危世之說 悖亂篇 第一章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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危世之說

悖亂篇

상편에서 이어집니다.


야심(夜深)한 언덕길에는 인적(人跡) 또한 드문데, 그 길을 따라 한 명의 늙은이가 넘어가고 있다.

"……"

비광은 야음(夜陰)에 몸을 숨기고, 손에는 단궁과 편전(片箭)을 들고 그 뒤를 쫓고 있다. 거리는 대략 오십 걸음, 늙은이도 적잖이 긴장하였는지 여러 차례 뒤를 돌아보았고, 비광도 그럴 때마다 모골(毛骨)이 송연(悚然)하였다.

"…흥…… 젊은 것들이 이리도 신의(信義)도 없고 성실(誠實)치도 못하니……"

아까부터 늙은이는 계속 불만스러운 투로 투덜거리고 있다.

"……장쇠 놈, 내가 평소 그렇게 일렀건만 끝내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 이제 내가 나서서 이 일을 하게 되었구나."

낮에는 그렇게 훤히 들여다보이던 지리(地理)가 밤이 되니 묘연(杳然)하기 짝이 없다. 계속 같은 길을 빙빙 도는 듯하다. 벌써 고개만 몇 번을 넘었는지 모른다. 이상한 일이라고 비광은 생각한다. 동헌이 이다지도 멀었다는 말인가.

비광은 이를 악문다. 아무래도 그 놈의 흡면귀가 장난을 치는 모양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 자신의 뒤에는 또 월화가 따르고 있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안심도 된다. 월화가 가지고 있다는 벽력탄은, 평소에는 두 가지의 물질로 나누어 휴대(携帶)하다가 위급(危急)한 순간에 강한 힘으로 한데 합쳐, 일성(一聲) 벽력과 함께 검은 연기를 일으켜서 위기를 모면(謀免)케 하는 수단이라 하였다. 아마도 그 흡면귀라는 놈을 잡지는 못할지언정 목숨을 구할 수는 있는 것이리라.

늙은 종은 계속 투덜거리면서 산길을 오른다. 이상하리만치 낯선 길이다. 지세(地勢)는 갈수록 험하여지고 늙은 종은 점점 더 높은 곳으로만 올라간다.

"……젊은 것들은 이 길이 지름길인 줄도 모르겠지…"

늙은 종의 혼잣말에만 의지하여 뒤를 쫓고는 있으나, 비광은 개운치 않은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혹시 지금 이 늙은 종이 흡면귀에게 놀아나고 있는 건 아닌가? 그렇다면, 이 사건은 단순히 원한 맺힌 자의 소행이 아니라, 정말로 귀신의 장난이라는 말인가? 비광은 늙은 종이 점점 더 거친 곳으로 올라갈 때마다 등줄기가 섬뜩할 따름이다.

기어이 늙은 종은 비광이 쫓기도 힘겨울 만큼 빠르게 높은 절벽을 오르고 있다. 비광은 숨이 턱에까지 미치는 것 같다.

"허억…… 헉… 헉……"

어찌어찌 절벽을 따라 오르기는 하였으나, 결국 늙은 종의 뒷모습은 비광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다. 비광이 급히 주위를 둘러보아도, 오밤중 깊은 산 속에는 그저 날벌레들만 요란하게 울어댈 뿐 늙은 종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아차!"

비광은 정신이 퍼뜩 든다. 늙은 종을 놓쳐 버렸다는 사실이 가리키는 바는 명명백백(明明白白)한 것이다.

"그렇구나! 내가 귀신에 홀려서 이렇게 된 것이다! 어서 빨리 다시 내려가지 않으면 그 종에게 화가 미치겠구나!"

온 몸에서 땀이 비 오듯이 흐른다. 몇 번을 구르고 엎어지나 아무 고통(苦痛)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비광의 머리 속에는 늙은 종의 생사(生死)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비광은 마침내 산을 다시 다 내려와 언덕길로 돌아왔다. 비광은 황급히 언덕길 저편을 바라본다.

"……아아!"

저기 언덕길이 우편(右便)으로 휘도는 곳에, 길 한가운데에 뭔가가 엎어져 있다. 비광은 젖 먹던 힘을 다해 그곳으로 달려간다.

"아니 된다…! 아니 된다……! 이럴 수는 없다……!"

길이 휘도는 곳에서 몸을 돌리니 눈 앞에 아까 그 종의 시신이 드러난다.

머리가 없다.

"……흡면귀 네 이놈…!"

비광은 눈 앞이 뿌옇게 흐려지는 것을 느낀다. 그는 다시 있는 힘을 다해 옆의 언덕으로 올라가서 주위를 둘러보지만, 어둠 속에는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다.

"네… 이놈……! 흡면귀 네 이놈……!"

이름 모를 산짐승들과 날벌레들만이 비광의 노성(怒聲)에 답할 뿐이다.

"…감히 나를 현혹(眩惑)하여 다시 무고(誣告)한 사람을 죽게 하였으니, 어찌 천지신명(天地神明)께서 네 놈을 용서하시겠느냐! 내 비록 아직 이름 없는 필부(匹夫)일지언정, 네 놈이 천벌(天罰)을 받으리라는 것을 어찌 모르겠느냐! 네 이놈!"

"……오라버니!"

귀에 익은 높은 목소리가 들린다. 월화다.

"오라버니…!"

"월화야, 일이 이렇게 되었구나!"

비광을 만난 월화는 얼굴 가득 근심을 띠고 비광을 붙든다.

"오라버니, 참으로 괜찮으십니까?"

"나… 나는 괜찮다. 도중에 그만 종의 뒤를 쫓지 못해, 이렇게 일을 그르친 것이 한스러울 따름이니라."

"그게 무슨…… 저… 정말로 괜찮으신 겁니까, 오라버니?"

"괜찮대도."

월화는 거의 눈물까지 글썽이며 다시 묻는다.

"대체, 뒤를 쫓지 못했다는 건 무… 무슨 말씀이신지요?"

"내 중간에 귀신에게 현혹되어 산길을 올랐느니라. 늙은 종이 그리로 오르는 줄로만 생각하고 따라 올라갔지. 늙은 종이 이쪽이 지름길이라고 혼잣말하며 오르길래, 뒤따르고자 했으나 너무 빠른지라, 결국 놓쳐 버리고 생각하니 귀신의 장난인 것이어서 다급히 돌아온 것이니라."

말을 하는 동안, 월화의 표정은 걱정에서 공포로 바뀌어 가고 있다.

"오… 오라버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왜, 왜 그러느냐?"

"소녀, 무슨 말씀이신지 전혀 모르겠사옵니다. 소녀가 먼발치서 보기에, 오라버니께서는 분명 이 자의 죽는 모습을 지켜보시지 않았사옵니까?"

"뭐라, 지켜보다니? 나는 전혀 보지 못했느니라! 내 말하지 않았느냐, 혼자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고!"

"오라버니!"

월화는 거의 소리를 지르다시피 한다.

"제발… 다시 한 번만 돌이켜 헤아려 보시지요. 그 모습을 보고 사시나무 떨듯이 부들부들 떨고 계시다가, 갑자기 산으로 올라가서 용서하지 않겠다고 소리를 치시지 않았사옵니까?"

"……!"

비광은 순간 그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를 정도로 놀라, 월화를 한 번 바라보고, 늙은 종의 시신을 한 번 바라본다.

"내… 내가 그러하였느냐? 그, 그럴 리가 없다! 저 산 절벽을 오르던 것이 그리도 생생하거늘!"

