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로는 계속된다 어디까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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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로는 계속된다 어디까지나

2022년 3월 9일

제145K기지 격리동


오전 일곱 시.

대부분의 재단 인원이 이때쯤 일어난다. 그거야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재단 인원들에게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은 무척이나 기대되는 소양이였고 고위 인원일수록 더 그랬다. 이사관들과 이사관보들, 부서장들은 잠을 자지 않는다고들 했다. 마치 뇌 절반은 항상 깨어 있다는 돌고래마냥. 정반대로 인원 아닌 인원들은 일곱 시에도 잠을 잘 수 있는 일종의 권한을 가지고 있기는 했다. D계급처럼. 실험을 꼭두새벽에 할 일은 없으니 D계급 기상 시간은 대강 오전 여덟 시 정도였다.

또 다른 인원은, 그러니까, 격리하의 개체들이였다. 재단이야 격리 중인 인간형 개체가 얌전히 있는 것을 원할테니 당연한 일이였다. 그리고 인원과 변칙 개체의 중간에 놓인 인물도. 이들은 재단이 구금해놓은 요주의 인물들이였다. 이들 중 아주 일부만이, 아주 정밀하고 특수 목적으로만 재단 활동에 참여했다.

특수 격리 절차: SCP-279-KO는 제145K기지 내 비물질 변위 중성화기(nPDN) 3기가 설비된 격리실 내에 격리하는 것이 예정된 절차이다. 제24K기지 산하 감시인력들이 SCP-279-KO가 인터넷에 끼치는 영향력을 조사하고 은폐하는 역할을 맡는다. PoI-3590 이외에 SCP-279-KO와 접촉한 민간인은 심문하며 그 기록은 삭제한다. SCP-279-KO의 담당 인원은 E계급 지정된 재단 인원, 박경수(PoI-3590)가 담당한다. 해당 인원의 역할은 면담을 통해 다음과 같은 정보를 알아내는 것이다.

  • SCP-279-KO의 생전 상세 특성 및 신상 조사.
  • SCP-279-KO와 연관된 것으로 보이는 요주의 단체 정보 습득.
  • SCP-279-KO와 흡사한, 심령 독립체의 행동양태 데이터 조사를 위한 정보 기록.

박경수는 오전 일곱 시 정각에 깨어났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일련의 버릇이였다. 나름 재단에 채용된 인물이긴 하기에 기지를 극히 일부나마 돌아다닐 수 있는 그는, 제145K기지의 몇 안 되는 미성년자였다. 몇몇 인원들은 비변칙 인간이지만 기지 밖으로 나가지 않는 그에게 연민을 느꼈다. 다른 이들은 그냥 박경수를 기지에 있는 수십의 변칙 개체처럼 대했다. 글쎄, 박경수 본인은 이를 신경쓰지 않았다. 재단과 접촉하기 이전부터 기형적으로 소외된 그의 인간관계 때문에 바깥 세상에 대한 그리움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소년은 일어나 이를 닦고 숙소 밖으로 나섰다. 기지는 항상 똑같았고, 그게 최선이였다. 재단 시설에서 미시적 변혁은 어떤 격리 파기나 그런 비슷한 재앙의 상징이였으니까. 그는 표준형 슬리퍼를 끌면서 지정된 기지 휴게실에 도달했다. 휴게실은 인원 등급에 맞추어 구분되어 있다.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하기 위해서이다. 박경수의 자리는 가장 하위 직원들을 위해 예비된 곳이였다. 물론 휴게실의 질에 있어 차이가 있기는 했다만 박경수는 한 번도 3등급 인원 휴게실을 궁금해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게. 굳이 따지지 않는 것은 박경수가 그 자리에 갈 일이 없다고 명시적으로 의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였다. 재단에 와서 배운 하나의 삶의 방식이였다.

그는 기지개를 켜고는, 시계를 힐끗 바라보았다. 어쨌거나, 재단 사람들은 바쁜 하루를 지내야 한다. 고작 십대 중후반의 남자애라도 다를 바는 없다. 그에게 맡겨진 일은 극소수 심령독립체에 대한 면담이였는데 사실상 면담이라기보다는 말동무가 되어주면서 독립체들의 스트레스를 줄이는 일이였다. 박경수는 대화에 아주 능통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지난 일이 년간 비슷한 일을 하면서 익숙해진 터다. 그는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아, 박경수 관리원."

누군가가 그를 부르는 소리에, 박경수는 막 걸음을 멈췄다. 그를 불러세운 사람은 한 여자였다. 키가 크고 새까만 머리카락을 뒤로 묶어 내렸는데 피로한 인상이 굉장히 명백한 사람. 기지의 심령 연구 인력 중 가장 직급 높고 똑똑한 사람. 민수민 박사였다. 박경수는 미소를 지으면서 목례를 했는데, 민수민 박사는 애당초 인사를 받았다 해서 기뻐할 만한 인원은 아니였기에 괜스레 눈치를 살피지는 않았다.

"안녕하세요."

"별로 안녕하진 못하지만. 지금 일하러 가는 길입니까?"

"예. 이번 주부터는 일정이 좀 변경된다고 해서 빨리 움직이려고요."

민수민은 미소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잠시 짓다가, 주머니에서 커피 한 캔을 건넸다. 그가 부하직원에게 특별히 무엇을 챙겨다 주는 일 자체가 유례없었기 때문에 박경수는 몹시 놀라, 온갖 감사를 표하며 커피를 받았다.

