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일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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쏟아지는 장대비가 런던의 골더스 그린 화장터의 유리창을 때렸다.

이곳은 아마 3일 전만 했어도 북적였을 것이었다. 그의 아들과 아내, 친우였던 어니스트 존스와 스테판 츠바이크, 그리고 아마 자크 라캉도 왔을 터이다.

칼 융은 고개를 숙인 채로 네모난 석판 위에 놓인 작고 검은 항아리를 바라보았다. 항아리에 그려진 디오니소스는 무심하게 자세를 취하고 있었고, 그 항아리 아래엔 반듯하게 깎인 검은 돌기둥이 있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6.5.1856 - 23.9.1939

"스승님. 전 당신이 미웠습니다."

그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축축하고 어두운 석조 건물 안에서 힘없이 메아리쳤다.

"… 당신을 떠난 것을 후회하지 않겠다고 그렇게 다짐했지만…"

그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는 미간을 주물렀다.

"여전히… 어떻게…"

그의 얼굴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제가 당신의 양아들이라고요? 황태자라고요? 제가요?"

그는 낮게 흐느꼈다.

"당신이 제 양아버지인 건가요? 당신이요?"

그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제가 그렇게 찾던 아버지가 당신인 건가요? … 답해 보세요. 스승님."

하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었다.

"제가… 제가 어떻게, 어떻게 했어야… 어떻게 했어야 했나요…? 알려주세요 스승님."

그는 천천히 대리석 바닥에 주저앉았다.

"당신이 제 아버지라면 말해 보시라고요!"

칼 융은 그렇게 소리쳤다.
그는 그렇게 홀로 남아 한참을 통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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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했다.
그렇기에 그는 아들이 자신을 살해할 날을 기다렸다.


RADIOGRAM

[RIGD-871193 / MNCO-171196]

| FROM: O5-OVERWATCH. SITE-01
| RE: Dept._of_Anly.Psyc. SITE-12.
| DATE: 1939.09.30.


이것은 요청 사항에 대한 답신이다.

회계과가 승낙했다. 네가 원하는 때에 회계과에 가라. 그들이 널 맞아 줄 것이다.
네 능력을 재단을 위해 사용하는 것에 O5 사령부는 감사를 표한다.

— O5 COMMITTEE

오마르는 받은 전보를 고이 접어 품속에 넣었다. 그는 분석심리학부의 사무실에서 걸어나오기 전, 명패에 걸린 태양십자를 바라보았다.

"… 제발 날 붙잡아줘. 제발. 이것이 마지막 기회가 될 거야."
그는 그렇게 말하곤 문을 닫았다.


칼 융은 멍하니 서서 상급감시사령부에서 내려온 공문을 바라보았다.

«익시온 프로젝트는 현 시간부로 해체된다. »

"때가 온 것일 뿐."

그가 혼잣말했다.

"그래. 더이상 익시온 프로젝트는 존속될 이유는 없지."

내향-직관: 아니야, 인정해선 안 돼. 우리에겐 해야 할 일이 있어. 전쟁을 예측하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일이야. 무엇이 우리의 영혼을 더럽히는지. 미래 인류의 정신이 어떻게 무너져 가는지. 그것을 알아내야 해.

외향-사고: 어떻게? 해몽? 우리가 지금껏 해온 그 어린애 장난처럼?

내향-직관: 어린애 장난이라니. 그것은 우리의 이론이야. 우리의 법칙이고.

외향-사고: 무엇이 우리의 영혼을 더럽히는지, 미래 인류의 정신이 어떻게 되는지 알아내야 한다고 했었지? 하지만 고개를 돌려 바깥세상을 봐. 이미 우리의 영혼은 더럽혀졌고, 우리의 정신은 이미 무너져 가고 있어.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느냐고? 아무래도 우리만이 그것을 모르고 있었지. 바깥사람들은 다 알고 있어. 전이. 동조. 그것이 우리 인간을 이렇게 만들어 간 것이야. 우리는 우리의 내면에만 너무 집중한 나머지 자명한 세계의 흐름을 놓치고 있었어. 이게 바로 익시온 프로젝트가 무너진 이유야. 그것만으로 미래를 예지하려 했던 것이 바로 우리의 오만이지.

