危世之說 勇力篇 第一章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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危世之說

勇力篇

상편에서 이어집니다.


"나리, 나리이──!"

"으헙…?!"

"괜찮으십니까요?"

벽에 걸린 두루마기가 춤을 추다 이윽고 늘어진다. 부스스 몸을 일으키던 나전칠(螺鈿漆) 목함(木函) 궤짝이 다시 주저앉는다. 그리고 눈 앞에 나타난 것은 월의 커다랗고 시커먼 들창코다.

"……어딜 갔다 이제 오느냐."

"무슨 말씀이십니까요? 나리 잠드신 후부터 여기 계속 있었습니다요. 무슨 안 좋은 꿈이라도 꾸셨습니까요?"

"……"

머리가 지끈거린다. 바깥으로는 이미 동이 텄고, 놀란 마음에 배를 쓰다듬으니 그저 보송보송할 따름이다. 비광은 그저 차라리 다행이다 싶다. 그 요망(妖妄)한 것에게 속절없이 잡혀 당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어서 수정 선생께 돌아가자. 우리가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전부 알아냈느니. 원한(怨恨) 맺힌 자의 밀살(密殺)이 아님을 작일(昨日) 저녁에 확증(確證)한 이상, 더는 지체(遲滯)할 여유가 없느니라."

"허면, 지금 바로 서두르셔야 할 겁니다요. 나리께옵서도 기억하시겠지만, 이금위(異禁衛)에서 당초 정하기를 일차(一次) 금일(今日) 저녁까지 기다리겠다 하였으니, 이 이상 시간을 끌면 안 될 겁니다요."

"그래, 지금 수정 선생이 우리를 기다리느라 목이 아마 한 자는 늘어났을 것이니라."

아직 동편 산등성이 위로 해가 뜨지는 않았으나, 여전히 박명(薄明)이 있어 그 험한 산세(山勢)를 헤쳐 가며 돌아가기에는 나쁘지 않다. 깊은 밤에야 발을 헛디디기도 쉽고 범도 볼 수 있을 터이나, 이 정도라면 풀뿌리를 부여잡고 나무등걸에 매달리고, 이끼 낀 바위를 밟아 올라가며 이금위 산채(山寨)로 가는 것쯤이야 어려운 일은 아닐 터다.

묏자락 사이사이에 피어오르던 는개가 흩어지기 시작할 즈음, 비광 일행은 수정 선생과 만날 수 있었다.


"그래, 척후(斥候)의 결과는 어떠하던가?"

무영(無影) 선생과는 다르게, 수정 선생은 상당히 반가운 기색으로 비광 일행을 맞아들였다. 비광은 하룻밤을 늦은 것에 대해 변(辨)하려 하였으나, 애초에 수정 선생은 그 문제에 그렇게까지 신경쓰지 않는 듯하였다.

수정 선생이 날카롭지만 호기심 어린 눈으로 비광을 바라보자, 비광은 대답 대신 서찰(書札)을 내민다. 작일 밤에 그가 정식(正式)으로 작성한 것이다. 수정 선생은 곧 그것을 빠르게 훑어보나, 장문(長文) 읽기가 힘든 눈치인지, 다 읽지도 않고 덮어둔 채 다시 입을 연다.

"내 궁금한 것이 있네. 혹여 사람 사이에 흔히 있을 법한 원한 관계의 문제는 아니던가?"

그 순간 비광은 과연 월이다, 하며 경탄(驚歎)한다. 오랫동안 수정 선생과 함께 해왔기 때문인가. 월이 염려했던 그대로다. 과연 수정 선생은 이 사건이 행여나 범인(凡人)의 소행(所行)이 아닐까 짐작하고 있는 것이다.

"예, 소생도 그 점을 염려하였으나, 천행(千幸) 만행(萬幸)하게도 작일 저녁에 이 문제에 대해 확증(確證)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관악(冠岳) 묏자락 어느 집에서 탐문(探問)하여 보건대, 바로 방금(方今) 전에 일가족이 참변(慘變)을 당하였으되, 사립문 앞에는 두 시진(時辰) 동안 족적(足跡)이 없었습니다."

수정 선생은 다소 피곤해 보이는 눈치다.

"거 참 말이 길구나. 아니라는 말이군."

"……예,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수정 선생이 비광을 바라본다.

"……선생께서 붙여 주신 조수(助手) 월이 그곳에서 실제로 그 불상(佛像)과 마주쳤습니다."

그 말에 수정 선생은 확실히 조금 놀란 눈치다.

"그러한가? 여봐라, 어서 월이를 들여라!"

"그리고…… 소생 짐작할 수는 없사오나, 그는 수태(受胎)치도 아니하였으며,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아니하였습니다. 다만 목숨이 경각(頃刻)에 달린 상황인지라, 소생과 함께 달음질하여 그 자리를 피하였습니다."

"내가 궁금한 것이 바로 그것일세. 그 상황에서 멀쩡히 돌아왔다니, 어째서일까? 월이 놈의 말을 들어봐야 하겠지만, 이금위가 그 놈을 사로잡고자 할 때에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야."

그 자리에 월이 들어오자, 수정 선생이 다짜고짜 묻는다.

"명명백백(明明白白)히 답하거라. 그 불상과 지근거리(至近距離)에서 마주쳤으나 해를 입지 않았다고 들었다. 정녕 그러했느냐?"

"예이, 불상과 눈이 마주쳤지만, 무슨 해코지를 당하지는 않았습니다요."

