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가 지고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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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K기지에 또다시 밤이 찾아왔다. 언제나처럼 보름달이 찾아와서 기지의 겉만을 쓸어주고 매정하게 창공으로 떠나버린다. 심시영 연구원은 간만에 컴퓨터 전원을 끄고 옥상으로 나섰다. 바람은 쌀쌀함을 넘어 맹렬한 수준이였다.

그래도 해를 하나 떠나보내는데, 이 정도 휴식은 괜찮지 않겠나.

심시영 연구원은 일 년 전체를 좁은 모니터의 환한 빛 속, 웹사이트 속 잡스러운 것만을 보고 지냈다. 그녀는 오늘 밤만은 그 인공광 대신 달밤을 바라보리라 믿었다. 멍하니 달을 바라보던 연구원의 옆에 키가 작은, 정장을 입은 여자가 섰다. 그녀 또한 밤하늘을 바라보더니 싱긋 웃었다.

"그거 알아요? 내년은 호랑이의 해에요."

심시영 연구원은 뭐라고 대답할지 망설이더니, 대신 가만히 고개를 끄떡였다. 요원은 별 몇 개가 뜬 밤하늘에 손을 뻗어 보이며 말을 이어갔다.

"무속학에서는 호랑이의 해를 신령하다고 봐요. 사인검의 그 인(寅)이 호랑이를 말하는 거에요. 잡스러운 귀신도 덤벼들 수 없는 신령한 해 말이에요."

윤덕희 요원은 별들을 가리키며 혼자 무엇을 생각하는 듯 했다. 심시영은 그 기묘하다는 무속학부 인원들 중 이런 사람도 있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미소를 지었다. 간만의 여유와 사람 간의 대화가 마음에 든 모양이다. 이때까지의 일들은 모두 험했으니까. 입에서 칼이 뽑혔다거나, 웹사이트의 말싸움에 자기도 모르게 휘말렸다거나.

"그렇군요. 내년은 더 안정되었으면 좋겠네요."

심시영은 휴대폰을 켜서 카운트다운 어플리케이션을 실행시켰다. 호랑이 이야기 때문일까, 이상하게도 내년이 조금 궁금해졌음이다. 그녀는 시시각각 변하는 숫자를 바라보았다. 내년에는 잡된 일들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1분 후 호출 메세지가 요란히 울렸고, 그녀는 욕지거리를 중얼거리며 WoI 연구과 정보실로 고독히 향했으며, 윤덕희 요원은 그녀 뒷모습에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이 난리통 속에서도 심시영은 중얼거렸다, 내년도 이렇게 죽지 않고 적당히 살기를 바란다고.




한편, 제09K기지에서는 조용한 한숨이 터져나온다. 짧은 머리의 연구원이 투덜거리며 온갖 변칙적 건물의 투사도를 검증하고 있다. 그 뒤로 두 여자가 스쳐 지나간다. 한 명은 단발 머리에 정장을 입었고 한 명은 긴 머리칼에 가운을 걸친 사람이다.. 연구원은 업무에 집중하는 도중에도 한편으로는 그 둘의 목소리를 듣는다.

"이사관님은 내년에 뭐 하실 거에요?"

"글쎄, 일?"

두 사람의 웃음 섞인 소리에 연구원은 가슴 깊은 곳에서 미묘한 감정이 꿈틀대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건 아마 분노에 가까울게다— 박사라는 사람들은 다 저렇게 여유로운가?
아니, 어쩌면 호기심일지도 모르겠다— 저 두 사람 언젠가부터 항상 붙어다니네.
그래, 사실 깨달음지도.— 뭐야, 오늘이 2021년 마지막 날이구나. 한 시간도 안 되어서 2022년이 찾아오겠지.

김담기 연구원은 거칠게 서류 더미를 내려놓고는 의자에 기댄다. 입으로는 연신 '또 1년이 지났네, 또 나이 먹겠네' 하는 말 따위를 중얼거리면서. 하지만… 하지만 소망이 아직 있음을 그녀는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었다, 내년은 이번보다 조금이나마 나은 해가 되기를.




