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은 한없이 아래로 뻗어 나가 있었다. 뿌리처럼 자연적으로, 또 무작위적으로 얽히고설킨 공간은 마치 지옥으로 연결된 통로 같았다. 이따금 걸음을 옮길 때마다 떨어지는 먼지는 온갖 옛것들의 향취가 났다. 모로 보나 평범한 김밥집 바닥에 존재하긴 주제 넘치는 계단이었다.
김철현은 어두컴컴한 이 계단에서 오로지 앞서 걸어가는 김한규의 인도하에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계단은 칠흑처럼 어두웠고 가끔 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작디작은 무언가가 발치에 기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철현은 입을 벌렸다가 삼킨 까끌거리는 것이 거미줄이 아니리라고 생각했다. 생각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퍽이나 사랑스럽고 아늑한 곳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철현은 나스챠 코렐을 떠올렸다.
둘이서 러시아 노보니콜라옙스크 한구석에 처박힌 마을에 자리를 잡았을 때를 떠올렸다. 가까운 역에서 세 시간 거리에 위치해 있는 외딴 마을이었고 주민들은 서로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황량한 곳이었다. 무관심과 빈곤 속에서 정신병은 전염병처럼 활개를 쳤고 눈보라가 이는 날에는 꼭 주민 한두 사람은 어둠 저편으로 사라졌다.
젊은 부부에게는 그 죽어가는 마을이 최적의 보금자리였다.
마을을 둘러싼 침엽수림에서 밤새 나무를 베던 기억이 떠올랐다. 용을 쓰며 톱질을 하던 철현을 보며 나스챠는 뭐가 그리 웃긴지 계속 웃었고, 그 웃음이 좋아 그도 웃었다. 나스챠의 웃음은 새가 지저귀는 것 같아서 항상 듣고 싶은 웃음이었다. 통나무집이 완성되던 날 나스챠는 눈물을 보였다. 이리 좋은 날 우는 게 뭐냐고 말했지만 어쩐지 철현도 눈물이 나는 것만 같았다. 그제야 벗어난 것 같아서. 족쇄처럼 매인 운명을 한걸음 거스른 것 같아서.
다른 곳이었다면 마을의 논란거리가 되었을 동양인 외양의 남편과 러시아인 외양의 아내는 그 집에서 곧잘 살았다. 둘은 곧 넷이 되었고, 아내가 쌍둥이 딸을 낳던 날에 남편은 아내만큼이나 사색이 되어서는 마을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하늘에 기도했다. 마을의 산파가 걱정 좀 그만하라고 핀잔을 주어도 남자는 거의 울 듯한 표정으로 집 밖에서 서성거렸다.
마침내 쌍둥이 딸아이를 품에 안았을 때…
철현은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손톱으로 손바닥을 찍었다. 계단의 곰팡내 나는 어둠은 그때의 통나무집을 연상케 했다. 비슷한 어둠과 비슷한 향취. 나스챠는 웃으면서 나무를 갈아야겠다고 말하곤 했다. 아이들의 호흡에 좋지 않을 것이라며.
나스챠…
철현은 주머니에서 알약을 하나 꺼내 삼키고는, 이를 악물었다. 약효가 빨리 돌기를 바랐다.
할매는 지하 맨 아래의 문 안에서 기거한다고, 한규가 말했다. 그들이 마침내 구불구불 굽이친 계단 아래에 떡하니 자리한 바로 그 문에 다다랐을 때, 철현은 문틈에 부적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부적 한 장을 주워들었다. 부적은 노란 바탕에 붉은 글씨로, 연각(緣覺)이라고 적혀 있었다.
"홀로 깨닫다…"
"우리 할매, 밀레니엄 시대 들어오시더니 갑자기 부처가 된다 어쩐다 보살이 된다 어쩐다 하심서 이런 걸 써 붙이고 다녔어요. 하기사 오래 사시기도 오래 사셨으니… 말씀하는 것만 보면 그냥 노망 난 늙은이라니까요?"
철현은 불안한 얼굴로 한규를 돌아보았다. 가택신의 위치를 아는 유일한 단서가… 노망이 났다?
"…왕대부인께서 바로 아시긴 하는 거요?"
"그런 거 말은 잘하셔요. 이따금 말이 좀 오리무중으로 튀어나오거나 웅얼대실 때가 있긴 한데… 에이, 설마 지금도 그러겠어요."
