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르의 비너스 (La Vénus d'Ille, 1836)
암흑기록원 유산 목록 173호
1836년에 루브르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그 출처는 피레네조리앙탈주 일쉬르텟의 비너스 신전이다. 산화된 청동과 미량의 다색 안료로 구성되어 있다.
반침대에는 라틴어 "Cave Amantem"이 쓰여 있다. 맥락으로 보아 "[그녀가 당신을] 사랑한다면 조심하라"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 조각상은 움직일 수 있으며 지극히 적대적이다. 시야 범위 안에 대상이 들어와 있으면 대상은 움직일 수 없다. 어느 순간에도 조각상을 향하는 시선이 끊어져서는 안된다. 조각상 보존 작업에 배정된 인원은 눈을 깜빡이기 전에 다른 사람에게 미리 알려야 한다. 대상은 사람을 세게 껴안아 등을 부러뜨려 죽인다. 공격할 경우, 관련 인원은 4등급 위험 개체 봉쇄 절차를 따라야 한다.
담당 인원들은 아무도 없을 때에 전시대 내에서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고 알려왔다. 이는 정상으로 여겨지며, 이 행동 방식의 변호가 있다면 수석 큐레이터에게 보고해야 한다.
받침대 주변에 있는 적갈색 물질은 썩어가는 장미 꽃잎과 피의 혼합물이다. 이러한 물질의 원천은 불명이다. 이 받침대는 반드시 2주에 한 번씩 청소해 주어야 한다.
민: 걱정 마 스피어. 그거 강화유리야. 그 조각상, 이 박물관 무너져도 그대로 갇혀 있을걸. 흠… 그래도 계속 지켜볼 수 있지?
세 사람은 서로를 영어 가명, '스피어(Spear)'와 '하트(Heart)'와 '민(Mean)'으로 부른다. 각진 턱에 각진 어깨와 각진 목, 생긴 모습은 서로 비슷하다. 80년대가 저물고 90년대가 떠오르려는, 땅거미 지는 시대의 순연한 산물들이다.
루브르에서도 이곳은 관람객에게 보통 개방해주지 않는다. 창문에는 어둡고 매우 두껍기 그지없는 벨벳 커튼을 쳤다. 도처에 먼지가 날린다. 이곳은 루브르 비밀동. 기이한 고대 유적을 보관해두는 곳이다.
민이 미심쩍어하는 표정으로 어떤 커튼을 총부리로 걷어낸다. 화면 바깥에서 하트가, 불운하게도 이 밤중에 세 사람과 마주쳐 버린 경비원을 결박하기를 마치는 중이다. 스피어가 유산 173호에서 눈을 떼고 이집트 제11왕조 파라오 키오스크(Kih-Oskh)의 반신상을 바라본다.
스피어: "필레몬 시클론(Philémon Siclone) 기증, 1933년". 흑반암? 아주 사치스럽군.
스피어가 다시 눈길을 돌렸다가 깜짝 놀란 소리를 낸다. 조각상이 스피어를 바라보고 있다.
민: 뭐 하는 거야, 조각상 지켜보는 간단한 짓거리도 제대로 안 돼?
하트가 화면으로 들어온다. 유달리 불안한 기색이다. 발작이 났는지도 모른다. 셔츠의 하얀 깃이 피로 얼룩진 듯하다. (감시 카메라가 흑백이라 상세히 확인할 수 없음)
민: 뭐야 H, 문신이 깨어났어?
하트: 우리 말고 또 누가 있어.
스피어: 그렇긴 해, 일단 얘도 있고.
하트: 조각상 말하는 게 아냐. 어떤 오컬트적 존재가 여기를 돌아다닌다고. 꾸물댈 시간 없어.
세 사람이 비밀동 3번 문으로 간다. 3번 문은 카바라도시(Cavaradossi)의 그림 《마리아 막달레나》와 나란히 있다. 하트가 문앞에 멈춰서서, 주머니에서 분필을 꺼내 그림에 기이한 패턴을 그린다. 감시 카메라 화면이 패턴이 그려지면서 점차 흐려진다. 민이 3번 문의 자물쇠를 부수고 문을 연다. 문 안의 공간은 '커튼의 방', 암흑기록원 연구실이다.
카메라 화면이 끊긴다.
