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에서의 환영을 해석하기 위한 세미나가 열렸다.
칼 융 박사와 오마르 울웨, 그리고 베게너와 미첼은 커다란 칠판 앞에 섰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베게너는 환자용 침대에 누운 채로 이들의 대화에 참여했다. 오마르는 베게너에게 각각의 환영에 대해 읽어주었고, 베게너는 자신의 지식을 모두에게 전달했다. 미첼이 가장 열심히 환영을 해석하는 것에 집중했다. 융은 각각의 환영 다발을 가리키는 패널을 준비하여 그 옆에 쌓아두었다.
"자, 준비는 끝났네."
융이 말했다.
그리고 갑작스레 찾아오는 강한 두통과 동시에 멀리서 들려오는 비명을 듣고는 잠시 모두가 손을 멈추었다. 그 소리는 마치 광인의 절규와도 같았으며, 영혼 가장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공포의 표현이었다.
"맥그리거 씨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미첼이 물었지만, 그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사막에서 돌아온 지 몇 주가 지났지만, 아직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베게너가 생각을 전했다.
"맥퀸 씨가 방법을 찾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언젠간 상태가 나아질 겁니다."
오마르는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
"불쌍한 그의 영혼에 하나님의 자비가 있기를."
칼 융은 묵념했다.
"어쩔 수 없지만, 다시 업무로 돌아옵시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미첼이 손을 비비며 말을 돌렸다.
"이제 본격적으로 해석에 앞서 기록을 위한 녹음기를 켜도록 할게요."
"그래 부탁하네."
오마르가 베게너가 누워있는 병원침대를 끌고 나와 그 뒤에 있는 녹음기를 드러냈다. 미첼은 커다란 황동 레코더에 다가가 태엽을 감고 안에 담긴 자기테이프의 끝을 헤더에 걸었다. 찰칵이는 소리와 함께 테이프가 돌기 시작했다.
<기록 시작>
미첼: 자, 맥그리거 씨는 사막에서 총 22개의 환영을 보았습니다. 이 환영 중 과연 무엇이 2차 세계대전의 개시를 알리는 것일까요?
베게너: 아무래도, 7번 환영인 태양 십자가 붉게 타오르며 모든 것을 불태우는 환영이 아닐까 싶은데요. 일단은 지금껏 우리를 따라다니던 태양 십자의 환영이 직접적으로 묘사되어 있기도 하고… 이때 묘사된 불타는 버섯의 형상은… 어쩌면…
칼 융: 어쩌면?
베게너: 만약, 막강한 폭발이 일어난다면, 구형으로 뻗은 뜨거운 공기가 위로 올라가며, 마치 버섯의 형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환영은 어떤 거대한 규모의 폭발을 예견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칼 융: 음… 그럼 무엇이 그런 폭발을 일으킬 수 있지?
베게너: 아직은 공상적인 단계입니다만, 이탈리아의 엔리코 페르미라는 과학자가 중성자로 우라늄 원소를 충돌시켰을 때 중성자를 발사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충분히 순수한 우라늄 덩어리가 있다면 연쇄적인 반응으로 거대한 폭발을 만들 수 있겠지요. 현재로선 그 정도로 연쇄적인 반응을 일으킨 실험 사례는 없습니다.
칼 융: 거대한 폭탄? 음… 잘 모르겠군. 그게 과연 전쟁의 시작이 될 수 있을까? 끝이라면 몰라도.
오마르: 혹은, 보탄, 애꾸눈의 왕. 4번 환영은 앞쪽에 위치해 있지만, 박사님이 독일 총통에 대해 생각한 상징과 겹칩니다.
베게너: 그렇다면 지금 당장 일어난다 해도 이상하지 않아. 1번 환영인 군단병의 환영은 바로 MTF 알파-1이 박사님과 맥그리거, 그리고 오마르 너를 찾아내는 사건을 예견한 환영이고, 3번 환영인 하늘을 나는 영웅의 환영은 최근 미국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만화책인 '슈퍼맨'을 예견한 환영임이 확인되었으니까. 일관적인 텀을 가지고 있다면, 이 모든 환영은 아무리 길어봐야 10년 이내에 일어나는 일이야.
