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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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돈, 돈. 결국 돈이 문제였다.

백태양은 한숨을 푹 쉬었다. PT로 버는 돈은 분명 상당하지만, 각각의 고객들을 위한 맞춤 운동법 제작에는 그 이상의 돈이 들었다.

심령 독립체를 위한 운동법 개발에도 돈을 쏟아부었고, 참배움연구소에다가도 상당한 돈을 지출했는데, 결국 그 지출에 걸맞은 수익을 내지는 못했다.

"하아. 플러그소프트 서버비도 내야 하고, 이게 안 먹히면 꿈 공동첸가 뭔가 하는 애들한테 연락해봐야 하겠네. 그러면 이번달에도 연체 확정인데…"

백태양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휴대폰을 열었다. 그 속에는 백태양이 필사적으로 외면하던 문자가 있었다.

[삼대천 스포츠 발신] [의뢰-가드팀 구함. 12시간 경호.]

백태양은 그 긴 문자의 끝자락에 주목했다.

[보수: 10억.]

함정이라는 건 당연히 알고 있다. 하지만 반나절에 10억. 거절하기엔 너무도 큰 돈이었다.

삼대천 스포츠에는 자체 가드팀이 있다. 그들은 단순한 경호원이 아니라 고도로 전문화된 집단이었다. 반면에 백태양은 분명히 '경호'에는 문외한이었다. 그런 삼대천 스포츠가 백태양에게 경호를 요청했다. 그건 두 가지 경우를 의미했다.

모종의 야비한 계획이거나, 고사리 손이라도-좀 큰 고사리 손이긴 하지만-빌려야 할 정도로 어지간히 중요한 경호 임무거나.

전자일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다고는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백태양이었지만, 그래도 그는 내심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보디빌딩은 자신과의 싸움을 이어가는 구도의 종목이다. 하지만 그에게도 이따금 자기과신을 하고 싶을 때가 있었다.

쪽팔리게 고객이나 직원들에게 할 수도 없고, 그나마 있는 직접적인 비교대상이라 할 수 있는 임한영 회장은 자신보다도 더한 육체를 가지고 있었으니. 내심 백태양은 힘 자랑을 하고 싶기도 했다.


백태양은 쭈뼛쭈뼛 호텔 스위트룸에 들어왔다. 삼대천 스포츠는 경호 인물에 대한 소개를 스스로에게 직접 들으라고만 했다. 정보를 요구했지만 대답 없이 5억원과 주소를 같이 보냈다.

의심은 더욱 커졌지만, 받은 5억원을 즉시 다 써버리기도 했고, 설사 함정이더라도 목숨은 건질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그에게는 있었다.

백태양은 심호흡을 하고 문을 두들겼다.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와요."

"실례하겠습니다."

"어머, 사진으로 봤을 때보다 훨씬 잘 생겼네?"

호위 임무에 맞춰 맞춤 양복을 쫙 빼입고 머리에 젤까지 발라 머리까지 정리한 백태양이었지만, 그는 너무 당황에서 여자의 칭찬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경호 대상이 커피를 마시고 있는 조그만 소녀여서가 아니라, 그 소녀의 정체가 거물이어도 너무 거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유창한 한국어로 인사를 건넸다.

"과묵한 타입인가? 방만석씨 부인이 추천한 이유가 있네. 나는 아이리스 다크라고 해."


백태양은 입을 다물었다. 아리리스 다크라니. 거물이어도 너무 거물이었다. MC&D가 어디인가. 규모는 삼대천보다 작지만 이들은 초상세계를 지배하는 거인들 중 하나였다. 그 재단, 연합과 비견될만한.

"내가 널 특별 지명했어."

"그…실례되는 말씀일지도 모르겠지만 개인 경호원 같은 거 없으십니까? 목숨이 노려질지도 모르는데."

그 말에 아이리스 다크는 미소를 머금었다.

"당연히 있지. 하지만 네 실력을 보고 싶은걸. 이건 평가이기도 해. 삼대천은 초상세계를 통틀어 손에 꼽히는 무력을 지닌 단체인데, 그게 허명인지 아닌지를 증명할 수 있는 꽤 괜찮은 기회가 아닐까 해서."

그런 이유로 경호를 일임한다라. 백태양은 아이리스 다크의 태연한 태도에 섬찟한 공포를 느꼈다.

그제서야 삼대천 스포츠가 이 계약을 성립시킨 이유를 알았다. 거기엔 계략이랄 것도 없었다. 백태양이 임무에 실패하고 MC&D와 삼대천의 관계가 험악해진다면 삼대천 스포츠에게는 오히려 좋은 일이다.

반대로 백태양이 무사히 경호에 성공하면 그건 그것대로 가드팀의 평판을 올리는 일이다. 퍼뜩 백태양은 한 가지 생각이 뇌리에 스쳤다.

"혹시 경호 비용으로 얼마를 쓰셨습니까?"

"응? 오늘 하루는 20억."

"그렇군요."

백태양은 이를 꽉 깨물었다. 그런 백태양을 눈 앞에 두고 아이리스는 느긋하게 커피를 음미하며 책을 보고 있었다.

첫 1시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나저나, 삼대천은 어지간히 계열사들끼리 사이가 안 좋나봐?"

먼저 침묵을 깬 건 아이리스 다크였다. 그녀의 질문에 백태양은 말을 더듬었다.

"그, 그걸 어떻게…"

아이리스는 백태양에게 읽던 책을 던졌다. 백태양은 책을 확인했다. 책에는 숫자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어떻게는 무슨. 그런 건 회계기록만 대충 살펴봐도 뻔하게 알 수 있어. 서로 업무 협력이란 것 자체를 안하고 있다는게 눈에 훤해. 그나마 생활건강은 실적은 괜찮은 편이고, 스포츠는 횡령이랑 회계조작이 눈에 밟히긴 하지만 적어도 굴러가기는 해. 근데 피트니스는 대체…돈을 벌 생각이 있는 건지 모르겠네. 내가 아는 방만석이라면 이걸 가만히 두고 있지 않았을 것 같은데."

