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는 사정 없이 요동치고 있었다.
아가멤논호는 천천히 동중국해의 너른 물살을 헤치고 있었다. 나가사키에서 출항한 이 총톤수 8510톤의 주력함은 그 위엄 있는 풍채를 자랑하며 은자의 나라로 거침없이 그 발을 들여놓았다. 그들이 향하는 목적지 위에 자리한 민족의 그 누구도 그들의 접근을 알지 못할 것이었다. 바로 그 점을 노리기도 했고.
그러나 지금 이 함선을 조종하는 무리의 우두머리는 그러한 것은 지금 안중에도 있지 않았다. 흔들리는 현등의 불빛 아래서, 윌리엄 도우웰 제독은 브랜디를 들이켰다. 휘스트는 그의 패배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만만치 않은 상대를 만난 까닭이었다.
상대는 두 명의 젊은 남자였다. 사실상 휘스트에 능한 이가 다른 이를 이끌어 나가는 형국이었는데, 보아하니 휘스트로 보나 관계로 보나 전자가 후자를 압도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우위에 선 남자는 훤칠한 외모에 검은색 조끼와 같은 색상의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같은 옷감으로 만들어진 체스터필드 코트는 보울러 모자와 함께 선장실 내의 옷걸이에 얌전히 걸어 놓았다. 전형적인 영국 신사의 모습이라고, 도우웰 제독은 생각했다. 아마 젊은 나이에 사업에 성공한 치라도 되는 모양이었다. 반면에 나머지 한 사람은 넥타이 없이 검은색 조끼만 입고 있었는데, 라운지 코트를 자기 자리 옆에 걸어두고 있었다. 내키지 않는 듯한 분위기였지만 다른 남자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성공한 자의 하인으로 일하고 있는 듯했다.
"제가 땄군요."
그 남자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도우웰은 탁자를 내려다보았다. 그 말이 맞았다. 남자는 어느새 10수를 따내고 있었다.
"대단하시군요. 본국 사교계에서 이름을 날리셨을 것 같은데."
"사교계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남자가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깊이가 있었지만, 어딘가 기계가 웅웅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제게는 신에 대한 사명이 있었고, 그를 지키는데 저의 시간을 써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선생님께서는 선교사시겠군요." 도우웰에 옆자리에 앉은 대령이 흥미롭다는 투로 질문을 던졌다.
"그런 셈이죠. 제독께서 말씀해주신 줄 알았습니다만."
"전달이 늦었습니다. 두 분을 워낙 극비에 승선시킨 것이라서요. 지금도 두 분이 여기 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극히 적습니다."
남자가 웃으며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책하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저희 둘은 제독께서 보여주신 호의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제독은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대가 없는 호의는 아니었으니까. 제독은 본국에서 날아온 전보의 내용을 지금도 기억한다. 두 명의 선교사를 조선의 삼산도로 옮겨달라. 처음에는 의아했다. 영조 통상 조약이 체결된 지 불과 2년 전이었다. 지금도 영국인은 자유로이 조선의 개항장 내를 돌아다닐 수 있었고, 외교 대표나 영사들은 조선 내를 여행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쉬운 길을 놔두고 왜 굳이 나가사키까지 와서 이 함대에 승선한다는 말인가? 그러나 결국 까닭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주어질 이익이 더 중요했지.
결국 지금에 이르렀다.
하인이 비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것을 흘리자, 남자가 살짝 움찔하는 동작을 취했다. 탁자에 가려져 잘은 보이질 않았지만, 느낌상 세게 걷어찬 것 같았다. 하인이 얼굴을 찌푸리더니 제 손에 놓인 카드에 코를 박았다.
다음 수를 남자가 또 이기고 난 뒤, 도우웰이 입을 열었다. "그래, 선생께서는 조선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글쎄요, 이코노미스트 지에 실린 기사나 사마랑호의 탐사 기록 정도밖에는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동양에 대한 지식은 부끄럽지만 미미할 따름입니다. 다만 세계의 관심과 힘, 정치적 기류가 그 땅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알지요. 마치 태풍처럼."
"우리는 그 태풍의 눈으로 들어가고 있는 겁니다."
제독이 품 속에서 시가 케이스를 꺼내 나머지 세 사람에게 권유했다. 대령과 하인은 그 권유를 수락했지만, 남자는 거절했다.
"파르타가스에서 생산한 오스쿠로입니다. 반하실 겝니다."
"하하, 저는 담배를 피우지 않습니다."
남자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부드러운 투로 거절했다. 꼭 신을 모시는 사람들은 피우면 안 되기라도 하는 듯이. 그래서일까, 도우웰은 그 남자가 매우 능숙하게 시가에 불을 댕기고 연기를 입에서 뿜어내는 하인을 노려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도우웰이 시가 케이스를 품속에 다시 넣고 고개를 들었을 때, 하인은 시가를 입에서 떼어낸 채 뒷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
"조선의 사람들이 교화가 될까요?" 대령이 물었다. 승선객들에게 묻는 말이었다.
"전 나름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자가 대답했다. "우리의 언어를 가르쳐 진리를 일깨운다면, 그들 역시 감화될 겁니다. 이미 구교에서, 또 신교에서 그러한 일들을 행한 일이 남아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된다면 이단의, 살덩어리의 도리를 따르던 수많은 백성들이 질서의 길로 들어설 수 있을 겁니다.
살덩어리의… 도리. 도우웰은 이질적인 단어에 사뭇 놀랐지만, 놀란 투를 드러내지 않으려 다른 질문을 던졌다.
"치안을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개항장은 모르지만, 내부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위험이 도사릴 겁니다. 누가 압니까, 식인종들이 바글바글할지."
도우웰의 말에 남자는 잠시 표정없이 그를 응시하다가, 이내 빙긋이 웃어 보였다.
"하하, 괜찮습니다. 살덩이는… 악마는 제 앞을 막을 수 없습니다."
남자의 표정은 웃고 있었지만 도우웰은 그의 내면 깊은 곳에 형체를 알 수 없는 강고한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마치 아주 크고 거대하며 기계적인 병기가 잠들어 있는 것만 같았다. 도우웰은 등줄기를 타고 내려가는 어떤 긴장감에 몸을 떨었다.
"아, 그리고… 제가 또 이긴 것 같군요."
남자의 손에는 끗수가 가장 높은 으뜸패가 들려있었다. 대령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남자가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그것도 혼자서. 도우웰이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고개를 들었다.
"선생, 우리 통성명도 안 한 것 같군요. 나 윌리엄 도우웰입니다."
카드를 정리하던 남자가 도우웰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리고는 잠깐의 침묵 이후 입을 열었다.
"레이드입니다. 레이드 할로웨이Lathe Hollow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