한규는 문을 쿵쿵 두드리고는 뒤로 물러났다. 철현도 내려오며 그가 했던 말을 잊지 않았다. 할매를 만날 때는 오직 한 사람씩. 이 원칙은 일가 내에서도 철저히 지켜진다고, 한규는 말했다. 만일 지키지 않을 시엔 며칠은 신병(神病)으로 앓아누울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노인의 답변을 기다리는 새의 정적이 멋쩍었는지 한규는 묻지도 않은 말을 늘어 놓았다.
"할매가 예전에, 그러니까 한 조선 시대 정도에는 유명한 예언술사였대요. 양반이나 상민이나 할 것 없이 많이 찾아왔다더군요. 유명세뿐만 아니라 능력도 판수 저리 가라 할 정도라고 했었고. 그러니 이번에도 제대로 찾아내실 겁니다."
"헌데 어찌 직접 묻질 않고?"
한규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게 왜 그러시는지는 모르겠는데, 예전에 한 번 ‘가택신의 행방을 안다’라고 하시고는 더 캐물어도 영 대답을 안 하시더라고요. 자청비님이 이야길 들으시더니 본인이 직접 전화로 물으시겠다고 하셨지만, 할매가 워낙에 전자 기기에 의존하는 성격이 아니신지라."
"그러고 보니, 자청비와는 어찌 아는 사이인 게요?"
"정확히는 저희 엄니하고 그분하고 아는 사이죠." 한규는 한쪽 다리에서 다른 쪽 다리로 체중을 바꿔 실으며 대꾸했다. "전 엄니 시키는 대로 서천 심부름을 하거나 물건을 가져다 드릴 일 있으면 하는 정도에요."
"이번 일은 그대가 심부름을 하지 않는 이유가 있소? 이를테면, 내가 답을 들은 뒤에 그대에게 일러주어도 되는 것 아니오."
"그으러니까… 이게 좀 복잡해요."
한규는 철현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이쪽, 특히 범인(凡人)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돗가비들은 나름의 규칙이 있습니다. 일정 구역을 정해놓고 웬만하면 그 구역 밖으로 나돌지 않는 것. 저 걸립이란 놈이 이상한 거지, 대부분은 우리처럼 거점을 정하고 생활해요."
"구역을 굳이 왜… 정한단 말이오?"
"서천과 다르게 대한민국 노상은 돗가비들에게 상당히 위험하거든요. 국가 기관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고, 기업체들도 이쪽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죠. 일전에 우리 가족이랑 친했던 전나무 할배는 어느샌가 사라졌다니까요?"
한규는 설명을 계속했다. 무속의 세상은 이리 치고 저리 쳐 몰아가는 범 같은 놈들의 위협으로 상당수 위축되어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답답하지만, 구역 내에서만 자유로이 돌아다니는 선택으로 안전을 도모할 수밖에 없다. 구역 밖으로 아예 못 나가는 것은 아니나, 되도록 빠르게 또 눈에 띄지 않게 다니는 것이 나았다.
"게다가 근래 나리들이 근방을 배회한다는 말이 있어서, 요 며칠은 납작 엎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철현은 아쉬운 기색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때마침 부적으로 덕지덕지 도배가 된 문에서 쿵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노인의 답변인 셈이었다. 한규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모쪼록 탈 없이 다녀오십시오."
"…고맙소."
이내 철현은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 보이는 것은 온통 형광으로 푸르른 벽이었다. 마치 루미놀 시약 검사를 한 사건 현장 같아서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눈을 찌르는 벽지 색은 부담스러웠다. 철현은 천천히 걸음을 내딛으며 주위를 살폈다. 온갖 잡동사니들이 바닥에 깔려 있었고 이따금 더러워진 봉제인형들이 눈에 띄었다. 마치 대형 마트를 잘근잘근 부숴서 한데 뭉쳐놓은 느낌이었다. 철현은 벽면에 걸려 반쯤 찢긴 예수의 초상화를 보고 등줄기가 뻣뻣해지는 것을 느꼈다. 주변에 인기척은 없었고 오직 어둠만이 자리했다. 계단의 어둠과는 또 다른 부류의 어둠이었다.