커튼의 방 경보장치 또한 동시에 비활성화된 듯하다.
프랑스 대통령은 영상 기록의 우중충한 흑백광에 얼굴이 잠긴 채로, 짜증이 오르는 듯 의자의 가죽 팔걸이를 톡톡 쳤다.
새벽 5시 이래로 대통령은 이 캄캄한 사무실에서 조그만 위원회와 함께 발이 묶여 있었다. 작은 만큼 은밀한 위원회였다. 사건이 발생한 루브르 박물관 비밀동 큐레이터, 자크 소니에르(Jacques Saunière) 교수. 암흑기록원의 호기심을 소니에르와 풀어나가다 보니 연구부의 수장에까지 오른, 브누아 메르카시에(Benoît Mercassier) 장관. 프랑스에서 가장 기민한 정보기관인 국가기능정보원(SNIF)의 원장, 프랑시스 코플랑(Francis Coplan), 일명 "익스 장군(Heffe Ixe)".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오늘 아침에만 벌써 몰리 담배를 여섯 개피나 바스러뜨리는, 파리 성경대 대장 디외도네 말그랭(Dieudonné Malgrain).
"대체 저 불청객들이 누굽니까?"
"음, 아직까지는 저희 추측입니다만…"
"저희가 압니다." 말이 끊긴 메르카시에의 시선을 무릅쓰고, 끼어든 말그랭이 말을 이었다. "사건을 통지받은 대로 제가 가능한 인력을 전부 풀어서, 콩코르드 광장부터 라스티냑 가까지 주변의 카메라는 전부 쓸었죠. 다행히도 30분쯤 지나서 이런 장면을 찾았습니다."
리모콘의 어떤 버튼이 눌리고, 아까와 전혀 다른 장면이 화면에 펼쳐졌다.
루브르 바깥 600m, 슈발리에 뒤팽(Chevalier Dupin) 가. 우체국 뒤팽 가 지점 앞에 회색 소형 봉고차가 가짜 번호판을 단 채로 서 있다. 이곳에도 역시 세 도둑의 공범이 운전석에 앉아서, 박물관 침입자들이 돌아오면 현장을 빠르게 빠져나오려 기다리고 있다.
ZOOM
봉고차 속 남자가 그루바드 컨트리(Groobad Country) 초코바를 먹으며 잡지를 읽고 있다.
ZOOM
잡지는 전날인 1991년 2월 12일 나온 《레포크(L'Époque)》 지다. 1면에는…
잡지가 스르륵 내려가며 남자의 얼굴이 드러난다.
소니에르와 메르카시에가 깜짝 놀랐다.
먼저 우물거리며 말을 꺼낸 사람은 소니에르였다. "하느님 맙소사! 1482년 바보들의 축제 이래로 이런 건 본 적도…"
말그랭이 웃음을 터뜨렸다. "깜짝 놀라셨죠? 이쪽 업계에서는 '못 알아보면 간첩인 면상'이라 부른답니다! 설명 끝이죠."
오늘 눈 뜨고 처음으로, 장 뤼생데르(Jean Lucinder) 대통령은 흥미를 느꼈다.
"Homo neanderthalensis. 매력적이군요." 대통령이 화면으로 다가가며 나직이 말했다.
"안 그럴 수가 없죠. 거기다 또 하나, 미국에 사는 네안데르탈인은 다 합해서 100명도 채 안됩니다. FBI 특이사건반에게 연락을 넣어서 알아낸 사실이죠. 저희가 아주 상황을 잘 이용해먹었습니다. 이슬라 누블라 사건 이후에 미국 정부가 제2의 '스타시스Stasis 사'가 맨해튼 한복판에 원시인을 떨궈놓을까봐 오만 호들갑을 다 떨거든요. 덕분에 저희가 이런 걸 다 아네요."
코플랑이 크래프트 종이봉투를 꺼내 뜯어서 큼지막한 사진 두 장을 꺼내 대통령의 책상에 올려놓았다.