"아니옵니다, 오라버니! 제발 정신 좀 차리시옵소서! 방금 전에 오라버니께서는 흡면귀를 보셨사옵니다! 이 종의 죽음을 지켜보셨다는 말이옵니다! 소녀에게 제발 말씀해 주시지요, 그 탈, 그 탈은 어떠했사옵니까? 흡면귀는 사람이옵니까, 귀신이옵니까?"

"……"

"오라버니…!"

"나… 나는 아무 것도 모르겠구나. 미, 미안하다, 월화야."

"제발……!"

비광은 까닭을 알 수 없었으나, 문득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온다. 그는 애써 먼 밤 하늘을 바라본다.

"나는 분명… 숨이 턱에까지 차서 산을 오르고 있었거늘…… 너는 지금 내가 이 자의 죽음을 보았다고 하는구나."

비광은 자신의 옷을 내려다본다. 어둠이 깔린 산길, 자세히 볼 수는 없으나 산길을 거의 구르다시피 해서 내려온 사람의 입성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정갈하고 야무지다.

"…괜찮사옵니다. 어서… 서찰을 회수(回收)하여 돌아가시지요. 더불어 그 탈… 아직 저 송장에 매달려 있을 것이오니, 행여 다른 피해가 생기지 않도록 오라버니께서 챙기는 것이 좋겠사옵니다."

"……괜찮겠느냐? 이런 것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했거늘, 나까지 해를 당하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그렇다고 길바닥에 버려 두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사옵니까? 각별히 몸조심하는 수밖에 없사옵니다."

비광은 한숨만이 나올 따름이다.

"한 번 귀신에게 농락(籠絡)당하고 나니… 영 자신이 없구나. 행여라도 내가 변(變)을 당하거든 너는 그 즉시로 무영 선생께 이를 고하도록 하고, 곧바로 장작을 모아서 그 탈과 이 일에 관련된 모든 서신(書信)들을 한꺼번에 불태우도록 하거라."

"오라버니……"

비광은 시신을 향해 힘없이 다가간다. 끔찍한 광경(光景)이나, 어둠이 깔린 탓인지 잘 보이지는 않는다.

"……내 미안하구나. 지켜주지 못해서."

비광은 두 서찰을 챙기고, 시신의 허리춤에 달려 있던 탈도 집어든다. 이상하게도 탈은 피가 전혀 묻지 않았으며, 어둠 속에서도 괴기스러울 정도로 희게 빛나면서 미소짓고 있다.

"……"

그것들을 챙겨서 월화와 함께 도로 길을 돌아가는 비광의 어깨가 축 처진다.


아침 해가 밝았다.

비광은 눈을 뜨자마자 몸을 벌떡 일으킨다.

"……!"

고요하고 평화롭다. 비광은 머리를 붙잡고 길게 한숨을 내쉰다.

"후우……"

머리맡을 돌아보니 어제의 그 탈이 놓여 있다. 여전히 기분나쁜 미소다.

작일(昨日)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 안채로 들어가려던 월화가 문득 그 탈은 자신이 살피겠다면서 달라고 했던 적이 있었다. 비광은 위험하다는 것을 이유로 하여 그것을 거절하였으나, 이제 와서 다시 헤아리니 딱히 위험해 보이지도 않은 듯싶다. 단지 조금은 기분나쁜 미소를 짓고 있다는 것뿐.

"하지만……"

여전히 흡면귀라는 것은 단 한 번도 마주치지도 못했고, 그저 알게 된 것은 이 탈이 그 흡면귀와 모종(某種)의 연관성(聯關性)이 있다는 것뿐이다. 혹여 흡면귀의 소유(所有)는 아닌가? 그렇다면 흡면귀는 자신의 물건을 훔친 비광을 마땅히 덮쳤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흡면귀는 작일 밤에 비광을 찾아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는 어찜인가?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거듭되다가 비광의 머리를 가득 채운다. 비광은 신음하며 문을 열어젖히고 밖으로 나선다.

"오라버니!"

월화다. 다행히 표정이 밝아 보인다.

"간밤에 안녕(安寧)하셨는지요? 좀 어떠시옵니까?"

"나는 괜찮다. 잘 잤느냐?"

"……소녀, 작일 밤에 뒤척이면서 이리저리 생각해 본 결과, 짚이는 점이 있사옵니다."

"……짚이는 점이라?"

"…일단, 조반을 들고 말씀드리도록 하겠사옵니다. 머무르고 있던 동헌 수령이 첫새벽에 서찰을 받아 가지고 대신 출발했사옵고, 어제 문초(問招)를 받던 장쇠란 종은 기력(氣力)을 잃어 뒤뜰에 묶여 있사옵니다. 지금 온 집 분위기가 말이 아닌지라, 우리도 눈치 보이기 전에 어서 이 곳을 떠나야 하겠사옵니다."

"그래, 그래야겠구나… 그럼 먼저 출발 준비부터 하기로 하자."


비광과 월화는 어제 들렀던 그 주막의 가장 안쪽 방으로 들어가 있다.

"……그 집에서 더 오래 있을 수는 없었던 것 같구나. 늙은 종이 죽는 것을 막지 못했다고, 다들 흥, 흥 하며 우리를 백안시(白眼視)하던 걸 보았느냐?"

"소녀도 알고 있사옵니다. 그래서 어서 떠나자고 했던 것이지요."

"…..한 집이 완전히 몰락(沒落)할 것마냥 기울었으니, 여기에는 우리의 책임도 있다 할 것이다. 무영 선생께서 아시면 얼마나 우리를 책(責)하시겠느냐."

"…마음을 굳게 잡수시옵소서. 아직은 기회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옵니다."

"그래, 고맙구나. 그나저나 아까 짚이는 것이 있다고 했었지?"

월화는 얼른 몇 장의 지물(紙物)을 꺼낸다. 온통 쓰고 지우고를 반복한 언문(諺文)들이 가득한 것들이다.

"소녀… 지금까지의 일들을 정리해 보았사온데, 상당히 중요해 보이는 부분들이 있사옵니다."

월화는 몇 장의 종이를 들어 보인다.

"소녀가 아낙네들에게 듣기로, 일전에 당했다는 훈장이나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기 자신을 높이고 자만(自慢)하는 과오(過誤)에 빠지거나, 지나친 공포에 내몰려 자기 스스로를 돌아보지 못하고 허장성세(虛張聲勢)로만 일관(一貫)하였사옵니다. 이렇게 되면 필시 주의가 흐트러지고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게 되는 법이라, 저 교활(狡猾)하고 꾀 많은 흡면귀는 바로 그 순간을 노린 것으로 사료(思料)되옵니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다른 것은 없더냐?"

"어제 문초의 일을 기억하시지요?"

"그렇지. 동헌 사령과 장쇠의 변론(辯論)이 서로 달라서… 가만 있자, 달라서…? 그렇다면……!"

비광의 표정이 굳어진다.

"그렇사옵니다. 오라버니께서 작일 밤에 헛것을 보신 것도 분명 같은 현상(現象)이었을 것이옵니다. 그들도 자기들 보기에는 억울했을 것이지요."

"……"

비광은 비로소 상황이 감이 잡히는 듯하다.

"허면… 어찌하여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

"…소녀도 아주 확신(確信)할 수는 없사오나, 본디 인간의 성정(性情)이라는 것이 어떤 충격(衝擊)을 느꼈을 시에 곧 그것을 극복(克服)하려 하는 면이 있는지라, 이 때문에 자신이 겪은 일임에도 기억치 못하는 것일 수도 있사옵니다."

"오오, 과연 그렇겠구나. 나 또한 작일에 그러하였는데, 따지고 보면 장쇠로서도 죄 없이 문초를 당한 셈이 되겠구나."