칼 융: 첫 번째로, 일관적인 텀을 가지고 있지 않을 수도 있지. 두 번째로, 지금 당장 전쟁이 일어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때라네.
미첼: 그렇다면 더더욱 여기에 사력을 다해야 합니다. 이 프로젝트의 목적이 바로 그것을 위한 거니까요. 저희가 예견하기 전, 혹은 정상세계의 사람들도 뻔히 알 정도가 되면 이 프로젝트는 더이상 의미가 없어지니까요. 즉, 2차 세계대전의 개시일이 저희 프로젝트의 끝을 선언하는 카운트다운 없는 데드라인입니다.
칼 융: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익시온 프로젝트는 첫 번째 세계대전이 그러했듯 이 2차 세계대전의 발발이 인류에게 커다란 정신적 충격을 가한다는 것 또한 전제로 하고 있다네. 우리가 소집되고 이것을 꿈과 환영을 통해 해석하는 이유가 바로 그거야. 그건 그저 정치적인 결과일 뿐 아니라 우리 인류의 정신에 커다란 영향을 주는 중대한 사건이 될 거야. 우리의 정신은 그 이전과 이후가 같지 않게 될 거야.
침묵
칼 융: 다른… 다른 의견은 없나?
베게너: 박사님이 1차 세계대전을 예견한 꿈과 가장 유사한 6번 환영일 수도 있습니다. 홍수라는 상징이 가장 밀접하게 닿아있죠.
칼 융: 다시는 홍수로 멸망시키지 않으리라… 홍수 상징은 이제 기한이 지났어.
미첼: 9번 환영. 달을 뛰어다니는 두 남자와 하늘에서 그걸 지켜보는 한 남자. 달은 광기를 상징하지요. 그리고 그 직전에 있는 환영인 9번, 심판의 날을 전하는 팡파레 상징까지 더한다면 아무래도 박사님이 우려하시는 바로 그 사건이 이때 일어난다고 생각할 수 있어 보입니다.
칼 융: 그럼 설마…
미첼: 인류에게 어떤 거대한 광기가 스며들고 있습니다. 이미 현재 진행형이죠. 그리고 언젠간, 아니, 꽤 빠른 시일 뒤에 완전한 광기가 찾아올 것입니다.
오마르: 자신의 꿈 내용에 너무 얽매이는 것 아닌가요.
미첼: 그게 익시온 프로젝트가 하는 일이잖니.
칼 융: 그렇다면, 그 이후로 이어지는 특히나 더 기괴한 환영들이 말이 될 수 있겠군. 그 기점을 이후로 인류의 정신은 커다란 타격을 받게 되는 거야.
베게너: 그 기점이 바로 2차 세계대전의 개시일일까요?
칼 융: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네. 하지만… 그건 언젠가 일어날 거야. 그때 인류의 영혼이 무너져 내리겠지.
침묵
미첼: 하지만, 시간이 없습니다. 2차 대전은 당장 내일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칼 융: 우리가 너무 늦기 전에 그것을 알아내었으면 하는데.
베게너: 저희는 12기지의 모든 사람, 그리고 전 세계의 여러 정신병동에서 꿈 자료를 수집하고 있어요. 저희가 검토할 수 있는 꿈 자료들은 너무나 많고, 그것을 해석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적습니다.
칼 융: 그것을 해석해주는 수많은 사람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너무 제한적이네.
오마르: … 앨런 튜링의 기계가 답이 될 수 있어요.
칼 융: 앨런 튜링?
오마르: 튜링 머신. 작년에 그는 생각하는 기계 시스템을 고안해 냈어요. 산술적인 계산을 수행하는 전기적 알고리즘이죠. 제가 이전부터 준비하고 있던 논문의 내용과 일부 겹쳐서 이전부터 눈여겨보던 연구에요.
칼 융: 인간의 사고과정을 모사하는 체계로군. 하지만 꿈의 해석에는 직관이 필요해. 그래서 튜링 머신은 아무래도 우리의 일을 돕긴 힘들 것 같네… 아니지 잠시만, 인간의 사고를 모사할 수 있다면, 어쩌면 감정과 감각, 그리고 직관을 모사하는 구조를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베게너: 우리가 직접 해석하는 게 아닌, 기계에게 해석을 맡기는 방안을 생각 중이신 건가요? 그럼 그 기계를 구상하고 설계하고 만드는데 시간도 고려해야 합니다.