백태양은 아이리스 다크의 말이 비수처럼 느껴졌다.

"분명 적자 투성이처럼 보이겠지만 투자의 성격이 강합니다. 이 세상 모두에게 땀을 흘리고 몸을 가꾸는 법을 알려주다 보면 고객층이 더 늘지 않겠어요?"

아이리스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흐음. 네 철학은 알겠어. 다만 그걸로 돈을 벌고 나서 말하면 인정해 줄게."

백태양은 할 말이 없었다. 내면엔 더 깊은 이유가 있겠지만, 피트니스가 무시받는 표면적인 이유는 적자라는 점 때문이었다.

'노력'의 값에 대한 증명. 백태양은 그것만이 하고 싶었다. 하지먼 회계기록의 숫자에서는 그것이 증명되지 않았다.

"저, 아이리스 다크 님. 혹시 pt 받아보실 생각 없으십니까? 외부차원에 있는 저희 센터는 미국에서도 쉽게…"

"됐어. 너가 정 네 철학을 지키며 사업을 하고 싶다면 삼대천을 통합해."

"통합."

백태양은 반사적으로 움찔했다. 그건 그가 막연히 생각해왔던 것이었다.

"그래. 통합. 네 바보짓으로 인한 손해보다, 각 계열사가 통합하여 긴밀한 협력을 통해 이뤄낼 이득이 훨씬 클 테니까."

백태양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통합. 어찌 그걸 생각해 보지 않았겠는가.

한때 백태양은 폭력적인 방법으로 이를 실행시키려 했었다. 지금 임한영이 그러고 있는 것처럼, 자신도 군림하려는 꿈을 꿨었다.

'공'을 깨달은 이후로 그 방식은 포기했지만, 삼대천을 통합시키겠다는 야망은 백태양의 가슴 속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아이리스 다크는 말이 없어진 백태양을 응시하며 미소를 지었다.

삼대천에는 재능있는 자가 많았지만, 그 재능을 하나의 단체인 삼대천을 위해 온전히 쓰려는 자는 너무나 적었다. 결론적으로 삼대천은 그 잠재력을 스스로 깍아먹고 있었다.

백태양이 삼대천을 통합해 낸다면, 삼대천은 아이리스 다크에게 있어 한층 더 매력적인 투자처가 될 터였다. 오늘 하루 쓴 반나절의 시간과 50억이라는 돈이 따위가 될 만큼.

"혹시 통합에 대해 조언을 좀 구해도…"

백태양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여는 찰나, 멋진 한강뷰를 보이던 호텔의 풍경이 일그러졌다.

"무슨?"

"어머나. 꽤나 정교한 공간변칙이네. 아무래도 전문적인 암살자가 왔나봐."

"그런. 일단 저희 센터로 가시죠.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조심수럽게 아이리스 다크의 손목을 잡고 삼대천 피트니스 센터로 가려 한 백태양은 공간이동이 실행되지 않자 다급해졌다.

"이게 왜 안 되지?"

"저 프랙탈 형태의 파장이 공간 이동을 막는 걸수도 있고, 최악의 상황이라면 여기가 이미 다른 여분차원일수도 있고. 그러면 좌표가 꼬여서 공간이동 자체가 인식이 안되겠지."

"그건 아닐 겁니다. 소용돌이치는 바람 소리가 들려요. 여기가 다른 차원은 아니라는 이야기죠."

그 말에는 아이리스도 깜짝 놀랐다. 그냥 몸만 좋은 남자인줄로 알았는데, 그 정도로 민감한 감각을 가졌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오래 유지하지는 못할 거야. 여기서 버티고만 있어도 되겠어. 이걸 입에 물어."

백태양은 아이리스 다크가 준 물건을 의심없이 입에 물었다.

"웬만한 호흡기에 통하는 독은 다 막아주는 물건이야. 조급해지지마. 상대에게도 시간은 얼마 없을 테니까."

그 말대로였다. 수십의 무장한 암살자들이 백태양과 아이리스를 포위했다. 백태양은 품 안에서 너클을 꺼내 착용했다.

-임무 종료 9시간 전.

"덤벼."

백태양은 일부러 그들을 도발했다. 백태양의 목적은 아이리스 다크를 보호하는 것. 적들의 모든 관심을 자신에게로 돌리는 게 우선이었다.

그 어설픈 도발이 먹힌 건지, 한 암살자가 백태양에게 달려들었다. 백태양은 허리를 완전히 비틀어 칼을 피한 다음, 그 반동으로 손을 뻗어 암살자를 제압했다.

"내가 무식하게 힘만 쎈 줄 알았지?"

백태양은 암살자의 마스크를 벗겼다. 암살자는 얼굴에 문신을 한 남자였다. 아이리스 다크는 비웃음을 머금은 채 말했다.

"혼돈의 반란이군. 저 이름을 사칭하는 자들이 워낙 많아서 확신은 못하지만, 날 죽일 이유는 충분한 놈들이긴 해."

백태양은 손가락에 힘을 줘 암살자를 기절시켰다. 그럼에도 아직 너무나 많은 적들이 남아있었다. 그는 숨을 깊게 들이쉰 뒤 손뼉을 크게 쳤다. 어려운 과제에 도전할때마다 항상 하는 버릇과 같은 것이었다.

백태양. 187cm에 157kg.

그 압도적인 무게가 전부 근육으로만 채워져있다. 단순한 주먹질만으로도 어중이 떠중이들은 손쉽게 처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어중이 떠중이가 아니었다. 고도로 훈련된 암살자들이었다.

그의 육신은 어떤 변칙 현상도 개입되지 않았다. 순수한 노력으로 완성된 육체. 그 신념이 모였기에, 백태양의 비변칙적인 육체는 그 자체로 변칙 현상이 되어갔다.

어려운 말로 하면 '공'. 쉬운 말로 하면 노력.

