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벽, 양주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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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질서와 규격화의 표본이요, "계획"의 실현인 산업의 대성당은 온 신앙의 땅의 모범이 되리니. - 수사도식사 사이펀(Syphon), 《성당 건립에 대한 명상》

8. 종이 울리매 그제야 산업의 대성당c의 모든 것이 질서 잡힌 움직임으로 행하니

9. 모든 곳에 불 들어오고 규격화된 움직임 소리 흥겹더라.

10. 성 엔리히너 내게 말씀하시니, "너 먼 땅에서 온 자여, 마땅히 알라.

11. 시간이란 가장 귀중한 원료이며, 가장 한정된 자원이다.

d. 시침과 분침과 초침의 선율이 조화를 이룸은 곧 규격화 내의 조화를 일컫는 메타포이니라. - 수녀대사 이젝터(Ejector), 《시간과 질서에 대한 논증》

12. 시계d.란 시간의 유일한 측도이며, 모든 공정의 준거다.

13. 따라서 규격화된 제조공정의 근본은 이에 있나니,

14. 시계를 흠모함은 곧 규격화의 길이니라."

— 권제19.93.V-28: 시간과 괘종시계의 성스러운 변환에 대하여 中


인공 햇볕이 옅게 내리쬐었다. 최 노인은 새벽녘의 싸늘한 공기의 흐름을 몸으로 느끼며 기지개를 켰다. 때는 어느새 묘시(卯時). 이른 아침이었다.

노인은 방 안에서 몸을 일으켰다. 찬 공기가 문을 두드리며 진입을 시도하는 것이 느껴졌다. 노인은 문을 열지 않았다. 바깥에 도사리고 있는 차가운 것은 공기뿐이 아님을 이미 알고 있기에.

그는 한참 동안이나 멍하니 서 있다가 아침이면 으레 그러하듯 솜이불을 정갈히 접어 방 한구석에 밀어두고, 방 밖으로 나섰다. 문지방을 넘을 때는 전에 없이 통증이 일었다. 나이를 먹었으니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 그 원인을 찾게 되었다. 인간으로 태어난 자들에게 주어지는 굴레라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항상 원인을 바깥에서 찾는 일. 극기와 수양의 삶을 저해하는 가장 큰 마음의 살덩어리.

노인은 대청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문 너머로 일찍부터 일어난 이웃들이 느릿느릿하게 돌아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도시 벽을 타넘고 돌아다니는 햇살은 잠든 몸을 깨우듯 부드럽게 이동했다. 안온한 정경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왜 이다지도 낯설은가.

등 뒤에서 부루퉁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아, 이리 일찍이 일어나야 해요? 할아버지도 참, 잠도 없소!"

노인은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외손자인 강월재가 졸린 눈을 비비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아침 산책이나 하자고 불렀는데, 영 졸음을 이기지 못하는 눈치였다. 노인은 말없이 월재를 바라보았다. 인상을 찌푸리는 방식은 제 아비를 닮아 있었고, 찌푸려진 눈썹은 제 어미를 닮았다. 제 어미의 눈썹은 다시금 노인 자신을 닮았으니 월재는 그를 닮은 셈이 된다. 성질머리 하나 말고도 닮은 점이 있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깨달았다는 점이 우스워서 노인은 잠시 헛웃음을 흘렸다.

"이 녀석아, 말이 많다. 잠이나 깨거라."

이제 조금만 있으면 외손주 녀석은 이 도시를 떠난다.

그 당연한 사실이 언뜻 무섭게 느껴진다.

"준비는 다 되었느냐?"

"아유, 준비야 뭐."

월재는 당연한 것을 물어보느냐는 투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피식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 열정을 이해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느 쪽이냐 하면, 노인은 제 외손자와 같은 부류였다. 다가올 새로운 도시들과 사람들, 어쩌면 만날 사랑이나 우정. 그런 관계와 새로운 것들이 풍기는 내음은 다분히 유혹적이었으니까.

"그래… 언제 나간댔지?"

"내일 새벽이어요. 그때까지 마을 어르신들께 말씀도 듣고, 구해야 할 물품도 좀 들어 두고, 친척들도 만나 뵙고…"

"긴장되냐?"

"아이, 긴장은 무슨."

