 크게 늘려봤다가 퍼져버린 게 에이즈 바이러스라는 거야. 어때, 신기하지?"

"태엽장치 바이러스에 접목할 생각을 한 게 틀림없군." 테이트 박사가 혼잣말을 했다.

"그렇다면 교단이 노리던 바이러스에 대한 정보가 제17기지에 있었다는 말인가요?"

"제이미, 키넛 박사랑 얘기하기보다 이쪽 좀 신경 써주면 안 될까?"

"문을 벌써 부수진 않을 거야. 우리도 지금 몇 시간 째 두들겨지고 있거든."

"그게 정말이야?"

"지금 보니 좀 많이 굽었긴 해."

"뭐라고?"

"이상하군. 제17기지는 바이러스 전문 기지가 아닌데…… 자료를 나눠서 보관했나?"

"그렇죠. 인간형 SCP 격리 기지에 바이러스 자료를 두는 건 좀…… 설마."

"뭐지?"

"제이미?"

문 쪽에서 뭔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제이미와 테이트 박사는 고개를 들었다.

"펠릭스, 지금 데이터 뱅크에서 휴대폰에 대해서 검색해 봐."

"휴대폰이라고?"

"아니면, 기밀 실험에 대해서! 제17기지 내에서 기밀 실험이 하나 있었을 거야."

"몇 개 되는데."

"접속 가능해?"

"나 지금 기지관리자 권한이야. 물론이지!"

"휴대폰에 대한 실험 찾아봐."

"어디, 휴대전화…… 응? 이거 네 휴대폰 아니야?"

"최근 업데이트된 기록이 어떻게 되지?"

"잠시만, 어……"

쿵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 위쪽이 뜯겨져 나갔다. 기계 팔 하나가 그 사이로 삐져나왔다. 테이트 박사가 급히 물류 창고 구석에 놓여있던 카트 위의 상자를 마구 쓸어내렸다.

"그제 기록인데, 어…… '휴대폰이 있던 자리에 갑자기 포장된 상자가 나타났다.'"

"그거야! 안에 뭐가 들었어?"

"아직 뜯어보지는 않았다는데. 뭐야?"

"보노디 교수의 화물이야! 내 휴대폰이 있던 자리에 화물이 대신 가버린 거라고!"

"뭐라고?"

"당장 확인해 보자. 보노디 교수에게 전화를 걸어야 해."

"어떻게?"

"네가 나한테 전화를 걸어. 보노디 교수에게 먼저 신호가 갈 테니까 그가 먼저 받을 거야. 한참 뒤에 내가 받을게."

"그걸로 돼?"

"보노디 교수는 지금까지 다른 사람이 내 번호로 건 전화에만 응답했어. 네가 나한테 걸어야 해."

"알았어. 끊어, 걸게."

전화를 끊은 직후 벨 소리가 울렸다. 제이미는 이십 초를 세고 받았다.

"제이미, 교수가 안 받아!"

"다시 해!"

그는 전화를 끊었다. 잠시 뒤 벨 소리가 다시 울렸다. 제이미가 이십 초를 세는데 뚜두둑 하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이미 위쪽에서부터 반쯤 안쪽을 향해 구부러진 상태였다. 기계 인간들이 바보처럼 일제히 책상을 치듯 누워있는 문을 두들겼다. 그는 전화를 받았다.

"제이미, 안 받는다니까!"

"다시!"

그가 전화를 끊자 문이 바닥까지 찌그러졌고, 기계 인간 하나가 그것을 밟으며 물류 창고 안으로 들어왔다. 제이미는 무전기를 허리춤에 쑤셔넣고 테이트 박사가 끌고 나온 카트 뒤에 나란히 섰다.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하자 두 사람은 신호를 받은 듯이 카트를 밀고 돌진했다. 카트는 기계 인간 하나를 친 뒤 쓰러진 문에 걸리면서 튕겨 올라갔다. 제이미와 테이트 박사는 안간힘을 써서 카트를 문틀에 맞춰 몰았다. 기계 인간들이 부딪히면서 우수수 떨어져 나갔다. 박사가 신음 소리를 내며 오른쪽 어깨를 붙잡고 밖으로 뛰었다. 제이미는 이어서 테이트 박사를 따라 뛰어갔다.