한 사람이 불 꺼진 방에 들어온다. 쇼파가 그녀의 움직임에 맞추어 주저앉는다. 그 사람은 케이크를 꺼내어 한 입 베어문다. 이사관은 한국사령부의 최고 선임으로서 한 해 동안 재단을 지휘해 왔으며 또 한 해를 맞이하고 있다. 그녀는 실눈으로 바깥을 내다보면서, 재단의 권역이 한반도에서 더 커지기를, 과 변칙현상이 반도에서 더 적게 일어나기를, 중 어떤 소원을 떠올릴지 고민하고 있다.




날카로운 눈매의 인물이 담뱃불을 붙이고 입에 악문다. 오늘도 이 바bar의 하루가 저물었구나. 그녀의 옆에 어느새 새카맣게 옷을 차려입은 여자가 검은 깃털과 함께 나타나 있었다. 호야는 일어서 건물에서 나갈 준비를 한다. 모리안도 주석을 뒤따른다.

"내일이면 기준차원에도 새해가 온다며."

모리안이 옅은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호야는 퉁명스레 대답한다.

"새해고 자시고."

호야의 담뱃불이 거의 다 타들어갔다. 건물 문턱을 나서고 거의 다른 길로 다다랐을때, 주석은 다시 담배 하나를 더 꺼내 고쳐문다. 그 모습을 본 모리안이 담배를 손으로 집은 뒤 재빠르게 빼낸다. 흰 손에서 담배가 돌더니 순식간에 녹색 불으로 타오른다.

"야, 이 새끼야. 왜 장난질이야, 장난질은."

호야가 꿀밤이라도 먹일 듯 덤벼들자 모리안은 가볍게 그 공격을 피했다. 아니, 그녀가 환각을 뚫고 왼편에서 걸어오더니 모리안에게 딱밤을 때렸다. 모리안이 여전히 미소를 띄며 말했다.

"새해인데 담배만 피지 말고 특별한 거 없어?"

"뭐, 그럼 뭐 하는데."

호야가 다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길을 다시 돌자 환한 야경이 눈에 들어왔다. 주석은 불을 붙이고 연기를 내뿜었다. 검은 구름이 눈앞에서 춤을 춘다. 그녀에게는 몇백 몇십 번을 맞는 신년일진대, 새삼스럽게 마음 속으로나마 새해 계획을 세워 본다. 아, 내년에는 분서꾼 새끼들이 깝치지 않기를, 맹원 애들이 무탈하고 일도 잘 하고, 그리고…




언젠가 폐가였던 펜션에서, 수십의 눈빛들이 어둠을 뚫고 텔레비젼의 희미한 빛을 바라보고 있다. 심야클럽 회원들의 측면에 앉은, 꼭 옛날 고등학생과 같은 복식의 소년이 화면 속의 산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연기대상이며 연예대상이 한창이였다. 무대에 서서 상을 수여받은 이들은 저마다 감정에 복받혀 울면서, 고마운 사람들을 소개한다. 다른 회원들과 매한가지로 윤성재도 그 감정에 어느새 빠져든다.

지혜가 살아 있었더라면, 저 무대 위에 설 수 있었을까.

식이 그치자, 긴장이 풀린 회원들은 저마다 불투명한 몸을 이끌고 건물 곳곳으로 저마다 사라진다. 남은 이는 여운에 묶인 소년 뿐. 조용히 손가락을 접어보며 윤성재는 죽은 채로 맞는 또 한번의 새해를 기다린다. 내년에는 비밀 조직들 마주치는 일 없이, 클럽 회원들 모두 무탈하기를 빌며 한 명 한 명 이름을 불러본다. 지혜는 이번 공연도 잘 끝마치기를, 외교부장도 마음 정리 잘 하고, 송현이도 무탈하게 공부 잘 하고, 그리고…




일그러진 그래픽의 숲에서 산뜻한 인상의 여인이 공간 즉 그래픽을 더듬는다. 이 게임도 잘 조절해서 서버에도 등록하고 개시도 해야지. 그렇지, 곧 새해구나? 새해 특별 세일도 해 줘야지? 이 게임 이름은 뭐였더라, 아무튼.

주서리는 기지개를 켠다. 2022 특별-페스티벌. 이 게임을 즐기는 사람이 많아졌음 좋겠네. 그리고 뭐 재단이나 연합 같은 것들이 방해를 하려나. 그런데 재단… 기동특무부대 감마-1, 레이나 페트코프 부대장. 이 사람은 다시 만나봤으면 좋겠고. 2022년도 바쁘게 돌아가겠구나. 플러그소프트가 가동하는 즐거움은 2022년에도 23년에도 220년에도 끝나지 않을 테니까.