노인은 무표정한, 그러나 눈빛만은 따뜻한 표정으로 등을 돌렸다. 노인이 걸음을 멈추자 월재도 덩달아 걸음을 멈추었다. 월재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힘에 부치면 이야기해라."

노인은 손자의 입가에 간간이 이는 진동을 바라보았다. 월재의 얼굴은 밝았지만, 밝은 만큼 굳어 있었다.

"힘은 무슨, 할아버지, 댁 손자가 어딜 떤다구 그래?"

"내가 언제 떤다 그랬냐."

"아, 아무튼."

긴장은 이 도시의 주민들이 으레 한 번은 겪는 일이었다. 수십 년 전, 그가 이 도시를 떠나던 아침에도 그랬다. 순례자들을 위한 몇 시간의 자유 시간. 그 자유 시간을 젊은 날의 노인은 객집에 앉아 멍하니 보냈다. 미래에 대한 흥분, 그리고 그가 짊어진 책임의 무거움은 마치 한몸인 것처럼 하나가 일어나면 다른 하나가 일어났고 곧장 으깨졌다. 삶이란 어떤 작동 기제라도 되는 것처럼 신비로웠고 알기 힘들었다. 이제 그 삶을 진정으로 살게 되는 젊음의 혈기란 주체하기 힘든 법이다.

"너무 걱정 마라. 사람은 어디서나 살게 되어 있다."

"…"

"무어가 그리 걱정이냐?"

"뭐… 걱정은 읎어요. 괜시리 부정 탈 생각은 뭣 하러 하게요."

걱정이 없는 예비 순례자는 없다. 노인은 손자의 얼굴로 무심한 시선을 던졌다. 객집에 앉아 있는 동안 뇌를 돌아다닌 생각들의 꼬리를 잡기 바빴던 시간을 회고할 때면, 그 명제는 마치 진리라도 되는 듯이 떠올랐다. 월재는 마치 그때의 자신처럼 불안해 보였다.

"밖이야 네가 알아서 할 것 잘 안다. 그걸 헤쳐나가는 것이 네게 주어진 길 아니더냐."

노인은 잠시 주저하다가 말을 이었다.

"집안일도 마찬가지다. 너는 신경 쓸 것 없다. 느이 애비 애미가 너 돌아올 때까지 작금의 일은 잘 해결해 둘 거고… 그리고, 갸가 그래도 제 앞 길은 건사하는 애가 아니냐. 오늘 일은 걱정은 하지도 말고—"

"할아버지… 그건 하라 하여도 안 할 거요."

차가운 말투에, 노인은 못내 못마땅한 신음을 내뱉었다. 노인도 알았다, 요즈음 벌어지고 있는 일이 그들 가정에 어떤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지. 그 역시 그림자의 사정권에 들어와 있었으므로 잘 알았다. 특히나 당자에게 영향을 많이 받은 월재로서는 다분히 당황스럽고 힘든 일이리라.

월재는 한숨을 내뱉고 말을 이었다.

"잘 되겠죠. 어찌 종결이 나던 간에."

"그래, 그럴 게다. …늦었다. 아침이나 먹으러 가자꾸나."


□ □ □ □


주막집은 전에 없이 한산했다. 본디 적어도 열 사람이 제각기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고 있던 그곳은 이제 세 사람 정도만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왁자지껄하던 주민들이 빠져나간 주막은 어딘가 가여운 공기가 감돌았다. 월재와 노인이 주막에 들어서면서 본 정경은 그러했다.

"월재 왔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웬 사내 하나가 국밥 한 그릇을 앞에다 놓고 반가워하고 있었다. 노인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보부상 심원종. 이십여 년 전에 순례를 나갔다가 그만 평생을 떠돌게 된 장돌뱅이. 양주골에는 장물을 거래하기 위해 매년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특히 오늘 같은 날에 많이 오는 편이었다. 순례를 나가는 시기, 전년도의 순례자들이 가져온 물건들이 거의 동날 즈음에.

"아재, 오랜만이요."

사람 좋게 씨익 웃어 보인 원종은 노인을 목격하자 금세 자리에서 일어나 절을 올렸다.

"아이고, 아바니도 계셨구랴. 그간 무고하셨소?"

"내사 안 무고할 게 뭐겠나."

둘은 태연스럽게 원종의 상에 합석했다. 원종은 작년에 왔을 때보다 고생을 더 했는지 피로해 보였고, 옷의 더러움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듯했다.