"소녀가 아뢰온 것이 반드시 옳지만은 않을 수도 있사오며, 가장 그럴 듯한 설명이라는 것뿐이옵니다. 그게 아니라면 정말로 문제가 심대(深大)해지게 되옵니다. 어쩌면 이금위군을 요청해야 할지도 모르옵니다."

"만일 아니라면… 어떤 상황일 수 있겠느냐? 말해 보아라, 내가 무슨 일을 겪은 것이더냐?"

월화는 잠시 입술을 깨물더니, 곧 천천히 아뢴다.

"……어쩌면… 그 흡면귀가 아주 우리의 감각(感覺)을 흩뜨리고 기억을 유린(蹂躪)하는 것일지도 모르옵니다."

"……!"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오니 너무 심려(心慮)치 마시지요. 그러나 만일 이것이 맞다면, 그 흡면귀는 더 이상 한갓 원한을 품은 자가 아니오라, 정말로 필부의 힘만으로는 감당키 어려운 위험한 귀신이 될 것이옵니다."

"허어……"

비광은 다시 한 번 등줄기가 오싹하다.

"…일단 그럴 수도 있다고 하였으니… 염두에 두고는 있겠다. 다른 것은 없더냐?"

"이 탈이옵니다."

월화는 예의 그 탈을 보인다. 비광이 찬찬히 그것을 바라본다.

"아낙네들의 말에 의하면, 모두가 말하기를 왜인들의 이상한 탈에 대해 의견(意見)이 합치(合致)하였사옵니다. 소녀, 왜인의 습속(習俗)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에 구구한 곡절(曲折)까지는 짐작하기 어려우나, 적어도 이 탈을 지녔던 자들 모두가 변을 당한 것은 분명하옵니다. 그런데… 작일 뵈었던 부관이 허리춤에 그 탈을 지니고 있는지라… 소녀, 간담(肝膽)이 서늘하여 그 탈을 떼어 놓고자 하였사온데……"

"그러한 줄은 내 미처 몰랐구나."

"소녀 생각에는 흡면귀가 혹시 이 탈을 쫓는 것이 아닌가 하여, 모진 목숨이오나 죽음을 무릅쓰고 작일 밤에 이 탈을 갖고 있기를 청하였사옵니다. 오라버니께서 갖고 계시기로 한 뒤에도… 한 시진 정도마다 계속 방에서 나와 오라버니의 방을 지켜보았사옵고, 남은 종들을 불러다 그 방을 잘 지키라고 당부(當付)도 하였사옵니다. 그러나 오라버니는 무사하시고, 흡면귀는 오지 않았고, 이제 그 종들은 대놓고 소녀를 비웃게 되었사옵니다. 그러하여…… 어쩌면 이 탈의 곡절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옵니다."

"…이것에는 나도 짚이는 바가 있구나. 이 탈이 그 흡면귀와 뭔가 관계가 있는 건 분명하다. 내 또한 처음에는 이 탈이 본디 그 흡면귀의 것이고, 자신의 물건을 훔쳐 가지고 다닌 사람들을 쫓아 살해(殺害)하는 것은 아닌가 하였다. 허나… 월화 네가 말한 대로 흡면귀는 내게 관심(關心)이 없는 듯하구나. 그렇다면, 이 탈이 본래 흡면귀의 것이라는 생각은 이치에 합당(合當)치 않게 되지 않겠느냐? 허면… 이제 남은 것은 무엇이더냐. 아니면 흡면귀가 내게만 자비(慈悲)를 베푼 것이냐?"

"이미 그 흡면귀가 숱한 인명(人命)을 해하여 그 죄가 사해(四海)를 덮었은즉, 자비심을 발(發)할 만한 자로 보이지는 않사옵니다. 아니면……"

"아니면?"

"…오라버니께옵서는…… 흡면귀가 해칠 수 있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는지도 모르옵니다."

비광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할진대 내가 네 말을 가벼이 듣겠는가. 마땅히 내 처신(處身)과 행적(行跡)을 깊이 살피어, 흡면귀가 왜 나만을 특별히 대하였는지를 살필 것이니라. 일단은 감영으로 가자꾸나. 이제는 감영에서도 이 일에 대해 관심을 보이고 있을 것이니, 혹여 한양으로 전갈(傳喝)이라도 가게 된다면 사달이 나게 될 것이다."


역시 이번에도 통(通)하였다.

"어서 오게나. 지금 민심(民心)이 이만저만이 아닐세. 작일에만 벌써 두 명이나 내리 죽어나갔다고 하던데…"

"바로 그것 때문에 온 것이옵니다, 감찰사 어르신."

메기 수염 같은 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감찰사가 마중하자 비광은 길게 읍(揖)하여 예를 다한다.

"그러잖아도 방금 막 서찰이 당도(當到)하였음인데, 그만 내 부관이 그런 횡액(橫厄)을 당하였다고 하더군."

"더 이상의 무고한 죽음을 막기 위해 제가 온 것이옵니다, 어르신. 소생의 누이가 길흉화복을 조금 볼 줄 아는데, 이 일을 그냥 모른 체하고 지나칠 수 없어 염치를 무릅쓰고 이렇게 감영의 문을 두드리게 된 것이옵니다."

"그래, 그 쪽에 있었다고 하니 마침 직접 눈으로 보았겠군. 사체(死體)를 보았다면, 검험(檢驗)은 어떠하였소?"

"과연 소문대로이옵니다. 희생자의 낯이 참혹하리만치 뜯어먹혔고, 그 모습을 보는 자마다 충격을 받지 않는 이가 없었사옵니다. 희생자들은 짐짓 허장성세를 부리며 애써 평안(平安)코저 하였으되, 모두가 다른 이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동안 무기력(無氣力)한 모습으로 그렇게 살해당했사옵니다."

"그대가 천지 음양(陰陽)의 조화(調和)를 아는 지관일진대, 어찌하여 그 동리에 그런 일이 생겼는지도 알지 않겠는고?"

비광은 헛웃음을 한다.

"그게 사실… 소생이 지금껏 쫓던 것이온지라, 쫓다 보니 어느 새 이곳까지 이르렀사옵니다, 감찰사 어르신."

감찰사는 메기 수염을 가만히 어루만진다.

"…그렇다면 당분간 이곳에 머무르면서 계속 살펴보시게. 우리 감영은 그대에게 필요한 것들을 모두 대어 주도록 하겠네."

"수은망극(受恩罔極)하오나, 행여 폐(弊)가 되지나 않을까 그것이 걱정이옵니다."

비광 일행은 그만 물러가겠노라 하고 다시 읍한 후에 밖으로 나온다.

월화가 걱정어린 표정으로 말한다.

"……이번만큼은 상황이 다르옵니다, 오라버니. 어찌 관(官)의 조력(助力)을 입는단 말이옵니까."

"…내 생각이 있느니라."

"물론 우리가 보전원의 이름을 빌리지 않고 접촉(接觸)하였으니 크게 문제는 없을 것이지마는……"

"그리고 이 탈 이야기도 하지 않았으니 괜찮지 않겠느냐."

"…허나, 필시 이곳 사람들까지도 이 이물에 연루(連累)될 것이옵니다. 그러하면, 상황이 더욱 커지게 되는지라……"

비광은 껄껄 웃는다.

"그 점은 나도 아느니라, 월화야. 그리 많은 신세를 지지는 않을 것이니 앞으로의 일은 걱정 말거라."


奇談察中 談不鎭靜 須先必疑而檢這談 後必安庶心

"기이한 이야기를 살피는 중에, 만일 그 이야기가 쉬이 가라앉지 않으면, 모름지기 먼저 그 이야기를 의심하고 시험하여야 할 것이요, 그런 후에라야 민심을 진정시켜야 할 것이다."

