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자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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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지났을까.

월영은 눈을 뜨고 자신이 방안에 누워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황급히 일어나려고 했지만, 몸은 생각만큼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는 찬찬히 상체를 일으켰다. 허리에 힘이 들어가며 뼈가 쑤셔왔다. 며칠을 광 안에 처박혀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간신히 앉은 자세를 취한 월영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방은 단출했다. 지금까지 월영 자신이 덮고 있던 솜이불과 침구를 제외하면, 방 안에는 문갑과 벽면에 걸린 족자밖에 없었다. 족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

격물, 정신이 있으매 만물의 이치를 연구함이요.

치지, 이치를 곰곰히 사고하매 지식이 지극히 됨이요.

성의, 지극한 지식으로써 추측하매 펼칠 뜻을 성실히 함이요.

정심, 뜻한 바를 계획으로 빚으매 원하는 마음을 바로함이요.

수신, 계획하여 원하는 바를 발명하매 몸과 마음이 수양됨이요.

"그리하여 수양된 몸과 마음이 곧 대부께옵서 뜻하신 바일지어다."

아주 자연스러운 기작처럼 월영의 입에서 말이 흘러나왔다. 지난날 모든 정신을 다 바쳐 외우고 익힌 일련의 구절들. 뇌리에 박혀 지워지지 않는 금언이었다. 총 열 개의 글자 안에 세상의 모든 진리가 다 들어있다고 믿었었지. 그 열 글자만 파면 모든 게 다 이루어지는 줄 알았지. 그 열 개의 글자를 배우기 위해 수만 권의 책을 읽고 외우고 되뇌었다. 그 길의 끝은 필히 질서로 이어지는 줄 알았었다.

월영은 해지고 더러워진 자신의 옷소매를 내려다보았다. 헛웃음이 나왔다.

문이 벌컥 열렸다. 월영은 고개를 돌려, 밥상을 차려 들고 들어오는 한 여자를 바라보았다. 흰 저고리에 갈색 치마를 입은 이였다.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었다. 방금 잠에 깨어나서일까, 월영은 제대로 인식할 수가 없었다. 상대 쪽에서 무어라 아는 척이라도 했더라면 금세 알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입을 꾹 다물고 밥상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월영의 시선을 느꼈는지 못 느꼈는지, 여자는 월영의 앞에 상을 내려두고는 곧바로 밖으로 나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잠깐만."

여자가 멈칫하면서 그 자리에서 움직임을 멈추었다.

"…너, 세령이냐?"

여자는 월영을 돌아보지 않았다. 잠시간의 침묵이 지난 이후, 차가운 목소리만이 돌아왔다.

"말 붙일 염치는 있었소?"

"그게 무슨 말이냐."

여자, 세령이 몸을 틀어 뒤를 응시했다. 월영은 흠칫 놀라 눈을 부릅떴다. 세령의 눈길에서는 전에는 느낄 수 없던 크나큰 감정이 가득 배어 있었다.

혐오와 질시, 그리고 배신감.

"…세령아."

세령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그 눈빛으로 월영을 한 번 쏘아보고는, 문밖으로 사라질 뿐이었다.


e. 저 대성당 해방Liberation of the Cathedral 동안 유지보조 수단으로서 구역을 단절시킴을 총대주교 또한 제안하신 바 있으나, 이는 매우 극심한 구조적 고장에 한하였다. 웬만큼 극심한 경우라도 구역 단절은 권장되지 않는다.

f. 성인께서는 '영혼' 같은 인간적인 의미의 온건함이 아니라, 산업과 생산 속의 온건함을 이른 것이다. 규격화를 계속 이어가고 메카네의 뜻에 따르고자 한다면, 규격화한 기술은 어떠한 자원으로써라도 생산과 확장, 개선을 거듭해야 한다. 그러지 아니함은 저 살덩어리의 혼란스런 무의미함에 굴종하는 것이다.

8. 셋째 딴지꾼, 곧 피니언(Pinion)이라 하는 자가 성 트루니언께 가로되,

9. "수녀특사님, 지혜롭고 또 메카네의 법칙을 이해하기가 방대한 이시여, 저 변속기를 반드시 파괴해야 함에는 저 또한 동의합니다. 그러나 저것은 생산라인 8b 제92구역의 구조 속에 통합된 상태입니다. 저것을 제거함은 곧 해당 구역을 완전히 해체하는 데 이르러, 생산량에 불인견(不忍見)한 충격을 줄 것입니다. 저는 해당 구역e을 완전히 단절시켜 대성당의 나머지와 떨어뜨려 놓음으로써 저 살덩어리의 토사물이 외로이 죽을 수 있도록 이끄는 방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0. 그러자 성인께서 제1형 Mark 0(시험용) 스팀 드라이버1를 손에 쥐어 그자의 심장에 철로 된 축복을 내려치고 가라사대,

11. "그대의 말에 아첨이 뚝뚝 묻어나 충실한 이들을 유혹하는구나. 대성당의 어느 한구석이라도 살덩어리에게 바쳐 방기(放棄)함은 규격화한 부위를 살덩어리에게 바침이나 다름없네. 메카네의 도식 속에는 온건함f을 노래하는 자리란 없다네."