내향-직관: 익시온의 오만이라.

외향-사고: 그래. 오만. 더욱이 우리는 사막에서 본 것도 있잖아?

내향-직관: 맥그리거의 환영. 그래. 그건…

외향-사고: 말 돌리지 마. 여전히 그것에서 도망치려 하고 있잖나.

내면 아이: 있다!

내향-직관: 그건… 그건…

내면 아이: 없다!

외향-사고: 나 자신도 알지 못한 채로, 아니 진짜 모습에서 도망치려 하는 우리가 어떻게 모두의 정신을 분석하고 깊은 곳의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겠나?

내향-직관: 하지만… 하지만 깊은 곳의 정신이 말해준 그 종말은 진짜야. 그래 물론 이미 사람들은 분노와 공포와 혐오와 광기로 가득 차 있어. 그렇지만 그것은 더욱 심해질 것이야. 끝없이 팽창해 가다가 스스로가 만든 거대한 의식에 지배당하게 될 거야.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지금보다 더 줄어들고 그것에게 사로잡혀 꼭두각시가 되어버릴 거야.

외향-사고: 그만해. 지금 넌 도리어 그 공포심에 사로잡혀 있어. 그 공포심이 네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있어.

내향-직관: 그렇지만…

외향-사고: 아니. 듣고 싶지 않아.

내향-직관: 내가 하는 말을 듣지 않을 거라고?

외향-사고: 그래. 네가 이 프로젝트를 이렇게 만들었어.

내향-직관: 그럼 나는 여기에 있는 이유가 뭐지?

감각: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외향-사고: 이유는 스스로 찾아라.

감각: 오마르의 목소리다. 우리를 찾는다.

내향-직관: … 그렇다면 … 그래. 뭘 해야 할지 알겠어.

"박사님? 계십니까?"

칼 융은 그제야 정신이 들어 문을 바라보았다.

"그래. 오마르, 들어 오게나."

문이 살며시 열리고 이제는 훤칠한 키를 가진 오마르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니?"

그는 심호흡하고는 입을 열었다.

"고백할 게 있습니다. 그리고 확인하고자 하는 것 또한 있습니다."

그는 천천히 그의 앞에 다가와 앉았다. 상당한 장신이 된 그는 이제 칼 융이 올려다봐야 할 정도였다.

"고백할 것이라니? 그게 무엇인가?"

"… 제가 박사님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칼 융은 대답하지 않고, 그 말을 곱씹었다.

"저는 저 자신을 사랑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 세계에 홀로 좌초되어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박사님과 함께하며 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해 주니 고맙네. 그게 네 고백인 건가?"

"아니요. 진짜 고백할 것은 따로 있습니다."

오마르는 고개를 숙였다.

"전 그 꿈을 꾼 적이 없습니다."

칼 융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곧이어 그가 칭한 꿈이 무엇을 지칭하는지 알아차리고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

"전 태양 십자의 꿈을 꾼 적이 없습니다. 아니, 애초에 전 꿈이라는 것을 꾼 적이 없습니다."

"그럼 그때 네가 이야기 한…"

"거짓말입니다. 또, 계산된 결과입니다. 그 꿈에 대한 정보는 이전에 다른 분과 면담을 할 때의 이야기를 지나가던 보안요원한테 전해 들었습니다."

칼 융은 얼이 빠진 채로 오마르를 쳐다보았다.

"그게… 다 거짓말이었단 거냐?"

"… 네, 그렇습니다."

칼 융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네놈이로구나. 익시온 프로젝트가 첫 단추부터 망가진 그 이유가 바로 너로구나!"

그가 노발대발하며 오마르에게 으르렁거렸다.