"양주골 큰 행사인데 이 안 올 수가 없었지요. 마침 접때 같이 다니던 패와는 따루 떨어지게 되어, 고향 땅으로 온 깁니다."

"밖에는 어때요?"

"밖에?" 원종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라지, 너 순례를 나가는 게로구나."

"그래요."

"밖이야 걱정할 거이 암만 없다."

월재가 얼굴을 찡그렸다.

"왜 내가 걱정한다는 말이 많소. 긴장, 마, 한 개도 안 했거든요."

"치아라. 뭐, 순례 나간단 사람치고 안 떠는 놈팽이를 내가 본 적이 없다."

"아아니— 에효, 그건 그렇다 치고 밖은 우째 돌아가는 기요?"

노인은 말없이 주모가 날라 온 국밥을 한 술 펐다. 원종과 치수가 주고받는 대화에는 일견 관심이 없는 체했다. 그러나 정작 거기서 가장 관심이 많은 이는 노인일 것이었다. 작년, 순례를 마치고 돌아온 청년들에게서 들은 조정에서의 반란과 진압을 들은 뒤로부터 내심 마음을 졸였던 까닭이다. 왜놈들과 청나라 사람들, 양이들이 한성에 득시글거린단 소문도 무시하기 어려웠다. 세상 밖은 그가 나갔던 수십 년 전보다 너무나 달라져 있으리란 확신이 불현듯 치솟았다.

"뭐… 개화파라나 뭐라나 하는 인사들이 사라지고는, 되놈들이 조정을 장악했다고 하든데. 그래갖고 한양은 난리도 아이고, 곳곳에 괴변이 자자하다."

"아, 아직도 그래요?"

"그래. 하이고야, 장사하는 사람들도 주제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다. 임오(壬午)년에 저기 저 되놈들하고, 계미(癸未)년에 왜놈들하고 나랏님네하고 맺은 약속인가 뭔가 하는 것 때문에 도리어 장사만 안 되니, 이거 원."

노인이 입을 열었다. "걱정을 하게 생겼구만그래. 나날이 저리 혼란스러워지니."

"그라도 수신도 사람들이 어디 바깥의 혼란스러움에 개의하기나 하겠습니까. 저야 아직 마이 부족하다카지만, 언젠가 꼭 질서와 계획의 체화가 이 조선 땅에 바로 설 것입니다. 외세 따위야 한 주먹이죠."

원종의 너스레는 사람을 안심케 하는 매력이 있었지만, 노인은 그래도 걱정의 말을 놓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디 외세가 도리에 따라 움직인단 말인가. 자네도 알겠지만 삼 년 전에도 순례인들과 왜인들이 충돌한 적이 있었다네. 다행히 부상을 입은 자는 없었으되 자칫하면 큰 사건으로 번질 수도 있었지."

"차암, 그 사건을 어찌 잊겠습니까. 치가 떨려서야 원!"

"그러니 더욱 만전을 기해야겠지."

원종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국밥을 들이켰다. 노인은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제 손자를 바라보았다. 월재는 평소와 다르게 밥을 깨작이고 있었다. 원종의 말 때문일까, 너무 긴장한 탓인 것 같았다. 무슨 말이라도 건네고 싶었지만, 말은 잘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란디 퍽 이상하단 말여."

원종이 대수롭지 않게 툭 던진 말에, 월재가 고개를 들었다.

"뭐가…요?"

"머 별건 아닌데." 원종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있냐, 어째 사람이 이리 없으까?"

월재의 얼굴은 급속도로 굳어졌다. 본인이 받은 충격도 충격 나름이었으나, 노인은 우선 손자의 반응부터 살폈다. 조금 나아졌던 월재의 표정은 이전과는 달리 새하얗게 바래 있었다.

"사, 사람이 많고 적고에 무슨 이유가 있다구요."

"괴이쩍잖냐. 내가 여길 드나든지 거진 십 년이 다 되어 가는데, 이 주막에 사람이 없는 것은 오늘이 첨이다, 첨!"

웬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아니, 못 들었소? 오늘 마을 어르신들이 모여서 송사를 벌인다잖소. 다 그걸 보러 간 게지."

노인은 고개를 들었다. 객집의 주모가 국을 젓다 말고는 다가오고 있었다. 노인은 날카롭게 여인을 쏘아보았지만, 수다를 떨 대상에 정신이 팔린 주모는 신경도 쓰지 않고 냉큼 자리에 앉았다.