성님!

어, 세령아.

차, 차기 두인으로 뽑히셨다고 들었구만요.

응? 그래, 그렇게 되었구나.

다들 역대 최연소루 차기 두인 지위에 오르신 거라고들 그래라우!

하하, 허나 그만큼 나는 못 미더운 차기 두인이 될 게다.

왜, 왜요? 성님이 을매나 겁나게 열심히 공부하셨는데… 다른 문하생들보다두—

그런 말 함부로 말어라. 그분들은 오래, 깊게 공부하시는 분들야. 학문에 큰 뜻을 품었기에 이런 직함에 연연치 않으시는 게지. 바꾸어 말하자면 내가 가장 유약하기에 이런 자리를 얻을 수 있었음이란다. 나는 너희 아버지와도 다른 처지니까.

아바닌…

엄청나신 분이지. 그분 밑에서 배우는 건 내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영예일 것이다.

저, 저두…

응?

저두 성님 밑서 배우고 싶어라우.

…하하.

우, 웃지 마요!

그래, 그러면 좋겠구나. 월재하고 네하고…

워, 월재요?

왜, 월재가 또 괴롭혔느냐?

그건 아니지만…

사이좋게 지내다오, 둘이 연배가 같으니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지 않겠느냐…


"…내 누이, 지금 어뗘요?"

"아야, 언제까지 물어볼 것이냐? 나도 모른다." 상철이 귀찮은 듯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나도 짐까지 순례 준비하느라 한 개도 신경을 못 썼다고 하지 않았느냐. 장월영, 아니 강월영, 그러니까 네 누이가 풀려난 것도 인제야 알았다."

"그래두, 뭐 못 들으셨시요?"

"유향소서 심가 데리고 오란 말만 들었다고 했잖느냐. 걱정도 원."

"걱정 아이라고요. 저는 암시랑토 않어요. 그, 우리 할아버지땜시."

노인은 속이 다 보이는 거짓말에 아무런 첨언도 하지 않았다. 월재는 꽤나 동요하고 있었다. 제 누이의 죄로 이미 마을의 수군거림을 당해온 마당이다. 원망도 있었겠으나, 걱정이 더 큼을 노인은 알고 있었다. 제 형제가 아니던가. 죄를 지었다한들 혈연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설마…고문하구, 그런 건 아니지요?"

"예끼 인석아, 경을 칠 말은 꺼내지도 말어라!" 상철이 인상을 찌푸리며 쏘아붙였다. "도리가 있고 규율이 있는 것이다. 괜시리 거시기헌 말 허지 말고 싸게 따라 오니라. 나도 맴이 좋은 거 아니다. 누가 그리할 줄 알았겠느냐?"

"허지만…"

노인은 월재의 어깨를 두드렸다. 월재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노인을 바라보았지만,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은 지하 1단으로 올라가는 승강기 안에 서 있었다. 순례관 업무로 유향소를 자주 드나드는 상철과 달리 월재나 원종은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더욱이 월재는 지금껏 지하 1단 이상으로 올라가 본 적이 없는 고로 충격이 훨씬 더한 모양이었다. 놀라움과 경외, 걱정이 섞인 월재의 얼굴은 오묘해 보였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는 듯한 그 표정. 노인은 그 놀라우리만치 친숙한 표정이 자신의 얼굴에도 떠올라 있으리란 예감에 몸을 떨었다.

"나리, 송사는…" 원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방금 취소되었네. 그란해도 자네가 가져온 소식이 전해진 담부터 유향소 사람들이 아닌 이들에게 송사를 공개해야 할지 의견이 분분했는데, 두인께서 결정을 내리신 게지. 사람들이 보기에 매급시 그리하셨다고 보실지는 모르겠으나… 두인께선 그 역시 감당하겠다는 것이네." 상철이 약간 자랑스러워하는 기색을 드러내며 대꾸했다.