불명 (1) - M. J. 미스테르 (2)
"현재 저희가 물음표를 찍어놓은 인물은 여기 있는 마틴 자크 미스테르(Martin Jacques Mystère)입니다. 뉴욕 출신 인류학자 겸 작가죠. 업계에서 그다지 유명하진 않습니다. 신지학(神智學)에 찌들었고 허언증도 있는데다 자기가 계시받은 선지자인 것처럼 행동하거든요. 그리고 이자의 파트너가 여기 있는… 신분도 전혀 없는 기형 인간입니다. 인류학계에서 미스테르 혼자만 이자가 네안데르탈인이라고 주장하죠. 저희 측에서는 진작부터 미스테르를 주시하던 참이었습니다. 지난번에도 이쪽 영역에서 여러 번 눈에 띈 바 있었거든요. 이자의 이력은 공범들과 비슷합니다. 미국인이지만 프랑스-이탈리아계고 소르본에 체류한 적 있더군요. 덕분에 프랑스 사회에 쉽게 섞여들 수 있었겠고요."
"방금 그 말은 공범이 누군지 벌써 짐작했다는 말씀 같은데."
"아직 가능성입니다만 그렇습니다. 저희 측은 벌써 나머지 두 명을 파악해뒀습니다. 적어도 그렇게 믿을 이유는 확보했다고 말씀해두죠. 미스테르의 이력을 바탕으로 미국에서 감시하던 요주의 인물들의 서류를 검토해서 생김새가 감시 카메라 영상과 일치하거나 최근 활동이 파리 여행인 사람이 있나 살펴봤습니다. 수색해 내기가 너무 어렵지는 않더군요.
'스피어'의 이름은 가브리엘 나이트(Gabriel Knight). 뉴올리언스에 사는… 어 이름 뭐시냐… "샤텐예거Schattenjäger"라고 합니다. 독일계입니다만 프랑스어에 아주 유창합니다. 작년에 렌르샤토에 머물 때부터 성경대에서 주시하고 있었죠.
그리고 '하트'의 이름은 별명 그대로 해리 다무르(Harry d'Amour)입니다. 나이트와 같은 뉴올리언스 출신이고 미스테르처럼 뉴욕에 살죠. 셋 중에는 중요도가 제일 떨어집니다만, 알려진 것도 제일 없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FBI 말로는 종류 불문하고 엄청난 건수의 범죄들에 간접적으로 엮여 있지만 매번 연관성이 불충분해서 구속된 적은 없다는군요. 사탄 숭배 쪽으로도 뭐가 있던 모양입니다."
방 안에 잠시 침묵이 내렸다. 뤼생데르 대통령의 책상에 다른 서류가 올라왔다.

"계속하겠습니다. 정보원에 따르면 마틴 자크 미스테르에게 지난 5월 10일 "센터"라는 불상의 단체가 접촉했다고 합니다. 이 단체가 미스테르를 만난 목적은 그날 밤 루브르 비밀동의 절도 사건과 연관된 점이 있다고 보입니다.
5월 18일에는 해리 다무르가 구마사 일 때문에 출장 나갔던 중에 미네소타의 어떤 카페에서 한 여성과 만났습니다. 이 여성은 미스테르가 며칠 전 만났던 단체 대표자와 생김새가 매우 닮았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자기 단체를 '인스티튜트'라고 자칭하더군요."
"이런 맙소사…" 메르카시에가 창백해진 얼굴로 뇌까렸다.
"이제 이해가 가시겠죠. 그 다음은 5월 26일이었습니다. 정보원에 따르면 이날 나이트는 캘리포니아 남부의 서니데일이라는 마을에서 가축 상해 사건을 조사하던 중이었습니다. 역시나 비슷한 인물이 나이트에게 접근했습니다. 이번에는 '구상'의 대표자라고 자칭하면서요."
"그것 참 일정한 패턴인데." 소니에르가 빈정대듯 말했다.
뤼생데르가 궁시렁거렸다. "세 사람은 그냥 잡범 졸개들이군요. 꼬리를 감추려고 고용된 프리랜서들. 그래서 그 고용주는 어떤 자들이었습니까?"
코플랑, 말그랭, 메르카시에가 불길한 눈빛만을 나눴다. 무거워진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는 듯이. 이윽고 메르카시에가 침묵을 깼다.