"그것이 어떻게 반응(反應)하였는지 소상(昭詳)히 고(告)하거라."

"눈을 마주치기는 했사온데, 그냥 덤덤하게 바라보더니…… 아니, 어찌 보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요. 그것이 주저하고 있길래, 비광 나리가 도망(逃亡)하자 하여 같이 도망하였으니, 그것이 전부입니다요."

"흠…… 그곳에서 다른 본 것은 없는가?"

"자욱한 피 냄새가 났고, 행랑의 문이 열려 있었습니다요. 하오나, 시체(屍體)는 그 쪽에서는 하나도 보지 못했습니다요."

"그러하단 말이지. 알겠다. 이만 물러가거라."

"예이."

수정 선생은 이후 비광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말한다.

"조반(早飯) 후에 바로 채비를 갖추어 진공(進攻)해 들어갈 것이니 그리 알게. 자네도 수고 많았네. 자네의 서찰은 다시 보전원(保傳院)으로 올라가게 될 걸세. 자네로서는 딱히 준비할 것은 없고, 밥이나 든든히 먹어 두게."


오늘도 마군(魔軍)을 소멸(消滅)코저 애쓰시는 이금위 수정 처사(處士)께, 마이산(馬耳山) 늙은 중이 삼가 졸필(拙筆)로서 고하나이다.

말씀하신 바 여래입상(如來立像)에 대해서는 소승(小僧) 역시 초문(初聞)이오나, 삿된 음욕(淫慾)에 이끌려 계(戒)를 저버리고 살생(殺生)까지 하였으니 이미 그 죄(罪)가 하늘을 덮었는지라, 그를 다스리고저 하신다면 마땅히 금강저(金剛杵)로써 다스려야 할 만큼 중죄일 것이옵니다. 허나 이금위에서 단지 복마(伏魔)만을 원(願)하시거든, 죽장(竹杖)과 삼고령(三股鈴)만 지니신다 하더라도 쉽게 범접(犯接)치 못할 것이옵니다. 소승에게 부디 기쁜 소식이 들려오기를 삼가 발원(發願)하나이다.

나무불(南無佛) 나무법(南無法) 나무승(南無僧)

"작일의 그 관악 묏자락의 집은 이미 수습(收拾)이 되었을 것이나, 그래도 한번 더 가 보기로 함이 어떻겠습니까?"

"그래야겠지. 적어도 그 곳은 가장 근래(近來)에 참극이 벌어진 장소이니 말일세."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무엇이 말인가?"

"그 여래입상이…… 어째서 파계(破戒)를 하고 이런 해괴(駭怪)한 음행(淫行)을 벌인다고 보십니까?"

수정 선생은 잠시간 미간(眉間)을 찌푸린다.

"나는 그런 건 잘 모르겠네. 그저 직접 송장을 봐야 감을 잡는 성미이니."

"물론 실지(實地)에서 직접 견문(見聞)함의 중(重)함이야 소생도 의심치 않사옵니다마는…… 이렇게 직접 짚어보는 것도 하나의 긴요(緊要)한 방책(方策)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생각이 나쁘다는 것은 아닐세. 그러나 내가 직접 할 만한 건 아니라고 사료(思料)되네만."

"……"

그러던 차에 어느덧 문제의 사립문 앞에 이른다. 어렴풋이 느껴지는 비릿한 냄새가 막 비광의 코에 이르던 차에, 수정 선생이 먼저 말에서 뛰어내린다.

"이런, 늦었어! 이미 송장을 치웠네! 하지만 혈흔(血痕)을 보면 감을 잡을 수 있을 게야. 같이 들어가지 않겠나?"

"소생도 따르겠습니다!"

비광이 부랴부랴 말에서 내려 사립문 안으로 들어가니,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족적들이 비광을 반긴다. 한 차례 난리가 난 게 분명하다. 포졸(捕卒)들이 들이닥쳐 시신(屍身)들을 내어 가고, 심지어 대청(大廳) 앞 양지바른 뜰은 세심(細心)히 비질까지 했는지 말끔하다. 이래서야 그 불상이 어떻게 일가족들을 습격(襲擊)하였는지 알아낼 도리가 없다.

비광이 그것들을 둘러보며 안으로 들어가니, 벌써 수정 선생이 사랑방에 쭈그리고 앉아서, 방구들까지 꿰뚫어 볼 법한 눈빛을 하고는 바닥을 손가락으로 쓸어보고 있다.

"너무 늦은 것 같습니다. 혹시 뭔가 짐작이 되는 것이라도 있으신지요?"

"……자네는 무엇을 알 수 있겠나?"

비광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방을 한 바퀴 둘러보고는 나직하게 아뢴다.

"……소생은 이런 경험이 없는지라 함부로 추론(推論)하기 어렵습니다."