승강기가 덜그럭거리며 작동하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노인은 오가는 대화에 하나도 집중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원종과 상철, 월재의 목소리가 계통 없이 인식되고 사라져 갔다. 노인은 갑자기 자신이 늙은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감정은 목의 근육을 긴장시키고 혀를 굳게 만들었다. 이제 그 모든 오명과 실망의 늪에서 벗어나는 길목 위에 서 있는데, 갑작스레 전달된 정보의 무게는 그를 그 길목 위에 멈추어 서게 만들었다. 부서진 신을 섬기는 오랑캐 선교사들… 월재나 원종, 심지어는 상철보다도 노인이 그 정보에 대해 느끼는 충격은 더욱 거대했다.

"원종, 아까 그 이야기를 더 해보게. 그 선교사들에게서 더 특별한 건 못 보았다던가, 자네의 친우가?"

"저, 어르신, 그 이야기는 시방 사사로이 하기엔—"

"이리된 거 인자 어찌 하겠나? 나는 들어야겠네."

노인이 단호한 어조로 상철에게 대꾸했다. 상철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 그란께, 그놈 하는 말이…" 원종이 불분명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두 놈이었다 하덥니다. 하난 뒤에 처져 짐을 지고 있었는디, 보니 꼭 짐꾼이드래요. 느자구 없는 상판으로 인상을 요로코롬 팍 쓰고 있었다 하고. 한 놈이 앞에서 이야길 막 해댔는디, 그놈이 대가리일 거라카드군요."

"둘밖에 안 왔다면, 아마 더 올 수도 있겠군."

"꼭 양이 선교사들이 그라제요. 자릴 터억 잡구, 이게 되는 장사다 싶으면 바로 걸뱅이마냥 온갖 문짝을 두드리고 다니당게요." 원종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음을 흘렸다. "암튼, 녀석이 일자무식으로 장돌뱅이로만 구르다 보니 정보가 영 시원찮긴 해라우. 제가 들은 건 그게 답니다."

"확실히 그네들이 월영이 한 그 이야기에 부합하는 학문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겠군."

노인은 입을 다물었다. 턱관절에 자극이 가해지는 것이 천천히 느껴졌다. 먼 옛날 나누었던 대화가 기억났다. 실로 오랜만에 두통이 이는 것만 같았다.

"이건 거, 확실치가 않기는 헌데…" 원종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덧붙였다. "이 녀석이 그 떠벌이를 보니 그 요상시려운 의복 사이서 뭐가 번쩍이는 게 있다 그랬어라."

"번쩍이는 거라니?"

"그걸 모르겠단 말이라우. 칼이라도 찼나?"

칼, 혹은 무기라면 평범한 선교사는 아닐 것이다. 삼산도 땅을 점령한 영길리의 군대. 만일 이들이 그들과 관련이 있다면, 만일 이들이 그들의 수괴라면… 더욱 위험할 것이다. 단지 수신도의 사상뿐만 아니라 수신도의 사람들 자체에 위협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수신도는 임란 때 왜에게 당했던 것 이상으로 큰 피해를 보게 될 것이다.

노인의 생각은 월재의 느닷없는 끼어듬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그거 보철 아녜요?"

노인은 말없이 월재를 돌아보았다. 원종과 상철의 얼굴에도 서서히 의혹과 충격이 조금씩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자신들의 몸에 자리하고 있는 보철을 내려다보았다.

만약 그게 보철이라면…


b. "딴지꾼은 논쟁을 거부하는 자요 논쟁의 흐름을 파괴해 메카네의 진리에 다가가는 것을 방해하는 자이니 곧 살덩이로다" -성 제조사 배플, 《논쟁의 흐름》 中

c. 《도식》 제4.13.32.9X-2권은 당시 이단들에 의해 이루어졌던 대규모 《도식》의 유출 사건과 이로 인해 벌어진 이단 공장들의 설립과 성전 등의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다.

d. 과한 분노는 사고를 좀먹지만, 분노해야 할 때조차 분노하지 못한다면 비옥한 사고를 해쳐 질서와 규격화마저 저버리게 되리라 -성 발명자 다이어프램, 《해석기관을 위한 질서잡히고 규격화된 의사표현》 中

2. 그 바로 아래 딴지꾼Naysayerb이 그의 제4형 연철판 고속 진동식 음성 생성기2로 말하니 《도식》이 먼 땅까지 전해져 먼 땅에서 대량생산의 예가 행해지고 있음에도c 사람이 질서와 규격화의 진리를 행하지 않는 것은 먼 땅 사람들의 성정이 완악하고 그들의 불신을 고칠 도리가 없기 때문인데 어찌 메카네의 진리를 품은 사절단을 그런 업무에 낭비해야만 하나이까 하니

3. 성인께서 딴지꾼의 제4형 연철판 고속 진동식 음성 생성기에서 나온 음파가 그분의 제4형 Mark XII 고막용 진동막3을 진동시키는 것을 느끼셨다.