기담찰요(奇談察要), [某] 편저(編著)

"어디로 가시는지요?"

"야방(冶坊)이니라."

비광은 대장간으로 향하며 양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이 놈의 탈을 어디다 두고 가고 싶어도, 무고한 사람들에게 해가 될까 걱정이니 메고는 간다만, 이것 참 답답하구나."

비광이 메고 있는 봇짐의 가장 안쪽에는 그 탈이 있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위험하다거나 무섭기는커녕 그저 흥미(興味)로운 탈로밖에는 생각되지 않을 수도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비광은 지금 이 탈에 대해 재고(再考)하고 있어, 마음 한 켠에서 스며오는 불길한 예감(豫感)에 못 이겨 이 탈이 든 봇짐을 벗어던지고 싶은 심정이다.

"월화야."

"예."

"지금껏 그대와 함께 하면서 그대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또 경탄하였다. 내 보기에 월화는 앞으로 닥쳐 올 위험을 상상하는 재주가 있더구나. 이야기를 만들고, 전후(前後)의 정황(情況)을 미루어 추측(推測)하는 것이지. 그것만 보아도 그대는 우리 보전원의 보물이니라."

"송구(悚懼)하옵니다."

"허나…… 그대가, 그리고 내가 잠시 놓쳤던 것이 있더구나."

"그것이 무엇이옵니까?"

월화는 정말로 궁금해 하는 눈치다.

"……우리가 듣고 알게 된 견문(見聞)을… 다시 요찰(料察)하여 보고, 회의(懷疑)하여 보는 것이니라."

"…소녀, 무슨 말씀이시온지 잘……"

그러는 사이에 어느덧 대장간에 닿는다. 비광이 거드름을 피우며 안으로 들어선다.

"어흠, 내 필요한 것이 있어서 왔느니."

야공(冶工)이 급히 와서 조아린다.

"아이구, 무엇이 필요하시어서 오셨습니까요."

"…혹 무쇠로 사람 얼굴 모양의 탈을 하나 만들 수 있겠느냐."

"무쇠로…… 말씀이십니까요?"

"그래, 그 중(重)함이나 후(厚)함은 내 고려치 않을 것이니라. 아주 얼굴에 밀착(密着)할 필요는 없지만, 사이로 손가락이 파고들기 어려울 만큼 잘 감싸야 할 것이니라. 겉으로 공교(工巧)할 것까지는 없다."

"만드시라면야 한번 만들어 보겠습니다만… 어디에 쓰시려고 그러시는지요?"

그러자 비광이 정색한다.

"어허, 쓸데없는 말이 많구나. 언제쯤이면 완성되겠느냐?"

"……공교히 만들지 않아도 된다고 하시니, 신속(迅速)히 만들고자 한다면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습니다요. 지금 바로 만들기 시작해서 내일 아침에는 완성토록 하겠습니다요."

"그래, 내 부탁하마."


그날 저녁.

"…오라버니, 어디에 다녀오시옵니까?"

"내 방금 관찰사 어르신과 대담(對談)하고 왔느니라. 듣자 하니, 이 근처에 인륜(人倫)을 저버린 금수(禽獸)와도 같은 자가 근래(近來) 압송(押送)되어 왔다고 하더구나. 꼼짝없이 그 명을 끊어 다스려야 할 자이겠지. 그러하여, 내 간청(懇請)해서 명일 하루 동안만 그의 처우(處遇)를 맡겨 달라고 하고 왔느니라."

"……"

월화는 조금 생각하는 표정을 짓는다.

"…오라버니께서 염두에 두고 계시는 바를 알 듯도 하옵니다."

"그래, 내가 감영에서 도움을 얻을 일은 이뿐이니라."

"보전원의 『기담찰요』 라는 책에서 바로 그것을 논(論)하였음인데, 소녀가 아직 불민(不敏)하여 이를 그만 잊고 있었사옵니다. 오라버니께서는 그 자의 얼굴에 무쇠로 된 탈을 씌우고, 그러함에도 흡면귀가 그를 해할 수 있는지를 살피시려는 것이지요?"

"그것도 그렇지만, 그와 함께 자기 자신을 높이는 것이 어떤 단초(端初)가 될 수 있느냐도 알아볼 것이니라."

"시험 삼아 그에게 자부(自負)하는 말을 하게 한 후, 이것에 그 탈이 호응(呼應)하는지를 보려는 것이로군요."

"그렇지. 바로 이해하는구나. 그리고 말이다……"

비광은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애초에 흡면귀 소리가 처음 나왔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그것이 원한을 품은 자거나 귀신이 분명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 누구도 정작 그 흡면귀라는 자는 본 적이 없지 않느냐? 네 말대로 지극한 공포에 의해서든, 아니면 그 흡면귀가 우리의 감각을 왜곡(歪曲)해서든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흡면귀라는 말이 나왔겠느냐? 순전히 근본(根本)도 없는 뜬소문 때문이 아니겠느냐?"

"그러하옵니다."

"나는 진작에 그 흡면귀라는 말부터 의심해 보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이 너무 늦어 이제까지 오게 되었느니라. 월화야, 보전원에서 가져온 것이 혹시 더 있느냐? 나는 대추나무 방망이와 옥경(玉鏡)을 갖고 있을 것이니라. 그 흡면귀라는 것이 만일 귀신이라면, 내가 그것을 지니고 그 자의 곁에 등을 돌린 채로 서 있다면, 그 자가 과연 죽음에 이르를 수 있겠느냐."

월화의 얼굴 표정이 밝아진다.

"…짐작하시는 바를 온전히 꿰뚫어 알겠사옵니다. 소녀는 귀신에 대항(對抗)할 물건으로는 향불 몇 개밖에는 없으나, 그것이라도 들고 오라버니의 반대편에 서겠사옵니다. 만일 그럼에도 그 자가 죽게 된다면, 과연 흡면귀는 귀신이 아니라 다른 무엇이라는 말이 되겠군요."

비광이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바로 그러한 것이니라. 아, 그리고 향불만으로는 족(足)하지 못할 듯하니, 내 옥경을 네게 줄 것이다. 내일 만반(萬般)의 준비를 끝내고 하나하나 따져 살피면, 비로소 이 탈과 흡면귀에 대한 소상(昭詳)한 내용을 짐작할 수 있겠지."


아침이다.

인적 드문 산골짜기 속, 야트막한 평지(平地)가 나오자 비광이 멈추어 선다.

"자, 세인의 이목을 피하기엔 이만하면 적절할 것이다. 어차피 사달이 나는 동안의 기억은 남지 않으니, 이 이상 깊게 들어갈 필요도 없겠지. 이제부터 내가 지시를 내릴 것이니라. 네 명의 군뢰(軍牢)는 이제부터 사면(四面)으로 나누어 서서 이 자를 보도록 하거라. 보면서, 이 자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내게 보이는 대로 고(告)하도록 하여라!"

"옛!"

"먼저 그 자를 끌고 오라."

붉은 오라에 단단히 묶인 봉두난발(蓬頭亂髮)의 못생긴 사내가 질질 끌려 온다.

"하이고, 나으리! 나으리, 제발 살려주시오! 나으리!"

"어허, 시끄럽구나. 너는 여기 서 있도록 하여라. 네 명의 군뢰의 가운데가 될 것이니라. 그렇지… 자, 월화야, 내가 아까 주었던 옥경은 챙겼느냐?"

"그러하옵니다. 향불도 이렇게 미리 불을 붙여 놓았고 향내가 가득 퍼졌으니, 이 정도라면 웬만한 귀신들은 범접(犯接)치도 못할 것이옵니다."