그 힘이 백태양의 전신에 깃들어 있다. 같은 체적이라 해도, 그 힘이 깃들어 있지 않은 자와 백태양의 힘은 천지 차이다. 물론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백태양에게는 어릴 때부터 많은 스승이 있었다.

백태양은 그들의 가르침 중 다른 모든 것을 버렸지만, 하나만큼은 극한까지 단련했다. 육체의 모든 부분을 무기로 사용하는 무술.

그것은 백태양 자신의 이름처럼, 새하얀 백지에서 피어난 태양이었다.

"분위기가 바뀌었네."

"말 걸지 말아요. 집중하고 있으니까."

"너무하네."

"전 보통사람보다 훨씬 청력이 민감하다고요. 누구 지키려고 이러고 있는 건데."

백태양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전신의 감각을 끌어올렸다.

그를 향해 다가오는 칼날을 온전히 의식한다. 보고, 듣고 느낀다. 백태양은 다가오는 칼날을 그대로 잡아 상대에게 돌려주었다.

"신기하네. 어떻게 한 거야?"

"후우…"

백태양은 오랜만에 자신의 한계를 깨부수려 하고 있었다. 전신의 근섬유 하나하나를 의식하여 조정한다.

무의식의 의식화. 정신분석학에서 사용되었던 개념을 그는 육체에 적용할 수 있었다. 백태양은 극한의 감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완성형이 바로 이 무술이었다.

백지의 무술.

간단하게 말하면, 완전모방.

그것은 백태양의 공의 경지를 통해 체득한 모든 것 중 유일한 무술이었다.

백태양 스스로는 보잘것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분명 힘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은 백태양의 최고의 성취 중 하나였다.

상대의 모든 것을 순식간에 파악하고, 모든 걸 모방한다. 그 상대보다 훨씬 육체적으로 강력한 백태양이었기에, 같은 기술로 상대하면 백태양은 결코 지지 않는다.

그 어떤 전투기술도, 극비리에 개발된 살인무술도 백태양은 순식간에 베껴낼 수 있었다. 백지의 위에는 그 어떤 그림이라도 그려낼 수 있듯이.

그렇기에 백태양은 원래도 강하지만 무술의 숙련자와 대결할때 훨씬 더 강해졌다. 그렇다면 고도로 숙련된 혼돈의 반란 출신의 암살자 수십을 상대로는 어떨까.

순수하게 집중한 백태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직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비명만이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 적막이 일었다.

완전히 난장판이 된 호텔방에서 오직 백태양만이 두 발로 서 있었다.

아이리스 다크는 웬만한 상황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압도적인 무력 때문이기도 했지만, 경계를 유지하는 백태양의 냉정함에 놀랐다. 특히, 그렇게 격렬한 난전에서 그 힘을 가지고서도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는 점이 놀라웠다.

"확실히 숫자만으로 사람을 평가할 수는 없나보네."

"죄송합니다만, 한명 더 있어요. 조금만 더 앉아계세요."

백태양은 아무도 없는 창문 밖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러자 창문이 산산조각나며 한 여자의 인영이 나타났다.

"그걸 눈치채다니 꽤 대단한걸."

"눈치는 아니고, 들었다. 거기만 바람 소리가 다르더라고."

"더 대단하네. 이젠 그 정도 소리도 신경써야겠네."

백태양은 여자의 여유로운 태도에 눈썹을 찡그렸다. 암살자가 정체를 들켰는데도 이렇게 태연한 게 말이 되지 않았다. 어쩌면 방심 시킨뒤 기습해 아이리스 다크를 노리려는 수작일 수도 있었다.

"덤비지 않고 뭐해."

"네 능력을 알게 되었는데 내 밑천이 털리게 둘 수는 없지. 또 보자고."

여자는 백태양에게 뭔가를 던지고는 휙 사라졌다. 어느새 창문 밖은 어두운 서울의 야경을 비추고 있었다.

"일단 저희 센터로 가실까요? 쓰러진 애들은…"

아이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혼돈의 반란이기도 했겠다. 재단이 처리하도록 손을 쓰도록 하지. 가자고."


삼대천 피트니스 센터에 도착한 아이리스 다크는 백태양의 헝클어진 넥타이를 바로 매 주었다.

백태양은 살짝 당황했다가, 피식 웃었다.

"제게 거짓말을 하셨군요."

"눈치챘구나? 내가 미쳤다고 경호도 없이 혼자 오겠어? 거기 도청장치가 있더라고. 호위가 있다고 하면 공격하지 않을 것 같았거든. 바에아씨, 나와도 될 것 같아요."

백태양은 그림자에서 발을 치웠다.

"오랜만이네, 태양 군."

"예. 안 보던 사이 문신이 더 늘으셨네요."

사모아인 용병 바에아는 떠돌이로 유명했다. 백태양은 아이리스 다크가 그토록 여유로웠던 이유를 깨달았다. 바에아라면 충분히 모든 걸 막을 수 있을 테니까.

아이리스 다크는 백태양에게 다시 다가갔다.

"그 여자, 암살자가 원래 직업이 아닌 건 분명해. 분명 강해 보였지만 전문 암살자라기에는 어설픈 부분이 많았어. 네게 또 보자고 하고 뭔가를 줬지?"

"예."

백태양은 여자에게 받은 물건을 펼쳤다. 명함 같은 생김새였고, 한자로 왕자 하나만이 새겨져 있었다.

"저희 센터랑 비슷한 원리의 공간이동장치인것 같네요. 이걸 찢으면 그 여자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아이리스 다크는 곰곰히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의뢰를 하나 할게. 그 여자를 찾아가서 암살을 누가 의뢰했는지 알아와."

"음…그 여자는 정말 위험한 느낌이었어요. 그렇게 쉽게 할 일이…"

"보수는 40억. 선수금 20억."

백태양은 입을 쩍 벌렸다. 그거면 이번 분기 적자를 완전히 메꿀 수 있었다.