"이… 저희도 아직 이들의 정체나 목표, 능력을 확실히는 모릅니다. 전번에도 성경대 병력과 암흑기록원 연구진을 동원해서 이들의… 직원들? 에게 접촉한 적은 있습니다. 적어도 굉장한 골칫거리라고 확인했다 말할 수는 있겠군요. 이 조직은 말하자면 어둠의 초대형 복합 군사·과학 복합체입니다. 네트워크를 어디까지 펼쳐 놓았는지 저희도 미처 확신하지 못합니다. 이름은 매번 바뀌는데 항상 간결합니다. 인스티튜트. 센터. 상점. 에이전시. 조직. 재단. 온갖 위장 단체, 온갖 히드라 머리를 내세워 놓고 몸체는 우리 손길이 안 닿는 곳에 숨겨놓았습니다. 알아낸 것이라고는 이 조직에서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대상들을 포획하고 수집한다는 사실뿐입니다."
침묵이 가만히 내렸다.
"그러면 이번에 저들이 뭘 가져갔습니까?"
침묵이 더욱 짙어졌다.

유산 085호의 정지사진
암흑기록원 유산 목록 085호
유산 085호는 그려진 생김새가 리디아의 여왕 옴팔레(Omphale)와 일치하나, 자신이 ████████ 후작부인이라고 주장하며 '카트린(Catherine)'이라 불리는 것을 선호한다. 대상은 확실히 지능을 가지고 있으며, ████년 ██월 ██일 현재 자신이 2차원 세계에 살고 있고 3차원 세계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수화와 글을 사용하여 암흑기록원 인원과 의사소통하는 법을 배워 사용하고 있다. 유산 085호가 존재하는 태피스트리에 글씨를 수놓는 것으로 대상과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관련 인원들은 대상이 우호적이고 활기차지만 평소에 외로워한다고 밝혔다.
유산 085호는 자신이 있는 태피스트리에 수놓인 물체와 마치 실제 물체인 듯 상호작용할 수 있다. 하지만 동물이나 인간을 수놓았을 때는 대상과 접촉했을 때는 움직일 수 있지만, 접촉이 멈추면 즉시 운동성을 상실한다. 파도나 흔들리는 나무 등 원래 움직이는 물체를 수놓아도 그 물체는 평형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가 대상이 나타나면 그제서야 움직이기 시작한다.
유산 085호는 태피스트리 두 장이 같은 방에 있는 경우 태피스트리를 옮겨다닐 수 있다. 대상이 조형미술적 그림 (기하학적 무늬가 사방에 걸쳐진 무늬 등) 이 수놓아진 태피스트리로 들어가면, 해당 태피스트리는 배경화면으로 인식된다. 이런 경우 유산 085호는 그 무늬가 펼쳐져 있는 끝없는 평원에 있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현재 카트린은 자수나 태피스트리 위에만 존재할 수 있으며, 천이나 종이, 유리, 양피지로는 이동할 수 없다. 다른 예술 작품 (바로크, 로코코, 라파엘 전파 등) 에 들어가면 카트린은 새로운 환경에 따라 그림 양식이 바뀐다.
기존에 예술 작품이 그려진 태피스트리라면 대상의 머리 위에 말풍선이 만들어져서 그 목소리를 눈으로 볼 수 있으며…
스피어: 인간 가죽을 장정해? 매우 사치스럽군.
민: 이것 좀 봐. 《시식교전의》? 아니 《슈타인의 서(Grimoire Stein)》도 있어? 이 책들 하나만 슬쩍해도 바로 백만장자 될 텐데.
하트: 죽은 백만장자 되겠지. 아니 함부로 열었다간 차라리 죽음이 더 나아. 갖고만 있어도 어떻게든 유혹해서 열어보게 만들걸. 원래 목표에 집중해.
암흑기록원 위험문헌실의 장서는 원래 각 도서 하나하나를 철제 자물쇠로 잠가둔 채로 책장에 묶어두어서 보관한다. 그러나 장 뤼생데르 도서관 금서과가 곧 완공될 예정이었는지라 장서들을 루브르에서 이관할 준비를 하던 중이었다. 각 마도서는 맞춤 제작된 금속 케이스에 꽉꽉 눌리다시피 들어 있었다. 벽에다 묶어둘 사슬도 없는 채로.
