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3시.
식곤증이 막 깨어날 시간이다. 그러나 언제나와 같지 않게, 잠 따위는 들어올 만한 시간이 아니다. 속이 메슥거리고, 심장이 계속해서 불안을 외쳐 대는 시간이 오늘의 지금이였다. 나는 손깍지에 턱을 올리고 멍하니 컴퓨터만 바라보았다. 컴퓨터는 시허연 빛을 내며 말이 없었다. 속에서 쓴물이 올라왔다.
품 속에 그 명함이 있다. 템페스트의 사원이니 하는 그 여자가 준 것. 아마 품 속 어둠에서 그 주홍색 광택을 접은 채, 내가 꺼내줄 때까지 고이 잠들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내 가치를 인정한 바 우리의 인재가 되라고 준 것이 분명하니 마음이 너무도 복잡했다. 내가 원래부터 이렇게 단호하지 못했던가? 광흥전자는 내가 어릴 때부터 염원했던 문자 그대로 꿈의 회사가 아닌가—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마음이 흔들리지."
나도 모르게 한숨 터지듯 말이 나왔다. 무심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자 황급히 들은 이가 없는지 사무실 전체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내 옆 자리를 쓰는 사람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저 멀리 창가 쪽 자리에 다른 사람이 한 명 보였다. 모르는 사람. 나보다 두어 살 어려 보이지만 머리를 단정히 묶고 단색의 옷을 입어 여느 이들보다도 더 유능한 회사원으로 보인다. 다만 오른 귀에 꽂힌 작은 무선 이어폰이 도드라지게 보인다. 광흥 것은 아니다. 허망한 웃음이 마악 난다. 현상황에서 도주하려는 방어기제처럼 저 사람에게 갑자기 관심이 갔다.
괜스레 테이블에 놓인 화분에서 잎을 하나 뜯었다. 생명의 형태라는 것이 느껴진다.
"과장님!"
날 부르는 소리. 다급하지도 않고 내가 잘 아는 목소리인 걸 보니 안심이 들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잘 아는 후임이였다. 이석진 사원. 거의 40줄에 가까워진 나와는 퍽 다르게 30대지만 검은 머리칼에 유독 하얀 얼굴이 합쳐저 소년이라는 인상이 드는 사람이였다. 거의 3년을 봤지만 아직도 신입 시절의 모습과 같아 개인적으로 잘 챙겨주곤 했더니, 종종 날 개인적으로 잘 따르고는 한다.
"응, 석진 씨. 왜 그래?"
"앞에 카페에서 커피 한 잔 하실래요?"
"커피? 나야 좋지. 근데 내가 사줘야 하는 거 아닌가?"
"에이, 공짜 기프티콘이 생겨서 그래요. 과장님 말고는 회사에서 같이 마실 사람도 없으니까."
그리 우스운 이야기도 아닌데 웃음이 났다. 쓴웃음이 더 적절한 말일까. 기분 전환도 좀 할 겸, 손에 쥐었던 잎사귀를 탁자에 놓아두고는 석진을 따라나섰다. 다시 밖으로 나서자 불온할 정도로 더운 난방의 기가 가시고 차디찬 바람이 한번 물러났던 사냥개처럼 다시 몸 이곳저곳을 파고들었다. 입김이 오래 전 피던 담배처럼 뒤로 흩어졌다.
"석진 씨."
"예?"
"이런 건 여자친구 줘서 같이 마시고 그러는 거야."
"에이, 저 여자친구도 없는데요, 뭐."