"벽(壁)에 혈흔이 없으니 첨예(尖銳)한 날붙이가 아님이고, 바닥의 혈흔을 보아하니 놈에게 당한 후 무엇을 어찌할 새도 없이 즉사(卽死)한 것 같아 보이진 않네. 그 방법이 무엇이든 치명적(致命的)인 상처(傷處)를 입히진 못했다는 걸세. 나졸(邏卒)들이 함부로 송장을 내가느라 많이 더럽혀지긴 했으나, 흔적을 보아하니 아마도 놈에게 당한 후 사랑채 밖으로 나가려고 했던 것 같군. 그 외에 혈흔이 퍼져 있는 걸 보면 출혈(出血)이 정말 심각했던 것 같은데, 방이 남(南)으로 기울어 있어 그쪽으로 피가 흘러내려간 모습이네. 따라서 남쪽 벽에 고인 피의 흔적을 보면 상처의 위중(危重)함도 짐작할 수 있을 게야. 이런이런…… 혈흔이 혼탁(混濁)한 빛이 아닌 걸로 보아 상당한 양의 소피(混濁)가 섞인 모양이군. 까닭은 역시 사내이기 때문인가? 아, 약간의 담즙(膽汁)도 섞인 걸 보니 내상(內傷)이 어지간히 심했던 것 같네."

"……"

"종합하면, 이 놈은 날카로운 뭔가가 아닌 방식으로 방광(膀胱)을 포함한 국부(局部)에 피해를 입혔고, 치명적이진 않지만 많은 출혈을 일으키는 내상을 초래(招來)했네. 당한 자(者)는 얼마간 생존(生存)해 있었으나, 환부(患部)가 심대(深大)한 탓에 결국 목숨이 끊어진 것이네. 그렇다면 이 놈은 아주 살인(殺人)을 목적(目的)으로 한 것은 아니고, 그저 위해만을 가하고자 했던 것이로군. 이제는 행랑으로 가세. 거기서는 이 놈이 얼마나 멀리서 사람을 죽일 수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게야."

"……알겠습니다."

가히 청산유수(靑山流水)로다. 비광은 수정 선생의 식견(識見)에 감탄한다. 그러고 보니 담즙이 어쩌고 한 것을 제외한다면 대부분 비광도 눈치챌 수 있어 보이는 것들이다.

"그런데 수정 선생, 그러고 보니 저도 조금만 주의(注意)를 기울였더라면 충분히 깨달아 알 법도 한 것들인 듯합니다."

그 말에 수정 선생은 의외로 쉽사리 고개를 끄덕인다.

"맞네. 대부분의 사람들은 증참(證參)이 될 만한 단서(端緖)들이 가득한 곳에 서 있어도 도무지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거나, 주의를 기울인다 하더라도 자신이 어디를 어떻게 보아야 할지를 모르지. 그런 훈련이 된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있다면 좋은 일이련만, 어디 그런 사람이 이런 초야(草野)에 묻혀 지내겠는가? 오히려 크게는 등용문(登龍門)하여 입상(入相)한 후 천하(天下)의 태평(太平)을 논(論)하고 있지 않겠는가? 아니라면, 작게는 적어도 이렇게 남모를 곳에서 송장이나 뒤지며 뭇 우둔(愚鈍)한 백성들이 안심(安心)하여 지낼 수 있도록 애쓰고 있기는 하겠지."

어느덧 행랑이다. 물론 행랑이라 해 봐야 그저 다 쓰러져 가는 한 간짜리일 따름이다. 수정 선생은 행랑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행랑 앞에서 유심히 행랑 쪽을 넓게 바라본 후, 갑자기 행랑 뒤편의 좁디좁은 구석으로 향한다.

"어디로 가십니까?"

"우리가 봐야 할 곳은 바로 여길세. 보통 이런 곳에 단서가 있게 마련이지. 나졸들이 칠칠치 못하거든 이 뒤쪽까지 수습하진 못하였겠지만…… 이런, 이 고을의 나졸들은 정말 칭찬해 줘야겠군 그려."

비광이 뒤쫓아가 보니 그 좁은 곳에 몇몇 농기구들이 있는데, 그것들이 온통 피에 젖어 있고 그 너머로는 아예 피범벅이 되어 있다.

"분명해. 여기서 노비(奴婢) 하나가 죽은 걸세. 그러나 나졸들이 송장을 끄집어내고 농기구들도 정리한 게야."

"원통(冤痛)하군요. 그렇다면 그 불상이 얼마나 멀리서 살상(殺傷)할 수 있는지 모르는 것이 아닙니까."

"……꼭 그렇진 않네. 뒤를 돌아보게. 사립문이 아주 잘 보이지 않나?"

비광은 다시 얼떨떨한 기분으로 뒤를 돌아본다. 사립문이 바로 보이는데, 거리는 대략 십구 척(尺)에 달해 보인다.

"……예, 그렇기는 합니다만."

"사립문에서 사랑까지는 꽤 먼 편이네. 사립문 열리는 소리가 났을 것을 고려하면, 불상이 움직이는 동안 노비들은 불상을 보지 못했던 것 같고. 그렇다면 이 놈은 의외로 움직임이 민첩(敏捷)한 것일 수 있네. 사랑채 뒤에는 안채로 향했네. 아녀자들의 송장이 안채 문지방 바로 너머에서 발견된 것은 그와 같은 시차(時差) 때문이고. 그렇다면, 그 불상이 먼저 사랑채를, 그 다음으로 안채를 습격하고, 그 다음에 행랑으로 향했다는 것이 되네."

"……그렇겠군요."

"자, 그 놈이 사랑채와 안채를 덮치는 동안, 행랑의 노비는, 뭐 대단치도 않은 집이고 행랑도 작으니 아마도 한 명인 것 같지만, 어쨌건 단말마(斷末摩)의 비명(悲鳴)에 놀라 뛰쳐나왔네. 그렇다면 아마 사랑채 정도까지는 들어갔을 터이고, 안에서 불상과 마주쳤겠지. 자신을 방호(防護)할 수단이 없었던 노비는, 어쩔 수 없이 도망해야 했고, 농기구 중 하나를 무구(武具)로 삼기 위해 이 좁은 곳으로 들어간 것 같네."

