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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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슨Olsen 국장과 그 조수의 사무실은 고요했다. 젊은 조수랑 시시껄렁한 토론이나 하고 앉은 올슨은 그냥 보면 딱 무슨 조직 관료체계의 무슨 행정 중간직에서 꿀 빨고 노는 사람 모습이었다. 하지만 바하마 사유지 섬 경비원도 아니고 이름만 있는 자리도 아닌, SCP 재단 국제지부간 업무조정국 조정 책임자 자리는 절대로 마냥 꿀 빠는 자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평상시에는 그 반대였다. 즉, 지금은 확실히 평상시가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올슨은 애써 그 사실을 무시하며 최대한 다른 곳에 정신을 집중하려 했다. 그래서 올슨은, 조수랑 토론이나 하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또 여자가, 기록실에서 만났던 여자 한 명이 있는데, 뭐랄지…"
"좋아해?"
"아니요! 아니, 일단은 그것까진. 그래도 음… 몇 번 같이 아침도 먹은 적 있고 또… 네, 좋아하는 걸 수도요."
"기지 밖에서 저녁 먹자 그래 봐, 좀 더 로맨틱한 분위기 끌어가게."
"아니 그런데 일도 있고…"

올슨 앞의 전화기 하나가 울렸다. 두 사람은 갑자기 사무실에 성령이라도 임재한 듯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서로를 마주봤다. 그래선지 올슨은 잠깐 주저했다가, 전능하신 수화기를 들어올렸다.

"국제지부간 업무조정국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네? 아 죄송합니다, 경리과에 전화한다는 게. 어… 전화 잘못 드려서 죄송해요. 감사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화를 끊고 올슨은, 한숨을 내쉬었다.

실망한 두 사람은 또 서로를 쳐다봤다. 변칙개체를 수송하고 교환하는 이메일, 전화, 조수들이 이곳에 넘쳐흐르던 시절이 몇 주 전이었다. 몇 주가 지났다고 사무실은 고요했고, 끊임없이 일만 하던 직원들은 지겨움이란 무엇인지 알아가는 참이었다. 그리고 오늘 유일하게 온 전화는 제19기지에 새로 온 사람이 잘못 건 전화라니.

"…그래서 제가 뭐랬냐면…"
"잠깐만." 올슨이 말을 끊었다.

전화 속에 들었던, 실망으로 인한 애통한 좌절감이 아닌, 뭔가 다른 것이 올슨의 마음을 별안간 움직였다. 아니, 스스로를 속여서야 아무 쓸모가 없지. 확실하게 가야겠어.

"올해 들어온 변칙개체들 기록한 서류 좀 준비해 줘."

조수가 서류를 준비하기 시작하자, 올슨은 그 동안에 디지털 아카이브로 접속해 자료를 훑어봤다. 지난주에는 변칙개체가 등록된 것도 이송된 것도 없었다. 그 앞의 주도 마찬가지였다. 올슨이 날짜를 계속 거슬러 올라가자, 아카이브에 변칙개체 이송 기록 정도만 드문드문 고개를 내밀었다. 아카이브를 두 달치 전까지 살펴봤는데도 SCP 개체가 등록됐다는 기록은 코빼기도 안 보였다. 하긴, 뭐든지 그럴 수도 있는 법이다. 변칙성이란 것 자체가 이 세상 규칙에 원래 안 맞는 존재니까. 어느새 아카이브는 석 달 전까지 올라왔다. 석 달 열흘. 바로 그때 화면에 겨우 빨간 선 하나, 즉 안전 등급 한 개가 나타나자, 올슨은 괜히 흠칫 놀랐다. 뭐 그렇다면야. 변칙개체가 마지막으로 등록된 게 석 달 열흘 전이라서 불안해진 건 아니었던 모양이네. 변칙성이라는 게 참… 그리고 이걸 뭐하러 걱정했던 거지? 자신이야 잠시 멈추는 건 기분 좋았다, 이 변칙개체들이 -

"석 달 열흘이네요, 국장님. 변칙개체가 마지막으로 기록된 게 석 달 열흘 전입니다. 적어도 아카이브 서류상으로는 그렇게 나오네요."