"그럼 수고해요. 격리 절차는 항상 참고하고."

민수민은 이 말을 남기고는 다시 저편으로 걸어갔다. 박경수는 민수민 박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으면서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커피를 받은 것이 별 일은 아니고 그렇다고 박경수가 커피를 굉장히 좋아하지도 않지만 오늘따라 일이 제법 잘 풀릴 것 같았다.





제145K기지 격리동

SCP-279-KO 격리실


"그래서 새로운 일이 생겼다고?"

SCP-279-KO, 박지연, 혹은 A급 심령체는 흐뭇한 표정으로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박지연이야말로 몇 년 동안 박경수가 가장 친밀한 관계를 맺어 온 유령이였으며, 그에게는 누나이자 형이고 때로는 이모나 고모와 같은 역할을 했다.

"네, 누나."

"재단 놈들이 시키는 것 중에 좋은 거 없을 텐데."

박지연은 또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는 부류였는데, 원격으로 인터넷 메세지를 송출하는 능력이 있는 탓에 사실상 재단도 완벽하게 그 송출을 통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기지에서 몇 안 되는 케테르급 독립체로 지정되어 있었고 몇몇 조건을 걸고 자진하여 격리되어 있었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 만나고 하는 게 끝인데요, 뭐."

"방심하지 마. 뭔 일이 있을지 난 모른다?"

걱정스런 말투에 사춘기 남학생다운 자신감이 발동한 박경수는 미소를 지으면서 답해주었다.

"설마요. 그래도 제가 잘 하면 되겠죠."





제145K기지 격리동

SCP-████-KO 격리실


"약간의 정적이 흐르고 난 후, 솜(Somme)에 온지 얼마 안된 한 신병은 저 너머에서 네모난 무언가가 줄지어 다가오고 있다는, 다소 이상한 말을 했다."

유리관 속에서 다리를 꼬고 앉은 남자는 진중한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그 남자는 콧수염을 양쪽으로 길렀는데 키가 크고 제1차 대전 당시의 독일 군복을 입은 채였다. 박경수는 앉아서 정신없이 유령의 말에 빠져들었다. 이 늙은 유령은 진중하고 냉정했지만, 실력 있는 이야기꾼이였으며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으며 희열을 느끼는 듯 보였고, 독일군 치고는 한국어를 굉장히 능숙하게 했다. 박경수가 역사를 그리 좋아하지 않기는 했지만 상대의 이야기 실력은 마치 영화처럼 뛰어났다.

"우리는 그 신병이 하는 소리를 이해하지 못했지. 그런데 곧 우리도 보게 되었다. 그것은 거대하고 견고한 무쇠덩어리였지. 얘야, 그게 무엇인지 알겠나?"

"무쇠덩어리요? 탱크….. 같은 건가요?"

"정말 똑똑하군."

남자는 유의미하게 기쁜 낌새를 보이며 자세를 고쳐앉았다. 으레 할아버지가 손주를 귀여워하는 듯한 모습이였다. 박경수는 내심 자신의 직감을 자랑스러워 하면서 계속 이야기를 들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그것은 탱크였다. 영국군의 탱크였지….. 그 전쟁에서 최초로 나타났다고 한다."

남자는 한때 독일군이였는데, 세계대전 당시 몇 차례의 전쟁을 겪은 후 죽어 귀신이 된 부류였다. 그는 굉장히 특이한 부류였는데, 전사한 망자치고는 원한 때문에 날뛰거나 미쳐버리지 않았으며 더구나 고향과는 이역만리 떨어진 대한민국에서 붙잡혔다. 성격도 특이해서 딱히 자신이 죽은 이유를 밝히는 데도 개의치 않았고 박경수를 늦둥이처럼 좋아했다. 낯선 이들이 가득한 유령 격리동에서 박경수가 SCP-279-KO 이외에 친하다고 생각하는, 몇 안 되는 사람이였다.

"오늘 이야기는 재밌었나?"

"예. 덕분에 역사 공부도 하네요."

"역사라….. 내 인생이 벌써 역사가 되는구나."

남자는 한숨을 푹 내쉬었지만 이내 다시 유쾌한 얼굴이 되었다.

"다음에 오면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준비해 놓으마. 아, 참. 다른 유령들을 만나러 간다고 했나?"

"예, 오늘 처음 만나는 유령도 있을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 말에 남자는 무언가를 고심하는 듯, 턱을 손에 괴더니 묘한 한 마디를 내뱉었다.

"항상 조심하게. 유령 중에선 못 믿을 이들도 많다."





제145K기지 격리동

E-35466 격리실


박경수는 의자에 앉았다. 여느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격리실이 눈앞에 있기는 하였으나, 이번에 조우하는 유령은 처음 만나보는 존재였다. 제아무리 선임들이 잘 정리해둔 격리 절차와 메뉴얼이 있기는 하지만, 박경수는 격리와 연구의 입장이 아니라 인간을 대하는, 최소한 인간처럼 대하는 것으로 보이는 행동을 해야 하는 사람이였다. 그는 메뉴얼을 집어 들고 다시 눈으로 읽었다.

