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마지막 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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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1년 6월 6일

레푸기움. 그 어둡고 둥근 요람 안에서 힘없는 신음이 새어나왔다.

칼 융의 딸들과 아들, 그리고 간병인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손수건에 찬물을 적셔 침대에 힘없이 누운 노인, 칼 구스타프 융의 이마를 닦아내었다. 그는 불편한 듯 몸을 계속 뒤척이려 하지만, 힘없이 꾸물거리기만 했다. 딸들은 그의 옆에 앉아 그를 진정시켰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의 주름진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열렸다. 그 사이에서 미약한 목소리가 천천히 새어나왔다.

"책… 그 책…"

"아버님, 원하시는 게 있나요?"

"내 성스러운 책. 내 붉은 책을 가져다줘."

그의 요청에 그의 큰딸, 그레트는 탁자에 놓인 붉은 가죽을 덧댄 무거운 책을 그의 품에 안겨주었다.
칼 융은 그 책을 받아들고 품에 꼭 안았다. 하지만 이내 그가 얼굴을 찌푸렸다.

"아니야… 아니야. 이건 너무 얇아…"
그가 신음했다.

"아버님, 아버님께서 오래전부터 써오신 바로 그 책, 레드북이 맞아요. 첫 장을 보시면 아버님께서 처음으로 보신 노란 홍수 그림이 있잖아요."

"아니야, 이건 일부에 불과해. 난 더 많은 것을 봤다고. 이것은 원래 이것보다 훨씬 두꺼워야 해."

그녀는 사경을 헤매며 알 수 없는 말을 힘없이 쏟아내는 그의 땀을 정성스레 닦아내었다.

"시간이 얼마 없어 보입니다."
간병인이 그의 손목을 쥐고 맥박을 재고는 그녀에게 이렇게 일렀다.

"헬레네, 프란츠, 마리안느, 아가테."
그녀가 남매들을 불렀다. 칼 융의 네 딸들과 한 아들이 원통형의 거실로 들어와 그를 둘러싸고 앉았다.

"아버지… 저희 보이시나요?"
그의 아들, 프란츠가 물었지만, 칼 융의 눈동자는 힘없이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난 인류의 미래를 보았어. 사막에서 옛 친우와 함께 그것을 바라보았다고. 이 책을 쓰기 시작한 지 스무 해는 넘어서 말이야."

"아버님, 아버님은 사막에 간 적이 없으셔요. 그리고 그때는 아버님은 심리과학협력체Scientific Collaboration for Psychology에서 근무하셨잖아요."

"그래 맞아. 거기서 일했었지.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어. 옛 친구들. 그들을 보고 싶어."

그러나 간병인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시간이 별로 없었다.

"아버님의 친구분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테런스 매튜 맥퀸, 로버트 로이 맥그리거, 마야 톰 미첼, 에두아르트 마이어 베게너, 그리고, 오마르. 오마르 울웨…"

하지만 모두 처음 듣는 이름들이었다.

"그들을 보고 싶어. 옛 동료들을 불러줘."

그가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몸부림을 쳤다.

"아버님, 무리하지 마세요."

"그들에게, 그들에게 못 해준 게 너무 많아. 내가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내가 나 자신에게 너무 얽매여 있었어. 한평생을 그것에서 벗어나고자 노렸했는데, 결국 나도 나에게 짓눌렸고 억압했던 거야. 그들에게 사과해야 해."

그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오마르, 미안하다. 다 내 잘못이야. 너야말로 내 양아들, 황태자가 될 수 있었는데… 프란츠, 오마르를 불러줘. 내 두 번째 아들이 될 수 있었던 이야."

"아버지, 그게 무슨 이야기입니까. 그런 사람 이름은 전 들어본 적 없습니다."

"아버님, 푹 쉬세요. 그분들은 지금 못 옵니다."

"아니야! 내가 그 아이에게 몹쓸 짓을 했어. 미안하다고. 내게 다시 기회를 달라고…"

칼 융이 크게 기침했다. 딸들이 그를 다시 편히 누울 수 있게 움직임을 도왔다.

"혹시 그분들 연락이라도 되려나요?"

"난 처음 듣는 이름이야. 지금껏 아버지가 말씀하신 적 없는 이름이야. 연락은커녕, 실제 존재하는 사람인지도 불분명해."

"하지만… 아버님께서 이렇게 강하게 누군가를 찾는 것은 처음 봤어요. 어제 오신 마리루이제 폰 프란츠 씨도 그렇게 반겼었지만…"

바로 그때. 갑작스러운 노크소리에 그들은 말을 멈추었다.

"그래. 그가 왔네."

칼 융이 힘겹게 미소 지었다.

"누구십니까?"

아들이 물었다.

"테런스 매튜 맥퀸입니다. 융 박사님의 오랜 친구입니다."

그의 아들이 벌떡 일어나 레푸기움의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깔끔한 정장과 포마드로 단정히 머리를 쓸어넘긴 남자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얼굴을 가로지르는 흉터가 난 여성이 서 있었다.

