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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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렸을 때, 양쪽 부모님 모두 이 회사에 다녔다.

한 분은 디자이너, 한 분은 기술자셨다. 그분들은 나란히 아침 늦게 출근했다가 나란히 저녁 늦게 돌아오셨다.

부모님이 돌아오시면, 밥상에 둘러앉아 함께 텔레비전을 보곤 했다. 간혹 광고로 광흥전자 선전이 나오기라도 하면, 부모님은 웃으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형석아, 저게 엄마가 디자인한 거야."
"저건 아빠가 만든 거고."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두분은 마주보고 서로 웃으셨다. 어릴 적에는 그런 게 얼마나 멋있어 보였는지…

내가 학교에 다닐 적에도 그런 감정은 아직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온갖 대기업들 중에서도 내가 목표로 했던 직장은 단연 광흥전자였다.
나는 나날이 광흥전자가 쇠퇴하고, 몰락하고, 다시 재건되는 모습을 보며 자라갔다.

진로에 맞춰 학과를 선택하고, 대학교를 졸업한 후 나는 당장 광흥전자로 달려갔다.

몇 년을 그곳에서 일한 후, 나는 비밀스러운 기술을 다루는 초상설계부에서 일할 수 있었다. 나는 금세 새로운 기술을 배웠고 수많은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그리고…


□□□□


어째 내 자리가 휑하다.

탁자 위에 나뒹굴던 잡동사니들은 간 데 없고 다만 샛노란 박스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가만 보니 내 물건들은 다 거기 들어가 있는 모양이다.

"…뭐야."

헛웃음만 나왔다. 남의 자리를 싹 비워버리다니… 이게 무슨 경우인가. 나는 박스 옆에 적힌 종이를 가만 들여다보았다.

부서 이관

단형석 과장은 기술부로 부서 이관되었습니다.


부서 이관? 다행히 해고는 아니였다.
나는 다시 의문에 사로잡혔다. 그런데 왜 부서를 이전한 거람, 내가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 사람인데. 하는 생각에 나는 상자를 집어들고는 당장 인사부장실로 찾아가게 된 것이었다.

인사부장실은 좁고 밀폐된 곳이었다. 방 안은 항상 바깥 공기에 맞지 않게 묵묵히 히터가 가동되고 있었고, 이런 공기는 꼭 냄비 속이나 온실처럼 건조하고 답답한 느낌을 주곤 했다.

"거기 앉게."

머리가 벗겨진 부장이 말했다. 나는 애써 침착한 척, 의자에 얌전히 앉았다.

"…제가 기술부로 이관됐다는 건 들었습니다."

부장은 조용히 고개를 끄떡였다.

"미안하게 됐네."

돌아오는 대답이다.

"아니, 이유가 뭡니까. 아무런 사전 통보도 없이… 제가 설계한 아이디어는 호응이 상당했는데요. 시연회에서도…"

대체 왜? 귀신을 이용한 라디오. 지성이 있는 심령들은 파장에 민감함을 고려해서 전력 소모를 줄일 수 있는 획기적인 발명 안건이었는데… 회사에서도 시도된 바 없는 그런 프로젝트—

"그 프로젝트가 취소됐네."

"…예?"

나는 나도 모르게 들고 있던 상자를 떨어뜨렸다.

"심야클럽 놈들이 손을 쓴 모양이야. 알잖아, 그놈들 귀신 인권이니 뭐니 주장하는 거. 그놈들이 인터넷에 찌라시를 쫙 퍼트려서… 초상 기술 다루는 직원들이 저주니 뭐니, 도무지 이 일은 안 맡겠다는구만."

개수작. 재단도 뭣도 아니고 웬 잡것들이 또 끼어드는 일은 아주 오랜만이었지만 예전과 똑같이 불쾌한 일이었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가 조용히 놓았다.

"그놈들 루머야, 사내에서라도 해명하면 되지 않습니까? 웬만한 직원들은 다 알고 있을 텐데."