미첼: 하지만 그것 하나를 만든다면 해석 작업에 엄청난 진전이 있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녀가 칼 융을 바라보았다.
미첼: 설사, 그것이 2차 세계대전의 개전을 뜻하는 게 아니라 할지라도, 그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을 어떻게 초래할지. 그것을 더 명확히 알 수 있게 되겠죠.
침묵
미첼: 인류의 완전한 광기의 도래를요.
<기록 종료>
RADIOGRAM
[PAVQ-519054 / BQMC-043823]
| FROM: Dept._of_Anly.Psyc. SITE-12.
| TO: O5-OVERWATCH. SITE-01.
| DATE: 1939.01.12.
광기는 계속되고 있지만, 누군가 체계적으로 이 광기를 이용하기로 결정했고, 이제 그것을 실행에 나서고자 합니다. 그리고 모든 체계는 결국 예측 가능하지요.
2차 세계대전은 1939년 9월 1일에 시작됩니다.
이것이 일어나는 때에, 제가 다시 전보를 보내겠습니다. 그때 제 요청을 들어주세요.
— Omar Ulwe
늦은 밤, 전보의 전송을 마친 오마르는 이내 분석심리학부 사무실 구석의 어둠 속으로 다시 사라졌다.
"죄송하지만, 이건 안됩니다."
맥퀸은 칼 융의 노트를 되돌렸다.
"전운이 다가오고 있어요. 중국과 일본 간의 전쟁은 더욱 거세지고 있고, 소련과 독일의 움직임이 더욱 수상해졌습니다. 모두가 전쟁을 준비하느라 바쁘죠. 재단도 마찬가지고요. 어째 분석심리학부를 제외한 모두가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1930년부터 개전을 예측하고자 했던 부서가 맞는지 의아하군요."
"그건 우리도 알고 있네. 그렇기에 더욱 서두르려 하는 것 아니겠나."
"이 구상, 그러니까 박사님의 이 '아키텍쳐'는 너무 규모가 큽니다. 설사 박사님이 모두 구상하고 설계까지 했다고 해도 이제 겨우 연구되고 있는 연산장치의 서로 다른 구조의 모듈을 4개나 만들려면 최소 10년은 걸릴 겁니다."
"하지만…"
칼 융은 크게 한숨을 쉬며 머리를 싸맸다.
"지금, 어쩌면 인류는 풍전등화의 상태에 놓여있을지도 몰라. 2차 세계대전이 중요한 게 아니야.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어. 그 아키텍쳐가 완성이 되어야 그것을 알아낼 수 있는데…"
"전쟁이 일어나면 자원 조달도 힘들어집니다. 그리고 애초에 익시온 프로젝트의 목표가 달성되든 말든 해야 그 중요한 무언가에 대해서 더 연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맥그리거 씨의 상황도 더욱 안 좋아지고 있습니다. 근래 들어선 하루에 네 번 꼴로 발작을 일으킵니다. 계속해서 사막에서의 그 환영을 반복해서 보고 있어요. 텔레파시가 너무 강력해서 이번에 기지 외곽 쪽으로 완전히 격리시키기까지 했습니다. 이제는 제대로 된 격리도 힘들어졌어요."
칼 융은 마른 세수를 했다. 맥퀸은 이렇다 할 답변을 내놓지 못하는 칼 융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익시온 프로젝트는 머지않아 해체될 것입니다. 그 정확한 때는 전쟁이 발발한 직후이겠지요. 그때까지는 개전일을 예측하는 것에 총력을 기울여 주세요."
"예측해내지 못한다면… 이 프로젝트는 끝이군. 우린 인류의 앞에 무엇이 남겨져 있는지 모르는 채로 남겨질 거야."
맥퀸은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 앞에 쌓인 서류를 정리해 가방에 집어넣었다.