"계십니까?"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아무도 없기라도 한 듯이. 철현은 조금씩 발걸음을 내딛으며 혹시라도 있을 위험에 대비했다. 어둠 저편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설마 죽은 게 아닐까, 하고 철현은 생각했다.
설마… 이미 오래전에 이 어두컴컴하고 온갖 물건들로 퇴적된 공간에서 한규의 조모는 죽었는데, 윗공간의 사람들이 그걸 모른다거나…
상상은 그저 상상으로 치부해버리기엔 힘이 있었고 쉽게 떨쳐낼 수 없었다. 철현은 망연한 눈빛으로 여태 걸어왔던 곳을 되돌아보았다. 어딘가 미묘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 파악하지 못했던 검은 음모가 꿈틀거리는 듯한 느낌.
갑자기 누군가 철현의 어깨를 후려쳤다.
철현은 왼 어깨를 부여잡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려다… 자기가 앉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방도 바뀌어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산재해있던 쓰레기들은 온데간데없고, 물걸레로 청소까지 한듯 바닥은 번들거리고 있었다. 방 한구석에는 정갈하게 향이 피워져 있는 향로가 있었다. 벽지도 눈 아픈 형광 파란색이 아닌 말쑥한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한쪽 벽에는 부처를 그린 탱화가 걸려 있었다. 철현은 이곳저곳을 바라보았다. 도깨비에게 홀린단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고, 그는 생각했다. 철현은 다시 한 대 더 맞고 시선을 앞으로 옮겼다.
"역신이 어델 함부로 들어오느냐!"
한규의 조모는 늙수그레한 여자로, 단아한 한복을 입고 저고리 위엔 연분홍색 비단 조끼를 입고 있었다. 가물가물한 두 눈에는 투지가 가득 담겼다. 이를 증명하듯 꽁꽁 묶은 백발이 무색하게 위협적인 둔기를 흔들어대고 있었다. 철현은 눈의 초점을 맞추었다. 자세히 보니 이는 도리깨였다. 노인과 철현 사이를 오래된 개다리소반 밥상이 가로막고 있었다.
"노인장께선 나를 아십니까?"
"역병신을 내가 모를리 있나! 예끼 이놈의 자식."
도리깨를 흔들어대는 꼴이 꼭 한 대 더 맞을 것 같아 철현은 조심스레 몸을 뒤로 뺐다. 다행히 늙은이는 공격해오지 않았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몇 마디 중얼거릴 뿐이었다.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어 철현은 턱을 긁적였다. 왜 그렇지…
늙은이가 갑자기 목을 홱 젖히고는 소리쳤다.
"여길 어째 왔는기오?"
보니 질문 같지는 않았으나, 노인은 답을 기다리는 듯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철현은 조심스럽게 대꾸했다.
"노인장께서 가택신의 행방에 대해 아시는 바가 있다 하여… 내 이리 찾아왔소."
"예끼 이놈!"
"…아야."
철현은 인상을 찌푸리며 얻어맞은 곳을 문질렀다. 이번엔 오른쪽 어깨였다.
"네놈이 번뇌에 빠져 정견(正見)하지 못하니 큰 죄를 짓는구나! 나를 못 알아보겠느냐?"
"…뉘십니까?"
철현은 멀거니 늙은이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슬쩍 팔목을 내려다보았다. 소매는 노인이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슬쩍 올라가 있었다. 시간은 오후 6시 53분. 김밥집에서 20분 동안 여길 내려온 것도 아닌데 시간은 그리 흘러가 있었다. 그는 두통이 다시 내려오는 것을 느꼈다.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내가 바로 미륵이다!"
철현은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냥 방을 뛰쳐나가고 싶었다.
자칭 미륵은 또 정신이 혼란한지 뭐라 뭐라 웅얼대고 있었다. 철현은 대체 제정신이 돌아오는 시간은 언제인지 궁금했다. 이렇게 진이나 뺄 줄 알았으면 그때 부르지.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성주신과 조왕신이 어디 있는지 알고 싶다는 말인 게로구나."
방이 또 바뀌었다. 이번엔 야외 테라스였다. 사방은 책장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늘로 끝도 없이 이어지는 높은 책장에 철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따금 멀리에서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 부자의 여름 별장에 온 듯한 기분이 들어, 철현은 당혹스러우면서도 신기했다. 그가 앉아 있던 곳도 고풍스러운 의자로 바뀌어 있었다. 노인은 단정한 양장을 하고 있었으며 향기로운 커피잔을 들고 책과 함께 앉아 있었다. 앞에 탁자가 놓여 있었다.