석진은 영문 모를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남의 속을 모르는 미소다. 마음 속으로 요즘 애들은 다 이런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무시했다. 나와 대여섯 살 정도 차이나는 사람이 소위 요즘 애인지, 내가 '꼰대'가 되어버린 것인지 하는 의문이 밀어닥쳤기 때문이다. 작은 광흥에서 편가르기는 최악이다. 나로서는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된 사실이였다. 이미 회사에 드리운 파벌글. 거기 어쩌다 끼여버린 나. 나는 올라오려던 한숨을 참았다. 선임이 걱정 많아 보이는 것은 부하직원에게 불안감만 줄 뿐이라는 말을 어느 싸구려 자기계발서에서 읽은 적이 있다. 불안한 짓보다는 어느새 도착한 카페의 분위기나 즐기기로 했다. 생각을 놓는 것도 나쁘지 않을만큼 잔잔한 분위기다.
카페 한 구석에 화분들이 가지런히 놓였다. 그 중 하나가 눈에 띈다. 내 탁자 위에 놔두었던 것이랑 잎이며 모양이 닮은 것이 보인다. 내 것은 예전 입사 동기 중 하나가 퇴사할 적에 내게 주고 간 것인데, 저것에 비하면 작고 볼품없다. 카페 화분에 심긴 선명하고 큰 잎. 그 감촉을 생각하다 보니 갑자기 딴 생각이 난다. 나는 목소리를 죽이고 조곤조곤, 석진에게 묻는다.
"저기."
목소리를 까는 것을 눈치챈 석진이 조용히 내 쪽으로 몸을 밀착했다. 석진도 어느 정도 변칙이라는 것에 대해 나만큼은 아니지만 이해하고 있었기에 언제 감추고 언제 시선을 피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말했다.
"그 사람 알아?"
"누구…요?"
"왜, 그 우리 사무실 창가에 앉는 사람이거든? 여자인데. 머리 이렇게 뒤로 묶고…"
"아, 그… 이름이, 그래. 이수정 대리님이요?"
"대리?"
이수정이라는 이름은 한 번도 들어본 바가 없었다. 물론 내가 거의 계획부나 기술부만을 얼쩡거렸다는 것을 시인하고서라도 들어본 적도 없고 본 적도 없는 사람이였다. 혹시 전근이나 발령 왔을지도 모르는 일이였다.
"네. 소문을 좀 들었는데, 이 대리님이 그렇게 유능하다던데요?"
"유능하다고? 어떤 분야인지는 혹시…"
"그러게요. 전 디자인 쪽이라고만 들었는데, 무슨 일을 마법같이 처리한다더라고요……"
석진의 목소리가 이윽고, 무언가 경고를 하려는 듯이 더 낮아졌다. 그리고 그 입 사이에서 보이는 농담에 가까운 미소.
"…진짜 마법이라고 하는 얘기도 있지만."
"그게 무슨 말인데?"
"변칙예술가였대요. 이수정 대리님은."
□□□□
나는 다시 앉았다. 왜인지 한기가 느껴지는 자리라 옷을 더 여미어야 했다.
그래도 오전보다는 괜찮았다. 인수인계니 하는 것들은 대부분 일시적으로나마 끝은 났고, 일은 하지만 배우라 마라 하는 지시가 바로 옆에 없으니 오랜만에 사색할 짬이 났다. 대강 타이핑을 두드리면서 그동안 몇 가지 꼬인 생각들을 좀 정리해서 풀어보았다.
첫째. 부서 이관— 다시 항의를 해 보려 한다. 부장이 아니면 사장에게라도 찾아볼 생각이다. 회사에서 파벌이 나뉘었다면 어쩌면 날 더 원하는 곳에 붙어 힘써볼 생각이다. 객관적으로 오랫 동안 설계와 아이디어 면에서 일했던 내가 다른 일을 하게 된다면 손해보는 쪽은 회사일 것이다.
둘째. 템페스트 명함— 아직 버리지는 않았다. 버리려고 해 봤는데, 이상하게 불안해졌다. 그래서 타협했다. 잘 되면, 이 명함은 인사부든 어디든 제출해서 산업 스파이든 기술 스파이든 그런 명목으로 신고할 것이고 만에 하나 상황이 너무 나빠져서 내게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런 생각은 애써 외면했다.