E-35466

대략 외관상 8세~12세 가량의 남성 아동 형태의 심령 독립체. 지적 능력과 물리 능력이 모두 존재하며 벽 등의 구조를 투과하여 움직일 수 있다. 확보 당시 시행된 버닝 다운 더 하우스 작전에서는 상당한 적대성을 보였으나 격리 상태에서는 협조적이며 몇몇 연구 인원을 가족처럼 대하는 행동을 자주 보인다.

격리 절차 메뉴얼:

  • 위압적 행동은 되도록 금할 것. 확보 이전 이러한 변칙 행동에 반복적으로 노출됨.
  • 본 독립체를 담당하는 유아심리학 전문 인원이 있으므로, 귀하는 교육의 영역보다는 청소년기 남성으로서 적절한 친목성 대화만 수행하도록 함.

박경수는 흠, 하며 짧은 한숨을 쉬었다. 가족이라, 본인 또한 가족애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라곤 무관심과 아쉬움의 영역 뿐인지라 상대와 잘 대화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그때, 그의 앞 격리실을 이룬 유리벽 너머에 희미한 형체가 드러났다. 그보다 훨씬 키가 작고 왜소한 아이의 형상이다. 아이는 몸을 웅크린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늘 자신을 이 기지에서 어린 편이라 생각했는데, 기분이 묘해진 그는 헛기침을 하고는 무슨 말을 꺼내야 하나 곰곰히 고민했다. 그러나 정작 먼저 말을 꺼낸 쪽은 상대였다.

"형은 누구에요?"

다행히도 예상했던 질문인지라 박경수는 미소지은 채 편안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응, 새로 온 선생님이야."

그 질문에 대한 예상 답안이 실제로 훌륭했던지 어떤지는 뒤로하고, 박경수는 자신의 자기소개에 만족하는 중이였다. 눈 앞의 아이가 영 딴판의 이야기를 하기 전까지는.

"선생님인데 왜 어려요? 다른 사람들은 다 나이 많은데."

박경수의 존재부터 재단의 미성년자 고용까지 폭넓은 의심을 던지는 그 질문에, 그는 뭐라 대답할 바를 찾지 못하고 잠시 침묵했다. 그 반응이 웃겼던지 유령은 깔깔깔 웃어 댔다. 그 또래 어린애다운 모습이였다. 박경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볼 뿐이였다. 재단에 오게 된 후로 손에 꼽히도록 힘이 빠졌다.

"선생님, 선생님도 유령이에요?"

"아, 아니. 나는 살아 있는 사람."

그는 겨우 목소리를 가다듬고서 다시 침착함을 유지했다. 그 대답에도 아이는 뭐가 그리 우스운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선생님은 학교 다녀요?"

"아니, 난 여기서 일해."

"그럼 선생님도 죽어서 유령 되면 안 돼요?"

박경수는 그 순간 질겁해 얼어붙었다. 물론 어떤 원귀의 사악한 저주술보다는 꼬마가 별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긴 하지만 살아 있는 박경수에게는 확실히 섬칫한 소리였다. 그는 두근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면서 애써 대꾸했다.

"그….. 난 아직 살 날이 많이 남아서."

"아아, 알겠어요. 그럼 나중에 기다릴게요."

아이는 대답이 영 마음에 안 들었는지 토라져 버렸지만, 박경수는 자신이 말을 오해했다는 생각에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적어도 자신을 죽이려는 원귀는 아니지 않는가. 박경수는 다시 몸을 숙이고 유령과 눈을 맞췄다. 아이의 눈은 흐릿했지만 또래와 같은 호기심이 서려 있었다.

"선생님, 선생님은 무슨 빵 좋아해요?"

그러나 그 아이의 토라짐이란, 천성의 쾌활한 기질에 비길 수 없었다. 박경수는 다시 주제가 일상적인 것으로 돌아온 것에 안심했다.

"응? 난 식빵 좋아하는데, 왜?"

"저는 슈크림빵 좋아해요. 지금은 그런데 못 먹어요."

"안됐네."

"선생님, 선생님은 윤설아 누나 본 적 있어요?"

"윤설아 요원님? 왜?"

"그 누나 가끔 놀러 와요. 착해요. 선생님처럼요."

두 남자아이의 말은 한 차례 속도가 붙자 끝날 줄 모르고 이어졌다. 이 대화는 한참 이어지며 지정된 면담 시간을 초과하다가 때마침 감독을 위해 격리동을 찾은 기동특무부대 을호-2 요원, 방금 대화의 주인공 윤설아에 의해 친절하게도 중단되며 아쉽게 끝을 맺었다.





제145K기지 격리동

E-119190 격리실


"나는 끔찍한 전쟁에서 되살아난 귀신이다. 지금 당장 이 문을 열어 내 복수의 천 길 불꽃을 다시 점화시키지 않는다면 너 같은 애송이는 갈기갈기 찢어서—"

박경수는 자신에게 대고 고래고래 쉰 목소리를 지르는 노인을 한 번, 손에 쥔 매뉴얼을 한 번씩 보았다. 노인의 사지는 으레 공포영화의 귀신들처럼 꺾이고, 인체의 비율은 찌그러졌으며 두 눈은 공허한 상처로 돌변했다. 박경수는 그대로 매뉴얼대로 행했다. 격리시설의 음압 장치가 순식간에 작동되면서 공기가 흘렀고, 귀신은 바람의 방향의 제멋대로인 움직임에 당해 순식간에 저편으로 나동그라졌다. 그는 고함을 지르며 욕을 쏟아내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박경수는 조심히 일어났다. 누군가의 원한을 이해하는 것은 지독하기 어려운 일인지라 어쩔 수 없다고는 해도 기분이 씁쓸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걸음을 옮기면서 다음 번에는 그 노인이 더 진정한 상태이기를 바랐다.