이쯤 들으니 당시의 상황이 눈에 그려진다. 송연(悚然)한 비명을 지르며 죽어 가는 사람들, 그리고 놀라 달려온 노비. 그러나 황망(慌忙)히 도망한 후 농기구를 가지러 왔다가 결국 죽게 되는 노비……

"이제 생각해 보게. 그 놈은 의외로 재빠르지만, 그리 멀리서는 위해(危害)를 가할 수 없음이 분명하네. 거의 스무 척에 달하는 거리를 쫓겨 감에도, 그 노비는 도중에 죽지 않고, 이 구석에 들어온 후에야 죽게 되었네. 그 불상이 멀리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이 노비는 아마도 마당 한가운데에서 죽었을 것 같군."

그 순간, 이금위군 하나가 와서 아뢴다.

"보좌관(補佐官)님, 후미(後尾)에서 전갈(傳喝)이옵니다. 지금 저자가 요란하고 인파(人波)가 시끄럽게 소동(騷動)하고 있다고 하옵니다. 이물(異物)이 다시 난동(亂動)하고 있는 것 같사옵니다!"

그 보고(報告)가 끝나기가 무섭게 수정 선생이 몸을 날리듯 달음질한다.

"이보게, 뭘 하고 있나? 시간이 없네! 한시바삐 희생자들을 살펴야 하네!"


"아이구, 어이구, 저게 무언 일이람……?"

"어허, 쯧쯧쯧. 어디 무서워서 살겠나……"

"에헤이, 갑시다, 가. 그저 조심해야지 뭐 어쩌겠어."

어디서 벌어진 일인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숱한 인파가 한꺼번에 몰리며, 뜻밖의 구경을 하려는 봇짐꾼과 주막(酒幕) 노파(老婆), 와중에 기함(氣陷)을 하고 넘어가는 아낙네, 그리고……

"떽! 이런 망나니 같은 아새끼들, 저리 가지 못할까!"

……세상 모르는 어린것들까지 모여들어 야단(惹端)이다. 그 여래입상이 만든 "야단" 치고는 참으로 법석거리는 야단이다.

누군가의 노호(怒號)가 있자 어린것들이 우 흩어져 가고, 거진 예닐곱 척 정도의 거리를 둔 채 사람들이 주춤거리고 서 있다. 비광은 앞서가는 수정 선생을 따라, 떨리는 마음으로 그 인파를 헤집고 들어간다. 드디어 사람들 사이로 참혹한 현장(現場)이 모습을 드러낸다.

"아아……!"

전부 여인(女人)이다. 막 초조(初潮)를 시작했을 법한 어린것부터 펀펀한 아낙까지 다양하고, 머릿수가 도합(都合) 넷이 된다. 비광이 이것을 확인한 후 무엇을 보아야 할까 가늠하고 있던 차에, 수정 선생은 이미 시신 중 하나의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다. 문득 주위가 소란해져 비광이 다시 주변을 둘러보니, 검은 복식(服飾)의 이금위군이 소리도 없이 따라와서는, 어느 새인가 육정육갑(六丁六甲)의 깃발을 들고 죽장을 딱딱 두드리며 군중(群衆)을 흩어내고 있다.

"물러서시오── 물러서시오── 아─알야── 카──알라난다── 명왕(明王)께서 우리를 보내셨소이다──"

비광이 듣기에 그것은 가래 끓는 음침한 목소리인지라 쿡 웃음이 나왔으나, 의외로 효험이 있는 모양이다. 비광이 비록 역(譯)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나, 이금위군은 어째 중간중간 범어(梵語)를 섞고 있는 듯하다. 그런 식으로라야 의미가 통(通)함도 없을 터이나, 멋모르는 민초(民草)들에게야 그만큼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또 있으랴.

어떤 무지한 아낙은 한 술 더 떠서 아예 육자명왕진언(六字明王眞言)으로 화답(和答)까지 한다.

"어이구, 예에, 예에, 옹── 마니── 판메── 훙──……"

소저(小姐)들이 물러가고 노옹(老翁)들이 길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부복(俯伏)하는 중에, 비광은 얼떨떨한 심정으로 수정 선생에게로 다가간다. 수정 선생이 눈길을 돌리지 않고 속삭인다.

"이금위에서 소규모(小規模)의 백성들을 흩기 위해 별도로 두고 있는 의장대(儀仗隊)일세. 얼굴에 희게 분칠(粉漆)을 하고 검은 옷을 입은 뒤, 저렇게 범어를 한두 구절 외고 있노라면 겁먹지 않는 이가 없네."

"어쩌면…… 뭇 백성들 사이에 떠도는 민담(民譚)들이 이금위 때문인지도 모르겠군요."

씁쓸하게 말하는 비광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정 선생은 이를 질끈 악물고 손가락을 딱딱 부딪치고 있다.

"……상황이 안 좋게 돌아가고 있네. 희생자가 좁혀졌어. 이 대낮에 설마하니 아녀자 넷만 걸어다니고 있었을 리 없고…… 무슨 말인지 알겠나?"

비광도 뭔가 와닿는 것이 있어 퍼뜩 답(答)한다.

"그 불상이…… 사람을 가려 죽이기 시작했군요."

