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시온: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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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것을 다 계산하고 계획한 것이로군. 안 그래?

애덤 브라이트, 이제 당신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난 잃을 게 없어.
내 프로젝트는 실패했고, 들통 났고, 빼앗겼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난 그만뒀거든.

전 당신에게서 뭘 더 뺏으러 온 게 아닙니다.

그럼 자리를 비켜주게.
난 너 같은 사람에게 은퇴 이후의 시간을 쏟고 싶지는 않아.

전 이미 당신의 많은 것을 빼앗았기 때문이죠.
그저, 당신에게 이를 알려주고자 했을 뿐입니다.
후임자로써 인사도 드릴 겸 하고요.

… 잠깐, 네가…?

인사드리겠습니다. 새로운 O5-12입니다.

잠깐, 이건… 말도 안돼. 내가 널 봤을 땐…

어린아이였죠. 하지만 이젠 아닙니다.
회계과에서, 행정관으로, 그리고 기지이사관까지 되며 많은 걸 알게 되었죠.
그만큼 전 더 많은 걸 계산하고 예측하게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 네가 프시케 프로젝트를 고발하였구나.

전 어린아이일 때부터 당신이 무엇을 꾸미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저 때를 기다렸을 뿐입니다.

… 그렇군. 이 또한…

지금껏 당신의 선택이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결국 모든 체계는 예측 가능하니까요.

우연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필연이었죠.



딸랑.

서울 영등포구의 한 음식점의 문이 열리며 종이 울렸다. 그 소리가 음식점에 웅크려 앉은 남자의 기억을 방해했다.
그는 슬쩍 고개를 들어 손님의 얼굴을 확인했다.

짧은 단발머리, 혹은 조금 긴 숏컷이라고 볼 수 있을만한 겨우 정돈된 머리를 한 여성이 휘파람을 불며 휑한 음식점을 바라보았다. 음식점에는 한구석에 앉아 묵묵히 순댓국을 음미하고 있는 흑인 남성만이 있었다.

"여기 순대국밥 하나요."

여자는 이렇게 말하고는 이미 남자가 앉아있는 테이블 맞은 편에 아무렇지도 않게 앉았다.

"다데기 넣어 먹으면 더 얼큰하고 맛있는데. 아무리 외국인이라지만 한국 왔으면 한국인 입맛에 맞게 얼큰하게도 먹어보셔야죠."

남자는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고 여자를 쳐다보았지만, 그녀의 가슴팍에 작게 달린 이름표를 보고는 황당함은 의문으로 바뀌었다.

"천세윤. 한국지역사령부 분석심리학부 부서장."

"반갑습니다. O5 나리."

O5-12는 티슈를 빼 들고는 입을 닦았다.

"나한테 볼일이 있나? 아니, 왜 나한테 볼일이 있는 건가?"

"볼일? 없는데요? 그냥 전 순대국밥 먹으러 왔습니다."

12는 콧방귀를 뀌었다.

"4등급 인원이 O5 평의원 밥 먹는데 앞자리 와서 한다는 게 겨우 순대국밥 먹기인가?"

"으흠, 17기지에서는 꽤 먼 거리고, 이렇게 높은 사람이 있기엔 보안도 허술한 곳인데도 오셨군요."

천세윤은 아랑곳하지 않고 기지개를 피며 말했다.

"… 도쿄의 기차표를 구하기 위해 잠시 동아시아 근방에 머무르고 있었을 뿐이네."

"암살의 위협이 있을지도 모르는데도요? 지금 당신께서 먹고 있는 다데기 없어서 밍밍한 그 순대국밥에 독이 들어 있을지도요?"

"그 정도야 충분히 예상 가능하지. 계획이란 본래 데이터에 기반하고, 데이터에 기반하는 순간, 필연을 따르게 되어 있으니까.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하지, 최근에는 혼돈의 반란의 한 요원이 날 암살하려 시도했더군. 주사위와 동전 던지기로 말이야. 좋은 시도였네만, 주요 계획에 확률을 사용하자는 '계획'또한 예측 가능했기에, 그는 주사위 한번 못 굴려보고 알파-1에게 사살당했지."

그때 보글거리며 끓는 순대국밥이 둘 사이를 가로지르며 천세윤의 앞으로 착륙했다. 모락모락 나는 김과 짭조름한 냄새가 둘 사이의 공기를 채웠다.
천세윤은 망설이지 않고 붉은 다데기를 크게 한 스푼 넣어 휘저었다. 흰 국물이 주황빛으로 천천히 물들었다.

"다 알고 온 것 아닌가?"

"뭐 말임까?"

"이곳에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

천세윤은 능청스레 웃음 지었다.

"물론이지요. 애초에 제가 먼저 이곳을 연구했는데요."

12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이곳에 감정의 우물이 있다는 것과…"

천세윤은 고개를 돌려 음식점 내부 냉동고에 살짝 열린 틈에서 새어나오는 희미한 푸른 인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당신이 다른 우물을 찾고 있다는 것도요."

천세윤은 12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12는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그 눈에서 마치 예언자와 과학자가 뒤엉킨듯한 기묘한 느낌을 오랜만에 느낄 수 있었다.

"이것 말고도 자네가 10년 전쯤 연구에 참여했던 그 고비사막의 우물이 있지."

"직관의 우물이었죠. 제 옛 친구…였던 윈디 싱클레어와 현재 여전히 같이 일하고 있는 조나단 할리만과 함께 연구했었죠. 아, 간바타르 차히아 박사님은 요새 뭐하신대요?"

"자살했어. 3년 전에."

"앗."