조수의 그 말이, 올슨이 무의식 속에 품었던 방어기제를 냅다 후려쳤다. 석 달 열흘. 아니, 이건 뭔가 심상치 않아. 올슨의 심장이 가능한 한 가장 빠르게 두근거렸다. 악마가 꾸민 무슨 상상 못할 음모를 깨닫게 된 느낌이었다. 곧바로 올슨은, 인간이라면 다 그렇듯이, 누가 이 일을 꾸몄는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O5? 불가능해. 컴퓨터 오류? 그럴 리가. 요주의단체? 아, 퍽이나. 하지만 올슨은 진지했다. 뭐든지 그럴 수도 있다지만 아무 이유도 없는 건, 인간의 이성에게 해로운 일이었다.

점심 시간이 되자 두 사람은 사무실을 경계하며 나섰다. 너무 많은 걸 알아서 잡혀가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하지만 복도에는 두 사람을 당장이라도 덮칠 정장 요원들 대신, 어색한 정적과 모종의 허무함만 덩그러니 있었다. 두 사람은 사무실들 여럿을 지나갔다. 복도에서는 서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하나도 안 보였다. 이네들도 자기처럼 사무실에서 토론이나 할 시간이 생긴 모양이지. 두 사람은 사무실에 도착했다. 사람들은 조용히 오늘의 메뉴 스테크프레츠를 먹었고, 또 올슨이 형언 못할 공포가 느껴질 만큼이나, 서로 이야기나 하고 있었다.

사실 제19기지 전체가 이렇게 고요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비밀 조직의 가장 큰 시설을 묘사하는 형용사 중에서도 "고요하다"가, 어느새 제일 알맞은 말이 되어버렸다.

식사는 아무 맛도 없이 지나갔다. 올슨은 온통 뭐라 못할 불안감만 느끼기 바빴다. 머릿속으로 오만 가지 질문들이 걷잡을 수 없이 밀려왔다. 어째서? 어떻게? 변칙개체 없이 SCP 재단은 뭘 해야 하지? 직원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이런 질문들을 올슨이 곱씹어보는 동안, 조수는 다른 질문에 집중했다. 왜 내가 뭔가 느낌이 오려고 할 때 예쁜 여자 말고 50줄 들어선 국장님이랑 오늘도 밥을 먹는 거지? 그러나 이 질문에조차도, 올슨의 고민보다는 훨씬 세속적일지언정, 뭔가 이상한 느낌이 온다는, 평상시와 아주 다른 세상이 시작됐다는 분위기가 서려 있었다.

점심을 마치고 두 사람은, 똑같이 우울하고 난감하고 불안하고 등등 섞인 정신 상태로 사무실로 되돌아왔다. 확실히 무슨 일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변칙개체가 그렇게 갑자기 확 안 나타날 수는 없었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변칙세계의 역사를 통틀어 봐도 전에 없고, 아무리 SCP가 세상을 뒤집어 놓더라도 이런 건 전에 없었다. 인류가 무수한 조직들을 세워서 변칙존재들을 제어하려 숱한 노력을 쏟은 이래 한 번도 없었다. 그 많은 조직들이 난데없이 무용지물이 되었다니, 올슨은 서글퍼졌다. 그리고 재단 역사의 전문가로서, 아찔한 생각 하나가 머리 한켠을 스쳤다. 초상격리왕립재단Fondation Royale pour le Confinement du Paranormal, 제국 특이한림원, 섹션 9, 등등 그 밖에도 인류가 몇 시대를 걸쳐 쌓아온 위대한 노력의 결실들이 모두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제01기지, 커다란 회의실 역시 똑같이 고요했다. O5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누구보다 강력한 남녀 13명이 근심하는 침묵 속에 싸여 겁에 질린 아이처럼 서로만 슬그머니 바라보고 있었다. 13명의 생각은 제19기지의 올슨보다는 덜 난삽했다. 지정학과 장기 계획의 관점으로 말미암아 볼 때, 모두의 마음속은 한 가지 생각으로 수렴했다. 변칙개체가 희귀하고 값비싼 재산이 되고 있다는 것. "탐욕"이라는 말이 모두의 머리 위를 떠돌았다. 그리고 절망적으로 고요하던 회의실에서, O5-3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말했다.

"여러분, 문제가 생겼어."


SCP 재단 국제지부간 업무조정국 조정 책임자 올슨의 사무실은 고요했다. 폭풍전야의 고요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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