제145K기지 격리동

SCP-████ 격리실


"경수 오빠다. 안녕! 오빠!"

그가 의자에 앉기도 전에 요란한 인사 소리가 그를 맞았다. 하얀 저고리와 새까만 치마를 입은 소녀가 방긋방긋 웃으면서 박경수를 바라보았다. 으레 자신보다 더 외향적이고 들떠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와 같이 그는 벌써부터 기가 빨리는 기분이 들었다.

"안녕, SCP-████."

"아,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했잖아."

"그래. 안녕, 명애야."

"나도 반갑다, 오빠. 그동안 뭐하고 지냈어?"

박경수는 재잘재잘 떠드는 소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있던 적도 없는 여동생을 보는 기분이기는 했다. 다만 아마도 SCP-████— 즉 김명애는 1920년생이라, 실제로는 박경수에게 할머니나 증조할머니뻘이라는 것이 참으로 묘한 점이였지만. 그래도 적대적인 유령은 아닌지라 박경수가 소녀를 대할 적의 부담은 이 정도의 묘한 기분이 다였다.

"나야 뭐, 항상 똑같지. 너는? 뭐 다른 일 있어?"

"나? 나도 다를 건 없는데."

소녀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내내 생글생글 웃었다. 어쨌든 피곤하기는 해도 박경수 또한 이 소녀와 이야기할 때는 기분이 꽤나 좋아지고는 하는 법이였다. 적어도 오늘처럼 처음 만난 유령들과 대화를 시작하는 것보다는 훨씬 좋은 일이였다.

"아 맞다, 그 예전에 내가 해 줬던 이야기 기억나?"

"음….. 그 경찰 이야기?"

"응. 오빠 기억력 좋구나. 아니면 내가 나쁜 건가?"

소녀는 피식 웃으면서 물질 상태조차 아닌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그리고는 높은 목소리로 수다를 떨기 시작했고 박경수 또한 귀를 기울였다.

"내가 응, 70년 쯤에 마산에 있었단 말이야. 그런데 거기서 귀신 잡는 경찰…… 중정 10국이라고 부르던데, 아무튼 그래서—"

"그 경찰이 잡으러 오는 데까지 했어."

"내 정신 좀 봐. 그래서 막 날 잡으러 오길래 골목 벽을 넘나들면서 뛰었지. 그런데도 막 부적이나 그런 걸 던지면서 쫓아오길래 더는 못 뛰겠다 싶어서 폐가 장롱 속에 숨었단 말야."

"그래서?"

박경수는 희한한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즐거움에 빠져들고는 했다. 비록 이런 경우는 대부분 못 알아먹을 만한 이야기였고 때로는 무엇을 들었는지 기억이 사라져버리는 일도 있기는 했지만, 이런 이야기는 판타지 소설처럼 즐거운 것이였다.

"그래서 숨어 있었단 말이야. 그런데도 그 놈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거든? 이제 어쩐다 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 남자가 문을 열더니 뭐에 얻어맞고 쓰러지는 거야."

"맞아? 뭐에?"

"나도 뭐지, 하고 내다보니까 그 남자는 쓰러져 있고, 키가 나보다 좀 크고 교복을 입은 애가 살벌하게 쏘아보고 있는 거야. 그래서 순간 놀라서 심장 멎는 줄 알았단 말야, 그때도 심장은 없었지만."

소녀는 고개를 좌우로 갸웃거렸다.

"그래서 누구세요 하고 물어봤지. 그러더니 그…. 무슨 클럽에서 나온 성재라 하더라고. 자기도 그 중정인가 어디서 탈출한 몸이라고, 그 클럽에 따라가자는 거야. 무슨 싸구려 카바레 같은 이름이라서 예의 바르게 거절하고 나왔지."

"잘했어. 낯선 사람 따라가면 안 돼."

박경수는 몇십 살은 더 나이 많은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대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싶기는 했지만 곧 본인이 좋아하니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또다시 내리고는 이어지는 말을 들었다. 그러다 보니 또 다른 의문점이 생겨났다. 거대한 연구 기관인 재단에게 과연 박경수의 보잘것없는 수다가 도움이 될 것인지 의심이 들었던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대화에 가치 있는 정보는 없는데. 다만 즐거울 뿐.


SCP-████ 격리 보조관 채록: 새로운 특기사항 일람

해당 독립체가 면담 도중 발설한 "성재"라는 인물이 요주의 단체 심야클럽 (GoI-893)의 실세로 추정되는 인물인 윤성재 (PoI-004-KO)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었음. 해당 독립체가 언급한 시점이 1970년대 경 제4공화국 시절으로 추정되며, 이 언급이 사실이라면 PoI-004-KO와 당대 국가 초상기관 중앙정보부 10국과의 연관성이 의심됨.

영향력이 큰 요주의 인물에 대한 정보 조사는 가치가 있음. 추가적 조사 실행 바람.