"익시온 프로젝트만 끝나는 게 아닙니다. 어쩌면 박사님이 해고되고, 또, 분석심리학부가 해체될 수 있어요. 박사님이 여기에 오게 된 이유가, 그리고 분석심리학부가 만들어진 이유가 바로 이 프로젝트를 위한 일이었으니까요."
그는 이 말을 끝으로 사무실의 문을 열었다.
그 앞에는 오마르가 노란 책을 들고 서 있었다.
맥퀸은 숨을 가볍게 내쉬고는 그의 옆으로 비켜 지나갔다.
"…"
"박사님?"
그는 칼 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탁자 위로 다가와 수많은 종이를 꼬깃꼬깃 이은 자신의 노란 책을 그 위에 올렸다. 칼 융은 미간에 손을 짚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저…"
칼 융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를 제치고 사무실에서 나갔다.
오마르는 가만히 서서 탁자 위에 초라하게 놓인 자신의 논문을 바라보았다.
"정말로요?"
"시간이 없습니다."
"…"
"저희는 너무나 많은 무의미한 자료들에 파묻혀 있고, 또, 확실하게 유의미한 자료들은 너무나도 적어요."
"그래서 사막에서의 그것을 다시 하자는 것이군요."
"하지만, 이번엔 제한된 환경에서요."
"제한된 환경이라면, 최근에 효과가 확인된 SCP-███-██ 이요?"
"네. 충분히 가능합니다."
"융 박사님은 반대하실 겁니다."
"그렇기에 저희끼리 해야죠."
"… 허, 당신이 이것을 제안하리라고는 생각 못했는데요."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악마와 싸우기 위해선, 우리가 악마가 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죠."
익시온 프로젝트: 실험기록
실험자: 테런스 M. 맥퀸, 마야 T. 미첼
대상: 로이 맥그리거
의의: 철저히 제한된 환경 내에서 약물을 통해 환각을 유도하여 익시온 프로젝트에 필요한 환영 정보를 얻기 위함.
첨부: 대상이 방출하는 텔레파시로부터 실험자를 보호하고, 전 인류의 집단무의식에 끼치는 영향을 줄이기 위해 SCP-???-??가 사용됨.
실험번호: 01
투입: 해시시(대마)
개요: 고대 암살자들이 의식용으로 사용하던 약물.
산출: 없음. 이전과 동일한 환영을 출력함.
실험번호: 02
투입: 코카인
개요: 창의성과 집중력을 대폭 상승시키는 약물.
산출: 새로운 환영 다발을 출력. 분석 결과 개인무의식에 존재하는 과거 기억이 상징화 된 것으로 추측됨.
실험번호: 03
투입: 메스암페타민
개요: 인지능력과 사고 속도를 강화시키는 약물. 강한 각성 효과를 띈다.
산출: 새로운 단일 환영을 출력. 해당 환영은 침대에 누운 노인이 하늘을 향해 승천하는 이미지였다.
실험번호: 04
투입: 리세르그산 디에틸아미드 (LSD)
개요: 1938년 알버트 호프만 박사가 맥각균 연구 도중 발견한 강력한 환각제
산출: 새로운 환영 다발을 다수 출력함. 확인된 환영의 예는 다음과 같다.
- 아버지의 무덤 앞에 주저앉아 우는 아이
- 녹색 돌을 깎아 만든 목걸이
- 돼지의 내장을 나누어 먹는 두 남녀
- 흑백의 두 기둥 사이에 흑백의 옷을 입은 여성
- 거대한 태아가 지구를 향해 손을 뻗어 그 내부를 뒤적임
실험번호: 05
투입: 리세르그산 디에틸아미드 (LSD)
개요: 투여량을 대폭 늘림.
산출: 새로운 환영 다발을 대거 출력함. 수가 많기에 해당 목록은 <부록 GQa-37: 환영 목록>을 참조하라. 이후 익시온 프로젝트의 주요 정보 수집은 본 약물을 통해 이루어질 예정이다.
실험번호: 06
투입: 리세르그산 디에틸아미드 (LSD)
산출: 위와 동일. <부록 GQa-38: 환영 목록-2차> 참조.