건장한 백발의 청년이 피투성이가 된 사내들을 뒤로하고 걸어간다. 손에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너클을 쥔 채다. 한 사내가 갑자기 옆에서 덤벼들자, 청년은 공격을 피하고는 주먹으로 그의 복부를 강타한다. 크헉, 하고 쓰러지는 사내. 피트니스는 싸움에 전문인 곳은 아니지만 그의 실력은 알아줄 만 하다. 그는 피식 웃으며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회장님. 끝났습니다. 웃기는 것들이네요. 뭔 오합지졸이 어디서 삼대천에게…"

이래저래 대화를 주고받던 사내는, 곧 주머니에 휴대전화를 넣고 묵묵히 걸어간다. 차디찬 겨울에 입김만이 희게 퍼져나간다. 그는 하늘이 유독 밝음을 알아채고 그곳을 바라본다. 달이 밝다.

"아 맞다, 오늘 12월 31일이네?"

백태양은 키득거리고는, 장난스럽게 달에 대고 소원을 빌어본다. 난잡한 소원들이다. 올해는 삼대천이 부흥하기를 바란다. 아니지, 삼대천 피트니스가 더욱 부흥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또 올해에는 내가……




어둠 속에 촛불이 하나 켜졌고, 소을촌의 밤이 창 너머로 보인다. 그 새에서 정랑이 밤하늘 아래에서 경전을 외운다.

지나간 것에 과욕을 지니는 것은 독약이니 이는 미약한 심신이 지니는 열과 염증에 비한다. 또 올해가 간 것에 미련하여 과하게 집착함도 해악이며 젊음에 집착함과 인과가 같느니라. 집착하여 올해를 잡아두면 대개 저를 마라로 바꾸게 되느니라.

또 새로운 삶이 오매 이가 계속되어 세세도록 계속되느니라. 이렇게 과욕을 지니지 않아야 할 것이며 또 하나 없이 둘을 바랄 수 없으리로다. 새로 올 해는 또 하나가 되고 거기서 둘이 돋으리라.




조용한 사무실에서 타자 치는 소리가 요란하다. 방재원장이 하얀 빛 속에서 업무를 마무리 감독하고 있다. 2017년에 설립된 이래 그 조직은 쉼없이 어둠의 적들로부터 국가와 나라를 보호한다는 사명 아래 일했다. 미사일 밀제조와 변칙 예술 같은 강한 적들에도 굴하지 않고 달려온 게다. 그리고 그 설립 이후 해가 지나고 또 해가 다가온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국민이 안전하기를, 그리고 국가 속에 드리운 어둠이 잠잠하기를, 따위의 조금 낙천적인 꿈들이 가득하다.




보랏빛 탁자에 중노년의 남성이 앉아 있다. 그 주변은 이름 모를 식물들이며, 엥겔베르트사의 문선과 문양이 난해히 얽혀 있다. 그는 환경 보호라는 쉽지 않은 목적을 위해 더 쉽지 않은 일들을 행했고, 더욱 더 쉽지 않은 적들과 맞서 왔다. 오래 전 회사와 조직을 창설하고 조직도를 그리고 재단이나 연합과 맞서던 일이 생생한데도 벌써 새로운 해가 올 것이다. 그는 수상쩍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조직의 임원들과 만나야지. 그들도 새해를 기다리고 있을텐데. 그는 중얼거리면서 복도로 대범하게 걸어간다. 한국의 요원들은 벌써 새해를 만났으려나. 동아시아에는 새해 소원을 비는 풍습이 있다지? 나도 빌어볼까,

내년에는 극성인 온실 효과가 줄어들고 빙하가 녹지 않도록. 전염병이 돌지 않고 또 짐승들과 식물들의 개체수가 회복되었으면. 그것이 우리 엔트로피를 넘어서가 바라는 바니까.






그렇다면 그대는 어떤가? 나는 어떤가? 그대는 새해 자정에 돌입하기 전에, 혹은 이미 새해를 만난 지금에 무엇을 바라고 있으며 그 소원을 위해 무엇을 행하겠는가? 그 소원은 덧없거나 이상하다고 생각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위의 것들만 하겠는가?

우선 꿈을 꾸어라.

어쩌면 이루어질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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