제145K기지 휴게실


저녁이 어두워질 무렵이 다 되어서야 그는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비록 어떠한 대단한 노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를 만나고 또 대화하는 일은 생각보다 굉장히 힘든 것이였다. 박경수는 이마에 한 방울 난 땀을 손등으로 닦았다. 차가웠다. 마치 응결되어 버린 수증기처럼.

그래도 잘 해냈다고 생각은 했다. 처음 만난 이들이든 만나 보았던 이들이든 간에 이토록 대화를 한다는 것 자체가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몸에서 긴장이 풀어지면서 쇼파의 감촉이 근육으로 흘러들었다. 목이 마르기는 했다만 정신적인 지침 내지 귀찮음 때문에 일어서기조차도 귀찮은 상황이였다.

그때, 삐익— 하고 날카로운 경고성이 순간 복도를 울렸다. 불길한 소음이였다. 기지는 항상 똑같았고, 그게 최선이다. 재단 시설에서 미시적 변혁은 어떤 격리 파기나 그런 비슷한 재앙의 상징이였으니까. 그러니까 그 경고성이란, 임박한 어떤 공포의 상징이였다. 박경수의 투쟁-도피 반응이 강하게 작용했고 몸의 근육 하나하나가 움직였다.

그리고 호출기가 노란색 빛을 토했다.

기지 긴급대응반 공지

기지 내에서 격리 중인 현실조정자에 의해 발생한 일시적 현실 조정 사태로 인하여, 기지 내 몇몇 독립체가 격리를 파기했습니다. 기지 인원들은 기지 경비와 긴급대응반의 지령이 내려올 때까지 안전 구역으로 이동한 후 대기하십시오.

기지 휴게실은 안전지대가 아니다. 문은 기본 수준으로만 견고하고, 진노한 기적술사의 화염 마법이나 유령의 움직임으로부터 그를 지켜줄 수가 없는 노릇이다. 박경수는 조심스레 일어나며 긴급 상황을 되짚어보았다. 휴게실은 일단 지상 2층, 변칙 개체 격리실은 죄다 지하다. 설마 경비 인력과 기특대 인원들을 뚫고 무엇이 이곳까지 왔을 리는 없다.

"경수야."

거기까지 미친 생각은 누군가가 벽 쪽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는 단순한 상황만으로도 깨졌다. 박경수는 질겁해 새된 비명을 지르면서 뒷걸음치려다, 그 목소리의 주인이 익숙함을 깨닫고는 겨우 미소를 지었다. 흐릿한 형상의, 갈색 머리를 한 키 큰 여자. SCP-279-KO였다.

"누나! 누나가 왜 여기까지 왔어?"

"쉿."

여자는 검지손가락을 그의 입술 위에 올렸다.

"그 영감이 탈출했어."

"무슨….. 설마 그 사람?"

E-119190. 박경수를 찢어죽이겠다며 고래고래 날뛰던 그 유령 노인. SCP-279-KO는 유례없이 진중한 눈길로 사방을 훑어보았다.

"그놈이 얼굴을 본 인간은 아마 너 뿐일거야. 널 쫓고 있을 거고. 기동특무부대가 오기 전에도 아마 그 놈은 벽을 거스르고 천장을 기어다니며 널 쫓아올 거야. 그래서 내가 왔지."

언젠가 들은 바가 있었고, 언제나 명심하고 있는 바가 있다. 유령이 원한과 감정으로 미쳐버리면 살인귀가 된다. 상대가 자기의 죽음과 관련이 있든 없든, 그 상대의 몸을 빼앗거나 갈기갈기 찢어 죽여버리기를 바랄 것이다. 그 영감도 똑같을 것이다. 어떤 전쟁에서 어떻게 죽었는지는 기억 못 하고 울분과 적개심만 남게 된, 인간의 굴레에서 굴러떨어진 존재가 된다. 박경수의 척추 어귀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불행히도 SCP-279-KO는 유령으로서 같은 유령을 해할 수도 제압할 수도 없는 부류다.

"막 와도 괜찮아요?"

"감방 문 간수 못 한 사람이 잘못이지."

여자는 웃었지만 그 눈빛에는 칠흑 같은 의지가 담겨 있었다. 보호를 위한 폭력을 당장이라도 자행할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마치 몇 년 전처럼, SCP-279-KO는 하나의 악귀가 되려는 듯한 의지에 사무친 듯 보였다.

"하지만 제 위치를 어떻게 알겠어요?"

"감이지. 유령들이란 다 그렇단 말야. 두 번 죽을 때까지 과거를 좇는다고."

SCP-279-KO는 말을 마치지마자 날선 눈으로 문 바깥을 바라보았다. 무엇이 있나 해서 내다본 박경수도 그 실체를 확인하는 데에 무리가 없을 정도로 상대는 가까웠다. 야성적인 발자국이 커지고 숨소리가 가까워지며, 곧 복도 길모퉁이로부터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눈은 까뒤집어지고 입은 산송장처럼 벌린 채 그는 어색한 자세를 취하며 다가왔다. 남자가 걸친 D계급 특유의 주황색 점프슈트가 얼룩진 채로 나부꼈다. 빙의. 무엇에 씌인 것이 명명백백했다. 남자는 기형적으로까지 들리는 목소리로 단어를 툭툭 내뱉었다.