"송사? 웬 송사?"

"응, 오래 나갔다 와서 잘 모를 줄 알았소. 예비 두인, 아니, 천인을 송사하는 게라우."

"예비 두인? 예비 두인을 송사한다구?"

"그랬었지. 이젠 천인일 뿐이라요."

월재는 여전히 말이 없이 난폭하게 숟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그런 월재도 월재였지만, 노인은 우선 자신의 내부에서 끓어오르는 불쾌와 무기력, 실망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 온갖 부정적 감정은 당자, 그리고 눈앞에서 입을 쉴 새 없이 나불거리는 여편네, 그리고 종국에는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노인은 숟가락을 상에 내리꽂듯이 내려놓았다. 원종은 말이 없어졌지만, 주모는 그런 반응에도 개의치 않고 아직도 제 할 말에 득달같이 달려들고 있었다.

"말하자면 길지. 아니 글쎄, 두인 승계도 얼마 안 남은 년이 큰 사고를 쳤지 뭐요. 정식 두인 직위를 승계받으려면 제대로 의식을 치렀어야 하는데, 이 장월영, 아니 강월영이란 년이 그 의식을 멋대로 개조해버렸다나?"

원종은 대꾸하지 않은 채 월재와 노인을 응시하고만 있었다. 그의 눈에 어린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그저 순수한 충격일 뿐이었다.

"전대 두인에서 후대 두인으로 이어져 온 유서 깊은 의식인데, 그걸 감히 맘대루 바꿔버리는 녀석이 어딨다구."

주모는 눈 앞에 죄인이 있다는 듯이 삿대질을 하며 말을 이었다.

"거기다가 제일 문제는, 글쎄 그년이 의식을 저 혼자 치루고는 뭐라 말했는지 아오?"

원종이 힘겹게 되물었다. "뭐라고 그랐는디?"

"대부(大父)가 부서졌다, 이럽디다."

노인은 원종의 표정이 충격, 그리고 두려움으로 물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 고을의 모든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그런 반응을 보였다. 혹자는 분노했다. 혹자는 에비 두인이 미쳤다고 했다. 혹자는 예비 두인을 죽여야 한다고 말했다. 대부, 최초의 두인인 장영실이 영접한 존재. 그 강대한 존재는 수신도 교인들의 힘이요, 목표요, 말 그대로 아비였다. 그런 존재가 파쇄되었다고 말하다니.

"어떻게 그런 개소리를 늘어놓는지, 단단히 미친 년이지, 미친 년!"

"이 아줌마가 사람 앞에다 두고 뭐하는 거야!"

노인은 옆에서 터져 나온 고함에 돌아보았다. 월재가 시뻘게진 얼굴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있었다.

"암 것도 모름서 그리 말하지 마오."

월재는 떨리는 목소리로 다음 한 마디를 힘주어 말했다.

"그 미친 년이 우리 누이요!"


e. 살덩어리의 형상 변이는 혼란스럽고 의미 없는 파도와 다름없으며, 혁신과 진보의 움직임에 반하는 고리타분하고 사악한 행위로다. 메카네의 참뜻과 정반대의 길을 고수하는 자들에게 고통 있을진저!

f. 살덩이의 눈을 가리는 거짓된 안개와 달리 성스러운 증기기관에서 뿜어져 나오는 증기는 곧 시야를 바로 보게 하는 향상의 기체요, 맑은 사상이라. - 수사투사 터빈(Turbine), 《탐구와 자가개조의 서》

g. 무질서하고 계통 없는 분노는 그야말로 살덩이의 발악이라. 살덩이의 혼돈이 만연한 곳은 파멸의 땅이요, 퇴보의 바다이니 두려워하고 물리쳐야 할 것은 바로 이곳에 있다. - 도식배치사 피스톤 로드(Piston Rod)

14. 성 엔리히너께서 그들이 곧 동료들에게로 도달하리란 사실을 깨달으시어 제2형 Mark XI 스팀 오롤로지움1으로 그들의 악행을 저지하려 하시어 오롤로지움을 작동시키시니 제4A형 Mark II 정신저항성 소음 유발기2에서 성스러운 음향이 발하매 살덩어리들이 놀라나니 이내 흉측한 모습을 드러내며 성인에게로 달려오더라.