"죄송… 죄송합니다…"

오마르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는 이를 꽉 깨물며 칼 융을 노려보았다.

"그게 어떻게 죄송한 표정인가? 하찮은 너 때문에 지금 10년 이상 지속된 프로젝트가 공중분해 되었다고! 넌 언제라도 이 상황을 막을 수 있었어. 그런데 왜?!"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전, 제가 고백을 하고 난 뒤에 당신이 절 이렇게 대할 거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런데 전 그러지 않으리라 믿었어요. 왜냐고요?"

그는 눈물을 닦고는 소매에서 봉투를 꺼냈다.

"당신은 언제나 제 예측을 피해 가는 사람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이제는 아닌 것 같네요. 저는 더 이상 당신과 있을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전 당신을 떠나겠습니다."

그가 봉투를 탁자 위에 내려쳤다. 봉투에는 회계과의 로고가 찍혀있었다.
칼 융은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집어 들었다.

"전 이제 분석심리학부에서 나가고 회계과로 이직합니다. 상급감시사령부의 승인을 받았습니다."

"오마르, 잠깐…!"

"안녕히 계십쇼."

오마르는 발을 돌려 사무실의 문으로 향했다. 그가 문을 열기 전 그는 잠시 멈추고는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 칼 융을 바라보았다.

"전… 전 박사님이…"

그가 잠시 머뭇거렸다.

"제… 아버지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잠, 잠깐, 오마르!"

그는 문을 쾅 닫았다. 사무실과 복도로 퍼져 나가는 잔향음이 길게 남아 사방을 휘감았다.

칼 융은 우두커니 서서 한참 동안 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스승과 같은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 1940년 7월 12일

제12기지를 내리쬐는 햇볕은 어느 때 보다도 강렬했다.

어제 많은 비가 내렸다는 사실을 비웃기라도 하듯, 하늘은 푸르렀다. 습한 대기가 기지를 채웠고, 그에 따라 여러 곤충들과 그 곤충들을 노리고 찾아온 많은 새들로 인해 조금 활기차고 북적였다.
칼 융은 소파에 앉아 익숙한 풍경을 바라보았다. 약간의 후텁지근한 열기가 올라와 그의 주름진 이마에 땀을 맺히게 했다.

그의 뒤에서 문이 스르륵 열리고 맥퀸이 나타났다.

"오늘 날씨가 좋군요."

"그러게 말이네."

"바깥은 여전히 치열한 전쟁 중인데도요."

그는 의자를 끌고 와 그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둘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창 밖의 푸르른 경치를 바라보았다.

"저희가 처음 만나던 날이 생각나는군요."

그는 조금 망설이고는 입을 열었다.

"공교롭게도요."

칼 융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가 어떤 소식을 전달할지를 말이다.

"박사님이 이곳에 오신지 딱 10년이 돼가네요."

"그래. 많은 인연도 만나고, 다양한 자료도 수집하고, 다양한 연구도 할 수 있었지."

"박사님이 오시기 전의 초심리학부는 말 그대로 혼돈이었습니다. 정립되지 않은 수많은 가설과 입증되지 않은 여러 은비적 이론들이 뒤섞여 있었죠. 그리고 박사님의 노고로 점차 이런 것들에게도 체계가 부여되면서 좀 더 그럴 듯 해졌습니다. 이 모든 게 박사님이 분석심리학부에서 힘써오신 덕분이죠."

"그런가? 난 그저 내 이론을 따랐을 뿐이었네만."

"박사님이 이 분야의 기준이 되셨습니다. 박사님의 연구 방법론을 따라 초심리학부 내에서 여러 부서들이 나오고 있어요. 현재 밈학부가 가장 뜨겁군요. 박사님의 아키타입 이론을 일부 차용해서 독자적으로 연구를 이어나가는 중입니다."

"허허, 그렇게 들으니 신기하구려. 연금술 분야는 어떤가?"

"연금학부의 댜길레프 이사관 역시 박사님에게 많은 신세를 졌다고 하더군요."