실험번호: 07
투입: 리세르그산 디에틸아미드 (LSD)
개요: 이전 실험과 동일한 양을 투여함
산출: 위와 동일. <부록 GQa-39: 환영 목록-3차> 참조.
실험번호: 08
투입: 리세르그산 디에틸아미드 (LSD)
개요: 투여량을 소량 늘림.
산출: 확인 불가. SCP-???-??의 한계를 넘어선 직관 텔레파시가 방출됨. 대상이 혼수상태에 들어섬.
"제기랄, 젠장… 하아… 제기랄…"
어둠 속에서 맥퀸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는 자신의 욕심이 불러온 비극 앞에서 너무나 뒤늦은 후회를 했다. 그의 눈앞에는 붉은 봉인이 붙은 공문이 있다. 공문의 표지에는 커다랗게 이렇게 쓰여 있었다. "상급감시사령부".
"우린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온 걸지도."
전등불을 등지고 선 미첼이 인영 속에서 묵묵히 혼잣말했다. 융 박사가 있든 없든, 맥그리거가 어떻게 되었든, 이 프로젝트는 계속되어야 했다. 그래야 그녀는 자신의 능력을 입증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대기하라."
깊은 한밤중, 병사들은 찬 공기를 마시며 지휘관의 명령을 기다렸다.
"아니야… 안돼… 이건… 이건 광기야. 광기가… 광기가 자라나고 있어…"
침대에 웅크리고 누운 칼 융이 몸부림쳤다. 희미한 의식 속에서 그의 눈꺼풀이 희미하게 떨렸고, 눈이 뒤집혔다. 고열로 땀 범벅이 된 주름진 이마가 번득였다. 환영의 불길 속에서 칼 융은 신음했다.
"이 광기는 어디에서 온 것이지?"
베게너는 곰곰이 생각했다. 그것은 서로에게 옮은 것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광기를 부추겼다. 그리고 그렇게 다수가 만들어낸 거대한 정신이 개인을 지배했고, 그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잃어갔다.
"…"
오마르는 화로 앞에 앉아 묵묵히 타들어 가는 노란 책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렇게 되리란 것을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저 때가 되었을 뿐. 그는 이렇게 속으로 되뇌었다. 그렇게 결론지었다. 그는 회생의 계획을 바꾸었다. 그는 일어나 전보를 보내기 위해 방을 나왔다.
"때가 되었다."
지휘관이 말했다. 명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이 총을 들고 일어나 폴란드의 국경을 넘었다.
"때가 되었다."
애꾸눈의 왕이 말했다. 그리고 불타는 태양이 떠올랐다. 25년 전에는 세계가 물바다가 되었지만, 이제 세계는 불길에 휩싸인다.
"때가 되었다."
천사 이스라필이 말했다. 다시는 물로 멸망시키지 않으리라. 우리에게 찾아온 이것은 물처럼 차갑고 무거운 것이 아니었다. 그 대신 뜨겁고 격양된, 그리고 너무나도 가벼운 광기의 불이었다.
"때가 되었군."
시가를 입에 문 유대인 노인이 혼잣말했다. 이전까지는 느껴보지 못한 무언가 강렬한,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이 밀려들어 와 내뱉은 무의식적 반응이었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 아직 해가 떠오르지 않아 스산한 안개가 낀 런던의 거리를 내다보았다. 그리고 그는 그의 옛 제자를 생각했다. 이번만큼은 그가 무엇을 느꼈는지를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는 이내 다시 집필하던 책, <정신분석학개론>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이렇게,
뒤늦게,
태양이 떠올랐다.
"결국 이렇게 되었군."
애덤 브라이트는 이렇게 말하며 붉은 책을 덮었다.
그는 눈을 돌려 준비물이 담긴 컨테이너 박스가 천천히 격납고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제, 때가 되었다."
"다우닝가 10번지 내각실에서 전달합니다. 오늘 아침 베를린 주재 영국 대사는 독일 정부로부터 11시까지 폴란드에서 즉시 군대를 철수시키겠다는 소식이 없다면, 양국 간에 전시상태가 될 것이라는 내용의 최후 통첩을 전달했습니다. 하지만 답신은 없었고, 결과적으로 이 나라는 독일과 전쟁에 돌입했음을 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