15. 그러자 둘째와 셋째 살덩이가 끔찍한 덩굴손과 촉수를 드러내며 스스로 쪼개져 거대한 괴수처럼 형상을 바꾸더라.e

16. 이윽고 성 엔리히너의 스팀 오롤로지움의 초소형 제6형 고압 스팀 파이프에서 영광스러운 증기f가 발하매, 곧 규격화된 제1형 Mark IV 공간 변이장이 방출되어 살덩어리들의 걸음을 늦추고 그들의 더러운 몸을 흙바닥에 나뒹굴게 하니,

17. 살덩이들 되려 격노하매g 스스로 합쳐지고 흩어져 사악한 형상을 취하더라.

— 권제55.07.A-19: 살덩이의 침범과 그 경고에 관하여 中


"야야, 월재야. 게 좀 서보거라!"

노인과 원종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멀찍이 걸어가고 있는 월재의 뒤를 쫓았다. 주막에서 뛰쳐나온 월재는 한참이나 씩씩거리면서 발 가는 대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 녀석아, 성만 낸다고 될 일이냐!"

노인이 외치자, 마침내 월재는 걸음을 멈추고 등을 돌렸다.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노인은 숨을 고르며 잠시 기다리라는 뜻에서 손을 들어 올렸다. 먼저 회복한 원종이 노인을 지나쳐 치수에게로 걸어갔다.

"내, 내… 몰랐다. 미안하다."

"아재가 뭐가 미안해요. 저 아짐이 뭐 아는 거 하나 없으면서 자꾸 지절거리니까 그렇지."

"대체 워째 된 거냐?"

노인은 허리를 펴고 둘 사이로 걸어들어 갔다. 아니나 다를까, 월재는 다시 창백해진 얼굴로 이를 악물고 있었고, 원종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런 월재를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은 한숨을 쉬고 둘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도 알고 싶은가."

원종은 노인의 눈치를 보며 공손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이야기 해줄 터이니 그만하고 들어보게. 월재 너도 가만 서 있거라. 그만 나다니고."

"대체 월영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갸가 매급시 그럴 아는 아니지 않습니까?"

원종은 월영을 알았다. 월영은 월재의 누이이자, 노인의 손녀였다. 월재보다 일곱 살이 많고 일찍이 학문에 재능을 보인 아이였다. 대부를 섬기는 데에도 모자랄 데가 없어 장차 큰 인물이 되리라 여겼었다. 그 아이는 가정의 기쁨이자 노인의 자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월영은 스물이 되기도 전에 저절로 서원의 으뜸이 되었고, 스물이 되자 향소의 일원이 되었으며, 재작년부터는 두인의 문하생이 되어 차기 두인이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네, 두인이 어떻게 교체되는지는 기억하나. 두인이 노쇠하면 그 휘하의 문하생 중 하나가 그 직분을 물려받네. 월영이 그 녀석은 여직 스물다섯도 되지 않은 어린 문하생으로, 누구나 다 녀석에게는 기회조차 없으리라 생각했지만 무슨 연고인지 차기 두인으로 녀석이 선출되었다네. 그땐 참… 영광이었는데."

"저도 기억합니다. 월영이 녀석, 영특헌 것은 알았으나 그렇게까지 대단헌 일을 벌일 줄은 몰랐지요. 헌데…"

헌데, 아아, 헌데. 그 헌데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뇌까렸는지. 노인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헌데 큰일이 일어나고야 말았지. 며칠 전 일이었네. 양산의 태완골에서, 녀석이 계승 의식을 멋대로 개조하고 계량화하여 탈바꿈시켰네. 그리고는 멋대로 이를 수행하였어. 그래서 이 사달이 난 걸세. 유향소에서는 당연히 녀석을 파문, 하옥하고 오늘 송사를 치르도록 하였네. 이따가 그 송사가 있을 게야…"

"월영이가… 의식 중에 분명 '대부가 부서졌다'라고 말한 거이 옳습니까?"

"그래… 그렇다더군."

원종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주위를 살피고 노인과 월재에게 손짓했다. 가까이 와 보라는 몸짓이었다. 둘은 원종에게 다가갔다.

"실은요," 원종이 속삭였다. "제가 들은 것이 이와 하도 유사한데…"

"들은 것?"

"있잖습니까, 제가 접때 두인 어르신을 만나뵙고 왔지요."