4. 그분께서 딴지꾼이 대성당에서 말하고 있음을 아시고 제7형 Mark V 음파증폭기4에 그분의 고막 진동막을 연결하시어 비행선 안의 모든 이들이 딴지꾼의 말을 듣게 하시니 비행선 안의 이들 중 분노d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래, 아침은 주고 왔고?

…네.

어떻더냐?

무엇이… 말이옵니까?

월영의 상태 말이다.

…그런 자의 상태는 어찌 괘념하십니까?

그런 자라 괘념하는 게다.

너는 월영이 그리도 미우냐?

…죄인입니다.

내 제자다.

전통을 배반한 년입니다.

진실을 배반하진 않았지.

지금 저년의 말을 믿으시는 겝니까…?

…하하.



"두인을 뵙습니다. 부르셨다 들었습니다."

원종이 앞으로 걸어나가 두인에게 허리를 숙였다. 그들은 유향소 중앙 마당에 들어섰다. 두인은 그곳에 서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청마루에는 두 사람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월영이었으며 다른 한 사람은 노인이 알지 못하는, 나잇대가 월재와 비슷해 보이는 여자였다.

둘은 대청마루의 양옆에 앉아 있었다. 월영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수척해져 있었지만, 적어도 기력은 돌아온 것이 분명했다. 그는 눈을 감고 정자세로 좌정해 있었다. 반대편에 앉아 있는 여자는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별다른 예를 갖추지 않았다. 그 자리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왔군. 헌데 둘은 내가 부른 기억이 없구려." 두인이 무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둘 다 오랜만이오, 강월재와 최성록."

둘의 이름이 호명되자 월영은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휘청거리면서 대청마루 아래로 내려오려고 시도했다. 쉰 목소리로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기침에 막혀 말이 나오지 않는 듯했다. 노인과 월재가 달려가 월영을 일으켜 세웠다.

"여기 어찌 오신 거에요." 월영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지키는 이들이 막았을 텐데…"

"지키는 사람들 없었어. 순례관 나리와 함께 왔어." 월재가 노인 대신 대답했다. "이 반편아, 그러니까 나대고 다니지 말래도…"

"입 걸은 건 여전하구나." 월영이 쏘아붙였다.

오가는 말은 거칠지 몰라도 월재는 월영을 조심스럽게 부축하고 있었다. 월영 역시 그런 월재의 도움을 피하지 않았다. 노인은 월영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두드렸다.

"외조부님."

"몸은 상치 않았느냐."

"저는 괜찮습니다."

월영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더 잇지 않았다. 그 무언의 대답이 무얼 염려하는 것인지는 알 수 있었다. 두인의 뜻을 거역하면서까지 자신을 만나러 온 게 아니냐는 물음. 노인은 그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 지금까지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던 두인에게로 몸을 돌렸다.

"사정은 이미 들어 알고 있소이다."

"신이 부서졌다 말하는 양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벌써 들었단 말이오?"

"두, 두인 어르신, 송구합니다."

원종이 잽싸게 바닥에 엎드렸다. 두인은 전혀 동요하는 모습 없이, 단지 원종에게 그만 일어나라는 손짓을 할 뿐이었다.

"그렇소, 그들이 들어왔다 하오."

"허먼?"

"허면이라니?"

"방책이 있느냔 말이오."

두인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유향소의 모든 공기가 조용해지며 정적이 흐르기 시작했다. 두인의 걸음걸이는 담대했지만 모래 하나 밟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지극한 체화의 경지라고, 노인은 생각했다.

"방책을 구할 정도로 이 사안이 심각하다 여기는군."

"심각하니까."

"심각한 건," 두인이 조용히 말했다. "그대의 손(孫)인 것 같소만."

"그건 의문의 여지가 없지." 노인이 담담하게 말했다. "감히 스승의 영을 어기다니."

두인이 흥미롭다는 듯이 고개를 까닥였다. "난 그대가 그대의 손(孫)을 지키러 온 줄 알았는데."

"아니, 두인의 생각이 맞소. 난 나의 손(孫)을 지키러 온 거요. 내 손녀의 행동에는 문제가 있지만 이 아이의 말에 문제가 있다고 보진 않거든."

두인의 시선과 노인의 시선이 부딪혔다. 서로를 강하게 밀어내는 시선의 충돌은 분위기의 온도를 서서히 높여갔다.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사문난적이란 죄명을 모르시오?"