"17기지 분석심리학부는 신경도 안 쓰는군?"

"뭐, 사실은 저희 부서 일 신경 쓰는 것만으로도 바쁘지 말입니다. 여하튼…"

천세윤이 목을 가다듬었다.

"그래서, 감정과 직관의 우물을 찾으셨으니, 이제 사고와 감각의 우물을 찾으실 건가요?"

"그렇지."

"그럼…"

천세윤이 손을 비볐다.

"저희 분석심리학부가 제격이겠군요. 17기지의 뭐, 정신권연구부? 사이오닉학부? 무슨… 본질물리학부? 그런 거 다 짭입니다. 진짜 근본 중의 근본. 저희 분석심리학부가 그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다면…"

"첫 번째."

12가 그녀의 말을 가로채었다.

"이게 네 의중이었군. 일개 부서장이 6등급짜리 평의원 밥 먹는데 와서 한다는 게 바로 지금 준비 중인 중요 프로젝트에 자기도 껴 달라 하는 것 말이야. 참 대담해. 19기지 이사관도 나를 쩔쩔매는 데."

"히히, 이건 예측 못 하셨나요?"

"그래. 참 신기하게도 말이야. 꽤나 옛… 스승을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어. 다른 모든 것은 예측해도 너만큼은 예측하지 못하겠단 말이야."

"좀 말괄량이긴 하죠 제가."

"그리고 두 번째. 아까도 이야기했지. 17기지에도 분석심리학부는 있어."

"그으렇죠? 윈디 싱클레어가 거기 부서장이잖아요? 걔가 그쪽에다 분심부 따로 세운 걸로 알고 있는데."

"이 말인 즉…"

"… 예? 아니 뭐? 윈디 싱클레어 그놈이 프로젝트 참여한다고요?"

12는 한숨을 쉬고는 이미 식어버린 자신의 남은 국물을 들이켰다.

"그래서 그 프로젝트가 뭔가요?"

너무나 순수하고 당연한 물음에 12는 사레에 들려 기침했다.

"이게 무슨 프로젝트인지도 모르고 나한테 끼워달라 한 건가?"

"에… 그냥 하면 뭐 이득이겠다, 재미있겠다 싶었죠."

"됐다 됐어. 5등급 기밀사항이니 자네 알아서 잘 찾아보게."

"전 4등급인데요? 윈디 걔한테도 알려주신 거 아니에요?"

"윈디는 5등급이네."

"뭐라고요?"

그는 못 들어주겠다는 듯 짜증스레 티슈를 뽑아 입을 닦았다.

"하아, 됐네. 자네는 아웃이야."

그리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재킷을 걸쳤다.

"잠깐만요, 이것만 먹고요."

"자네는 그거 계속 먹고 있게."

천세윤은 아직 김이 모락모락 나는 피순대 하나를 입에 넣고는 재빠르게 일어났다.

"가기 전에 그 우물은 보셔야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아직은 저희 관할인데."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네."

그는 단정히 단추를 잠그고는 음식점 내부로 향했다.

"언제나 고생이 많어. 최아현 요원."

천세윤이 순댓국을 끓이고 있는 이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인사를 받고는 설렁설렁 고개를 끄덕였다.

천세윤이 냉동고 문을 열자 그 한기와 푸르른 희미한 불빛이 밖으로 새어나왔다.
그것은 외롭고 쓸쓸하게 맥동했으며, 보는 이로 하여금 빨려 들어가는 듯한 묘한 느낌을 주었다. 이것을 보고 있노라면 차갑고 날카로운 아픔이 내면 깊은 곳에서 솟아올랐으며, 그와 동시에 역설적으로 포근하고 편안한 양가감정이 솟아올랐다.

"프로이트가 이것을 봤었어야 해. 1차대전 이후의 프로이트가 말이야."
천세윤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것이 그것이군. 감정의 통로."

"어… 왜인진 모르지만, 심령 뭐시기 활동의 일환으로 절망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

12는 그 푸른 구멍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넘실거리는 푸른 빛의 춤사위를 바라보고 있자니, 그것 또한 나를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그것은 12의 무의식 깊은 곳의 아직 아물지 않은, 어쩌면 영원히 아물지 않을 그곳을 살며시 찔러보았고, 12 또한 그것의 가장 깊은 곳에 있을 핵(核)을 슬며시 바라볼 수 있었다. 짧은 시간 동안 이루어진 탐색 끝에, 그는 그 구멍에서 자신의 형상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는 희미하게 미소 짓고는 몸을 돌렸다.

"… 전임자의 유산을 찾았어."

그가 냉동고의 출구로 향하며 말했다.

"이 프로젝트는 그의 유산으로 이루어진 것이지."

"레드북."

천세윤의 이 말에 12는 냉동고의 문 앞에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분석심리학부 부서장이면 이 정도도 잘 알지요. 칼 융 박사님이 썼지만 전 O5-12가 가져가, 현재는 당신이 숨기고 있는 그 책 말입니다."

"그래. 그 책. 보면 볼수록 놀랍더군."

12는 얼굴 하나 안 바뀐 채로 말했다.

이내 12는 몸을 돌려 냉동고에서 나왔다.
그는 최아현 요원에게 국밥값을 지불하고는 슈트케이스를 들고 문밖으로 나섰다.

천세윤은 여전히 냉동고에 있는 채 그에게 큰 소리로 물었다.

"그 프로젝트. 이름이 뭔가요?"

12가 혼잣말하듯 말했다. 그녀가 듣지 못하길 바라듯 말이다.










"프네우마. 프네우마 프로젝트. 그리스어로 영혼과 숨결을 뜻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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