"하하, 그렇게 들으니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군. 그럼…"

칼 융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싱크로니시티 이론은 어떻나? 다른 부서에선 이것에 대해 다루고 있나?"

맥퀸은 입을 다문 채 미소만을 지었다.

"음, 그렇군."

"현실의 변동성을 연구하는 현실조정과가 막 등장한 참입니다만, 그쪽에선 크게 이쪽에 관심을 두지는 않고 있네요."

"괜찮네, 괜찮아."

칼 융은 이렇게 말하고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래. 서론이 길었군. 자네가 이곳에 온 목적이 있지 않겠나?"

"그래요 맞아요."

맥퀸은 의자에 몸을 기대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맑고 푸른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이런 좋은 날이 이런 소식을 전해드려서 유감입니다. 박사님."

그는 작은 서류를 그에게 건넸다.

"칼 융 박사님. 당신은 SCP 재단에서 퇴사처리 되었습니다."

칼 융은 서류를 받아 들었지만, 시선은 바깥의 풍경에 고정시킨 채로 있었다.

"내가 여기서 나가게 된다면 분석심리학부는 어떻게 되나?"

"일단은 미첼 양이 2대 분석심리학부장이 될 예정입니다. 하지만 이제 분석심리학부는 주요한 목적이 없는지라… 과연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는지는 장담을 못드리겠습니다. 보통 이런 경우엔 1년을 채 넘기기 어렵습니다."

"아무래도 그녀가 그 짧은 시간 동안 우리 인류가 직면할 그 위협에 대해 연구를 이어가겠군."

"하지만 익시온 프로젝트를 하던 때와는 다르겠지요. 이제는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평의원도 없고, 그만큼 지원받는 자원도 없으니까요."

"그렇지."

어색한 침묵이 둘 사이에 감돌았다.

"… 박사님은 그 일이 언제 일어난다고 생각하십니까? 박사님, 그리고 미첼양이 우려하는 바로 그 일이요."

"모르겠네. 나는 내가 처음 불타오르는 태양 십자의 꿈을 1930년에 꾸었을 때 1년 이내에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리라 생각했네. 하지만 전쟁의 발발은 그 9년 뒤였지.
시간이 계속해서 지날수록, 곧, 정말 손으로 잡을 만큼 그 시간이 다가왔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그저 내가 충분히 가까이 있다고 착각했을 뿐이었지. 그렇게 9년이 흘렀네.

인류 광기의 도래가 언제 오느냐고? 나는 모르네. 그리고 아무리 미첼 양이 그것을 연구한다 할지라도 알아낼 수 없을지도 모르겠네. 그것은 광기이고, 광기는 계산할 수 없는 것이니까.
또, 어쩌면 그 태양 십자의 불길이 세상을 태우는 그 환영은 어쩌면 아직도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이미지일 수도 있어. 그게 2차 대전의 개전을 상징한다고 우리가 섣불리 결론지은 것일 수도."

"굉장히 과학자와 닮아지셨군요. 아니, 원래도 과학자와 같으셨지만, 지금은 좀 더 완전한 모습입니다. 박사님도 그동안 많이 성장하신 것 같군요. 그런가요?"

"성장인 건가, 혹은 상실인 건가. 사실 이건 완전한 모습이라기보다는 조각난 모습이지 않을까."

칼 융이 나지막이 혼잣말했다.

맥퀸은 자리에서 일어나 찻잔에서 와인과 크리스털잔 두 개를 꺼내 탁자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그는 두 잔 중 칼 융의 잔 안에 흰색 알약을 떨어뜨렸다.

"퇴사 절차입니다. 이 약, 기억하시나요?"

"물론이지."

그는 두 잔에 붉은 와인을 흘려 넣었다.

"구스타브 로렌츠, 피노 누아 리저브. 프랑스에서 만든 진짜 예술이죠."

칼 융은 기포를 내며 녹아드는 기억소거제를 바라보았다.

"오마르는 어떻게 되었나? 잘 지내고 있나?"