그가 오랜만에 어두운 요람으로 들어왔다. 칼 융은 그를 보고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오랜만입니다 박사님."
맥퀸과 미첼이 그에게 인사했다. 칼 융은 껄껄 웃었다.

"자네들도 많이 늙었구려."

"박사님이 나가신 뒤로 20년이란 세월이 지났으니까요."
미첼이 말했다.

"역시 박사님은 대단한 정신력의 소유자이십니다. 기억소거제를 넘어 저희를 기억해 주시다니요."

칼 융이 껄껄 웃다가 곧이어 그 웃음이 발작적인 기침으로 이어졌다.

"그간 무슨 일이 있었나? 그 미래의 일은 해석할 수 있었나?"

맥퀸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쉽게도 분석심리학부는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박사님이 나가고 제가 분석심리학부의 2대 부서장이 되어 어떻게든 팀을 이끌어 가려고 했지만, 3달이 채 안 되어 분석심리학부는 완전히 해체되었습니다."
미첼이 답했다.

"그래도 한가지, 그 붉은 태양십자 환영의 의미는 밝혀졌습니다. 그건 바로…"

"아니, 그건 아직 오지 않았어."
칼 융이 맥퀸의 말을 가로막았다.

"여전히. 여전히 그 꿈은 계속되고 있어. 아직, 아직 시간이 남아있어… 해석할 수 있어. 만일 그 자료가 남아있다면…"

칼 융이 무겁게 기침했다.

"내 자료는… 말소되었나..? 그 자료의 기한이 20년이라 했었지?"

"여전히 그 자료를 걱정하고 계시는군요."

"내 모든 것, 그리고 우리 모두의 미래를 거기에 두고 왔으니 말이야."

맥퀸은 몸을 숙여 그의 창백한 손을 붙잡았다.

"박사님의 자료들은 걱정하지 마십쇼. 한국지역사령부의 한 연구원이 당신의 자료를 열람했습니다."

칼 융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자가 박사님의 자료를 들고 한국으로 넘어가 새로운 분석심리학부를 창설할 겁니다."

칼 융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게… 그게 누구인가?"

맥퀸은 살며시 미소 지었다.

"곧 알게 되실 겁니다."

맥퀸이 미첼에게 눈짓했다. 미첼이 일어나 문밖으로 나가 밖에 서 있는 자에게 들어오라 손짓했다.
칼 융은 몸을 일으켜 세워 자신의 요람 안으로 들어오는 자를 기다렸다.

훤칠한 키와 짙은 눈썹을 가진 한국인이 여자아이 하나를 품에 안은 채로 레푸기움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칼 융의 머리맡에 와 천천히 앉았다.

"박사님의 소식을 듣고 왔습니다.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융 박사님. 저는 이██ 박사입니다."
그의 가슴팍에 안긴 어린아이는 곱슬거리는 자신의 머리칼을 매만지며 칼 융을 바라봤다.

"너도 인사해야지. 우리 분석심리학부의 아버지란다."

여자아이는 고사리 같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침대에 누운 칼 융을 약간은 두려운 눈초리로 쳐다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윤금선이에요."

"그래. 내 자료를 맡길만한 인재들이로군."

칼 융은 아이의 손을 힘겹게 손을 들어 매만졌다.

"부탁하네. 자네가 내 뜻을 대신 이루어 주게나…"
칼 융은 윤금선의 맑은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가 크게 기침을 했다.

"아버지!"

딸들이 그를 둘러쌌다.
그의 숨결이 점차 느려졌다.

윤금선은 무서웠는지 이██ 박사의 품을 꼭 안았다.


내 눈이 뒤집혔다.

호흡이 점차 느려졌고, 입에서 새어나오는 신음도 점차 옅어졌다.

"아버님! 아버님!"

나는 고개를 돌리곤 눈을 힘겹게 떴다.

맥퀸과 미첼 사이에 깡마른 독일인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의 뺨에는 점 세 개가 삼각형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베게너…"

그의 옆에는 이젤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는 주름진 민머리의 화가가 보였다. 그는 나를 보고 환하고 호탕하게 웃었다.

"로이…"

나는 어둠이 드리운 요람의 한쪽 구석에 서 있는 조그만 흑인 남자아이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오… 오마르…"

내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나는 남은 힘을 쥐어짜내 환하게 미소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오늘 밤에는 좋은 와인을 한잔하자꾸나."


하늘에서 푸른 빛이 쏟아졌다.

그의 몸은 점차 가벼워졌다. 그의 몸은 점차 떠오른다.

그레트, 헬레네, 프란츠, 마리안느, 아가테, 그리고 테런스, 마야, 에드, 로이, 오마르, 그리고 이██와 윤금선, 모두가 그를 올려다본다.

그는 레푸기움의 천장을 넘어 새겨진 별빛과 은하수의 바다로 향했다.

주님의 광채가 그를 휘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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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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