세 사람의 작업 분담은 이렇다. 민이 아틀란티스 기술로 보이는 강력 레이저 권총으로 마도서 상자를 절단한다. 상자가 열리자, 셋 중에 목숨이 가장 가벼워 보이는 스피어가 마도서의 표지를 살펴본다. 하트는 눈을 감은 채 뒤에 머무르며 탐지 혹은 보호의 의식을 실행한다. 동료를 보호하려는 행위겠지만 대항하는 대상이 상자에서 꺼내는 책인지 외부의 위협인지 알 수 없다.
카메라 B-07, 벨로크(Belloq)관
커다란 검은색 그림자가 천장 어디선가에서 내려와 체사레 보르도네(Cesare Bordone)의 청동상 《안드로메다》 꼭대기에 착지한다. 몇 분 간 매달린 채로 움직이지 않다가 슬쩍 미끄러져 땅으로 내려온다.
영상이 흐려진다.
스피어: 안티페리카타메타나… 파르… 뵈… 단… 아니 다시. 안티파라메타…
민: 장난치는 거야?
스피어: …단…프리…크리… 으어… 작전 참 오래 걸리네.
하트: 벌써 00시 반이야. 자정이면 끝난다면서.
민: 알았어, 시간낭비 그만하자. 도서 분류법이나 전체 목록, 여기 굴러다니는 것들 싸그리 정리해놓은 거 어디 없어? 목록 아니면 서류가방이라거나?
스피어: 잠시만 이제 제목 알겠어. 《안티페리카타메타나파르뵈그담…》
민: 크게 좀 읽지 마, 문제 있는 책이면 어쩌려고! H, 네 능력으로 아우라가 제일 강하게 나오는 상자를 찾아볼 순 없어?
하트: 가능은 한데 그러려면 너한테 보호 거는 걸 쌩으로 포기해야 해.
민: 지금 상황까지 와선… 아 스피어, 그만 좀 하고 망이나 봐. 무슨 일이 우리한테 생기려면 분명히 벌써 생기고도 남았겠지.
카메라 D-11, 클레름바르(Clairembart) 갤러리
《유니콘호의 뗏목》이 서쪽 벽에 가만히 걸린 채 창문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달빛을 받는다. 캔버스 위로 언뜻 그림자가 드리웠다가 거의 곧바로 사라진다.
영상이 흐려진다.
하트가 소매 걷은 두 팔을 수평으로 뻗은 채로 상자들 사이를 걷는다. 팔뚝에 그린 문신에서 연기가 가늘게 피어오른다. 수증기인 듯하다. 두 눈을 감고 머리를 뒤로 젖힌 채로 담배를 피우고 있다. 이런 곳에서 매우 금지되는 행동이다.
민: 어때?
하트: 그 시끄러운 입만 잠시 참아주면 좀더 집중이 잘될지도 모를…
멈춘다.
하트: 이거야.
민: 확실해?
하트: 이 방에 오만 아우라가 들끓고 있어, 민. 사악한 진동들이 지옥에 떨어진 영혼처럼 마구 울부짖지. 자네 키를리언 폴라로이드로 아무 상자나 찍어보면 나오는 사진은 온통 까만색이거나 불이 활활 타오를 거야. 그런데 이건…
민: 이건…?
하트: 이걸 찍고 사진이 나오면 4시간 뒤에 알아차릴 거야. 사진기에 애초부터 필름이 없었다는 걸. 그런 녀석이야.
민이 고개를 어렴풋이 끄덕이고, 담배 한 대를 뽑아들어 입에 물고는 장도리로 상자를 열고 구멍을 내기 시작한다.
민: 스피어한테 그렇게 빡칠 필요는 없었는데…
하트: 그렇긴 했지 뭐.
민: …그랬어야 스피어가 나 대신 이 자식 꺼내주지. 뭐 만약이란 게 있으니까.
커튼의 방 바깥. 카메라 S-03, S-05, S-06. 전류가 갑자기 끊겨서 멈추었던 카메라들이 보조 발전기의 힘으로 재작동한다.
스피어가 총을 든 채로 3번 문에 도착한다. 불안한 표정으로 대리석 받침대 뒤로 몸을 숨긴다. 유리 덮개 너머로 미라의 발치가 보인다.
스피어: 이 갤러리 정말 크네. 숨을 곳은 많아서 좋군.
스피어가 재킷에서 손전등을 꺼낸다.