그는 전화를 받았다.

"젠장, 아가씨, 아가씨 전화는 최대한 피하려고 했는데 좀 심한 것 아니오? 받지 않으면 연락하는 것도 그만둬 주시오."

"보노디 교수!"

"응? 뭡니까?"

"프로메테우스 연구소에서 보낸 화물이 뭔지 당장 말해요!"

그들의 앞에 기계 인간이 나타났을 때, 제이미는 테이트 박사가 그것을 쏴 주기를 기대했지만 박사는 총을 꺼내들지도 않았다. 그는 방향을 틀었고, 제이미는 가까스로 기계 인간의 팔을 피해 그를 따라갔다.

"곤란한데요. 그런 건 함부로 밝히면……."

"급하니까 당장 말하라니까!"

"아니 급한 건 그쪽 사정이고……" 보노디 교수가 불만스럽게 말했다. 제이미가 다그쳤다.

"바이러스지? 무슨 바이러스입니까? 어떤 조작을 거친 거였죠?"

"숙…… 숙주가 바이러스를 퍼뜨리기 쉽도록 '전염 의지'를 가지게 만드는 거였소. 활동 반경을 넓히고, 접촉 욕구를 증대시키고. 단순히 학술적인 목적이었소."

"전염성은?"

"접촉으로밖에 전염되지 않소. 당신 혹시 샘플을 깨뜨린 겁니까?"

"됐습니다. 그만 끊죠."

"이봐요!"

"제이미, 이제 어떻게 해?"

"박사님, 이제 어떻게 할 겁니까?"

테이트 박사가 앞에서 외쳤다.

"놈을 잡아야지. 자네 애인한테 말해. 기지 전체에 SCP-191이 격리된 장소를 방송하라고."

"이봐요, 제이미 씨.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펠릭스, 기지 전체에 SCP-191이 격리된 장소를 방송해. 그게 어디야?"

"2층 A지구 218…… 방송하라고?"

"지금 뭐하는……"

제이미는 총에 맞아 머리가 완전히 박살 나있는 기계 인간의 시체를 뛰어넘으며 말했다.

"마이크 있지?"

"없어!"

"그럼 휴대폰 연결해! 지금 빨리!"

"하지만……"

연락이 끊겼다. 제이미가 폰을 들여다보니 화면이 까맸다. 배터리가 다 된 모양이었다. 그는 마침 다가오는 기계 인간에게 휴대폰을 집어던졌다.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그는 무전기를 꺼내들었다.

"사람 있습니까?"

대답이 없었다. 그는 계속 말했다.

"부서진 신의 교단의 첩자가 프로메테우스 연구소의 바이러스 샘플을 받아갔다고 합니다. 정비공의 짓입니다."

"무슨 샘플?" 갑자기 반응이 왔다.

"숙주가 전염 의지를 지니게 하도록 개조를 거친 바이러스라고 합니다."

"방금 추적을 시작했네. 자네들 지금 뭐하고 있나?"

제이미는 무전기에서 입을 떼고 테이트 박사에게 물었다.

"박사님, 대체 어쩌실 작정입니까?"

"그 멍청한 자식은 기지 전체를 격리시켜놓고 하루가 꼬박 지날 동안에도 SCP-191의 격리 장소를 못 찾았어. 많이 초조해졌지 않겠나? 바로 걸려들 거야."

"그래서 어쩌시려고요?"

"쏠 거야."

"정비공을 잡으려고 합니다."

"보고할 필요는 없었어."

"그래도 해야죠!"

"잘 들어, 애로우 요원. 곧 돌입 작전을 시행할 테니 기다리게."

제이미는 숨이 찬 상태로 말했다.

"죄송한데 지금 기다릴 상황이 아닙니다."

"놈을 죽이면 안 돼!"

그 때 기지 전체에 펠릭스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SCP-191, 사이보그 아이는 2층 A지구 218호에 격리되어 있습니다. 정비공, 그쪽에서 만납시다." 그녀는 방송에 괜한 말을 덧붙이고 있었다.

"방금 그거 무슨 소리였지?"