"그렇지. 다시 말하면 그 불상이 원하는 바를 성취(成就)하기 위해서는 수태할 수 있는 계집이 있어야 한다는 걸세. 그리고 이 송장들의 환부를 고려하면…… 그리고 이걸 보게. 응당(應當) 결론(結論)이 나오지 않겠는가?"

수정 선생이 웬 핏덩이 하나를 가리킨다. 비광은 저도 모르게 놀라 입을 틀어막는다.

"우웁……! 이거 설마……!"

"나도 이런 것은 평생(平生) 처음 보네. 그러나 어디로 보나 이것은 잉태(孕胎)되다 만 태아(胎兒)일세. 사람인지 괴물인지 귀신(鬼神)인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죽은 것 같군."

그러면서 수정 선생이 손끝으로 그것을 툭툭 건드려 본다. 비광은 그것이 어째 갑자기 확 몸을 일으켜 달려들지나 않을까 노심초사(勞心焦思), 수정 선생을 뜯어말리려 한다.

"서… 선생, 이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자꾸 건드리시면……"

"괜찮네. 혈색(血色)이 이미 푸르죽죽하게 바랬고 사지(四肢)가 딱딱하게 굳어 오그라들었으니, 가히 죽은 자의 그것이라. 그렇다고 숨이 드나들고 있지도 않으니, 혼백(魂魄)이 어찌 붙어 있다 할 수 있겠는가."

수정 선생은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상황이 좋지 않네. 지금껏 이런 적은 없었던 것으로 보아, 이제 그 불상이 드디어 태아를 수태케 하는 이치(理致)를 터득(攄得)한 것 같네. 그리고 아마도 다음 소동이 벌어지게 된다면, 그 때에는…… 실제로 살아 숨쉬는 아기를 볼 수도 있는 것일 터이고."

"……!"

수정 선생이 낯빛이 딱딱하게 굳어 있다.

"막아야 하네. 그 아기가 과연 어떠한 행태(行態)를 보일지 우리로서는 예상할 수조차 없네. 나무를 깎아 만든 여래의 피와 인간의 피가 섞인 아기라. 그것이 무엇이든 결코 좋은 징조(徵兆)가 아닐세."

수정 선생은 한 마디 한 마디 힘주어 말한 후, 이윽고 말 위에 뛰어오른다.

"어서 가세! 이제 우리가 할 일은 그 불상을 추적해서 붙잡는 것이네. 더 이상의 희생자가 나와서는 안 돼!"


주민(住民)들의 제보(提報)에 힘입어, 비광 일행은 불상의 뒤를 쫓을 수 있었다.

"바로 저쪽이라 했네! 다행히도 저 방향은 막다른 길이라 하였으니, 우리가 제대로 몰아가고 있는 것 같군."

그러면서 수정 선생이 손짓하자, 뒤에서 말을 타고 따르던 이금위군 하나가 단궁(檀弓) 하나를 꺼낸다. 그가 미리 준비하고 있던 화살을 시위에 걸치는데, 괴이(怪異)하게도 살은 보이지 않고 촉에는 시퍼런 도깨비불이 이글거리고 있다. 그가 하늘을 향해 그 도깨비불 화살을 날려보내자, 수정 선생이 비광에게 손짓한다.

"이제 저 동리(洞里)는 완전히 포위(包圍)되었네. 이제 자네도 이걸 챙기게. 감로수(甘露水)일세. 몇 방울만으로도 제어(制御)에 부족함이 없는 강력(强力)한 물건이지만, 위험하다 싶으면 냅다 뿌려도 되네."

"알겠습니다."

"자, 내 병장기(兵仗器)를 가져오라! 전군(全軍) 전투(戰鬪) 대형(隊形)!"

맨 앞줄에는 특별히 조련(調鍊)된 듯한 투견(鬪犬)들이 컹컹 짖으며 늘어서고, 그 뒤로는 죽장과 여러 기이(奇異)한 물건들을 지닌 이금위군이 뒤따른다. 본디 아무 기척도 없이 바람처럼 움직이는 이금위군이건만, 이번만큼은 다들 하나씩 방울을 차고 있는지 짤랑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비광으로서는 사뭇 가슴이 떨려 오며, 경외감(敬畏感)마저 느껴지는 것이다.

수정 선생은 눈을 들어 저 멀리를 바라보면서 나직하게 말한다.

"내가 본디 이런 체질도 아니고, 그저 송장이나 뒤지는 보좌관일 뿐이지만, 때로는 직접 이런 싸움도 하곤 하는 법이라. 우왕좌왕(右往左往)하지 않을 자신 정도는 있으니, 기왕이면 내 곁에 머무르고 멀리 가지 말게나."

"예, 각별히 조심하겠습니다. 선생께서도 조심하십시오."

그 순간, 저 멀리서 한 줄기 웬 비명이 아득하게 들려온다.

"꺄아아아───아!!"

"들었나? 대략 마흔 장(丈) 밖에서 난 소리일세. 굉장히 젊은 계집의 것이고, 고통(苦痛)이라기보다는 공포(恐怖)인 것 같네! 아마도 그 불상이 좋아할 만하니───"

수정 선생의 말을 비광이 받는다.

"───저기 여인이 달음질해 오는 걸 보면 불상을 만날 수 있겠습니다!"

너무 힘을 주어 내달린 탓인가, 그 여인이 결국 얼마 오지 못하고 풀썩 쓰러진다. 그리고 그 뒤로 자그마한 목상(木像) 하나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걸 보자 수정 선생의 말이 급해진다.