"…오늘 날 많이도 홀리실 모양인가 봅니다."
"철현 도령. 자네가 가택신을 찾는 다라… 서천의 신들이 드디어 큰 걸음을 내딛기 시작한겐가?"
제정신을 되찾은 도깨비는 푸근한 인상 속에 날카로운 눈빛을 겸비하고 있었다. 그가 차를 홀짝이며 그 눈빛으로 철현을 쏘아보았다.
"저의를 알지 못하여, 그 내막을 분명히 하지 못합니다."
"자네가 이번 여행에서 내딛는 걸음이 곧 큰 걸음으로 이어질 걸세. 하기야 늘 그렇지 않았나. 자네의 걸음은 언제나 큰 국면으로 치달았지."
철현은 의자의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리면서 노인과 시선을 맞추었다. 의자를 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철현은 자기의 입가가 떨리는 것을 느꼈다. 다시 담배 생각이 났다. 주머니에서 알약을 다시 꺼내 삼키고는, 손을 들어 이마를 문질렀다. 약효가 슬슬 돌았다. 검은 눈동자가 눈꺼풀 사이에서 빛났다.
"무얼 말씀하시는지 압니다."
"알아야지." 노인은 신비로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알아야 하고말고. 왜정(倭政) 시기를 어찌 잊을 수 있겠나."
"그에 대한 말씀은 나중에 하셔도 될 듯합니다." 철현은 초조하게 말했다. "지금 제가 시간이 없습니다. 가택신을 빨리 찾아야 합니다."
"찾으려는 이유가 뭔가?"
"서천에서 그들을 찾기 때문이지요."
"자네가 찾으려는 이유는 뭔가?"
철현은 멈칫했다.
"서천과 자네의 관계가 그리 심(深)치 않은 것은 내 짐작할 수 있네. 헌데 이리 공연한 발걸음을 하다니 자네 스스로도 어떠한 목적이 있지 않겠는가."
"…잘 아시는구료."
노인은 대답을 기다리는 듯 책을 덮어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철현은 한숨을 내쉬고는, 하는 수 없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각시손님과 그의 병세에 대해.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고 오로지 목적 없는 살의에 사로잡혀 난동을 피우는 이에 대해.
"병세가 날로 심해지십니다. 몸의 상처는 악화되진 않으나 마음의 상처가 덧날 대로 덧나… 제정신이실 때가 없습니다. 발작을 일으키시는 주기 또한 빈번해지고요."
주기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쟀을 때가 3일이었다. 그 직전에 쟀을 때가 일주일 주기였기 때문에 철현이나 간호사나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게 바로 어제의 일이었다.
"당장에 오늘 또 발작을 일으키실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깨어나셨을 때 매우 혼란스러워하실 수도 있고요. 주위에 대한어를 할 줄 아는 이가 없으니 말입니다. 해서, 전 빨리 돌아가야겠습니다. 그분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노인이 잔잔히 웃었다.
"집착이 심하면 독이 된다네."
"집착하지 않으면 다른 이를 물어뜯을 독입니다."
"그게 자넬 물 수도 있지."
"감내하겠습니다."
방이 다시 바뀌었다. 이번엔 흙색 벽지에 창 밖으로 햇살이 잔잔하게 들어오는 곳이었다. 어딘가 익숙한 가구 배치였다. 마치 오랜 기간 머문 공간인 것처럼. 철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1인용 소파에 앉아 있는 노인을 돌아보았다. 소파를 보자 깨달을 수 있었다.
"내 방으로 오셨군요."
"숙소가 참 괜찮군그려. 자네가 가고 나면은, 나도 순미에게 여기로나 보내달라고 해야겠네."
"한 분을 더 모시게 되었군요." 철현은 옅게 웃으며 말했다. "찾으라는 사람들에 가외 인원까지. 김 교수가… 퍽 좋아하겠습니다."
"그들이 어디 있는지 알고 싶다 하였지."
철현은 저도 모르게 목덜미에 힘을 주었다. 그는 노인에게로 다가가 맞은편에 놓인 소파에 앉았다.