"……까마귀와 신은 하나이며 같은 존재인데, 우리 마음에 그 날개를 쉬었다. 내 사랑들, 우리 신이 당신들을 기다리신다."

남자는 중언부언하며 미친 사람처럼 다가왔다. 걸음걸이는 꼭 공포영화에나 나오는 좀비를 닮아 박경수는 순간 겁에 여자의 뒤로 숨었다. 인간의 육체에 파고드는 것은 유령에게 굉장히 유리하다. 감각과 움직임, 물리능력의 존재와 같은 것은 공격적인 독재자에게 미사일을 쥐어주는 격이니까. 하지만 감각이란 것은 그리고 물리능력이라는 것은 때로는 하찮은 것이다. 특히 상대가 다른 강력한 유령이라면야.

순간, 보이지 않는 힘에 남자가 나동그라졌다. 그리고 온갖 잡동사니들이 날아와 남자에게 연발 세례를 베풀었다. 남자는 곧 말을 멈추며 쓰러졌고 SCP-279-KO는 손을 털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인간의 육체인 이상 이런 부류의 공격은 막아낼 수 없다. 여자는 생각보다 간단했다고 생각하다가, 무언가를 깨닫고는 얼어붙었다. 탈주한 노인은 분노에 찬 부류다. 종교적 신념이 아니라. 그리고 거꾸러진 남자의 입가엔 웃음이 걸렸다. 그렇다는 것은,

여자는 신속히 뒤를 돌아보았다. 소년이 천천히, 뒤틀린 자세로 일어나고 있다.

"탈주자는 두 명이였어."

소년의 얼굴에 뒤틀린 분노가 커져 갔다. SCP-279-KO는 공중으로 부상했다. 최악의 결과다. 진짜 적은 뒤로 나타난 것이다. 공중에서 잡동사니들이 일제히 날아올라 소년을 겨냥하고 쏘아졌지만, 그가 손을 흔들자 순식간에 다시 추락하고 말았다. 그의 눈에서 일그러진 힘이 폭발적인 생명력으로 빛났다.

"드디어 그 전쟁의 기억에서 해방되었도다. 새 몸을 얻어서 말이지."

그가 쉰 목소리로 키득거렸다.

"이 애새끼는 죽이고 싶을 정도로 밉지만…… 우선 그건 재단이란 놈을 죄 죽이고 나서다. 너는 구경이나 해 둬라. 꼬마 숙녀."

그 말을 남긴 남자가 순간 바람처럼 뛰쳐나갔다. 유령은 물질을 통과한다. 그래서 SCP-279-KO가 문 앞에서 버티고 섰음에도 그는 가볍게 문 밖으로 뛰쳐나갈 수 있었다. 더구나 소년은 야수처럼 빨랐다. 귀신 들린 자는 힘이 세다고들 하는데 그 꼴이였다. 이대로 가다건 박경수의 손으로 사람 한 둘쯤은 죽이고도 남으리라. 여자는 공중으로 날아올라, 공기를 가속하며 그를 쫓았다. 하지만 헛수고나 다름없었다. 소년은 염동능력과 속도에서 모두 우위에 있었다. 게다가 지치지도 않았다.

"내가 그 참상에서 돌아왔다! 이제 미래는 내가 만들 것이다—!"

그는 그렇게 소리지르며 내달려, 막 계단에까지 다다랐다.

그리고 넘어졌다.

"뭐야!"

그는 몸을 털며 다시 일어나려다가, 경악하여 뒤로 물러섰다. 그의 앞에는 서양인이 서 있었다. 키가 크고 훤칠하며 콧수염을 양쪽으로 길렀는데, 제1차 대전 당시의 독일 군복을 입은 채였다. 난데없는 제3자의 등장에 소년, 아니 노인 유령은 순간 당황했다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양이(攘夷)? 게다가 유령이라. 어이없구나!"

"댁도 군인이었나?"

독일군 망령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거 어느 전쟁인지는 모르겠다만 꼴이 우습군. 마구잡이로 남을 해하고 자기 아픔을 공감해주기를 바라지?"

순간 그의 손에서 공간이 휘더니, 엑토플라즘이 꿈틀대면서 장총의 형상을 갖추었다.

"감옥 안에서야 안 되지만 여기서는 간만에 싸울 수 있을 법 하군."

그리고는 날카로운 돌개바람이 상대의 뺨을 스쳤다. 요지부동. 제아무리 노인의 염동능력이라 해도 바람을 막아낼 수 없었다. 뺨에 얕은 상처가 새겨졌다. 독일군 사내는 상대의 공포를 느끼고 미소하던 와중 SCP-279-KO가 빽 고함을 지르자 정신을 차렸다.

"아저씨! 경수 뺨에 생채기 났잖아!"

"아, 아차."

"이러다가 바람구멍도 내겠어?"

영혼은 노인이나 몸은 유령들이 알고 있는 박경수 그 자체가 확실한 터라 장총을 집어 든 사내 또한 자신의 전략 오류를 깨닫고 당황에 빠졌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적은 달려들어 독일군의 형체를 통과해버린 후 달려나갔다. 일단 도주하기는 했으나 노인으로서도 버거웠다. 수 년을 격리실에서 고작 음압의 폭풍이나 전기 자극 따위와 씨름하던 노인은 일단 짜증나는 남자애 하나를 붙잡았는데, 대체 왜 저런 강력한 귀신의 가호를 받는지도 알 수 없었다. 혼란스러움은 그럼에도 해묵은 증오에게 뒤덮이고 말았으니 그는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을 쫓아 달려나갔다. 그러느라 뒤에서 들려오는 두 유령의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총 말고 다른 건 없어?"