스피어: 물론 별 소용은 없겠지만, 그렇다고 크게 소리내서 생각할 수도 없으니.
스피어가 손전등을 켜고 맞은편 벽을 비춘다. 태피스트리 《옴팔레의 발치에 누운 헤라클레스》가 비친다. 옴팔레가 손전등을 끄라고 손짓한다. 스피어가 얼굴이 창백해져서 떨리는 손으로 태피스트리에 무기를 겨눈다.
스피어: 아주 멀쩡한 곳의 극치군. 이 박물관에서 살아나는 녀석은 이걸로 끝이면 좋겠는데.
옴팔레가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불을 끄라고 격렬하게 손짓한다. 행동이 점차 다급해지는 반면, 스피어는 더 어리둥절한 표정만 짓는다.
스피어: 너… 너도 여기 갇힌 신세냐? 너 경비원 부를 생각은 아니지? 여기서 탈출시켜 줄 수도 있는데.
옴팔레가 발치에서 움직이지 않는 헤라클레스의 어깨를 만지자, 헤라클레스가 움직인다. 두 인물 모두 팔을 격렬하게 흔들며 스피어에게 경고를 표시한다.
스피어: 불을 끄라고?
스피어가 돌아본다.
바로 뒤에 우람한 형체가, 칠흑같이 어두운 망토를 두르고 얼굴에 황금빛을 띤 채로 서 있다.
스피어: 이런. 매우 끔찍-
영상이 흐려진다.
뤼생데르가 입술을 짓씹었다. 그리고 눈길 하나 까딱하지 않는 채로 소니에르에게 말했다. 듣는이를 말하진 않았지만 관장은 소니에르였으니까.
"시체는 없습니까?"
"전혀 없었습니다."
"잘됐군요 잘됐어. 걱정거리 하나는 줄었군요… 하나는."
뤼생데르는 화면의 하얀 바탕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마치 그 가면 쓴 형체가 지금이라도 앞에 나타나 죽음을 내릴지 모른다는 듯이.
메르카시에가 주저하다가 스카치 한 잔을 입에 붓고 말했다. "이것만 가지고는 아직 그 녀석이 살았는지 죽었는지지 말하진 못해요."
아무도 그 말에 한 마디 보태지 않았다.

발굴 당시의 유산 076호.
암흑기록원 유산 목록 076호
유산 076호는 돌로 된 관(SCP-076-1)과 그 안에 들어있는 인간형 개체(SCP-076-2)로 나뉘어져 있다.
유산 076-1호는 검은 반점이 있는 변성암으로 이루어진 길이 3m 너비·높이 2m 크기의 석관이다. 석관 안팎의 표면에는 고대 이집트 제국 양식의 문양들이 깊게 새겨져 있다. 문양 속 히에로글래프들의 내용은 주로 모압인과 암몬인이 숭배했던 셈족 신 "바알 페올BAÂL PHEGOR"을 설명한다. 방사성 동위원소 측정 결과 이 물체는 약 4,000년 정도 된 것으로 밝혀졌다. 석관의 덮개는 0.5m 크기의 자물쇠와 그 주변에서 원형을 이루는 20개의 작은 자물쇠로 잠겨 있다. 아직까지 열쇠는 하나도 발견되지 않아 문이 한번 닫히면 잠그는 것은 불가능하다.
유산 076-2호는 인간형 미라로 보이며, 성별과 연령은 불명이다. 황금 마스크와 회색 두건을 썼으며 온몸에 커다란 검은 천을 둘렀다. 대상의 키는 1.96m이며 몸무게는 81.65㎏이다.
유산 076-2호는 석관 안에 있을 때는 죽어 있다.
카메라 S-06: [OFF]
카메라 S-07: [OFF]
카메라 L-02, 비밀동 북측 내실
한쪽 눈구멍이 찌그러진 커다란 해골이 어디선가에서 날아온 총알에 여러 번 맞는다. 조그만 파편들이 떨어져 나온다. 위턱에 금이 간다.
카메라 D-01: [OFF]
카메라 D-03: [OFF]
카메라 D-06: [OFF]
카메라 D-07, 클레름바르 갤러리
하트와 민이 겁에 질린 채로 갤러리를 내닫는다. 뒤를 자주 돌아보기도 하고 여러 번 서로 부딪히기도 한다. 발길이 가리키는 곳은 15번 문이다.