"좋다, 이제 나는 대추나무 몽둥이를 여기 들고… 월화 너는 이 자의 왼편, 한 자 정도의 거리에서 등을 돌리고 서거라. 나는 이 자의 바른편, 마찬가지로 한 자 정도의 거리에서 등을 돌리고 서겠다."

"알겠사옵니다."

비광은 군뢰 하나가 건네 준 무쇠 탈을 받아서 수인(囚人)의 낯에 씌운다.

"흠, 이 정도라면 괜찮겠지… 그 영감이 행여 눈구멍이라도 만들까 하였는데 다행이로군."

"으으, 무겁소, 나으리."

"흥, 좀 조용히 하거라. 패륜(悖倫)을 저질러 놓고도 네놈이 아직도 할 말이 있더냐. 하늘 보기가 부끄럽지도 않더냐?"

"내 소행이 비록 잘못된 건 맞소만, 지금 이건 참수(斬首)하러 온 건 아닌 것 같은데 말이오."

"네놈이 오늘 아침에 죽을지 살지는 하늘에 달렸느니라. 설령 여기서 죽는다 하더라도 헛되이 죽는 것이 아니니 염려치 말라."

"…만일 여기서 살게 되면, 살 수 있는 거요?"

비광이 차갑게 답한다.

"그렇게 되면 네놈은 다시 관찰사 어르신의 처분(處分)을 기다려야겠지. 너무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니라."

"아, 아하이고, 살려 주시오 나으리!"

수인의 비명을 뒤로 한 채, 비광이 품에서 방망이와 탈을 꺼내며 말한다.

"자… 이제 시작하겠으니, 각인(各人)은 필히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할 것이다."

비광은 절로 목소리가 떨리려는 것을 억누르고, 등을 돌려 선 채로 수인에게 지시한다.

"자, 내 말에 순순히 따르는 것이 좋을 것이니라. 내 이것만큼은 용서하여 줄 터이니, 누가 감히 나를 대적(對敵)하겠느냐고 외쳐 보거라."

"…뭐, 뭐요?"

"한번 말해 보거라. 왜, 그냥 죽고 싶은 게냐?"

"이, 이렇게 해서 살 수만 있다면 뭔들 못 하겠소이까? 허나 내가 이 말을 하는 건 내 뜻이 아니라 나으리께서 시키셨으니 하는 것이오. 부디 이것까지 감찰사 나으리께 청죄(請罪)치는 마시구려."

"대장부(大長夫)는 본디 한 입으로 두 말을 하지 않는 법이라.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라."

"아… 알겠소. 누가 감히 나를 대적하겠는가!"

"더 크게 외치거라!"

"누, 누가 감히 나를 대적하겠는가!!"

산골짜기에 그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메아리가 된다. 그런데 그 대성(大聲)이 끝나기가 무섭게 수인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아아, 나으리, 혹시 그 탈이 무엇이오? 거기 손에 들고 계신 것이 혹시 탈이 맞다면, 내가 좀 가져도 되겠소이까? 어차피 마지막 가는 길에 길동무라도 삼고 싶어서 그러한 것인데."

비광은 순간 소름이 쫘악 돋는다. 이 자는 자신이 탈을 꺼낸 것을 보지도 못했으며, 생전(生前) 여기서 이 탈을 본 적도 없다. 무엇보다도 이 자는 지금 무쇠로 된 탈을 쓰고 있어, 시야가 온전히 가려져 있는 중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여 이 탈의 존재를 알았음인가? 비광은 등 뒤에서 월화가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도 같다.

"…오냐, 내 이것을 네놈의 허리춤에 직접 묶어 주도록 하마."

"고맙소이다."

비광은 몸을 돌려서 그의 허리춤에 이 탈을 묶어 준다. 마지막으로 바라보는 이 탈의 미소는 그 어느 때와는 달리 유례(類例)없이 음흉(陰凶)한 모습을 하고 있다. 비광은 몸서리치며 다시 등을 돌려 선다.

"자, 한번 더 외쳐 보…"

"누가 감히 내게 대적하겠는가!!"

비광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수인이 기세 좋게 외친다. 비광은 턱이 달달 떨리는 것을 애써 참으며 외친다.

"자, 월화야, 절대 등을 돌려서 보지 마라! 그리고 너희 군뢰들은 잠시도 눈을 떼지 말고, 보이는 그대로를 말하도록 하라!"

"옛! …어어, 어… 저, 저… 나으리!"

"왜, 왜들 그러느냐!"

비광이 보니 군뢰들의 낯빛이 벌써 사색(死色)이 되어 있다.

"저… 저 탈이… 저 탈이…!"

"지, 지금 이 수인의 얼굴 앞으로 떠올라 가고 있사옵니다!"

비광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인다. 바로 이것이로구나. 귀신이 아니라 탈이다. 이 탈이 그 사람을 해치는 것이다! 이 탈의 앞에서 자신을 높이는 자는 저도 모르게 이 탈을 소유(所有)코자 노력하게 되며, 소유한 후에는 그 사람의 낯을 훼손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계속 말하라!"

그러나 군뢰들의 목소리는 이내 등 뒤에서 들려오기 시작한 괴상한 소리에 묻힌다.

우드득 ────

콰득 ── 아드득 ─────

"무… 무슨 일이오 나으리! 지, 지금 이 무쇠탈이…"

"가만히 있거라!"

수인이 공포에 질려서 마구 외치는 동안에도, 비광의 등 뒤에서는 무쇠의 파편(破片)들이 마구 튀어나가고 있다. 대추나무 몽둥이를 들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귀신이 아니다!

"으… 으아아…… 살려 주시오, 제발 살려 주시오!"

말할 수 있는 걸로 보아서는 아직 낯이 훼손당하지 않은 모양이다. 앞이 가려져 있으니 수인으로서는 더욱 공포가 증폭(增幅)되고 있을 터이다. 그러는 중에도 무쇠가 거칠게 떨어져 나가는 소리는 여전하다.

"보고(報告)하라! 무쇠탈은 어찌 되고 있는가!"

"예! 예, 그… 심하게 훼손되었사오나 아직… 아아! 구멍이 났사옵니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곧 수인의 단말마(斷末摩)에 묻힌다.

"으아아악! 아아악! 으… 으아아아아악────!"

그러더니 이제는 목소리도 아니고 그저 담(痰) 끓는 듯한 소리만 난다.

"나… 나으리, 지금 저 탈이… 탈이……!"

"탈이 어떻단 말이더냐!"

"그, 그 자의 어, 얼굴을 더, 덮쳐서…"

"덮쳐서 어쨌단 말이더냐!"

"자, 잘은 보이지 않사오나 뜨, 뜯어먹고 있는 게 아닌가 하옵니다!"

그 동안에 이제 수인의 목소리는 거의 가라앉아 가고 있다.

"그으…… 그르르륵… 끄륵……"

"뜯어먹다니, 어떻게 뜯어먹는단 말이더냐?"

"…마치 그 모습이… 저, 나으리, 어찌하면 좋사옵니까? 이 자를 똑바로 지키지 못했으니 죽을 죄를 지었사옵니다!"

"……무슨 말이냐?"

"아니, 나으리! 방금 나으리와 쇤네들이 저 산에서 지나가는 포수(砲手)를 쫓아내고 돌아오지 않았사옵니까?"

"……!"

과연 예상했던 대로다. 비광은 급히 뒤를 돌아보며 외친다.

"이 자가 죽은 게로구나!"

과연 등 뒤에는 처참한 모습이 펼쳐져 있다. 사방에 튀겨나간 무쇠 조각들은 이 탈의 흉악(凶惡)함을 방증(傍證)해 보여주고 있다. 월화는 아직 등을 돌리지 않은 채 말한다.