"빨리, 빨리! 저 계집까지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네!"

수정 선생은 이금위군을 뒤에 두고 말을 채찍질해 혼자 앞서 달려나간다. 그의 오른손에는 감로수가 담긴 호리병이 들려 있다. 비광도 뒤늦게 그 뒤를 따랐으나, 오호통재(嗚呼痛哉)라, 수정 선생보다 불상이 더 가까이 다가와 있다. 거리를 어찌할 수는 없는 것이로다.

푸아아악─────

쩌저적─────

"아아아악……!!"

핏방울이 푸른 하늘 아래 선연(鮮然)하게 피어오른다.

비광은 자신도 모르게 으헙, 하고 숨이 탁 막힌다.

젊은 여인네의 쓰러진 몸이 일순(一瞬) 피보라와 함께 풀썩 튀어오르더니 그대로 인형(人形)처럼 널브러진다.

그리고 그 밑에서 기어나오는 그것……


정신을 차려 보니 손에 들린 감로수 병이 가볍다. 비광의 앞에서는 자그마한 아기 크기의 무언가가 시커멓게 불탄 듯한 모습으로 연기를 피워내고 있다. 그리고 이런 것이 얼마 더 있는지, 대여섯 마리의 투견들이 그것들 둘이 쓰러져 있는 곳에 달려들어 물어뜯고 있다.

으르르르─── 크르르르릉─────

모골(毛骨)이 섬뜩할 만한 소리다. 투견들이 물어뜯고 있는 그것은, 인골(人骨)이 부서지는 우드득, 와드득 하는 소리가 아니다. 차라리 무엇이라고 하여야 할까? 오래 된 나무등걸이 부러지는 우지끈, 와지끈 하는 소리라고 해야 할까?

그리고 그 아수라도(阿修羅道)의 한복판에서, 수정 선생이 두 마리 투견의 호위(護衛)를 받으며 버티고 서서 불상과 대치(對峙)하고 있다. 이미 한 차례 공격을 받았는지, 그 불상은 머리 부분에서 연기를 피워내고 있는데, 투견들의 기세(氣勢)에 적잖이 밀리는지 조금은 움츠리고 있는 것이다.

수정 선생이 한 차례 고함(高喊)지른다.

"란(蘭)!"

"여기 있사옵니다!"

이금위군 하나가 돌돌 말려 있는 족자(簇子)를 수정 선생에게 던져 준다. 수정 선생이 그걸 받아 펼치니, 유려(流麗)한 필치(筆致)의 먹으로 멋스럽게 그려 놓은 난초(蘭草)가 그려져 있다.

수정 선생이 그것을 그대로 불상 쪽으로 던지니, 펼쳐져 날아가던 그 족자는 일순 허공(虛空)에서 푸른 불꽃을 일으키며 발화(發火)하다가, 번쩍이는 푸른 기운이 되어 불상을 향해 날아가 엉겨붙어 드리운다.

마치 벽력(霹靂)이라도 치는 듯 콰르릉 하는 낮은 천둥이 울고, 불상은 바깥에서부터 녹아내리기 시작하면서 단 한 치도 움직이지 못한다. 뒤에서 이금위군 하나가 외쳐 묻는다.

"매(梅)나 죽(竹)이 필요하지 않겠사옵니까?"

"물론 쓸 수도 있겠으나 너무 희소(稀少)하기에 쓰지 않을 뿐이니라. 위력(威力)은 약하다 하더라도 란이 충분히 많이 있으니 그것으로 족(足)하지 않겠는가. 장전(裝塡)한 봉시(蓬矢)를 거두고, 대신 다시 신호를 보내어 억제(抑制)가 성공하였음을 알리거라."

"알겠사옵니다!"


이금위군 영채(營寨).

"그 용력(勇力)을 거의 잃기는 하였으나, 아직까지 여전히 그 혼백이 떠나지 않은지라, 주위에 뭇 계집만 가까이 하면 애써 움직이려 하니, 일단은 포박(捕縛)하여 투견 철망(鐵網) 중(中)에 두었네. 이 불상은 이제 이금위 본영(本營)으로 압송(押送)하여 그 처우(處遇)가 결정되게 할 걸세."

비광과 수정 선생은 함께 군막(軍幕) 밖으로 지나가는 수레를 바라본다. 투견 한 마리와 함께 거의 녹아 오체(五體)가 들러붙어 버린 불상이 포박당한 채 들어 있다.

"저 불상은…… 이제 어떻게 되리라 보십니까? 아예 없이 하게 되겠습니까, 아니면……"

"아마도 그렇겠지. 본영에서도 저 불상을 좋게 보지는 않을 걸세. 도무지 이로운 구석이라곤 없어 보이니 말이야. 아 참, 그리고……"

그러면서 수정 선생이 엷은 미소를 띤다.

"……자네도 정말 고생이 많았네. 자네의 도움 덕분에 일이 한결 수월했어."

"별 말씀이십니다. 소생에게도 정말 소중하고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으음……"

단 이틀간의 일인데도 거의 한 달포 정도는 고생했던 것 같다. 기억이 문득 그 마지막 희생자에 이르자, 비광은 끄응 하고 나직하게 신음(呻吟)한다.