두 사람이 복도 끝까지 닿자, 15번 문에서 어떤 형체가 튀어나온다.
카메라 D-10: [OFF]
카메라 D-11, 클레름바르 갤러리
민의 몸이 서쪽 벽으로 내던져진다. 대리석 벽에 몸이 거세게 부딪힌다. 아슬아슬하게 《유니콘호의 뗏목》 그림을 비껴나간 자리다. 그림이 못에 달려 흔들거린다.
카메라 F-02, 북측 계단
유령이 막 떨어질 뻔하던 산도미에시 백작 위뷔(Ubu de Sandomierz)의 반신상을 붙잡아 다시 똑바로 세워 놓는다.
총알구멍이 수두룩히 박힌 망토에서 먼지구름이 자욱이 피어나온다. 당사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카메라 E-03: [OFF]
카메라 E-08, 오라투아르 정원
비둘기들이 날아오른다.
1층의 창문이 깨지며 어떤 사람이 튀어나온다. 박물관의 모든 경보장치들이 일제히 울린다. 나온 사람이 유리조각 깔린 잔디밭을 구른다. 곧이어 동료가 똑같은 방식으로 나온다.
두 사람은 몸을 움직이지 못하다가 10초쯤 지나서 간신히 일어선다.
다른 창문. 어떤 형체가 움직임 없이 두 사람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가만히 모습을 감춘다.
은행 감시 카메라, 슈발리에 뒤팽 가
봉고차 운전석에 탄 네안데르탈인이 별안간 화면 밖에서 무언가를 목격하고는 동요한다. 그리고는 황급히 잡지를 놓아두고 차의 시동을 건다.
민이 화면으로 들어온다. 총을 쥐었으며 훔친 책을 팔로 꼭 붙들고 있다. 민이 네안데르탈인에게 뭐라고 소리친다. 뒤이어 하트가 들어온다. 다리를 절뚝이며 왼팔을 붙잡고 있다. 팔에서 피가 줄줄 흐른다.
민이 봉고차 뒷문을 열자 하트가 재빨리 올라탄다. 바로 민이 뒤따라 올라타 문을 닫는다. 봉고차가 길앞에 주차된 차를 치면서 휭하니 떠난다.
"유산 701호. 저들이 701호를 가져갔다니…"
"물론 제가 상황의… 상황의 심각성을 충분히 공감합니다만, 그래도 저희로선 최악은 면하지 않았는가 싶습니다, 네. 제자리에 남겨둬야겠다 싶은 작품은 손 안 대고 떠났으니까요. 또 예, 감히 이런 말씀 드려도 될까 싶습니다만 이 문제는 이제 본질적으로 그자들 문제 아니겠습니까."
"메르카시에 장관님, 저들이 문진이나 숟가락, 시멘트 벽돌 같은 걸 훔쳐갈 수도 있었는데 굳이 암흑기록원에 침입해서 701호를 가져간 겁니다. 이건 저희들 문제예요."
모두들 손에 스카치 한 잔씩을 들고 있었다. 뤼생데르 대통령은 화면을 등지고 누르스름한 얼굴빛으로 잔을 흔들어 돌리며, 집무실 벽난로 위에 걸린 프레스코화를 바라봤다.
프랑스 초대 대통령 프랑시옹(Francion)을 필두로 역대 국가원수들이 그림에 그려져 있었다. 파라몽드(Faramond)부터 나폴레옹까지, 드 지브뢰즈(de Givreuse) 장군부터 자신 장 뤼생데르까지. 일종의 전통으로 각 대통령은 새로 뽑힐 때마다 이 그림에 새로 덧그려졌다. 언젠가는 자기 뒤에도 후임이 그려질 테고, 그 뒤에 후임이 또 있을 테고 — 그러다 언젠가, 결국에는 이 프레스코화도 프랑스도 멈춰버리겠지. 뤼생데르는 죽음이 두려웠다. 끝이 찾아온다는 것이 두려웠다. 더구나 자신은 암흑기록원에 관련된 내용은 아는 것도 그다지 없었지만, 701호만은 그 몇 없는 '아는 개체'에 들어갔다.