"굳은 머리가 초래할 수많은 죄악은 알지."

두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월재와 월영, 원종과 상철은 아연하게 그의 웃음을 바라보았다. 두인이 미치기라도 한 건가? 노인은 그 웃음에 딱히 놀라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내 유향소를 떠난 지 스무 해가 지났으나 여직 이 마을이 어찌 돌아가는지는 알고 있소. 마을에는 차기 두인, 지금은 천더기 취급받는 저 차기 두인이 미쳤다는 풍문이 자자하오. 그게 바로 다가오는 변화에 대해, 처음으로 이 마을이 보이는 반응이오."

노인이 한숨을 내뱉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 어찌 할 거요?"

두인이 입꼬리를 올렸다.

"성록, 그대가 보기에는 어떻소."

"내 판단을 묻는 거요?"

"그대가 이리 나올 제엔 언제나 나름의 답을 구한 다음이라는 것을 알거든."

노인은 물끄러미 두인을 응시했다. 아주 오랜 과거의 일이 뇌리에 떠올랐다. 스승님 앞에서 각자의 학문을 펼치던 시절. 나름의 논리를 조립하여 질서를 구하던 시간의 그들. 그러한 날들은 찬란하고 숭고한 심상으로 그의 마음 안에 남아있었다. 노인은 그날의 자신을 떠올렸다. 다시 그날로 돌아간 것 같은 감각이 용솟음쳤다.

"두 가지 선택지가 있을 것 같군." 노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차기 두인의 입을 막아, 여태의 평화를 유지하던지. 아니면 진짜로 대부께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알아보던지."

"그대는 이미 내 선택을 알지 않소."

"내가 기억하고 있는 장계남이라면야 후자를 택하겠지." 노인은 덤덤하게 대꾸했다. "그러나 나는 두인에게 묻는 거요. 경쟁 상대이자 친우였던 최성록으로써 장계남에게 묻는 게 아니라, 단지 마을 주민으로서 두인에게 묻는 거란 말이오."

두인은 잠시 말없이 노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노인의 시선과 두인의 시선이 맞닿았다. 두인이 먼저 시선을 돌렸다.

"도대체, 외조부나 그 손녀나 이리 노려보는 것이 비슷하니."

두인은 고개를 돌려 월영에게 헛웃음을 지어 보였다가, 대답했다.

"두인으로서도 마찬가지요."

두인은 다시 노인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흐르지 않는 물은 썩기 마련이며 굴러가지 않는 바퀴는 녹이 슬기 마련이다. 이 말을 기억하시오?"

"…스승님의 가르침이었지. 어찌 잊겠소."

"그대와 같이, 나는 그런 말을 한 유자(儒者)의 제자요. 이 마을이 어떻게 나아갈 것인지, 그것은 두고 봐야 할 일이나 진정으로 수신도의 도리를 추구하는 자라면 적어도 이 모든 상황이 어디론가 이어질 것인지 알아봐야만 할 것이오."

그리고는 두인은 월영에게로 다가갔다.

"네가 해주어야만 하는 일이 있다."

두인의 시야에 월영의 눈동자가 비치었다. 노인의 눈동자였다. 노인의 눈동자와 너무나도 닮은 그 광채. 보철로도 숨겨지지 않는 것이 있다. 어떤 연결은 그 모든 것으로도 지울 수 없었다.

"쉽지 않은 일일지도 모른다. 행하다가 다칠 수도, 심하면 죽을 수도 있다."

두인은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해야만 하는 일이다."

노인은 어떤 불안에 휩싸여 두인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의 등은 굳건한 위엄이 서려 강인해보였다. 그런 강인함이 무얼 낳을지, 그는 알 수 없었다.

"내가 허한다. 이 마을을 떠나, 그들을 찾아가거라."



…세령아.

…네, 아버지.

수신도가 지금까지 이 좁은 굴 안에서 얼마나 오래 지내왔는지 아느냐?

우린, 나아가 이 조선의 유학자들은, 이 굴 밖을 나가본 적이 없다.

우린 하물며 대부께서 정확히 어떤 모습인지조차 모른다.

월영은 대부를 만나고도 살아남은 유일한 자다. 그리고 지금, 삼산도에서 우리의 도를 같이 하는 자들이 오고 있다.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이 너무도 의심스럽지 않더냐?

…아버지.

나는 월영을 믿는다고 할 수 없다. 허나 의심할 수는 있지.

우린 그의 주장을 탐구하고 검증해야 한다. 그게 어쩌면 우리를, 이 수신도를 다시금 갈고 닦는 길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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