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돌렸나?"
"예.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럼 좀 쉬다가 이동하지."
나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바닥의 뾰족한 돌이 바지를 찌른다거나 흙이 묻는다거나 하는 걱정은 생각나지도 않았다.
어디서 정보가 새었는지.
내 머릿속을 가득 매운 생각이었다.
내부에 스파이가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애초에 우리 조직은 스파이가 생길 정도로 위협적인 조직도, 그렇게 거대한 조직도 아니었으니까.
"괜찮으십니까?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아니, 아니네. 그냥 생각을 좀 했다네."
"그나저나 이거 정말 큰일이군요. 그들의 귀에 이 소식이 들어가면 우리도 무사하진 못할 겁니다. 아니,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죠."
"내가 이런 일을 대비해서 외국에 마련해둔 도피처가 따로 있다네. 아마 아직 밀항 연락선이 남아 있다면, 그곳으로 갈 수 있을 걸세."
"괜찮으시겠습니까? 외국으로 도피하는 것은 계약을 위반하는 일이 됩니다."
"아..계약…"
나는 계약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얼굴을 찌푸렸다.
그들이 우리에게 기술을 지원해주면서 맺은 계약.
분명 5조 n항 어딘가에 계약 기간 동안에는 출국을 제한한다는 내용이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어쩌겠나. 일단은 살고 봐야지. 아무리 이 바닥에서 그들의 세력이 강하다 해도, 외국까지 손이 뻗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네."
"유감이군요. 그들은 당신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나도 미안하게 생각하네만, 아직은 죽고 싶지 않아서 말이야. 이제 그만 일어나세. 밀항장은 꽤 멀다네."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다 한가지의 생각이 뇌리를 강렬하게 스쳤다.
내가 유상에게 계약의 내용을 말한 적이 있던가?
"유상. 내가 너에게 계약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나?"
"…예. 계약을 체결하고 바로 말씀해주시지 않았습니까."
"그 때가 정확히 언제인지 기억하는가?"
"2015년 1월 5일입니다만, 그건 왜 물으시는지?"
"아니, 나이를 먹으니 기억이 흐려저서 말이야. 이런 중요한 일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구만."
"아직 65세에 불과하신데 벌써 기억이 흐려지셔야 되겠습니까. 중요한 날짜도 제대로 기억을 못하셔서야.."
"허허, 그러게나 말일세. 외국으로 가면 영양제라도 챙겨 먹어야겠어."
밀항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그냥 늙은이의 쓸데없는 기우인 걸까.
아니면…
"…그래, 분명 계약을 맺을 때는 아주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이게 뭔가? 재단에 잡혀와서 이름도 아니라 Pol어쩌고저쩌고 하는 이상한 코드로 불릴 줄은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하지만, 그 계약은 당시로서는 놓칠 수 없는, 아니 놓쳐선 안되는 중요한 제안이었습니다."
"그래그래, 누가 자네를 탓했나? 그냥 늙은이의 넋두리인 거지…"
"그 계약을 맺도록 권유한 건 저니까요. 저로서는 영 듣기 좋은 소리가 아니라서 말입니다.."
"거참, 까칠한 건 잡혀와서도 똑같구만."
"아 ,그러고 보니 물어볼 것이 있는데.."
"뭔가?"
"저희가 그들과 계약을 맺은 날이 언제였죠?"
"2015년 1월 1일이였네만, 그건 왜 묻는 겐가?"
"알고 싶었습니다. 바깥의 "당신"은 잊어버린건지, 잊어버린 척 하고 우리를 속이는 건지…뭐 후자로 밝혀졌으니 더는 숨길 필요도 없겠죠?"
"…뭐?"
"유감입니다. 솔개밤 씨. 당신은 우리와의 계약 5조 7항을 위반하셨으며, 이에 대한 대가는 저희 수거팀 직원이 수거해 갈 것입니다."
"이게 지금 무슨…잠깐, 네가 왜 그 계약의 내용을 알고 있는 거냐?"
"저희 업체와의 계약을 맺어 주신 점에 감사드리며, 계약을 위반하신 것에 대해 유감을 표합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솔개밤 씨."
"잠시만 씨발, 이게 다 뭔 헛소리인가! 난 계약을 어긴 적이 없어!"
"바깥의 "솔개밤"은 아닌 것 같은데요? 솔개밤님."
"잠시만, 내가 해결하겠네, 난 아직…"
"당신과 바깥의 솔개밤의 생각은 똑같을텐데요?"
"아니, 그건…"
"그동안 영광이었습니다. 솔개밤 씨. 다음 생에는 뵈지 않기를."
후두둑.
솔개밤의 뇌수가 벽과 바닥에 흩날렸다.
아마 고통을 느낄 새도 없었으리라.
검은 정장에 튄 뇌수를 보곤 불쾌한 듯 얼굴을 찌푸린다.
"아, 다른 솔개밤 님도 보내드렸으니 심심하시진 않을 거라고 말씀드리는 걸 깜빡했군…"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는 나무 위에서 재단 요원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정말 여기가 맞나?"
요원들이 근방을 수색하고 있다. 틀림없이 솔개밤을 곧 발견할 것이다.
"예, 분명 이 근처에서 거동이 수상한 자 2명이 이 근처에서 목격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코빼기도..잠깐, 저거 시체인가?"
물론, 살아있는 상태는 아닐 것이다. 내 작품이다.
"솔개밤입니다…왜 이런 곳에?"
"도대체 뭐로 죽였기에 이런…"
"뭐, 일단 본부에 보고하도록 하지. 후속 조사는 본부에서 할 걸세."
본부에 보고하지만, 본부는 지금 보고를 받을 상태가 아닐 걸.
"본부, 들리나? 본부?"
"…예상대로."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는 그대로 숲 안에서 증발하듯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