"하겠습니다."


백태양은 홀로 가부좌를 튼 채 앉아 있었다. 그의 눈 앞에는 왕자가 적인 명함 하나가 있다.

그걸 찢으면 제 발로 적진에 걸어가는 것일 터였다. 바로 어제 백지의 무술을 너무나 많이 시전했기에 머리속이 복잡했다.

"끄응…일단 돈 생각은 그만두자. 그때 여자의 숨소리를 떠올려 보는 거야."

아이리스 다크가 한 말이 마음에 걸렸다. 암살자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그녀의 숨소리는 아주 정밀했다. 극도로 훈련된 인물의 호흡법이었다. 그런 존재가 셋 이상만 되어도 백태양은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그래, 가는 수밖에 없겠지."

백태양은 과감하게 종이를 찢었다.


백태양은 아무도 없는 캄캄한 방에 홀로 있었다. 이미 예상하던 상황이기에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백태양은 눈을 감고 손뼉을 크게 쳤다. 울림은 길지 않았다. 이곳이 좁은 방안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판단을 내렸다면 행동은 빨라야 했다.

백태양은 몸을 던져 방의 벽에 부딪쳤다. 벽에 금이 가며 빛이 들어왔다.

"역시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네. 그래도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는데."

그때 그 여자의 목소리였다. 백태양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싸울 생각은 없어. 그저 왜 아이리스 다크를 노렸는지만 말하면 돼."

그 말에 여자는 방이 떠나가라 웃었다.

"아이리스 다크가 표적이라고 생각한 거야? 왕의 일족의 목표는 언제나 하나였어. 백태양 너."

"뭐라고?"

"너를 죽이거나 생포하는 것이 목표였지. 걱정하지 마, 난 널 죽일 생각이 없으니까. 그저 네 강함을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야."

대화를 나누는 사이 백태양은 벽을 완전히 부수고 여자와 대면했다. 맨 얼굴의 그녀는 생각보다 순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네 목표는 아이리스 다크가 아닌 나였다."

"그래, 너는 센터 안에 있거나 아니면 '그 회장'하고만 있으니까, 죽일 기회가 없었지. 이번이 기회였고."

백태양은 생각이 복잡해졌다. 여자의 원래 타겟이 백태양 자신이었다…그렇다면 아이리스 다크에게는 어떻게 보고해야 할까. 선수금 20억은 전부 빚을 갚는데 사용한 상태였다.

"얼굴이 너무 창백해졌는걸. 걱정하지마, 나는 널 죽일 생각이 없으니까. 난 일족을 배신하기로 했거든."

"그것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아니다. 질문 하나 하지. 왕의 일족이라는게 뭐냐?"

그 말에 오히려 여자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 사람이 우리에 대해 말을 안해줬다고?"

"응. 금시초문인데."

"이건 좀 많이 허탈하네."

백태양은 조금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돈을 못 벌수도 있겠다 싶어서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왕의 일족이 뭐냐고."

"뭐라고 말해야 할까…네 회장이 싸그리 죽여버린 패배자들의 집단?"

"회장? 임한영 회장님을 말하는 거야?"

그 물음에 여자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그럼 누구겠어. 미안하지만 그 사람의 이름을 언급하는건 좀 힘들어서. 그냥 회장이라고 불러줘."

백태양은 심각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에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럼 왕의 일족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겠어?"

여자는 한숨을 쉬었다.

"긴 이야기가 될 거야. 잘 들어. 왕의 일족은 태조 왕건의 후예야."

백태양은 뜬금없어 보이는 이야기에 고개를 갸웃했다.

"고려를 세운 그 왕건?"

"그래. 그 왕건. 너도 알겠지만 조선이 세워진 이후 왕씨는 상당한 견제를 받았어. 왕씨 몰살 사건으로 수백명이 학살당했고. 전 왕족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지. 거기서 살아남은 사람들일지라도 대부분 쥐죽은 듯이 살았고."

"그랬구나."

"사실 이성계가 경계한 건 개성 왕씨 전체가 아니었어. 대부분은 호족 결혼 정책으로 왕씨 성을 받은 것뿐, 진짜 혈통은 아닌 경우가 많았으니까."

여자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들이 진짜 노린 건, 태조 왕건의 직계혈통들. 그러니까 왕족들이었지. 명분도 이유였지만, 그들은 알고 있었던 거야. 왕씨 혈통에 있는 진짜 왕의 힘을."

"왕의 힘?"

"대를 이어져 내려오는 유전적인 특성이지. 태조 왕건과 쿠빌라이 칸. 두 위대한 왕의 유전자가 섞이며 아주 특이한 현상이 일어났어. 이성계는 그걸 경계했던 거고."

"쿠빌라이 칸?"

"몽골의 위대한 왕이야. 충렬왕때의 일이지. 그렇게 우리는 황금씨족의 피와 고려왕조의 피를 동시에 가지고 있게 된 거야."

"그 유전자들에 초능력 같은게 있었고, 이성계가 그걸 알고 숙청을 해버렸다는 거로군."

"똑똑하네. 우리 일족들 사이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말이라 정확한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우리는 그렇게 믿고 있지."

"초능력이 뭔데?"

백태양의 물음에 여자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성급하게 굴지 마. 너도 결국 알게 될 테니까."

"알았어."

"500년간 왕의 일족은 정체를 들키지 않으려 음지에서 활동했어. 대외적으로는 왕씨를 버렸지만, 안에서는 누구보다 왕씨에 대한 집착이 강했지. 검계라고 알아?"

"…조선시대의 깡패같은 집단 아닌가?"

"맞아. 그 검계가 바로 왕의 일족이야. 우리는 그렇게 돈을 벌고 무술을 개량해갔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당대의 강자들을 포섭해 유전자를 더 발전시키는 것이였지."

"으음."

"하지만 그런 영웅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지. 한 시대에 태조 왕건과 쿠빌라이 칸과 비교될만한 영웅이 많이 있을리가 없잖아."