"박사님들, 돌입 작전을 빨리 시행해주세요. 정비공은 아마 테이트 박사가 잡을 것 같으니까 우리라도 빨리 구출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내 말 제대로 못 들었나? 놈을 죽이면 안 된다니까!"

"입 닥치라고 해."

테이트 박사가 어느 새 제이미에게 다가와서 무전기를 빼앗아 들더니 옆에서 다가오던 기계 인간에게 집어던졌다.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마침 지나가던 컴퓨터실 앞에 모여 있던 기계 인간들이 두 사람을 따라오기 시작했다. 부서진 컴퓨터실 문 위쪽의 틈으로 펠릭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이미!"

"괜찮아, 펠릭스! 카메라로 우리 상황이나 감상하고 있어!"

제이미가 테이트 박사를 앞질러서 사이보그 아이가 격리된 장소로 안내했다. 테이트 박사가 안내가 필요했는지는 의문이었지만, 어쨌든 그는 제이미를 따라왔다. 모퉁이를 돌아 격리실 앞에 도착한 제이미는 기계 인간들을 따돌렸나 확인하고 숨을 골랐다.

테이트 박사는 모퉁이를 돌자마자 총을 빼들었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쏜다고 했잖아."

"죽이시려고요?"

"놈이 아이를 만나게 둬선 안 돼."

"그렇다고 죽일 필요는……"

"놈이 샷건을 메고 돌아왔다는 사실 잊었나."

"그러니까 제 말은 그렇다고 곧바로 죽일 필요는……"

제이미의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가 뒤돌아보자 초췌해보이는 남자가 샷건을 들고 서 있었다.

"애로우, 비켜."

제이미는 테이트 박사와 정비공의 사이에 서 있었다.

"움직이면 쏜다." 정비공이 말했다. 제이미는 손을 들었다. 뒤에서 테이트 박사가 피스톨을 만지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뒤에 있는 박사, 총 내려."

테이트 박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제이미는 펠릭스가 테이트 박사에 대해 그는 좀비와 제이미 둘 다 쏠 인간이라고 얘기한 것을 뒤늦게 떠올리고 아차 했다. 곧 총소리가 들렸다.

제이미는 겨드랑이 밑으로 뭔가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정비공의 어깨에서 피가 튀었다. 그는 샷건을 떨어뜨렸다. 제이미가 뒤를 돌아보자 테이트 박사가 어깨를 부여잡고 주저앉아 있었다. 제이미는 멀쩡했다. 그가 박사에게 다가가려다가 주춤하며 다시 정비공을 쳐다보니 그는 천천히 격리실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펠릭스가 제이미의 위험을 보고 관리자의 고유 권한을 이용해서 격리실의 문을 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정비공을 따라 격리실로 달려들었다. 사이보그 아이가 건너편에 앉아 있었다. 정비공이 말했다.

"아가야, 아빠가 왔어…… 아빠가 왔단다."

사이보그 아이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표정없는 얼굴을 정비공에게 돌렸다.

"자, 이거, 이거 보렴. 아빠가 선물을 가져왔다."

정비공이 잊고 있었다는 듯이 서둘러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제이미가 옆으로 다가갔는데도 정비공은 그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두 손으로 펴보인 것은 작은 분홍색 손수건이었다.

사이보그 아이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정비공은 누군가에 의해서 끌려갔다. 사이보그 아이는 격리 팀에 의해 둘러싸여 있었다. 그녀는 아무 일도 겪지 않은 것처럼 평상시 모습 그대로였다. 제이미는 응급 구조 요원에게 진단을 받고 있는 테이트 박사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십니까?"

"어깨가 박살났지."

"총을 쏘시면 안 되는 몸이셨군요."

제이미는 그제야 자기 도움을 기대하지 말라던 테이트 박사의 말을 이해했다.

"소문만 그렇지 실제로는 그렇게 나쁜 분도 아니신데요. 총 솜씨가 대단하시군요. 어떻게 거기서 그걸 맞추셨어요?" 그가 웃으며 말했다.

테이트 박사는 웃지 않았다.

"자네 애인이 그랬지. 오클랜드에서의 사건."

"예?"

"난 민간인을 신경 쓰지 않는 작전 강행으로 악명이 높고." 그는 신음을 내뱉으며 숨을 골랐다. "그리고 너희들 일개 요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야."