"어….. 일단 애들 데려오기는 했는데."

"아니, 혼자 온 것도 아니였어? 그러고 보니 대체 어떻게 온 거야?"

이런 말이 이어진 후, 이들을 뒤로하고 계단을 내달리던 남자가 무언가에 걸려 넘어졌다. 커억, 하고 신음을 내뱉은 그는 몇 차례를 더 구르고서야 멈춰섰다. 뒤를 보니 가느다란 실이 난간과 난간 사이를 팽팽하게 잇고 있었다. 누군가가 묶어 둔 것이 뻔해 보였다. 그는 처절하게 몸을 일으키며 고함을 질렀다.

"이번엔 또 어디서 굴러먹다 온 놈이야!"

난간 아래에서, 여덟 살 즈음의 어린 남자아이가 기어 올라왔다. 남자는 어이 없이 웃었지만, 정작 그 아이는 중세의 기사들처럼 결연한 표정이였다. 아이는 다시금 두 발로 서서 그를 노려보았다.

"선생님 몸 돌려주세요."

"뭐?"

"돌려줘요! 안 그러면 싸울 거에요."

아이의 오른손 약지에 새하얀 실이 묶인 채 하늘거렸다. 순간 남자는 알아챘다. 어느 문화권이든 아이 유령, 요절한 순진무구한 악의는 유령 중에서도 두려운 존재라고들 했다. 더구나, 이번 사실은 남자도 몰랐겠다만은, 아이는 제145K기지에 붙잡힐 때까지는 한동안 매우 강력한 악귀의 소유물이였는데다가 그 영력이 몸에 배여 있었다. 싸울 거에요, 하는 아이의 여윈 형상으로부터 냉기가 치솟아 올랐다. 남자는 자연스레 뒤로 물러났다. 퇴로가 막힌 상황.

"그러면 어쩔 테냐, 이 어린 것아."

그러나 상대는 가장 중요한 인질을 붙잡은 채였다. 박경수 속의 노인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이 육신을 죽일 순 없으며, 죽인다 하면 상대도 악령이 될 뿐이다. 여차하면 몸을 버리고 도망치면 끝난다. 그는 거리낌없이 손을 들고 박경수의 육신의 것인 목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힘을 주었다. 그리고는 다시 놓아버린다.

"어?"

남자의 손이 순간 제어를 잃고 펴졌다. 그리고 그 강렬한 통제불능은 오른손에서 팔, 어깨, 가슴을 집어삼키고는 의식의 선에 손을 뻗었다. 노인의 정신이 휘청하나 싶더니, 엑토플라즘으로 된 유령 노인이 그의 몸에서 굴러떨어져 버렸다. 그는 어이없는 상황에 멍하니 박경수를 올려다보았다. 박경수의 눈빛이 그를 싸늘하게 내려다보나 싶더니 이내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천진한 소녀와 같은 미소.

"잡았다."

박경수가 웃음을 터뜨렸다.

"경수 오빠 시선은 이런 느낌이구나? 나보다 키 크네, 확실히. 아저씨! 언니! 이 미친 놈 잡았어!"

SCP-279-KO는 다른 인물들의 난데없는 등장에 뭐라 쏘아붙여 주려다가 그저 오랜만에 웃고 말았다. 이 인간들은 훗날 재단이 할 일은 생각하지 않는가 싶은 마음이 반, 대체 격리 파기가 얼마나 장엄한 것이였기에 이렇게 많이들 튀어나왔는지 의심이 반이였다. 어쨌거나 박경수의 몸에서 기생충은 뽑아냈고 남은 것은 수습 뿐이였다. 그 범인은 전혀 물러서고 싶지 않은 듯 했지만.

"이 너저분한 잡귀들이! 감히….. 그래 봐야 밑으로 내려가 생자들을 더 잡아내면 그만—"

악을 쓰던 노인은, 발사된 사인철 총탄이 제 머리를 궤뚫어 소멸시켜버리자 겨우 그 말을 끝맺었다. 흩어져버리는 연기 새로 정장을 입은 여자가 조용히 나타났다. 기동특무부대 을호-2, 귀신 잡는 부대의 요원 윤설아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설아 누나다!"

남자아이야 천진하게 소리쳤지만 나머지는 죄다 얼어붙은 상태였다. 사인탄환은 유령을 죽인다. 게다가 상대는 재단. 일촉측발의 상황인지라 긴장감이 맴돌았다. 윤설아 요원의 표정도 어이가 없다는 느낌에 가까웠지 당장 모두를 썰어버리겠다는 느낌은 아니였다.

"……저."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윤설아였다.

"당장 격리실로 돌아가주시겠습니까? 그…… 불복 시 적대적 반응으로 판단, 즉결 대응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다행힌지 불행인지 총 대신 권유였다. 다른 심령독립체들이야 모두 재단과 격리의 상관관계에 대해 뻔히 알았고 더 바깥에 있으면 좋을 것도 없었다. 아이는 더 놀고 싶다며 울상을 짓기는 했지만 워낙 박경수나 윤설아에게 호감이 깊은지라 더 이상 마음에 상처받는 일 없이 돌아갔고, 박경수의 몸을 차지했던 김명애는 그대로 격리실에 돌아가려다 지적 세례를 받는 일이 있기는 했다만.