"……하지만 그 마지막 아녀자의 일은, 솔직히 회고(回顧)하고픈 마음은 없습니다. 아직도 비릿한 냄새가 코끝에 맴도는 듯하고, 아직도 눈 앞에 핏줄기가……"

"무슨 말인지 알고 있네. 앞으로 자네도 그런 경험을 많이 하게 될 걸세. 그러나 곧 깨닫게 되겠지…… 이들의 죽음은 결국, 보다 기민(機敏)하고 영특(英特)치 못한 나 자신의 불찰(不察)이라고 말이야. 그러한즉, 그들의 원통한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더욱 쇄신(碎身)하여 일함이 마땅할 걸세."

"명심하겠습니다."

비광이 길게 읍(揖)한다. 그러다가, 비광이 문득 기억난 것이 있어 다시 아뢴다.

"아, 그러고 보니 일전에 붙여 주셨던 조수 역시 특출(特出)한 재능으로 몇 차례 소생을 위기에서 구하였습니다. 솔직히, 처음에는 그의 입성만을 보고 짐짓 멸시(蔑視)했던 것도 있었습니다, 하오나…… 이제는 정말 그에게 감사(感謝)를 표하고 싶습니다. 그와 함께 했던 덕택에 정말 많은 것을 깨우칠 수 있었습니다. 혹시 그를 지금 다시 만나볼 수 있겠습니까?"

수정 선생이 씨익 미소짓는다.

"허허, 이 친구…… 그리 원한다면 만나볼 수도 있네. 월이를 보고 싶은가?"

"예, 선생."

수정 선생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군막 밖으로 외친다.

"여봐라! 지금 내 군막으로 월이를 들라 하거라!"

잠시 후.

"어어……?"

"놀랐는가?"

비광은 자신이 짓궂은 희롱(戱弄)에 넘어간 건가 하여 멍하니 섰다가, 수정 선생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다가, 다시 그…… 월이를 바라본다. 아니, 그것이 과연 월이가 맞다면 말이다.

"지…… 지금 들어온 이 가이가…… 정녕 월이가 맞다는 말입니까?"

"그렇다네. 그래서 이름이 '워리' 가 아니던가."

"워… 워리…… 월(月)이 아니라 워리……라는 말씀입니까? 하하 참……"

못생긴 점박이 가이 한 마리가 비광을 보더니 갑자기 마구 꼬리를 치며 컹컹 짖는다. 자세히 보니 그 못생긴 코가 닮기는 닮았다. 곧 그 가이, 아니, 워리는 아예 몸을 일으켜서 비광의 왼쪽 다리에 마구 달라붙는다. 눈을 반짝이는 것을 보니 한 번쯤 쓰다듬어 달라고 투정이라도 하는 듯하다.

"네…… 네놈…… 네놈이 워리란 말이렷다? 허허 이거 원, 내가 네놈에게 속았구나, 속았어!"

"지치지 않는 체력(體力)도 그렇지만, 이 놈은 특별히 냄새를 아주 잘 맡는다네. 우리 이금위의 여러 견공(犬公)들 중에서도 정예(精銳)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지. 그래도 같이 고락(苦樂)을 함께 한 사이인데, 친한 척을 좀 하는 게 어떻겠나?"

허나 비광은 그저 헛웃음만 날 뿐이다.

"이 놈의 가이, 내가 아주 제대로 속았구나. 마음 같아서는 쉰밥이 그릇그릇 날진대 네 녀석에게 돌아갈 것이 있겠냐만, 어쨌거나 내 목숨을 여러 차례 살렸으니, 네 녀석이야말로 진실로 충견(忠犬)이로다! 아무튼간에 고맙구나!"


다시 보전원으로 돌아왔다.

보전원의 여러 사람들 속에서, 무영(無影) 선생이 담뱃대를 비껴 물고 비광에게 다가온다.

"무사해서 다행이군. 행여나 그 이물에게 잡혀 죽지나 않았는지 걱정했던 차였네."

특유의 무표정한 모습으로 그렇게 말하는 무영 선생에게, 이미 그를 잘 알고 있는 비광은 예(禮)를 생략(省略)하고 곧바로 다가가 아뢴다.

"위험하기도 했으나 참으로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더불어 이금위군의 위용(威容)도 직접 볼 수 있었습니다."

무영 선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입을 연다.

"……자네가 먼저 올려보냈던 첫 번째 서찰은 잘 받아 보았네. 금일(今日) 아침에 보니 자네가 작일 밤에 돌아와서 다시 쓴 두 번째 서찰이 와 있더군."

"읽어보셨습니까?"

"대충은 읽어봤네. 아마 그런 종류의 이물은 없이 하게 될 걸세. 기별(奇別)을 받거든 그것까지 함께 비록(祕錄)에 기록토록 하게."

"알겠습니다. 허나……"

"허나?"

비광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아뢴다.

"항상 느끼는 것이오나…… 저는 늘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 이물은 왜…"

"…어떤 연고(緣故)로 나타났으며, 그 사연(事緣)이 무엇인가 하는 이야기 말인가?"

무영 선생이 대신 말하니, 비광은 멋쩍을 뿐이다.

"송구(悚懼)하오나 부디 책(責)잡지는 마셨으면 합니다."

"……"

이번만큼은 무영 선생도 딱 자르기보다는 오히려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다.

"내 보기에…… 자네의 천성(天性)이 그래서인 것은 아닌가 싶네. 나도 자네가 그런 사람인 줄은 능(能)히 짐작하고 있으니, 나를 너무 어려워하지는 말게. 다만! 내가 무어라 대답할지 알고 있는 이상, 구태여 다시 이런 이야기를 꺼내어 서로 곤란하게 만들지 않았으면 하네.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충분히 알겠습니다."