셋째. 둘에 비하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이수정 대리 이야기다. 우리 회사에 어떻게 변칙예술가가 들어오게 된 건지 궁금증이 생겼다. 디자인 쪽일 수도 있겠지만, 소위 변칙적 디자인이라면 소비자들에게 그런 변칙을 내던지는 것과 다름없어진다. 광흥의 목적은 변칙적 방법으로 일반적 상품을 만드는 것이지, 그런 부류가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아이디어 쪽일 텐데, 아이디어는 내가 일하던 분야가 아닌가. 설마 날 대체할 사람인가, 하는 불안이 도졌다. 내가 사라진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될 것이다. 나는 회사에게 대체되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고 싶었고, 지금도 그랬다. 아마 처음 이곳에 입사할 때부터 그랬겠지.
꿈을 꾸는 사람들이 다 그렇듯이.
—어머니, 아버지.
나는 마른 세수를 한번 하고 다시 컴퓨터를 켰다.
—어머니, 아버지도 이렇게 사셨나요?
지금으로써는 도저히 알아낼 수 없는 질문을 마음 속으로 던지고는, 나는 아주 오랜만에 담배 생각을 했다. 다시 무언가에 깊이 중독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잘 생각해보니 그것이 담배는 아닌 것 같았다.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방향 없고 목적도 없는 충동이 점점 내 일상에 강하게 잠입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다시 한기가 들었다.
□□□□
이수정 대리는 미동이 없었다.
일에 집중하는 까닭은 아니다. 다만 더 집중해야 할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무실의 앉은 쪽에서 북쪽으로 눈을 돌리면, 복도로 향하는 그 쪽에, 무언가가 아른거렸다. 이수정은 확실히 무당 기질이 있는 영능력자 같은 것은 아니지만 대강 감이 좋은 인간이였기에, 처음 그것을 봤을 적부터 무엇인지는 대강 눈치채고 있었다. 귀신(鬼神). 귀신 하면 떠오르는, 목이 제멋대로 꺾이고 머리가 산발이 된 꼴이 아니라 와이셔츠며 검은 바지를 입은 것이였다. 수상할 정도로 멀쩡하게 생긴 그것은,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 이수정에게는 관심도 없는 채 한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과장직에, 자신보다 조금 나이가 많아 뵈는 남자. 단형석이라고 했던가. 이수정은 생각했다. 왜 저 남자가 귀신에게 쫓기는 건지, 사실 답은 명확했다. 저 남자가 누굴 죽이거나 그런 꼴이 되도록 몰아넣는 인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으니, 분명 자기가 설계했다던 '귀신 라디오'에 앙심을 품은 귀신이겠지. 유독 멀쩡한 형태나 미소를 지으며 기다릴 만큼 이성을 갖춘 자라면 확실히 그 세력이다.
심야클럽.
종종 광흥전자와 물밑에서 알력을 빚었다고 알려진 귀신들의 집단. 이런 식으로 빠르게 나타났다 사라지며, 때로는 소리 없이 기습하거나 북풍 같이 소란을 야기해 왔던 자들. 하필 지금 저 일원이 이곳에 있다는 것은, 자기를 못 보는 사람들을 편안히 지나쳐서 목표물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회사 내에 재단이나 그런 자들이 오게 된다면 광흥전자의 손해고, 더 놔둔다면 단형석 과장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이수정은 숨을 들이켰다. 저위협 타입 그린, 변칙예술가, II등급 다기능 현실조정자, 하는 애매한 자기소개가 뇌내에서 솔개처럼 맴을 돌았다. 예술에만 쓰였던 재주가, 삼 년간 벽장에 넣었던 그 재주가, 이렇게 캔버스도 없는 곳에서 쓰이게 되다니. 운명의 장난인가 싶어 불쾌한 미소가 지어졌다.
수정은 펜 하나를 집었다. 푸른 펜이였다. 광흥전자의 색처럼, 그리고 그곳의 색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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