"어, 오빠 왜 안 일어나지? 내가 잘못했나?"

김명애가 쩔쩔댈 만큼 박경수의 상황은 영 좋지 않기는 했다. 몇 분이나마 인간을 초월한 속도로 뛰거나 두 유령에게 동시에 빙의된 탓에 영적 피로도 심한지라 기절해 버린 것이다. 곧 윤설아가 호출한 경비들이 박경수를 업고 의무실로 향했으며 현장에는 윤설아만이 남았다. 요원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별일이네… 그때처럼."





제145K기지 의무실


박경수는 아침이 되어서야 깨어났다. 오전 일곱 시.

대부분의 재단 인원이 이때쯤 일어난다. 그거야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재단 인원들에게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은 무척이나 기대되는 소양이였고 고위 인원일수록 더 그랬다. 이사관들과 이사관보들, 부서장들은 잠을 자지 않는다고들 했다. 마치 뇌 절반은 항상 깨어 있다는 돌고래마냥. 정반대로 인원 아닌 인원들은 일곱 시에도 잠을 잘 수 있는 일종의 권한을 가지고 있기는 했다. D계급처럼. 실험을 꼭두새벽에 할 일은 없으니 D계급 기상 시간은 대강 오전 여덟 시 정도였다. 이러한 기상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박경수의 버릇이였다.

그는 천천히 눈을 뜨다가 옆에 있는 사람을 보고 놀라 몸을 움츠렸다. 어제 아침에야 만났던 민수민 박사. 커피를 줬던 그 3등급짜리 선임 인원이 그의 침상 옆에서 다리를 꼰 채 커피를 홀짝이고 있었다.

"깼군요."

"아, 제가…… 언제 잠들었죠? 분명 격리 파기가……"

"잠든 게 아닙니다."

민수민 박사는 침착하고도 냉정히, 어떠한 교훈도 없는 논문의 의인화 같은 목소리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동안 소년의 표정은 경악과 공포, 묘함과 기쁨과 뿌듯함 새를 날아다녔다. 그 모든 말을 끝낸 박사는 이러한 말을 남겼다.

"어제 격리 파기는, 이것만 말해드리죠. 기지 역사상 최대였습니다. 심령독립체가 4개체 이상 탈주한 일은 유례 없거든요. 하나하나가 모두 강력한 독립체였습니다."

그는 커피를 다시 한 모금 마셨다. 헤이즐넛 향이 강학게 퍼졌다.

"표준 모델의 심령독립체는 이기적이고 맹목적이며 가변적입니다. 하지만 모두 당신을 도왔는데, 이유를 아십니까?"

그리고 민수민은, 박경수에 대한 이전의 정밀조사에 따르면 박경수가 세습무나 영능력자 혹은 사이오닉 능력자 비슷한 것이 아니라는 말도 확실히 내놓았다. 대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모양새다. 박경수는 어지럽고 온 몸의 근육통이 끊어질 듯이 울렁였지만 어느 때보다도 또렷한 기분이 되었다. 가슴이 편안했다.

그는 대답을 하나 했고 민수민은 여느 때처럼 무표정했다만, 어떠한 어긋남은 분명 그들 새에 존재했다.

"그 답을 확신하신다니 뭐, 저야 행동학 이론을 들이밀고 싶지는 않군요. 박경수 요원."

박경수는 딴생각을 하다가 난데없는 호칭 변화에 놀라 눈이 커졌다. 민수민은 마네킹 같은 하지만 어떤 감정이 담긴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인사부에서 종합 평가가 이루어졌습니다. 축하드리죠. 박경수 씨는 이제 1등급 면담 요원입니다."

"정말요?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박사님!"

박경수는 놀라 소리를 쳤다. 보통 때 같았으면 이를 무례로 여기고 자중했겠지만 지금은 그 정도의 이성이 정념을 잡아두지않아도 되었다.

"그럼 내일부터 다시 업무 재개하시면 되겠습니다."

"아뇨. 지금부터 갈게요."

민수민은 미덥잖다는 눈길을 주었다.

"지금 박경수 요원은 부상자이며, 유해한 심령 반응을 검사 중입니다."

"그럼 어쩔 수는 없죠. 하지만 마음 같아선 당장 가고 싶은걸요."

"왜죠?"

박경수는, 맑게 미소했다. 나름 재단에 채용된 인물이긴 하기에 기지를 극히 일부나마 돌아다닐 수 있는 그는, 제145K기지의 몇 안 되는 미성년자였다. 몇몇 인원들은 비변칙 인간이지만 기지 밖으로 나가지 않는 그에게 연민을 느꼈다. 다른 이들은 그냥 박경수를 기지에 있는 수십의 변칙 개체처럼 대했다. 글쎄, 박경수 본인은 이를 신경쓰지 않았다. 재단과 접촉하기 이전부터 기형적으로 소외된 그의 인간관계 때문에 바깥 세상에 대한 그리움이 없어져 버린 것이라고 한때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 이유를 당당히 역설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게 사람이 산다는 거니까요. 어디까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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