"역시 이번에도 기억이 사라졌사옵니다!"

"그래, 내 이제야 똑똑히 알겠구나. 네 명의 군뢰들은 모두 모여서, 자신이 아는 바를 상세히 고하여라!"

네 명의 군뢰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다가온다.

"…막 탈을 꺼내시려는 차에 마침 포수들이 내려와 무엇을 하는 중이냐고 묻기에, 나으리께서 명하셔서 다 같이 그들을 쫓아 보낸 후 돌아온 것이 아니옵니까? 나으리, 방금 전에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어떻게 된 일이냐고 일갈(一喝)하시지 않았사옵니까?"

"아니옵니다, 나으리! 보이는 바를 고하라고 나으리께서 명하신 직후 갑자기 멧돼지가 나타나 이 자의 무쇠탈과 낯을 이렇게 파먹지 않았사옵니까? 그 모습을 보고도 그것을 막지 못하고 떨며 지켜보았으니, 실로 죽을 죄를 지었사옵니다!"

"이 자가 갑자기 오라를 풀고 산 아래로 도망치기에, 있는 힘을 다하여 그를 추적(追跡)하였나이다. 그러나 문득 행방(行方)이 묘연(杳然)하고 자취를 감추어, 허탕을 치고 죄를 받기 위해 돌아와 보니 이렇게 되어 있지 않겠사옵니까?"

"나으리, 쇤네가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던 차, 뒷걸음질을 치다 땅벌의 집을 건드린지라, 땅벌 하나가 쇤네의 눈을 쏘고 가서 얼마간 시야가 혼미(昏迷)하여 앞을 보지 못하였으니, 일이 어떠한 곡절로 이리 되었는지를 어떻게 알았겠사옵니까?"

"끄응……"

비광이 이를 악문다.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이라면 모를진대, 네 사람의 말이 제각각이고, 그나마 제대로 된 증언(證言)조차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은 소름끼칠 정도다. 그것도 이 수인이 죽음을 맞이한 시점(時點)에 맞추어 이렇게 갑자기 말이 바뀌었으니, 이제 이 탈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명약관화(明若觀火)하게 된 일이다.

"……일이 어찌 되었든 그대들에게 죄를 묻지 않을 것이니 안심하라! 이 자의 시신을 치우고, 뭇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깊은 곳에 묻도록 하거라. 이 탈은 내가 직접 가져가겠다. 오늘 이 자가 죽은 일에 대해서는 발설(發說)치도 말고 애태우지도 말라. 나는 이 자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지 못하였으니, 그대들이 서로 말이 맞지 않은 이상 함부로 입을 놀려서 헛소문을 퍼뜨려서는 안 될 것이야. 내 말 알아듣겠느냐?"

"예!"


"어떠하옵니까?"

"아직까지도 자기들끼리 다투고 있더구나."

비광이 고소(苦笑)하며 들어와 앉는다. 점심식사를 먼저 마친 월화가 비광의 앞에 물그릇을 내밀며 말한다.

"차라리 잘 된 일이옵니다. 네 사람이 이구동성(異口同聲)이었다면 필시 무영 어르신의 질책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옵니다."

"무영 선생의 질책이야 어느 정도 각오(覺悟)했던 것이나,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과연 잘 된 일이로구나. 오늘 중으로 출발하여 이제 돌아가기로 하자꾸나."

그러면서 비광이 고개를 끄덕이자, 월화가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말한다.

"헌데… 괜찮겠사옵니까? 지금 그 탈은 방에 있는데, 행여 누가 그 탈을 가져가기라도 한다면……"

"허허, 괜찮다. 여기가 어디더냐? 감영이니라. 감영의 노비(奴婢)들이 설마하니 남의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대겠느냐. 또 우리가 알아낸 바에 의하면, 이 탈은 근처에서 스스로를 높이는 자가 있을 때에만 호응(呼應)함인데, 근처에 있을 만한 사람들이 노비들 말고 누가 더 있겠느냐."

"……"

월화가 걱정어린 표정을 하고 있자 비광이 입맛을 다시며 덧붙인다.

"정 그러하다면 지금 바로 방으로 돌아가 보도록 하자꾸나. 제 아무리 그 성질이 밝혀진 이물일진대 어쨌건 이물임에는 분명하니까 말이다."


잠시 후.

"……없다, 없어!"

"분명히 여기다 두시지 않으셨사옵니까?"

"허어, 이럴 리가 없거늘…! 다 찾아보라! 방을 샅샅이 뒤져봐야겠구나!"

비광은 목구멍이 바싹 마르는 것 같다. 등줄기에 다시 소름이 돋는다.

"…없사옵니다. 있을 만한 곳은 전부 찾아봤지만 없사옵니다."

"이런이런……"

머리가 아프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아침에 자신의 생각이 옳았음을 확인한 뒤, 그 기분에 잠깐 방심(放心)했던 것이 화근(禍根)이다. 비광은 문득 어지러움을 느낀다.

"……내 불찰이다. 내 불찰이야. 그것을 끝까지 지니고 있었어야 했는데…"

"방에는 없사옵니다. 더 늦기 전에 노비들을 불러모으고 취조(取調)해야 하옵니다!"

비광과 월화는 거의 날듯이 방에서 나와, 온 노비들을 전부 불러모으나, 노비들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른 채 눈만 각자 끔뻑이고 있을 따름이다. 비광은 장탄식(長歎息)이 나오는 것을 억제(抑制)치 못하나, 본디 그 이물의 성질이 이러할진대 어찌 노비들을 탓하겠는가? 다들 헛것을 기억하는 것일 따름이다.

"…하이고 나리, 무슨 일로 이렇게 황급히 부르셨는지 저희는 통 모르겠사옵니다."

"내 묻겠노라. 너희들 중에 평시(平時) 스스로를 자주 높이고 교만(驕慢)하여 방자(放恣)히 행하는 자가 있더냐?"

그 물음에 노비들은 당황스러워하며 서로를 바라보기만 하고 있다.

"내 묻지 않느냐, 어째서 대답이 없는 게냐!"

"…저, 저기 나리, 저희들은 한갓 노비들일 따름이온데, 어찌 감히 방자히 행할 수 있겠나이까."

"조금이라도 스스로를 높인 일이 없느냐!"

"저희들 중 그 누구도 그럴 만한 사람은 없사옵니다, 나리."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월화가 거든다.

"…헤아리건대, 이들의 말에 틀린 점은 없을 것 같사옵니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감영의 공노비들이고, 평시 언행을 함부로 할 만한 자들은 아닐 것이며, 설령 당사자들이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주변에서 증험(曾驗)한 바가 있으면 이미 의심되는 자를 지목하기라도 했을 것이옵니다."

"……"

그렇다면, 그 탈에 대해 자신이 잘못 알았다는 말인가? 비광은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을 느낀다. 다시 안개 속으로 빠져드는 듯한 느낌이다. 비광은 보다 직접적으로 묻기로 한다.

"…내 방에 있는 탈이 사라졌느니라. 왜인들의 탈인데, 크고 눈에 띄는 모양이라 너희들 중 누군가는 보았을 것이다. 탈에 대해 알고 있는 자는 없느냐?"

"……"

"정말 아무도 본 자가 없더냐?"

"그… 그렇사옵니다."

이번에는 월화가 나선다.

"자, 정말로 중요한 일입니다. 당혹스러우시겠으나, 소녀 조금만 더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이 방에 출입(出入)한 자는 없었습니까?"

그러자 종 하나가 월화에게 나선다.