"무슨 말씀을……"

"재단은 오늘 날 버리는 카드로 사용했어. 난 골칫덩어리였다고, 요원. 그리고 살아 돌아왔지. 난 이제 좀 더 심한 골칫덩어리가 될 거야."

박사가 제이미를 올려다 보았다.

"그러니 착각하지 말게. 자네를 살려준 게 아니니까. 그 남자를 죽여도 되는지에 대한 확신만 있었다면 난 주저 없이 자네 목을 향해 쐈을 거야."

제이미는 오싹한 마음이 들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테이트 박사는 응급 구조 요원을 물리치고 혼자 일어서서 걸어갔다.

격리실 문 앞으로 다가간 두 사람이 사이보그 아이를 바라보았다. 사이보그 아이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들을 마주보더니, 그녀가 말하는 방식대로 화면에 타이핑했다.

"아빠는 나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곤 했어요. 그리고 공주를 구해주는 영웅에 대해서도요. 당신은 어느 쪽인가요?"

사이보그 아이는 이내 고개를 숙이고 다시 자신을 내려다 보기 시작했다. 격리 팀은 화면을 보고 금세 웅성거렸다. 테이트 박사는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밖으로 걸어가버렸다.

제이미는 가만히 서서 재단에 대해 생각했다.


펠릭스의 휴대전화를 이용한 마지막 통화에서 보노디 교수는 사건의 전말을 대략적으로 전달받았다. 그는 알렉실바 대학이 받아야 할 바이러스를 가로챈 정비공에게 화를 냈으며, 그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했다. 제이미는 딸을 위한 행동이었다고 적당히 포장했다. 보노디 교수는 그가 손수건을 펼치는 장면에 크게 관심을 보여 손수건에 어떤 무늬가 있었는지에 대해서 물었다. 제이미가 솔직하게 대답하자, 그는 안타까운 일이라고 애석해했다. 그리고 그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으니 휴대폰을 돌려주겠다고 말하곤 통화를 끊었다. 그 뒤로 보노디 교수와는 연락할 수 없었다.

리지웨이 박사는 램지 프레데릭 박사가 정비공을 풀어준 이유를 조사하는데 주력했다. 상부는 이번 일에 대해서 아무 것도 응답하지 않았다. 레이번은 그 남자가 연관된 일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며, 따라서 궁금해하지 않는 대신 리지웨이 박사의 호출에 순순히 응했다. 테이트 박사는 치료를 받은 뒤 3등급 보안 단계에서 4등급으로 ID 카드를 수정하기 위해 찾아오라는 소식을 듣고 짜증을 냈다. 알베르토 박사는 그 뒤에도 몇 번 펠릭스에게 전화를 줬지만 하필 펠릭스가 조사받는 도중이었기 때문에 번번이 부재중 전화로 남고 말았다. 아무도 아닌 자는 아까웠다고 생각했다.

방법은 알 수 없었지만 펠릭스는 제이미의 휴대폰을 발견했다. 제이미는 휴대폰을 열어 일주일 전의 부재 중 전화와 문자를 확인했다. 리지웨이 박사는 처음에 선물 사서 가고 있다는 문자를 보냈다. 그 날 리지웨이 박사는 오지 않았다.

펠릭스는 보안 기록에서 발견한 영상을 제이미에게 보여주었다. 리지웨이는 일주일 전 제17기지에 찾아와 오른손에 캔맥주 봉투를 들고 복도를 걷고 있었다. 전화를 걸던 리지웨이는 제이미가 받지 않자 그 때 문자를 보냈다. 이어서 그는 누군가의 전화를 받았고, 표정이 심각하게 굳었다. 그는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고 전화를 끊었다. 캔맥주를 바라보던 리지웨이는 봉투를 바닥에 내려놓고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뒤로 돌아서 가 버렸다.

미안

제이미는 지금도 언제든지 리지웨이에게 전화를 걸어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한 마디가 리지웨이와의 마지막 대화라는 것을 알았다.


🈲: SCP 재단의 모든 컨텐츠는 15세 미만의 어린이 혹은 청소년이 시청하기에 부적절합니다.
따로 명시하지 않는 한 이 사이트의 모든 콘텐츠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를 따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