노인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 그것이 왜?"

"긍께, 제가 전한 말이 바로 그기라고요. 자기네 신이 부서졌다, 그라는 선교사들이 지금 조선 땅에 들어와 있다고, 그 말이요."

순간, 노인은 가슴팍을 얻어 맞은 사람처럼 숨을 모조리 토해냈다.

그렇다면 월영이 옳았던 건가?

"근래에 삼산도 땅을 영길리에서 온 양이들이 점령했다는데, 아마 같이 따라 들어온 것 같소." 원종이 머리를 긁적였다. "제가 저, 세을가 녀석들 가운데 소을촌(瘙乙村) 살던 친구 한 놈이 있습지요. 이 녀석이 갖바치짓 하다가 어찌 삼산도 인근으로 고기를 잡게 되어 나갔답니다. 근디 삼산도에서 배를 타고 나오는 양이들을 봤다고 하데요. 이 자가 일어로 물었더니, 선교사다. 그라믄 무얼 포교하느냐, 서학쟁이냐? 답하기를, 그런 건 잘 모르고 우리는 어… 메, 메가, 그라지, 맥하내를 믿는 사람들이며 조선에 새로운 도리를 세우기 위해 왔다고 하더란게요."

"맥하내?"

"뭔지는 모르겠고, 아마 길 맥[陌]자에, 물 하[河]자, 올 내[來]자를 써서 세상의 이치를 보인 이름이 아닐까 싶지라우."

노인은 한숨을 쉬었다. 갑자기 밀려 들어온 이 정보는 급습을 당하듯 갑작스러웠다. 만약에 월영이 옳고, 대부가 정말 부서져 있다면, 그렇다면 선교사 영길리 양이들은 대부를 섬기는 자들인가? 알 수 없었고 쉬이 단정 짓기도 버거운 사안이었다.

"심원종!"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인과 월재, 원종은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들이 걸어온 방향에서 백색의 도포를 두른 한 남자가 당당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노인은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향소의 순례관(巡禮官), 이상철이었다.

"내 자네를 찾으려고 얼마나 돌아다녔는지 아는가. 주막에 있으려니 하여 마을 내의 주막이란 주막은 다 돌아다녔네. 헌데 여기— 아이고, 어르신께서 예는 어찌 오셨습니까. 아니, 월재 너도 여기 있었느냐."

상철은 원종을 향해 다가오면서, 노인을 향해서는 허리를 꿉적 숙이고 치수에게 아는 체를 했다. 노인은 고개를 까닥이면서 시선을 원종에게 두었다. 도대체 순례관이 원종은 어찌 찾는단 말인가?

"자네 나랑 같이 가 주어야겠네."

"예? 어데를 말씀이십니까?"

"두인께서 급히 찾으시네. 이후 있을 송사에 자네가 긴히 헐 일이 있을 것이니."

말을 마치자마자 상철은 원종을 끌고 가다시피 붙잡고 걸음을 옮겼다.

"잠깐!"

노인은 상철과 천태가 얼떨떨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는 것을 보았다. 월재가 절박한 얼굴로 앞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나도 같이 갑시다."

"아야, 네가 참견할 일이 아니다."

상철은 당황한 모습이었다.

"아니긴요. 그 죄인, 내 누이에요. 알잖어요, 순례관 나리."

"향소 일원으로써의 강월영을 심판하는 자리다. 가족의 혈연은 이 사안서 배제해야지."

"그게 그리 쉽게 됩니까?"

노인은 그들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월재와 상철은 제각기의 말을 내뱉는데 정신이 팔려 그가 다가오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이보게 상철."

"아, 예, 어르신."

"궁금해할까 말해주자면 우리도 저이가 하는 말을 들었네."

상철은 순간 얼굴이 파리해지더니, 원종을 쏘아보았다. 웜종은 시선을 돌리고는 입맛을 다셨다.

"단순히 내 손녀딸이라서가 아니야. 유향소를 떠나온 뒤로 내 한 번도 돌아가지 않았으나, 작금에 벌어지는 일은 단순히 마을의 행정이나 학문에 대한 논쟁과 엮어 논할 수는 없는 일일세."

노인은 성큼성큼 다가가 상철의 어깨에 손을 턱 올려놓았다.

"수신도 자체의 존속마저 위험해질 수도 있는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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