"아, 오마르, 그가 있었군요. 네, 그 친구는 원래 똘똘한 친구지 않았습니까. 현재 내무부 산하 회계과에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변칙적인 계산능력 덕에 빠르게 승진 중이랍니다."

"올해로 성인이지 않나?"

"음… 아, 그러네요."

"그렇군…"

칼 융은 와인이 담긴 잔을 들고 햇빛에 반사시켜 보았다. 밝은 햇빛을 받아 사무실 벽에 기묘한 붉은 패턴이 일렁였다.

"박사님이 그 술을 마신다면, 지난 10년간 재단에서 일한 기억을 모두 잃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쇼. 대신 다른 기억이 들어차게 되어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조차도 모르실 겁니다. 그렇게 한 병원에서 깨어나는 거죠. 그리고 그때 손에는 박사님의 자료들 중 평의원의 판단하에 정상세계에 공개돼도 되겠다 싶은 자료들이 들려 있을 겁니다."

"내 붉은 책 말인가?"

"네, 그렇습니다. 박사님의 그 책은 초상적 지식을 다수 포함하고 있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그런 부분은 외부 세계에 알려져선 안 되기에, 모두 검열된 채로 나머지만 당신에게 돌려 드릴 겁니다."

"검열이라."

칼 융은 아쉬운 마음으로 잔을 바라보았다. 그는 수많은 생각에 잠겨 한참을 그 잔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그것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차가운 크리스털이 입술에 닿았다. 시큼한 와인의 향기가 코로 넘어왔다. 넘실거리는 표면이 입술을 적실 듯 다가왔다.

"… 내 나머지 자료는 어떻게 되는 거지?"

칼 융은 입에서 잔을 떼고 물었다.

"아직 미련이 남으시는군요."

맥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곧 기억소거 절차가 진행될 예정이라 거짓말을 해도 상관은 없습니다만, 사실대로 말하겠습니다. 재단의 모든 자료는 20년이라는 기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10년간 열람자가 없다면 그 자료는 데이터베이스에서 제외됩니다. 그리고 그 후로 또 10년간 그 자료에 접근을 요청하는 이가 없다면 소각됩니다."

"그런가… 그럼 내가 지금껏 이곳에서 이루어 온 그 모든 것들은…"

"연금학부에서 열람하는 박사님의 자료 일부, 그리고 밈학부에서 참조하는 아키타입에 대한 자료들 말고는 아무래도 대부분 그 대상에 포함되겠지요. 사실 분석심리학부 말고는 그 모든 꿈의 환영과 그 해석에 대한 자료를 열람할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겁니다."

칼 융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 제 말씀이 박사님의 미련을 더 크게 남기게 된 것 같네요."

"괜찮네, 괜찮아. 그저… 아직 결단력이 없을 뿐이야."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창 밖을 바라보았다.

"음, 조금… 덥군요. 창문이라도 조금 열까요?"

맥퀸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말했다. 그는 허리를 숙여 앞의 커다란 창문을 밀어젖혔다.

바로 그때, 황금빛으로 빛나는 풍뎅이 한 마리가 열린 창문 틈으로 날아들었다. 그 풍뎅이는 분석심리학부 사무실을 크게 한 바퀴 선회를 하고는 칼 융 박사가 들고 있는 와인잔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는 반대편 손을 향해 손바닥 안으로 파고들었다.

칼 융은 자신의 손에 얌전히 앉은 풍뎅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거대한 필연의 흐름이 자신에게 다가왔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는 망설이지 않고 단숨에 자신의 오른손에 담긴 붉은 영약을 들이켰다.
















칼 구스타프 융은 1940년 7월 13일의 아침, 취리히의 한 병원에서 깨어났다. 그의 손에는 이상하리만치 얇은 그의 붉은 책이 들려 있었다.

떠오르는 햇살이 붉은 책을 희미하게 비추었다. 책에 음각된 태양십자가 햇볕을 받아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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