"그런 자네가 틀렸다거나 한 것은 아닐세. 하지만 그 말에는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것이 달리 마땅히 없기 때문이고, 나는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네. 부디 오해(誤解)하지 않아 주었으면 하는 게 내 생각일세."

"예, 선생. 앞으로는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비광은 하릴없이 무영 선생의 앞에서 물러난다. 비광이 몸을 돌려 이제 그의 방으로 향하려 하는데, 문득 같은 방향으로 향하는 소저가 있다. 소저가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얼마간 비광과 함께 걷다가, 문득 먼저 입을 연다.

"……소녀(少女), 뜻밖에 자리에 함께하였는지라, 방금 무영 어르신과 나누었던 대화(對話)를 듣게 되었사옵니다."

"……"

"무영 어르신께서 본디 일부 강경(强硬)하신 성미가 있으시니, 장부(丈夫)께옵서는 너무 괘념(掛念)치 마시지요."

"그렇다면, 소저는 어떻게 생각하오? 어떤 이물이 어째서 나타나게 되었고 어떤 곡절(曲折)이 있어 그런 일을 저지르게 된 것인지…… 분명 보전원에서 밝혀 알아내어 함께 기록해야 할 필요도 있지 않겠소이까?"

"장부께서 말씀하신 대로라면……"

그 소저는 문득 고요한 가운데 혼자 미소짓는다.

"……관악산 자락의 어느 아낙이 혼례(婚禮)를 맺었으나 자녀(子女)가 없어 번뇌(煩惱)하던 차, 문득 산중(山中) 암자에 올라 득남(得男)을 염(念)하며 여래입상 하나를 정성껏 시주(施主)하였더니, 그 지성(至誠)이 하늘에 닿은지라, 여래입상이 그 의지에 감화(感化)되어 저 혼자 움직여서 수태(受胎)하고자 하였으나, 아직 인간 사이의 수태의 이치를 몰라 남녀(男女) 불문(不問)하고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그런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그 말에, 비광은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어 선다. 소저 역시 가만히 발걸음을 멈춘다. 소저는 자신이 괜한 이야기를 꺼냈다 싶었는지 백옥(白玉) 같은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숙인다.

"혹시…… 그 불상에 대해 뭔가 아는 것이오?"

"아, 아니옵니다. 소녀, 그저 전해들은 풍문(風聞)만을 가지고 나름대로 추론(推論)해 보았을 따름이옵니다."

"……"

"소녀가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여 장부의 마음을 혼란(混亂)케 하였으니, 부디 용서하여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아… 아니오. 정말이지 놀랍구려. 나는 직접 그 자리에서 뛰고 지켜보고 놀라기까지 하였음에도 그런 생각을 하지는 못하였소이다. 어떻게 이렇게 앉은 자리에서 그런 내막(內幕)을 짐작할 수 있다는 말이오? 나는 비록 보전원에서 그리 오래 일하지는 않았으나, 소저와 같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줄로 지레 짐작하였더니, 그게 아니었구려. 소저의 말은 내게 마치 가뭄의 단비와도 같소이다. 탁견(卓見)에 진심으로 감사하오!"

비로소 소저가 안도의 미소를 짓는다.

"…소녀의 부질없는 상상(想像)이 장부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면, 그것만으로도 다행이옵니다."

"나, 나는 비광(朏光)이라 하오. 그… 저…… 괜찮다면 소저의 이름을 좀 알 수 있겠소이까?"

소저가 가만히 예를 갖추면서 공손하게 대답한다.

"소녀는 보전원의 다모(茶母)…… 월화(月花)라고 하옵니다."




용력(勇力) 병술(丙戌) 제(第) 일호(一號)

상(詳) 아녀자들에게 접근(接近)하여 수태(受胎)케 하는 여래입상(如來立像)
당(當) 이금위(異禁衛) 십일호(十一號) 금위대(禁衛隊) 보좌관(補佐官) 수정(水晶)
결(結) 과천현(果川縣)에서 작전(作戰)하여 제압(制壓) 및 포박(捕縛)
현(現) 본영(本營) 압송(押送) 후(後) 원년(元年) 칠호(七號)로써 파괴(破壞)

선비가 말한다.

이 여래입상은 알려지지 않은 방법으로 스스로 움직일 수 있으며, 주로 아녀자들에게 가까이 접근하여 아기의 형상(形象)을 한 다른 이물(異物)을 즉시 출산(出産)케 한다. 이 이물들은 그 행태(行態)가 밝혀지기 전에 모두 금위대 작전 중 소멸(消滅)되었다. 한편, 이물을 출산한 피해자는 과다(過多)한 출혈(出血)로 인해 모두 사망하였다. 작전의 결과로 포박된 이 불상(佛像)은 이금위 본영으로 압송되었으나, 존재(存在)할 가치가 없다는 판단(判斷) 하에 원년 칠호 "금강저(金剛杵)" 를 활용(活用)하여 파괴하였고, 이후 불을 질러 완전히 소각(燒却)하여 그 존재를 없이 하였다. 지역(地域) 백성들에게는 의장대(儀仗隊)가 명계(冥界)의 군졸(軍卒)들이 나타난 것처럼 선전(宣傳)하여,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해 심려(心慮)치 않고 생업(生業)에 종사(從事)하는 데 집중(集中)토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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