"그건 그렇지."

"그래서 우리는 피를 진하게 유지시키기 위해 근친교배를 했어."

백태양은 자기도 모르게 미간은 찌푸렸다. 여자는 그 모습에 피식 웃었다.

"나도 알아. 역겹지. 조선 왕조에 대한 복수, 그것을 위해서는 왕의 일족 구성원 개인이 중요한 게 아니다 라는 거였겠지."

"지독하네."

"응. 그러나 500년간 왕의 일족은 그 흔한 난 한번 일으키지 못했어. 본거지인 개성에서 임꺽정이 난을 일으켰을 때도, 왕의 일족은 개입하지 않았어. 너무 오랜 기간 숨어있었던 나머지 겁쟁이가 되버렸나봐. 우린 충분히 강했지만, 위대한 선조를 따라갈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몰라."

백태양은 홀린 듯 여자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러던 와중 조선이 멸망했어. 일본 제국이 들어섰지. 왕의 일족은 복수의 대상을 잃었어."

"그런. 그러면 일본이랑 맞서 싸웠나?"

그 말에 여자는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왕의 일족은 검계, 즉 조선의 뒷세계의 제왕이라는 위치를 유지하고 싶었을 뿐이었어. 오히려 적극적으로 친일 행각을 펼쳤지."

"허어. 그래도 한때 왕족이었던 사람들이…"

"일본에 충성하는 댓가는 달콤했다고 해. 뒷세계의 거물의 위치를 유지한것도 모자라, 혈통의 힘을 쉽게 강화할 수 있는 방법을 얻었거든."

백태양은 침을 꿀꺽 삼켰다.

"어떻게?"

"이자메아의 실험을 통해서였지. 원래 왕의 일족은 능력 개화 성공율이 10퍼센트대에 불과했어. 개화를 위해서는 죽을 때까지 몰아붙였지. 즉, 사망율이 90퍼센트였다는 거야. 대를 잇는 것도 힘겨운 수준의 소수정예였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지. 하지만 약물을 통한 강제 개발법이 생기면서 대부분의 아이들이 왕의 일족이 되는 데에 성공했지. 그때가 왕의 일족의 최전성기였어."

"100년 정도 전의 이야기네. 그때가 최전성기라면, 대체 왜 몰락한 거야?"

"어느 정도 눈치챘지 않아? 회장 때문이었지."

임한영. 백태양은 그를 존경했지만, 그의 과거는 전설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가 독일로 가기 전, 아주 젊은 청년 시절의 이야기는 거의 몰랐다. 백태양은 귀를 쫑긋 세웠다.

"회장이 어떻게 강해졌는지는 들었어?"

"알고 있지. 실험을 당하셨었고…또…"

"지옥에 직접 갔다왔다고."

"응. 솔직히 믿기지 않지만."

"우리도 완전히 믿는 건 아니야. 다만, 회장은 우리 왕의 일족에게 있어 일종의 트라우마야. 전후관계는 모르지만, 우리는 그가 부활이라는 초자연적인 현상과 이자메아의 지독한 마루타 실험을 모두 겪은 존재라고 판단하고 있어."

"……"

"과학과 변칙. 그 중 하나만으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불가해한 힘을 가진 괴물 중의 괴물. 그게 회장이니까."

"회장님은 정말 강하시지만 그렇게까지 고평가하는 이유가 대체…"

백태양은 짐작가는게 있었다. 임한영의 가장 큰 전설 중 하나인 야쿠자 대학살. 하지만 그건 분명 해방 이후였다.

"회장은 왕의 일족의 일원 9할을 몰살시켰어. 어린아이를 제외하고 살인을 해본적 있는 모든 자를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죽였지. 이유는 나도 몰라. 왕의 일족의 가주들은 모두 그때 왜 죽였는지에 대해서는 함구하거든."

백태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끔찍한 이야기지만, 젊은 시절의 회장님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트라우마가 된 거구나. 너희도 힘들었겠네. 500년 전에도, 100년 전에도 일가의 몰살을 겪었으니."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두 학살은 크게 달라. 500년 전에는 조선왕조에 대한 증오를 키웠지만, 회장의 학살 때는 그러지 못했어. 이미 친일행위를 하며 일족의 자긍심이 꺽였던 데다가, 그때는 조선이라는 단체에 짓눌린 거였다면, 회장은 집단이 아닌 개인이었기 때문이야."

"회장은 예외적인 사람이잖아."

"그렇다 하더라도 수백년 넘게 힘을 얻기 위해 개량해온 유전자가, 단 한명의 돌연변이에게 철저히 짓밟혔어. 그건 왕의 일족에게 있어 단순한 패배가 아니었어. 존재 의의 자체를 위협하는 치욕이자 좌절이었지."

"…슬픈 이야기네."

백태양은 이야기에 몰입하느라 잊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그래서 삼대천의 일원인 나를 죽이려 하는 거야? 임한영…아, 미안. 회장님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고 복수하려고?"

"아니. 여전히 회장은 공포의 대상이야. 하지만 넌 달라."

여자는 백태양에게 다가갔다.

"내 이름은 왕지현이야. 왕의 일족의 계승자이고, 두달 전 내 친오빠와 결혼하라는 명을 받았지."

"…"

"지금의 왕의 일족은 그냥 미쳐버린 집단이야. 암살자 가문으로 재탄생했지만, 난 그곳을 나가고 싶어."

"그냥 나가면 되잖아."

"아이구. 그게 그렇게 쉽겠어요, 왕자님?"

왕지현은 백태양에게 기대었다. 백태양은 그녀를 떼어내려 했지만 그녀는 버텼다. 백태양은 그녀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녀의 눈이 어느새 완전히 까맣게 물들어 있었던 거였다.

"눈이 왜…아니, 그보다 나를 왜 죽이려 한다는 거냐고!"

그 말에 왕지현은 배시시 웃으며 백태양을 올려다보았다.