코플랑이 점잖게 헛기침 소리르 냈다.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저희 측에서 유산 701호가 어떤 개체인지 알 수 있다면 도움이 되겠습니다만."
"뭐? 아 네. 네, 당연하죠, 그럼요. 소니에르 관장님, 괜찮으실지…?"
"두말하면 잔소리죠."
코플랑은 처음으로 자신이 전혀 모르는 기밀이 담긴 기밀문서를 받아들었다. 처음 있는, 앞으로 또 생길까말까하는 일이었다.
"코플랑 원장님, 유산 701호는 일명 《아래세상》이라는 책입니다. 여러 책들 중 잔존하는 단 한 권인데… 책의 내용은 독자의 정신건강에 막대한 위협을 끼치고 그 주변의 세계를 급속도로 뒤흔듭니다. 물론 저희는 그 책에 무슨 내용이 쓰였는지, 실제로 내용이 존재하는 책인지 전혀 모릅니다."
말그랭이 덧붙였다. "저희가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 책이 끼치는 결과뿐이었죠."
"그렇습니다. 안타깝지만 그것 말고는 《아래세상》은 연구할 여지 자체가 보이지 않았던 책입니다. 그러니 그 책이 도난당한 사태가 불안할 수밖에 없고요. 무슨 도구 삼아서 활용할 만한 놈도 아니고 남들이 뭘 시킨다고 따라 줄 놈도 아닙니다. 그래서 도저히 저 센터…"
"혹은 조직."
"혹은 인스티튜트."
"혹은 재단."
"…이 그걸로 무슨 짓을 저지를 생각인지 모르겠군요. 보유하는 즐거움 자체가 목적인 건지."
대통령은 느닷없이 스카치 잔을 벽난로 속에 냅다 던졌다. 펑, 단숨에 잔이 터지며 불꽃이 떨기나무처럼 피어올랐다. 다른 사람들 모두 깜짝 놀라 대통령을 돌아봤다.
"그러니 저자들이 무슨 요량으로 일을 꾸몄는지 알아내기 미룰 요량은 없습니다! 그 미국 녀석들이 이 나라를 못 뜨게 할 겁니다. 설령 떴더라도 원래 우리 것을 반드시 제자리로 돌려놓을 테고! 말그랭 대장, 미스테르와 다무르를 다음달 수배자 목록 맨 위에 올려놓으십시오. 국경 전역에 불심 검사를 실시하고요. 나이트도 혹시 모르니 마찬가지입니다. 코플랑 원장, 미국의 연락책을 총동원하십시오. 소니에르 관장, 메르카시에 장관, 암흑기록원에서 보유하는 다른 유산은 무사한지 확인하고 관련 전문가를 있는 대로 동원해서 왜 하필 701호만을 훔쳐갔는지 분석하십시오. 진행 경과는 모두 실시간으로 보고하기를 바라겠습니다. 모두 아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대통령님. 다만… 그 뭐랄까… 질문할 것이 있다면…"
"반응을 보아하니…"
"혹시 이번 절도 사건의 동기에 관련해서 어떤 정보가 있어서 이렇게 강력히 반응하시는 건 아닙니까?"
다크서클이 짙어진 대통령의 눈길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정보요? 아니요, 의심입니다. 《아래세상》은 그깟 책이니 뭐니 하며 넘길 물건이 아닙니다, 말그랭. 이 책들을 하나만 빼놓고 전부 불태운 이유를 묻지 말고, 왜 이 한 권만을 남겨놓았는지 물으십시오. 지금까지 《아래세상》을 읽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전부 내용을 밝히기를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여러분도 잊지 않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작년에 암살 기도를 겪고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저로서는 도저히 이쪽 분야를 모르는 채로 살 수가 없습니다. 어느 때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유산 701호의 비밀을 알아내는 사람은 그 순간에 가장 믿음직한 사람이 될 겁니다. 프랑스 전체에서 가장 믿음직하다는 뜻입니다. 그저 정신이상이나 죽음에 그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물질계 너머의 것까지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영혼이란 것의 힘을 믿습니다, 여러분…"
대통령이 롱코트를 집어들고 기밀문서를 코트 안주머니에 쑤셔넣었다.
"…그리고 여러분을 놓아주지 않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