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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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와서도 지희는 가끔 그 날을 생각한다. 과연 그 날의 일은 우연이었을까.

그 날은 몹시 추웠다. 눈이 많이 내린 날이었다. 대전역 승강장에서 사람들은 연착된 기차를 기다리며 떨고 있었다. 지희도 하염없이 늦어지는 기차를 기다리며 자판기 커피로 손을 데우던 날이었다. 남자가 말을 걸어온 것은 커피를 반쯤 비우고서였다. 춥지 않으세요. 그렇게 말하는 그 자신도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지희는 이 사람이 참 웃기다고 생각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을 거는 이 사람은 동생 성호를 떠올리게 했다. 성호는 친구가 많았다. 동네 복덕방 아저씨부터 이층집 꼬마까지 모두 성호의 친구였다. 이 사람처럼 아무렇게나 말을 걸어서 그랬던 걸까. 이제 따듯해지겠죠, 동지도 지났는데. 삼한사온이라잖아요. 이 사람도 친구가 많을까, 생각하며 지희는 의미없는 말들을 흘렸다. 성호에게도 이렇게 말했었던가. 지희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성호와의 기억은 단편적인 조각만 남아 있었다.

남자는 옆자리였다. 두 사람은 이 우연을 가지고 한참을 얘기했다. 그는 철물 공장에서 일한다고 했다. 냄비를 만드는. 지희의 집에도 있었던 브랜드다. 그을어 까매질 때까지 그 냄비에 라면을 해 먹었다. 이 이야기를 듣자 그는 반색하며 모델명을 물었다. 사용자들이 모델명도 외우고 다닌다고 생각하는 걸까. 지희는 또 웃음이 나왔다. 주황색 고무 손잡이가 있는 냄비였다. 그는 금세 알아들었다. 한참 동안 늘어진 제품 자랑을 지희는 못 들은 척했다. 지희는 항상 성호와 라면을 해 먹었다. 지희의 부모도 공장에 나가셨다. 하루는 성호가 달걀을 가지고 왔다. 학교 앞에서 파는 병아리를 암탉이 되도록 키운 친구놈이 있었더랬다. 성호는 닭이 알을 몇 개나 낳냐고 물었다. 생물 선생더러 물어보겠다고 지희는 대답했다. 그 날 저녁 둘은 계란을 푼 라면을 먹었다. 지희는 라면의 맛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다음 날 생물 선생이 뭐라고 대답을 해 주었는지 지희는 기억하지 못했다. 사실 지희는 생물 선생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에 남을 만한 위인이 아니기 때문이었을까. 지희는 남자에게 성호의 질문을 물었다. 놀랍게도 남자는 매우 자세하게 알고 있었다. 어릴 적 부모님이 양계장을 하셨더랬다. 남자는 또 닭의 행태에 대해 한참을 떠들었다. 기차가 터널을 지날 때쯤, 지희는 잠에 빠졌다. 짧은 시간에 지희는 꿈을 꾸었다. 끝없이 떨어지는 구멍 속에 성호와 함께 떨어지고 있었다.

구명 벽에 박힌 누군가가 떠들어댔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생물 선생이. 성호는 떨어지면서도 라면을 먹고 있었다. 계란을 푼 라면을. 라면을 먹고 난 다음 날 아침엔 어떤 일이 있었나. 지희는 떠올려냈다. 얼굴이 퉁퉁 부은 성호가 지희를 보고 한참을 웃었다. 지희는 방에서 거울을 가져와 성호에게 보여줬다. 성호는 한참을 더 웃었다. 그리고 그 날 저녁엔… 지희는 그날 저녁을 기억해냈다. 그리고는 잠에서 깼다. 남자가 언제 샀는지 훈제계란을 까먹고 있었다. 지희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지희는 계란이 싫었다.

지희가 깨어난 곳은 병원이었다. 남자가 의사와 얘기하고 있었다. 지희는 슬펐다. 남자가 옆에 다가왔다. 서울에 도착했는데도 안 일어나길래 한참을 깨웠더랬다. 그제서야 창백한 안색을 보고 정신이 들어 구급차를 불렀더랬다. 지희는 고맙다고 했다. 그 순간 자신이 고마워하고 있었던가? 지희는 알지 못했다.

지금 와서도 지희는 그날의 남자를 생각한다. 과연 그 남자를 만난 건 우연이었을까. 지희는 KTX 차푯값을 알고, 학점의 중요성을 알고, 토익에 나올 단어를 알던 학생이었다. 지금, 남자를 만난 그는, 성호를 알고, 라면을 알고, 냄비 속의 계란을 안다. 그리고 지희는, 실패한 기억 소거의 슬픔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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