"백태양. 넌 왕의 피를 가지고 태어났어."


1987년 6월. 개성.

"호헌철폐, 독재타도!"

뉴스에서는 서울의 시위현장을 방영하고 있었다. 그걸 지켜보던 남자는 차분히 TV를 껏다.

"우리랑은 상관없는 일이다."

남자는 이후 고개를 돌려 한 여자를 쳐다보았다.

"개화를 한지 2년이나 지났다. 현숙아. 아직도 결정을 못한게냐?"

남자의 말에 현숙이라 불린 여자는 고개를 들어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아버지. 저는 투사가 되고 싶습니다."

"왕의 일족의 여성은 많은 아이를 낳아야 할 의무가 있음을 알고 있지 않느냐. 약물 없이 자연 개화를 한 네 재능은 알고 있으나, 그렇기에 더더욱 임신을 해야지."

남자는 짐짓 따뜻한 미소를 지었지만, 그것이 가식이라는 것을 왕현숙은 알고 있었다.

딸의 임신을 종용하는 아버지. 그것도 남동생과 결혼하여 애를 낳으라는 명령을 내리는 아버지가 정녕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존재일까.

왕현숙은 세뇌를 받으며 자라왔지만, 이른 나이에 초능력을 개화해 인간의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런 그녀에게 있어 이 일족은 소름끼치는 집단일 뿐이었다.

물론 아버지이자 왕의 일족의 현 가주, 왕제경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현재 왕의 일족 중 임한영 회장의 대학살 현장을 온전히 기억하는 몇 안되는 인물이다. 일가족이 전부 참살당하는 현장을 목격하고서, 그 역시 괴물이 되었을 것이다. 자신은 공포에 짓눌려 이기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후손이 언젠가 복수를 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1년만 시간을 주십시오. 딱 1년만 더 투사 활동을 하겠습니다."

"그럴 순 없다. 투사 활동을 하다 불임이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어."

아버지는 절망에 빠진 딸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차마 그녀의 눈을 쳐다볼 수 없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지금 왕제경은 아버지가 아닌, 왕의 일족의 가주다.

"…일주일을 주마. 푹 쉬다 와서 결혼을 하는 거다."

"예."

똑똑한 왕현숙이라면 일주일 동안 잘 추스리고 운명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왕제경은 생각했다.


일본, 도쿄.

"즐거운 여행 되십시오. 히데코씨."

"감사합니다."

왕숙희는 일본에 당도했다. 감히 아버지를 거스를 생각은 없었다.

그저 일족의 원수, 회장이 만든 삼대천이라는 단체에 큰 타격을 주고 이를 통해 투사로서 인정받겠다는 생각이었다. 1년만 잠적한다. 그 기간 동안 회장을 암살하고 일족의 영웅이 되어 돌아가겠다는 계산이었다.

1987년의 도쿄는 밤에도 낮과 같았다. 왕숙희는 도시가 주는 화려한 위용에 순간적으로 압도되었다.

삼대천은 이곳에서 카지노와 캬바쿠레 사업을 하며 막대한 수익을 벌고 있었다. 임한영은 서울에 있지만, 최근 한국은 정치적으로 너무나 불안정한 데다가, 올림픽 개최 등으로 인해 조직폭력을 통한 수익 창출이 어려워지고 있는 상태였다.

그렇게 눈을 돌린 곳이 일본이었다. 임한영은 야쿠자 정벌 이후 일본을 떠났고, 현재 도쿄의 암흑가를 관리하는 것은 백시후라는 남자였다.

왕숙희는 백시후에게 접근 한 뒤 삼대천에 잠입할 생각이었다. 그가 영업하는 캬바쿠라의 종업원으로 위장취업을 한 뒤 정보를 캐낼 생각이었다.

왕숙희가 가게 방문을 두들기자, 얼마 지나지 않아 험악한 인상의 사내가 문을 열었다.

"아직 영업시간 아닙니다."

"아, 실례했습니다. 그게 아니라…여기 채용공고를 보고 왔어요."

왕숙희의 입에서는 유창한 일본어가 흘러나왔다. 그 말에 남자의 얼굴도 풀어졌다.

"그런 거라면 들어오시죠. 사장님과 면담을 해야 하니 조금만 기다리시죠."

얼마 지나지 않아 동그란 인상을 쓴 선해 보이는 남자가 다가왔다. 특이한 점은, 젊은 외형임에도 머리가 백색이었다는 점이었다.

"백시후라고 합니다."

"아, 조선인…죄송합니다."

왕숙희는 당황해서 하지 않던 말 실수를 해버렸다. 백시후라는 이름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당당하게 한국 이름을 말할지는 몰랐다.

"아, 하긴. 이땅에 사는 조선인들 대부분은 이름을 감추고 살아가죠. 저 역시 권력을 갖추기 전에는 이름을 감추고 살았습니다."

왕숙희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면…신분증을 보여주시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왕숙희는 신분증을 건넸다. 나고야 출신의 히데코로 완벽하게 위조된 신분증이었다. 신분증을 받아든 백시후는 곤란하다는 듯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히데코씨…미안하지만 위조된 신분증으로는 고용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최근에 야마기파가 다시 또 영업방해를 하는 바람에 신상이 깨끗한 사람만 고용하는 주의라서요."

"…!"

왕숙희는 평정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대체 어떻게 안 거지?

"다 들려요. 음…답하기 곤란하시면 그냥 가만히 계셔도 괜찮습니다."

왕숙희는 긴장했다. 역시 괜히 그 회장의 간부가 된 것은 아니구나 싶었다.

"너무 긴장하신거 같네요. 어려운 질문은 아니니까요?"

"……"

"조선인이지요? 조선총련계?"

왕숙희는 다시 한번 놀랬지만 태연함을 가장했다. 백시후는 미소를 지었다.

"맞군요. 내일부터 저녁 7시에 출근하시면 됩니다."

백시후는 잠깐 멈칫하다가 마지막 말을 이었다.