"…한…… 반 시진쯤 전에 감찰사 나리께서 들어가시는 것을 보았는데, 나리께서는 들어가신 지 얼마 안 되어서 다시 나가셨지요. 저는 감찰사 나리께서 행차(行次)하시는 길이라 제지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소저께서 물으시는 그 탈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군요."

비광의 표정이 굳는다. 이 요망한 것이 기어이 감찰사의 손에까지 들어갔구나. 그런데 도대체 어째서인가?

"어떻게 되어 가는 일인지 모르겠구나. 감찰사 어르신의 처소(處所)는 이곳에서 충분히 멀지 않더냐? 월화야, 감찰사 어르신께서 행여 스스로를 높이셨다 해도, 그것에 이 탈이 반응했을 리가 있겠느냐?"

월화도 미간을 찌푸린다.

"…더 확인해야 할 것 같사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혹시 감찰사 어르신께서 들어오시기 전까지 무엇을 하고 있으셨습니까?"

"뭐어…… 우리야 늘 하던 대로 일이 잠시 끝나서 대청 앞에 삼삼오오(三三五五) 모여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요."

"무슨 이야기를 하셨습니까?"

"…그것이, 지금 탄금대 쪽에서 흉흉(洶洶)한 괴소문이 돌고 있는데, 그 뭐라더라, 흡면귀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 이야기가 나오니까, 대뜸 제가 나서서 우리 감찰사 나리께서 그런 헛소문은 당장 때려잡을 거라고 했지요. 얼마간 옥신각신하다 보니, 갑자기 나리께서 나타나셨던지라…"

"……!"

비광과 월화가 동시에 표정이 굳는다.

"…월화야, 이 자들이 있었던 위치는……"

"…이 탈의 영향을 받을 만큼 가깝사옵니다. 이 탈 근처에서 타인을 높이는 경우에는 그 타인이 영향을 받게 되나 보옵니다!"

"이럴 시간이 없다. 어르신께서 위험하다! 어서 가서 탈을 되찾아야 한다!"

그러자 다시 종이 나선다.

"…저, 나리. 무슨 말씀이신진 모르겠사옵니다만, 감찰사 나리를 뵙고자 하시오면, 외람되오나 떠날 채비를 하셔야 할 것이옵니다."

"그건 무슨 말이냐?"

"감찰사 나리께서는 이 방에서 나오신 직후, 이 일에 대해 조정에 보고해야 하겠다시면서, 그 길로 한양으로 떠나셨사옵니다."

그 순간, 잠시간 침묵이 이어진다. 침묵 속에서 비광과 월화가 불안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본다.

그리고 곧이어, 두 사람의 입에서 한꺼번에 비명이 터져 나온다.

"……주상(主上) 전하(殿下)!!"

"……전하께서 위험하옵니다!!"


비광은 연신 채찍질을 한다.

"이랴, 이랴! 빨리 가자꾸나, 어서!"

비광의 등 뒤에서 그의 허리를 힘껏 끌어안고 있는 월화가 걱정스럽게 말한다.

"…오라버니, 이래도 되는 것일지는……"

"어쩔 수 없지 않느냐? 감찰사는 말을 타고 먼저 출발했고, 우리는 마패(馬牌)도 거마비(車馬費)도 없거니와 그렇다고 달음질을 할 수도 없으니… 그냥 말 도둑놈이 되는 게 낫지 않겠느냐."

"…종묘사직이 위태(危殆)하니 소녀도 일단 타기는 하였사옵니다마는……"

비광이 숨을 들이쉬며 말한다.

"희망을 가져 보자꾸나. 감찰사께서 직접 전하를 언급하셨다면 정말 큰일이겠지만, 그냥 조정에 보고하겠다고만 했다면 아직은 괜찮을 것이니라."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연로(年老)하신 나랏님께서 그 탈 때문에 버선발로 달려나오실 일이 아니옵니까?"

"……"

"이러니 저러니 하지만, 무고한 생명이 달린 일이다. 감찰사 어르신께서 별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다 해도, 결국에는 감찰사 어르신께서도 그 종의 한 마디 때문에 오늘 밤을 넘기시기 힘들 것이니라."

그러면서 비광은 산길 앞에 나 있는 좁다란 계곡을 말을 달려 뛰어넘는다.

"흐읍!"

"조심하시지요!"

말은 뒷발을 몇 번 버둥거리다가 건너편으로 올라선다. 비광이 다시 말을 달린다.

"내 소시(少時)에 말을 좀 몰아 보았느니라. 이 정도야 별 것 아니니 걱정 말거라!"

"……아까 역참(驛站)에서 대뜸 말에 올라타시는 것을 보고 소녀도 짐작은 하였사옵니다."

비광이 말을 달려 산길을 내려가며 자책한다.

"…내 잘못이다. 너무 섣불리 안심했던 잘못이다… 오늘 아침에 확인한 것이 그 탈의 모든 성질이 아니었을 거라고는 왜 생각지 못한 것일까?"

"너무 자책하시지 마시지요. 그래도 너무 늦지 않게 뒤쫓게 되지 않았사옵니까? 앞으로는 더욱 조심하면 되는 것이지요."

비광은 고개를 천천히 가로젓는다.

"……만에 하나 우리가 실패한다면 우리는 종사(宗社)를 결딴낸 역적(逆賊) 도당(徒黨)이 되는 것이 아니겠느냐."

"…거꾸로 생각하면, 우리가 성공한다면 우리는 종사를 지켜낸 충신(忠臣)이 되는 것이겠지요."

"……고맙구나."

비광은 자신의 등 뒤에서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월화를 느낀다. 따뜻하다.

"…고맙구나……"

"아까… 역참에서 하시던 말씀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옵니다."

"……"

"분골쇄신하여 종묘사직을 지키겠다고 다짐하시지 않으셨사옵니까? 그걸로 된 것이옵니다. 오라버니의 꾸밈없는 본심(本心)을 소녀가 어찌 모르겠사옵니까? 세상 모두가 오라버니를 손가락질해도, 소녀는 오롯이 오라버니와 함께 하면서 그 진정(眞情)을 보고 들었으니…… 어찌 오라버니의 편에 서지 않겠사옵니까?"

"…월화야, 내 그대를 만난 덕을 많이 보는구나. 어젯밤에도 위험할 것을 알면서 굳이 그 탈과 함께 밤을 새기를 청하고, 또 이렇게 지금도 역적의 수괴(首魁)의 등 뒤에 매달려서 그 역적을 믿어 주겠다고 하는구나. 외간남자(外間男子)에게 이 어인 일이냐."

"……"

월화는 대답이 없다. 비광은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낀다. 어째서인지 입꼬리가 올라가려 한다. 비광은 애써 마음을 누그러뜨리며, 다시 입을 연다.

"…내 괜한 것을 물었구나. 어쨌건 감찰사 어르신을 무사히 따라잡을 수 있을지, 따라잡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할지 궁리해 보자꾸나. 이 길이 내 짐작이 맞다면 험하기는 하나 지름길이긴 할 터이니 말이다."


깊은 산기슭.

비광은 숨을 죽이고 수풀을 살며시 열어 본다. 저 앞에 오솔길이 있고, 아름드리 나무 아래에 월화가 돗자리를 펴고 앉아 있다. 비광은 그 모습을 보고는 다시 한 번 몸을 웅크린다.

"……"

아까 탁 트인 언덕 위에서 본 바로는, 이제 얼마 안 있어 감찰사가 말을 타고 이 곳을 지나칠 것이다. 비광은 정말이지 여러 모로 마음이 놓였으나, 아직은 알 수 없는 일이다. 일단은 이 기회가 마지막이라고 여겨야 할 것이다.

곧 감찰사가 탄 말의 발굽 소리가 따각거리며 가까워져 온다. 감찰사는 그리 급하게 가고 있지는 않은 모양이다.