나는 다시 자신만만해져서 부장의 얼굴을 살폈다. 그럼에도 그의 주름진 얼굴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 단 과장, 그게 문제가 아니네."

부장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

"요즘 우리 쪽에서 설계된 물품에 온갖 클레임이 다 붙었네. 대부분은 초상 기술로 생산한 것들이지."

"그건—"

"그리고 대부분은 단 과장이 안건을 내놓은 거였고."

부장은 주변을 조급히 둘러보더니 말을 이어나갔다.

"재단, 연합, 거기다 방재원 쪽까지 이쪽을 주시하고 있네. 게다가 웬 놈들은 귀신 학대다, 웬 놈들은 환경 파괴한다… 개인적으로, 더 이상 초상기술이 설 곳은 없는 것 같네."

"그래서, 초상 기술 아이디어를 여럿 낸 저를 이전시킨 겁니까? 기술부로?"

그는 읽기 쉬운 표정으로 침묵했다.

"부장님. 양복쟁이들이 이쪽을 주목하는 건 다 짝퉁이나 상품 때문입니다. 이건 아이디어가 문제가 아니라 기술부 애들이 문제라고요. 제가 얼마나 회사를 위해 열심히 하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입실론 건도 자네가 낸 아이디어에서 발전한 거였지?"

나는 입을 다물었다.

"결과적으로 어떻게 됐나? 더 이런 일이 있다면 그치들은 언제든 이 회사를 헤집어 놓으려고 할 걸세. 연합이면? 이 회사 공장마다 불 나는 꼴 보고 싶나?"

잠시간 침묵.

"대답이 되었을거라 생각하네. 나가보게."

싸늘한 분위기가 온 방에 퍼져나갔다.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조용히 일어났다. 의자가 평소보다 거칠게 끌리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죄송합니다. 부장님."

돌아서는 내 뒤로, 부장은 한 마디를 더 쏘아붙였다.

"자네 애사심은 알지만… 티는 내지 마. 솔직히 다른 사원들은 좀 불편해하네."







오전 내내 기술부 인수인계를 받았다. 기술부 인원 몇이 퇴사한 이후라, 나는 자연스럽게 과장 직급 자체는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음에는 들지 않았다.

인수인계를 두 시간 동안 받는 건 정말 끔찍했고, 들은 것 대부분은 했던 말을 또 반복해서 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수첩을 꺼내 적어보려고 했지만 금세 문자 그대로 정신이 나가버렸다. 나중에 수첩을 펼쳐보니 알아들을 수 없는 것만이 쓰여 있었다. 짜증이 솟구쳤다.

얼마 후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긴 시간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나는 폐인처럼 비틀비틀 걸어나가 근처 설렁탕집에 털썩 주저앉았다. 앉아서 설렁탕이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가게 주인이 물었다.

"손님, 주문하시겠어요?"

…내 정신 좀 봐.

제대로 주문을 끝내고, 다시 벽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생각에 빠져들었다. 내가 만들고 싶은 건 아이디어다. 뇌 없는 기계처럼 남이 시키는 걸 만들고, 그걸 계획하는 일이 아니라. 이 회사를 이름나게 만들만한 아이디어를 짜는 일.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 회사를 위해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했다고 자부한다. 20대에 입사해서 40살이 가깝도록 이 회사에서 벗어난 적이 없을 정도로 일했다. 그러면서 회사가 망할 뻔 한 것도 보았고, 심야클럽 같은 자들에게 협박 메세지도 받았다. 과실 영 대 백의 교통사고를 당했을 적에도 나는 죄인처럼 상사들에게 빌었다.

"…내가 생각하던 광흥은 이렇지 않았는데."

나는 미친놈처럼 실실 웃었다. 광흥은 부모님께서 항상 즐겁게 일하시던 곳이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부모님도 나와 다를 바 없으셨겠지. 새벽밥을 드시고 저녁 늦게 돌아오셨으니까. 그리고 내 앞에서는 힘들지 않은 척을 하셨으리라. 내가 자신만만하게 광흥에 입사한다고 했을 적 부모님의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님."