"…히데코씨."


1년이 지났다.

처음에 왕숙희는 백시후를 통해 삼대천의 정보를 얻으려고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삼대천과 백시후의 커넥션은 거의 없었다. 대신 백시후의 행동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행동 하나하나에는 상냥함이 묻어 있고, 누구보다 먼저 계획을 세우는 꼼꼼함까지 있었다. 특히 그 어떤 진상이 와도, 다른 깡패들이 와도 잃지 않는 미소.

왕숙희는 백시후의 그 미소가 좋았다.

점차 그녀는 일과 때 외에도 백시후를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백시후도 그 사실을 알까? 분명히 알 것이었다. 지독하게 훈련했던 연기도 들켰는데, 이렇게 숙희 자신도 알 만큼 크게 뛰는 심장소리를 그 백시후가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백시후도, 왕숙희도 서로를 향해 다가가지는 않았다.

그러던 날. 왕숙희의 집에 한 남자가 들어와 있었다.

"누구냐!"

왕숙희의 홍채가 즉시 확대되었다.

"고작 1년만에 이렇게 풀어졌구나."

"…가주님."

"아버지라 불러라."

왕제경이었다. 왕숙희는 개화를 풀었다. 탈력감이 느껴졌다. 그 왕의 일족 치고는 너무나 늦은 추적이었다.

"절 죽이실 겁니까?"

"그래야 겠지. 나는 가주지만 왕의 일족 전체가 내게 복종하는 것은 아니다. 네가 그렇게 떠나고 내 입지는 위태로워졌지. 지금이 네가 결정할 때다. 네가 사랑하는 남자를 죽이고 왕의 일족으로 돌아올 지. 아니면 우리의 집요한 추적을 받을지."

"……"

사랑하는 남자라. 왕의 일족은 숙희의 일거수투일투족을 이미 다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왕제경은 입을 굳게 다문 왕숙희를 서글픈 눈으로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래, 그것이 인간의 반응이겠지. 가주 자리를 위협받게 되자 그제서야 네 생각이 나더구나. 내심 일족을 택했으면 싶은 바람도 있었지만…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거라."

"아버지."

"나는 돌아가 널 죽였다고 할 거다. 여전히 의심하겠지만 내가 가주를 내려놓으면 일족은 굳이 이 도쿄의 거리까지 찾아오지는 않을 거야. 이곳은…임한영의 영역이기도 하니까."

왕숙희는 아버지의 표정을 보고 깜짝 놀랐다. 강하게 씹은 입술에서는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왕제경은 지금까지 회장의 실명을 단 한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 그걸 언급했다는 것은 왕제경이 일족으로서의 짐을 내려놓았다는 말이었다.

"안아보자꾸나. 우리 딸."

왕숙희는 왕제경을 껴안으며 눈물을 흘렸다. 평생을 왕의 일족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교육받은 그녀였다. 그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족의 따뜻한 품을 느꼈다.


왕숙희는 즉시 백시후의 집에 찾아갔다.

"어, 히데코씨. 무슨 일…"

왕숙희는 백시후의 입을 맞추었다. 백시후는 귀가 좋고 키도 훤칠하지만, 결국 왕숙희에게는 절대적인 힘이 크게 밀렸다.

그렇기에 왕숙희가 백시후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처음에 백시후는 저항하려는 듯 했지만, 이내 왕숙희를 부드럽게 껴안았다.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 조금 당황스럽네요."

"미안해요."

"아니에요. 제가 겁쟁이였죠. 당신이 절 좋아한다는 걸 알면서도 가만히 있었으니까요. 저도 당신을 사랑하거든요."

왕숙희는 더이상 무표정을 유지하려 애쓰지 않았다. 오늘은 긴 밤이 될 터였다.


"그때 왜 고용했어요? 호흡 소리를 듣고 훈련된 자라는 걸 알았다면서요."

"탈북한 특수부대 출신인줄 알았죠."

"거짓말."

왕숙희는 웃었다. 백시후도 그것을 보고 웃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히데코의 가식없는 웃음을 본 건 처음이었다. 그 웃음은 깜짝 놀랄 만큼 아름다웠다.

"히데코씨. 혹시…"

"제 이름은 숙희에요."

그 말에 백시후는 활짝 웃었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지만 그 누구도 그녀의 진짜 정체를 알고 있지 않았었다.

"숙희. 예쁜 이름이네요. 성은요?"

왕숙희는 멈칫했지만, 어차피 백시후라면 거짓말을 알아챌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더구나 지금은 살을 맞대고 있지 않은가.

"…왕씨에요. 왕숙희."

왕숙희는 백시후의 품에 안겨 눈을 감았다. 일족의 복수? 삼대천? 그런 건 이제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할 것 같았다.


다음날. 가게에 두 남자가 찾아왔다. 왕숙희는 직감적으로 그들이 일반적인 손님들과는 뭔가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아주 잘생긴 남자와 무뚝뚝한 표정의 남자. 그들은 테이블들을 넘어 곧장 사장실로 들어갔다.

"이, 이화천 형님, 정철민 형님…연락도 없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왕숙희는 백시후가 그렇게 당황한 모습을 처음 봤다. 두 남자 중 이화천이라 불린 잘생긴 남자는 태연하게 백시후를 향해 말을 걸었다.

"엄밀히 따지면 여기도 우리 두명 관할 구역인데, 못 올 이유는 또 뭐야?"

"…여기서 이러시지 말고 따라오시죠."

왕숙희는 직감적으로 이들이 삼대천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이곳에 1년 동안 잠입했던 이유, 삼대천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었다.

"음. 애랑 애."

이화천은 웃음을 머금은 채 여자를 골랐다. 그 중에는 왕숙희도 있었다.

"히데코씨, 오늘은 쉰다고 하지 않았나요?"