"……어르신, 소녀를 기억하시옵니까?"

월화의 천연덕스러운 인사에 감찰사는 멈칫 말을 세운다.

"아… 아니, 그대는 그 무녀가 아닌가? 어떻게 여기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말이냐?"

"…소녀, 말을 타고 달리는 사내를 따라잡는 건 어렵지 않사옵니다. 그보다, 긴(緊)히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신묘한지고…… 그, 그래. 무슨 말을 전하려고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느냐?"

월화는 감찰사가 향하는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저 방향으로 가면 꼼짝없이 횡액을 당하오니, 가시는 길이 염려되어 소녀가 이렇게 급히 나섰사옵니다. 머지않아 어르신과 어르신을 따르는 자들이 위험에 처할 것이옵니다."

"회, 횡액이라? 나는 한양으로 향하는 길이거늘."

"…너무 위험하옵니다. 청하건대, 말을 돌리심이 어떠할지요."

감찰사는 메기 수염을 몇 차례 어루만진다. 비광은 수풀 속에서 조용히 복면(覆面)을 한다.

"……그렇다 해도 안 될 일이로다. 대장부 가는 길에 어려움이 없을 리 없으나, 어찌 그것 때문에 말을 돌리리오?"

"어르신… 죽을 살(殺) 자에 흉할 흉 자에 사특할 사 자가 한꺼번에 모였으니, 이는 참으로 걱정스러운 점괘(占卦)이옵니다. 굳이 오늘만 날인 것도 아니지 않사옵니까? 오늘은 돌아가시고 다음을 기약(期約)하시지요."

"허, 허어……"

감찰사가 머뭇거리며 말을 돌리자, 비로소 감찰사의 반대편 허리춤에 매달린 탈이 비광의 시야에 드러난다. 때를 놓치지 않고 월화가 비광을 향해 얼른 눈짓한다. 삿갓에 복면까지 한 비광이 수풀에서 확 달려든다. 탈을 확 붙잡으니 탈이 허리춤에서 뜯기면서 감찰사의 도포 자락까지 함께 찢는다.

"좋은 탈이로구나. 이 몸이 감사히 가져가마! 에잇!"

"뭐, 뭐냐! 아… 아니 저…!"

비광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황급히 수풀에 몸을 던져, 말을 묶었던 곳으로 달려간다. 감찰사는 워낙 일순간의 일이라 어리둥절하여 비광이 사라진 쪽만 보고 있다. 월화가 조용히 말한다.

"이 동리에는 유난히 좀도둑들이 많은가 보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니, 소녀는 실로 염려되옵니다."

감찰사의 곁에 함께 말을 타고 있던 부하 하나가 묻는다.

"나리, 저 자를 쫓으리이까?"

"……됐다. 내 무슨 일로 마음이 그리 동하여 한양에까지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는지 모르겠구나. 그저 흔한 왜인들의 탈일 뿐인 것을… 어서 돌아가자. 지금 연이은 사고로 인해 민심이 소란해 있느니라."

"……한양으로도 아예 안 가시옵니까?"

"그래, 탈 이야기는 말고, 그냥 죽음이 연잇고 있다고만 보고하면 될 것 같구나. 어서 채비하라. 해가 지기 전에 돌아가자꾸나."

"…알겠사옵니다."

먼발치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비광은 기쁘게 미소지으며 말을 묶었던 줄을 푼다. 월화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그 사건이라 하시면, 저와 동행하였던 지관께서 방금 해결하셨사옵니다. 이제 더 이상의 죽음은 없을 것이라 하셨으니, 어르신께서도 이제는 안심하셔도 될 것 같사옵니다."

"오오, 정말이냐? 그것 참 다행스러운 일이로다. 혹시 그 지관을 다시 만나게 되거든, 언제 기회가 되면 그대와 함께 충청감영에 들렀다 가라고 전하거라. 내 성대히 대접할 것이니."

"망극(罔極)하옵니다."

"그런데 아까 저 자는… 그 지관과도 비슷하게 생기지 않았더냐?"

잠깐 침묵이 이어진다. 비광이 멈칫하는데, 월화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약간 달라 보였사옵니다. 그 자가 좀 더 기개가 있어 보이고, 어깨가 듬직해 보이지 않았사옵니까?"


비광과 월화는 함께 말을 타고 역참으로 천천히 돌아간다.

"…지금 생각해도 오라버니, 정말 잘 하셨사옵니다.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사옵니다. 우리가 그 탈을 되찾은 것이 맞는지…"

"하하, 이 탈 말이냐. 여기 이렇게 있다. 감찰사 어르신께서 무사해서 다행이구나. 그나저나 이제는 각별히 입조심을 하여야 할 것이야."

"명심하겠사옵니다. 이렇게 위험할진대, 곧바로 한양으로 가는 것이 낫지 않겠사옵니까?"

"물론 그럴 수도 있겠으나… 말 도둑놈이 말 도둑질을 했으면 용서를 빌어야지. 안 그렇겠느냐? 어허, 딱한지고. 종사를 구했더니 도둑놈, 도둑년이 되어 도로 감영으로 끌려가게 생겼구나."

"…정 그러하시면, 역참에서 조금 떨어진 산기슭에다 밤중에 몰래 말을 묶어두는 게 어떻겠사옵니까?"

"아… 그렇게 해야겠구나. 저 서산 너머로 마침 해도 저물어 가는데, 역참까지는 몇 리 남지 않았으니, 이쯤에다가 말을 묶어두기로 하자꾸나."

"예, 오라버니. 저녁식사는 아까 지나쳤던 그 주막이 어떻겠사옵니까?"

"그거 좋은 생각이구나. 그럼 우리가 묵을 방은……"

그러자 월화가 쿡 웃으며 말한다.

"이 놈의 탈이 오라버니의 허리춤을 따라다니는 한, 자중자애(自重自愛)하심이 어떠할지요?"




패란(悖亂) 병술(丙戌) 제(第) 일호(一號)

상(詳) 서열(序列)이 높은 이를 미혹(迷惑)하여 살해(殺害)하는 탈
당(當) 감찰관(監察官) 비사대부(批士大夫) 무영(無影)
결(結) 감찰부(監察部) 소속(所屬) 비광(朏光)에 의해 회수(回收)
현(現) 비록(秘錄)에 기록 후 금제소(禁制所)에 금제(禁制)

선비가 말한다.

이 이물은 충주(忠州) 탄금대(彈琴臺)에서 발견된 왜인(倭人)들의 탈로, 가까운 근처에 있는 사람이 타인을 높이거나 스스로를 높이는 말을 하면 그 대상이 되는 자의 정신(精神)을 현혹(眩惑)하여 직접 탈을 갖도록 하는 힘을 지녔다. 이후 탈을 지닌 자가 다시 자긍(自矜)하는 말을 하거나, 혼자 떨어져 있을 경우 스스로 부유(浮遊)하여 그 자의 낯을 훼손(毁損)하는 방식으로 살해한다. 이때 목격자(目擊者)는 자신이 본 바를 전혀 기억치 못하며 자기 스스로 합당(合當)하다고 여겨지는 다른 기억을 강변(强辯)케 된다. 회수 이후 금제의 법(法)이 금제대전(禁制大典)에 기록되었다.

이 이물이 금제된 금제소에서 추존(推尊)이나 자부(自負)하는 언행(言行)을 하는 것은 가(可)하며 금제를 깨뜨리지 않으나, 그 언행을 한 자는 기이행미행(其已行未行)을 불문(不問)하고 한 명 이상의 령(領)의 참관(參觀) 하(下) 엄히 다스릴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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