눈에 이슬이 고였다.

"손님!"

"예, 예?"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설렁탕 나왔는데, 안 드세요?"








잿빛 연기가 피어올라 차디찬 허공에서 춤춘다. 담뱃불을 비벼 끄고는 쓰레기통에 던져넣었다. 빨간 불빛이 사그라들었다. 담배끊어야 한다, 생각은 하는데 무릇 중독적인 것들이 다 그렇듯 특히나 오늘 같은 날이면 끊을 수가 없다.

마스크를 올린 뒤 회사로 돌아가려는데, 누군가 등을 건드렸다.

"저기요."

저승사자를 연상시킬 만큼 유독 새카만 정장을 입은 여자. 우리 회사 사람인가? 처음 보는 얼굴인데.

"안색이 안 좋으신데, 무슨 일 있으세요?"

"…저는 도 안 믿습니다. 무신론자입니다."

나는 황급히 몸을 돌렸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

"저기요, 광흥전자 다니시죠?"

"…예."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 근처에서 가장 유명한 회사는 광흥전자이니, 짐작해 알아맞춘 것이겠거니 하고…

"아, 좋아요. 단형석… 과장님이시죠? 설계부 과장님."

이번에는 경우가 달랐다.

"뭐야, 당신… 어떻게?"

나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지금은 명찰도 가지고 있지 않고, 나를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도 아니다.
뺨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나는 조용히 휴대폰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때 또 다른 질문이 날아왔다.

"어머, 그 휴대폰도 살아있는 건가요?"

일순간 싸늘한 공기가 흘렀다.
이건 스토커나 경쟁사 협박이 아니다. 어떻게 초상 상품까지 알고 있는 거지?

"당신. 재단인가? 아니면 방재원?"

양지 기업이 아니야. 분명 어떤 비밀 조직이 보낸 것이다. 대체 누가?
여자는 생글생글 웃으며 이쪽으로 거리를 좁혔다.

"아니에요. 무슨 그런 말을 하시나."

여자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나는 분명 총이겠거니, 하고 다짜고짜 뒷걸음질치며 비명을 질렀다.

이렇게 양복쟁이 새끼들한테 총 맞아서 죽고 싶지는 않았는데, 아직 결혼도 못 해보고… 진급도 못 했는데.

몇 초가 흘러도 총성이 나지 않자, 나는 조용히 눈을 떴다.

손에 들려 있는 건 잿빛 명함이었다.


앤더슨 로보틱스

사원 한설연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앤더슨 로보틱스 사원, 한설연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여자는 명함을 내밀었고, 나는 얼떨결에 받아들었다. 명함에서는 선명한 광택이 나고 있었다.
앤더슨 로보틱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다. 아마 음지 기업 중 하나겠지.

"…당신 지금 날 빼오려고 하는 거군. 광흥전자에서."

나는 코웃음을 쳐 보였다.

"미안하지만 잘못 선택했어. 나는 광흥에 대한 애사심 하나는 철저하거든."

나는 명함을 돌려주려 했지만, 여자는 손을 뻗지 않았다.

"다 알고 왔어요. 단형식 과장님. 요새 사정이 말이 아닌 것 같던데요."

대신 그녀는 조용히 웃어 보였다.

"솔직히 단 과장님은 초상 기술 설계 전문가나 다름없는데, 과장님을 부서 이전 시키는 건… 회사 전체가 일반 기업으로 되돌아가려는 거죠."

나 또한 건조하게 웃었다.

"…정말 잘도 아시는군."

"광흥전자와는 달리 저희는 초상 기술을 계속해서 이용해 나갈 겁니다. 그러려면 당신 같은 인재가 많이 필요하죠."

내 손의 명함이 다시 한번 빛났다. 마치 반딧불처럼.

"정식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단형식 씨. 앤더슨 로보틱스에 입사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리고 점심시간이 느릿하게 끝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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