백시후는 그 와중에도 왕숙희를 걱정했다. 하지만 그녀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아니에요. 사장님. 저는 괜찮아요."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면서 남자들은 한국어로 말했다. 양 옆에 여자들이 못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왕숙희는 그들의 말을 완벽하게 알아듣고 있었다.

"우린 삼대천을 배신할 생각이다."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올림픽 이후 더이상 삼대천이 대한민국 전역을 커버할 수 없게 되었다. 무리한 진출이 독이 되었어. 이에 임한영은 음지의 조직을 숙청할 생각이야."

"…확실한 겁니까?"

"그래. 이대로 가면 우리 다 죽어. 그 전에 선수를 친 다음 셋이서 왕이 되자고."

이화천은 활짝 웃으며 백시후에게 친한 척 어깨를 두들겼다. 백시후는 웃을 수 없었다. 백시후 역시 임한영이 이들을 숙청할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이들이 운영하는 것이 음지의 사업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들이 마약 사업에 손을 댔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깨끗하게 운영되는 백시후의 영업장을 임한영이 숙청할 일은 없었다.

그렇기에 백시후는 이들이 영업장에 찾아올 거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삼대천의 가장 위험한 괴물 둘이 그의 앞에 있었다.

뭘 고르든 간에 백시후는 외통수였다. 이들의 반란이 성공할 확률은 너무나 적었다.

왕숙희는 분위기를 읽었다. 이화천은 가벼운 듯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지만, 그 옆에 남자. 정철민은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여차하면 백시후를 죽일 듯이.
그건 막아야 했다. 기습이라면 승산이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왕숙희는 개화를 펼치려 했다. 그때였다.

"회장님을 배신할 수는 없습니다!"

백시후는 이화천에게 뛰어들었다. 정확히는, 이화천 옆에 있는 왕숙희와 이화천 사이로 뛰어들었다.

정철민은 그 즉시 반응해 백시후를 난자했다. 피가 비산했고, 이화천은 여전히 웃은 채로 그 피를 뒤집어썼다.

왕숙희는 극도의 흥분으로 인해 개화도 하지 않고 정철민에게 달려드려 했다. 하지만 백시후의 외침이 아주 조금 더 빨랐다.

"절 죽이는 걸로 만족하십시오! 만약 배신에 성공하신다면 여기 종업원 모두가 형님들의 재산 아닙니까!"

이화천은 짐짓 고민하는 듯 머리를 긁적이더니 웃었다.

"맞는 말이네. 가자, 철민아!"

그 말에 정철민은 반박했다.

"아직 완전히 죽지 않았습니다."

"니가 장기를 아작을 내놓았는데 어떻게 살아. 그냥 가자. 아가씨. 너무 속상해하지 말아요. 그 녀석 어차피 오래 못살았을 거야."

원래라면 이 둘 모두 이리 허술하게 일처리를 하지는 않았겠지만, 지금 그들은 임한영을 배신하려는 생각으로 반쯤 미쳐 있었다.

이화천은 왕숙희에게 윙크를 한 뒤 정철민을 데리고 유유히 떠났다. 왕숙희는 살의가 확 들었으나, 지금은 백시후의 상태가 훨씬 중요했다.

"왜…왜…"

"당신이 나서려고 했으니까요."

왕숙희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제 사랑을 나눴다고는 해도 자신의 목숨을 내던질 정도는 아니었다.

백시후는 힘겹게 몸을 움직여 왕숙희의 배에 귀를 가져다 대었다.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숙희 씨 배 속에서 평상시랑은 다른 소리가 들렸어요. 혹여나 이게…우리의 아이라면…"

"그만…그만…말 하지 말고 일단 쉬어요."

왕숙희은 백시후의 손을 꽉 잡았다. 백시후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게 그의 마지막이었다.


3개월 후.

왕숙희는 무덤을 바라보았다. 매주 일요일이면 백시후의 무덤에 찾아가는 것이 그녀의 삶의 루틴이 되었다. 그리고 백시후의 감각이 맞았다. 그녀는 하루하루 불어가는 배를 바라보며 백시후의 존재를 인식했다.

그때, 왕숙희의 뒤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

"좀 늦었군. 미안하네. 처리할 일이 있어서."

그는 왕숙희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무덤에 꽃다발을 놓은 채 혼잣말을 했다. 무덤을 뒤덮을 많큼 거대하고 화려한 꽃다발이었다.

왕숙희는 한번에 알았다. 이 남자가 임한영이다.

임한영은 한참을 무덤을 바라보더니 눈물을 흘렸다. 왕숙희는 놀랐다. 왕의 일족들이 바라본 임한영은 괴물 그 자체였다. 그런 존재가 눈물을 흘리다니. 임한영은 눈물을 닦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원래라면 자네는 내 손에 죽었을 거다."

"……"

왕숙희는 위압감에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저 정도의 존재가 진심으로 뿜어내는 살기는 엄청났다.

"그러나, 내가 가장 아끼는 동생의 애를 뱄더군. 아이는 낳아라. 내가 기르지."

왕숙희는 그 말에 죽을 힘을 다해 목소리를 냈다.

"……안됩니다. 제가 기를 겁니다."

"목숨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내 최대의 자비를 베풀어주는 거라고 생각해라. 난 자식이 필요하고, 넌 너 자신과 네 자식 모두를 살릴 수 있어."

"……"


"그래서. 그 아이가 나라고?"

"그래."

"그걸 어떻게 믿지?"

백태양의 말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백태양은 회장을 존경했다. 허나 만약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어머니는 살아있을 수도 있었다.

"네가 왕의 일족의 능력을 개화한다면 믿을 수 있겠어?"

"…그래. 그 대단한 능력이 대체 뭐지?"

왕지현은 대답 대신 눈을 까맣게 물들였다.

"내게 한달이라는 시간을 줘. 직접 느끼게 될 거니까."

백태양은 침묵했다. 이 모든 게 거짓이라면, 속아줄 만 할 정도로 정교한 거짓말이었다. 백태양은 왕지현에게 물었다.

"내 어머니, 살아계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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