"네."
"정확한 햇수는 나도 모르나 성주신과 조왕신, 그 둘은 이 땅에 머물고 있지 않네."
철현의 눈이 크게 뜨였다. 한국 땅에 없다면… 해외로 나가야 한단 말이렷다. 그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초조하게 두들겼다. 시간이 더 소모되는 건가? 3일 내로 들어갈 수 없나? 세워 왔던 계획이 산산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어느 나라에 계신 겁니까?"
"나라가 아닐세."
"…예?"
"붕익(鵬翼)에 머물고 있지."
철현은 빙그레 웃는 노인의 모습을 보고 문득 그도 김서방네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나이가 많고 적고를 떠나서 의도적인 도치로 사람을 놀리는 것은 이들의 특성인 모양이었다.
"비행기… 말씀이시군요."
"맞네. 지난 계미년, 2003년이었나. 한번은 순미와 손주들과 함께 타국으로 여행을 가려한 적이 있었지. 국…제선. 그래, 국제선에서 붕익을 타려 하는 중이었네.
헌데 승강장으로 가는 도중 묘한 기운이 느껴지질 않던가. 내 보니 한 거대한 붕익에서 주체할 길 없이 신기(神氣)가 느껴지더군. 나는 그것에 다가갔네. 점차로 느껴지는 안온한 기운, 그것은 보통 잡신이나 영귀가 깃든 건 결코 아녔지. 두 기운이 영롱하게 발하는 모습에서 드디어 알 수 있었다네. 조왕신과 성주신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을."
노인은 적적히 웃으며 말했다. 철현은 소파를 끌어당기며 물었다.
"허면, 지금도 그들이 그 안에 있겠습니까?"
"그들이 달리 갈 곳이 있겠나?"
그렇게 반문하는 노인의 모습이 언뜻 쓸쓸해 보여, 철현은 내심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신격들의 거동마저 속되어 버린 요즈음에 달리 갈 곳이 있겠나?"
노인은 한숨을 쉬며 가까이 오라는 듯 손을 까닥였다. 철현이 몸을 숙이자, 노인은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번 걸음은 비단 서천의 신들뿐만 아니라 자네 자신에게도 큰 걸음이 될 걸세. 내 말 명심해두라고."
노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쉰 소리와 낮은 목소리가 어우러져 섬뜩한 느낌이 드는 말투였다. 철현은 그를 쳐다보며 침을 삼켰다.
"옛 적과… 옛 동료가, 그리고 옛 연인이… 한꺼번에 자네의 시야 속에… 돌아오게 될 거야."
그 말을 하는 데도 노인은 기운이 싹 빠졌는지 힘겹게 소파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는 인제 그만 가보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한규는 김포공항까지 그를 바래다주기로 했다. 버스를 타고 가는 와중에도 한규는 불안한 듯 사방을 살폈다. 불의의 습격을 받을지 두려운 모양이었다.
철현은 서커스단을 생각했다.
드넓은 시베리아 벌판에서 울부짖던 날을 생각했다.
아마 이들과 그때의 자신이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빼앗길까 봐 두려운 나날이었으니. 철현은 어느새 새까매진 창밖을 바라보며 머리를 창에 기댔다. 몸이 많이 지친 모양이었다. 시간은 8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철현은 뒤쪽 자리에 앉은 한규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자세를 틀었다. 버스는 유달리 한산했고 탑승객이래 봤자 할 일 없어 보이는 노인들과 젊은이들뿐이었다. 그는 지친 얼굴로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상태로 출구 쪽에 시선을 던졌다. 누군가가 내리려고 하고 있었다. 남자였다. 얼굴은 보이질 않았고 파편적인 모습만 알아볼 수 있었다.
철현은 입을 다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규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철현의 얼굴에는 공포와 반가움, 기쁨을 한데 뒤섞어 으깨놓은 듯한 표정이 어려 있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한규에게 나지막이 이야기했다.
"김 군…"
"무슨 일… 있으세요?"
"집에 가시오."
"예?"
정류장에 버스가 섰다. 철현의 시선이 붙박인 남자가 제일 먼저 내리고 몇 명의 노인들이 그 뒤를 이었다. 철현도 뒤를 이었다. 한규가 미처 말릴 새도 없이, 그는 부리나케 하차문 밖으로 뛰쳐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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